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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10화 (10/100)
  • 10화

    2. 그 남자와의 계약

    화희는 잠이 든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 자신을 잔뜩 경계하던 동그란 눈을 감은 얼굴은 아스라이 먼 기억의 창백한 얼굴과 겹쳐졌다.

    그저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풀이된다. 이것은 선택인가 아니면 숙명인가.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수아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던 그때, 화희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머나먼 시간을 돌아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달픈 기다림에도, 비통한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그를 거부했음을.

    사랑해 주지 않음으로써, 사라져 버림으로써, 죽어버려야 했을 만큼 그녀는 그를 증오했다.

    강제로 혼례를 치르던 날, 그의 손을 뿌리치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과 같았다.

    ‘저는 당신이…… 역겹습니다.’

    얼마나 들떴었던가. 눈처럼 흰 신복을 입고 찾아와서 그에게 ‘감정’을 만들어 주었던 여자가 자신의 신부가 되었을 때.

    그래서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은 혼례복을 바라보는 그 처절한 눈빛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제 사람이 된 것만으로 족했다. 그것이 악연의 씨앗일 것이다.

    아마도 분했던 것 같다. 남이나 다름없는 가솔들의 목숨 따윈 무시하고 차라리 도망칠 일이지. 도망치거나 차라리 원수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다루기 쉬웠을 텐데, 여자는 그저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앉은 채 모든 것을 거부했다. 고귀한 신분임에도 굶어 죽기를 바라는 듯 바짝 말라버린 어깨가 안타까웠다.

    그래서였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녀가 곡기를 끊고 쓰러졌을 때 화희는 검을 빼 들고 귀족 넷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들은 여자를 빌미로 겨우 살아남은 주제에 오히려 원수와 붙어먹는다면서 그녀에게 자진을 강요하던 버러지였기 때문이다.

    고된 갈증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던 그녀가 굴러떨어지는 모가지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희게 질린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었을 때 그녀는 그를 봐 주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무엇을 말입니까.’

    ‘제 가족을 살려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답이 틀렸습니다. 나는 그대를 살리기 위해 저들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허니 비가 살지 않겠다면 저들은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화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목이 잘려나갔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비명을 멈췄다. 그저 눈을 감고 외면했다. 꼭 숨을 멈추고 싶은 것처럼.

    그는 초조해졌다. 나머지 가솔들을 모조리 끌고 나오라 명하려 할 때 그의 발밑에 그녀가 무릎 꿇었다.

    ‘바라는 대로 살겠습니다. 신부가 되라면 신부가 될 것이고 액받이로 살라면 전 액받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검을 거두십시오.’

    ‘그대는 그저 나의 신부이기만 하면 됩니다.’

    ‘네. 바라는 대로 살겠습니다.’

    순순한 대답과 달리 그녀의 눈에는 적나라하게 증오가 드러났다. 초췌한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뚝 떨어져 바닥에 기형적인 원을 그렸다. 마치 그들의 마음처럼.

    “흐윽…….”

    흐느낌을 억지로 참던 신음이 아직도 생생했다.

    머나먼 기억 같기도, 혹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도 한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던 화희는 멈칫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수아가 악몽이라도 꾸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화희는 그녀에게 닿으려고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내가 민수아를 도울 자격이 있을까. 그때처럼 도우려고 내밀었던 이 손이 그녀를 옭아매는 가시가 된다면.

    아니다. 허튼 생각이다. 그녀를 살리는 데 있어서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오로지 선택은 민수아, 그녀의 몫이었다.

    화희는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냈다. 그녀의 입술에 붉은 피를 흘려 넣고 악몽이 물러가고 편안한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민수아, 마치 안온한 물처럼 느껴지는 이름이다. 성격 역시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래서인가? 함께 있으면 마음속 뜨거운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무리 유하다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나면 미워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밀어내는 걸 보면.

    대체 이번엔 무엇을 잘못한 건가. 죽어 마땅한 놈을 죽이지도 않았고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 열심히 자리도 피해 주었다.

    화희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날이 밝을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수아를 지켜보았다.

    * * *

    분명 겁에 잔뜩 질린 채 잠이 들었던 같은데. 그런데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얼마나 오래 잔 걸까. 수아는 잠에서 깨자마자 멍하니 블라인드가 쳐진 병실 창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 이렇게 퍼져 자도 되는 거야?’

    그러다 갑자기 조용한 병실의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 있다는 안도감보다 현실의 위기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여긴 1인실이잖아!

    화재 사고로 직장과 살 곳을 동시에 잃은 처지에 의료 보험 적용도 안 되는 1인실이라니 터무니없었다.

    수아는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른 퇴원 수속하고 요양원 어르신들의 입원 처리도 알아봐야 했다.

