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저 남자는 잠을 자기나 하는 건가?
수아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오다 멈칫했다. 화희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패드로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7시였다.
잠시 그의 완벽한 수트 차림과 자신의 트레이닝복을 번갈아 보았던 수아는 다시 위로 올라가려 했다.
“내가 비켜 줄까요?”
그러다 부쩍 가까워진 목소리에 흠칫 놀라 멈춰섰다. 돌아보니 팔짱을 낀 화희가 소파에 기대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멋쩍어진 그녀는 헛기침을 하면서 걸음을 돌려 내려왔다. 수아가 다가가자 한결 눈빛이 부드러워진 화희가 패드를 치우고 말을 건넸다.
“일찍 일어났군요. 어제에 이어 나와 조깅하려는 거면 환영인데.”
“설마요, 연약한 내 몸을 그딴 걸로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출근하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본가에서 조찬이 있습니다. 어서 피하지 않으면 들이닥칠 거라서요.”
“본가에 있는데 피한다고요?”
“조부가 내게 미쳐서 성가시거든요.”
미쳐? 수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의 조부라면 HH그룹 회장님 아닌가?
“그러니까 본가 조찬에 참석하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이리로 쫓아오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사님한테 미치…… 손자를 너무 좋아하셔서?”
“좋아하면 팔아먹으려고 하진 않겠죠.”
“손자를 어디다 팔아요?”
“그런 작자들이야 뻔하죠.”
눈을 동그랗게 뜬 수아에게 화희가 피식 웃으며 비아냥조로 대꾸했다. 더 이해하기를 포기한 그녀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일찍 출근해야겠어요. 안녕히 대피하시고 저녁에 봬요.”
“홀로 안녕히 대피하기엔 내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요?”
거절할 새도 없이 화희가 패드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끝내버렸다. 수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HH그룹 회장님을 혹시라도 맞닥뜨릴까 꺼려졌다. 손자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외간 남자 집에 얹혀사는 자신이 결코 곱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 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다.
수아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선 화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열라는 듯 문을 향해 턱짓했다.
누가 보기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이른 시간이라 지나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저, 일해야 되는데요. 일이 밀려서…….”
“일은 업무 시간에만 합시다. 고용주의 간곡한 명령이죠.”
혹시나 해서 말해 보았지만, 화희는 코웃음 치며 코웃음 친 화희는 직접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수아는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 급히 안을 둘러보았다.
그제 늦게 퇴근하느라 제대로 치우고 갔는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깨끗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서 커피 좀 만들어 올게요.”
“내가 하죠.”
가방을 놓고 막 나가려던 수아는 딱 자른 답에 멈칫 돌아보았다. 분명 짧은 말인데 ‘매우 싫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처음 타 준 커피가 그렇게 맛없었어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화희는 오히려 인상을 쓰면서 투덜거렸다.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는데 차마 못 마셨다면 짐작이 됩니까?”
“아, 좋은 인상을 주고 싶으셨는데 그렇게 다짜고짜 ‘죽을래 결혼할래’ 협박하셨구나.”
“나름 긴장했던 겁니다. 양해해주죠? 민수아 씨와의 첫 만남에 수줍었던 나를.”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방을 나가자 수아는 재빨리 책상을 물티슈로 훔친 후 보조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이리저리 각도를 쟀다. 잠시 후 그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오자 아무것도 안 한 척 앉아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와, 황송해요. 이사님이 손수 타준 커피를 받다니. 어, 이게 이런 맛이 나는 거였네요?”
내심 맛없기를 기대했는데 커피는 굉장히 맛있었다. 수아가 실망에 찬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홀짝거리자 픽 웃은 화희가 갑자기 그녀의 잔을 빼앗아 들었다.
“커피란 원래 이런 맛이라는 걸 알면 됐고.”
“앗, 피 넣으려고요? 안 아파요?”
윽, 어떻게 손가락을 물어서 피를 낼 수 있지. 수아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화희가 잔을 돌려주며 옅게 웃었다.
“왜 이런지 궁금합니까? 그럼 마셔요.”
고개를 끄덕인 수아가 커피를 한 모금 마기가 무섭게 화희가 그녀의 눈 위로 손바닥을 스쳤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이 가까워지자 움찔했던 그녀는 순간 작게 탄성을 흘렸다.
붉은 핏방울들이 작은 조각처럼 흩어져서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더 잘게 쪼개지면서 각자 어떤 모양을 그렸다.
상형 문자나 도형처럼 된 작은 조각들이 공중에 나풀거리다가 살아 있는 촉수처럼 그녀 쪽으로 줄지어 뻗어왔다.
숨을 죽인 채 보다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피하려던 수아에게 조각들이 닿자마자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마치 붉은 반딧불 같은 게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화희가 피를 낸 손을 들자 그와 그녀에게 이어진 피의 조각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과 내가 이어진 겁니다. 내 힘을 담아 결계를 치는 거죠.”
