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장
***
시간이 흘러, 초여름이 찾아왔다. 황궁에서는 오랜만에 국무 회의가 있었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붙잡지 말라는 어조에 다들 눈만 깜빡였다. 카르한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헤인리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뜨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요즘 각하께서 입이 귀에 걸리셨군.”
“부인께서 회임하신 후로 회의가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 버리시니, 대화를 나눌 틈도 없습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불평하는 말과 달리 회의장에는 훈훈함이 감돌았다. 그중 자식이 많기로 유명한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는 제게 육아 비법까지 물어보셨지 뭡니까.”
“아니, 유모들이 다 키울 텐데…….”
“아버지가 되는 건 처음이라 잘 해내고 싶다 하시더군요.”
몇몇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다른 이들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축하할 일이지요.”
“아이가 태어나면 블로든 가문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참.”
이제는 상상하는 것도 두렵다는 어떤 이의 말에 모두가 동감했다.
그리고 한편. 회의장을 빠져나온 카르한과 헤인리는 곧바로 마차를 타고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퇴근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카르한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향했다.
“왔어요?”
이제는 많이 불러온 배를 감싼 채 일리아가 일어섰다.
“힘들 텐데 누워있으십시오.”
“그래도요.”
카르한은 일리아를 반쯤 강제로 눕힌 후에 책을 집어 들었다. 태교에 좋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이 시간쯤엔 항상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카르한이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자,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나름 목소리에 변주까지 주어서 구연동화를 이어갔다.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일리아는 깜빡 졸았는지 급하게 고개를 바로 했다.
“깜빡 졸았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많이 졸리면 한숨 자는 게 어떻습니까?”
“아까도 낮잠 많이 자서 괜찮아요.”
임신한 후로 일리아는 겨울잠에 들어간 것처럼 잠이 많아졌다. 그 모습까지 사랑스러워서 카르한의 눈꼬리가 잔뜩 휘어졌다. 그런 그의 시선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일리아의 맨발이 들어왔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양말은 신고 있는 게 좋습니다.”
카르한은 몸을 일으켜, 비단 양말을 꺼내왔다. 일리아가 두 발을 뻗자 카르한은 큼직한 손을 꼼질거리며 양말을 신겨주었다. 꼼꼼하게 양말을 신겨준 후에야 카르한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음, 그럼 과일 좀 먹을래요.”
카르한은 곧장 고용인을 불러, 과일을 가져오라 일러두었다. 고용인이 과일을 가져오자 카르한은 포도를 한 알씩 떼어내 일리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다람쥐처럼 우물거리는 일리아가 귀여워서 카르한은 막 떼어낸 포도를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많이 먹었어요?”
일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자, 카르한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며 속삭였다.
“지금보다 더 먹어도 됩니다.”
순식간에 포도 두 송이를 먹어버린 일리아는 배부르다는 표시로 배를 문질렀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온몸에 키스비가 내려앉자 일리아는 간지러웠는지 웃음을 흘렸다.
“아……!”
일리아의 외침에 카르한이 우뚝 멈추었다.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며 일리아를 살폈다.
“어디가 아픈 겁니까?”
당장 의원을 부를 기세에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싼 채 제 배 쪽으로 당겼다.
“들어봐요.”
배 안에서부터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카르한은 감격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카르한은 헛기침을 내뱉은 후에 다시 배에 얼굴을 기댄 채 속삭였다.
“아버지란다.”
고작 한마디 하고서는 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머니 말 잘 듣고.”
일리아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덩치만 커다란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일리아는 카르한을 끌어올려,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제 배에 있는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엄마아빠 사이가 이렇게 좋단다.”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은 아이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날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정원은 푸릇한 녹음으로 가득 찼다.
그사이 일리아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는데, 의원은 쌍둥이 혹은 세쌍둥이일 거라 진단 내렸다. 카르한이 만났던 점술사가 했던 예언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 후로 일리아는 먹는 것을 조절해야 했다. 아이가 너무 커버리면 조산할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쑥쑥 커져갔고, 일리아는 이제 방을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호흡도 불편했고 허리가 아파서 잠을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일리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발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침대에 누워 독서하던 일리아는 책을 내려놓았다.
방금 배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아직 쌍둥이일지 세쌍둥이일지는 모르겠지만, 배 속이 비좁은지 요즘 들어 자주 움직였다. 의원은 조산할 확률이 높다며 출산 준비를 미리 해두라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일리아는 걱정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들에게 불안함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배 속의 아이가 다시금 꿈틀거렸다.
일리아는 가볍게 배를 쓰다듬어준 후 고개를 돌려 빈 의자를 응시했다. 최근 들어 저 의자와 한 몸이 된 카르한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공작저로 출근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올 테지만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도대체 분쟁지에 가 있을 땐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깐 낮잠을 잤는데도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는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
꿈속에서 일리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원피스 밑자락이 나부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여긴 어디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조각구름이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과 초록빛 잔디로 가득 채워진 들판만이 전부였다. 일리아는 뒤늦게 제 품에 안긴 단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단지에 꿀이 가득했다.
