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장
***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주도하에 뒤풀이가 열렸다. 오감이 화려해지는 향연에 하객들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다.
피로연은 선상 파티였다. 석양이 질 무렵,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 위에서 작은 연회가 열렸다. 마지막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으며 마무리되었다.
길었던 결혼식이 끝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기절하듯 잠을 잔 후에 아침 일찍 신혼여행을 떠났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남부령에 도착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새하얀 집들 사이로 저 멀리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깥을 구경하던 일리아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카르한, 여기부터 남부래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카르한이 일리아의 어깨를 감싼 채 대답했다.
“저는 남부는 처음입니다.”
“그래요? 저는 어릴 적에 두 번 정도 왔었어요.”
부모님 사업차 따라온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특히 에메랄드빛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선착장으로 가는 겁니까?”
“그럴까 싶어요.”
관광은 마지막 날에 하기로 했고, 오늘은 곧바로 섬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마차는 해안을 따라 쭉 달려, 선착장 앞에서 멈추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이 양산을 펼쳐 들어주었다.
카르한은 바다에 정착된 배를 훑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여럿 보였다.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배가 하나 있었다. 블로든 가문 재력에 익숙해진 카르한은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겠다는 듯 유추했다.
“저기 제일 큰 배가 블로든 가문 것입니까?”
“맞아요.”
역시나.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선착장이 우리 가문 것이니, 여기 있는 배는 전부 내 거예요.”
카르한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예측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몰랐다.
“자, 타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카르한이 먼저 배에 올라타고, 일리아는 마차에 숨겨둔 향료를 꺼내왔다. 연인끼리 쓰기 좋다며, 스텔라가 선물해준 거였다.
향료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일리아는 특별히 주문한 속옷과 잠옷도 챙겼다. 그리고 의욕 넘치는 얼굴로 배에 올라탔다. 결혼도 했겠다, 가족들도 없겠다…….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인장이 박힌 배에 올라탔다. 섬에 들어가서 사흘 정도 머무를 예정이었기에, 고용인들도 함께 승선했다.
그들이 탄 배는 진주알 같은 하얀 포말을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배 아래에 옅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눈앞에서 찰랑거렸다. 갑판 위에 서서 끝없는 수평선을 응시하던 카르한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사실 바다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입니다.”
“정말요? 그래도 제법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제가 간 지역은 바다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행군할 때 아주 멀리서 본 적이 있긴 합니다.”
기억을 더듬던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너무 멀어서 색깔만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때 본 바다는 푸른색이었습니다.”
“하긴 남부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바다는 푸른색이 대부분이죠.”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일리아와 함께 처음 바다를 보아서 기쁩니다.”
카르한은 남부의 태양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이랑 함께 본 바다가 평생 본 바다 중에서 제일 예뻐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갑판에 나란히 서서 더운 바람을 맞이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바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잔잔한 바다를 쭉 나아가니, 저 멀리 섬 하나가 보였다. 해변에 깔린 흰 모래와 뒤로 우거진 녹음이 대비되었다. 섬 뒤편에 배가 정착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별장에 들어갔다.
이 섬에서 별장은 두 채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해변과 가까운 별장을, 고용인들은 섬 뒤쪽 별장을 이용할 예정이었기에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리아는 길이가 짧고 얇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카르한은 쇄골이 드러나는 셔츠 한 장과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은 후 함께 해변으로 향했다.
흰 모래가 깔린 해변에는 라탄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파고라와 그네가 휴양지 느낌을 자아냈다. 백사장에 선 카르한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여긴 우리뿐이니까요.”
“……그럼 바다에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좋아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신발을 벗어놓고 바다로 향했다. 수면이 얕아서 그런지 바닥이 유리처럼 깨끗하게 비쳤다. 고운 모래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헤엄쳤다.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던 카르한이 바다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
카르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리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짜서…….”
쑥스러운 듯 카르한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일리아가 물장난을 쳤다. 참방, 하고 카르한의 몸이 반쯤 젖었다. 그러나 일리아가 물을 뿌려도 카르한은 묵묵히 맞기만 했다.
