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장
***
점심 식사 시간이 돌아왔다. 아침에 수확한 양배추와 순무로 만든 요리가 식탁에 올라왔다. 그러나 일리아는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식당에 내려오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카르한은 좋아하는 양배추 샐러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조용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세쌍둥이는 방으로 올라왔다.
“다들 앉아봐.”
엘로드의 말에 헤이든만 자리에 앉았다. 라울이 정신 산만하게 몸을 움직이자 엘로드가 짜증 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할 거라고.”
“뭔데?”
“엄마 아빠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음…….”
뺨을 긁적이는 라울을 대신해 헤이든이 말했다.
“형들처럼 싸웠나 봐.”
라울과 엘로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둘 다 헤이든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평소에 태평하기만 하던 라울이 걱정되었는지 슬쩍 물었다.
“……어쩌지?”
“생각 중이야.”
엘로드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끙끙거렸다. 이렇게나 어려운 문제는 처음이었다. 지금껏 일리아와 카르한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나서자!”
헤이든이 소리치자 라울과 엘로드가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래. 우리가 도와줘야겠어.”
엘로드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라울이 성격 급하게 문을 열었다.
“엄마한테 먼저 가보자.”
아이들은 곧바로 일리아의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일리아가 아이들을 맞이했다.
“점심은 잘 먹었니?”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라울은 본래 목적도 잊어버린 채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재잘거렸다. 엘로드가 라울의 옆구리를 쿡 찔러서 입을 다물게 한 후에 말했다.
“오늘 야채가 많이 나왔는데, 아빠가 거의 다 남겼어요.”
일리아가 움찔했다.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빠한테 저녁은 잘 먹으라고 전해주렴.”
“엄마는 저녁 안 먹어요?”
“별로 생각이 없네.”
“알겠어요.”
세쌍둥이는 곧바로 일리아의 침실을 빠져나와 카르한에게 갔다.
“아빠!”
문이 열리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쌍둥이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니?”
“방금 엄마 만나고 왔어요.”
내내 처져있던 카르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라울은 방금 일리아가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저녁 먹으래요.”
“……지금?”
“바보야. 단어를 빼먹었잖아.”
라울을 타박한 엘로드가 말을 정정했다.
“저녁은 잘 먹으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카르한은 다시금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말에 숨겨진 의미는 ‘나는 저녁도 안 먹을 거예요.’였다.
“엄마는…… 화난 것 같아?”
카르한이 조심스레 묻자, 세쌍둥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라울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카르한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뽑아버리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카르한은 후회 가득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시 고개를 든 카르한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한테 저녁은 거르지 말라고 전해주렴. 그리고…… 아빠가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전해줄게요!”
아이들은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일리아의 침실로 뛰어갔다. 복도를 걷던 고용인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도련님들! 뛰면 안 돼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오늘만 봐줘!”
복도를 힘껏 달린 아이들은 일리아의 침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리아에게 카르한이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일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네…….”
일리아는 화병에 꽂힌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 출근하기 전에 카르한이 직접 갈아놓고 간 꽃이었다.
“이유 없이 꽃을 꺾을 사람이 아닌데.”
혼잣말하던 일리아는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저녁은 같이 먹어야겠어.”
일리아의 혼잣말에 아이들은 다음 말도 듣지 않고 침실을 뛰쳐나와, 카르한의 집무실로 향했다. 세쌍둥이가 들이닥치자 방 안을 서성이던 카르한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을 맞이했다.
“엄마가 저녁 같이 먹자고 했어요!”
카르한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빨리 아빠도 대답해줘요.”
“우리가 전해줄게요!”
세쌍둥이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이 아이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세쌍둥이는 또다시 일리아의 침실로 뛰어갔다.
“엄마!! 아빠가 사랑한대요!”
일리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순식간에 일리아의 뺨과 목덜미에 붉은 물이 들었다. 세쌍둥이는 대답을 재촉했다.
“엄마는요?”
“……엄마도 그래. 벌써 보고 싶네.”
그리고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곧바로 침실을 나왔다. 부지런히 뛰어서 카르한의 침실에 도착한 아이들이 소리쳤다.
“아빠!! 엄마가 보고 싶대요!”
그 말에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르한은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새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일리아의 침실 앞에 멈춰 선 카르한이 숨을 갈무리한 후 노크하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쥔 일리아가 놀라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일리아가 먼저 두 팔로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카르한.”
카르한 또한 팔을 들어 일리아를 마주 안으며 속삭였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카르한은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일리아가 키우던 야생화는 벌레가 뿌리부터 갉아먹어서 죽기 직전이었다. 이러다가 옆에 있는 식물들까지 피해를 볼까 싶어, 뽑아버렸다고 그가 말했다. 일리아는 귓불을 붉힌 채 웅얼거렸다.
“자세히 듣지도 않고 오해했어요.”
“일리아가 아끼던 꽃인데, 말없이 뽑아버려서 미안합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부부가 된 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서투른 구석이 많았다. 다툰 적이 없어서 풀어나가는 방법도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앞으로는 기분이 나쁘다는 핑계로 대화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일리아는 결심했다.
잠시 눈을 마주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온기가 전해지며 부족함이 채워졌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지켜보던 세쌍둥이가 달려들었다.
“우리도!”
카르한이 아이들을 번쩍 들어올렸다. 한 명 한 명 뺨에 입을 맞춘 일리아가 속삭였다.
“라울, 엘로드, 헤이든. 고마워.”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침대에 함께 누운 그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올 때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올해 열 살이 된 세쌍둥이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블로든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특별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자, 종이에 적어두었으니 사올 수 있지?”
일리아의 물음에 세쌍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넣어둔 지갑과 지도를 건네준 일리아가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엄마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렴.”
일리아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현관 계단을 내려가자 프란체와 말렉이 아이들을 반겨주었다.
“도련님들, 오늘 저희가 엄호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순서를 지키는 병아리처럼 하나씩 마차에 올라탔다. 창문에 다다닥 붙은 아이들을 향해 일리아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요?”
“역시 뒤따라가는 겁니까?”
“잘하는지 봐야죠.”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특이한 전통이군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 사람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에요.”
“그럼 일리아도 했습니까?”
“당연하죠.”
아주 오래되었기에 잊어버릴 법하나, 아직도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어릴 적의 일리아도 부모님이 시킨 심부름을 하러 떠났다. 간소했던 첫 심부름은 재물운이 터져, 일리아가 시장을 반쯤 쓸어오며 막을 내렸다.
“애들도 금전 감각을 깨우칠 때가 되었죠.”
세쌍둥이는 지금껏 직접 물건을 구입해본 적이 없었다. 필요한 건 전부 저택에서 구할 수 있었기에, 어른들이 거래하는 것을 지켜본 게 전부였다. 그러니 첫 심부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많이 얻게 될 터였다.
번화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프란체와 말렉이 확 눈에 띄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뒤따라 걷는 중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종종걸음으로 아이들을 뒤쫓았다.
“책부터 사야 해.”
둘째 엘로드가 종이에 적힌 심부름 목록을 확인하고 말했다.
“서점을 가야 하는데, 여기가 우리 위치니까…….”
똑 부러지는 엘로드의 모습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까지 아기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나 자랐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세쌍둥이는 별 다른 문제 없이 서점을 찾아 나섰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건물에 몸을 숨긴 채 아이들을 따라갔다. 두리번거리던 아이들이 뒤돌아보려는 순간 일리아가 소리쳤다.
