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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4화 (14/100)
  • 14화

    통화를 마치고 문자로 온 임시 보호소 주소까지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온 수아는 민철이 준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걸로 박화희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절로 긴장이 되서 숨을 죽인 그녀는 조심스레 서류 봉투를 열었다.

    맨 첫 장은 법률 무식자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혼인 신고서였다.

    ‘남편’란의 신상 정보는 전부 채워져 있는. 심지어 영어로 되어 있는 외국의 혼인 신고서까지 있었다.

    이 남자가 진짜!

    수아는 신음을 흘리며 서류 봉투를 통째로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말로만 듣던 그 HH 재단의 ‘박 이사’가 결혼을 못 해서 안달이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할까? 왜 자신을 구하냐는 질문에 박화희가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의 하루가 간절합니다. 지금의 당신은 기억할 수 없는. 그러니 반드시 살아서 나와 그 하루를 지내 줘요.>

    그의 말은 수만 가지 감정이 담겨 있어서 무섭도록 무거웠었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게 뭘까.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침대에 엎드려서 아래층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가 스스로가 우스워진 수아는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우습게도 이불에선 엄마가 쓰던 섬유 린스 냄새가 났다.

    * * *

    ‘왕세자비마마께서 드셨습니다.’

    상시관이 외치자 곧 윤허를 내리는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심 거절당하길 기대하고 있던 그녀는 처형장에 걸어가는 기분으로 상시관을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약초향에 가려진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서 입술을 깨물고 참아야만 했다.

    ‘나의 비께서 어인 일이실까요. 무척 놀랐습니다.’

    ‘청이 있어 왔습니다.’

    침상 위에 느슨하게 기대있던 남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말과는 달리 그녀가 그럴 줄 충분히 예상했다는 것처럼.

    수치스러워서 눈이 질끈 감겼지만 수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아비가 처형된다. 탐욕과 나태에 빠져서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하나뿐인 아비였다. 한 나라의 왕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짐승처럼 도살되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한밤중 침의 자림으로 원수의 침상에 기어 올라가는 한이 있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을 저지할 만한 힘이 있는 자에게 제가 줄 수 있는 것을 내주고 사정하는 것뿐이었다.

    수아가 침상 앞에 서자 그가 손을 뻗어 허리를 감았다. 쓰러지듯 품에 안긴 그녀를 꽉 끌어안은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는 아직도 나를 증오합니까?’

    남자의 말은 무심한 듯 들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숨통을 옥죄는 무게였다.

    싫다. 다른 이들의 목숨으로 그녀를 옭아매는 그를 증오했다. 하지만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 역시 그뿐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수아는 조용히 답했다.

    ‘싫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신부니까요.’

    수아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제 침의 옷자락을 벌렸다.

    하아, 시선으로 그녀를 탐하듯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마치 뱀이 독을 뿜는 것처럼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디가 곱고 긴 손가락이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끼쳐서 그녀는 피하지 않으려 혀를 깨물어야만 했다.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렇게 떨면서 거짓말을 하는군요.’

    떠는 것보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문제였다. 수아는 턱 끝에 고인 눈물을 그의 가슴에 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 부끄러워서…… 그러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취하시어…….’

    ‘비가 이렇게 한다 해도 변할 건 없습니다. 그대 아비의 죄악은 마땅히 처벌 받을 테니까.’

    수아는 수치심에 이를 악물면서도 그의 품을 벗어나 침상 위에 엎드렸다.

    ‘제발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치욕스러운 죽음만은 면해 달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일으켜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침의가 흘려내려 드러난 살결에 닿았다는 건 느껴졌다.

    그의 탐욕 어린 시선을 눈치챈 적은 많았다. 조반을 들 때 밥을 씹는 그녀의 입술을, 물을 마시는 목덜미를, 궁 내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녀의 허리를 스치듯 탐하는 시선을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를 지켜보기만 할 뿐 손도 대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치 달콤한 과육을 탐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를 흔들면 됐다.

    수아는 몸을 일으켜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으음, 남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손을 뻗어 침의를 도로 입히고 품에 안았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욕망을 푸는 동안 비는 가만히 날 봐주기만 하셔도…….’