“왜 가만히 있어요. 재미없게.”
그제야 카르한이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조심조심 물장난을 하는 모습에 일리아는 또 웃고 말았다.
한참 물에서 놀던 일리아가 멈추었다. 얇은 셔츠가 푹 젖어서, 그의 몸이 고스란히 비쳤다. 베틀로 짠 듯 잘 자리 잡힌 근육은 카르한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일리아의 귀가 붉어졌다.
“일리아?”
카르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름을 불러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다른 것도 해보자며 그를 이끌었다.
둘은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름을 써보거나 예쁜 돌멩이를 모아서 쌓으며 놀았다. 늦은 점심으로는 요리사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었다. 한참 놀던 일리아는 진 빠진 얼굴로 말했다.
“아, 힘들다. 좀 쉬고 있을게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쉬자며 일리아의 옆에 착 달라붙었을 텐데, 한창 신난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바다로 향했다. 라탄 의자에 앉은 일리아가 농담했다.
“물고기나 잡아 와요. 식량 떨어지면 구워 먹게!”
아무런 도구도 없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르한도 이 정도는 농담인 줄 알 것이다. 일리아는 라탄 의자에 편히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체력을 비축해두어야 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예정이니 말이다.
‘이게 바로 휴양이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공간. 완벽한 휴식이었다.
“일리아, 더 잡아 올까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그대로 멈추었다. 품에 물고기를 잔뜩 안은 카르한이 서 있었다.
‘아니, 진짜 잡아 왔잖아?’
놀란 일리아가 아무 말 못 하자 카르한이 다시 물었다.
“장작도 패 올까요?”
“…….”
한쪽은 휴양인데, 다른 한쪽은 섬에서 살아남기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카르한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다며,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에게 말했다.
“혼자 둬도 잘 살겠어요.”
카르한은 품에 안고 있던 물고기를 후두둑 떨어뜨렸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곰 같은 사내가 제 한 마디에 철렁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일리아는 견딜 수가 없었다.
“농담이죠. 누가 당신 혼자 둔대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팔을 잡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대로 이끌려온 카르한이 일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물고기는 어떻게 잡은 거예요?”
“손으로 잡았습니다. 예전에 식량이 부족하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거든요.”
일리아는 카르한만 있으면 조난당해도 생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석양을 지켜보았다. 물감 통을 쏟은 듯 바다에 붉은색 물이 들었다.
그 위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을 위한 한 편의 극이었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어둠 위를 걸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백사장의 흰모래를 와르르 쏟은 것처럼 가득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깜깜해진 해변을 걸었다. 검은 물결이 밀려오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남부라 그런지 저녁인데도 후덥지근한 기운이 아직 가시질 않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사소한 이야기와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것들…….
“원로들이 계속 공작저를 비워둘 거냐고 묻더군요.”
카르한은 여전히 블로든 저택에 머무르며, 공작저로 출퇴근했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 백작저를 나와 공작저에서 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저는 계속 블로든 저택에 살고 싶습니다.”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좋았다. 가끔 시간이 나면 함께 저녁을 먹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서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주었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에반테온 공작저와 달리 블로든 저택은 행복한 추억만 가득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일이 바쁘면 공작저에 잠깐 머무르면 되죠.”
같이 가주겠다고 일리아가 속삭이자, 카르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사실 떨어지기 싫었습니다.”
일리아는 말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백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수평선부터 달려온 파도가 나란히 새겨진 발자국을 지워갔다.
밤이 깊어지자 일리아와 카르한은 별장으로 돌아왔다. 일리아는 별장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바다에 들어갔으니 바로 씻는 게 좋겠어요.”
옷은 거의 다 말랐지만 아직도 몸에 소금기가 남아 있었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핑계를 대려고 했다.
“욕실이…….”
일리아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아차, 욕실이 너무 많았지.’
욕실이 하나니까 같이 씻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말도 안 됐다. 일리아는 순발력을 발휘해 말을 정정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별장이라서 욕실을 하나밖에 못 써요.”
“그럼 먼저 씻으십시오.”
