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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9화 (19/100)
  • 19화

    간만의 휴일임에도 평소 기상 시간에 눈이 떠졌다.

    왠지 손해 보는 기분에 더 잘까 했지만, 수아는 아직 낯선 방을 둘러보고 일어나 앉았다.

    지난 일주일은 너무 바빠서 매일 야근이었다. 쳇바퀴 돌듯 회사에서 온종일 보내고 집에선 잠만 자다 보니 아직도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설었다.

    “아, 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네.”

    수아는 해야 할 목록을 들춰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평일 틈틈이 신분증과 통장, 카드 같은 것들을 재발급받았지만 소소하게 남은 일들이 아직 많았다. 하지만 관공서가 쉬어서 오늘 같은 일요일에 할 수 있는 건 쇼핑밖에 없었다.

    쇼핑이라.

    방에 있는 명품들은 부담스러워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방에 있는 물건들은 민수아 씨가 안 쓰면 버릴 겁니다.>

    <네? 아깝게 왜요?>

    <그러니까요. 아깝지 않게 잘 써주면 좋을 텐데요?>

    그것을 눈치채고 전투적인 눈빛을 보이는 화희에게 완전히 졌다. 더불어 꽃무늬와 레이스가 제 취향과는 아주 거리가 멀단 걸 말할 기회도 같이 날아갔다. 그냥 주어진 걸 감사히 받는 수밖에.

    ‘집이 되게 조용하네. 집주인님은 아직 안 일어났나?’

    수아는 1층으로 내려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복도 가장 안쪽 마지막 끝 방까지 발길이 닿았다. 두껍고 오래된 나무문은 다른 방과 달리 내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용도도 짐작할 수 없었다.

    뭐지, 이 방만?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키는데 문이 열리며 안에서 검은 인영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민수아 씨.”

    남자와 마주친 수아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에게 이유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려던 건 본능에 가까웠다.

    급히 물러서는 그녀를 본 화희가 그 자리에서 멈칫 멈춰섰다. 순간적으로 희게 질린 수아를 본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 왜 이렇게 놀랬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 기겁했던 게 스스로 너무 멋쩍어졌다. 수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얼른 말을 건넸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안 계신 줄 알고 놀랐어요, 미안해요.”

    한숨을 길게 쉰 화희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놀란 게 아니라 날 무서워 한 것 같은데요.”

    “내가 왜 무서워해요?”

    대답 대신 화희가 불쑥 팔을 쭉 뻗는 바람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멈칫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친 그가 도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내가 무서울 때마다 그렇게 싫은 표정 말고 차라리 때리는 건 어때요. 따귀를 날리든지 발로 차든지.”

    “농담이죠? 무서우면 도망쳐야지, 왜 때려요?”

    “그러니까요. 난 민수아 씨가 도망치는 것보단 때리는 게 훨씬 낫습니다. 민수아 씨라면 웃으면서 잘 맞을 자신도 있고.”

    “더 이상한데요. 맞는데 왜 웃어요? 그리고 난 이사님 안 무서워한다니까요.”

    “그럼 날 위해서라고 칩시다. 기껏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원점이 되면 상처 받으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아직도 가끔 그에게 이유 모를 섬뜩함과 두려움을 느끼곤 했으니까.

    화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비틀고 그녀를 살피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반박할 수 없게 되자 수아는 얼른 말을 돌렸다. 이제 보니 평소와 달리 그는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어디 나가시려던 길인가 봐요.”

    “조깅하려던 길입니다.”

    “아, 그렇구나. 잘 다녀오세요.”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치려던 화희가 멈칫 뒤돌아 물었다.

    “같이 갈래요?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일은 없지만 매우 바쁜데요.”

    “잘됐군요, 나도 바쁘니까. 빨리 다녀오도록 합시다.”

    “왜 하필이면 조깅이에요? 운동은 진짜 싫단 말이에요.”

    “내가 무서워서 같이 가기 싫은 건 아니고?”

    코웃음 치며 웃은 화희가 눈길을 거두지 않자 수아는 압박에 못 이겨 알았다고 해 버렸다.

    이씨, 운동은 질색인데. 투덜거리면서 그를 지나치는데 순간 화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뜻밖의 환한 미소였다.

    왜, 왜 저렇게 웃어? 같이 조깅하는 게 뭐? 뭐가 대단해서?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그를 흘깃거리던 수아는 하마터면 계단 턱에 걸려 자빠질뻔했다.

