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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화 (9/100)

9화

남자가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 그를 보고 있자니, 지금 불이 났다는 것 자체도 실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연기에 질식하여 헐떡대는데 그녀와 달리 화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 남자는 사람이기나 할까?’

바닥을 짚고 기를 쓰며 일어서려던 그녀는 시야가 핑 돌아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남자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무너지는 몸을 재빨리 받아서 부축했다.

뿌리치려 했지만 화희가 손바닥으로 수아의 눈을 덮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의식이 아득해지려 했다. 찰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사지에 몰린 그녀를 보며 웃던 꿈속의 남자와 지금 박화희의 미소는 너무나 똑같았다. 그녀의 불행을 만족스러워하는 집요한 눈빛까지도.

“이거 놔요!”

일어서며 자신을 끌어안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던 수아는 현기증이 나서 힘없이 쓰러졌다. 화희가 그녀에게 내쳐진 손을 내려다보면서 부드득 이를 갈았다.

우지직- 가까운 곳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현관 밖에서도 불길이 모든 것을 잡아먹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수아는 스스로 보호하듯 몸을 웅크렸지만 남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화를 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수아가 기침을 터뜨리자 길게 한숨을 내쉰 화희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믿어 주면 좋았잖습니까. 진작 내 청을 들어주었으면 이런 험한 일은 안 겪었을 텐데.”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그를 보며 수아의 의식이 침잠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그의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안쓰럽다는 듯 씁쓸하게 떠오른 미소가 화염의 빛으로 붉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 * *

‘당신이 싫습니다. 그러니 제발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죽여주세요.’

‘비는, 나의 신부는 죽을 수 없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한은.’

꿈이 마구 뒤엉켰다. 마음에 증오와 혐오만이 가득 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 마음을 잘라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제발…….”

수아는 간절히 중얼거리다 겨우 악몽을 찢고 정신이 들었다.

“민수아 씨, 이제 정신이 드세요?”

누군가 그녀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와 곤혹스러웠으나 수아는 코끝에 풍기는 약 냄새와 손목에 꽂힌 링거로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1인 병실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간호사가 재차 부드럽게 물었다.

“여기에 왜 오셨는지 기억나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숨통을 틀어막던 시커먼 연기도 떠올랐다.

그래, 불이 났었다.

소스라친 수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요양원에 불이 났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모두 무사하세요. 현재 다른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세요.”

그녀의 몸을 도로 눕힌 간호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는 여기에 누가 입원시킨 거죠?”

“요양원 관계자라고 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검사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어서 곧 퇴원하실 수 있으세요.”

“제가 얼마나 있었어요?”

“꼬박 하루 동안 의식이 없으셨는데 쇼크로 인한 실신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호사가 나가고 큰 병실에 덜렁 혼자 남게 되자 수아는 흰색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들 무사하다니 천만다행이다.

나도 목이 칼칼한 걸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고.

그녀가 불이 난 걸 알았을 때 이미 요양원의 본채 병동은 하나의 거대한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자던 별채보다 먼저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런 큰 화재에 인명 피해가 없는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크게 안도하고 나니 두서없는 질문이 안에서 맴돌았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걸까. 화재는 그의 말대로 방화범의 짓일까? 난 정말 그 방화범과 맞닥뜨려서 죽을 뻔…….

“……!”

문이 너무 자연스럽게 열려서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침대 위로 긴 그림자가 져서야 수아는 고개를 들었다.

문을 닫고 기대서 팔짱을 낀 장신의 남자가 수아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

이불을 움켜쥔 수아가 대답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한숨을 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만히 있던 수아는 그가 내민 손이 제 뺨에 닿을 때쯤에서야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허리를 숙여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화희가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왜 날 무서워합니까? 나는 민수아 씨의 목숨을 구했는데.”

“……혹시 내 방까지 불이 번지도록 기다렸어요?”

수아가 망설이며 묻자 그의 길고 짙게 뻗은 눈썹이 크게 휘었다.

“민수아 씨가 나와 가기 싫다면서.”

“뭐라고요?”

“물러설 데가 없을 때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기다렸습니다.”

“그건 일부러 내가 죽기 직전까지 기다렸단 뜻이에요?”

수아는 그의 담담한 말투에 눈을 치떴다. 하지만 박화희가 먼저 싸늘한 눈빛을 가라앉히고 눈을 돌리자, 갈 곳 잃은 화를 안으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둔 그가 낮고 느릿하게 물었다.

“혹시 내가 불을 질렀다고 의심합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쪽이 내게 왜 이러는지는 의심은 돼요.”

“당신을 늦게 구한 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창밖의 오렌지빛 불빛에 그의 한쪽 뺨이 매끈하게 빛났다. 화염을 등지고 서 있던 얼굴과 겹쳐 보여서 움찔 떠는데 박화희가 문득 한 손을 뻗어 수아의 목을 감아 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빈틈이 없어서 고개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뿌리쳐지지 않았다. 묵직한 어둠을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내가 일 초만 늦어도, 단 한 번만 늦어도 당신은 죽어. 단지 그 이유였습니다.”

꼼짝 못 하고 눈만 크게 뜬 그녀에게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남자가 엄지로 목선의 살결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러니 제발 나를 믿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커다란 손은 부드럽고 또 섬뜩했다. 그가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수아는 용케 입을 열어 물었다.

“그게 아니라 왜 나를 살려주는 건지…….”

그러나 그 말은 끝맺지도 못했다. 남자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바싹대고 말했다.

“살아 있는 당신은 경이롭습니다. 이런 것을 내가 얼마나 원했는지 모를 겁니다.”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남자의 눈은 홍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맣고 또 깊었다. 입술에 스치는 그의 뜨거운 입김에 수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아 버렸다.

목을 어루만지던 남자의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딱딱한 손톱이 촉촉한 입술 사이의 점막 안쪽을 건드리자 등줄기에 싸한 감각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키스라도 할 것 같은 자세였으나 입맞춤보다 이를 세워 콱 물어뜯을 것 같은 폭력적인 기운이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수아는 그제야 박화희가 상당히 화가 난 상태임을 깨달았다. 이상했다. 왜 이제야 화를 내는 걸까. 그를 거절한 당시에 화내지 않고서.

“아직도 내가 해칠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나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데도.”

수아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면 남자가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화희가 칭찬하는 것처럼 손등으로 볼을 몇 번 쓰다듬고 천천히 목을 놔주며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하루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당신은 기억할 수 없는. 그러니 반드시 살아서 나와 그 하루를 지내 줘요.”

그의 손이 멀어질수록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던 몸이 조금씩 풀려났다. 동시에 억눌린 숨이 터져 나와 숨을 몰아쉬는데, 허리를 곧게 편 그가 힘을 주어 말했다.

“솔직히 민수아 씨가 내 말을 따라주지 않는 것이 편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기니까. 무슨 방법을 쓰든, 난 당신만 살리면 되거든.”

수아는 말없이 한참 화희를 쳐다보았다. 한참 뒤에 화를 내는 그도 이상하지만 자신도 이상했다.

그가 말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분노’라도 드러내는 모습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살려 주겠다’는 말이 더 감정 없이 들렸었다.

그를 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 이유 모를 섬뜩함과 거부감은 뭘까. 그가 말하는 ‘하루’는 목숨보다 안전한 것일까.

하지만 수아에겐 따로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녀가 선 곳은 죽음이 바다처럼 펼쳐진 막다른 절벽 끝이었다.

이번엔 일부러 그가 자신을 늦게 구해주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구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수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가늘게 떴던 남자가 크게 웃는 것처럼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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