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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3화 (3/100)
  • 3화

    졸지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희게 질린 수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보였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미술관의 그림을 감상하듯 꼼꼼한 눈길로 훑었다. 그리고 그에게 멀어지려고 뒷걸음치는 그녀에게 주문을 걸듯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살릴 거니까.”

    “나, 나를 살려준다고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누구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야 하는데 멈칫 멈춰선 수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남자가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피했다. 여차하면 도망칠 구석을 찾으면서도 잠시간의 침묵에 그녀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범상치 않아 보였고 살려주겠다는 그의 말은 삶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부추겼다.

    그래서 드디어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을 때 일말의 희망이라도-

    “나와 하면 됩니다.”

    “하, 하다니요?”

    어감이 이상했다. 가뭄에 새싹처럼 샘솟던 희망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황당해서 일그러진 수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남자가 다시 한번 고저 없는 말을 뱉어냈다.

    “결혼 말입니다.”

    “…….”

    “나와 결혼해요. 그리고 오래 삽시다.”

    그게 생사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희망이 꺼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절대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들켜서 놀림 받은 것처럼 수치심까지 들었다.

    “저기요. 결혼이 급하면 병원이 아니라 중매소를 찾았어야죠.”

    경악과 실망에 찬 수아는 입술을 깨물고 남자를 노려보다가 접수대로 돌아갔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더 상대하기도 싫었다. 여차하면 경비 벨을 누를 참이었다.

    “민수아 씨.”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협박하는 것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판국에도 표정이 없어서 조각 같은 외모가 비정상적으로 차가워 보였다.

    수아는 북받치는 화를 참다 결국 서랍을 뒤져 반창고를 던졌다.

    “이거나 붙이세요, 머리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안 가면 다음엔 머리 좀 고치라고 이걸 던져줄 테다. 수아는 비상벨에 손을 올린 채 안경용 스크루 드라이버를 들다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너무 검어서 반들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동시에 몸이 굳은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자 당황한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어찌나 눈꺼풀에 힘을 주었는지 눈앞에 작고 노란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선택해요, 죽든지 나와 결혼하든지.”

    노란 나비들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굳은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드라이버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있는 힘껏 쥐다가 어느 순간 힘이 빠져 툭 떨어뜨렸다.

    흠칫, 몸을 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한동안 잠잠하던 악몽이 다시 시작되어 심란하던 차였다. 정체 모를 남자까지 등장하자 수아의 마음은 뒤숭숭해졌다.

    하는 말만 보면 딱 미친놈인데.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외형과 권위 있는 태도가 매우 걸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종류 가려가면서 미치는 건 아니잖아. 처음 본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희망을 품은 나도 제정신은 아닌 듯하고.

    그런데 어떻게 내 일을 알까. 눈빛이 집요하게 느껴졌는데 사기꾼 같은 건 아니겠지?

    따지고 보면 누구나 죽는다. 가는데 순서 없다는 말도 있고. 그냥 그런 말로 넘겨짚은 건데 정곡을 찔린 것처럼 혼자 오버한 건지도 몰라.

    ‘도를 아십니까’ 같은 해프닝 정도로 넘기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수아는 밤새 씩씩대다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러다 핸드폰이 울려서 잠에서 퍼뜩 깼다.

    -민 과장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네? 아, 보호사님이시구나. 무슨 일이세요?”

    -502호, 윤 할머니께서 민 과장님 불러 달라고 새벽부터 성화시라서 부득이하게 깨웠네요.

    지금 간다고 전화를 끊고 나니 아침 여섯 시였다. 502호라면 수아를 가끔 ‘애기씨’라고 부르면서 굉장히 예뻐하는, 소위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였다.

    어릴 때 집에 큰 화재가 났었는데 주인집 딸이 당시 7살이었던 할머니를 구했더랬다. 윤 할머니는 수아가 그 주인집 딸을 닮았다면서 치매 증상이 올 때마다 늘 수아를 애타게 찾곤 했다.

    할머니를 뵌 김에 오늘은 머리 좀 해 드릴까? 뭐에 마음 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좋아하시는 양갱 좀 챙기고.

    그녀는 차라리 잘됐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502호 할머니는 수아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면서 끌어안았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면서.

    곁에 있던 요양 보호사가 반기면서 한시름 놓은 표정을 했다.

    “아무리 제가 달래드려도 무섭다고 우시더니 민 과장님이 특효약이네요. 근데 오늘 민 과장님 봉사 가시는 날이죠? 미안해서 어떡해요.”

    “이따 오후라서 괜찮아요. 제가 할머니 재워드릴 테니까 좀 쉬시고 오세요.”

