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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4화 (24/100)
  • 24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걸 보는 건 싫어.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내 삶은 고통이야. 그래도 살아달라는 건 당신 욕심일 뿐이야. 하지만 나는. 나는 당신 때문에, 이 삶에-

    “수아씨…….”

    누군가 반쯤 의식이 돌아온 수아를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어지럽고 아파서 피하려고 했지만 의식은 결국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음-”

    억지로 눈을 뜨자마자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 누군가 몸을 굽혀 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강 변호사님?”

    “그래요, 맞습니다. 민수아 씨, 이름이 뭐죠?”

    “……그러는 강 변호사님은 직업이 뭔데요?”

    바보 같은 질문에 바보처럼 대꾸하자 민철이 인상을 썼다. 억지로 자신을 깨워 놓고 표정엔 싫은 내색이 가득했다.

    저 사람은 왜 날 저렇게 보는 거지? 난 왜 이렇게 정신이 없고?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폭발음이 순간 이명처럼 들려왔다.

    놀라서 벌떡 일어났던 그녀는 침대 위로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삐걱거리고 아픈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신음을 삼키며 억지로 몸을 일으킨 수아는 민철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박화희 씨는요? 어디 있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하긴 괜찮겠지요. 이사님을 쿠션 삼아 아주 푹신했을 테니까.”

    “쿠션 삼다니요?”

    “기억 안 납니까?”

    끔찍한 기억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순서를 맞춰 갔다.

    화희는 그녀의 몸 전체를 빈틈없이 꽉 붙들고 있었다. 그대로 버스가 고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랬다면?

    답을 듣기도 전에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의 반응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자세히 살피던 민철이 몇 번 헛기침하고서 덧붙였다.

    “이사님은 침실에서 주무십니다.”

    “침실이라고요? 제대로 말해 주세요. 이사님이 어떻다는 거예요? 괜찮으시냐고요!”

    그제야 겨우 자신이 병원이 아닌 화희의 저택, 제 방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아는 민철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빈정거린다는 것에 일단 안심이 됐다. 그래도 초조해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캐묻자 민철이 쓰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이제까지 봤잖습니까? 아무리 피를 흘려도 다음에 보면 상처 하나 없이 낫는걸.”

    “그래서 어디 있는데요? 지금 당장 봐야겠어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텐데요.”

    “나 때문에 다쳤어요? 제발 괜찮은지 확인하게 해 줘요.”

    민철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안내했다.

    박화희는 자신의 침실에 잠들어 있었다. 머리와 가슴에 감은 붕대도 그렇지만 안색이 매우 파리해서 위중해 보였다.

    불사일 것만 같던 남자가 의식을 잃고 죽은 듯 누워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나 미동도 없는지 수아는 이마의 감은 붕대 사이로 그의 미지근한 체온을 느끼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민철이 한탄하는 것처럼 말했다.

    “온몸의 뼈가 조각나고 척추와 경추가 아스러졌습니다.”

    “이, 이렇게 다쳤는데 병원에 안 가도 되나요?”

    “이렇게 다쳤는데 일주일 만에 싹 나을 거니까 병원엔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군요.”

    감탄인지 감격인지 말을 뱉고 나서야 자신이 울먹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뜨거운 울음이 치받친 수아는 결국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엄청난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나 때문에 이 사람이 다쳤다. 내가 뭐라고. 이 남자가 이런 일까지 겪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민수아 씨, 꼭 초상난 것처럼 이러지 맙시다. 며칠 뒤면 나보다 더 튼튼해지실 거니까.”

    울먹이는 그녀를 침실에서 데리고 나온 민철이 거실 소파에 앉히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린 걸 알면 이사님이 화내실 겁니다.”

    “일부러 보여준 거잖아요. 아까부터 쿠션 어쩌고 하면서 죄책감 느끼라고.”

    “그래서 그 죄책감, 많이 느끼십니까?”

    “그럼 결…… 하면…… 괜찮은가요?”

    “뭐라고요?”

    수아는 애써 울음을 삼켰다. 지금 울어 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비장하게 물었다.