    아씨,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무릎을 턴 그녀는 다음 순간 뛰듯이 방으로 올라가 기록적인 시간 만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니, 그래도 이게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수아는 어느새 트레이닝 바지에 패딩 점퍼를 걸쳐 입고 찬 바람을 맞으며 화희를 따라 산길을 뛰고 있었다. 저택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던 산은 낮아 보였는데 의외로 길이 좁고 가팔랐다.

    화희와 조금이라도 더 말을 해 보고자 따라나선 것이건만 말은커녕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정말 형편없이 못 뛰는군요.”

    10분도 되지 않아서 헐떡거리며 뒤처지기 시작하는 그녀를 두고 한참 앞서가던 화희가 다시 돌아와 감탄조로 말했다.

    오기가 인 수아는 잠시 속력을 내보았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옆에서 그녀와 보조를 맞춰 천천히 뛰어 주던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죠. 무리하면 안 하는 것만 못 하니까.”

    “먼저 다녀오세요. 전 알아서 돌아갈게요.”

    “그럼 같이 돌아가죠.”

    “방해되기 싫은데요.”

    왠지 지는 기분에 수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으나 그녀 앞에 버티고 선 그가 빈정거리듯 웃었다.

    “내 삶에 민수아 씨가 방해가 될 일은 절대 없습니다. 차라리 방해해 달라고 빌고 싶을 지경인데.”

    “저기요, 제발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말 좀 그만 해요.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부끄러워할 기운도 없단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 부끄러울까요. 민수아 씨가 결혼 말고 섹스하자고 했을 때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받아들이지 못한 게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불능이 된 느낌이랄까요. 그것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는데. 잘 봐요, 이렇게나 힘이 넘쳐서 오래도록 빨리 뛸 수 있는 나를. 내가 수줍어서 그렇지…….”

    “진짜 이럴 거예요? 제발 그 시옷시옷 단어 좀 그만 닥치…… 아니, 다그치라니까요!”

    악, 이 남자가 오늘 날 잡았나. 수아는 오싹해지는 단어에 발끈하여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와중에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시 놀란 것처럼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녀를 들여다보던 화희가 고개를 까딱하며 바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한데요? 제발 결혼하자고 할 때까지 시옷시옷 단어를 끝도 없이 나불거리려는 계획이요?”

    “아무래도 날 무서워하는 민수아 씨보단 어이없어하는 민수아 씨가 더 대하기 쉬운 점이랄까요.”

    “혹시 아까 무서워할 바엔 차라리 때려달라는 것과 결이 같은 거예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는 화희를 보니 수아는 기가 막혀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버티고 섰다.

    “그래도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면 큰일나요! 세속에선 그런 걸 변태라고 하거든요.”

    “하,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극으로 치닫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두고 서로 알아가면 되잖아요.”

    “시간이라.”

    화희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노려보았다. 순간이지만 정말 그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무서워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하긴 전에 화재 때도 그의 손을 뿌리쳤을 때 뒤늦게 엄청 화를 냈었다.

    한숨을 길게 쉬며 표정을 바꾸려는 것처럼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린 그가 저택을 향해 턱짓했다.

    “그렇게 계속 야하게 헐떡댈 거면 그만 돌아갑시다. 수줍던 내 음심이 용감해지기 전에.”

    “누가 뭘 해요? 자, 잠깐…… 앗!”

    제 할 말만 하고 휙 가 버리는 화희를 쫓아가던 수아는 순간 발을 헛디뎠다.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으나 다음 순간 단단한 품에 푹 안겨있었다.

    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수아는 부쩍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순간 넋이 빠졌다. 날렵하게 솟은 콧날과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의 조화가 기가 막혔다.

    “고마워요. 괜찮은데, 이제…….”

    더 홀리기 전에 떨어지려고 했는데 그의 품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화희가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등을 꼼짝할 수 없이 안고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그녀를 처음 본 것처럼 이마부터 뺨, 입술까지 천천히 살폈다. 마치 눈빛으로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 간질거리면서 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필이면 잊고 있던 그 꿈이 생각나려 했다. 남자의 집요한 시선 앞에서 그를 유혹하던 여자의 어색한 몸짓과 그런 그녀를 거절하지 못하던 남자의 음험한 손길.

    안 돼. 그만 떠올려!

    그와 맞닿은 부분이 심하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팔, 맞닿은 가슴, 코끝에 스미는 남자의 체취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심장이 달리기에 혹사당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뛰었다.

    힘을 줘서 움직이려고 했으나 손가락 하나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숨이 모자란 것처럼 가쁜 숨을 내쉬었는데 순간 화희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가까워지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 떠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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