꿀단지를 고쳐 안은 일리아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아장아장 걸어오는 까만 형체가 보였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좀 더 가까워지자 형체가 선명해졌다. 세 마리의 아기 곰이었다.
‘곰이 두 발로 걷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눈앞의 아기 곰들은 두 발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바로 앞에서 멈춰 선 세 마리의 아기 곰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일리아는 제 무릎까지 오는 아기 곰을 물끄러미 보다가 꿀단지를 가리켰다.
-이거 줄까?
아기 곰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일리아는 꿀단지에 들어있던 나무 국자로 꿀을 퍼, 한 마리씩 먹였다. 입가에 꿀을 묻힌 채 냠냠 먹는 곰들을 보며 일리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더 달라고?
신기하게도 일리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부지런히 꿀을 퍼주었다.
세 마리라서 그런지 먹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꿀을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일리아는 곰들이 점점 커져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리아는 안 되겠다 싶어서 꿀단지를 내려놓았다.
-자, 사이좋게 나눠 먹자.
그러자 아기 곰들이 옹기종기 앉아, 단지에 손을 집어넣어 꿀을 퍼먹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일리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만 해도 무릎까지 오던 곰들이 눈에 띄게 커진 것이다. 정신없이 꿀을 퍼먹던 곰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일리아의 키를 넘기고 말았다.
-어, 어어?
깜짝 놀란 일리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어느새 아기 곰들은 나무만큼 커져서,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
손바닥보다 작아진 꿀단지를 샅샅이 핥아먹은 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체격 차이에 일리아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일리아가 말했다.
-……이제 없어.
곰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무룩해하는 모습에 일리아는 괜한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으로 가면 꿀 많은데…… 갈래?
세 마리의 곰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
“헉!”
잠에서 깬 일리아는 식은땀을 훔쳤다. 평소에는 꿈을 꿔도 잊어버리는데, 이번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노크와 함께 비올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올레는 잠깐 멈춰 섰다.
“혹시 자는데 깨운 거니?”
“아니에요. 좀 전에 깼어요.”
비올레는 안도하며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일리아도 꾸물꾸물 일어나 침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제가 들판에 서 있는데…….”
방금 꾼 꿈을 전부 말해주자, 비올레가 웃었다.
“태몽 같은데?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구나.”
비올레의 말에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깐 카르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한이 요즘 뜨개질에 취미를 붙였다고 말해주자 비올레가 웃었다.
“둘이 참 잘 만났구나.”
일리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랑 어떻게 만난 거예요?”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져서요.”
일리아는 비올레와 클리프가 마을 축제에서 첫눈에 반해서 결혼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서로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어,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는지 문득 궁금했다.
“말하자면 좀 길 거야.”
“괜찮아요.”
잠시 회상에 잠긴 비올레는 과거를 되짚어갔다. 대대로 검사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난 비올레는 어린 나이에 여검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실의에 빠졌다. 아무리 남들보다 뛰어난 공적을 세워도 벽에 가로막힌 듯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였으나, 여자는 선발 기준에도 들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그녀의 가문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기에, 빨리 결혼하라고 종용하는 상황이었다. 현실주의자인 비올레는 그때부터 검술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중, 마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올레는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축제에 참가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을 축제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발견했다.
-우리가 돈이 부족해서 그런데, 좀 빌려줄 생각은 없어?
-돈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시고 있지 뭐야.
사내 여럿이 한 남자를 둘러싼 채 협박하는 중이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비올레는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저런, 당연히 빌려드려야지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정말 돈이 필요한 이에게 빌려주는 것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돈을 내밀었다.
-오오, 생각보다 훨씬 부자잖아?
-혹시 귀족 아냐?
-귀족이 이런 마을 축제에 올 일이 뭐 있겠어.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던 사내들은 더 큰 탐욕을 부렸다.
-옷이랑 장신구도 전부 내놓고 가라?
-인심 썼다. 속옷은 안 건드리마.
사내들이 낄낄거리자 남자가 난감한 눈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한 듯했다.
-빨리빨리 안 내놔?
사내가 윽박지르는 순간 비올레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비올레는 울상을 짓는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넌 뭐야?
사내들이 사나운 눈초리로 비올레를 노려보았다. 대책 없이 끼어들게 된 비올레는 난감해졌다. 여기서 사고 쳤다간 소속된 기사단에서 잘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자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았을 때는, 이미 발부터 나간 후였다.
“네 아빠가 보호본능을 일으키지 뭐니.”
그때를 회상하던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거기 있던 놈들 다 때려눕히고 나서 둘이 같이 식사했어.”
덩치만 커서 오들오들 떠는 클리프를 보며, 비올레는 자신이 지켜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첫 만남에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은 몇 번 정도 만남을 이어갔고……. 비올레는 뒤늦게 클리프가 블로든 가문의 후계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네 할아버지가 반대할 줄 알았는데…….”
부유하기로 소문난 블로든 가문과 비교해 비올레의 가문은 한미했다. 그러나 클리프의 부모님은 비올레를 무척 반겼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꽃밭에 사는 클리프에게 경계심을 심어줘서 고맙다며 말이다.