    요양 보호사가 나간 후, 수아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한참 도닥였다. 그리고 진정이 된 할머니를 눕혀드리고 침상 옆에 앉아 가져온 빗으로 흰 머리칼을 빗겼다.

    “할머니, 오늘은 벼 모양으로 딸까요?”

    “애기씨가 해주는 건 다 예뻐.”

    “에이, 할머니가 뭘 해도 예쁘신 거죠.”

    가만히 누워서 수아를 올려다보는 할머니의 눈빛이 매우 깊었다. 아이처럼 혀 짧은 발음을 하지만 눈빛만은 그랬다.

    빗질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바로 잠이 들었다. 수아가 막 커튼을 치고 나오는데 식사를 마치고 온 김 할머니가 반겼다.

    “아이구, 우리 민 과장 왔네? 나 좀 물어볼 게 있어. 핸드폰에서 이건 어떻게 아들한테 보내?”

    “어? 어제 받으신 건데 왜 이제 물어보세요. 궁금한 건 전화로 바로 물어보시라니까요.”

    “바쁘자네. 원장이 맨날 부려먹드만.”

    “그건 그래요. 이번에 연봉 안 올려주면 밥 두 배로 먹으려고요. 식비라도 왕창 써야지.”

    “그랴, 팍팍 먹고 살 좀 쪄. 살만 좀 붙으믄 미스코리아 뺨도 왕복으로 치겠구만.”

    여기 어르신들 중 제일 활기가 넘치는 김 할머니가 잠시 수아를 붙들고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그녀는 몸이 아픈 와중에도 늘 뭔가를 배우고 즐기는 성격이었다.

    숙식을 전부 같은 공간 안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요양원 어르신들은 식구나 다름없었다. 또래의 젊은 사람들과 단절된 대신 다른 계층의 지인을 얻은 셈이었다.

    맨 처음 요양원에 끌렸던 이유는 죽음과 닿아서였다. 막연하지만 죽음 그 언저리에 있는, 노인들이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지금의 수아에게 이분들은 승리자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을 사건, 사고, 아픔, 상처를 무사히 다 겪어낸 승리자.

    나도 꼭 할머니가 되어서 승리해야지.

    그래, 이제 그만 우울해하자. 할머니를 돌봐드리러 왔다가 오히려 힘을 얻었다. 병실을 나서던 수아는 새삼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때맞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엄마’라는 글자는 보기만 해도 안도감이 밀려드는 신기한 단어였다.

    그녀는 심호흡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이따 봬요.”

    * * *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바람에 꽃잎이 사르르 흩날리는 것처럼 아름답고 애틋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아이들은 좁은 운동장을 뛰면서도 깔깔깔 해맑게 웃으면서 수아와 옆의 송 여사에게 연신 손을 흔들었다.

    “꺄아아아……! 언니! 아줌마! 와아~!”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복을 받는다고 엄마에게 이끌려 달마다 찾아오는 보육원이지만, 도움을 받는 것은 수아 자신이었다. 아이들을 보면 불안하게 울렁거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넌 애들이 그렇게 좋으면 빨리 결혼을 해서 네 아이 낳을 생각을 해. 그래야 나도 사위에게 널 떠넘기고 맘 편히 살 것 아니니.”

    아이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던 수아는 ‘결혼’이라는 말에 흠칫해서 송 여사를 돌아보았다.

    늘상 엄마에게 듣는 말이지만 왠지 유난히 찔리는 건 어제 그 남자 때문일까?

    수아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잘생기고 괴상한 남자의 얼굴을 지우며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남자가 없네?”

    “그러니 좀 꾸며. 요즘은 얼굴만 예뻐선 안 된다며? 가슴에 뽕도 좀 넣고. 쓰질 않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작아. 아, 성격도 괴팍하지? 한창때 아가씨가 발랄한 구석도 없이 애늙은이 같아서, 원.”

    “…….”

    “그래, 네가 살 길은 딱 하나뿐이야. 네 드센 팔자를 누를 만큼 양기 센 놈을 보거든 콱 자빠뜨리는 수밖에.”

    “엄마, 혹시 새 아빠를 그렇게 꼬신 거야?”

    “어머, 무슨 소리야. 그이가 먼저 나한테 반해서 쫓아다녔어!”

    “완벽한 새 아빠가 뭐가 아쉬우셔서? 아, 알겠다! 엄마가 콱 자빠뜨려서 찜했구나.”

    “내 로맨스를 욕보이지 마! 흥, 그 나이 먹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 본 네가 뭘 알겠니.”

    엄마에게 불시에 연속적으로 디스를 당한 수아는 억울했지만 입을 다물고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11월 중순의 날씨는 따뜻했고 단풍은 아름답게 흩날리고 있으며 아이들은 꺄르르 잘만 웃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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