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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5화 (15/100)
  • 15화

    그녀는 잠시 명품으로 도배되어 있던 방을 떠올렸다. 나중에 다 갚을 요량이어서 제일 값싸 보이는 것을 입었는데 그것이 트레이닝복이었다.

    “음,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옷은 가는 길에 알아서 사려고요.”

    “당장 신용 카드도, 현금도 하나 없는데 무슨 수로요?”

    현재형 거지라는 말을 참 고급스럽게 돌려 말한다. 수아가 멈칫한 사이 화희가 시계를 흘깃 내려다보며 억양 없이 덧붙였다.

    “저녁에 레스토랑과 호텔을 예약해 두었으니 옷은 마음껏 써요.”

    “호텔은 왜요?”

    “이제까지 살벌한 상황에서만 만났으니까. 로맨틱한 분위기에서도 만나 보죠.”

    “로맨틱? 저랑요?”

    “그래야 어색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뭐가요?”

    “섹스 말입니다.”

    “네?”

    그녀를 밤새 괴롭혔던 단어에 수아가 질색하자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뜩잖게 대답했다.

    “민수아 씨가 하자면서?”

    “…….”

    “난 싫지만. 굳이 민수아 씨가 하자니까, 섹스를.”

    무표정하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에게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수아는 입만 벙긋거렸다.

    공짜 명품과 로맨틱한 호텔 라운지 중 어느 것을 먼저 거절해야 하는지 순간 헷갈렸다. 무엇보다 꿈의 잔상 때문에 그에게서 섹스라는 단어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낯뜨거웠다.

    결국, 그녀는 어색하게 제 옷을 쭈물거리다가 더욱 어색하게 대사를 치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래요, 거지라도 굳이 거지꼴로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죠. 출근도 해야 하는데. 그럼 감사히 옷 좀 빌릴게요.”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계단 아래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절대 호텔은 안 가요!”

    “아, 그럼 이 집에서 할까요?”

    “그 얘기가 아니고요. 내 평생에 결혼한다면 내가 먼저 프로포즈 할 거예요. 그, 그 시옷 시옷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 닥쳐 아니, 다그쳐요!”

    마지막 말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게 됐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수아는 뜨거워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얼른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 * *

    ‘이게 임시 보호소라고?’

    수아는 제 눈을 의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원장이 말한 ‘임시’가 이런 수준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보호소는 병원이나 요양원이라기보다 현대적 휴양 시설을 갖춘 리조트에 가까웠다. 본관의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원장이 뛰어나왔다.

    “민 과장! 괜찮은 거지?”

    “전 괜찮아요. 그런데 원장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HH 재단이…….”

    “민 과장, 잘 들어.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요양원이야. 불이 났던 날 ‘그 HH 재단’이 인수하겠다고 연락을 했더라고.”

    “왜 저한테는 말씀 안 하셨어요?”

    “다음 날 말하려고 했지. 법무팀과 자세한 사항을 논의하려고 약속을 잡았었거든.”

    “그렇게 큰 데가 굳이 왜 우리 요양원을요?”

    “그게 말이지…….”

    묘한 표정을 지은 원장이 굉장히 큰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뜸을 들였다.

    아, 역시. 박화희가 연관되어 있구나. 수아가 마뜩잖게 그의 말을 기다리는데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제 강 변이 드린 서류에 고용 계약서가 있었을 텐데요.”

    원장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아, 깜짝이야! 누, 누구? 헉! 박 이사님?”

    수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아보자 뒷짐을 지고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화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올 때까지 아무 말 안 했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수아는 기가 막혀 화희를 흘겼다. 아침에도 출근한다고 했을 때 ‘마침 지나는 길이니 태워 주겠다.’라고 언급한 게 다였다.

    원장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수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속닥거리듯 물었다.

    “민 과장, 박 이사님을 알고 있었어?”

    “오다가 차를 얻어 탔어요.”

    수아가 성의 없이 둘러대자 가늘게 뜬 눈으로 원장을 쳐다보던 화희가 말을 딱 잘랐다.

    “이제 민 팀장님입니다.”

    “아참,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민 과장. 자네 팀장으로 승진했어.”

    “예? 누구 마음대로요?”

    “민수아 씨에겐 잘된 일 아닙니까? 전의 직장에 비하면 비둘기 요양원은 한참 하향 지원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하향 지원이라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민망해진 수아가 현 고용주인 원장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화희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당황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원장님을 왜 저렇게 사납게 쳐다보는 거지?

    수아는 화희를 쳐다보다가 슬쩍 원장의 앞을 막아섰다. 작년 수술 이후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져서 대신 일을 처리해 준 것이 몸에 밴 탓이었다.

    “민 팀장님, 원장님은 이제 경영 선에서 물러나실 겁니다.”

