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걱정돼서 찾아갔건만 잡상인 취급당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저 여자는 왜 나를 애 취급하는 건데?
시뻘게진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면서 윤성은 연신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젠장. 입 밖으로는 뜻도 없는 욕설을 뱉으면서도 미련이 남은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연신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 제일 기분 나빴다.
발끝으로 바닥을 차면서 걷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민수아가 두리번거리며 건물에서 나오는 걸 발견했다.
설마 내가 잘 가나 지켜보러 나왔나?
그럼 그렇지. 순간적으로 드는 기대에 가슴이 뛰는 걸 느끼고 어이가 없어졌다.
윤성은 먼발치에서 새삼 민수아를 다시 살펴보았다. 내가 왜 저 여자 때문에 감정이 오락가락할까.
아담한 키에 마른 듯한 몸매, 작은 얼굴에 동그란 눈. 제법 예쁘장한 외모긴 하지만 저보다 훨씬 예쁜 여자는 주변에 많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소위 잘난 여자들과도 확연히 달라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왠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게 무심해서 그럴까? 아니면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서?
장학금까지 받고 명문대를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업해 잘 살다가 갑자기 망해가는 요양원에 취직한 것부터 수상쩍긴 하다. 궁금하다. 숨기는 부분이 뭔지 더 알고 싶다.
그래, 이번 기회에 물어보면 되지. 그녀를 지켜볼수록 초조해진 윤성은 그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그런데 민수아는 그가 온 정문 쪽이 아닌 정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장신의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가만히 수아를 보고 있을 뿐인데도 위압적인 분위기가 남달랐다. 아버지 회사를 가끔 방문했을 때 수많은 업계의 사람들을 봤지만 저런 분위기의 남자는 없었다.
다른 곳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는 수아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대체 저놈은 뭐야?
남자를 노려보며 인상을 쓰던 윤성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에 흠칫 놀랐다.
“……당신이 싫습니다! ……증오합니다! 날 원한다면 차라리 내 시신을 능욕하세요!”
내용은 자세히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위험에 처해서 외치는 소리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윤성은 막 남자가 수아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 수상한 놈이었어. 민수아가 놈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게 분명했다.
저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남자를 막으려고 막 뛰어가려던 순간, 수아가 놈을 향해 웃었다. 마치 기쁘다는 것처럼.
멈칫한 윤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웃으면서 그와 나란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땅을 박차려던 발에서 허무하게 힘이 빠졌다. 대신 가슴 한구석에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잘못 들은 거였어?
인상을 찌푸린 윤성이 재차 수아와 남자를 번갈아 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왔다.
“도련님! 왜 안 오고 서 계십니까?”
“아씨,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닭살 돋잖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러면 회장님께 제가 꾸지람을 듣습니다.”
윤성은 회장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움찔해서 기사가 눈짓한 차를 돌아보았다.
“먼저 가시라니까 왜 기다리고 있대요?”
“중간 일정이 취소되어서 잠시 시간이 비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점심 드시자고 하십니다.”
젠장. 윤성은 치미는 욕설을 참으며 차로 걸어갔다. 꼼짝없이 붙잡히게 생겼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옆에 올라탔는데도 서류를 읽고 있던 부신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너를 그리 애태우던 사람이 저 아가씨니?”
“별일 아닙니다. 사고가 났다니까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에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생전 안 하던 부탁까지 했는데 별일 아니라니. 아무래도 마음이 깊은 모양이지?”
으음, 낮은 소리를 흘린 부신이 뜻밖에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심지어 아들이 마음에 둔 여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처럼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거듭 묻기까지 했다.
“너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 연상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윤성은 아버지가 왠지 민수아를 보는 것이 싫어서 짜증을 내버렸다. 그러나 급히 후회했다. 제 얼굴에 닿는 차가운 시선에 순간 온몸이 떨려서 티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버지가 겉으로는 인자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건 자신에게 대드는 인간이었다.
윤성은 급히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소한 일로 신경을 쓰시게 해 드린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됐다. 한창때 여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빌어먹을, 민수아. 아버지와는 평소 이런 말을 섞을 정도로 가깝지 않았는데 그녀 때문에 부탁까지 했다. 그런데 찬밥 신세라니.
윤성은 이래저래 화가 치밀어서 입을 꾹 다물고 제 무릎만 노려보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중얼거린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네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구나.”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언제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다고.
순간 차 안에 뭔가 썩는 것 같은 역한 냄새가 풍겼다. 윤성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얼른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이드 미러에 비친 민수아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을.
“신께서 내게 오욕을 갚아줄 기회를 주셨구나.”
부신의 손등에서 검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더불어 역한 냄새가 더욱 진해졌지만 차 안 누구도 감히 티를 내지 못했다.
3. 마음과 마음 사이
박화희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의외로 쉽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딜 가나 그 남자와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그는 고용주이자 집주인이며 심지어 청혼자이기까지 하니까.
대단한 건 실물뿐 아니라 말과 소문으로도 그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러 직원 휴게실에 들어왔더니 다른 부서 직원들의 수다가 한참이었다.