    그런데 간호사에게 묻고 원무과까지 찾아간 성과도 없이 황당한 답만 들었다.

    “HH재단이라니 거기서 왜요?”

    수아가 황당해서 연거푸 되묻자 직원은 같은 답만 되풀이했다.

    “비둘기 요양원 환자분들과 관계자들 의료비 전부 HH재단으로 청구되었습니다. 재단이 비둘기 요양원을 지원한 모양인데 모르셨어요?”

    우리 요양원은 사설인데? 지난 3년간 총무 일을 해 오면서도 재단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작은 요양원을 후원한다기엔 HH재단은 지나치게 크고 유명했다. 재벌형 대기업인 P그룹의 계열사였다가 따로 독립해 소외 계층을 위한 하우징, 쉘터, 교육 등과 관련된 소셜 임팩트를 지향하는 기업형 복지 재단으로 급성장했다. 모친인 송 여사는 그 재단 산하의 복지원에 자원봉사 외에도 다달이 성금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병원도 HH재단 계열이었다.

    나를 여기에 입원시킨 게 박화희 같은데 설마 HH와 연관이 있나? 그럼 대체 언제부터…….

    “당장 전화로 물어…… 아, 핸드폰이 없구나.”

    수아는 당장 요양원 원장에게 전화해 물어보려 했지만, 문득 자신에게 핸드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공중전화를 이용할 동전도 없다.

    엉뚱한 곳에서 거지가 된 현실이 뒤통수를 쳤다.

    호되게 후려치는 현실 감각을 억누르고 겨우 직원에게 핸드폰을 빌려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수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직원에게 다른 걸 물었다.

    “요양원 어르신들 병실 호수 좀 알려주셔도 될까요? 다들 잘 계신지 확인 좀 하려고요.”

    702호, 703호…….

    그녀를 제외한 어르신들은 이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건강에 이상은 없지만 HH재단의 지원 아래 임시 보호소로 옮기기 전까지 예비 조치라고 했다.

    먼저 할머님들부터 봬야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아는 7층 복도에서 호수를 적은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들려오는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돈이 없다니 왜 없어? 해 준 건 쥐뿔도 없으면서 엄마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분노가 잔뜩 서려 있어 거슬렸다. 그 대상이 ‘엄마’라는 것에, 특히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눈을 흘기던 수아는 멈칫했다. 복도 끝으로 향하는 환자복 차림의 할머니와 맞은 편 중년 남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요양원의 303호 할머니였다. 험악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윽박지르는 중년 남자는 일전에 할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봐 달라고 사정했던 아들이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거동과 상태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얼핏 보이는 표정은 매우 불안해 보였다.

    무슨 아들이 저렇게 불손하게 굴어? 수아는 여차하면 할머니를 도울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문에 바짝 붙은 채 그들을 살폈다.

    “재철아…….”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쥐어 잡은 아들은 주위를 살펴본 후 제 어머니를 험악하게 비상계단에 밀쳐 넣었다.

    수아는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부러 한 층을 더 올라가서 소리가 안 나게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밀폐된 공간에 악다문 잇새로 격앙된 음성이 짓눌린 것처럼 울렸다. 얼핏 들리는 말에 그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무나 잔인한 말이었다.

    “돈이 왜 없어? 요양원 입원비 있잖아. 그거라도 빼서 줘요.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좋은 곳이 다 무슨 소용 있어?”

    “그럼 이 애미는 어디로 가라고…….”

    “나만 잘 살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엄마 손자들을 위한 길이야!”

    “언제까지 도박으로 빚만 질 셈이야. 사채업자들이 요양원까지 찾아왔었어. 재철아, 제발 정신 차려, 응? 애들을 봐서라도.”

    “그러니까! 애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정하잖아. 어차피 몸뚱이가 시원찮아서 낙도 없잖아. 대체 얼마나 더 살려고 그래?”

    아들이 매몰차게 쏘아붙이자 할머니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애가 왜 이렇게 못된 말을 해? 응? 얼마나 힘들면 애미한테까지 이렇게 해.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응? 착한 아이가 왜…….”

    할머니의 떨리는 주름진 손이 사정하듯 아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러나 남자는 진절머리난다는 듯 바지를 털고 언성을 높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내 자식들이 낯선 외국에서 돈이 없어서 학비를 못 내! 엄마가 죽었어야지. 그랬으면 보험금으로 빚도 갚고 나도 거기 가서 우리 식구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다 망쳤어!”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서럽게 흐느끼기만 하는 할머니의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제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잔인한 말에 수아의 숨통까지 턱 막혀 왔다.

    죽었어야지, 그 한 마디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번뜩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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