    “네?”

    “이야기 잘 끝내시죠. 나와는 앞으로 시간이 많을 테니 오늘만 내가 양보하는 걸로.”

    양보? 무엇을? 수아가 돌아보았지만 화희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원장을 노려본 후 성큼성큼 가버렸다.

    “하하하,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박력 있어? 역시 큰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이.”

    “원장님, 정말 은퇴하시게요?”

    수아는 원장과 나란히 멀어지는 화희를 같이 넘겨보다가 먼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원장이 그녀를 돌아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이제 내 건강 생각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붙잡을 수가 없잖아요.”

    “민 과장, 박 이사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몰라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 저쪽에선 고용 계약 유지를 걸었지만 자네 승진 건은 내가 먼저 강력하게 추천한 거야.”

    “음,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너무 감사해요, 원장님.”

    “뭘, 나야 일 떠넘기고 갈 사람 있으니 좋지. 자, 오후에 HH 재단 측과 미팅 있으니까 그 전에 재단에서 요구한 우리 쪽 자료 좀 준비해 줘.”

    피곤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일을 떠넘기던 원장의 수완이 마지막까지 빛을 발했다. 수아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원장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로 향했다.

    수아는 아직도 얼떨떨해서 기획팀이 내놓은 팸플릿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알고 보니 ‘자칭’ 임시 보호소는 두 달 전에 완공을 마친 최신식 의료 시스템과 하이엔드급 숙박 시설을 갖춘 HH 재단 지부의 다섯 번째 요양원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오픈하기도 전에 비둘기 요양원을 먼저 인수한 것이었다.

    현재 **병원에 있는 비둘기 요양원 어르신들은 다음 주부터 차차 입원하기로 하고 기존 직원들도 맞춰서 정상 출근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잘 곳과 일자리를 잃었던 수아로서는 고용 조건이 훨씬 좋아졌으니 무척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박화희와 더욱 깊게 얽히는 것 같은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거절해야 할까. 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은데.

    수아는 원장에게 시설을 둘러본다고 말하고 화희를 찾았다.

    ‘여기에도 델피늄 꽃이 있네? 대체 야외에서 어떻게 폈을까.’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정원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놀라운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수아는 멈칫했다.

    정원 너머 수풀 앞에 화희가 서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장신에 넓은 어깨는 두드러졌다.

    저기서 뭐 하는 걸까. 그에게 다가가려던 수아는 차가운 분위기에 섬찟해져 걸음을 멈췄다.

    “자네가 이렇게 좋은 터를 주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일세.”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는데 중후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화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뱉듯 대꾸했다.

    “헛소리. 제 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문지기 따위에게 누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비둘기는 나도 꽤나 좋아했다고. 하지만 난들 어쩌겠어? 자네도 알잖아. 인재는 죄인이 행동하는 순간 예지할 수 있지 않나.”

    “네 놈 감이 다한 건 아니고?”

    “늙어서 내 감도 닳을 만큼 닳았겠지. 비둘기 원장처럼 나도 이제 마음 맞는 할망구랑 남은 생을 편히 보내고 싶을 뿐이야.”

    “헛소리. 허튼 수작 부리려거든 당장 꺼져.”

    듣다 보니 화희의 상대 목소리가 낯익었다. 발돋움을 해서 잠깐 내다보니 서 할아버지였다.

    설마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근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박화희는 나이도 한참 많으신 어른에게 왜 저리 예의 없이 하대하는 거지?

    뭔가 내가 들어선 안 될 대화 같기도 하고.

    당황한 수아가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데 문득 서 할아버지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어이, 민 과장!”

    “어, 할아버지!”

    놀란 그녀는 지금 막 도착한 것처럼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서 할아버지가 반갑게 다가왔다. 애써 할아버지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는데 화희의 시선이 뺨에 따갑게 와닿았다.

    “먼저 와 계셨네요. 무탈하셔서 참 다행이에요.”

    “응, 덕분에. 민 과장이 무탈해서 나도 무탈할 수 있었지, 뭐야.”

    “다들 정말 다행이에요. 이곳은 마음에 드세요?”

    “텃세만 아니라면 너무 괜찮지 그럼. 다음 주에 김 할멈까지 오면 지상 낙원일 테고.”

    서 할아버지가 능청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따라서 웃던 수아는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는 화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사님을 아세요?”

    “응. 전에 일하던 곳의 고용주였어. 이번엔 민 과장 고용주가 되었다면서? 그래서 말인데.”

    서 할아버지가 몸을 낮추고 수아에게 속닥였다. 그런데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내가 특별히 민 과장을 예뻐하니까 말해 주는 건데 말이야. 저 인간 조심해. 딱 봐도 완전 팔불출 관상이잖아.”

    “팔불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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