역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카르한부터 씻어요. 미리 물 받아두라고 말해뒀는데, 확인만 할게요.”
일리아는 냉큼 욕실에 들어갔다. 집에서 쓰는 것보다 조금 작은 욕조에 미지근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스텔라가 준 향료를 꺼내 물에 풀었다. 달콤하면서 매혹적인 향이 은은하게 들어찼다. 일리아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욕실을 나왔다.
“들어가요.”
카르한이 먼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일리아는 잠시 문 밖에 서서 기다렸다. 막 욕조에 몸을 담근 것인지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새어나왔다.
일리아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문을 열었다. 욕조에 반쯤 기대 눈을 감은 카르한은 일리아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리아가 얇은 원피스를 벗기 시작했다. 사르륵,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카르한이 번쩍 눈을 떴다.
“!”
화들짝 놀란 카르한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가득 채워진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원피스 어깨 끈을 내리며 속삭였다.
“역시 씻지 않고 돌아다니려니 찝찝하더라고요. 같이 씻어도 되죠?”
뻣뻣하게 굳어진 카르한이 욕조 손잡이를 잡은 채 입만 벌렸다. 부정이나 긍정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빠르게 옷을 벗은 일리아는 수건으로 몸을 살짝 가린 채 카르한에게 다가갔다.
카르한의 몸은 불씨가 남은 장작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일리아가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욕조가 꽉 차며 촤악, 물이 밀려나는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잔뜩 긴장한 카르한의 무릎에 일리아의 무릎이 닿았다. 지금껏 옷에 가려 본 적도 없던 무릎이 부딪치자 카르한이 움찔거렸다. 카르한은 고목처럼 굵고 강인한 팔로 욕조 팔걸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뒤로 조금 물러나려고 했으나 욕조가 작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순진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서서히 열이 차올랐다. 껴안고 키스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리아의 승낙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듯 몸을 좀 더 가까이 했다.
“이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카르한이 손을 뻗어 일리아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가르쳐주신다면, 잘 배울 자신이 있습니다.”
욕조에서부터 흘러나온 달콤한 향기가 욕실 가득 퍼져나갔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허리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큼직한 손에 비해 무척이나 부드러운 힘이었다. 기울어진 일리아의 몸이 카르한에게 쏟아지며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일리아는 널찍한 가슴팍에 손을 짚은 채 그를 받아들였다. 물안개를 머금은 듯 입가가 점점 젖어갔다. 카르한은 횡단하듯 입술 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좀 더 뜨거워진 숨결이 피부 위를 덮어왔다.
출렁이는 물소리가 낮에 들은 파도 소리보다 더 강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입을 맞추던 카르한이 일리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수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몸이 완벽하게 밀착했다.
입술을 떼어낸 일리아는 카르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아까 본 밤하늘처럼 어둑했다. 그의 달아오른 숨결이 일리아에게 닿았다.
“여긴 좁지 않아요?”
명백한 유혹에 카르한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촤악, 밀려나간 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카르한은 두 팔로 일리아를 단단히 안아 든 채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 급한 얼굴로 속삭였다.
“제가 나중에 씻겨드리겠습니다.”
***
얇은 커튼 사이로 시곗바늘처럼 뾰족한 햇살이 쏟아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오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꿈을 헤매는 듯 몽롱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일리아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다.
“윽…….”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특히 허리와 배가 찌르르 아팠다. 일리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머리맡으로 시선을 옮겼다. 침대 머리판이 반쯤 부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 부서져서 다행이네.’
일리아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카르한은 지금껏 유지해온 인내심을 전부 내려놓고 일리아를 탐했다.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행위가 눈에 띄게 능숙해졌다. 그러다 카르한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대 머리판을 부수고 말았다.
카르한은 무척 당황해하더니, 일리아가 부서질까 봐 겁이 났는지 그때부터 아주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감질 난 일리아가 카르한의 어깨를 잡았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역시 전직 사령관의 힘을 얕보아서는 안 됐는데.”
