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눈을 뜨자마자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화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왜 넋을 놨지?
당황하고 창피해서 뒤로 물러서려 했는데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덩어리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눈? 아직 11월 말인데? 그보다 눈이 올 날씨가 아니었…….
“……어?”
이상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에 금세 주위가 새하얗게 변했다. 듬성듬성 나뭇잎을 매달았던 나무들은 어느새 앙상한 가지에 하얀 솜 같은 눈을 잔뜩 얹고 있었다.
“작년 겨울에 폭설이 내렸군요.”
“이, 이거 뭐예요? 눈도 내릴 수 있어요?”
때아닌 설경에 수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화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 산의 기억을 읽는 겁니다.”
하아, 입김을 뱉어 보았으나 보이는 것과 달리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가 답하는 사이 풍경이 다시 변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파노라마 같았다. 눈이 녹고 나무가 다시 앙상해졌다. 이어서 작고 오돌토돌한 새싹들이 가지마다 피어났다. 곧 노란 산수유, 매화, 분홍 진달래, 개나리가 산을 온통 색색으로 물들였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계절이 바뀌었다. 벚꽃이 온 산을 하얗게 뒤덮었다가 함박눈처럼 바람에 날려 쏟아져 내렸다.
화희가 넋이 나간 그녀를 보고 웃었을 땐 울창한 녹색 숲을 지나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물들어갈 때쯤이었다.
“이 정도 시간을 두면?”
“……뭐, 뭐가요?”
“우린 방금 한 해를 같이 보냈는데, 전보다 친밀해졌을까요?”
화희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느새 그림 같았던 풍경은 사라지고 그녀는 11월 말의 현실 속에 서 있었다. 방금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되새길 여유도 없었다.
이런 능력을 보이면서 두려워 말라니.
하지만 그가 보여준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어떻게 했는지 이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박화희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됐다.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애쓴 것만. 계절의 변화 중 예쁜 장면만 공들여 골라 보여준 그의 성의가 느껴질 만큼만.
수아는 입술을 깨물다가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손 좀 빌려주실래요? 다리가 후들거려서 또 자빠질 것 같아요.”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수아가 먼저 그의 손을 빼앗듯 잡았다.
“고, 고마워요.”
그의 손은 크고 단단하면서 부드러웠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수아는 빨개진 볼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내려가는 길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서워할까 봐 화희가 더 이상 변태 같은 농담을 하지 않은 것이 제일 다행이었다.
11월, 어쩌면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쓸쓸한 계절임에도 어쩐지 조금 더운 것만 같았다. 산이 기억하는 잔상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 * *
“다른 것엔 그토록 둔감하면서 왜 유독 내 살기에만 그렇게 민감한지.”
혼잣말을 하는 것이 극히 드문 남자가 오래된 신문을 던져놓고 중얼거렸다.
“예? 사, 살기요?”
민철은 흠칫 놀라 더듬거리면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가뜩이나 이 방에 있을 때의 박화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무서운데 직접적으로 화를 드러내자 오금이 다 저렸다.
수아의 방이 있는 쪽을 흘깃 올려다보던 화희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성마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아, 역시 민수아 일이구나.
그는 안도하는 한편 촉각을 곤두세웠다. 박화희는 염세적이고 무심한 편이지만 민수아와 얽히면 감정적으로 변한다.
혼인 신고서를 보고서 하얗게 질렸던 민수아가 떠올랐다. 그대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화희를 순순히 잘 따르고 있다.
좀 특이한 여자였다. 겁 많고 소심한데도 의외로 싫은 건 싫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천성이 순하고 어딘가 맹하면서도 하는 일은 똑 부러졌다. 모순된 부분이 많았다. 바꿔 말하면 어디로 튈지 몰라 다루기 까다롭단 뜻도 됐다. 자칫 잘못 튀기라도 하면 그 불똥은 온통 민철의 몫이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 같던 화희가 곧 다시 신문을 집어 들고 물었다.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지?”
“정확히 이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앙 지부에서 윤성민을 체포해서 카마 부산지부를 압수 수색했습니다만, 카마에서는 윤성민은 물론 부산까지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답니다.”
“역시 윤성민은 사파이가 아니었군.”