심지어 전대 블로든 백작은 그녀에게 가업을 물려받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해왔다. 비올레는 그 길로 기사단을 때려치우고 클리프와 결혼해 상단주가 되었다.
“나한테 사업에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 하여튼 그렇게 된 거란다.”
정말 독특한 만남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일리아는 자신도 만만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카르한과 계약 연애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가끔 내가 계속 검사로 남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보지만……, 그래도 너희를 낳았으니 후회하지 않아.”
시간을 돌려도 클리프와 결혼해서 일리아와 헤인리를 낳겠다고 비올레가 속삭였다. 가슴이 뭉클해진 일리아는 팔을 뻗어 비올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처럼 저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일리아가 제 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비올레는 옅게 웃다가 일리아를 안아주었다.
“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너는 평생 내 아가야.”
일리아는 말없이 비올레의 품에 안겼다. 요즘 들어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그런지 눈가가 조금 젖어들었다. 한참 안겨 있다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미소 짓던 때였다. 문득 배에서 진통이 느껴져, 일리아는 허리를 숙였다.
“일리아?”
“아윽…….”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일리아가 신음을 삼켰다. 곧이어 침대 시트가 흠뻑 젖어들었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
한창 회의 중이던 카르한은 연락을 받고 곧장 블로든 저택으로 뛰어왔다. 계단을 오르자, 복도를 서성이는 클리프와 헤인리가 보였다.
“각하.”
헤인리가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카르한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일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통을 느끼고 분만에 들어갔습니다.”
똑같이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헤인리가 대답해주었다. 그 옆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클리프가 중얼거렸다.
“괜찮아야 할 텐데…….”
클리프의 말을 마지막으로 복도에 침묵이 맴돌았다. 카르한은 주먹만 움켜쥔 채 분만실을 응시했다. 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카르한은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일분일초가 일 년처럼 느껴졌다. 주위는 온통 조용한데, 온갖 상념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뒤이어 안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뻣뻣하게 몸을 굳힌 카르한은 곧장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헤인리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의원이 방해될 수 있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카르한의 팔이 스르륵 내려갔다. 꽉 닫힌 문 너머에서 신음이 이어졌다. 일리아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카르한은 괴로운 얼굴로 하염없이 문만 응시했다. 길에서 만난 점술사가 했던 말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다시금 터져 나온 비명이 메아리처럼 복도를 가득 채웠다. 카르한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뒤로 다시금 비명과 아기의 울음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복도를 가득 메운 울음소리에 카르한은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굳게 닫힌 문이 열리더니 산파로 보이는 이가 나왔다.
“산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 남자가 동시에 묻자 산파가 눈을 깜빡였다.
“잠깐 기절하시긴 했는데…… 무사하십니다.”
모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깜짝 놀란 산파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정신 차리셨으니,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곧장 분만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커튼을 쳐서 공간을 분리해두었다. 커튼 밖에 서 있던 여자가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아기는 이쪽에……,”
그러나 카르한과 클리프, 헤인리는 곧장 커튼 쪽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비올레가 커튼을 걷어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일리아가 보였다.
우뚝 멈춰 선 그들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일리아는 무척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괜찮아요.”
그 말에 클리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클리프가 울려는 그때 헤인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일리아…….”
헤인리가 울자, 클리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리아와 비올레 또한 입만 벌린 채 헤인리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었는지 비올레가 ‘너 헤인리 맞니?’ 하고 물어볼 정도였다. 헤인리는 비올레의 말을 무시하고 일리아에게 속삭였다.
“정말 고생했어.”
일리아는 말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뒤늦게 정신 차린 클리프가 일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수고했다. 무엇보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헤인리와 클리프가 함께 훌쩍이자, 비올레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세 사람이 잠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이 일리아를 향해 다가섰다.
“카르한.”
일리아가 이름을 부르자,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찌나 뜨거운지 눈물이 스친 곳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카르한은 서서히 무릎을 굽혀 일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리아…….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더듬거리던 카르한이 일리아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전해지자 카르한이 눈을 꾹 감고 속삭였다.
“일리아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감정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부족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일리아는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계속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카르한이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항상 그렇습니다.”
다시금 카르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조용히 울음을 삼키자, 일리아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울어요.”
카르한은 대답 대신 일리아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벅참과 기쁨, 고마움……. 수많은 감정이 입술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다독여, 겨우 울음을 그치게 했다.
“아무래도 우리 집 남자들은 눈물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비올레는 새 손수건을 클리프에게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는 어때요? 보고 싶어요.”
일리아의 말에 고용인이 속싸개로 감싼 아기를 일리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라, 무려 세 명이었다.
“진짜 세 명일 줄이야. 어떻게 내 배에서 나왔지?”
일리아는 신기하다는 듯 속싸개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뒤로 물러서 있던 의원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의원에게 향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 관리를 잘 해주신 덕분인지, 산모의 몸에는 큰 이상이 없습니다. 그래도 많이 무리하셨으니 백 일 이상은 쉬셔야 합니다.”
