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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3화 (23/100)

23화

방금 뭘 본 거지? 안 그래도 장소가 납골당 앞인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영 꺼림칙했다.

수아는 마침 버스가 오는 걸 보고 뛰어 탔다. 외곽 고가 도로로 돌아가는 경로였지만 더는 혼자 있기 무서웠다.

환한 버스 안에는 열댓 명의 승객이 있었다. 대부분 하루 일과에 지친 표정으로 자거나 지루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광경에 안심이 됐다.

뭐지, 방금 그 여자는? 수아는 자리를 찾아 앉으며 그녀의 손이 닿았던 제 손을 연신 문질렀다.

더욱 소름 끼치는 건 순간 보였던 잔상이 얼마 전 꿈속에서의 제 모습과 겹친다는 것이었다. 붉은 혼례복과 가채, 슬픈 표정, 사극풍의 시대. 분명 제 꿈과 같았는데 잔상에서는 그 여자가 제 모습으로 존재했다.

“아, 맞다. 전화!”

버스를 타기 전 화희와 통화 중이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 애쓰던 수아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이 꺼져 있었는데 다행히 전원 버튼을 눌러보자 불이 들어왔다.

그동안 버스가 외곽으로 벗어나는 고가도로에 올랐다. 밖을 내다보며 화희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잘 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버스가 가는 방향만 막히고 반대편 차선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사고가 났나?

창밖을 내다보던 수아는 핸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확인했다.

화희였다.

-혹시 버스가 고가도로에 올랐습니까?

받자마자 바로 다그치듯 묻는 그의 목소리가 차갑고 낮았다.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네. 지금 막요. 왜 그래요?

-반대편 차선에 내가 보입니까? 흰색 차입니다.

“잠시만요!”

수아는 핸드폰을 든 채 창에 붙어 밖을 살펴보았다. 도로 바깥쪽이라 차가 잘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까지 가서 밖을 살폈다.

도로가 아래로 휘어지는 지점부터는 차들이 아예 멈춰 있었다. 흰 차, 반대편 차선. 고개를 빼서 자세히 보니 뚫려 있는 반대편 차선에서 흰 SUV 차가 빠른 속도로 고가 도로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어, 보여…… 엇!”

수아가 막 반색하며 차를 봤다고 하려는 순간, 흰 차는 갑자기 유턴하듯 방향을 바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반 바퀴 돌았다.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와 같은 방향을 노려보던 버스 기사가 경적을 마구 울려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어떤 미친놈이 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우는 거야!”

수아는 드리프트 하듯 두 차선에 걸쳐 차를 세우고 통화 중인 채 내리는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기요, 혹시 지금 차에서 내렸어요?”

-됐군요, 그럼.

“네? 여보세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 쪽을 힐끗 쳐다본 화희가 핸드폰을 휙 던져 버렸다. 수아는 문이 열린 채 도로 한가운데 버려진 흰 차와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장신의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였다.

“저, 저게 뭐야?!”

기사가 차 안이 울리도록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앞 유리창을 넘겨보던 수아는 놀라 얼어붙었다.

화희의 차 뒤쪽으로 거대한 탱크를 매단 유조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조차는 방향을 잃고 지그재그로 차선을 왔다 갔다 비틀거렸다. 급기야 몇 차선을 넘나들던 유조차는 바리케이드처럼 가로막고 서 있던 화희의 차를 거세게 들이박았다.

쾅! 쇳덩어리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는 소리가 포탄 떨어지는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불도저처럼 흰 차를 밀어낸 유조차가 중앙선을 넘어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이쪽으로 돌진했다.

쾅쾅쾅쾅. 유조차가 곧 바깥 차선에 늘어선 차들을 박기 시작했다. 차들이 박살나는 엄청난 굉음이 고막이 얼얼하도록 울려 퍼졌다.

뒤늦게 버스 근처의 차들이 유턴하여 유조차를 피하려 했지만 서로 뒤엉켜 충돌했다. 연이어 차들을 들이박은 유조차는 속도가 현저히 줄었지만 멈추지 않고 점점 가까워졌다.

“빨리 문 열어요!”

“도, 도망쳐요!”

누군가 겁에 질려 소리치자 황급히 문을 연 기사가 앞문이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승객들도 비명을 지르며 뒤이어 앞뒷문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렸다. 버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저리 비켜!”

수아는 뒷문으로 달려가다가 앞의 여중생이 누군가에게 세게 떠밀려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른 일어나.”

