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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3화 (13/100)
  • 13화

    수아는 질색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화희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허공에 손가락으로 주문을 그렸다. 지하철에서 억지로 피를 먹였을 때처럼.

    따뜻하던 실내에 갑자기 찬 바람이 불고 그때처럼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짓눌렀다.

    당황하여 눈을 길게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짧은 사이 그녀 몰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수아는 제 어깨 위에 걸쳐진 흰색 캐시미어 숄을 믿을 수 없어 내려다보았다. 경악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까부터 병원복이 너무 요망해서요.”

    “어, 어떻게…….”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잔재주를 부리는 동안 내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뿐이니까.”

    뭐라 대꾸하려고 했지만 이런 믿기 힘든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는 그에게 해야 하는 제대로 된 말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힘이 빠진 수아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소파에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 이런 능력까지 있는데 왜…… 그렇게 결혼을 강조했어요? 혼인 사기가 필요한 불법 체류자라도 되는 건 아닐 테고…….”

    무표정하던 그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내 존재 자체가 불법적이긴 하죠. 그런데도 내가 굳이 합. 법. 적인 방법을 제안한 건 민수아 씨가 합법 선호자라서만은 아닙니다.”

    음험한 어투로 말을 끝낸 화희가 상체를 앞으로 길게 빼고 가까이 들이밀었다.

    “내게 당신의 목숨을 묶을 방법으로는 현생을 묶는 결혼, 육체를 묶는 교합, 영혼을 묶는 영결, 이 세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지. 이 중 결혼이 싫다면 나와 섹스할 겁니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면서 한참 빤히 쳐다보자 당황한 수아는 얼굴까지 붉어져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침묵 대신 집요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다 너 때문이다. 그러니 군말 말고 따라라.

    “정말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럼 윤회 내내 내게 구속되는 영결식을 할까요? 내 업보까지 짊어져서 다음 생을 비참하게 살아도 좋다면.”

    이젠 영혼과 내세까지 등장했다. 수아는 이 모든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윤회를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에게 영혼이 구속되다니 어딘가 소름 끼쳤다. 하지만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단순히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도, 법적으로도, 말 그대로 현생의 모든 것이 얽힌다.

    “그럼 아무래도, 꼭 선택해야만 한다면 섹…… 큼큼, 육체만 얽히는 게 다른 것보다는 낫지 않겠…… 어요?”

    머뭇거리는 그녀의 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희가 이를 악물었다.

    “절대 안 됩니다.”

    어찌나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지 싫은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이쯤 되자 수아는 의문보다 기가 막혔다.

    “저기, 대부분 남자라면 반대 아니에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던 화희가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나마 날 그쪽이라는 지시대명사가 아닌 남자라고 쳐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그럼 그쪽…… 아니, 당신은 정체가 뭔데요? 영혼을 묶는다느니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저기, 일단 사람이긴 해요?”

    화희가 움찔 동작을 멈췄다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섹스가 가능한 종자겠죠, 일단은.”

    “저기, 그 단어 좀 그만 말하면 안 될까요?”

    “이상하군요. 내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보다 섹스라는 말이 더 거슬리는 것처럼 보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현재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근데 정말 사람이 아니에요?”

    “설마요. 나도 대부분의 남자입니다. 먹고 자고 원하고 좌절할 줄 아는. 단지 당신과는 반대의 저주에 씌였을 뿐이죠.”

    “반대라면 어떤?”

    “알면? 매우 사적인 일이라서 나와 깊고 단단히 얽힐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까?”

    상체를 들이밀고 그녀를 훑는 시선이 어딘가 음험해 보였다. 섹스라고 발음하는 것보다 훨씬.

    “민수아 씨에게 날 것의 나를 보이는 건 홀로 발가벗는 것과 같아요. 어딘가 수줍고 수치스럽죠.”

    수아는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의 흰 이를 쳐다보다가 뒤로 주춤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희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쉬죠. 민수아 씨 방은 2층입니다.”

    “아, 아니에요. 이만 가봐야죠.”

    “갈 곳이 있기나 합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주섬주섬 일어나던 수아는 정곡을 찔려 동작을 멈췄다. 당장 갈 곳이 없긴 했다. 엄마와 새아빠의 집은 이미 그들 식구만으로 만원이었다. 친구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은 3년 전부터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아가 머뭇거리자 화희가 대번에 코웃음 쳤다.

