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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1화 (11/100)

11화

수아는 화재가 있기 며칠 전, 어머니를 만날 생각도 않고 요양원 근처만 서성이다 도망치는 저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화재 당일엔 그 어떤 비상경보나 방화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다. 아마 화희가 언급했던 ‘방화범’, 그것도 계획적인 자의 짓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저 남자는 제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험금을 받아야만 했다고.

본능적으로 그가 요양원에 불을 지른 범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돈 때문에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막 걸음을 떼려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한 손이 강하게 잡았다. 마치 몸이 끌려가는 것처럼 뒤돌려 세워져 벽처럼 서 있는 남자와 마주 서게 되었다.

“민수아 씨.”

화희가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녀를 붙든 것과 달리 그는 느긋한 시선으로 수아를 찬찬히 훑었다.

분노가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난 그녀의 눈, 화를 참지 못해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팍, 떨리는 손까지 책을 읽듯 꼼꼼히 훑어본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직하고 느릿한 목소리가 귓가에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맞아요, 본래라면 저놈 때문에 당신과 요양원 사람들은 산 채로 불에 타서 죽었을 겁니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스럽게. 이유를 몰랐다면 죽음은 덜 고통스러웠을까요?”

섬뜩한 말은 머리가 아닌 감정에 바로 꽂혀 들었다.

한낱 돈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을 뻔했구나. 인간도 아닌 버러지 같은 놈 때문에.

수아는 북받치는 감정에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희가 말을 멈추자 잔혹하게 배신당한 모정에 흐느끼는 할머니의 울음이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들려왔다.

인간으로서 차마 하면 안 되는 죄를 지은 남자는 악다구니를 치며 모정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내가 왜 이렇게 됐냐고? 이게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엄마 탓이잖아! 이렇게 거지같이 살게 내버려 둘 거면 날 왜 싸질러 낳았어?!”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 후레자식의 입을 어떻게서든 막아 버리고 싶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화희가 그녀의 주먹 쥔 손을 잡아 펴면서 위로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예쁜 손 더럽히지 말고 내게 부탁해 봐요.”

“.....뭘요?”

“버러지는 버러지 같은 꼴이 어울린다고.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조용하지만 무거운 목소리는 들끓는 분노를 부추겼다.

“머지않아 저놈은 제 어미의 등을 떠밀어 목을 부러뜨릴 겁니다. 나는 저 여자를 살릴 수 있어요, 당신 부탁이라면.”

귓가에 닿은 그의 뜨거운 입김이 화를 뜨겁게 달구는 것만 같았다. 화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불쌍한 자식새끼, 손주 새끼 모른 척하고 혼자 잘 처먹고 사느니 그냥 같이 죽자, 죽어!”

수아는 흠칫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할머니를 어떻게 할 것 같았다.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보다 슬픔으로 무너진 할머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들이 걱정돼서 수아에게 살펴봐 달라고 사정까지 했었다. 평소에도 아들 살림 걱정에 요양원 내의 시설비를 제외하고 간식도 제대로 사지 못했던 분이었다.

낳아 주고 키워준 분을 고작 도박 빚 때문에 죽이려 하다니.

그런 게 과연 사람일까? 그래, 버러지보다 못하다.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다.

“정말 도와줄 수 있어요?”

잔뜩 젖은 솜덩이가 목에 들어찬 것 같아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수아는 할머니에게서 겨우 눈을 떼 화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과 마주치자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얼마든지, 기꺼이.”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검은 눈에서 살의가 번뜩였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강한 살기는 처음이었다.

버러지 같은 짓을 하는 놈을 버러지처럼 만든다. 그의 눈빛으로 보건데 끔찍한 응징에 가까울 것이다. 그라면 충분히 비참한 삶을 만들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누구를 위한 걸까?

잠시나마 저 쓰레기가 바닥을 기는 모습을 상상했던 수아는 몸서리쳤다. 그녀의 부탁대로 해 주겠다던 화희의 다정한 미소가 소름 끼쳤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든 수아는 한발 물러서려다가 양팔이 그에게 잡힌 것을 깨닫고 깊게 심호흡했다.

