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 악몽 같은 그 남자
수아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바로 눈앞에서 옥외 광고판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었다. 어제 일처럼 생생했지만 벌써 3년 전 일이다.
처음 1년간은 회사도 다닐 수 없을 만큼 공황 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사람답게 잘 살다 가자고 결심하고 겨우 현실에 적응했지만, 때때로 현실은 눈을 빤히 뜨고 꾸는 악몽 같았다.
매번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나서는 악몽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악몽 속 그녀의 죽음은 어느 하나 곱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했는데. 왜 또 꾸기 시작하지?”
땀에 젖은 긴 머리칼을 다시 묶은 그녀는 제 방을 둘러보면서 진정하려고 애썼다.
방 네 면에는 절에서 받아온 부적이 붙여져 있고 곳곳 벽에는 십자가, 묵주, 염주 등이 걸려있었다. 딸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신성하다는 절이며 교회를 찾아다니는 엄마의 작품이었다.
비둘기 요양원. 이곳은 절망에 빠졌을 때 찾은 유일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여기에서 일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고 자신을 자신답게 지킬 수 있었다.
평화롭고 안온하기 그지없는 요양원에서 별일은 좀처럼 벌어지기 힘들다.
최근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봤자, 어제 208호 김 할머니가 307호 박 할아버지와 곶감을 나눠 드시는 장면을 보고 207호 서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던 일이 전부였다.
‘오늘도 모두 무사하게 해 주세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기도한 그녀는 꿈의 여운을 몰아내기 위해 재빨리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다년간 경험에 의하면 근심 걱정이 있을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였다.
“글쎄, 박 할배가 바람을 피운다니까? 어제는 박 할매와 사탕 나눠 먹고서 오늘은 왜 김 할매랑 곶감을 나눠 먹어! 앙? 다 늙은 할아방구가 아주 늦바람이 났어!”
아침나절에 빗자루를 들고 정원을 쓸러 나왔던 수아는 나오자마자 서 할아버지에게 붙들렸다.
할아버지가 어제에 이은 하소연하기 시작했지만 귓등으로 흘려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원 가득 여름에 피어야 할 델피늄 꽃이 초겨울 볕에 생생한 청보랏빛을 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근데요, 저게 왜 핀 걸까요?”
수아가 화원을 손가락질하자, 서 할아버지가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여기에 봄바람이라도 부나 보지, 박 할아방구가 불러일으킨 게야, 바람피우잖아.”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바람은 아닌데요. 고작 곶감을 나눠 드신 것뿐…….”
“고작 곶감?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남녀가 무얼 나눠 먹는다는 건 다른 것도 나눌 수 있단 얘기야!”
“에이, 할아버지. 요즘 말로 그건 오버세요.”
수아는 하소연이 길어질 것 같자 슬슬 뒷걸음질 쳤다. 서 할아버지의 김 할머니에 대한 짝사랑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무래도 안정치료 시간에 삼자대면하도록 요청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오늘 반찬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등어조림이에요.”
수아는 병동의 307호 창문을 정확히 노려보는 서 할아버지를 겨우 식당으로 보내놓고서 만개한 델피늄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가 참으로 좋아하는 꽃이어서 이상한 일이긴 해도 마치 선물 같아서 좋았다. 찬 바람에 시들지도 모르니 옮겨 심어야 하나 고민하던 수아는 일단 식당의 아침 식사부터 돕고 해결하기로 했다.
평화로운 요양원에서 수아의 일과는 간단했다. 혼자 쓰는 별채의 숙소에서 기상, 세면. 공동 식당에서 아침 식사, 로비 청소를 간단히, 그리고 접수대에 앉아 아주 가끔 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회계일을 처리하다 틈틈이 갖은 잡일을 했다.
오전 일과를 마친 후, 수아는 한참 금액을 따져보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번 달도 적자네.”
입실한 어르신이 전부 해야 10명인 이 요양원은 거의 망해간다고 봐도 좋았다. 작년, 당뇨 합병증을 얻은 원장이 운영에 소홀해지면서부터일 것이다.
이곳 아니면 갈 데가 없는데. 여기선 이상하게 별 탈이 없었는데.
