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제처럼 무거운 감정을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가벼운 감정이나마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토라진 소년처럼 보여서 대하기 편했다. 그래서일까, 수아는 줄곧 생각했던 말을 토로했다.
“내 말은 한꺼번에 하지 말고 천천히 하잔 뜻이에요. 내가 나 살자고 덥석 결혼해서 이사님 인생까지 말아먹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다른 생이 있다 해도 우리 둘 다 이번 생은 단 한 번뿐인데.”
“하, 결혼을 거절하는 말도 가지가지군요.”
“그게 아니라 겨우 그쪽 덕분에 목숨 부지하고 있는 나는 ‘이번 생을 덤으로 산다’는 말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이에요. 인생이 걸린 결혼도 덤으로 할 수 없고요. 결혼이 무덤이라는 말은 딱 이럴 때 어울리죠? 없을 무, 덤 덤.”
미간을 찌푸린 화희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찌나 강렬하게 쳐다보는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지막에 농담은 괜히 했나? 부탁하는 처지에 너무 딱 잘라 말한 것 같아서 덧붙인 건데.
이내 표정을 가리듯 이마를 짚은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민수아 씨는 알면 알수록 이상합니다.”
“네에? 아무리 봐도 처음 본 여자한테 결혼하자는 게 더 이상해요!”
“좋단 뜻입니다. 민수아 씨가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해서.”
내가 이상해서 좋대. 별 것 아닌 말인데도 순간 심장이 덜컹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 그래요? 어쨌든 당장 결혼하자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네요.”
수아는 동요된 마음을 숨기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따라서 웃는 것처럼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쌍꺼풀 없는 아몬드형의 긴 눈까지 초승달처럼 접으면서.
그가 웃자 이제까지와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평소 표정이 별로 없어서인지 금욕적인 분위기였는데 환한 미소가 수려한 외모를 확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뭐지, 왜 이렇게 잘생긴 거지?
그를 홀린 것처럼 본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수아는 머쓱함을 숨기려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 얼른 준비하고 나갈게요.”
도망치듯 방의 욕실을 들어온 수아는 가슴을 짚으며 괜스레 투덜거렸다.
어떻게 봐도 박화희는 평범한 남자는 아니었다. 낯부끄러운 말들을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그러다 거울을 보고 창피함에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맙소사,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나로 묶었던 긴 머리는 삐죽삐죽 튀어나와 산발이었고 한쪽 볼엔 이불 자국이 밭고랑처럼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잠옷으로 입었던 트레이닝 복은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대칭으로 둘둘 접혀 있었다.
아, 이 꼴로 대체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수아는 뒤늦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얼굴을 붉혔다.
* * *
수아는 출근 후 정신없이 바빴다. 관계자 외 다른 직원들과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었다.
낙하산이나 다름없이 고속 승진한 줄 알았는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비둘기 요양원의 자료를 각 담당 부서로 인계하고 현 요양원의 복지 후원 대상 자격 검토와 예산 책정이 그녀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그래도 낙하산의 특권인가, 개인 사무실도 있었다.
수아는 기획팀이 넘겨준 자료를 정리하다가 뻐근한 눈을 비비며 눈길을 돌렸다. 문득 화희가 준 꽃을 꽂아 놓은 화병이 눈에 밟혔다.
아침마다 하얗게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가득 피어난 꽃들은 마치 마법 같았다.
도대체 그 남자는 정체가 뭐지? 혹시 현대판 마녀인가? 차가운 도시 남자 마법사? 아니면 ‘도사란 무엇인가, 땅을 접어 달리고 바람을 일으키는…….’ 전우치? 아니, 박씨니까 박우치?
“아, 박우치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파우치도 아니고.”
혼자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젓던 수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문이 벌컥 열리며 바람이 세게 몰아쳤기 때문이다.
바깥의 찬 바람을 몰고 들이닥친 장신의 남자는 곧바로 수아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줄 알았잖아!”
놀란 그녀는 남자의 품을 뿌리치고 나오려 했지만 억세서 쉽지 않았다. 힘껏 뿌리치고 나서야 상대가 윤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수아가 화를 내며 물었는데도 윤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잡으려 팔을 뻗었다. 수아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피하자 그는 큰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화를 내려던 수아는 아침 엄마의 반응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성의 태도와 말에서 걱정이 느껴졌지만 얼떨떨했다. 아직 비둘기 요양원의 소재는 비공식이었다. 병원에 입원했던 당시 당사자인 그녀조차 쉽게 알지 못했는데 윤성이 이곳까지 왔을 정도면 적잖게 알아봤단 뜻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정도의 사이였던가.
“보다시피 멀쩡해.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어?”
“갑자기 사라진 주제에 나한테 고작 할 말이 그게 다야? 나는 민 과장님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진짜 놀랐는데?”
“왜 오버야. 사고 때문에 이틀 입원한 게 다인데. 걱정했다면 미안한데 그래도 이렇게 화내도 될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윤성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태어나서 그런 더러운 감정은 처음 느껴 봤어!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다고!”
윤성이 어깨를 숙여 그녀에게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를 피하려고 한 걸음 물러서던 그녀조차 동요될 정도였다.
진짜 날 좋아하나? 만약 그렇다 해도 받아 줄 순 없었지만, 수아는 일단 달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윤성아. 걱정했다면 미안해.”