“놔요.”

“민수아 씨.”

자신에게도 제 목소리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심호흡한 수아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

“내게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화희가 그녀에게 뿌리쳐진 제 손을 내려다보다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눈이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다시 잡아채 물어뜯고 싶은 것처럼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수아는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아무리 버러지라도 무슨 권리로 사람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해요?”

“누, 누구야?!”

수아의 목소리에 놀란 듯 아래에서 남자가 외쳤다. 윽박지르다 못해 제 어머니의 멱살까지 잡고 있는 후레자식의 모습에 그녀는 화희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남자를 밀쳐서 할머니에게서 떼어냈다.

“이 나쁜 놈아!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한테 뭐가 어쩌고저째?”

“으윽! 너, 넌 뭐, 뭐야!”

바닥에 나뒹군 남자가 적잖게 당황했는지 얼굴을 감싼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수아는 얼얼한 손을 꽉 쥐고 할머니 앞을 막아선 채 외쳤다.

“뭐긴, 당신 때문에 두 번이나 죽을 뻔한 사람이지!”

“이, 이 여자가 미쳤-.”

“미친 건 당신이야! 아무리 돈에 미쳤어도 그렇지, 사람들이 있는 병원에 불을 지르다니 제정신이야?”

영문도 모르고 죽을 뻔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아는 악에 받쳐 남자를 마구 때렸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막던 남자가 주먹을 치켜들자 그녀가 먼저 달려들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입에서 알고 있는 갖은 욕이 다 튀어나왔다.

미친놈, 돌은놈! 사람을 어떻게 죽이려고 할 수가 있어!

당황한 채 얻어맞던 남자가 뒤늦게 그녀를 세차게 밀어냈다. 얼떨결에 손톱을 세운 채 밀려난 수아는 등에 단단한 가슴팍이 닿자 놀라 돌아보았다.

어색하게 공중에 한 팔을 든 채 굳은 화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쥐어뜯긴 몰골이 된 남자를 흘깃거리다가 한숨처럼 입술만 달싹였다.

“……조…… 해요.”

“네?”

“흠, 손 조심하라고요.”

헛기침하고서 뱉는 말을 겨우 알아들은 수아는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됐다.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다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심호흡을 한 그녀는 화희의 재킷 안쪽을 급히 뒤졌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여전히 어색하게 팔을 든 채 서 있던 화희가 수아의 손이 닿자 흠칫하더니 시선만 내려 쳐다보았다.

“잠시만 빌릴게요.”

그의 핸드폰을 찾아든 그녀는 비상통화로 걸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법대로 해봐, 어디!”

“뭐? 겨, 경찰?”

수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다. 막 그녀가 쫓아가려는데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어느새 화희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등을 밟고 서 있었다. 남자의 쥐어 뜯겨 헝클어진 머리를 허리까지 숙여 노골적으로 살펴보는 표정이 묘했다.

“비, 비켜…… 으악!”

그의 발에 깔린 채 기어서라도 도망가려던 남자의 정강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움찔한 수아는 얼른 흐느끼는 할머니를 꽉 끌어안아 시야를 막았다. 그리고 굽고 가녀린 어깨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하게.

할머니의 슬픔과 회한이 그대로 전해져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 왔다.

* * *

할머니를 병실에 모셔다드리고 제 병실에 돌아오니 화희가 이미 병실 안, 문에 기대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비난하는 것처럼 멍이 든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감추듯 등 뒤로 숨겼다.

그녀는 신고를 받고 온 경찰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어제 용의자에 관한 제보가 접수되어서 이미 조사하고 있었다던데. 혹시 익명의 제보자가 그쪽이에요?”

“나는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제보는 누가…….”

“그런 자잘한 건 강 변호사가 하지.”

그러니까 결국 먼저 조치를 해 놓고 날 떠봤다는 거잖아. 하지만 그 남자를 법이 아닌 방법으로 처리하겠다는 것 또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단지 그녀가 부탁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아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문에 기댄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시선만 쫓는데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수아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서자 몸을 바로 한 화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살려 주신 건 고마워요, 너무 고마운데요. 그런데 다신 날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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