“숙여요.”
카르한은 재빠르게 커다란 몸을 구겼다. 비록 우체통으로는 몸이 전부 가려지지 않았으나 다행히 아이들은 못 본 모양이었다.
“휴, 들킬 뻔했…….”
안도의 한숨을 삼킨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맞은편 건물에 달라붙은 비올레와 클리프가 보였다. 일리아는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비올레와 클리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가 눈빛으로 물었다. 다들 왜 거기 있어요?
“어흠흠.”
클리프가 헛기침하며 일리아 쪽으로 다가왔다.
“우연이로구나.”
“볼일 보고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러 봤단다.”
비올레가 말을 덧붙이자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요, 뭐…….”
그 와중에 나름 변장까지 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일리아는 웃음을 삼켰다. 클리프는 콧수염을 붙였으며 비올레는 가발을 썼다. 슬쩍 봐서는 두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다.
“우리 천사들이 서점에 들어가는구나.”
클리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버린 세쌍둥이가 서점으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 서점으로 향했다.
“……엇?”
서점 앞을 지키던 프란체와 말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리아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서점 유리창에 옹기종기 붙어서 세쌍둥이를 지켜보았다.
“와, 책 많다.”
라울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블로든 저택 서재보다 작은 서점이었으나 사방에 책이 가득했다.
“우리가 사야 하는 책은 이거야.”
엘로드는 연신 두리번거리는 라울과 헤이든에게 책 제목을 알려주었다.
“세 권이니까 각자 한 권씩 찾아오자.”
엘로드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각자 흩어졌다. 서점을 누비던 라울은 금방 지루해졌는지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딴짓하기 시작했다.
헤이든은 책을 찾다가 바로 옆 칸에 마련된 예술 서적을 발견하고, 바닥에 앉아서 미술 책을 읽었다. 두 형제와 달리 엘로드는 착실하게 분야부터 찾은 후에 제목을 살폈다.
“찾았다.”
책장 위쪽에 찾던 책이 꽂혀 있었다. 엘로드는 책을 빼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들어도 닿지 않았다.
한참 끙끙거리던 엘로드는 이만 포기하고 점원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등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엘로드가 뒤돌아서자, 두꺼운 안경에 중절모를 쓴 남자가 책을 내밀었다.
“찾던 게 이건가요?”
얼떨결에 책을 받은 엘로드가 남자를 살피며 물었다.
“헤인리 삼촌?”
“…….”
헤인리는 낭패 어린 얼굴로 자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아본 거지…….”
잠깐 고민한 끝에 헤인리는 노선을 틀기로 했다.
“우연이구나. 서점은 무슨 일로 온 거니?”
“엄마 심부름 왔어요.”
“그래? 삼촌이 도와줄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엘로드가 또박또박 말하자 헤인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견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이었다. 엘로드는 책을 품에 안고 라울과 헤이든을 찾았다.
둘 다 딴짓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엘로드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다른 책을 찾아 나섰다. 볼일 보는 척하던 헤인리는 엘로드의 주위를 맴돌며 함께 책을 찾아주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집에서 봐요.”
엘로드의 인사에 헤인리가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딸랑, 문에 달아둔 종이 울리며 세쌍둥이가 서점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구경꾼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잠시 후 헤인리가 서점을 나오자,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헤인리가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것이 어른의 도리지요.”
“……일은요?”
“당연히 휴가 냈지.”
이런 중대사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냐며 헤인리가 웃었다. 일리아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만 내저었다.
어느새 다섯으로 불어난 그들은 세쌍둥이의 뒤를 밟았다. 지도를 보느라 바쁜 엘로드와 달리 라울과 헤이든은 이미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 엘로드가 길을 살피는 사이, 라울은 노점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군것질거리를 샀다.
헤이든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을 듣고 길거리 연주자들 앞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정신 차린 엘로드가 라울과 헤이든을 불렀다.
“야! 너희 뭐 해?”
돼지고기 꼬치를 먹던 라울이 멈칫하는 동시에 길거리 연주를 듣고 손뼉 치던 헤이든이 뒤돌아보았다. 양손에 꼬치를 가득 쥔 라울이 엘로드에게 꼬치 하나를 내밀었다.
“먹을래?”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지갑에 있는 걸로 샀는데?”
라울의 대답에 엘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심부름 할 돈인데, 그걸 쓰면 어떡해?”
엘로드가 잔소리하자 헤이든이 자백했다.
“나도 돈 다 썼는데.”
“뭐?”
“사람들이 연주 듣고 돈 주길래 따라 줬어.”
길거리 연주자에게 수중에 있던 돈을 전부 줬다는 거였다. 순식간에 엘로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일리아는 심부름비를 넉넉하게 주었다. 그 돈을 셋이 똑같이 나눠서 들고 있었는데, 벌써 반 넘게 써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뭐? 부족하다고?!”
“그럼 다른 거 못 사?”
그제야 라울과 헤이든도 상황을 깨닫고 심각해졌다. 잠시 말이 없던 세쌍둥이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프란체와 말렉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말렉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희도 가진 돈이 없습니다.”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에게 아이들을 직접 도와주지 말라고 못 박아두었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흠, 큰일 났네.”
별로 큰일 난 것 같지 않은 말투로 라울이 말했다. 그리고 정작 진짜 큰일이 난 것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었다.
“우리 천사들이 돈이 모자라다는데요?!”
아이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클리프가 호들갑 떨었다.
“가는 길에 돈을 뿌려둘까요?”
“차라리 경품에 당첨된 척하는 건 어떻습니까?”
클리프에 이어 헤인리가 의견을 제시했다. 비올레가 멀찍이 서 있던 수행원에게 말했다.
“심부름 목록에 적힌 물건을 파는 가게, 당장 매수해!”
카르한도 안절부절못하다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난리법석을 부리자 보다 못한 일리아가 나섰다.
“다들 진정 좀 해요.”
그들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볼 기회잖아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나서면 되죠.”
“……그것도 그렇구나.”
겨우 수그러든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눈으로 세쌍둥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클리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천사들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일리아는 못 말린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침착함을 되찾은 뒤, 다 같이 세쌍둥이를 찾아 나섰다.
“사과 사야 해.”
다음으로 사야 할 물품은 사과 다섯 알이었다.
“여기 과일 파는데?”
엘로드가 과일 가게를 스쳐지나가자 라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가격 비교하고 살 거야. 팻말에 적혀 있는 가격 봤으니, 이제 시장에 가보자.”
“시장은 왜?”
“시장이 더 저렴하니까.”
엘로드의 대답에 헤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은 그걸 어떻게 알아?”
“고용인들한테 미리 물어봤어.”
뒤에서 대화를 전부 들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했다.
“누구를 닮았는지 똑 부러지네.”
클리프가 중얼거리자, 일리아는 조용히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오르골 가게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점원에게 강매 당하던 카르한이 떠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일리아는 생각했다. 일단 엘로드는 카르한을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이다.
세쌍둥이는 시장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사과를 샀다. 자신감을 얻게 된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바게트를 사기 위해서 빵집을 찾아 나섰다. 위풍당당하게 빵집에 들어간 세쌍둥이가 바게트를 집어 들었다.
“5크로엘입니다.”
지갑을 전부 털었지만 3크로엘뿐이었다.
“혹시 3크로엘에 주실 순 없나요?”
