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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6화 (26/100)
  • 26화

    “그 사람들은 누군데요?”

    “모릅니다. 그래서 문제죠. 처리할 수 없으니까.”

    그럼 매번 그렇게 가위에 눌린다는 건가? 하지만 가위라기엔 느낌이 사뭇 달랐는데.

    어쨌든 그런 저주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적잖게 힘들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진 수아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엔 괜찮으니 그런 표정 할 것 없어요.”

    신문을 내려둔 화희가 미소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제는 덕분에 살았습니다.”

    “내 덕분에요? 난 아무 짓, 아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했습니다. 민수아 씨는 희망찬 법성애자니까 존재 차제만으로도. 덕분에 가슴이 따뜻해지더군요.”

    “법성애자라니…….”

    “법선호자라고 했습니다. 아까부터 내 말을 곡해해서 듣는군요. 불신에 차서 날 보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

    “목이 마르니 차 좀 입에 대줘요. 아, 왼손은 보기엔 멀쩡해도 힘이 안 들어갑니다.”

    얼떨결에 찻잔을 들어 입에 대주던 수아는 곧 사실을 확신하고 얼굴을 붉혔다.

    날 껴안고 잔 걸 기억하는구나.

    찻물로 우아하게 입술을 적신 그가 과장된 어조로 덧붙였다.

    “어쨌든 나는 강 변에게 듣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민수아 씨가 날 위해 내 침. 대. 곁.에서 꼬박 밤을 세웠다니.”

    “…….”

    “왜 그렇게 봅니까? 한가하면 거기 수건으로 내 이마 좀 닦아 줘요. 민수아 씨가 내 아픈 손을 노려보니까 식은땀이 다 나네요.”

    수아는 왠지 억울해서 따지려다가 수건을 들어 뽀송뽀송 매끈하기만 한 그의 이마를 토닥거리는 척했다. 더 말해 봤자 자기만 손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딱 붙어있으니 제대로 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칭 환자는 이 와중에도 심장 떨리게 참 잘생겼다. 무언가, 굉장히,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제 숨결이 그에게 닿지 않도록 팔을 길게 뻗었다.

    그러나 화희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자꾸 이것저것 주문했다.

    “신문 좀 다시 펼쳐 줘요. 아, 거기 펜 좀 들어서 여기에 줄 좀 쳐줄래요?”

    “……오늘의 운세를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유쾌한 감정이 생겨나게 되니 무척 좋은 하루입니다. 말이 좋잖습니까?”

    수아는 피식거리면서 턱짓하는 화희를 흘겨보다가 이를 악물고 펜으로 줄을 그어주었다.

    놀리는 게 분명한데. 아, 참자, 나 때문에 아팠던 사람이야.

    화희가 턱짓으로 수건, 신문, 차를 번갈아 가면서 주문했다. 수아는 시선을 다른 데 둔 채 손수건으로 모양 좋은 그의 입가를 닦아주다가 멈칫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국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왜요?”

    “민수아 씨가 밥과 국을 번갈아 퍼주려면 번거로울 테니까.”

    그녀는 결국 들고 있던 펜을 그의 가슴팍에 내팽개쳤다.

    “아씨, 밥 정도는 알아서 드세요!”

    도저히 오글거려서 못 참겠다고!

    씩씩대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뒤로 화희가 큰 소리로 웃었다. 저번에 들었던, 장난치다가 폭소가 터진 소년처럼.

    “다 나은 거면서!”

    날 놀리는 게 재밌나? 알면서도 휘둘리는 나는 또 뭐냐고.

    보란 듯 방문을 쾅 닫으려던 수아는 잠시 멈칫했다.

    ……근데 저렇게 웃으면 되게 어려 보이던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난간 사이로 고개를 길게 빼서 슬쩍 그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려 했다. 그러다 제 행동을 깨닫고 기겁해서 얼른 방으로 도망치듯 뛰어들어 갔다.

    * * *

    “급한 일입니다.”

    수아는 제 방 앞에 버티고 서서 고집스럽게 눈을 빛내는 화희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데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머리 좀 감겨 주는데 이해씩이나 필요합니까?”

    “하아, 그냥 강 변호사님께 부탁하면 안 돼요?”

    “당연히 다른 일로 바쁘겠죠. 몸을 닦아 달란 것도 아니고 머리 조금 감겨 달라는데 남한테 미루다니. 너무 박한 것 아닙니까?”

    수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화희를 노려보았지만 눈앞에서 깃발처럼 흔들리는 하얀 붕대를 보니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 코웃음 친 화희는 그대로 그녀의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저기요! 왜 그쪽으로 가요?”

    “민수아 씨가 내 욕실에 다녀가면 앞으로 그곳에선 당신 생각만 날 테니까.”