“아침에 박 이사님 봤니? 기럭지가 어찌나 훌륭하신지 주차장 밖에서도 다 보이더라.”
“그러니까. 어제 어떤 손님이 연예인 아니냐고 묻더라고.”
“노인네들밖에 없는 곳에서 뭔 재미로 일하나 했더니 이런 눈 호강이 있었어. 나는 강 변호사님도 좋더라. 약간 너드 같지만 시크하잖아?”
수아는 내린 커피를 들고 테이블로 걸어가다가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수다 내용의 주인공과 미묘한 관계만 아니면 저기에 껴서 실컷 떠들었을 텐데.
오늘 아침이라면……. 역시 따로 오길 잘했다. 그 박 이사님과 나란히 같은 차로 출근하는 걸 저들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일까.
수아가 요양원의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내려 달라고 말하자 화희의 태도가 바로 삐딱해지긴 했지만.
<전 먼저 내려서 걸어갈게요.>
<같이 내려요. 나도 오늘은 회의가 있으니까.>
<음, 그래도 따로 가는 게 좋겠어요. 강 변호사님, 죄송한데 여기서 세워 주시겠어요?>
운전하던 민철이 화희의 눈치를 보았다.
차를 세우라고 눈짓했으면서도 막상 수아가 내리려고 하자 팔짱을 낀 화희가 투덜거렸다.
<혹시 나와 다니는 게 창피합니까?>
<그게 아니라 고용주시잖아요. 아직 직원들과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벌써 낙하산으로 찍히고 싶지 않아요.>
<그건 앞으로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란 뜻입니까?>
<그렇다기보다 우리의 관계를 공적으로 보이는 게 좋겠다는 거죠.>
<공적으로? 아, 그러니까 역시 사적으로는 창피하단 뜻이군요.>
<음, 오늘따라 이사님 말투가 삐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그건 민수아 씨가 삐뚤어졌으니까 그렇겠죠. 상관도 없는 남들 눈을 신경 쓰는 게 바르게 느껴지진 않는데?>
목소리는 부드러운데 말속에 가시가 있다. 차에서 막 내리려던 수아는 흠칫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요.>
<결혼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몸만 얽힌 사적인 사이보단 법적으로 얽힌 공.적.인 사이가 훨씬 낫잖습니까.>
민철이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했다. 수아는 틈만 나면 결혼을 세뇌시키는 그에게 질색하며 얼른 차에서 내려버렸다.
그의 말대로 선택지가 없긴 하다. 어쩌면 시 문제일까.
잠깐 얼굴을 내비친 것만으로도 여직원들의 아이돌이 되는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입장이라니. 그게 알려지면 확실히 공적이 되겠지. 여자들의 공공의 적.
어릴 적부터 학교와 아르바이트 때문에 늘 바빠서 인간관계는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잘 어울리는 친구 무리나 동료 무리는 있었는데 그마저도 몇 년 전부터 뚝 끊기고 말았다.
외로움을 느끼는 체질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 또래들을 보면 혼자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어디에 있든 미움받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게 최대 목표긴 한데, 여긴 시작부터 곤란한 일이 참 많다.
왠지 어마무시한 남자를 날로 먹는 기분이 드네요, 이사님. 수아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울리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흠칫했다.
호랑이 화희였다. 그녀는 얼른 커피잔을 정리하고 탕비실을 나와 인적이 없는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몇 시쯤 퇴근합니까.
“일곱 시 넘어서 갈 것 같은데요. 다섯 시에 회의가 있어서요.”
-차를 보낼까요?
“괜찮아요, 알아서 갈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일찍 끝나면 결혼이나 할까 했습니다.
“아, 진짜. 저기, 혹시 재미있어서 더 그러는 건 아니죠?”
-누가 청혼을 재미로 합니까? 그것도 거절당할 게 뻔한 청혼을. 난 민수아 씨 목소리 들으려고 합니다.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아주 신선해요. 감히 내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고용주님. 제가 업무 시간에 감히 이런 어이없는 대화로 월급 까먹고 있는데 괜찮아요?”
-아, 내일은 자택 직원분들 전부 쉬시는 날입니다. 내가 수작 부린 게 아니니 놀라지 말라고 미리 전화했어요.
“네? 그런 생각은 안 하지만…….”
-다행이군요. 그럼 이만.
전화가 일방적으로 뚝 끊겼다. 늘 느끼지만 화희의 어법은 특이했다. 가만 보면 되게 배려 넘치게 매우 자기 멋대로였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그런가, 갑의 태도가 몸에 밴 듯했다.
‘가만, 그럼 내일 집에 그 남자와 단둘만 있다는 거네?’
그걸 굳이 전화로 놀라지 말라고 알려주는 건 뭐냐고. 지나치게 친절해서 오히려 더 의식이 되잖아. ……그런데 수작이라니. 뭐로 보나 수작을 부리려면 내가 부리는 게 맞는데. 재벌가 출신 상사도 매우 귀한데 거기다가 내 목숨을 구명해 주는 초능력자님께.
수아는 복도 창 너머로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정원의 꽃들을 보다가 혼자 어이없어서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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