의원이 유의 사항을 줄줄 내뱉자, 카르한은 전부 기억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들께서 미숙아로 태어나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체온과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십시오.”
별다른 지병이나 이상한 점은 없다며, 의원이 일리아를 안심시켰다. 의원이 물러나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전부 아기들만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기들의 피부는 쭈글쭈글했다. 전부 카르한을 닮았는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카르한은 물병보다 작은 아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때요?”
“너무 작아서…….”
아기의 머리통이 카르한의 주먹보다 작았다. 카르한은 만지면 부서질 설탕 과자를 보듯 아기들을 눈으로 살폈다.
“제가 만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잔뜩 긴장한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 남자아이인데……, 혹시 아쉽지는 않아요?”
“성별은 상관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카르한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전부 저를 닮은 것 같아서…… 그게 좀.”
한 명쯤은 일리아를 닮을 거라 생각했는데, 머리카락부터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이목구비까지 카르한을 쏙 빼닮았다. 그것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이름을 지어줘야겠어요.”
“내가 생각해둔 게 있단다!”
어느새 눈물을 거둔 클리프가 의기양양하게 나섰다.
“라울, 엘로드, 헤이든 어때!”
“너무 적당히 지으신 거 아닙니까.”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곱게 접던 헤인리가 말했다. 제국은 고대어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 클리프가 제안한 이름은 고대어로 씩씩함, 건강함, 밝음을 뜻했다. 클리프는 한 명이라도 제 편을 포섭하기 위해 냉큼 비올레의 팔짱을 꼈다.
“그게 최고지. 안 그래요?”
“뭐, 두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죠.”
비올레가 자연스레 일리아와 카르한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여러 이름이 후보에 올랐지만, 클리프가 지어준 세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세 아이의 이름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
출산 후 일리아는 한 달 정도 침대 생활을 계속했다. 확실히 많이 무리했는지 바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긴 어려웠다.
일리아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세쌍둥이들도 제법 건강하게 자라났다. 가끔 위기가 찾아왔으나, 모두가 달라붙어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덕에 체중도 많이 불었다.
세쌍둥이들이 눈을 뜨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할 때쯤, 본격적인 육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도움이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직접 아이들을 돌보았다.
특히 카르한은 지금까지 전수받은 육아 지식을 전부 선보였다. 목욕물 온도 맞추는 것부터 식사 후에 트림을 시키는 것까지. 뭐든지 일리아보다 더 능숙하게 해냈다. 어찌나 익숙한지, 이미 아이들을 몇 명이나 길러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전 일리아는 무척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카르한이 우는 첫째에게 딸랑이를 흔들어주는 동시에 둘째를 안고 재우고 있었다. 거기다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며 자는 셋째를 계속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일리아는 카르한이 묘기를 부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이 된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 때는 유모가 봐주니 괜찮습니다.
카르한은 오히려 산후 조리를 잘해야 한다며, 일리아를 걱정했다. 며칠 전 일을 떠올린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비올레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니?”
“죄송해요. 잠깐 방에 가봐야겠어요.”
오늘은 휴일이었고, 지금 카르한이 세 아이를 도맡는 중이었다. 수유를 끝내고 비올레와 차를 마시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그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안으로 들어간 일리아는 침대 위를 확인하고 웃음을 겨우 삼켰다. 카르한과 세쌍둥이가 똑같은 자세로 잠든 것이다.
“부자 아니랄까 봐…….”
침대로 다가간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에 들린 딸랑이를 발견하고 혼자 키득거렸다. 일리아는 얇은 이불을 펼쳐, 그 위로 덮어주었다. 그의 뺨에 입을 맞춘 일리아가 속삭였다.
“다들 잘 자요.”
평화로운 어느 날 오후였다.
***
약 백 일 간의 몸조리를 끝낸 일리아는 미뤄둔 업무를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기 방으로 향했다.
“라울, 엘로드, 헤이든.”
이름을 부르자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들이 방긋방긋 웃었다. 세쌍둥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더니, 이제는 슬쩍만 봐도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첫째인 라울은 누가 보아도 카르한을 쏙 닮았다. 까만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 짙은 눈썹까지. 카르한이 어렸을 적에 이렇게 생겼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둘째인 엘로드는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엘로드 또한 카르한과 많이 닮았지만, 군데군데 일리아의 흔적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막내인 헤이든은 일리아와 느낌이 비슷했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은 카르한과 같았으나, 아래로 내려간 눈매가 일리아를 연상하게 했다.
세쌍둥이는 외모가 다른 만큼 성격도 달랐다. 라울은 뭐든지 행동이 크고 씩씩했다. 우는 것도, 옹알이하는 것도 우렁찼다. 엘로드는 조용한 편으로 잘 울지 않았다. 그래도 호불호는 확실하게 표현했다. 헤이든의 경우에는 항상 맹했다. 반응도 느렸고 두 형들에게 치여도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흐뭇하게 웃던 일리아는 라울부터 안아들었다. 한 명씩 수유하는데, 다행히 울지 않고 차례를 기다렸다. 수유를 끝낸 일리아는 헤이든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카르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리아, 다녀왔습니다.”