“이건 꼭…….”
‘인연의 붉은 실’처럼 보이는데.
수아는 자신을 감싼 붉은 조각들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마치 그녀에게 반응하는 것처럼 조각들이 잘게 몸을 떨었다.
신기해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화희가 마뜩잖은 듯 덧붙였다.
“얼마 못 갑니다. 강한 계약이 아니라면.”
“피에만 이런 힘이 있어요?”
“힘은 ‘나’에게 담긴 것이죠. 그러니까 내 본질에 가까운 것일수록 효과가 좋은 거고. 가장 강한 건 역시 섹스 같은 행위로 나의 태초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정수를-.”
“아, 알겠으니까 그만 해요! 아침부터 굉장히 느끼, 아니, 느낌 있게 말씀하시네요.”
수아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느끼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말을 얼른 끊었다. 눈을 가늘게 뜬 화희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왜 이런 포인트에서만 반응이 확실하지? 혹시 즐기는 건 아닙니까?”
“이봐요,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럴걸요?”
“누구든 당신 빼고 내 알 바 아니라서요.”
날 놀리는 게 분명해. 근데 왜 두근거리는 거야, 새삼.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웃는 입가를 가리는 화희를 보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붉은 빛무리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이것이 그의 힘이라는 걸 들어서 그런가, 어쩐지 빛무리가 화희와 매우 닮은 것 같았다.
그녀를 지켜주고 옭아매는 것도. 무엇보다 신비하고 우아한 모양이면서 어딘가 발색이 요염하다.
수아는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자신을 감싼 붉은 조각들을 만지작거렸다.
* * *
한가로웠던 오전이 거짓말처럼 매우 바쁜 하루였다.
공식적으로는 오픈 전인 요양원은 준비할 게 많았다. 아직 미정된 팀원들 이력서를 두고 인사부와 회의를 하고 오후엔 비둘기 요양원 어르신들의 입실 예산을 새로 작성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창 일에 빠져있던 수아는 핸드폰에 수신된 문자를 흘깃 확인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도착했습니다.]
퇴근길에 데리러 와준다고 했던 화희의 문자였다. 시계를 보니 정각 여섯 시였다.
시간 맞춰 여기까지 오려면 일찍 출발했어야 했을 그를 생각하니 갑자기 퇴근이 조급해졌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수아는 문을 열다 깜짝 놀랐다. 택배 기사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거대한 난초 화분을 두고 서 있었다.
“민수아 팀장님 맞으시죠?”
“네, 맞긴 한데요. 이걸 누가 보낸 거죠?”
얼떨떨하게 묻는 수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승진 축하해 달라면서?”
윤성이었다.
그녀가 윤성을 보는 사이, 택배 기사들은 문 안쪽에 난초를 내려놓고 가 버렸다. 수아는 문 앞에 버티고 선 윤성과 난초를 번갈아 보다가 일단 사무실을 나왔다.
“내가 언제 축하해 달랬어? 그리고 화분은 개업 선물이야.”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지.”
“설마 이거 주려고 온 거야?”
“겸사겸사. 같이 저녁도 먹고.”
“오늘은 안 돼. 미리 전화라도 했어야지.”
“그래서 퇴근 시간에 맞춰 왔잖아. 나 오래 못 볼지도 몰라. 꼰대가 나더러 부산에 반년이나 가 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윤성이 인상까지 쓰고 심각하게 우기자 수아는 걸음을 옮기면서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화희에게서 문자가 온 지 벌써 15분이 지났다.
“진짜 미안한데 윤성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 돼. 다음에 보자.”
“안 돼, 약속 취소하고 나랑 저녁 먹어. 우리 오래 못 볼지도 모른다니까?”
수아는 건물 밖까지 쫓아 나와서 고집부리는 윤성을 곤란하게 쳐다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일단 튀자.
윤성은 대부분 그녀의 말을 잘 따르지만 가끔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서 끈질겼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싸우고 가출했다면서 요양원에 입실시켜 달라던 일. 그땐 그녀가 거절하니 원장을 구워삶아서 3주나 입실했다.
또 오토바이를 사서 전국 일주를 하겠다던 일. 알고 보니 그때도 가출이었고 수아는 협상안으로 위험한 오토바이 대신 일주일 입실을 허용했다.
그리고 자기 생일이라면서 선물 대신 그녀에게 제 소설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무슨 소설인지는 몰라도,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모은 찰진 욕으로 겨우 거절했다. 무려 2주나 시달린 끝에.
수아는 그와의 찐득찐득한 껌 같은 추억을 떠올리고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미안, 정말 오늘은 안 돼. 이따 전화할게.”
“민수아, 진짜 날 오래 못…… 저놈은 누구야?”
고집스럽게 그녀의 앞을 막아서려던 윤성이 갑자기 욕설을 뱉으면서 손가락질했다. 무례한 그를 나무라려던 수아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윤성의 손가락질 끝엔 슈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오는 화희가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