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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5화 (25/100)

25화

어느새 그녀는 드넓은 벌판에 서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사방은 끝없이 푸른 초목이었다.

경악한 수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진정하려 노력했다. 전에 화희와 산에 올랐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기억으로 끌려온 것일까?

사람의 흔적도 없이 광활한 자연만 있는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찬비를 맞는 것처럼 춥고 꼼짝할 수 없이 답답했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때문에…….”

“……그년이 미워요.”

멀리서 울리는 것처럼 작게 들렸던 말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뒤섞인 사람들이 각자 어딘가에 감정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은 점점 원망과 시기,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악다구니로 변해 갔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주세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악다구니로 귀가 멀 것 같았다.

더 듣기 싫어. 여기에서 도망쳐야 해. 수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순간 발이 움직여진다 싶었을 때.

어느새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화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으나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듯 짓눌렀다.

눈을 감은 화희는 깊이 잠든 것 같았다. 그녀를 붙잡은 건 무의식인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괴로운 듯 심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그건 뭐지? 기억이라기엔 너무 기괴하고 끔찍하다. 벌판에 뿌리박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력함이 꼭 가위에 눌린 느낌이었다.

그래, 가위와 비슷했다. 혹시 그는 조금 전 일을 꿈으로 겪고 있는 걸까?

“……이사님.”

수아는 그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흔들지도 못하고 조용히 불러 보았다.

“……어?”

착각일까. 깨려는 기색은 없지만 순간 그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이사님. ……박화희 씨?”

착각이 아니었다. 깊게 팬 미간이 펴지고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혹시 내 목소리로 가위가 풀리는 건가?

수아는 얼른 그를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아프게 해서 진짜 미안해요. 내가 오래 살 수 있고 행복해지도록 도와준다고 약속해서 너무 고마워요. 나도 당신이 행복하도록 반드시 노력할게요.”

급해서 떠들긴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진심이 나와버려서 왠지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완전히 편안해지는 걸 보니 보람이 있었다.

수아는 그에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던 몸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넓은 가슴팍을 감쌌다. 화희의 안녕을 위해 잠시만 이렇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단단한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써야 했지만.

“근데요, 박화희 씨는 식은땀에 젖어도 향긋한 냄새가 나네요. 이것도 초능력인가요?”

“어깨가 되게 넓어요. 이것도 혹시 초능력?”

“잘생긴 것도 능력이면 당신은 우주 최강.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초능력자님.

“저기 있잖아요. 나 구해줄 때요, 그땐 너무 무서워서 아무 생각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되게 멋있어요. 살려준 것도 너무 고맙지만 멋지기까지 해서 더 고마운 거 있죠.”

그가 맨정신이라면 절대 못 했을 말을, 수아는 그를 위하는 거라고 자기합리화하며 계속 종알거렸다.

그런데 편안히 잠든 그를 보자 그녀의 마음까지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 * *

“민수아 씨, 아침 식사…… 헉!”

누군가 문을 열고서 그녀를 부르다 입을 틀어막았다. 얕은 잠에 빠졌던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민철과 눈이 마주치고 소스라쳤다.

그녀는 아직 화희의 품에 안긴 채였다. 어제 그대로 잠이 들어서 지금까지 잔 모양이었다.

경악할 새도 없이 수아는 급히 자신을 감싼 팔을 치우고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왔다. 당황하던 민철이 화희를 돌아보며 반갑게 외쳤다.

“어, 이사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막 잠에서 깬 것처럼 화희가 쉰 목소리로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꿈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보여서.”

수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화희의 시선을 피하다가 민철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부라린 그녀는 입만 벙긋거리며 협박했다.

방금 본 건 절대 잊어요.

입을 떡 벌리고 당황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민철이 화희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이사님, 민수아 씨가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회사도 못 가고 내내 곁에 계셨어요.”

“아니에요, 난 한 게 없어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인데요. 이게 다 나 때문인데…….”

수아는 민철의 과한 묘사에 낯뜨거워져서 화희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쑥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잠시라도 상황을 모면하려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자 불쑥 몸을 일으킨 화희가 수아에게 팔을 뻗었다.

놀란 민철이 만류했으나 화희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헤드에 기대앉았다.