수아는 아이를 먼저 일으켜 세우고 뒷문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막 그녀가 내려가려는 순간.

유조차가 버스 바로 앞차를 들이박았다. 콰쾅, 밀려난 차가 버스를 들이쳤고 그 충격에 수아는 버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악!”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며 문 앞에 서 있던 승객이 비명과 함께 도로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기어가듯이 겨우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밖을 내다보려는데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남자. 숨을 몰아쉬면서 수아를 끌어안는 화희와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과 함께 안도감, 그리고 죄책감이 한꺼번에 어지럽게 밀려들었다. 울컥 뜨거운 눈물이 안에서 치받쳤다.

“여, 여긴 왜 왔어요?”

“민수아 씨가 있으니까.”

그녀를 이끌어 뒷자리에 앉힌 화희가 무심하게 답했다. 수아는 복받치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 지금이라도 피, 피해요.”

“밖에선 차에 치일 수도 있어요.”

“그, 그게 아니라 나 때문에…….”

화희가 그녀와 의자 틈 사이에 마주 보고 서서 의자의 손잡이를 잡아 감싸듯 껴안으며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당신 사는 것만 생각해요. 그게 날 살리는 거니까.”

그의 등 너머로 해일처럼 밀려드는 유조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빌딩만큼 높은 해일이 이쪽으로 내려 덮치는 것을 무력하게 보는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두려움이 이성을 사정없이 짓뭉갰다. 수아는 앞의 의자를 떨리는 손으로 꽉 부여잡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간절하게 빌었다.

쾅!

유조차가 버스를 들이받았다. 충격에 의자에서 공중으로 몸이 크게 들렸다 내려앉은 수아가 비명을 질렀다. 화희가 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한 손을 급히 제 입에 대고 물어뜯어 피를 내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가에 댔다.

입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오자 엉겁결에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그사이에 화희가 주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쾅. 끼기기기긱.

버스는 유조차에게 받친 채로 퉁퉁 바닥을 긁으면서 끝없이 떠밀려갔다. 그러다 시멘트로 된 난간과 유조차 사이에 끼여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며 V자로 휘었다.

흠칫한 수아가 고개를 들자, 화희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숙이게 했다.

“아무것도 보지 말고 나만 봐요.”

비릿한 피 맛과 고막을 진동하는 파열음, 쇠가 우그러지며 찢어지는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이 한데 지옥처럼 한데 뒤섞였다. 그녀의 몸을 감싼 단단한 양팔과 미지근한 체온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유조차와 난간 사이에 낀 버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결국 가운데가 짓이겨져 두 토막이 났다. 버스 앞 토막은 유조차에 밀려 난간을 뚫고 아래로 떨어졌다.

콰쾅. 유조차가 고가 아래에서 폭발했는지 엄청난 굉음과 열기가 버스 안 남은 유리창을 깨뜨리며 밀려들었고 사방에서 온갖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고가 도로가 아래위로 휘청했다.

순간적으로 고막이 나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삐-. 날카로운 소리와 뜨거운 열기만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덜컹덜컹 몸이 심하게 위로 들렸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통 안에 넣어져 마구 휘둘리는 것만 같았다. 끔찍한 부유감에 비명도 못 내고 숨만 참는 수아를 더욱 세게 감싸 안던 화희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흘깃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이마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더 깊게 숙이게 했다.

“당신 사는 것만 생각하라니까.”

시야가 뒤집혀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수아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버스 토막이 난간에 겨우 걸리듯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히 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아 허우적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화희가 그녀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달랬다.

검고 곧은 눈이 주위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녀만 보고 있었다.

“안 죽어요.”

“무, 무서워요…… 제발…….”

“아프지만 말아요. 낫게 해 줄 수는 있어도 대신 아파 줄 수는 없으니까.”

죽음이 바로 코앞이었다. 화희와 눈이 마주친 채 그의 말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기절한 채 죽을걸.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본능적이었다. 너무나도 무서워서 벌써 죽은 것 같았다.

차체가 덜컹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몸을 더욱 세게 빈틈없이 감싸 안는 화희의 체온이 그나마 순간 위로가 되었다.

발밑이 쑥 꺼져 몸이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는 아찔한 현기증이 온몸을 짓눌렀다. 끔찍한 부유감에 수아는 소원대로 몸에 충격이 오기 전에 의식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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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s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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