“그건 안 돼요.”
단호한 대답에 엘로드는 바게트를 내려놓았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아이들은 곧장 다른 빵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른 빵집도 마찬가지로 깎아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벌써 세 군데에서 퇴짜를 맞게 된 아이들은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신속하게 각자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비올레와 클리프가 가게를 매수하러 간 사이, 일리아는 말렉에게 몰래 신호를 보냈다. 다른 가게로 유도하라고 말이다.
“도련님들. 저쪽에도 빵집이 있습니다.”
세쌍둥이가 동시에 말렉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데, 다른 가게보다 저렴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빨리 가보자!”
희망이 생긴 아이들은 곧장 말렉이 말한 빵집으로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빵집 주인이 아이들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바게트 얼마예요?”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가격을 묻자,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1크로엘입니다.”
세쌍둥이의 입이 벌어졌다. 다른 가게보다 무려 다섯 배나 저렴했다. 기뻐하는 라울이나 헤이든과 달리 엘로드는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왜 여기만 이렇게 싸요?”
뒤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완벽하게 매수된 빵집 주인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나치게 많이 구워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오늘만 특별히 이 값에 팔고 있답니다.”
“그렇구나.”
그제야 엘로드는 의심을 거두었다.
“우리 2크로엘이나 남았어!”
“빵 맛있겠다.”
라울과 헤이든이 방앗간에 온 참새처럼 빵집을 빙글빙글 돌았다. 행복한 고민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에 가게 밖에서 구경하던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오늘 애들 간식은 빵이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빵 하나씩 안고 나온 세쌍둥이는 심부름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몰래 지켜보던 블로든 가문 사람들도 다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간발의 차로 먼저 저택에 도착한 일리아는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아이들을 맞이했다.
“잘 다녀왔니?”
세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심부름으로 사온 물품을 확인한 후 아이들을 칭찬했다.
“전부 다 사왔구나. 잘했어.”
헤헤 웃던 세쌍둥이는 오늘 심부름이 어땠는지 저마다 재잘거렸다.
“앞으로는 좀 더 계획적으로 돈을 쓸 거예요.”
“형들이랑 가게 탐방하는 게 재밌었어요.”
“돼지고기 꼬치 맛있었어요. 또 먹고 싶다.”
그때 뒤에서 나타난 카르한이 아이들을 번쩍 안아들었다.
“얘들아, 간식 먹자.”
“오늘 간식은 뭐예요?”
아이들의 물음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카르한이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빵.”
***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가을 초입이 훌쩍 다가왔다.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 고민하던 끝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둘이서 근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틀 동안 가족들이 세쌍둥이를 돌봐주기로 했기에, 정말 오랜만에 둘이서만 보내는 시간이었다.
마차는 어느새 수도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빼곡하던 건물이 사라지고 울긋불긋한 단풍나무가 주변을 에워쌌다. 연신 감탄하던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에게 말했다.
“올해는 단풍이 빨리 들었네요. 예쁘지 않아요?”
그 말에 카르한이 자연스레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예쁘다는 단어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일리아를 보게 되었다. 시선을 느낀 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의 귓불이 단풍처럼 붉어졌다.
“아니, 단풍을 보라니까요…….”
“저는 단풍보다 일리아를 보는 게 더 좋습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질리기는커녕 늘 새롭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나름대로 뻔뻔하게 굴 수 있게 된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리아를 감상했다.
마차는 근방에서 가장 좋은 여관 앞에 멈추었다. 직원이 짐을 옮겨주는 사이, 둘은 방에 들르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산책하듯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곳도 관광지이긴 했으나 근처 마을이 더 유명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었다. 일리아가 느긋하게 구경하자 카르한이 옆에서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저건 곰 머리 바위라고 불립니다.”
“그러고 보니 진짜 곰처럼 보이네요. 당신은 어떻게 알았어요?”
“책에서 봤습니다.”
바쁜 와중에 공부까지 하고 온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문득 과거의 카르한을 떠올렸다. 데이트 해본 적도 없는 그를 위해 연애 지침서까지 사다주던 때가 있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알아서 척척 데이트 코스를 짜오곤 했다.
두 사람은 단풍나무 아래를 걸어, 작은 폭포가 있는 곳까지 갔다. 시원한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졌다. 워낙 한적한 곳이라 그런지 주위에 온통 물소리만 울려 퍼졌다. 한참 폭포를 감상하던 일리아가 속삭였다.
“평화롭네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인 카르한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 그런지 현실감이 떨어졌다. 저 멀리서 불어온 가을바람이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햇빛 아래서도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카르한은 결혼반지를 낀 손으로 일리아의 손을 잡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일리아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깍지를 낀 채 그가 중얼거렸다.
“저는 일리아를 만난 후로 항상 행복했던 기억뿐입니다.”
오랫동안 그를 발목 잡아온 나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퇴색해갔다. 일리아와 함께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카르한을 만들어주었다. 일리아가 카르한을 이루는 전부가 된 것이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아버지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일리아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깍지 낀 손은 맞물린 고리처럼 단단해졌다.
“부모가 되는 건 처음이잖아요. 조금 서투르면 뭐 어때요.”
“…….”
“다른 누가 뭐래도 제가 보기엔 당신은 최고의 아버지예요.”
그제야 카르한이 안도한 듯 눈매를 휘었다. 인적이 드문 단풍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쳐 온 과거부터 까마득하게 먼 미래까지. 시간이 많이 흘러도 분명 서로가 곁에 있을 터였다.
밖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같이 씻으려고 했으나, 함께 들어가기 불편한 구조였다. 카르한이 먼저 씻고 나온 후, 일리아가 욕실로 들어섰다. 기대감 때문인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처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속옷을 입고 가운을 걸친 후 욕실 문을 열었다.
“……!”
일리아는 바닥에 뿌려진 장미 꽃잎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테이블에 놓인 와인과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일리아.”
나직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카르한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목욕 가운을 제대로 동여매지 않은 탓에 탄탄한 가슴이 언뜻 보였다. 램프 조명 때문인지 굴곡진 그의 몸에 희미한 그늘이 드리웠다. 요즘 훈련할 시간도 많지 않을 텐데 여전히 완벽한 몸이었다.
일리아는 홀린 듯이 카르한의 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은 일리아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일리아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안자 떨어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밀착되었다. 한 팔로 허리를 두른 카르한은 다른 손으로 일리아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특별한 날이니, 준비해 봤습니다.”
귀에 꽂아드는 저음에 일리아의 허리가 떨렸다. 그저 분위기만으로도 벌써부터 열이 올랐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마른 수건을 가져와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완전히 털어주었다.
수건을 내려놓은 카르한이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일리아는 괜히 갈증이 나 와인을 홀짝였다. 와인을 한 모금 삼킨 카르한이 목욕 가운 끈을 슬쩍 당겼다.
앞섶이 벌어지며 반쯤 감춰진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세심하게 깎아 만든 듯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는 몸이었다. 속으로 감탄하던 일리아는 와인을 전부 마셨다. 일리아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와인 더 없어요?”
“남은 건 이것뿐입니다.”
카르한은 제 손에 쥐고 있던 와인 잔을 가리켰다. 고작 한두 모금 정도 될 법한 양이었다. 아쉬웠는지 일리아가 잔을 빤히 바라보자 카르한이 물었다.
“줄까요?”
“그럼 반으로 나눠 마셔요.”
