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12화 (12/100)
  • 12화

    “내가 감히?”

    “어제요. 내 목을 졸랐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목덜미를 쓰다듬었던 것이지만 충분히 두려웠다.

    떠올리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저도 모르게 말끝에 힘을 주어 눈을 부릅떴는데 화희가 멈칫 뒤로 물러났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묘하게 시선을 비낀 채로 느릿하게 대꾸했다.

    “당신을 살리려는 내가 목을 졸랐을 리가 있습니까. 그저 난 당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

    “무서웠단 말이에요! 그쪽도 내가 무서워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화가 난 것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거고.”

    수아는 한 발 그에게 다가서며 손가락을 세운 채 목소리에 힘을 줬다.

    “날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도 말고요. 살려 줬다고 내가 그쪽 건 아니잖아요.”

    “난 당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럼 아까 그건 뭐예요? 처음부터 그쪽은 그런 식이었어요. 살고 싶으면 무조건 내 말을 따라라. 생판 처음 보자마자 결혼하자. 할머니를 돕고 싶으면 저 남자를 해쳐야 한다. 그쪽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요, 아는데!”

    “……아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시간은 줘야 하잖아요. 세상에 무조건 옳은 결정이 어디 있어요? 이런 식이면 나는 오히려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말을 이을수록 감정이 복받쳤다. 수아가 진정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다물자 화희 역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수아의 말을 귀담아들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그녀 쪽으로 기울인 채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는 동안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살기가 사르르 녹는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대신 그 자리에 알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들어찼다. 깊고 무거워서 애달픈 슬픔과도 닮은 그런 느낌이었다.

    한참 후에 그가 먼저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내가 옳지 않다면? 그럼 당신은 죽는 한이 있어도 내 말을 따르지 않을 겁니까?”

    “꼭 모든 선택이 그렇게 극단적이어야 해요?”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간절하니까.”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암만 봐도 이상했다. 어째서 이 남자는 이다지도 애틋하게 쳐다보는 걸까. 그녀가 어떤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너무나도 간절한 것처럼.

    수아가 마른침을 삼키자 그의 시선이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았다.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축였는데 그 동작마저 대단한 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아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질 것만 같았다.

    “나도 살고 싶어서 환장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게 그쪽을 이해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녀가 말을 끝냈는데도 화희는 기다리는 것처럼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초조해진 수아가 눈살을 찌푸려서야 그제야 고개를 보일 듯 말듯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려 했지만 화희가 돌연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왜, 왜요?”

    “다쳤잖아요.”

    반사적으로 그를 피하려던 수아는 그가 제 손을 들어 올리자 물러서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괜찮아요. 아깐 좀 얼얼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 저기, 피는 싫어요!”

    막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검지를 깨물던 화희가 멈칫,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웃었다.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환장했단 말입니다.”

    그녀의 손을 입술에 대는 바람에 팔이 땅겨져서 절로 그에게 바짝 다가서게 됐다. 일부러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화희는 당장 어쩌고 싶은 것처럼 빨갛게 붓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의 눈길이 닿으니 간질간질했다. 수아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황해서 손을 잡아 빼고 헛기침을 했다.

    “음, 그보다 전화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퇴원 수속 하려면 돈도 필요하고 해서 연락 좀…….”

    “수속은 이미 강 변호사가 처리했습니다.”

    “아까부터 강 변호사가 누구…… 아니, 제 걸 왜 그분이 해요?”

    “강 변호사가 해야죠. 나는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닌데요.”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낀 화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민수아 씨는 지금 몹시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어요.”

    “굶주린 내 얼굴은 어떤 건데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뜯어먹고 싶다는 야성미? 나한테 화풀이도 제대로 못 했으니 이해합니다.”

    “저기, 화풀이가 아니라요.”

    “압니다. 닥치는 대로 뜯고 싶은 건 나도 그러니까. 하아, 오백 년 만에 혼났더니 오장육부가 다 오그라드네요. 괜히 두피도 아픈 것 같고.”

