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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4화 (4/100)

4화

아이들. 수아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특히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갓난아이는 아예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명치끝이 저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결혼을 꿈꾸기는커녕 남자도 제대로 못 만나 봤다. 소싯적 몇 번인가 했던 연애는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에 남자의 바람이나 이상한 우연으로 꼬여서 어긋나기 일쑤였다. 지금은 오히려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면 그마저도 제 사고에 휘말릴까 두려웠다.

<나와 결혼해요.>

그런 위험천만한 자신에게 다짜고짜 청혼했던 남자가 문득 떠올랐다.

처음 본 자신한테 반했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데 살려면 결혼하라니. 무슨 프러포즈를 그렇게 무섭게 한담. 생애 처음 받은 프로포즈가 그딴 식이라니. 그래도 살며 본 남자 중에 제일 잘생겼으니…… 다행인가?

수아는 남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물음표로 머릿속이 가득 차는 것 같아서 애써 생각을 지웠다. 그 잘생기고 기이한 남자를 한 시간 후에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다음 주에 반찬 더 가져올게. 요양원 밥은 어르신들을 위한 거라 젊은 애가 먹기엔 너무 밋밋하잖아.”

오늘도 엄마는 헤어지는 정류장에서 수아의 양손에 반찬과 김치가 담긴 보따리를 잔뜩 들려 보냈다.

때아닌 겨울의 뙤약볕에 양손 가득 든 짐은 엄마의 사랑만큼 무거웠다. 땅값이 싼 곳에 있는 작은 요양원은 버스 정류장과 멀어서 한 번 나올 때마다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수아가 빨간 불이 막 파란 불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아무도 없는 건널목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부아아아앙.

빨간 차가 엄청난 엔진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차는 방향도 종잡을 수 없이 들쑥날쑥 곡선을 그리면서도 정확히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미친 듯 덮쳐들던 차가 수아의 십 미터 앞에서 갑자기 급정거를 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운전자는 시커먼 연기가 날 정도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달려오던 속도에 등을 떠밀린 차체가 급속도로 회전하며 다가왔다.

놀란 수아가 뒷걸음질치는 사이 차는 순식간에 그녀 앞까지 미끄러졌다.

설마 죽는 건가? 그토록 버틴 삶의 허무함이 눈앞에 환영처럼 스쳐 가는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엔진 소리가 사납게 고막을 흔들었다. 반대편 차선에서 검은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검은 차 역시 정확히 그녀 쪽을 향했다.

어느 차도 피할 수가 없이 꼼짝없이 죽게 된 수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쾅!

포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덩달아 세게 내던져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쇠가 우그러지고 유리가 박살 나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편을 튕겨냈다. 타이어 고무가 탄 메케한 연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도 귀가 먹먹한 걸 제외하고 아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수아는 살짝 눈을 떠보았다.

빨간 차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검은 차가 그녀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빨간 차는 잔뜩 우그러진 채 저만치 밀려나 버렸다.

뒤늦게 달려온 검은 차가 그녀를 치려던 빨간 차를 막아준 셈이었다.

자신이 차에 치인 게 아니라 다리가 꼬여 넘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자 안도감에 힘이 빠졌다.

“으읏-”

서둘러 일어나려던 수아는 손을 헛디뎌 널브러진 김칫국물을 손으로 짚었다. 쇼핑백 속, 맨 위에 있던 김치 통이 엎어져서 빨갛게 버무려진 오이와 새빨간 국물을 도로 위에 토해내고 있었다.

달칵, 검은색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운전자의 완벽한 슈트를 올려다보는데 이미 놀라서 펄떡거리던 심장이 뚝 떨어져 내렸다.

설마 이 사람이 나를 구해준 거야?

믿을 수 없어서 시선을 올리자 넓은 어깨를 지나 길고 우아한 목덜미 위의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앞 보닛이 심하게 우그러질 정도로 박았는데 남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는 표정이 전혀 없는 얼굴로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을.

불과 몇 초였지만 남자는 몇 시간 동안 느껴질 정도로 지켜보다 낮게 물었다.

“다쳤습니까?”

“……네?”

그의 시선을 따라 붉은 국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제 손을 흘깃 내려다본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손은 엎어진 오이소박이 국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니요, 이건 김치가…….”