상념에서 빠져나온 일리아는 겨우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카르한은 이미 일어나 있는 일리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리아, 벌써 일어났습니까?”
“저절로 눈이 뜨였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잠시 섬 뒤편 별장에 다녀왔습니다.”
일어나면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음식을 받아왔다고 카르한이 말했다. 일리아가 고용인들과 최대한 마주칠 일 없도록 직접 다녀온 것이다.
“나중에 갔다 올 걸 그랬습니다.”
침대 귀퉁이에 앉은 카르한이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투와 달리, 카르한은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기력이라도 보충한 것처럼 아주 반짝반짝해 보였다. 아직도 허리가 아픈 일리아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카르한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일리아는 심술부리려던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저렇게 좋아하니, 괜히 부끄럽고 머쓱해진 것이다. 일리아 쪽으로 조금 더 당겨 앉은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근육통이 조금 있어요. 오늘은 침대에서 쉬어야겠어요.”
“어제 제가 절제를 못 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르한이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난 좋았어요.”
그제야 카르한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일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살짝 기댔다.
“다음에는…… 더 자제하겠습니다.”
“다음이라뇨?”
일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자, 카르한이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에 일리아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러다가 카르한을 놀리는 데 재미 들리면 어쩌나 싶었다. 겨우 웃음을 거둔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였다.
“꼭 다음이어야 해요?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는데요.”
그 말에 카르한이 기울였던 몸을 똑바로 해, 일리아를 마주했다. 자연스럽게 침대 머리판을 잡으려던 카르한은 조금 급하게 속삭였다.
“여긴 안 될 것 같으니…… 옆방으로 가겠습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훌쩍 안아들었다. 제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응시하던 일리아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첫날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섬에서 사흘을 보냈다. 가끔 해변을 산책하거나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침실에 박혀 있었다. 산책하는 사이에 고용인이 와서 방을 치우고, 그 외에는 카르한이 손수 돌봐주었기에 불편한 점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아침. 섬에서 출발한 일리아 일행은 점심 무렵 육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는 도시를 돌며 관광하고 내일 오후에 수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유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친지들에게 나눠줄 관광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쇼핑을 시작했다.
“이건 특이하네. 열 개 주세요.”
“옙!”
일리아의 말에 가게 주인은 잇몸이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부호가 방문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일리아가 들어오면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상자를 포장하는 사이, 일리아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유리로 만들어진 볼을 만지작거렸다. 투명한 유리 안에 흰 모래와 조개껍질이 담겨 있었다.
“마음에 들면 사요. 그건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드니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고민하다가 유리 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건 방에 두고 싶습니다.”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고 카르한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열 개 살까요?”
“……두 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이 둘러 거절하자, 일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쇼핑 목록에 유리 볼 두 개도 추가되었다. 길었던 쇼핑이 끝나고 일리아는 고용인들에게 따로 자유 시간을 주었다. 이제부터 카르한과 단둘이서 관광할 생각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눈에 튀지 않는 간편한 차림새로 갈아입고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유명한 관광지도 들르고 특이한 건물도 구경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파는 맛있는 간식도 사 먹었다.
“사이가 참 좋아 보이시네요. 혹시 부부신가요?”
오징어를 굽던 노점 주인이 물었다.
“예, 얼마 전에 결혼했습니다.”
카르한이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딱 좋을 때네요. 남부에서 좋은 추억 많이 쌓으시고 가세요.”
노점 주인의 말에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으로 구운 오징어를 손에 든 카르한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일리아, 우리가 부부처럼 보이나 봅니다.”
“그러게요. 바로 알아보네요.”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이 귀여워서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한창 돌아다니던 중, 더위를 먹은 일리아가 그늘 아래에서 멈춰 섰다.
“더워요. 목도 좀 마르고.”
그 말에 카르한이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근처에 음료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카르한은 곧바로 음료를 파는 가게로 향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얇은 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일리아는 옷감 아래에 숨겨진 몸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더위를 먹은 몸이 다시 달아오르자, 일리아는 손바닥으로 부채질했다.
멍하니 카르한을 기다릴 때였다. 급하게 걸어오던 누군가가 일리아와 부딪쳤다.
