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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7화 (27/100)
  • 27화

    갑작스럽게 그의 위로 몸이 끌어 당겨진 수아는 나머지 한 손으로 욕조를 잡아 버티며 그의 얼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고정해 놓았던 샤워기가 그녀 아래에 깔려서 청바지가 젖고 있는데도 마주친 검은 눈에 온 정신이 빼앗겨서 움직일 수 없었다.

    화희가 속삭이는 것처럼 물었다.

    “정말 내 걱정 많이 했어요?”

    수아는 입술을 몇 번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인 거잖아요.”

    “걱정에는 죄책감만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마주친 새까만 눈동자는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수아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답을 읽으려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시선이 매우 불편했다. 뒤늦게 몸을 비키려 했으나 화희는 잡은 손목을 놓고 오히려 그녀의 뒷머리를 당기듯 감쌌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모르면, 내 마음대로 당신의 걱정을 해석해도 될까요?”

    “……어떻게 해석할 건데요?”

    설레듯 떨면서 묻는 말에 대답처럼 화희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듯 눌렀다.

    찰나에도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촉감도. 입술부터 짜릿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힘주어 그의 입술을 눌렀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남자의 단단하고 젖은 혀가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듯했으나 피할 틈을 주지 않는 축축하고 단단한 혀는 그녀의 입 안을 마음껏 헤집었다. 혀가 헤집는 입 안의 점막들이 성감대처럼 온갖 저릿저릿한 감각을 온몸에 퍼뜨렸다.

    이리저리 입 안의 살들을 건드리던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찾아 얽어매자 아랫배가 욱씬 조여왔다. 신음이 샐 것 같아서 수아는 욕조를 힘주어 잡아야만 했다.

    매끈한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환청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숨이 막혀 입을 더 벌리려 들면 남자가 뒷머리를 잡아 누르며 더욱 깊게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혀를 삼킬 것처럼 빨아들이다가도 애틋하게 애무하는 그의 혀는 그처럼 저돌적이면서 자극적이었다.

    입 안에서 뜨거운 아이스크림이 천상의 맛으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감은 눈앞에서 빛나는 나비들이 황홀한 빛을 뿌리며 춤을 추었다.

    한참 그가 주는 아슬아슬하고도 자극적인 감각에 빠져있던 수아는 어느 순간 턱 끝까지 숨이 차서 그의 혀를 가볍게 깨물었다.

    “음..”

    낮은 신음을 흘린 화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입술을 놓아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욕조 위에 거꾸로 엎드린 채 그의 위로 반쯤 눕다시피 몸을 기댄 채였다. 화희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에게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며 수아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제 입술을 혀로 길게 핥으며 중얼거렸다.

    “사실이잖아, 진짜 야하다니까요.”

    “뭐, 뭐라고요?”

    뒤늦게 제정신이 든 수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옷이 젖어 속옷은 물론이고 속살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허둥대는 바람에 욕조를 짚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욕조 안으로 자빠질 뻔했지만 화희가 어깨를 짚은 손을 지탱해 주어 참사는 면했다.

    이제 보니 그도 마찬가지로 젖어있었다. 잠시 가슴팍의 단단한 굴곡을 드러낸 티셔츠를 쳐다보던 수아는 제 옷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외쳤다.

    “이, 이제 혼자 씻어요. 안 나았다는 손으로 멀쩡히 잡아준 거 다 봤어요!”

    새빨개진 얼굴로 방으로 도망치듯 숨어버리면서 수아는 깨달았다.

    젖은 옷처럼 언젠가부터 그녀의 마음 역시 뜨거운 감정으로 인해 젖어 들고 있다는 걸.

    * * *

    그와 키, 키스를 했어! 그것도 완전 야하게!

