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1화 (1/100)

1화

당신의 흔적을 남기지 마십시오. 내가 읽을 수 있으니.

나의 비를 찾는 것은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으므로, 반드시.

반드시 내가 당신을 쫓지 못하도록.

Prologue

“네, 메일 보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마침 다른 일이 있어서 늦게 퇴근했어요.”

수아는 통화를 끊고 심호흡을 하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퇴근 후 한 시간 정도 지난 지금, 사무실엔 몇몇만 남았다.

자리를 정돈한 그녀는 자신의 블라우스를 내려다보았다. 30분 전 퇴근길 복도에서 어떤 남자와 정통으로 부딪쳐서 아메리카노 벼락을 맞았다. 그가 세탁비를 언급하며 명함까지 줬지만 회사에 찾아온, 그것도 간부 측 손님인 것 같기에 그냥 보냈다.

[HH재단]

수아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명함을 서랍에 대충 넣고 일어났다.

엄마와의 약속 시간은 늦었고 심하게 배도 고프지만 급한 오더를 해결해서 위쪽에 점수 땄으니 좋은 일이라 치지, 뭐.

마침 엘리베이터가 와서 뛰어 탔던 수아는 흠칫 놀라 다시 내렸다. 뒤늦게 [점검 중]이라고 뜬 화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점검 중인데 왜 문이 열려, 무섭게!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그녀는 다른 걸 타려다 그만두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요즘 일진이 안 좋으니까 조심해야 해.

오늘 물벼락은 한 건 했고, 가는 길에 남은 건 차 조심, 전기 조심, 불조심, 또……. 아, 이 건물은 튼튼한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건물인 걸로 아는데 아까 엘리베이터도 그렇고 갑자기 불안하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겪다 보니 없던 강박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평범한 일상이었다. 자상했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걸 빼곤 탄탄대로의 인생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큰 회사에 취직해 고속 승진으로 자리도 잘 잡았다. 내년엔 모아 놓은 돈으로 벼르고 벼르던 해외여행을 갈, 행복한 나날만 남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

오토바이에 치일 뻔하고. 계단에서 구르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질 뻔하고. 떨어진 화분에 맞을 뻔하고.

자잘한 사고는 우연이라 여기고, 연속된 우연은 운수가 사납다 치려 해도, 불운의 그림자는 점차 일상을 크게 뒤흔들었다.

탔던 버스가 트럭과 충돌하고 전선이 끊어져서 감전될 뻔했다. 심지어 저번 주에는 출장 가기로 했다가 취소된 비행기가 기계 결함으로 불시착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지금, 어느 한 군데 부러지지 않고 성한 게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씨, 몸 사리다가 힘들어 죽겠네.’

계단은 무려 23층,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다. 수아는 무사히 내려가는 것만 집중하면서 갑갑한 비상계단을 힘들게 빠져나왔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오자 길거리를 망연히 쳐다보게 됐다.

막연한 두려움이 불시에 찾아 왔다.

버스를 타려다가 차에 치이면 어떡하지? 이렇게 죽을 수 있나? 저렇게 죽을 수도 있나? 일어날 수 있는 죽음의 변수를 계산하다 보면 그냥 길바닥에조차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다.

한창때, 저 멀리 수평선으로 보여야 할 죽음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구체적으로 닥친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하면 될 텐데 이렇게 잡힐 수 없는 불운 같은 건 어떡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집에 처박혀서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아니, 집도 안전하지 않다. 저번 주에 누전으로 침실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지금 거실에서 텐트 치고 자는 신세인데.

안 돼. 이렇게 살려고 악착같이 공부만 하고 일만 한 게 아니야. 수아는 익숙해지려는 공포를 몰아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나쁘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니까 지금 행복하려고 사는 거지, 나중에 행복하려고 지금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면서 깨달은 삶의 신념 같은 것이었다.

그래. 당장 엄마를 만나러 가자. 오는 길에 시간 되는 친구와 치맥도 하고. 그리고 또…….

“민 과장님, 이제 퇴근하세요?”

“아앗! 네?”

혼자 주문처럼 중얼거렸던 수아는 누군가 말을 거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다른 팀 김 대리가 동료 일행과 함께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하하. 저희끼리 조촐하게 회식하러 가는 길인데요. 민 과장님도 시간 되면 같이 가실래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쓸어넘긴 수아는 아쉬운 척 김 대리에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아쉽네요. 대신 내일 제가 기획2팀 분들께 점심 살게요. 이번 협업 프로젝트 건으로 답례하려고 벼르고 있었거든요.”

“안 그래도 저희 부장님도 민 과장님이 중간에서 너무 열일하셨다고 따로 뵀으면 하시던데요. 그럼 아쉽지만, 내일 뵐게요.”

일행에게 인사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걷던 수아는 잠시 멈칫했다.

아, 맞다. 아까 보낸 메일 이야기를 해주면 좋았을 텐데. 막 멀어지는 김 대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쫓아갈까 말까 고민하려던 그녀는 바로 앞에 키 큰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엄마야!”

놀란 수아는 황급히 물러서다가 넘어질 뻔한 데다 핸드백까지 떨어뜨렸다.

그녀가 핸드백을 주우려고 숙일 때까지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우뚝 선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얼핏 봐선 잘생겼는데 하는 행동은 꽤 무례했다. 장신으로 시선만 내려 그녀를 쳐다보는 눈길이 묘하게 따가웠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야? 비켜주든가 사과를 하든가…… 어? 근데 이게 뭐지?

일어서려던 수아는 멈칫했다. 핸드백 아래 검붉은 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시선으로 따라가다 남자의 늘어뜨린 길고 흰 손가락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세히 보니 흰 셔츠의 소맷자락까지 적시고 있는 건 피였다.

다친 건가? 당황한 수아가 막 그를 올려다보려던 순간이었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갑자기 시야가 깜깜해졌다. 거대한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그들의 머리 위를 까마득히 덮쳤다.

“피, 피해요!”

다급히 외친 수아는 남자를 제 뒤로 밀치려고 손을 뻗었다.

쾅,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리는 진동이 일었다. 흙먼지와 파편들이 태풍처럼 밀려들면서 귓가에 삐이- 이명이 일었다.

거센 바람에 떠밀려 넘어졌던 수아는 기듯이 일어나서 앞을 넘겨보았다. 처참한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 말도 안 돼…….”

그녀가 서 있던 거리는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대한 광고판이 구겨져서 길 한복판에 처박혀 있었다. 그 아래 깔린 사람들의 형체가 얼핏 보였다. 주위로 금속판의 부서진 잔해에 다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악! 사, 사람들이!”

비명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제발 살려주세요! 사,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제 비명만 머리를 울려댔다.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참혹한 광경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언제쯤 이 악몽 같은 상황은 끝이 나는 걸까.

제발 멈춰주세요. 제발 그만.

수아는 눈을 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빌고 또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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