“죄, 죄송합니다.”
세게 부딪친 것은 아니었기에, 일리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개를 숙인 남자아이는 금방 갈 길을 가버렸다. 곧이어 손에 음료를 든 카르한이 돌아왔다.
“레몬 에이드 사왔습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차가운 레몬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더위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가게에 들어가서 쉬는 건 어떻습니까?”
“음.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은데…….”
카르한이 무리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자, 일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쉬다가 움직여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잠시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저희 가게는 선불입니다.”
가게 문 앞에 서 있던 점원의 말에 일리아는 자연스레 가방을 열었다.
“어?”
가방이 텅 비어 있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뜨렸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카르한……. 나 소매치기 당했나 봐요.”
아까 남자아이와 부딪쳤는데, 그때 소매치기 당한 것 같다고 일리아가 설명했다. 하필 카르한도 남은 돈이 없었다.
“어쩌지요.”
카르한이 난감한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버렸기에, 마차 삯을 마련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걸어가게 생겼다. 수중에 있는 물건이라도 팔아야 하나 카르한이 고민하는 사이, 일리아가 말했다.
“돈 좀 마련해야겠어요.”
“……예?”
“따라 와요.”
의아해하던 카르한은 일단 일리아를 따라 가게를 나왔다.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작게 조성된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 한쪽에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고운 모래가 쌓여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일리아는 모래를 살살 팠다. 그러자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구리 동전 하나가 굴러 나왔다. 카르한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일리아가 말했다.
“아주 가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써먹는 방법이에요.”
일리아는 구리 동전을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원을 나온 일리아는 곧장 노점을 찾아가 가장 저렴한 복권을 구입했다. 즉석에서 당첨을 확인할 수 있는 복권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르한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
1등이었다.
일리아는 1등 당첨 금액이 적힌 복권을 들고 은행에 들러, 당첨금을 수령했다. 그 과정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카르한은 놀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곧장 마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고용인들을 발견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가씨, 그게…….”
고용인들은 하나둘씩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잠깐 구경하는 사이 지갑이 없어졌어요.”
“저도 주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가 사라졌어요. 정말 소중한 건데…….”
일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만 소매치기 당한 것이 아니었다.
“카르한, 아무래도 경비대를 찾아가봐야겠어요.”
“근처 경비대 위치를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카르한이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러 간 사이, 일리아는 고용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사실 일리아는 제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범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경비대에 들르는 것도 귀찮았고 무엇보다 귀중한 휴가를 망치기 싫었다. 하지만 고용인들마저 피해를 입었다 하니,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위치를 알아낸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경비대로 향했다. 경비대 건물로 들어서니,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경비대원들이 바짝 긴장하며 일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들은 카르한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요즘 카르한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지만, 흔히 볼 수 없는 체격과 사나운 인상은 괜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장소가 이런 곳이면 더더욱 말이다.
경직된 반응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카르한을 대신하여 일리아가 대답했다.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일리아의 말에 경비대원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경비대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진술서 쓰시고 돌아가십시오. 범인을 찾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바로 수사가 들어가나요?”
“뭐……, 크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찾으려는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아, 카르한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우린 내일 올라가야 합니다.”
경비대원은 긴장한 듯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나마 뭔가 하려는 시늉을 보이자,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서 진술을 시작했다.
“피해를 입은 장소는 어디입니까.”
“흰 갈매기 분수대 근처였어요.”
“피해 금액은요?”
“정확하진 않지만, 20만 크로엘 정도요?”
일리아의 대답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른 일 하던 경비대원들도 전부 이쪽을 바라보았다.
“2, 20만이요?”
진술을 받던 경비대원이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경비대원이 다시 말했다.
“금액을 정확히 말해주십시오.”
“아, 적게 말했네요. 제 고용인들의 피해금액은 합산하지 않았거든요.”
농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가 일리아를 슬쩍 훑으며 물었다.
“……그, 성함이……?”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블로든……?”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모든 경비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더 편한 의자가 있습니다.”
