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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22화 (22/100)

22화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고 다가오는 화희의 차가운 표정에 흠칫 놀랐다. 꼭 차 사고를 낼 뻔한 음주 운전자를 보던 분위기와 비슷했다.

오해하기 쉬운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슬쩍 윤성을 가로막으며 서둘러 소개했다.

“비둘기 요양원에서 알게 된 자원봉사 학생이에요. 안 지 오래됐어요.”

“이런, 재미있는 걸 달고 있군요.”

윤성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보던 화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소개에도 전혀 누그러진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성이 수아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불쑥 끼어들었다.

“넌 뭔데? 뭔데 민수아 옆에서 얼쩡거려?”

험악한 말투에 수아는 당장 윤성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천윤성, 무슨 말이 그래?”

“그러니까 저놈은 누구…… 악!”

“말조심해. 얻다 대고 놈이래?”

반항기 청소년 같은 태도에 인내심이 동난 수아는 그의 귀를 꽉 잡았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나 매너 있지, 다른 이들, 특히 남자에게 가차 없는 걸 보았기에 조금 걱정됐다.

그녀는 펄쩍 뛰는 윤성을 무시하고 미간을 찌푸린 화희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애가 착한데 싸가지가 좀 없어요. 아, 반댄가? 하여튼 기다리게 해서 죄송한데 잠깐만 더 실례할게요. 천윤성,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눈살을 찌푸린 화희가 뭐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수아는 못 본 척하고 윤성의 귀를 잡은 채 얼른 걸음을 옮겼다.

“이거 놔! 쪽팔리게 진짜 이럴 거야?”

씩씩대는 윤성을 억지로 끌고 본관 게이트까지 내려온 수아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윤성이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버럭 소리쳤다.

“아씨, 같이 욕했는데 왜 나만 내쫓아? 못 들었어? 나더러 물건이랬어!”

“그야 저 사람이 여기 오너고 네가 먼저 욕했으니까.”

“오너가 대수야? 그래서 무슨 사인데?”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하는데?”

수아가 싸늘하게 잘라 말하자 윤성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나한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사실이잖아. 내 사생활은 너랑 상관없어.”

“야, 민수아!”

“천윤성, 너 이딴 식으로 굴 거면 다신 오지 마.”

뭐라 대꾸하려던 윤성이 움찔했다. 표정에 짜증이 섞였는데 그녀를 보는 눈빛은 상처 받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입안으로 작게 욕설을 짓씹던 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이건 갑질이야, 민수아. 감정적으로 을인 내게 부리는 횡포라고.”

수아는 더 잘라 말하려다가 그의 빨간 귀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든지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는데도 순순히 끌려온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녀라면 언제든 자신을 잘라낼 것을 알아서.

이런 푸대접까지 참을 정도로 나를 깊이 좋아하는 거면 어쩌지? 아니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만큼 안 좋은 사정이 있나?

순간 드는 염려에 수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윤성이 먼저 선수 쳤다.

“아, 됐어. 드럽고 치사해서 그냥 간다.”

“저기, 윤성아.”

“됐다니까. 승진 축하해. 오늘은 이 말만 하고 간 걸로 해 줘.”

말을 더 붙이기도 전에 윤성이 빠른 걸음으로 휙 가 버렸다. 꼭 도망치는 것처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말대로 오래 못 보게 된다면 서운할 것도 같고. 또 자신의 사정상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는데 뼈 아픈 제 말이 마지막이라면 슬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여지를 주는 게 나중을 위해 더 안 좋을 테니까.

침울하게 걸음을 돌리던 수아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화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안지 오래돼서 그런가, 윤성이와 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이는군요.”

“네?”

“아무래도 다정하게 윤성이를 부르니까. 이쪽은 방향 지시대명사거나 직함일 뿐인데 말이죠.”

“음, 친한 동생 같은 사이니까요.”

“윤성이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던데요.”

‘윤성이’만 몇 번째야? 황당해서 그를 올려다보던 수아는 미심쩍게 물었다.

“음, 설마 이름 부르는 걸로 날 탓하는 건 아니죠? 방금 이사님과 함께 가기 위해, 그리고 이사님께 무례한 이유로 내쫓은 참인데?”

“내가 본 장면은 다릅니다. 애틋하게 윤성이를 부르다가 안타깝게 윤성이 뒷모습만 쳐다보던데?”

“……진짜 이럴 거예요?”

“못할 것도 없겠죠. 윤성이와 달리 이쪽은 이사님씩이나 되니까?”

수아는 얼른 이 말도 안 되는 ‘질투적’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생각에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화.희.야, 여기서 이러면 매우 곤란해.”

“……하?”

화희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수아는 더 나아가 그를 흉내 내며 삐딱하게 고개를 쳐들고 따지듯 덧붙였다.

“그러니 그만 좀 하지, 화.희.야?”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점차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까지 젖히고 크게 웃어 젖혔다.