“이사님, 아직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워.”

그에게 부담될까 차마 손을 빼지 못한 수아는 쭈뼛쭈뼛 그의 베개를 고쳐 주며 중얼거렸다.

“저, 많이 다쳤었어요. 강 변호사님 말대로 조금만 더 누워요.”

“나보다는 민수아 씨가 더 피곤해 보여요.”

“난 괜찮아요. 덕분에 아주 멀쩡해요. 그보다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런. 착각이 심하네요, 민수아 씨.”

“네?”

“내가 이 꼴이 된 건 당신 탓이 아닌데.”

수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자 오히려 그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올라와서 이리저리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오히려 민수아 씨는 피해자지.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인재(人災)가 노리는 매력적인 피해자.”

“하지만 나는…….”

“그래도 민수아 씨의 그런 눈빛, 나쁘지 않군요. 뭘 해달래도 다 들어줄 것처럼 쳐다보네.”

화희가 고집스럽게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수아는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얌전히 잡힌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내게 주려거든 근거 없는 자책 말고 근거 있는 동정은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민수아 씨는 착한 법성애자니까. 나처럼 아프고 동정적인 사람은 합법적으로 잘 보살펴 줄 거라 믿어요.”

“법…… 뭐라고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수아가 되묻자 화희는 딴청을 부리듯 뒤에 선 민철에게 눈짓했다.

“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철이 방에서 튀어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다른 손엔 물수건이 들려 있었다.

“으윽, 땀 좀 닦아 줄래요?”

짐짓 과장된 신음을 흘린 화희가 성가시다는 듯 제 앞머리를 후 불고 턱짓했다.

“보시다시피 몸뚱이가 이 모양이라. 멀쩡한 건 이 입밖에 없나 보군요.”

“…….”

“뭐해요? 어서 닦아 줘요. 내가 모양 빠지게 축축해지기 전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아서 기쁘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태도가 좀 달라진 거 같아.

수아는 그가 잡은 채 놔주지 않는 제 손과 다른 손의 물수건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설마 간밤의 일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간호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의 표정과 시선이었다.

환자의 눈빛이 쓸데없이 집요하고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 * *

다행히도 화희는 아주 매우 멀쩡해졌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른팔만은 다 낫지 않았다.

그걸 빌미로 수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의 곁에서 시중 아닌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보지 말죠?”

종이 신문에 눈길을 고정한 화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실 소파에 붙어 앉아서 신문을 넘겨주던 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붕대 감은 팔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보는데요?”

“불신 가득한 눈빛이요. 아주 거슬립니다.”

“음,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요. 어떻게 다리는 다 나았는데 팔이 안 나을 수가 있죠? 팔이 다리보다 훨씬 얇잖아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가 아무 짓도 못 할 만큼 손을 못 쓴다는 게 중요하지.”

“……지금 아무 짓이라고 했어요?”

“잘못 들었겠지. 난 ‘아무것도’라고 했습니다. 다 읽었어요, 다음 장.”

“왼손으로 넘길 수 있지 않나요?”

“오른손잡이라서.”

수아는 신문을 넘겨주고 계속해서 밀려드는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음, 지난밤에 가위눌렸을 때요. 혹시 기억하는…… 아니죠? 깊이 잠들었죠?”

“아, 가위.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맞아요, 가위에 눌린 건 기억합니다.”

그럼 제 입으로 우리가 껴안고 잔 것도 기억하냐고 차마 직접적으로 물을 수 없었던 수아는 말을 에둘렀다.

그녀를 힐끗 곁눈질한 화희가 나지막이 물었다.

“민수아 씨에게 본연의 나를 보이는 건 발가벗겨진 느낌이라고 한 말 기억합니까?”

“네, 그래서 정체를 묻지 말라고 했죠?”

“내게는 그 가위가 그래요.”

“……되게 무섭던데. 자주 그래요?”

“가끔. 특히 힘이 약해졌을 때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아는 드넓은 벌판에서 들리던 악에 받친 소리를 떠올렸다. 귀가 아플 정도로 컸던 건 둘째치고 남을 극도로 저주하는 말들은 그 일과 상관없는 그녀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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