“차라도 타 올까요?”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
“아뇨, 저는 소매치기범만 잡으면 되거든요.”
“당장 잡아오겠습니다!”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갔다. 진술서를 작성하던 경비대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보니, 소매치기범이 많습니다. 하지만 귀족의 소지품에 손을 대는 간 큰 놈들은 잘 없지요.”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그 대상이 귀족이라면 처벌 수위부터 달랐다. 하지만 일리아와 카르한은 아주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귀족인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설명을 마친 남자는 긴장한 듯 목울대를 움직였다. 블로든 가문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전부 시말서를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이 잘 풀리면 포상금을 받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겠습니다.”
예상가는 곳이 있다며,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원들이 돌아왔다.
“잡아 왔습니다!”
그들에 비해 체구가 유독 작아 보이는 소년이 질질 끌려 들어왔다. 차림새를 보니 아까 길거리에서 부딪쳤던 소년이었다.
“지갑에 너무 큰 금액이 들어 있어서 겁먹은 모양입니다.”
자기들끼리 소란을 피워서 금방 붙잡을 수 있었다고 경비대원이 자랑스레 말했다. 움칠거리던 소년은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자, 잘못했어요.”
소년이 두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카르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년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카르한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피해자가 많은데, 다른 물건도 네가 훔쳤니?”
“아니에요!”
소리친 소년이 지레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일리아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지갑을 내밀었다. 지갑은 텅 비어있었다. 일리아가 가만히 쳐다보자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돈은 꼭 갚을게요.”
“이미 썼어?”
“형들이 전부 뺏어가서…….”
아이들에게 소매치기를 시키는 놈들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경비대원들은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가라앉은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일리아는 프란체를 떠올렸다. 빈민가 소년이었던 프란체도 일리아의 지갑을 훔친 것으로 인연을 맺어, 지금은 블로든 가문의 기사가 되었다.
“어떻게 갚을 건데?”
“그건…….”
일리아의 물음에 소년이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뭐든 할게요.”
“좋아.”
일리아는 속으로 결정을 끝냈다.
‘이제 프란체에게도 제자가 생길 때가 되었지.’
십 년째 막내라고 투덜거리는 프란체에게 새로운 막내를 붙여줄까 싶었다. 물론 성실함과 진실성을 먼저 봐야겠지만 말이다. 검술에 재능이 없다면 고용인으로 삼아도 될 거고…….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경비대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착취하는 범죄 조직이 있는 모양인데, 수색해야지 않겠어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영주님의 명령이 없으면 못 움직입니다.”
경비대원이 단호히 대답했다. 아무리 블로든이라 한들, 신분은 백작에 불과했다. 그것도 백작 본인이 아닌 딸이 다른 지역의 공권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곳 영주는 후작으로, 블로든보다 신분이 높으니 일리아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경비대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카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영주를 만나면 되겠군요.”
“예?”
경비대원은 이내 헛웃음을 삼킨 채 대답했다.
“영주님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영주께 전하십시오.”
그의 말을 잘라낸 카르한이 좀 더 힘주어 말했다.
“에반테온 공작이 기다리고 있다고.”
***
연락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주가 직접 경비대로 찾아왔다. 아직 남부에는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에반테온 공작 부부가 신혼여행을 왔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었다.
영주는 카르한에게 굽실대느라 여문 벼처럼 허리를 펴질 못했다. 요즘 카르한의 위세는 몰아치는 파도와 같았다. 카르한은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데다가 국무 회의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했다.
영주는 그런 카르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성으로 모시겠다며 눈을 빛냈다. 카르한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딱 한 마디만 했다.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리더군요.
-……경비대를 새로 꾸려서 소탕하겠습니다!
영주는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확답을 듣고 나서야 일리아와 카르한은 경비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고작 반나절 사이,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경비대원들은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지금껏 잡지 못한 게 아니라, 잡지 않은 것인지 아이들을 내세워 돈을 벌어오던 놈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왔다. 훔친 물건을 팔아넘기는 경로도 수색한 듯, 고용인들이 도둑맞은 귀중품들도 모두 돌아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범죄에 연루된 아이들을 보호할 시설을 물색하고, 보육 교사를 고용했다. 앞으로 아이들은 소매치기 대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될 터였다.