    수아는 문이란 문은 죄다 활짝 열어놓고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화희를 내려다보았다.

    올 블랙의 브이넥 니트와 슬랙스를 세련되게 입고서 마른 욕조에 누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방비하게 욕조에 기대 누워 있는 그는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야하게 놀자고 유혹하는 애인처럼 퇴폐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옳지 않았다.

    눈을 감았던 화희가 망설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유혹하듯 빙긋 웃었다.

    유혹이라니, 내가 무슨 망상을!

    수아는 단순하게 눈앞의 작업에 집중하자며 성인물의 카오스에 빠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머리칼이 붙어있지 않은 부분은 무시하면 돼.

    ‘이건 수박이야, 수박.’

    샤워기를 틀어 욕조의 가장자리에 고정해놓은 그녀는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며 쓸데없이 심하게 잘생긴 수박, 아니 화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런데 자꾸 수박과 눈이 마주쳤다. 화희는 물이 튀는데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자 더욱 검어지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며 수아는 필요 이상으로 샴푸 거품을 많이 내서 문지르며 그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말없이 수박을 씻기는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불쑥 물었다.

    “대부분 여자분들은 남자가 어떤 식으로 구애하길 바랍니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자 수아는 자기 세뇌가 깨질까 샤워기를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대충 대답했다.

    “적극적이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

    “그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어떤 질감에 가깝습니까? 거리나 깊이 중에?”

    “그건 인기 많으신 분이 잘 알지 않나요? 강 변호사님이 이사님 팬덤도 있다고 자랑하던데.”

    “모릅니다. 수줍은 성격이라서 말 못 했지만, 제대로 된 연애는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조차 민수아 씨가 처음…….”

    “에?”

    수아가 놀라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샴푸가 사방으로 튀었다. 왼손으로 눈에 들어간 거품을 닦아 내며 화희가 투덜거렸다.

    “연애를 못 해 봤다는 게 이렇게 공격 받을 일입니까? 조금 수치스러워지려고 하는데.”

    “아니, 이 얼굴과 재력으로 왜요?”

    “흐음, 다행이네요. 내 외모와 재력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그럼 수아 씨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내 성격입니까?”

    “누, 누가 뭘 마음에 들어 해요?”

    “아닙니까? 가끔 내 얼굴을 야성적으로 쳐다보던데.”

    “아니거든요!”

    야성적이 뭔지 모르지만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는 걸 들킨 것 같았다. 낯뜨거워진 수아는 입을 다물고 샴푸를 다시 짜내 열심히 문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밀려드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그런데 정말이에요? 모태 솔로라는 거?”

    화희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수아 씨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저 작자가 뭘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해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더욱 좋고. 나는 수아 씨 말이라면 착하게 말 잘 들을 자신 되게 많습니다.”

    그의 귓불이 점점 붉어지는 걸 보면서 수아는 순간 넋이 빠졌다. 그는 진심이었다.

    모태 솔로라니. 남자의 조건도 조건이지만 너무나 섹…… 시옷시옷을 당당하게 발음하기에 경험이 많은 줄 알았다. 아니, 그건 연애와 별개의 문제인가?

    뜻밖의 충격에 빠져 남자의 머리통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샴푸를 끝냈다. 물에 흠뻑 젖어 올백이 된 그의 이마는 훤히 드러나자 오히려 미모가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이런 극강의 미모로 왜 그동안 연애를 못 해봤냐고.

    폭탄을 던져놓고 화희가 나른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한 번만 더 감겨 줘요. 민수아 씨, 그렇게 안 생겨서 손길이 나긋나긋한 게 기분이 좋네요.”

    “……손길이 나긋나긋하게 안 생긴 건 어떻게 생긴 건데요?”

    “솔직히 민수아 씨가 부드럽게 생긴 건 아니잖습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몰라서 묻습니까? 야하게 생겼잖아요.”

    “……응? 귀에 물이 들어갔나 봐요. 막 헛것이 들리네.”

    “민수아 씨, 내 눈엔 당신 굉장히 야하게 생겼어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새침하게 볼 때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는데 굉장히 야해요. 그리고 가끔 날것 그대로 먹고 싶다는 야성미가 드러날 때가 있는데 그건 내 수줍던 음심도 되바라질 정도로 섹…… 윽!”

    살다 살다 야하게 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은 수아는 손에 힘을 줘서 그의 머리칼을 당겼다.

    “이 작자가 뭘 몰라서 그런가보다, 하는 게 바로 지금인 것 같네요!”

    “사실을 말하는 건데도 안 됩니까?”

    “뭐가 사실이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동요한다는 사실.”

    화희가 제 머리칼을 잡은 그녀의 손목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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