카르한은 와인을 나누는 대신,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벌어진 입술을 타고 미지근해진 와인이 타고 들어왔다. 알싸한 향기가 입 안 가득히 맴돌았다.
일리아가 와인을 삼키자 카르한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와인에 젖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아준 그가 속삭였다.
“더 마시고 싶습니까?”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카르한이 적극적이긴 했지만 오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일리아가 두 팔을 뻗어 카르한을 껴안았다. 침대에 풀썩 누운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달아오른 열기와 짙은 와인 향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주위에 머물렀다.
“벌써 결혼한 지 십 년이나 되었는데…….”
일리아는 카르한이 입고 있는 목욕가운을 잡고 끌어내렸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가운이 침대 시트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일리아가 속삭였다.
“슬슬 넷째는 어때요?”
***
주말 오후, 세쌍둥이의 간식 시간이 돌아왔다. 각자 놀던 아이들은 간식 시간이 되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오늘의 간식은 무화과 잼이 든 스콘이었다. 빠른 속도로 간식을 먹어치우던 라울이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야, 너네 그거 알아?”
엘로드는 무시했고 헤이든만 라울을 쳐다보았다.
“일주일 후에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래.”
그제야 고개를 든 엘로드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어.”
라울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좋은 날인가?”
“바보야, 당연히 좋은 날이지. 유모한테 물어보니까 생일 다음으로 좋은 날이랬어.”
“와, 그 정도야?”
헤이든이 순진무구하게 감탄했다. 어깨를 으쓱인 라울이 엘로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우리도 엄마 아빠한테 선물을 주는 건 어때?”
“흠, 나쁘지 않네.”
엘로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라울이 활짝 웃었다. 사사건건 트집만 잡던 엘로드가 동의해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난 벌써 선물 정해뒀으니까, 너네도 빨리 생각해봐.”
헤이든이 포크를 쥔 손을 번쩍 들었다.
“꽃다발은 어때?”
“그건 안 돼. 꽃은 정원에도 많잖아.”
“엄마는 꽃을 좋아하는걸.”
“아빠도 분명 꽃 선물을 주실 거니까 다른 거 생각해봐.”
엘로드마저 반대하자 헤이든은 양 뺨을 부풀린 채 미간을 좁혔다. 끙끙거리는 헤이든을 바라보던 엘로드가 라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물은 어떻게 살 건데?”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부탁할 거야.”
“그건 네가 선물하는 게 아니잖아.”
엘로드의 일침에 라울이 멈칫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라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금껏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말하기만 하면 됐다. 그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라울은 헤이든과 마찬가지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자, 라울이 엘로드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저금해둔 돈이 있어.”
“그것도 결국 엄마 아빠 돈 아니야?”
“…….”
결국 엘로드마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세 아이들은 머리를 맞댄 채 고민에 빠졌다.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선물을 살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앓는 소리만 들려올 때 헤이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가 돈을 벌어서 사주자!”
“어떻게?”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보려고.”
헤이든이 해맑게 말하자 라울이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엘로드가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모두의 시선이 엘로드에게 향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엘로드는 무척 자신만만했다.
“일해서 돈 벌자.”
엘로드는 자신의 계획을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가만히 듣던 라울과 헤이든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자!”
성격 급한 라울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울은 곧바로 비올레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할머니!”
간만에 집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비올레가 자리에서 일어나 라울을 맞이했다.
“라울, 무슨 일이니?”
“저를 고용해주세요!”
비올레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라울을 내려다보았다. 라울은 설명도 건너뛰고 곧장 물었다.
“제가 이 방 청소하면 얼마 주실 거예요?”
“돈이 필요한 거니? 그럼…….”
비올레가 자연스레 백지 수표를 꺼내려 하자, 라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해서 받을 거예요. 그걸로 엄마 아빠 선물 사줄 거거든요!”
비올레는 장하다는 듯 라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럼 당연히 줘야지. 집무실 청소하면 10만 크로엘을 주마.”
10만 크로엘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라울은 고개를 내저었다.
“금화 하나만 주세요.”
“그래, 그래.”
“지금부터 청소할게요!”
라울은 어디론가 뛰어나가, 빗자루와 먼지떨이를 가져왔다. 비올레는 라울이 청소하도록 잠시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 있으니, 안쪽에서 웬 소음이 들려왔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아무래도 라울은 청소가 아니라 방을 파괴하러 온 듯했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소리가 끊기더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며 라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다 했어요.”
“그래?”
비올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본 비올레는 살짝 열린 서랍장에 비죽 튀어나온 러그 귀퉁이를 발견했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저기다 밀어 넣은 모양이었다.
“청소 잘했구나. 약속한 대로 수고비를 줘야지.”
비올레는 금화 한 닢을 라울의 손에 얹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금화를 쥔 라울은 세상을 얻은 듯 무척 행복한 얼굴로 집무실을 나왔다.
한편, 엘로드는 헤인리의 방으로 찾아갔다.
“삼촌.”
휴일을 맞아 방에 있던 헤인리가 엘로드를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꼬마는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삼촌이 하루 동안 저를 고용해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헤인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가 뭐라고 했니?”
“아니요. 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럼 당장…….”
“제가 벌어서 살 거예요.”
엘로드의 단호한 말에 헤인리는 눈썹머리를 좁혔다. 더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헤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 계약서 써야 하죠? 책에서 봤어요.”
똑 부러지게 말하는 엘로드의 모습에 헤인리는 웃고 말았다.
“너는 참…… 날 많이 닮았구나.”
헤인리는 엘로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류 서른 장씩 나눌 수 있겠니?”
“맡겨만 주세요.”
엘로드가 순조롭게 일을 따낸 사이, 헤이든은 바이올린을 들고 클리프를 만나러 갔다.
“아이고, 우리 천사.”
화초에 물을 주던 클리프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헤이든을 반겼다. 헤이든은 발치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펼쳐서 내려놓았다. 길거리 악사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할아버지, 바이올린 연주 듣고 싶지 않으세요?”
“오오, 직접 연주해주려고?”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으응?”
잠시 당황한 클리프는 빈 케이스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무엇을 주면 좋을까?”
“돈이요.”
속물적인 대답에 클리프는 눈을 깜빡였다. 벌써부터 예술로 돈을 벌겠다는 포부인가……! 우리 집안에 예술가가 하나 나오겠다는 꿈에 부푼 클리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헤이든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금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각자 돈을 모아온 세쌍둥이는 다시 모였다. 금화 세 닢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아이들은 머리를 맞댔다.
“이걸로 뭐 사지?”
“아까 생각해둔 게 있다면서.”
엘로드의 말에 라울이 뒷목을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별로인 것 같아.”
“설마 먹는 거 생각한 건 아니겠지?”
뜨끔했는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한 라울이 투덜거렸다.
“그럼 네가 말해봐.”
엘로드는 생각나는 게 없는지 침묵했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니까……. 이런 건 어때?”
구석에서 꼼지락거리던 헤이든이 의견을 내자, 라울과 엘로드의 눈이 반짝였다.
“괜찮은데?”
“그럼 그걸로 하자!”
아이들은 곧장 선물을 사다줄 사람을 물색했다. 아직까지 어른을 대동하지 않고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쌍둥이는 비올레에게 부탁해서 산 선물을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마침내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둘이서 근교로 여행을 떠났다.