    “결혼하면요. 이사님과 결혼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거냐고요.”

    처음부터 박화희는 결혼하자고 했다. 그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수아는 민철에서 물었지만 이미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래, 결혼하자. 일단 살아야 결혼도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건데. 이래서야 박화희에게 민폐만 될 뿐이야. 내가 뭐라고 결혼을 거절해? 그래, 결혼해. 결혼하면…….

    “절대 안 됩니다!”

    갑자기 민철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놀란 수아가 쳐다보자 눈을 부릅뜬 민철이 삿대질까지 하면서 반박했다.

    “결혼은 말이 쉽지 법적으로 매우 복잡하단 말입니다. 특히 이사님처럼 글로벌하게 활동하시는 분은 처리할 서류가 어마무시하게 많습니다. 사인만 하다가 늙어 죽을지도 몰라요. 뿐입니까? 이사님은 은근 유명인입니다. 민수아 씨 신상 털리는 건 생각 안 해요? 나중에 이사님과 갈라서더라도 후환이 남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게 낫습니다. 잘 생각하세요. 이렇게 감정적으로 정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네? 그, 그럼 어떡해요? 나, 나 때문에 이사님이 저 지경이 됐는데!”

    “그러니까 나는 민수아 씨가 좀만 더 따뜻하게 잘해 드리라는 뜻이었지요!”

    의외로 민철이 거세게 반대하자 수아는 당황했다. 둘이 한 편이 아니었나?

    민철이 씩씩거리며 긴말을 해 놓고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으로 박화희의 침실 쪽을 넘겨보았다. 길게 한숨을 쉰 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무엇보다 민수아 씨. 이사님과 평생 안 헤어질 자신 있습니까? 죽음을 걸고 하는 결혼은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헤어질 수 없다고 들었단 말입니다.”

    “헤어질 수 없다고요? 하지만 괜찮아지면 놓아준다고 했…….”

    “그렇게 쉬울 리가 있습니까? 잘 생각해 봐요. 결혼만 방법인 건 아니잖아요.”

    민철이 뭐라고 계속 설득했으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청보라 델피늄 꽃다발을 넘겨주며 화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괜찮아지면 대가만 받고 반드시 놓아주겠습니다.’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왜 그녀의 행복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더니 즉 그의 말은,

    내가 당신을 놓아줄게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라는 뜻이었다.

    결국 박화희와 이혼하려면 그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어야 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화희는 결혼이 단순한 계약인 것처럼 말했을까.

    수아는 망연자실하게 그가 잠든 침실 문을 쳐다보았다.

    첫날 밤, 부러진 뼈들이 제 자리를 찾아 어그러지는 모습은 처참하고 괴로웠다. 의식을 잃은 채였는데도 화희는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아무리 육체가 재생하는 과정이라 쳐도 상처를 헤집고 비트는 고문과 다름없어 보였다.

    매번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걸까? 전에 지하철에서 갑자기 피를 흘렸을 때도?

    하얗게 질린 그녀를 보고 민철이 교대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고통을 나눌 순 없겠지만 수아는 그의 곁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틀이 지나고 온몸의 뼈가 제대로 자리 잡자 화희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통은 여전한 것처럼 찌푸려진 얼굴은 그대로였다.

    수아는 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면서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많이 아파요? 내가 아파야 하는 건데, 정말 미안해…… 어?”

    순간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느리게 깜빡이는 긴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가 곧바로 수아에게로 향했다.

    “……신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간절함이 담긴 부름에 수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를 부른 거지? 아주 짧은 말이었는데도 가슴이 묵직하게 울릴 정도로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는가 싶던 화희가 무겁게 눈을 감았다. 수아는 다시 그가 의식을 잃을까 초조해져서 급히 일어났다.

    “강 변호사님 불러올…… 앗!”

    그러나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손목이 강하게 잡혔다. 돌아보려는 순간 시야가 휙 돌았다.

    그리고 주변이 바뀌었다. 천장이 파란색으로, 발아래가 녹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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