“부산 지부장이 사파이가 아니라면 수뇌부는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일까요? 이대로 몸을 사리고 자취를 감춰 버린다면 큰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을 거다. 카마는 상당히 거만하고 욕심이 많아. 기습 공격으로 자존심을 건드려놨으니 조만간 어떻게든 리액션을 취할 거야.”
“헌데 36년 전 일이 고의적일까요? 그렇게 큰 조직이 평범한 여자 하나 때문에 움직였다기엔, 그저 우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어. 설사 우연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일까. 산 사람의 장기를 떼다 파는 쓰레기들이다. 더러운 것들을 이 기회에 없애버리는 게 세상에도 이로워.”
그런 것치고는 사감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본래 세상사에는 관심도 없는 분이잖습니까.
민철은 속으로 말을 삼키다 화희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고 흠칫했다. 그가 마뜩잖다는 듯 툭 내뱉었다.
“널 대신할 개는 많으니 자꾸 토 달 거면 때려치워.”
역시 알고 계셨나.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민철은 새 세상을 만난 것만 같았다. 박화희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육체적 강인함은 물론이고 금융, 의료, IT 등 온갖 분야를 통틀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갖가지 이유로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섰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거금을 들고 러브 콜을 하는 인사들을 거부하고 몇 년째, 이 집에 들어앉아 칩거했다.
박화희가 변한 건, 삼 년 전 그녀를 ‘발견’하고 나서부터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험한 일들을 그만두고 엄청난 공을 들여 넓은 부지에 집을 세우고 들어앉아, 때마다 ‘죽음’을 겪었다.
사람 자체에게 일말의 동정이나 관심, 양심에 가책 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한 여자에게 모든 능력과 감각을 역으로 발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민수아가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어째서 아까운 능력을 그깟 여자에게만 쏟는 건가.
그가 요즘 감히 갖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주인을 뼛속 깊이 사모하는 노예근성에 가까운 충성심은 어쩔 수 없다.
민철은 새삼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박화희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수려한 얼굴은 귀기가 흘러 섬뜩하기조차 했지만 경이로웠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사죄했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다만 요즘 얼굴색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이 지나쳤습니다.”
그의 눈에만 보일, 허공의 무언가를 응시하던 박화희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나가.”
민철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방을 나왔다.
겨우 숨통이 트였다. 아무래도 저 방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민수아가 저 방을 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죽음을 총망라한…….
“어, 변호사님도 계셨네요? 볶음밥 할까 하는데 같이 드실래요?”
갑자기 주방 쪽에서 민수아가 걸어 나오는 바람에 그녀의 생각을 하고 있던 민철은 기겁했다. 그를 보고 반색하는 그녀의 손에는 식칼까지 들려 있었다.
“네? 아니, 나는…….”
우물거리는 민철의 뒷목에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흠칫해서 돌아보니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화희가 눈으로 살기를 쏘아 댔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따여서 뒷산에 묻힐 것 같았다.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친 화희가 수아의 손에서 칼을 받아들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이 실장님 요리를 데우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어머, 나도 요리는 곧잘 해요.”
“그럼 써는 건 내가 하죠.”
“할 줄 알아요? 전혀 못 하게 생겼는데.”
“칼로 하는 건 뭐든 잘합니다.”
“진짜요? 무서워 말라면서 그런 말을 하면 무섭잖아요.”
“서툴게 칼을 쥔 당신을 보는 게 더 무섭습니다만.”
둘은 민철을 두고서 주방으로 가버렸다. 평소 말도 없던 화희가 끊임없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그는 기분이 묘해졌다.
분위기가 이렇게 급변해도 되는 거야?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집은 생과 사가 공존하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방금 전쟁의 집대성 같은 방에서 화희는 살기를 방향제처럼 뿌려대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순간 만에 집이 평화로운 꽃밭처럼 변해버렸다.
뭔가 크게 진 기분이었다. 이십 년 넘게 모셔온 자신도 못한 일을 저 여자는 한순간에 해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민철은 망연자실 우두커니 거실 한 가운데 서 있다가 화희의 눈짓에 그만 쫓겨나듯 집을 나오고 말았다.
11월 말, 아직 늦가을인데 그의 마음엔 벌써 겨울의 중순이라도 된 듯 뼈 시린 한파가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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