엄마 아빠가 없는 그날 밤, 아이들은 램프 하나를 켜놓고 밤늦게까지 재잘거렸다. 두 손바닥으로 턱을 괸 헤이든이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가 좋아할까?”
“당연하지. 우리가 고른 건데!”
“너네 편지는 다 썼어?”
엘로드의 물음에 라울과 헤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울과 헤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엘로드는 두 사람 뒤에 서서 감시했다.
“거기 조사 틀렸어.”
“조사가 뭐야?”
헤이든이 묻자 엘로드는 설명해주는 대신 편지를 직접 고쳐주었다. 작문에 재능이 없는 라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리다가 겨우겨우 편지 반 장을 채웠다.
“다 썼다.”
라울과 헤이든이 뿌듯한 얼굴로 편지지를 접었다.
“이만 자자.”
세쌍둥이는 다시 침대에 주르륵 누웠다. 램프 불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이 들어찼다.
***
짧았던 여행을 마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블로든 저택 현관에 마차가 도착하자, 건물 안쪽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이들이 쏟아지듯 뛰어나왔다.
“엄마! 아빠!”
“다들 잘 있었어?”
일리아가 두 팔을 벌려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마차에서 선물을 꺼내온 카르한은 세쌍둥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빨리 들어가요!”
아이들이 일리아와 카르한의 옷자락을 잡고 이끌었다. 두 사람은 외출복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아이들 방에 들어왔다.
라울과 엘로드가 일리아와 카르한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헤이든이 옷장에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꺼내왔다. 잘 포장된 상자가 일리아와 카르한의 무릎에 놓였다.
“선물이에요!”
“선물?”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일리아와 카르한의 눈이 커졌다. 라울이 자랑하듯 말을 덧붙였다.
“일해서 번 돈으로 샀어요.”
“일이라니…….”
카르한이 당혹스러운 듯 아이들을 쳐다보자 하나씩 재잘거렸다.
“할머니 집무실 청소하고 받은 돈이에요.”
“저는 서류 정리해서 삼촌한테 수고비를 받았어요.”
“바이올린 연주해서 벌었어요!”
그 말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감동에 젖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의 눈동자에 서서히 희미한 물기가 차올랐다. 아이들을 꽉 안아준 카르한이 상자를 가리켰다.
“뜯어 봐도 될까?”
세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잔뜩 들뜬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똑같은 목도리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목도리를 꺼내자, 끄트머리에 자수로 이름이 박힌 꼬리표가 보였다.
아이들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조용히 목도리를 만지고 쓸다가 목에 둘러보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고맙다. 얘들아.”
그제야 아이들이 활짝 웃었다.
“편지도 썼어요!”
헤이든이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를 받게 된 일리아와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혀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목도리를 받았으니, 겨울에는 다 같이 눈을 보러 여행 갈까?”
“좋아요.”
“빨리 겨울 오면 좋겠다!”
일리아는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며 무척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카르한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
새벽 일찍 일어난 카르한은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말간 얼굴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침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에 도착한 그는 당장 봐야 할 서류부터 검토했다. 그중 야만족인 우르시오에게서 온 서신도 있었다.
야만족의 왕이 화친을 제안해온 뒤, 외교에 관심이 많은 현 황제는 카르한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야만족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카르한이 직접 외교를 담당했고, 그 결과 두 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국이 얻은 이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야만족이라 무시했던 아메르크 왕국의 문물은 제국에서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일으켰다. 왕국 음식이 귀족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 되었을 정도였다.
더불어 육로가 뚫리며 새로운 교역로가 열렸다. 더 이상 제국민들은 위험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수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귀족들은 카르한이 이룩한 성과를 칭송했다. 공작가 원로들 또한 공작령의 수익이 대폭 늘자, 카르한을 견제하지 않고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달리했다.
카르한은 우르시오에게 보낼 답장을 작성한 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새벽빛이 물러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펜을 내려놓은 그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카르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일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일리아, 아침입니다.”
“으음.”
“더 잘 겁니까?”
“일어날 거예요…….”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일리아가 웅얼거렸다. 카르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오늘 저는 아이들과 연못가에 갔다 올 겁니다.”
일리아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카르한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두 팔을 뻗어 일리아의 얼굴을 감싼 채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웠는지 일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못 가서 아쉽네요. 그래도 잘 다녀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도가 쿵쿵 울렸다. 세쌍둥이가 뛰어오는 소리였다.
“아빠!!”
“준비 다 했어요!”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세쌍둥이가 뛰어 들어왔다. 벌써 옷까지 갈아입고 가방도 멘 채였다.
“빨리 가요!”
라울의 재촉에 카르한은 일리아와 인사를 나눈 후 침실을 나왔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고용인에게 미리 준비시켰던 짐을 받았다.
가방을 멘 세쌍둥이와 카르한은 저택 뒤편의 연못가로 향했다. 단풍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깐 카르한은 아이들을 데리고 연못 앞에 앉았다.
“엄마랑 아빠가 여기서 데이트를 몇 번 했지.”
카르한에게 연못가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가 처음 블로든 저택에 방문했을 때 일리아가 데려온 곳으로, 그 후에도 종종 둘이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조용히 수면을 내려다보던 헤이든이 고개를 들어 카르한에게 물었다.
“여기 물고기 살아요?”
“그럼.”
“낚시 하고 싶다!”
라울이 소리치자, 카르한이 냉큼 낚싯대를 가져왔다.
“그럴 줄 알고 가져왔지.”
“와!”
엘로드와 헤이든은 카르한의 양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고, 라울은 아예 카르한의 등에 매미처럼 매달렸다. 세쌍둥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낚싯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끼를 달아서 연못에 찌를 던졌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 때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카르한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묵직한 것으로 보아 대어가 낚인 듯했다.
“아빠, 힘내요!”
아이들의 응원을 받은 카르한은 팔에 힘을 주었다. 수면을 가르고 무언가가 튀어 올라,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일제히 그 주위를 둘러싼 세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고기가 아닌데?”
카르한이 건진 것은 녹슨 장난감 배였다. 당황한 카르한이 장난감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왜 여기에…….”
카르한은 설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래전 일리아는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책을 읽는데, 스무 척의 배를 띄우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보자마자 따라하고 싶었죠.
그래서 가지고 있던 장난감 배를 전부 가져와 연못에 띄웠다고 했다.
-한참 동안 내버려뒀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국 전부 침몰해버렸어요.
지금 카르한은 20년 넘게 연못 밑바닥에 침몰해 있던 장난감 배를 건진 것이다. 장난감을 툭툭 건드려보던 라울이 중얼거렸다.
“연못에 왜 장난감이 있지?”
“오래전에 엄마가 잃어버린 장난감이야.”
“어른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요?”
헤이든의 물음에 카르한이 나직하게 웃었다.
“엄마도 어렸을 적이 있었으니까.”
카르한은 손수건을 펼쳐 장난감을 조심스레 감쌌다. 아마 일리아가 이걸 보면 무척 신기해하면서 좋아해 줄 터였다. 오늘 밤 잠들기 전까지 일리아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낚싯대를 든 카르한은 쌍둥이가 기다리던 물고기를 낚는 데 성공했다. 세쌍둥이는 양동이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실컷 구경했다. 물고기를 다시 연못에 풀어준 카르한이 물었다.
“이제 점심 먹을까?”
“네!”
세쌍둥이는 빠르게 돗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도시락을 여니 속이 푸짐한 샌드위치와 과일이 담겨 있었다.