    오백 년?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황당한 수아가 되물으려 했으나 ‘꽤 무서웠어요.’ 덧붙이고 어깨를 으쓱한 화희가 병실을 나섰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그녀가 오는지 확인하는 듯 힐끔 돌아보아서 수아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차가 거대한 철재 문을 지나서 가지가 무성한 거목들로 잘 조경된 정원을 한참 지났다. 저택처럼 보이는 건물 뒤로는 울창한 산이었다.

    “여기가 뭐 하는 데에요?”

    무슨 식당이 이렇게 커? 꼭 박물관 같잖아.

    수아는 고풍스럽게 꾸며진 복도를 둘러보며 어색하게 병원복 옷깃을 쓰다듬었다. 얼떨결에 화희를 따라 병원을 나오긴 했는데 차림이 적잖게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화희나 안내해 주는 직원들은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집입니다. 현재 제일 안전한 곳이라서.”

    “집이라고요?”

    수아는 광활하도록 넓은 홀과 그 한가운데 자리한 고딕 양식의 기둥을 타고 자라난 덩굴, 2층으로 향하는 나선형 대리석 계단, 환한 빛을 투과시키는 통유리창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들을 안내했던 유니폼을 맞춰 입은 직원들이 물러나고 정장을 갖춘 50대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이사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화희가 그녀에게 묵례한 후 수아를 돌아보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이 집을 관리해주시는 분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이 분을 통해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순임입니다. 편하게 이 실장이라고 부르세요.”

    “안녕하세요, 민수아입니다.”

    얼떨결에 인사하고 나니 다들 자신을 오래 볼 것처럼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끼어들 타이밍을 놓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과분할 정도로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식사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 긴장한 수아만 꼬박 바라보고만 있던 화희가 코웃음 쳤다.

    “아닌 것 같던데.”

    더는 뜨거운 시선을 외면할 수 없던 수아는 마주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봐요?”

    “간절히 소망했으니까요.”

    “간절한 게 의외로 많네요.”

    “그게 내 탓만은 아니라서.”

    “음, 설마 생면부지의 병원복 입은 여자랑 밥 먹는 걸 소망했다는 건 아니죠?”

    “무려 아홉 번째 생에 겨우 만났는데 생면부지란 말은 어폐가 있죠.”

    “네? 아홉 번째 뭐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수아가 되묻자 화희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티 포트에서 차를 손수 따르며 말을 돌렸다.

    “드디어 만나서 반갑단 뜻입니다. 마셔요. 소화에 좋을 겁니다.”

    그녀가 의문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어깨를 으쓱한 그는 보란 듯 먼저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빤히 쳐다보는 통에 그녀도 옥색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향은 아주 좋은데 뭔가 이상한 맛이 혀끝에 걸렸다. 멈칫해서 눈으로 묻자, 그녀가 넘긴 차를 훑는 것처럼 목덜미 쪽을 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겨우 세 방울인데 예민하군요.”

    “설마 또 피에요?”

    수아가 찻잔을 던지듯 내려놓고 질색하며 바라보자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손목과 그녀를 찰나 집요하게 번갈아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방울이 아니라 제 손목을 갈라 왕창 먹이고 싶다는 것처럼.

    “왜 자꾸 그쪽 피를 먹이는 건데요?”

    “당신에게 향할 사신의 낫을 미리 받아 두는 겁니다.”

    대신 죽기라도 한단 건가? 말도 안 된다고 이성은 이해를 거부했지만, 본능은 문득 그녀에게 피를 먹이고 갑자기 고통스러워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저번에 갑자기 피를 흘렸던 게 그래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대답 대신 화희가 제 손을 들어 올렸다. 희고 매끈했던 그의 손등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까 방화범을 치느라 다친 그녀의 손처럼.

    정말 대신 다친 거야? 멀쩡해진 제 손을 살피던 수아는 더듬더듬 그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을 리 있습니까. 더 효율적인 방법을 놔두고 맛도 없는 피 따위를 먹이는데.”

    “네?”

    “결계로 제일 확실한 방법은 교합이니까.”

    교합? 상처가 아프진 않냐는 뜻으로 물었던 수아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화희가 혀를 차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요즘은 이런 말 쓰지 않을 텐데. 섹. 스. 말입니다.”

    “섹…… 하, 왜 방법이 다 그렇게 극단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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