“벌써 왔어요?”
잠깐 외출하고 돌아온 카르한의 손에 뭔가가 잔뜩 들려 있었다. 아기 용품이라도 사왔나 하고 일리아가 기웃거리자 카르한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지나가는 길에 생각나서 사왔습니다.”
꽃향기가 일리아를 감싸 안았다. 일리아가 꽃다발을 살피는 사이,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담요와 향초입니다. 고심해서 고르긴 했는데…….”
당연히 아기 용품이라고 생각했던 일리아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기를 낳고 나서도 카르한은 언제나 일리아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고마워요. 카르한.”
일리아는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던 카르한이 일리아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화답하듯 입술에 도장을 찍은 후 일리아를 내려놓았다.
“오는 길에 봤는데, 분수대가 벌써 다 지어졌더군요.”
“그래요? 아버지께서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클리프는 평소에 세쌍둥이를 천사라 불렀다. 손주들에게 껌뻑 죽던 그는 결국 세쌍둥이의 얼굴을 본 따서 분수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천사 날개를 단 세쌍둥이가 물이 쏟아지는 분수대 물동이를 받치는 형태였다.
본관과 마주 보는 곳에 지어두었으니, 앞으로 저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분수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게 생각나네요.”
일리아가 문득 떠올랐다는 얼굴로 말문을 뗐다.
“저녁에 잠깐 아이들 보러 방에 들렀는데……, 오라버니가 딸랑이를 흔들어주고 있는 거예요.”
우르르 까꿍, 하면서 함박웃음 짓는 헤인리가 너무나 낯설어서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어 봤을 정도였다. 특히 헤인리는 식구들 중에서 가장 이성적이며 점잖은 편이었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어머니도 요즘 상단을 터는 데 재미 들리셨고요.”
비올레는 아기 용품 신상이 나오면 무조건 사들였다. 자꾸 물건이 늘어나서 어느 세월에 다 쓸지 고민이었다.
“다들 저마다 사랑해주는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쌍둥이가 태어난 후로 저택에 활기가 돌았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용인들도 웃음꽃이 피었다.
카르한이 아기 침대로 향했다. 아빠를 알아본 첫째 라울이 활짝 웃었다.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둘째는 꼼질꼼질 미소 지었고, 특유의 맹한 표정을 짓던 셋째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카르한이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아기들은 아직도 그에게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그래도 부서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던 과거와 달리, 힘을 잔뜩 뺀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우응…….”
라울이 뭐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옹알이를 시작한 라울은 평소에도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아빠 왔네, 아빠.”
일리아가 옆에서 말하자 라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이어 옹알대던 라울이 소리쳤다.
“바바!”
그 외침에 카르한이 버쩍 굳었다. 라울의 뺨에 손을 댄 카르한이 고개를 홱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 들었습니까?”
감격에 가득 찬 카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엘로드가 소리쳤다.
“아바!”
카르한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심장이 멎기라도 한 듯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셋째, 헤이든이 웅얼거렸다.
“바바바?”
카르한의 몸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을 굽힌 채 반쯤 주저앉은 카르한이 침대 틀만 쥐고 심호흡했다.
“카르한, 괜찮아요?”
“……예.”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로 카르한이 대답했다. 카르한은 숨을 크게 내쉰 후에야 다시 바로 섰다. 그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은…… 천재인 듯합니다.”
“천재까지야. 그래도 어느 순간 말문이 트이겠죠?”
“내일 갑자기 말하면 어쩌지요?”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요.”
“하지만…….”
카르한이 뭐라고 말하려는 그때, 엘로드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바닥을 밀어내며 몸을 뒤집으려고 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깜짝 놀라서 엘로드를 쳐다보았다. 혹시 첫 뒤집기를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가족들 불러요!”
카르한이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도에 여러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천사들이 뒤집기를 한다고!!!”
저 멀리서부터 클리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올레는 조용히 하라며 클리프를 가볍게 타박하면서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비올레도 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벌써 뒤집기 했니?”
“아직이요.”
비올레와 클리프는 냉큼 아기 침대에 달라붙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엘로드는 다시금 몸을 꿈틀거렸다.
“조금만 더.”
“그래!”
열띤 응원을 받아, 엘로드가 힘을 주었다. 탄력을 받았는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말 듯 했다. 그러자 옆에 누워있던 라울과 헤이든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모두가 역사적인 순간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마침내, 둘째 엘로드가 먼저 뒤집기에 성공했다.
“아이고, 장하다!”
클리프가 숨도 쉬지 않고 칭찬을 쏟아냈다. 뒤이어 첫째 라울이 몸을 뒤집자, 비올레가 감탄했다. 두 형들과 달리 한참 끙끙거리던 헤이든이 마지막으로 몸을 뒤집었다. 하루 만에 세 형제가 뒤집기에 성공하자 비올레와 클리프는 난리가 났다.
“우리 상단 기념일로 지정해야겠구나.”
“신동이 태어났다고 학회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냐!”
주책이라고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을 때, 그들 못지않게 감동한 카르한이 말했다.
“지금 당장 축하 파티를 준비하라고 일러둬야겠습니다.”