“내 포도야.”
“먼저 잡은 사람이 먹는 거지.”
“라울, 엘로드. 싸우지 말고.”
카르한은 능숙하게 두 아이를 떼어놓고 각자 입에 포도를 넣어주었다. 그사이 헤이든은 포도 한 송이를 손에 넣고 혼자서 냠냠 먹었다.
식사를 끝낸 카르한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끈을 묶어 해먹을 설치했다. 완성되자마자 엘로드는 해먹에 누워 독서를 시작했다.
카르한은 미리 준비해둔 말뚝을 박고 천막을 펼쳐, 작은 막사를 만들었다. 목검을 든 라울이 막사 안에 들어가더니 혼자 군대놀이를 즐겼다. 마지막으로 연못가 고목에 매단 그네는 헤이든이 독점했다.
카르한은 헤이든이 탄 그네를 밀어주다가 라울과 칼싸움을 하는 둥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오후였다.
카르한은 잠깐 쉴 겸 돗자리에 앉아, 세쌍둥이를 구경했다. 얼굴은 참 많이 닮았는데 하는 짓이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여기까지 와서 각자 노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카르한은 아쉬움을 담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오늘 일리아와 함께 오지 못했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서로 시간이 맞으면 한 번 더 놀러 와도 좋을 듯했다.
머리 위에 뜬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주위는 빠르게 어두워졌다. 카르한은 장작더미를 쌓아 낙엽에 불을 지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하늘까지 닿을 듯 치솟았다.
그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세쌍둥이에게 고구마와 버섯 등을 구워서 나누어주었다. 모두가 부른 배를 부여잡고 돗자리에 누웠다. 깜깜해진 밤하늘에 물동이를 쏟기라도 한 듯 은하수가 길게 흘러갔다.
“저건 하프 자리야. 하프처럼 생겼지?”
카르한은 아이들에게 별자리를 하나씩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별자리를 보면서 방향을 찾는 법도 알려주었다.
“저 별은 이름이 뭐예요?”
헤이든이 가리킨 별을 확인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아직 이름이 없는 별인데, 헤이든으로 할까?”
“나도, 나도!”
“그럼 저 옆에는 라울. 왼편에는 엘로드라고 하자.”
“엄마는요?”
엘로드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침묵했다. 순간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생각났다. 어두운 곳에서도 유독 선명하던 눈동자는 카르한이 본 그 어떤 별보다 아름답게 반짝였다.
일리아의 눈동자를 떠올린 카르한은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평생을 헤매어도 그보다 반짝이는 별은 찾을 수 없을 터였다.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카르한이 조용히 속삭였다.
“엄마 별은 하늘에 없어.”
“왜요?”
“아빠가 가져갔거든.”
뜻밖의 대답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르한의 왼편에 누워있던 라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도 가지고 싶다.”
카르한은 팔을 뻗어 라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 거라서 그건 어렵겠는데.”
“그럼 아빠 별은요?”
“엄마가 가져갔지.”
그래서 둘 다 하늘에 없는 거라며 카르한이 웃었다. 헤이든이 미간을 좁힌 채 제 별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언제쯤 나도 별을 가질 수 있어요?”
“기꺼이 너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닥, 타닥 불씨가 꺼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이 물을 부어 불씨를 완전히 껐다.
“늦었으니까 이만 들어가자.”
“나중에 가면 안 돼요?”
“지금쯤이면 엄마도 돌아왔을 거야.”
카르한이 부드럽게 거절하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의 손에 램프 하나씩 쥐여 준 카르한은 곧바로 연못가를 빠져나왔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 사방이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리아의 마차를 확인한 카르한은 현관으로 들어왔다. 카르한과 아이들은 씻기 전에 먼저 일리아에게 인사하기 위해 침실로 올라왔다.
“일리아, 들어가겠습니다.”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 문이 먼저 열렸다. 문을 열어준 일리아는 잘 다녀왔냐는 인사도 하지 않고 카르한과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함을 느낀 카르한이 심각한 얼굴로 일리아를 살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일리아가 입을 달싹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라면 있긴 했는데…….”
카르한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미간이 좁아지자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분위기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당장 일리아를 곤란하게 만든 주범을 찾아내, 혼내 줄 기세였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일리아는 결연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카르한과 시선을 마주한 채 말했다.
“나 임신했대요.”
카르한은 충격 받았는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몸이 좀 좋지 않았거든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고요.”
일리아는 며칠 전에 꿨던 꿈을 말해주었다. 꿈속에서 일리아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갑자기 하늘에서 금화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금화 비에 파묻힐까 싶어, 어느 빈 건물로 피신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타조 알만 한 보석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놀라서 집어 들자 알이 깨지더니 환한 빛이 일리아를 집어삼켰다.
“아무래도 태몽인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의원을 불렀더니…….”
임신이었다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카르한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쌍둥이를 키우며 내심 넷째를 바라긴 했지만 속으로 단념했었다. 일리아를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미 새로운 아이가 찾아왔다면…….
“카르한.”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혹시 싫어요?”
“그게 아니라.”
카르한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이 복잡해서 잠깐의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저는 기쁘지만, 당신이 힘들까 봐, 그게…….”
“의원은 관리만 잘 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나보고 회복이 빠르대요.”
일리아는 팔을 뻗어 카르한의 손을 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그때도 당신이 도와줘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카르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약 카르한이 조금이라도 가정에 소홀했다면 넷째는 생각지도 않았을 터였다. 일리아는 아직 밋밋한 배에 그의 손을 얹게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넷째의 아빠가 된 소감은요?”
계속 말이 없던 카르한은 팔을 벌려 일리아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일리아의 뺨에 입을 맞춘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영광입니다.”
카르한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일리아가 마주 웃었다. 이렇게나 좋아해주니 역시 잘되었다 싶었다. 잠시 껴안고 있던 일리아와 카르한이 서서히 떨어지자, 잠자코 기다리던 헤이든이 물었다.
“동생 생기는 거예요?”
“그래, 내년에 동생을 볼 수 있겠네.”
일리아의 대답에 라울이 깍지 낀 두 손바닥을 뒤통수에 댄 채 중얼거렸다.
“벌써 두 명이나 있어서 필요 없는데.”
“너희처럼 사고 치지만 않았으면.”
“뭐? 내가 사고 친다고?”
라울과 엘로드가 투닥투닥 싸우는 사이, 헤이든이 일리아의 품에 쏙 안겼다.
“그럼 이제 나는 막내가 아닌 거죠? 동생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쏟아지는 질문에 일리아는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아직 성별은 몰라. 하지만 이제 헤이든도 어엿한 형이나 오빠가 되겠네.”
“나는 동생 좋아요!”
드디어 막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에 헤이든은 만족하는 듯했다. 밤이 늦었기에 세쌍둥이는 먼저 방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카르한은 서둘러 일리아를 침대에 앉혔다.
“다른 분들은 이 소식을 아십니까?”
“아직 말 안 했어요. 당신한테 가장 먼저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카르한은 잠시 말없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감격에 젖은 푸른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사실 넷째가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지금도 너무 기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치게 기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하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설레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카르한을 보며 일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넷째는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카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별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일리아가 원하는 것이 곧 카르한이 원하는 거였다.
“물론 아들이라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사랑해줄 거예요.”