뭐, 뭐가 그렇게 웃겨?

수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대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떻게 이 남자는 웃기만 하면 분위기가 이렇게 확 바뀌지? ……근데 크게 웃으면 볼우물이 패는구나. 어쩐지 되게 어려 보이잖아.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던 수아는 소년 같은 그의 웃음에 제 기분도 확 바뀌는 걸 느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더 심하게 두근거려서 수아는 웃음을 멈추지 않는 그의 소매를 서둘러 잡아끌었다.

“아, 배고프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우리 화희는 무슨 반찬 좋아할까?”

못 이기는 척 따라오면서도 그는 차에 도착할 때까지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더 듣고 싶어서 수아는 저도 모르게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청량한 웃음이 살랑거리며 그녀를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 * *

향냄새는 언제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었다. 수아 모녀는 지난 20년 동안 같은 납골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 사진을 봐도 이제는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려 해도 기억은 빛이 바래고 여운 같은 깊은 감정만 남았다. 그마저도 평소엔 잊고 있다가 때가 되면 꺼내 보는 느낌이었다.

슬슬 새 아버지에게도 미안해지는데 이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제사는 그만두자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때때로 그녀 혼자 이곳에 와도 좋을 정도로 상처는 아물고 세월은 흘렀으니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새 숙소는 괜찮아? 일은 할 만하고? 좀 야윈 것 같은데 살 빠졌어?”

송 여사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막 제사상을 치우고 술잔을 정리하던 수아는 어색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엄마, 죄송한데요. 나 금방 가 봐야 돼. 야근해야 되는데 겨우 빠져나온 거라니까요.”

거짓말을, 특히 엄마한테 하는데 매우 익숙하지 않은 수아는 아까부터 대충 얼버무리느라 진땀이 다 났다.

딸에 관해선 도가 튼 엄마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질문이 점점 집요해졌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전처럼 또 신세 지기 싫어서 나한테 거짓말하고 고시원에서 사는 건 아니겠지?”

“에이, 무슨. 이번 숙소는 리조트급이야. 알잖아, HH재단 돈 많은 거. 완전 땡 잡았어. 내가 내일 사진 찍어서 보낼게요.”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심 양심에 찔린 수아는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얼른 말을 돌렸다.

“택시 불렀어? 빨리 가요, 새아버지 기다리시잖아.”

“얘가 왜 이렇게 재촉이야? 알았어, 얘.”

“집에 가서 전화할게, 엄마.”

수아는 송 여사를 태운 택시가 멀어지자 겨우 한숨 돌렸다. 이번엔 어찌저찌 넘겼지만 오래 못 갈 것 같았다.

외간 남자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단 말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않을까. 일찍 남편을 여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이제야 두 발 뻗고 잘 사는 엄마에게 딸 걱정을 보탤 생각하면 마음이 늘 무거웠다.

택시 정거장 옆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핸드폰이 울려서 내려다보니 박화희였다.

-제사는 잘 끝났습니까?

“네, 지금 버스 정류장에 있어요. 아, 버스가 왔네요.”

-그럼 잠시…….

“아!”

막 화희가 뭐라고 말을 잇는 순간이었다. 버스를 발견하고 뛰려던 그녀의 앞을 누군가 불쑥 가로막았다.

팔을 부딪쳐서 핸드폰을 떨어뜨린 수아가 당황해서 급히 주우려는 순간 부딪친 여자가 대신 주워주며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 들려고 고개를 들었던 수아는 순간 멍해졌다. 흰 원피스에 새빨간 립스틱이 도드라져 보이는 굉장한 미인이 그녀를 보고 생긋 웃었다.

얼마나 눈에 띄게 예쁜지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언제 봤지?

수아가 그녀를 살피는 사이 긴 머리를 가지런히 넘긴 여자가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예뻤거든요. 찬란한 보석처럼. 물론 지금은 빛이 바랠 대로 바랬겠지만.”

뭐라는 거지? 설마 도를 믿으십니까, 그쪽 류는 아니겠지? 지나가는 사람을 쳐 놓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그녀가 이상해 보였다.

그사이 타려던 버스는 가 버리고 말았다. 수아는 정류장을 넘겨보며 대충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핸드폰을 쥔 수아의 손을 붙잡으며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어머, 벌써 가면 곤란한데.”

그녀의 손은 매우 차갑고 말랑거렸다. 놀라서 뿌리치려고 했지만 촉감이 멀게만 느껴졌다.

순간 영화의 잔상처럼 어떤 장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검고 긴 머리칼의 가채, 붉은 혼례복을 입은 눈앞의 여자가 박제된 짐승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신당 제단 앞에 서 있었다.

“이, 이거 놔요!”

질겁한 수아가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 쳤다. 여자가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휙 지나쳐 갔다. 뺨을 스치는 여자의 검고 긴 생머리가 소름 끼쳤다.

수아는 멀어지는 여자를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잔상은 흔적도 없고 주변은 현실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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