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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화 (8/100)

8화

그래도 찬바람을 일으키며 쌩하니 가 버리는 그가 마음에 걸렸다. 망설이던 수아는 슬그머니 뒤따라서 요양원 입구까지 나가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어주는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평소 외관에서 귀티가 나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상당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저 외모로 좋은 대학에 재력까지 받쳐주다니. 과거 평범한 자신이었다면 상당히 들떠서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하긴 조건으로 따지자면 박화희는 어떻고. 수아는 일평생 그렇게 잘생기고 부티에 존재감 넘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기만 했다면 현대판 신데렐라급 인생 역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은인이니 다른 걸 요구했더라면 얼마든지 응했을지도. 왜 하필 서로의 인생이 걸린 결혼인지 다음에 만나면…….

‘미쳤나 봐. 다음에 만날 걸 당연히 여기다니.’

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담벼락 아래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 저 남자. 303호 할머니 아들과 닮았는데?’

할머니의 부탁으로 그를 찾아 어제 자택까지 방문했던 터였다.

수아는 좀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 했으나 남자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자 담벼락을 돌아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가 버린 자리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수아는 쫓아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핸드폰이 울리자 꺼내 들었다. 207호 서 할아버지였다.

-민 과장, 나 이불 좀 바꿔줘. 추워서 잠이 안 와.

“할아버지, 지금은 낮인데 주무시게요?”

-혹시 알아? 밤에 데이트라도 하게 될지.

김 할머니와의 삼자대면이 잘 풀리셨나. 속으로 웃던 수아는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요, 할아버지. 이불 같은 용품은 윤 주임님께…… 아, 아니에요. 제가 금방 올라갈게요.”

부서별 담당이 따로 있지만, 어르신들은 회계와 접수 담당인 그녀가 편한지 곧잘 민원을 요청하시곤 했다. 특히 서 할아버지는 단골이었다. 그녀는 통화를 끊고 요양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몸이 바빠야 잡생각이 없어진다. 서 할아버지의 이불을 바꿔드리는 김에 병동 휴게실 청소도 하기로 결심했다.

* * *

꿈이다.

늘 그렇듯 현실보다 선명하지만, 기억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살아 있지만 비참했다.

수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비단과 금사로 지은 혼례복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붉은 비단이 마치 ‘피’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시관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장신의 남자가 수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서 눈을 내리깔고 제 손만 꽉 움켜쥐었다.

‘날 보지 않는군요. 무서워서 그렇습니까?’

수아는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아프게.

너무 맑고 또렷해서 더욱 섬뜩한 검은 눈이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한참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곱고 귀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에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느릿하게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만지는 섬섬옥수는 몇 명을 도륙한 손이라곤 믿을 수 없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첫날밤 부부를 위한 사향보다 그에게 풍기는 피비린내가 더 진했다.

또 누굴 죽이고 온 걸까.

비단을 감상하듯 보드랍게 그녀의 턱을 쥐는 손길이 그녀에겐 얼음보다 차갑고 벌레보다 징그럽게 느껴졌다.

어제, 그는 저 손으로 귀족들의 목을 직접 베었었다.

참다못한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손을 밀어내자 눈살을 찌푸린 그가 턱을 잡아 고정시켰다.

‘비는 내가 손대는 것이 싫습니까?’

‘저는 당신이…… 역겹습니다.’

얼굴이 들려 억지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시나무처럼 오소소 떨었다. 유난히 살기로 번뜩이는 그의 눈은 살인귀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악에 받쳐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삼켜야 했다.

남자의 손이 화려하게 장식된 그녀의 가채를 움켜잡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뿐이지만 그와 마주 보는 일은 어떤 폭력보다 두렵고 끔찍했다.

남자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나의 신부입니다. 결국 나를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진득하게 닿았다. 손의 체온처럼 역시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끔찍하게도 피비린내가 났다. 고개를 돌려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신부였고 그저 남자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가솔들을 위해 스스로 택한 일이다.

남자의 입술이 이마를 지나 제 입술에 닿자 수아는 구역질을 참으면서 몇 번이나 주문처럼 되뇌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남자가 증오스러웠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이자 남편인 이 남자가.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다면, 그래서 이 남자와 함께해야만 한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자괴적인 소망만이 강하게 남는다.

차라리 날 죽여줘.

수아는 남자의 집요한 눈길을 참으려고 버둥거리다가 눈을 떴다.

“……!”

불을 켜 놓은 방 안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던 수아는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어떻게, 언제 들어와 있었는지, 남자는 침대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등받이에 양팔을 얹은 채 기대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꿈에서 덜 깬 것만 같았다. 눈앞의 남자는 방금 그녀가 증오하던 살인귀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제 눈을 믿을 수 없어진 수아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긴 어, 어떻게 들어왔어요?”

꿈의 연장인 게 두려운 건지, 한밤중 박화희가 제 방에 들어와 있다는 게 공포인 건지 제대로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화희가 작위적인 몸짓으로 제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시간이 없다고 했잖습니까.”

“시간이요?”

“무슨 냄새 안 납니까?”

“냄새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았다. 수아는 멍한 정신으로 유독 감정 없이 들리는 그의 말만 따라 하다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 내가 심하게 코를 찔렀다. 그리고 방안은 뿌옇게 연기가 차 있었다.

불?!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연기가 가득 찼을 뿐 불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는 내부가 아닌 현관문 밖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어, 어디에서 불이 난 거죠? 아니, 그보다 신고부터…… 해, 핸드폰이 어디 갔지?”

수아는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이리저리 허둥댔다. 그러다가 요양원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이 닿았다.

‘어르신들부터 피신시켜야 해!’

그녀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문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기척도 없이 움직인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늦었습니다.”

“뭐, 뭐가요?”

“이 방에서 나갈 방법은 없어요. 이미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미 늦었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어쩔 줄 몰라서 눈만 깜빡거리던 수아는 매운 연기에 기침을 터트렸다. 한 번 기침을 시작하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폐가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워서 허리를 꺾은 채 기침을 토해 내는 그녀에게 화희가 애써 무릎까지 굽혀서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그러게 일찍부터 내 말을 들었으면 좀 좋습니까.”

“흐윽, 사,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당장 본인 걱정부터 해야지.”

바로 앞 남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밀려들었다. 격한 기침에 지친 수아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숨이 가빠 헐떡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창문 밖에 조명이 켜진 것처럼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비웃는 것처럼 입술을 비튼 박화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번에 가져간 민수아 씨 죽음이 왜 그리 더러웠는지 알겠습니다. 당신은 우연히 마주친 방화범에게 살해당할 예정이었나 봅니다. 그것을 막았더니 대신 화염이 당신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 드는군요.”

“대체 무슨 말을…….”

수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끔찍한 말을 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수아가 깨지 않았다면 박화희는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불길이 그녀를 덮칠 때까지.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이 남자는 불이 난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여기까지 왔을까. 이 상황에서 왜 나를 비웃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한 걸까?

박화희의 서늘한 얼굴이 꿈속의 남자와 겹쳐졌다. 사람에 대한 감정과 동정을 느끼지 못하던 눈빛과 표정이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수아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민수아 씨를 데려가려고.”

“날 데려간다고요?”

“고작 화염 따위에 당신을 빼앗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화희가 답하면서 미묘하게 웃었다. 마치 이 말을 하려고 기다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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