수아는 새삼 아쉬워서 컴퓨터 모니터에 뜬 숫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적정한 온도가 맞춰진 로비 안에 꼭 찬바람이 분 것처럼.
창문이 열렸나 돌아보던 수아는 멈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완벽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접수대와 제일 가까운 테이블 위에 팔짱을 낀 채 걸터앉아 있었다.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나 기척을 듣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허름한 요양원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흰 피부에 눈이 아몬드처럼 긴 상당한 미형의 남자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상당히 커서 앉아 있던 수아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느릿하게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는 마주친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시선이 어찌나 강렬한지 매우 잘생긴 외모보다 눈빛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접수대에 서자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바람을 탄 것처럼 풍겼다.
“어,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를 넋 놓고 보고 있던 수아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한쪽 팔을 접수대에 올려놓고 기대는 바람에 부쩍 가까워진 시선이 부담스러워 수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내려다보는 게 싫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머리 하나가 차이 났다. 그녀의 찌푸린 미간을 본 남자가 손끝으로 매끈한 제 미간을 문지르며 느릿하게 답했다.
“입원하려고.”
“어느 분이요?”
수아의 질문에 남자가 답 대신, 눈을 내리깔아 눈길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여긴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원인데요.”
수아가 접수대에서 조금 멀어지려 애쓰며 얼떨떨하게 대꾸하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더니 픽 웃었다.
“요양해야 할 만큼 오래 살고 싶습니다만.”
“오래 살고 싶은 거라면 병원을 가시는 게 어떨까요? 저희는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어르신을 모시는…….”
“저한테는 커피 안 주십니까? 저분들에게는 주시던데.”
커피? 그녀의 말을 끊은 남자가 턱짓으로 로비 바깥을 가리켰다.
점심 식사 후, 삼각관계 어르신들에게 커피 석 잔을 타드렸었다. 그분들은 로비 바깥 의자에 앉아 원장님과 그룹 면담을 하고 있었다. 삿대질하는 서 할아버지의 목에 솟아난 핏대가 매우 울창해 보였다.
‘그건 한 시간 전인데. 설마 그때부터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수아는 섬뜩한 두려움이 들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재촉하는 것처럼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또 턱짓했다. 명령을 내리는데 익숙한 태도에 수아는 반사적으로 접수대 옆의 정수기에서 종이컵을 꺼내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남자가 접수대에서 비켜나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봐도 넓은 어깨에 군살 없이 슬림한 체형은 요양이나 입원과 거리가 멀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를 것 같진 않은데 일부러 떠본 건가? 뭐 하는 사람이길래?’
등에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지자 압박감에 수아의 동작이 점점 뻣뻣해졌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집요한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수아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남자가 이윽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곧바로 눈썹을 꿈틀하더니 컵을 검지 끝으로 밀어냈다.
보기도 싫다는 듯 최대한 탁자 끝으로 밀어내는 모양새가 자칫해선 떨어뜨릴 것 같았다.
“맛이 없으면 안 드셔도 되는데요. 다른 차를 내올게요.”
은근 무안해진 수아가 슬쩍 말을 건네자 남자가 못마땅한 것처럼 눈썹을 추켜세웠다.
“다른 차가 있는데 굳이 이걸 주신 겁니까?”
“굳이 그걸 달라고 하셨잖아요.”
“굳이 이런 맛일 줄 몰랐으니까.”
말이 짧고 이상했는데도 목소리의 질량이 다른 사람보다 묵직해서 절로 긴장하게 됐다.
믹스 커피가 다 똑같지. 왠지 억울해진 수아는 컵에 가려는 제 시선을 억지로 남자에게 고정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대답 대신 남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수아의 호흡 하나, 눈썹의 움직임, 모든 움직임을 빈틈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그녀의 동그랗고 큰 눈매와 도톰한 입술을 보면서 희미하게 한숨을 내쉰 것도 같았다.
긴 침묵 끝에 남자가 뜻밖에도 부드러운 어투로 답했다.
“보고 싶어서요.”
“입원하실 곳을요? 말씀드렸다시피 손님께서 입원은 불가…….”
“민수아 씨, 당신 말입니다.”
“네? 저를 언제 봤다고요? 그보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놀란 수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오래오래 보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당신을.”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곧 죽을 거잖아요. 어쩌면 이곳의 누구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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