결국 일리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뒤집기에 성공한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는 법을 깨우쳤다. 그러다 걸음마를 하더니, 금방 혼자 아장아장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세쌍둥이가 걷기 시작한 후로 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그렇게 세쌍둥이의 네 번째 생일이 돌아오던 해, 어느 날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카르한은 자연스럽게 세쌍둥이의 방이 있는 복도로 올라왔다.
“도련님들!”
저 멀리서 세쌍둥이를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서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고용인이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묻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카르한은 복도 중앙에 서서 아이들을 불렀다.
“라울, 엘로드, 헤이든.”
방 안쪽에서 와장창, 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첫째구나.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자기 몸집만 한 목검을 든 라울이 뛰쳐나왔다.
“아빠!”
신나게 사고 치던 중이었는지 라울은 차림새가 엉망이었다. 카르한은 한 팔로 라울을 안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 서재에서 엘로드가 나왔다. 독서 하다 나왔는지 제법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낀 채였다. 카르한은 다른 팔로 엘로드를 번쩍 안았다.
주위를 슥 둘러본 카르한은 복도 창가에 달린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어내자 창밖을 구경하던 헤이든이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카르한은 막내 헤이든까지 가볍게 안아 들었다.
혼자 세 아이를 들자 고용인이 감탄했다.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닌지라 자세가 무척 안정적이었다. 아이들 수거를 끝낸 카르한이 고용인에게 말했다.
“간식을 준비해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부탁을 받은 고용인이 곧장 자리를 떴다. 카르한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제 품에 안긴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았지?”
“전쟁놀이를 했는데, 악당이…….”
“책 두 권을 읽고…….”
또래보다 말을 잘하는 라울과 엘로드는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안겨 있던 헤이든은 멍하니 있다가 ‘나비’ 하고 짤막한 단어를 내뱉었다. 아마 오늘 하루 중 나비를 본 게 가장 기억에 남은 모양이었다.
나직하게 웃던 카르한이 아이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웠는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동화책 읽을까?”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쌍둥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카르한은 태교를 목적으로 구연동화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카르한은 동화책을 골랐다.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이었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둘째 엘로드가 질문했다.
“아빠, 그림 잘 그려요?”
“음.”
카르한은 요즘도 종종 그림을 그렸다. 그 동안 연습도 많이 했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나 테시온은 잘 그린다고 칭찬해주니까……, 객관적으로 그럭저럭 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 기준으로 보기엔 잘 그리는 듯했다.
“그런 것 같은데.”
세쌍둥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보고 싶어요!”
결국 카르한은 동화책을 내려놓고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은 일 때문에 외출한 일리아에게 연락을 넣게 되었다.
[일리아, 우리 아이가 진짜 천재였습니다.]
***
카르한은 테이블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 맞은편에 세쌍둥이가 참새처럼 쪼르르 달려와 착석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카르한이 펜을 들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기대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게 된 카르한은 무엇을 그릴지 고민했다.
그의 눈에 꽃병에 꽂아둔 장미가 들어왔다. 장미를 그리기로 마음먹은 카르한은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종이 긁히는 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신중하게 뻗어나가는 선을 따라서 아이들의 눈동자가 함께 움직였다.
한창 집중해서 그림을 완성 시킨 카르한은 뿌듯한 얼굴로 펜을 내려놓았다. 회심의 역작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제 형제들과 고개를 맞댄 채 구경하던 첫째 라울이 말했다.
“아빠 이거 애벌레예요?”
“바보야, 달팽이 등껍데기잖아.”
둘째 엘로드가 쐐기를 박았다. 카르한은 충격에 휩싸여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나름 장미 같은데……, 그렇게 못 그렸나? 카르한이 이리저리 그림을 살피는 사이, 셋째 헤이든이 말했다.
“응아.”
카르한은 상처 받은 나머지 조용히 그림을 덮어버렸다. 씁쓸함을 삼킨 카르한은 새로운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며 물었다.
“그림 그릴까?”
세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아이들 앞에 종이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색연필을 쥔 아이들이 무엇을 그릴지 고민했다.
“엄마 그려야지!”
성격이 급한 라울은 곧바로 색연필을 움직였다. 쭉쭉 선이 과감하게 뻗어져나갔다. 엘로드는 잠깐 고민한 후에 색연필 색깔부터 골랐다. 그리고 신중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헤이든은 나비 그릴까?”
카르한은 색연필을 쥔 채 고민하는 헤이든에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헤이든이 천천히 색연필을 움직였다. 세 아이들을 지켜보던 카르한 또한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꼭 장미 같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건 내 거야.”
“잠깐만 쓴다니까!”
“또 부러뜨릴 거잖아.”
때때로 라울과 엘로드가 아옹다옹했다. 라울이 힘 조절을 못해서 색연필을 잡는 족족 부러뜨린 탓이었다. 카르한은 둘을 중재한 후에 색연필을 새로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 다들 그림을 완성했다. 카르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물구나무서기 해서 봐도 장미처럼 보였다.
“아빠도 다 그렸다.”