    수아는 이불로 몸을 돌돌 감고 현실을 외면하려 애썼다. 이불 속에서 영원히 숨어 살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아무리 봐도 키스할 단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중간에 몇 단계를 확 건너뛴 기분이었다. 부끄러운 와중에도 창피한 건 그의 키스에 넋이 나갔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봤다면서 키스를 왜 그렇게 잘하는 걸까. 처음엔 그가 밀어붙였을지 몰라도 분명 다음 순간에는 내가 더 적극적으로 입술을 벌리…….

    똑똑.

    “엄마야!”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자 수아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민수아 씨? 왜 그래요?”

    문밖에서 민철이 놀라 물었다.

    그, 그 남자가 아니야. 수아는 얼른 심호흡을 하고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문을 조금 열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원이요?”

    “아, 깜짝이야.”

    되물으며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그녀를 보고 민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어디 아픕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에서 혼자 운동 좀 했어요.”

    이불킥 좀 열심히 날렸죠. 민망해진 수아는 머리를 묶는 척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벼므네 간다고뇨.”

    고무줄을 물고 말하는 바람에 발음이 뭉개졌으나 용케 알아들은 민철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별 이상은 없지만 이사님 상태를 체크하러 갑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런데 저는 왜요?”

    “이사님이 산책 겸 같이 가자고 물어보라고 하셔서요.”

    “산책이요?”

    “당분간 민수아 씨가 방에서 안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시던데요. 오전에 저 없는 사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은 무슨 일이요?!”

    언성까지 높이면서 강하게 부정하는 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아는 쇳소리까지 섞인 제 목소리에 헛기침을 하면서 머리를 다시 묶는 척 얼굴을 가렸다.

    “음, 말씀은 고맙지만 전 좀 쉰다고 전해 주시면 감사해요.”

    민철은 그녀의 빨개진 얼굴을 훑으며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던졌으나 순순히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몇 차례나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한 번만 더 물어보라시는데요.”

    “좀 쉬고 싶다고…….”

    “직접 말씀드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사님 성정 아시잖습니까. 앞으로 저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려야 할지 까마득하단 말입니다.”

    민철이 한숨을 쉬며 어깨너머로 대리석 계단을 눈짓했다.

    수아는 결국 외출 준비를 하고 일 층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막상 소파에 앉아있던 화희는 그녀에게 제대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한 어투로 묻는 게 다였다.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해도 됩니까?”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 버렸다.

    뭐지, 불러낼 땐 언제고.

    마지못해 나와서 그를 외면하려 했지만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왜 저런데요?

    왜 이럴 때 둘이 시선을 마주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뒤에 남은 민철과 수아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 모양으로 묻다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서울 외곽의 HH재단의 종합병원에 도착했을 때도, 검사를 받는 동안 둘러보라면서 근처의 풍경 좋은 커피숍을 알려줄 때도.

    화희는 내내 그녀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도무지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섹스보다 결혼을 주장하고. 그러면서 키스는 했고. 그런데 막상 나를 피하고.

    커피숍 테라스에서 멍하니 아래 보이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며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혼자가 되자 뒤늦게 찾아온 이성이 슬금슬금 양심을 툭툭 건드려 댔다. 지금 한가롭게 키스 따위를 걱정할 때냐면서.

    눈앞의 거리는 평화로워 보였다. 적어도 며칠 전의 대형 사고는 없던 일 같았다. 수백의 사상자가 났음에도 무관한 사람들은 잘만 살아간다. 심지어 그런 일을 겪은 그녀조차도.

    수아는 의식적으로 사고에 대한 뉴스는 피했다.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혼자 있게 되면 이유 없는 죄책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뿐, 생사에 비하면 소소한 걱정을 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어쩌면 수아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구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최악의 사고에서도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도, 괴로움도 죄책감도 큰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신은 피해자예요. 그러니 자책하는 건 당해도 싸다고 피해자를 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옳은 건 가해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겁니다.>

    화희가 순간순간 건네는 위로가 위안이 되고 보호벽이 되었다. 그런 남자에 대한 감정이 호감을 넘어서 부쩍 깊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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