한참 씩씩대던 윤성이 제 어깨를 스치듯 닿은 수아의 손을 보며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어졌어.”
“……응?”
“복수할 거라고, 민 과장님한테. 반드시 날 걱정하게 만들어서 차버릴 거야.”
“야, 그게 무슨 애 같은 소리야.”
“애 취급 실컷 하더니 이제 와서 당신이야말로 무슨 소리야?”
“당신? 다앙시인?!”
달래려던 수아는 멈칫 눈을 치켜뜨고 인정사정없이 윤성의 머리통을 콱 쥐어박았다. 제 손이 얼얼할 정도였지만 내친김에 한 대 더 때렸다.
“아, 아프잖아!”
“야, 내 손이 더 아파!”
머리를 감싼 윤성이 소리치자 수아는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남자 두개골과 여자 손뼈 중 어떤 게 더 연약한가!”
“그러니까 왜 애새끼 대하듯 꿀밤을 때려? 차라리 따귀를 치라니까!”
“애초에 애처럼 굴지 마. 걱정했다고 하면 될 걸 왜 땡깡을 부려?”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궁금하니까 그랬지! 애초에 전화번호만 알려줬어도 됐잖아.”
“아무리 그래도…….”
제 감정에 못 이겨 가쁘게 들썩이는 윤성의 가슴팍을 보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워졌다. 수아는 더 다그치려다가 그만두고 목소리를 낮춰 달랬다.
“너, 자꾸 소리 지를래? 그래서 복수 안 당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는데.”
“……빚 갚아. 내가 당…… 민 과장님 찾아 헤맨 시간에 대해.”
“그건 어떻게 갚는 건데?”
“딱 내가 걱정한 시간만큼 나한테 쓰면 되겠네.”
“걱정 안 했다며?”
“하, 하여튼. 전화번호 내놔.”
“너, 바보지? 나 여기 있는 거 알아볼 시간에 전화번호 알아내서 직접 물어볼 생각은 왜 안 했어?”
“요양원이 홀랑 다 타 버린 걸 보고 놀라서 아무 생각 못 했다, 왜! 겨우 병원 알아내서 갔는데 극비라면서 아무것도 안 알려 주잖아! 민 과장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부신 건설 회장 아들인 나보다 더?”
‘부신’이라면 꽤 유명한 건설 회사였다. 얘가 그렇게 대단한 집 자재였어? 수아가 놀라 한걸음 물러서자 입술을 또 삐죽인 윤성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하여튼 전화번호 줘. 내가 누구한테 전화번호 물어본 적이 있는 줄 알아?”
아, 또 사연 어린 눈망울. 난 왜 얘는 매정하게 못 뿌리칠까.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정상 사람에게 정을 두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인지하는데 이상하게도 윤성에게는 딱 자르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감정이 깊어지도록 자주 만나는 일만 없으면 되겠지, 변명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알았어, 폰 줘봐. 내 번호 저장하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단서를 달았는데도 윤성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그녀에게 닿자, 멋쩍어진 수아는 빠르게 번호를 저장하곤 말을 돌렸다.
“아참, 나 승진했다? 이제 이분께서는 민 팀장이란다. 어, 뭘 확인까지 해?”
제 폰을 빼앗듯 받아든 윤성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눈을 번뜩였다. 수아는 울리는 제 핸드폰을 무시하고 시계를 확인하는 척했다.
“어, 회의 시간 다 됐네. 나 가봐야겠다. 미안, 다음에 얘기하자.”
억지로 그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자 윤성이 흰자가 보이도록 잔뜩 흘기고는 쾅 문을 닫고 가버렸다. 방 전체가 울리는 소리에 수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핸드폰이 다시 울려서 윤성인 줄 알고 이마를 찌푸렸지만 아니었다.
[박화희 이사님]
번호를 저장한 적이 없는데. 강 변호사가 핸드폰을 주면서 저장을 한 것 같았다.
불쑥 찾아오기만 하더니 전화도 할 줄 알았구나. 이름만 보고도 가슴이 콩닥거려서 헛기침을 한 수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화희입니다.
몇 시간 전에 들은 목소리인데도 폰을 통해 듣는 나지막한 저음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잠시 일이 있어서 들렸습니다.
“여기 오셨다고요? 무슨 일인데요?”
-민수아 씨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일이요.
“저는 바쁜 것 빼고는 무사한데요, 이사님은 안 바쁘세요?”
-바쁘니까 잠시 들렸죠. 안 바쁘면 벌써 거기 입실했을 겁니다.
“음, 지금 어디신데요?”
-차에서 내려서 막 그쪽으로 가려 했습니다만. 바쁘다니 됐습니다. 이따가 집에서…….
“아,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나도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아, 고용주님한테 너무 대놓고 땡땡이친다고 고한 건가요?”
-그 고용주도 지금 땡땡이치는 중입니다. 그럼 반갑게 동지를 기다리죠.
수아는 전화를 끊고서 헛소리를 한 느낌이 민망해서 통화 목록을 망연하게 들여다보았다.
여기까지 와놓고 그냥 가겠다는 건 무슨 심보야. 그렇다고 난 또 왜 굳이 기다리라고 한 거고.
혼자 쑥스러워하던 수아는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다시 앉아서 거울을 보며 립글로스를 바른 후에야 사무실을 나섰다.
* * *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