카르한이 당당하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라울과 엘로드가 동시에 말했다.
“막대 사탕!”
카르한은 잠깐 침묵했다. 그래도 막대 사탕이면 나름 장미랑 비슷해 보이니 만족하기로 했다.
“다들 어떻게 그렸는지 볼까?”
성격 급한 라울이 가장 먼저 자랑했다.
“엄마 그렸어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보였다. 그나마 눈은 알아볼 수 있었다.
“잘 그렸네. 이게 눈이지?”
“귀예요.”
“……아빠가 실수했구나. 다시 보니 귀네.”
카르한은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라울을 칭찬해준 카르한은 엘로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장 열심히 그렸지만 엘로드의 그림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우리 가족이에요.”
“이건 포포지?”
“맞아요.”
카르한은 팔을 들어 엘로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엘로드는 자기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헤이든의 그림을 본 카르한은 잠시 멈칫했다.
“우와. 너 잘 그린다.”
헤이든의 그림을 본 라울이 감탄했다. 칭찬에 인색한 엘로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흰 도화지에 나비 한 마리가 담겨 있었다. 비록 선이 매끄럽진 않았으나 형태가 분명했고, 색깔을 조화롭게 섞어서 마치 어느 화가의 작품 같았다.
잠시 넋 놓고 감상하던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리아에게 이 사실을 당장 알려야 했다. 우리 아이가 진짜 천재라고!
***
일리아는 온천 사업 건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몇 년 전에 개장한 온천 휴양지는 성공을 거두다 못해 대박을 쳤다. 수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필수 관광지로 입소문이 난 것이다.
블로든 가문이 직접 운영하는 여관은 6개월 후까지 만실이었으며, 입장료 외에 부수적인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입장객 수가 대폭 늘었기에 덩달아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막 회의를 마친 일리아는 카르한이 보낸 사람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일리아, 우리 아이가 진짜 천재였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일리아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현관문이 열리더니 세쌍둥이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엄마!”
일리아는 제게 달려드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었다.
“오늘 다들 뭐 했어?”
“그림 그렸어요.”
일리아가 몸을 일으키자, 뒤에 서 있던 카르한이 다가와 일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카르한은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건네며,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눈짓했다.
두 팔로 아이들을 번쩍 든 카르한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세쌍둥이의 놀이방에 도착하자, 널찍한 테이블 위에 종이가 잔뜩 널려 있었다.
“엄마, 이거 내가 그린 거예요.”
라울이 곧바로 자기 그림을 집어 들어 일리아에게 자랑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었으나 일단 칭찬부터 했다.
“와, 잘 그렸네! 뭐 보고 그린 거야?”
“엄마예요!”
그 말에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라울의 그림 실력은 카르한을 닮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 라울. 엄마를 예쁘게 그려줬구나.”
라울의 뺨에 뽀뽀해준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엘로드의 그림을 확인했다. 역시나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무엇을 그렸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엘로드는…… 우리 가족들을 그린 건가?”
“맞아요.”
일리아는 엘로드에게도 칭찬을 듬뿍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이든의 그림을 본 일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린아이가 그렸다고 보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카르한, 당신이 도와줬어요?”
“아닙니다.”
카르한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르한이 도와준 건 아닌 듯했다.
‘진짜…… 천재인가?’
카르한의 연락을 받았을 때, 일리아는 그가 평소처럼 과장하는 거라 생각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매일 세쌍둥이를 보며 천재라며 노래를 불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림을 본 순간, 일리아는 헤이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이든은 나비를 그린 거지?”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깔이 반짝반짝하구나. 혹시 직접 보고 그린 거야?”
“오늘 나비를 봤는데…….”
평소에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헤이든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헤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꼬마들, 재미있게 놀았으니 이제 씻어야지?”
“씻기 싫은데!”
“더러워.”
라울이 투정부리자 엘로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처럼 투닥거리며 싸우기 시작하자, 일리아는 둘을 떼어놓은 후 고용인을 불렀다. 그리고 아이들을 씻겨달라고 부탁했다.
세 아이가 나가버리자 방 안에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일리아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하다가 카르한이 그린 그림을 칭찬했다.
“카르한도 실력 많이 늘었네요.”
마지막으로 칭찬 받게 된 카르한이 뒷목을 쓸었다. 머쓱해하면서도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장미 그린 거죠?”
일리아가 알아보자 카르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리아…….”
감동에 젖은 카르한이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벌써 오 년 넘게 카르한의 그림을 봐온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나 실력이 한결 같은 카르한도 사랑스러웠다. 카르한을 마주 안아준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당신 말처럼 헤이든에게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헤이든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듯하니…….”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조만간 바네사를 만나봐야겠어요.”
***
그림 소동이 일어나고, 일리아의 예상대로 집안이 뒤집어졌다.
세쌍둥이의 그림을 본 클리프가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헤인리는 평소에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에 아이들의 낙서를 달고 다녔으며, 비올레는 세쌍둥이의 그림을 판화로 만들어 자사에 달력을 배포했다.