    ‘아니오. 저는 당신의 여인입니다. 부디 저와 깊은 연을 맺어 주세요.’

    ‘이렇게 울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합니까.’

    ‘제 눈물이 싫으시다면 차라리. 차라리 제 눈을 가려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안아 주세요.’

    남자의 신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수아는 눈을 감은 채 남자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앗!’

    분명 그녀가 당긴 것 같은데 시야가 한 바퀴 돌았다. 어느새 그녀는 흐트러진 금침 위에서 남자를 올려다보게 됐다.

    그녀를 훑어보는 남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금방이라도 이를 드러내서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눈빛에 진한 굶주림이 드러났다.

    그의 손이 그녀의 눈물을 쓸어내려서 수아는 제 스스로 남자의 머리를 묶은 비단을 풀었다.

    ‘이런.’

    어둠처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수아는 더 이상 남자를 보지 않고 비단으로 제 눈을 묶어 버렸다.

    눈이 가려지니 훨씬 나았다. 그저 깊은 어둠에 잠겨 있다고 여기면 됐다. 그녀의 육체는 그저 제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착각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육체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사락거리며 옷 벗는 소리가 나고 드러난 살결에 남자의 단단한 육체가 닿았다. 그의 체취는 피비린내가 짙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솔 향기 같기도 하고 사향 같기도 한 체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으읏!’

    축축한 혀가 목덜미를 쓸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녀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려 금침을 움켜쥐자 남자가 손을 빼앗아 깍지를 잡아 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거칠었다. 이제까지 참았던 굶주림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여린 입술이 뜨거운 입안 가득 빨렸다. 커다란 손이 달아오른 그녀의 살결을 거침없이 어루만졌다. 어느 순간 가는 허리를 잡아채는 그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무게가 그녀를 온전히 짓누르자 아랫배에 희미하게 열락이 피어올랐다.

    ‘……아앗!’

    눈앞이 아찔해졌다. 남자의 뜨거운 것이 제 안에 들어오는 순간 수아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쾌락에 겨운 신음처럼.

    “아악!”

    수아는 제 비명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눈을 가렸던 비단이 없어진 것처럼 눈앞이 밝았다. 그러다가 급히 이불을 들춰 보고 기겁했다.

    무슨 꿈이 이렇게 리얼해?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도 정사를 치른 것처럼 아랫배가 묵직했다.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웬 몽정이냔 말이야!

    여러 차례 심호흡해서 살색 찬연한 꿈의 여운을 몰아내고 나니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베이지와 라벤더 톤으로 꾸며진 방, 박화희의 집이었다.

    현실을 깨닫고 나니 더욱 기가 막혔다. 아직 정체도 불확실한 남자의 집에서 깊게 잔 것도 모자라 바로 그 남자와 동침하는 꿈을 꾸다니, 그것도 사극으로 각색까지 했다. 평소에 이쪽으로 판타지가 있던 것도 아닌데!

    수아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을 나서자 2층의 복도 난간 아래로 거대한 홀과 저택 내부가 한눈에 보였다.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살이 가득할 뿐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수아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1층으로 내려갔다.

    “맨발이네요. 슬리퍼가 있었을 텐데.”

    기다렸다는 듯 불쑥 나타난 화희가 계단 맨 아래에서 말을 건넸다. 이른 아침임에도 흠잡을 데 없는 슈트 차림에 말끔한 얼굴이 도드라졌다.

    수아는 허리를 숙여 제 앞에 슬리퍼를 놓아주는 그를 보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맨발을 보는 그의 눈길을 보니 잊으려 애쓰던 꿈이 떠올랐다. 사극풍의 꿈에서 동침을 했던 남자는 바로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 다행인 건, 그나마 중요 장면에서는 눈을 가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소리는, 감촉은 남았지만…… 안 돼. 그만 생각해!

    수아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애써 시선을 돌리는 동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차림을 훑어본 화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방에 있는 건 전부 당신 겁니다.”

    다행이었다. 에로틱한 꿈 대신 거지 같은, 아니 실제 거지가 된 현실이 자리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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