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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7화 (7/100)

7화

잠시 후, 수아의 가방을 들고 돌아온 화희가 그녀 앞에 우뚝 서서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남자의 존재감이 크게 와닿기 시작했다. 그를 다시 보자 처음 봤을 때보다 충격은 덜 했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흠잡을 데 없이 잘 차려입고 정중한 말투를 쓴다 해도 폭력적인 행동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째서 사고 때마다 나타날 수 있는 거지? 마치 날 쫓아다닌 것처럼.

수아는 안도감과 불안함이 뒤섞인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뒤늦게 화희가 제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받아들며 겨우 말을 끄집어냈다.

“고마워요. 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고맙다니, 그럼 나와 하겠습니까?”

“뭘요?”

“결혼.”

“…….”

“방금 미친놈으로 안 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남자가 겁먹은 수아의 얼굴을 훑더니 답답하다는 듯 제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혀로 핥았다. 불만에 찬 아이 같은 행동인데도 남자가 그러니 묘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놈이야! 어서 체포해!”

곧 한 무리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계단 아래 기절한 남자를 에워쌌다.

잠시 그를 훔쳐보던 수아는 흠칫해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사건을 지켜본 시민 몇몇이 다가와 화희를 손가락질하자 경찰들이 둘을 돌아보았다.

남다른 존재감은 그녀만 느끼는 것이 아닌 듯 화희를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은 경찰이 다가오려고 했으나 슈트 차림에 금테 안경을 낀 누군가가 불쑥 막았다. 차 사고 때 흰 차를 몰고 왔던 남자였다.

소란이 거슬린다는 듯 힐끗 주위를 둘러본 박화희는 혀를 차고서 툭 내뱉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 그럼 전 정말 괜찮으니까 가 보셔도…….”

“민수아 씨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할 테니까.”

믿을 수 없다는 수아의 표정을 본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기(死氣)가 당신에게 환장했거든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 가리지 않고 민수아 씨를 잡아채려고 안달 난 걸 보면.”

“사기요? 그쪽 말대로라면 난 결국 죽어야 한단 뜻인가요?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요?”

“살아야만 이유도 알아낼 수 있을 텐데요.”

너무 끔찍했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 거지? 수아는 남자의 뚫어질 듯 강한 시선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겨우 가라앉았던 두려움에 무기력해졌다.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살려면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당신과 결혼이요?”

“그게 싫으면 내 집에서 나와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뭐, 뭐라고요?”

“빌어먹을.”

패닉에 빠진 수아에게 시선을 떼지 않던 화희가 갑자기 욕설을 뱉었다.

갑작스러운 욕설에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자 허공을 노려보던 그가 제 손가락을 이로 깨물었다. 그리고 검붉은 피가 흐르는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엄마야, 놀란 수아가 채 나오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려 했으나 화희는 제 피범벅이 된 손가락을 벌어진 그녀의 입안에 쑥 집어넣었다.

혀끝에 닿은 긴 손가락에 기겁한 수아가 입을 다물기 전 잠깐 사이에 입술 안쪽 점막을 훑고 혀를 건드리며 피를 묻히고 나왔다. 닿은 순간은 짧았지만, 키스처럼 부드럽고 기묘하게 저릿한 느낌이 더욱 섬뜩했다.

“읏! 이게 무슨……!”

수아가 뒤늦게 그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피 맛에 침을 뱉어 내려고 했다가 순간 멈칫했다.

“삼켜요.”

박화희가 그런 행동을 했다간 또 피를 먹이겠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대놓고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눈빛이 어찌나 싸늘한지 움찔한 수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비릿한 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실내에 웬 바람인지 의아해하기도 전에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발밑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느낌 같기도 했다. 수아는 숨이 막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숨통이 트였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려 했으나 화희가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것으로 시간은 잠시 벌었지만 그뿐입니다. 죽음은 다른 형태로 다시 찾아올 테니까.”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에 수아는 반강제적으로 일어나고 나서야 짧은 사이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이를 악문 박화희가 부쩍 낮아진 목소리로 협박하듯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말 나와 결혼하는 것이 싫습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해도?”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는…….”

“시간이 없다니…… 까.”