아들만 넷이어도 재밌을 거라고 일리아가 키득거렸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무척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아무리 헤매도 찾지 못한 별이 일리아의 눈동자에 살아 숨 쉬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다시 육아를 하려니까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땐 어떻게 했나 몰라.”
일리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에 카르한은 벌써부터 의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부 제게 맡겨주십시오.”
***
일리아의 임신 소식에 저택이 크게 뒤집어졌다. 가족들은 경사 났다며 벌써부터 주책을 떨었다.
그날 이후로 장기 휴식에 들어간 일리아는 두 번째 임신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세쌍둥이를 임신했을 때와 달리, 처음 겪어보는 입덧에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과일이나 수프로 대충 때울 때가 잦아졌다.
옆에서 걱정하던 카르한은 일리아가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단 한 입이라도 먹이기 위해, 새벽이라도 외출해서 음식을 구해왔다.
어쩌다 일리아가 두 숟가락을 먹으면 누구보다 기쁘게 웃어주었다. 그런 카르한의 노력 덕분에 입덧 기간은 무탈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배가 점점 불러오자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과 발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이러다가 돼지보다 게을러지면 어떡해요?”
카르한은 웃다가 일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게으른 일리아도 귀여울 겁니다.”
일리아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해가 바뀌고 세쌍둥이도 점차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큰둥하던 라울과 엘로드도 동생이 잘 있는지 슬쩍 묻곤 했다. 나중에는 아예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손꼽아 동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일리아는 넷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일리아.”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이 일리아를 껴안고 인사를 건넸다. 똑같이 마주 안은 일리아가 대답했다.
“오늘도 일찍 왔네요?”
“예, 일이 끝나자마자 곧장 왔습니다.”
막내가 태어난 후로, 카르한은 매일매일 더 일찍 돌아오려고 노력 중이었다. 이러다가 나중엔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에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문제는 카르한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거 알아요? 당신이 꼴찌예요.”
카르한은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옷만 갈아입은 그는 일리아와 함께 막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방은 만석이었다.
“아일라, 이쪽 봐주렴.”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아기 침대에 달라붙어서 막내인 아일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그에 맞서서 불쑥 자라버린 세쌍둥이도 관심을 구걸했다.
“라울 오라버니라고 불러봐.”
“저건 무시하고 엘로드 오라버니라고 불러보렴.”
“아일라, 내가 바이올린 켜줄까?”
지나친 관심 속에서 아일라는 눈만 깜빡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방으로 들어오자 비올레와 클리프가 먼저 아는 척했다.
“카르한, 왔어요?”
고개를 끄덕인 카르한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일라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일라, 아빠 왔다.”
눈만 동글동글 뜬 아일라의 입매가 조금씩 허물어졌다. 미소를 지을락 말락 하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마침내 아일라가 배시시 웃자 클리프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천사가 분명해…….”
이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둬야 한다며 클리프가 주장했다. 평소에 사사건건 토를 달던 헤인리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조각상도 만들고, 시인을 불러 찬양 시를 짓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요즘 네가 좀 마음에 드는 소릴 하는구나.”
클리프와 헤인리가 훈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피식 웃다가 아기 침대로 걸어가 아일라를 안아들었다.
아일라는 일리아와 똑 닮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블로든 가문을 상징하는 금빛 머리카락과 카르한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어우러져, 마치 인형 같았다.
“보니까 옹알이도 제법 하더라고요. 슬슬 단어도 말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모두가 득달같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보렴.”
“할머니가 더 짧지 않니?”
“라울 오라버니, 아니 라울이라고 불러도 돼!”
순식간에 방이 시끄러워지자 일리아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게 된 아일라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응, 어마……?”
“세상에.”
비올레의 감탄사와 함께 모두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놀란 나머지 입술만 살짝 벌린 채 아일라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저 부른 거 봤어요?”
침착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흥분한 일리아가 가족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역시 막내는 엄마가 제일 좋은가 보구나.”
“그럼 두 번째는 외삼촌을…….”
헤인리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슬쩍 끼어들었다가 비올레에게 차단당했다.
“일리아, 제가 안겠습니다.”
조심스레 아일라를 넘겨받은 카르한은 흐물흐물 녹은 얼굴이 되었다.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들은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세쌍둥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일라 보고 싶어.”
“지금 자려나?”
“잠깐만 보고 오는 건 어때?”
라울의 제안에 엘로드와 헤이든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쌍둥이는 몰래 방을 빠져나와 아일라의 방으로 향했다. 유모가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방에는 아일라 혼자뿐이었다.
램프를 가까이 가져가자 잠에서 깼는지 아일라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놀라서 숨이 멎었다. 울면 어쩌나 싶었으나, 아일라는 옹알이하며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내 동생 귀여워…….”
헤이든의 중얼거림에 라울과 엘로드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한참 동안 아일라와 놀아주었다. 딸랑이를 흔들어주고 모빌을 돌리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아이들은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늦었다가는 아침에 못 일어날 터였다. 아쉬운 얼굴로 방을 둘러보면서 엘로드가 입을 열었다.
“여긴 너무 깜깜하고 무섭지 않아?”
“맞아. 우린 세 명이지만 아일라는 혼자잖아.”
“그럼 우리가 가도 무섭지 않게 해주자.”
헤이든의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쌍둥이는 곧바로 옆방에서 장난감을 가져왔다. 아일라를 중심에 두고 곰인형을 둥글게 앉혔다. 라울은 어릴 적에 자주 가지고 놀았던 병정 인형을 가져와 의자에 세워놓았다. 이 인형들이 밤새 아일라를 지켜줄 것 같았다.
그제야 안심한 세쌍둥이는 만족스러운 듯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차례대로 아일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
***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어왔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를 보던 일리아는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탁 트인 정원은 만개한 꽃으로 가득했다.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 주위에 물동이를 받치는 세쌍둥이 동상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막내인 아일라 동상이 추가로 세워져 있었다.
한참 창밖을 구경하는데, 익숙한 마차 한 대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곧장 현관으로 내려와 세쌍둥이를 불렀다.
“라울, 엘로드, 헤이든.”
세쌍둥이가 일리아의 부름에 환히 웃었다.
“어머니!”
이제는 소년이 되어버린 세쌍둥이가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리아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져 버린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어제 방학식이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할까 싶어서 오늘 왔어요.”
“저는 쟤 때문에 강제로 하루 더 묶여 있었어요.”
엘로드의 말에 라울이 투덜거렸다. 아직도 티격태격하는 첫째와 둘째를 보며 일리아가 웃었다.
“두 달 동안 방학이라고 했지?”
“맞아요. 보고 싶었어요.”
헤이든이 어리광부리듯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몸은 훌쩍 커버렸지만, 헤이든은 아직도 아기처럼 굴곤 했다.
“일단 들어가자.”
일리아의 말에 세쌍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작년, 일리아와 카르한은 아이들의 교육을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정교사를 고용해서 집에서 교육시킬지, 아카데미에 보낼지 말이다.
의논 끝에 두 사람은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보내기로 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둘 다 아카데미에 가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쌍둥이는 아카데미로 떠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검술에 재능을 보인 라울은 검술부에, 예전부터 책을 끼고 살던 엘로드는 행정부로, 미술과 음악에 두각을 나타낸 헤이든은 예술부에 입학했다.