    “위험하면 내가 더 위험하겠죠. 결혼보다 섹스하자고 한 건 민수아 씨니까. 나는 반드시 내 침실 문을 잠글 겁니다.”

    “이봐요, 그건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질색한 수아가 반박했으나 그는 들은 체도 않고 성큼성큼 가 버렸다.

    뭔가 억울해서 씩씩대고 있는데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 실장이 자애롭게 웃었다.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저는……!”

    수아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실장은 벌써 계단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실장님이 고용주를 닮은 건 기분 탓일까. 매우 정중한데 내 말은 무시한다.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어느새 베이지와 라벤더 톤으로 꾸며진 방 안에 앉아 있었다.

    * * *

    그녀가 안내 받은 방은 딱 봐도 하루아침에 준비된 모양이 아니었다.

    욕실에 딸린 드레스룸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들과 계절별로 나눠진 여성복들이 있었고, 벽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가방들이 보였다. 서랍에는 속옷까지 전부 갖춰져 있었다. 슬쩍 라벨을 살펴보았는데 모두 명품 브랜드였다. 급히 준비한 것치고는 매우 디테일하고 고급스러웠다.

    죽음이 제 스토커라는 것을 이제 겨우 인정했는데 이젠 박화희까지 고민해야 하다니. 이것은 복에 넘치는 천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혼란 그 자체기도 했다.

    수아가 긴 머리칼을 몇 번이고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진정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했다.

    “이사님께서 전해 드리랍니다.”

    화들짝 놀라 문을 열자 금테 안경을 쓴 30대 후반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차 사고와 지하철 사건 때마다 있었던 화희의 측근이었다.

    “강민철입니다. HH 재단 법무팀 팀장입니다만 대체로 박 이사님 전담이죠.”

    그는 수아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명함 대신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역시 박화희가 HH 재단과 관련이 있었구나. 어마어마한 이 집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이 되긴 했지만, 그곳의 이사라니 왠지 압도당하는 기분에 얼떨떨하게 서류 봉투를 받아 들던 수아는 뒤늦게 물었다.

    “이게 뭔데요?”

    “대한민국과 기타 몇 개국이 보증할 수 있는 이사님 신분에 관한 서류입니다.”

    “그런데 왜 제게?”

    “민수아 씨가 이사님에 관해 물으셨다고요.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나에 대해 알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할 것이다’라고 협박한 게 아주 기뻐한 거라고?

    수아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개의치 않은 민철이 말을 이었다.

    “민수아 씨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제가 조금 알려드리자면, 회사에서 저희 이사님 별명이 ‘삼미’입니다. 미친 재력, 미친 미모, 거기다 ‘미. 혼.’ 팬덤까지 있죠. 게다가 자상하기는 얼마나 자상한지 동물, 노인, 여자한테는 천사가 따로 없답니다.”

    왜 갑자기 그런걸? 아무리 봐도 외운 걸 줄줄 외운 것 같은 말투인데 민철은 한참이나 화희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해서 저희 이사님과 결혼하실 분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습니다.”

    말을 끝낸 그의 표정에 자괴감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슬쩍 뒤쪽에 시선을 주었던 민철은 길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수아가 따라서 넘겨보려고 하자 얼른 헛기침한 그는 품에서 최신형 핸드폰을 내밀었다.

    “기존 핸드폰은 화재로 완전히 쓸 수 없게 돼 버렸더군요. 최대한 매칭해 놓았으니 바로 쓰시면 됩니다.”

    거절할 틈도 없었다. 수아의 손에 억지로 쥐어진 핸드폰에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익숙한 번호였다.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여보세요, 원장님?”

    -민 과장, 몸은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이제 퇴원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원장님도 괜찮으신 거예요?”

    -물론 괜찮지. 근데 괜찮지 않은 것 같기도 해, 특히 나는! 그래서 말인데 내일 당장 출근하면 안 되겠나?

    “출근이라니요? 어디로요?”

    -일단 만나서 얘기해.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 임시 보호소 주소는 문자로 보낼게.

    원장이 작년 수술 이후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고 하면서도 잔뜩 흥분한 어투로 그녀가 알겠다고 대답할 때까지 출근을 닦달했다.

    “어지간히 성질 급한 양반이구먼.”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는지 지켜보던 민철이 마뜩잖게 중얼거리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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