수아는 자신을 구해준 남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기승전 ‘결혼’으로 끝나는 말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시각각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진 화희가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 캐물으려던 그녀는 말을 삼키고 급히 그를 살폈다.

“어디 아파요?”

“하, 당신의 죽음은 참으로 더럽군요.”

대답 대신 이를 악문 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남자가 돌연 휙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걸음마다 핏방울이 떨어졌다.

제 눈이 의심스러워진 수아는 눈을 부릅뜨고 핏자국을 살폈다.

어디를 다친 거지? 분명 방금까지 멀쩡했는데.

“괜찮으십니까?”

경찰과 대화 중이던 금색 안경테가 급히 그에게 다가가자 화희는 수아를 향해 고갯짓했다.

곧 금테 안경이 40대 남자 경찰 한 명을 대동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민수아 씨는 이만 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한 경위님께서 모셔다드릴 겁니다.”

수아가 화희에 대해 물으려 했으나 깍듯하게 인사한 금테 안경은 여지를 주지 않고 가 버렸다. 옆에 선 경찰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서둘러 그녀를 역 바깥으로 안내했다.

경찰차를 타고 오면서 뒤늦게 피를 뱉으려고 헛구역질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꺼림칙한 느낌과 의문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고 쫓기듯 요양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 * *

[오후 세 시경, **역 앞에서 서른다섯 살 이모 씨가 준비한 흉기로 여성들만 골라 무참히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그의 범행으로 총 다섯 명이 중태에…… 극도의 혐오 범죄로 가중 처벌…….]

수아는 너무 작게 틀어서 잘 들리지도 않던 뉴스조차 더 견디지 못하고 로비의 TV를 껐다. 정말 가까스로 무사했다는 걸 깨닫자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야만 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뉴스를 아무리 봐도 범죄자를 잡은 남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준 경찰은 박회희를 ‘박 이사님’이라고 부르면서 신분을 보증한다는 말만 했을 뿐 더는 알려 주지 않았다.

힘과 능력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날 구해 주는 거지?

메모지에 의문을 천천히 적어 보았지만 뭘 모르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질문이 끝도 없었다.

난 왜 죽어야만 할까.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예지 능력자? 종말 음모론자? 무력도 예사롭지 않고 경찰도 대우해 주는 걸 보니 역시 정부의 기밀 병기? 아, 안 돼. 너무 멀리 가잖아.

수아는 메모지에 단어를 적어놓고 천천히 번갈아 동그라미 쳤다.

근데 그 사람은 괜찮을까? 분명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피를 흘린 거지?

“다 늦어서 공부는 아닐 테고. 웬 깜지?”

불쑥 나타난 윤성이 똑똑 접수대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흠칫 놀랐던 수아는 윤성을 확인하고 숨을 참았다. 어제 일이 적잖게 충격이었는지 불쑥 나타나는 사람 그림자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얼른 메모지를 구겨버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언제 왔어?”

“저번에 뭘 놓고 가서 잠깐 들렀어. 온 김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접수대에 팔을 괴고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윤성이 인상을 쓰며 수아의 코앞에 뭔가를 바짝 들이밀었다. 제 핸드폰이었다.

화난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먼저 본 수아는 의도를 알 수 없어 핸드폰과 그를 멀뚱히 번갈아 보았다.

“응?”

“이런 일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번호 찍으라고.”

수아는 미심쩍은 눈길로 윤성을 살폈다. 시선을 살짝 피하고 귀 끝이 빨개져서 슬쩍 시선을 피한다. 설마 날 좋아하나, 의심이 들었다.

수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번호는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난 여기에 매일 있는데.”

“어제 월차 냈다며. 헛걸음했잖아.”

“이제 안 내. 요양원 밖은 위험하더라고.”

“뭔 소리야.”

윤성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것처럼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꽤 싸늘했다. 싹싹한 척 굴지만 이럴 때 보면 역시 성격이 보통은 아니었다.

“누가 아줌마랑 뭐라도 하자는 줄 아나.”

투덜거린 윤성이 휙 뒤돌아섰다. 미안해진 수아는 핸드폰 번호 따위야 아무것도 아닌데 알려 줄까 하다가 참았다. 당장 내일조차 앞일을 알 수 없는 자신과 앞길이 창창한 윤성이 엮여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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