세쌍둥이의 입학과 동시에 아카데미는 아주 난리가 났었다. 황족 버금가는 화려한 배경을 가진 데다가 각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단연 화제가 되었다. 교수들도 천재라며 혀를 내둘렀기에, 결국 세쌍둥이는 메즈라 제니어스가 담당하게 되었다.
카르한의 스승이자 일리아에게서 유물을 받아 수많은 논문을 써온 메즈라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셋 다 월반해서 2년 내로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아일라!”
세쌍둥이의 부름에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일라는 장난감을 내려놓고 도도도 달려왔다.
“오라버니!”
“넘어질라.”
세쌍둥이는 아일라가 넘어져도 받을 수 있도록 일제히 팔을 벌렸다.
“잘 있었어?”
“오라버니는 아일라가 너무 보고 싶던데, 아일라도 라울 오라버니 보고 싶었지?”
“아일라, 저건 그냥 무시해도 된단다.”
아일라를 두고 저마다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천재라 이름을 날린 세쌍둥이도 막내 앞에서는 한낱 팔불출 오라버니에 불과했다.
“자! 출발!”
라울이 아일라를 등에 태우고 네 발로 바닥을 기었다. 평소라면 품위 없다고 질색하는 엘로드도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무릎을 꿇고 아일라와 눈을 맞추었다. 헤이든은 자기 차례가 돌아오길 호시탐탐 노리다가 아일라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세 아이가 아일라와 놀고 있는 사이, 일리아는 방을 나왔다. 슬슬 카르한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일리아가 현관으로 나오자 포포가 달려왔다. 일리아는 포포를 품에 안고 카르한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가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는 카르한에게 다가섰다.
“카르한, 어서 와요.”
일리아의 인사에 카르한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다녀왔습니다.”
일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카르한이 장미 한 다발을 내밀었다.
“오는 길에 장미가 탐스러워 보여서 사 왔습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어쩌다가 꽃을 샀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분명 길 가다가 꽃가게를 발견하고 차마 지나치질 못해서 구입했을 것이다. 정원에 이렇게나 많은 꽃이 있는데도 말이다.
“고마워요. 카르한.”
일리아는 발뒤꿈치를 들어 카르한의 입술에 도장 찍듯 입을 맞추었다. 그 작은 보상으로도 카르한은 세상을 얻은 듯 기쁘게 웃었다.
“아참, 애들 좀 전에 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카르한은 세쌍둥이에게 인사부터 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포포를 내려놓은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계단을 오르던 카르한은 잠깐 멈춰 서서 벽에 걸린 초상화를 응시했다.
초상화는 두 점이었다. 왼쪽은 카르한의 생일 선물로 그렸던 가족 초상화였다. 오른쪽은 작년에 새로 그린 초상화로, 무려 네 명이나 더 늘어버렸다.
카르한은 초상화를 그렸을 때를 떠올리고 작게 웃었다. 사람이 아홉 명이다 보니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특히 모두의 신경이 막내에게 향하느라 바네사가 몇 번이나 정면을 보라고 말했었다.
카르한은 그림 속에서 미소 짓는 일리아를 응시했다. 아름다웠지만 역시 그림은 실물을 전부 담을 수 없었다. 초상화에서 눈을 뗀 카르한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예뻐서요.”
짤막한 대답에 일리아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당신 많이 능글맞아진 거 알아요?”
예전엔 말도 제대로 못 하더니 요즘은 숨 쉬듯이 예쁘다, 귀엽다…… 그런 말들을 내뱉었다. 슬쩍 눈꼬리를 내린 카르한이 물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누가 싫대요?”
그제야 카르한이 안심한 듯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과거의 카르한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곤 했다. 카르한은 다시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랐다.
“다음에는 둘이서만 초상화를 그려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 둘만요?”
“예. 그건 제 집무실에 걸어두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요.”
잠시 말없이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걸 확인 받고 싶었습니다.”
계단을 전부 오른 카르한이 씩 웃었다.
“지금은 그냥 자랑하려고 초상화를 남기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저와 일리아가 사랑했고, 사랑할 거라는 걸 다들 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매년 초상화를 남겨야겠어요.”
모든 순간을 기록해서 후세에 남길 것이다. 세상이 끝나는 날에도 분명 초상화 속 모습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있을 터였다.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얕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손을 맞잡은 채 복도를 걸었다. 아일라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이번에 시작한 사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비올레에게 사업의 대부분을 물려받은 일리아는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리아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번 사업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재물 운이 잠잠하니, 제가 더 힘내야죠.”
일리아의 미친 듯한 재물 운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금맥을 발견한다거나 온천이 터지는 재물 운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리아는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에 사업에 더욱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온전히 제 실력으로 사업을 키울 수 있어서 좋아요.”
지금도 블로든은 제국 제일의 부자였고, 운에 의지하지 않고도 사업은 순탄히 흘러갔다. 일리아는 아무래도 재물 운이 연애 운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어느덧 아일라의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얘들아.”
카르한의 목소리에 세쌍둥이와 아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헤이든이 곧바로 카르한에게 달려왔다.
“오셨어요?”
“와,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엘로드와 라울도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부자 관계와 달리, 그들 사이에 어색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짤막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카르한은 아일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막내는 오라버니들이랑 잘 놀았나?”
“응응.”
아일라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렸다. 특히 카르한은 예뻐 죽겠다는 듯 아일라의 코에 제 코를 비볐다.
일리아를 많이 닮은 막내는 카르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어찌나 예뻐하는지 아일라가 먹을 이유식에 들어갈 당근도 손수 심었을 정도였다.
“이제 우리 막내 생일이 일주일도 안 남았네.”
카르한의 속삭임에 세쌍둥이가 눈을 빛냈다.
“아일라, 가지고 싶은 건 없고? 말만 하면 오라버니가 당장 구해올 테니까.”
“오라버니는 작년부터 돈을 모아두었단다.”
“내가 연주회 열어줄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세쌍둥이를 보던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부모님이랑 오라버니가 엄청난 일을 꾸미더라고요.”
“음…….”
이제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의 재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일리아가 엄청나다고 말할 정도면 상상 그 이상일 터였다. 생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카르한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참, 저번에 의논한 대로 그곳 땅을 매입했습니다.”
“잘했어요. 아일라 명의로 샀죠?”
“예. 지금쯤 지반을 다질 겁니다.”
두 사람은 아일라의 생일을 기념해 별장을 선물하기로 했다. 위치 좋은 땅을 매입했으니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완공될 터였다.
“얘들아, 슬슬 점심 먹을까?”
“좋아요.”
엘로드가 아일라를 불쑥 안아 들었다. 그러자 라울과 헤이든이 항의했다.
“야! 내가 안을 거야.”
“이번엔 나야.”
셋이서 티격태격하자, 일리아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카르한이 성큼성큼 걸어가 아일라를 안아 들자, 세쌍둥이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형제에게 아일라를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아버지가 안는 게 나았다.
다 같이 식당으로 향하던 때였다. 반대편 복도에서 누군가 황급히 걸어왔다.
“카르한 님!”
테시온을 발견한 일리아와 카르한이 멈춰 섰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세쌍둥이도 덩달아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테시온이 주춤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얼마 전에 아일라 님 명의로 매입한 땅 말입니다. 공사를 진행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뭐?”
“지반을 다지다가 광맥을 발견했습니다.”
테시온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그냥 광산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광산입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일라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진 줄 알았던 재물 운은 여전히 블로든 안에 건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돈으로 약혼자를 키웠습니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