“…….”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그사이 수아의 얼굴을 쓸 듯이 훑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긴 팔을 그녀 쪽으로 쭉 뻗었다. 수아가 반사적으로 기겁하여 몸을 움츠리자 그의 검지가 이마 앞에 우뚝 멈췄다.

얼떨결에 제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 보았지만, 김칫국물만 묻었다. 당황하여 손을 살펴보는데, 남자가 싸늘하게 욕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빌어먹을.”

돌연 남자가 화를 내며 가 버리자 수아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성큼성큼 뛰듯이 걸어가 빨간 차의 덜렁거리는 앞 범퍼를 세게 걷어차 단번에 떨어뜨렸다.

막 터진 에어백을 해치고 비틀거리면서 나온 남자가 험악하게 욕을 뱉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며 혀 꼬부라진 소리가 잔뜩 술에 취한 듯했다.

“이런 씨발! 어떤 개새끼가……!”

“살인은 큰 죄지.”

그러나 욕설을 하던 덩치는 남자가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가자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혀를 찬 남자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움찔했던 덩치는 순간 기가 밀린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울컥한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살인? 무슨 개소리야! 시발, 당신이 길 한 가운데 멈춰있었잖아? 내가 죽을 뻔했…….”

덩치를 노려보던 남자가 돌연 엉거주춤 서 있는 수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네놈이 저분을 뺑소니치고 도주했지. 원래대로라면 이 차가운 도로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세 시간 만에 겨우 죽는다.”

내가? 수아는 너무 황당해서 눈만 깜빡였다.

덩치가 얼떨결에 그녀를 돌아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뱉었다.

“이거 미친놈 아냐? 죽긴 누가 죽었다고 지랄이야?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컥!”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기척도 없이 움직였다. 손날로 목을 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덩치가 쓰러지자 연이어 배를 걷어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인 남자가 공중으로 붕 떠서 저 멀리 등부터 쾅 떨어져 내렸다. 보통 사람의 무력이 아니었다.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힘에 수아는 놀란 숨을 삼킨 채 숨을 죽였다.

남자는 의식을 잃고 늘어진 덩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음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피비린내가 실린 것만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뜬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더 다가와 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급하게 뒤로 뺐는데 스치지도 않은 손의 냉기가 닿은 것 같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흰색 차 한 대가 검은 차 옆에 멈춰섰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급히 차에서 내린 금색 안경테를 쓴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으며 명령했다.

“정리해.”

무시에 익숙한 듯 군말 없이 안경테를 치켜세운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 기절한 덩치에게 가 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혼란스러워진 수아는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여전히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남자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기요.”

“잠시만 참아 주시겠습니까?”

“네? 뭘 참아…….”

남자가 손을 들어 수아의 말을 막더니 갑자기 몸을 숙였다. 뭐하나 싶어 쳐다보는데 그는 갑자기 그녀를 앞쪽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왜, 왜 이러세요?!”

졸지에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기게 된 수아가 비명을 지르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가볍게 들고 빠르게 움직이는지 항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멀쩡한 흰색 차의 조수석에 사뿐히 앉혀졌다.

“심각한 상처부터 치료하죠.”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 묵직하게 말해서 수아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자신은 죽을 뻔했던 것에 놀란 것을 제외하곤 매우 멀쩡했다.

“심각하다니요? 저는 멀쩡한…… 악,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돌연 제 엄지를 깨물어 피를 냈다. 보는 그녀가 다 아파서 소리를 질렀는데 남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엄지를 그녀의 입술 앞에 대고 명령했다.

“빨아요.”

“뭐라고요?”

“내 피를 먹어요. 상처가 나을 테니.”

“놀라서 혼자 넘어진 것뿐이지 멀쩡해요!”

남자가 인상을 쓰고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특히 입술을 쳐다보는 모양이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라 수아는 반사적으로 문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피, 피를 빨라니 미쳤어요?”

“싫습니까?”

“당연히 싫죠. 사람 피를 왜 먹어요? 제발 그러지 마시고 손가락 지혈부터 하세요. 그쪽이 더 아파 보인단 말이에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먹이고 싶은 걸 애써 참는 것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엄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수아는 제 입술에 가까워지는 손가락, 특히 검붉은 피를 경악해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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