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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6화 (16/100)

16화

“그래, 지 신부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게 생겼어. 아니지, 시늉이 뭐야. 진짜 죽고도 남을걸? 게다가 한 번 반하면 얼마나 졸졸 쫓아다니는지. 요즘 말로는 스토커람서?”

뒤쪽에서 이를 부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아는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는데 성큼 다가온 화희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오래전 대감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수아는 얼른 아무 말도 안 들은 척 딴청을 피우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기로 서 할아버지는 어떤 집안의 정원수를 오래 했다고 들었다. 설마 화희에게 고용됐었던 걸까.

“대감이요?”

“응, 아주 오래전 내 별명이야. 그때 저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서 누굴 찾아달라고 날 어찌나 들볶던지-.”

“시끄럽군. 본인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갑자기 화희가 서 할아버지의 말을 막는 것처럼 그를 제치고 그녀 앞을 막아섰다.

“민수아 씨, 그보다 시간 있습니까?”

“왜요?”

“시간 있으면 결혼이나 합시다.”

“아, 진짜.”

수아는 당황해서 서 할아버지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새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었다.

수아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따지듯 물었다.

“이사님, 보기보다 훨씬 부자신 것 같은데요. 만약에 내가 결혼해서 그쪽 재산을 전부 탕진해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랬다가는 죽음에서 벗어난다 해도 강 변호사의 저주를 받을 텐데요. 그 사람 보기보다 더 깐깐하고 끈질기고 뒤끝마저 깁니다.”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해요. 날 살리고 대가로 받겠다는 그 하루가 대체 뭐에요? 심지어 내가 기억할 수도 없다면서요.”

“기억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정확히는 전생의 기억이니까.”

“지, 지금 전생이라고 했어요?”

“정확히는 아홉 번째 전의 생입니다.”

수아는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듣긴 들었는데 정확히 뜻이 와닿지 않았다.

차라리 고용 계약서에 관해 물을 걸 그랬어. 이건 너무 어마어마하잖아.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에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이하게도 어딘가 아귀가 맞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본 사이인데도 화희는 그녀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수아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기억을 찾는 게 쉬운 일인가요?”

“전혀. 모래밭에서 특정한 모래 한 알을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내가 그 전생이라는 걸 끝까지 기억하지 못한다면요?”

“당신이 10번째로 태어나면 그때 다시 묻죠.”

“그럼 이전까지는 전부 실패했다는 거네요. 그런데도 날 무조건 도와준다고요?”

“물론. 내겐 민수아 씨만 답이거든요.”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한 가지는 깨달았다. 차라리 이 허황된 전생 이야기가 ‘민수아’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있다는 걸.

그는 이제껏 민수아 자체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데요?”

“민수아 씨가 스스로 기억하기 전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기억이란 일방적이고 왜곡되기 쉬우니까.”

“그런 게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음, 나는 그쪽이 원하는 사람은 될 수 없어요.”

“압니다, 기억을 찾는다 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건. 나 역시도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그럼 이사님은 뭘 얻는데요? 이미 다 가진 것 같은데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까지 해요?”

“다 가졌다……. 글쎄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 생은 하나만을 위해 덤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화희가 자조적으로 말하며 쓰게 웃었다.

그의 표정에 이제까지 보지 못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지만 슬픔, 분노, 안타까움, 미련,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가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듯 심장 언저리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때는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나와의 일은 살기 위한 계약일뿐이라고. 당신이 괜찮아지면 대가만 받고 반드시 놓아주겠습니다.”

“놓아준다니, 지금 내가 그쪽에게 잡혀있다는 거예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던 화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흰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델피늄 화단이었다.

“저 꽃을 민수아 씨가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꽃말이 색마다 다르다는 걸 압니까? 흰색은 ‘왜 나를 싫어합니까?’, 청보라색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라더군요.”

화희가 꽃을 한 다발씩 꺾었다. 그리곤 그 중 청보라색 꽃송이만 골라서 그녀에게 내밀며 고백하듯 말했다.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 행복에 왜 그의 목숨까지 필요할까. 난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알아서 행복해질 수 있는데.

지나치게 무거운 말에 당황한 수아는 얼떨결에 꽃을 받아들고 말문이 막혔다.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상징적인 의미 같아서.