그러나 라울과 엘로드는 금방 그림에 흥미를 잃었다. 라울은 칼싸움이나 몸 쓰는 일을 좋아했고, 엘로드는 서재에 틀어박혀 책 읽느라 바빴다. 막내 헤이든만이 그림에 재미를 붙였는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엄청난 재능이에요.
일리아가 발굴한 천재 화가 바네사는 헤이든의 그림을 보고 칭찬을 쏟아냈다. 좀 더 자라면 수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재능을 보인 것은 헤이든만이 아니었다.
프란체는 첫째 도련님이 검술 천재라며 사방팔방에 자랑하느라 바빴다. 훗날 최고의 검사가 될 거라면서 말이다. 헤인리는 엘로드가 무척 똑똑하다며 감탄했다. 나중에 아카데미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자신의 후계자로 삼길 바랐다.
일리아는 일단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직 어리니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후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지지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세쌍둥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저희 상단 측에서는…….”
일리아는 블로든 저택 응접실에서 거래처 상단주와 대화 중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일리아는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다 숨었냐!!”
저 멀리서 라울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옅은 미소를 지은 일리아는 다시 상단주의 말에 경청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저희 상단 측과 앞으로…….”
그때 펑, 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상단주가 기겁한 얼굴로 일리아에게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방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며 그가 몸을 일으키자, 일리아가 대답해주었다.
“아, 애들 숨바꼭질하는 소리예요.”
“……예?”
“시간이 지나도 상대를 못 찾겠으면 소리 지르잖아요. 저희 집은 그걸 대신해서 폭죽을 터뜨려요.”
상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얼빠진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집이 좀 넓어서요. 안 그러면 숨바꼭질이 평생 끝나지 않거든요.”
***
일리아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여덟 살이 된 세쌍둥이가 침대로 뛰어든 탓이었다.
“엄마!! 농장 가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아이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일리아는 어제 서류를 보느라 늦게 잤더니 좀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세쌍둥이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주말이었기에, 일리아는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졸음을 밀어냈다.
“일리아, 일어났습니까?”
열린 문을 통해 카르한이 들어왔다. 한참 전에 일어난 것인지 그는 편안한 차림새에 머리 정돈까지 끝낸 후였다.
“아이들은 제가 맡을 테니, 천천히 준비하십시오.”
능숙하게 세쌍둥이를 안아든 카르한이 방을 나갔다. 일리아는 이불 밖으로 나와 세수부터 했다. 간단하게 씻고 나서 머리카락은 땋아서 틀어 올렸다.
옷까지 갈아입은 일리아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준비를 마친 카르한과 클리프 그리고 세쌍둥이가 일리아를 맞이했다.
“자, 그럼 가볼까!”
클리프가 외치자 세쌍둥이가 먼저 앞장섰다. 그들이 향한 곳은 블로든 저택 뒤편에 위치한 농장이었다.
클리프와 카르한이 직접 양배추와 순무를 심어서 만든 곳으로, 종종 주말 농장이 열리곤 했다. 농장에 도착하니 알이 꽉 찬 양배추가 잔뜩 널려 있었다.
“오늘 수확해도 되겠구나. 자, 다들 식탁에 오를 양배추랑 순무를 가져와 볼까?”
클리프의 말에 세쌍둥이는 모종삽을 든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클리프는 감회가 새로운 듯 농장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잘 자랄 줄이야…….”
한때 선인장까지 죽여 버렸던 클리프는 제 손으로 농장을 일궜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해 보였다. 그는 카르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식물을 키우는 것에 재능이 있어요.”
“백작님께서 많이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클리프가 감동 어린 얼굴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내년에는 무엇을 심을지 토론하는 사이, 일리아는 세쌍둥이를 지켜보았다.
이미 라울은 삽을 내팽개치고 손으로 순무를 뽑고 있었다. 라울이 가는 곳마다 밭은 엉망이 되었다. 엘로드는 양배추 하나를 두고 분석하듯 모종삽을 움직였다. 정교하게 흙을 덜어내는 모습이 마치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 같았다. 헤이든은 순무를 뽑다 말고 흰나비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웃으면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좀 아프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두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예민해진 일리아는 적당히 있다가 들어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아는 산책하듯 걷다가 이전에 손수 심어둔 야생화를 떠올렸다. 매번 농장에 올 때마다 잘 크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
텅 빈 밭을 본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저번 주에 직접 물을 주었던 야생화가 뿌리째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에서 양배추를 뽑던 카르한이 곧장 다가왔다.
“뭔가 찾는 거라도 있습니까?”
“카르한, 여기 심어진 꽃 못 봤어요?”
“아, 그건 제가 뽑아버렸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순간 가슴에서부터 서운함이 울컥 밀려왔다. 나름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는데, 그걸 뽑아버리다니.
다시금 두통이 밀려오더니 늪에 빠진 것처럼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일리아가 입을 꾹 다물자, 카르한이 당황해하며 말을 이었다.
“금방 똑같은 꽃을 찾아서…….”
“됐어요.”
애써 속상함을 삼킨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피곤하니까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일리아…….”
“아이들 좀 부탁할게요.”
일리아는 그 말을 남기고 농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