화희는 흰색의 꽃을 들고 그녀는 청보라색 꽃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때 지난, 혹은 두 계절이나 빠르게 핀 꽃들의 빛깔은 유난히 진해서 더 애틋해 보였다.

* * *

‘나는 당신을 여전히 연모합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잊지 못합니다.’

못됐어. 왜 당신은 늘 당신 마음대로만 나를 사랑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슬펐다.

무슨 꿈인지 모르고 잠결에 괴로워하던 수아는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하고서야 겨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여, 여보세…… 아, 엄마?”

수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 여사의 화난 음성이 핸드폰 너머로 귀청을 가격했다.

요양원 방화범의 범죄가 기사화된 것을 이제야 보고 놀라서 전화하신 모양이었다.

“어, 당연히 난 괜찮지. 별일 있었으면 바로 엄마한테 전화했…. 네, 죄송해요.”

열심히 대꾸하는 동안 핸드폰 너머로 데시벨이 조금 낮아지자 수아는 얼른 엄마에게 좋은 소식부터 전했다.

“전화위복이라고 HH 재단 알지? 거기로 회사가 옮겨져서 좀 바빴어. 나 승진했다? 응, 우리 성금 보내는 거기. 아냐 아냐, 와 보실 필요까진 없어. 지금 한창 인수 중이라 바쁘거든요.”

이것저것 자랑하는 척하면서 전화를 끊고 나니 현재 자신의 처지가 급격히 실감이 났다.

엄마한테 새 직장 내의 숙소에서 살게 됐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여간 찔리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남의 집에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수아는 한숨을 내쉬며 지나치게 고급진 제 방을 둘러보았다.

어제 이야기 끝에 예약한 레스토랑을 취소하자고 말을 하자마자 화희가 싸늘하게 잘라 말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이 집에 다시 들어오고 말았다.

<그럼 선택할 때까지 내 집에 있어요. 나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안전하니까.>

아, 지금이라도 직원 숙소에서 산다고 해 볼까.

수아는 탐색하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다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다.

검은 롱코트를 걸친 화희가 그녀 방 난간 앞에 기대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났네요?”

방금까지 투덜거렸던 것을 들킬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아가 인사하자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던 그가 뒤늦게 고개를 까딱여 대답했다.

“언제 출근할 건지 물으려고 노크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

“아, 이제 막 준비하고 나가려고 했어요.”

“그럼 준비되면 아래층에서 봅시다.”

“그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 있으면 알려 주세요. 혼자 가는 게 편해요.”

“일단 역이든 정류장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고 나도 근처에 볼일이 있습니다.”

“음, 아닌 것 같은데요.”

수아가 미심쩍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화희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내가 민수아 씨 뒤를 졸졸 쫓아다니려고 없는 핑계도 만드는 걸로 보입니까?”

“쫓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그쪽이 이쪽을 통제하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인 걸까요.”

“통제라…….”

눈빛이 대번에 삐딱해진 화희가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그쪽과 붙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통제하려고 했다면 벌써 그쪽은 이쪽과 결혼해서 이쪽 재산을 몽땅 탕진하려고 애쓰고 있겠죠. 그쪽이 이쪽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할 게 아니라.”

화희가 어제 그녀가 따지듯 한 말까지 푸짐하게 얹어서 반격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남자의 말버릇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은 무한 반복한다. ‘결혼 안 할 겁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쪽’과 ‘통제’까지.

“알았어요. 되게 높으신 이사님이 태워 주시는 차에 감사히 올라타서 무사히 출근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쪽’ 소리가 더 나오기 전에 수아는 항복의 표시로 과장되게 양손을 번쩍 들었다. 삐딱하게 팔짱까지 끼고 서 있던 화희가 대놓고 코웃음 쳤다.

“이쪽이 민수아 씨보다 높은 건 ‘키’밖에 없으니까 지금까지처럼 대해요.”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대했는데요?”

“미친놈처럼, 혹은 결혼에 환장한 불법 체류자? 아니면 이쪽저쪽 방향 지시대명사. 혹은 통제광?”

역시 기분이 상한 게 맞구나. 그런데 투덜거리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평소처럼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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