할 일을 마친 일리아와 카르한은 아쉬움을 삼킨 채 마차에 올라탔다. 화려한 관광 도시의 이면에 일리아는 씁쓸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도 뿌리까지 뽑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가난과 범죄가 태어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창밖을 응시하던 일리아가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혼여행까지 와서 일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카르한은 대답 대신 일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딱 붙어 앉은 카르한이 대답했다.
“저는 일리아의 그런 다정한 면을 좋아합니다.”
“…….”
“그리고 기뻤습니다. 드디어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항상 일리아가 하던 일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이제는 직접 관여하고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카르한은 뿌듯해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리아가 손에 깍지를 꼈다. 손끝에서부터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항상 내게 도움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카르한.”
카르한은 소리 없이 웃다가 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일리아는 다른 손으로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아이들 보니까 귀엽더라고요. 이제 우리도 슬슬 아이 생각을 해봐야겠죠?”
그 말에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몇 명 정도가 좋을까요?”
“음…….”
카르한이 생각에 잠긴 사이, 일리아가 먼저 말했다.
“역시 셋 정도는 낳아야겠죠?”
순간 가슴이 섬뜩해진 카르한은 잠시 잊고 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가 좀 많네요. 그것도…… 세쌍둥이?
설마, 아니겠지. 카르한은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
늦가을에 접어든 동부는 사방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가득했다. 천천히 후원을 걷던 레베타는 잠시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단풍을 올려다보았다.
단풍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붙어있었다. 아등바등 가지를 붙들던 단풍이 끝내 추락하자, 레베타는 그제야 걸음을 돌려 후원을 벗어났다.
그녀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차와 수프로 식사를 마친 후 정원을 산책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가문의 살림을 맡아 일하다 보면 하루가 끝났다.
집무실로 들어온 레베타는 이번 달 저택 관리비 예산을 짜기 위해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잠시 후 복도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펜촉 소리를 덮어썼다.
“아가씨 앞으로 선물이 왔습니다!”
레베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고용인을 맞이했다. 꽃다발과 작은 상자를 건네받은 레베타는 상자 겉에 적힌 수신인을 먼저 확인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의 이름이었다. 레베타는 상자부터 열었다. 작은 상자 안에 바다를 연상케 하는 기념품이 담겨 있었다.
카르한이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한 결혼식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아마 이건 남부에서 구입한 기념품일 것이다.
한참 동안 기념품을 만지작거리던 레베타는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마.
레베타는 카르한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수도를 떠나 친가로 내려왔다. 남편의 장례식은 물론이고 카르한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저택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그럼에도 때때로 궁금해졌다. 카르한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지내고는 있는지……. 그러다가 두 달 전, 카르한에게서 선물이 왔다.
편지 하나 없이 물건만 달랑 보내왔지만, 레베타는 무척이나 기뻤다. 완전히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은 아직 이어져 있었다. 그 후로 가끔씩 이렇게 작은 선물이 오곤 했다.
“…….”
레베타는 아까 내려놓은 펜을 힐끗 보았다. 카르한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순간, 카르한은 가끔 물건을 보내오는 것조차 끊어낼 것이다. 유일한 소통의 창구조차 닫히는 거다. 결국 편지를 보내는 것을 단념한 레베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랑했던 남편은 아들의 손에 살해당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아들은 제 손으로 내쳤다. 심지어 블레어드의 소식은 전혀 들려오는 바가 없으니,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었다.
장식품을 상자에 집어넣은 레베타는 고용인을 불러 화병을 가져오라 일렀다. 화병이 마련되자, 직접 포장지를 풀어서 꽃을 꽂기 시작했다. 꽃꽂이를 갈무리한 그녀는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도 그랬지…….”
레베타는 종종 문가에 놓인 꽃을 보며 위로 받았다. 블레어드가 놓고 간 것이라 어림짐작하지 말고 진작 알아보았더라면……. 부질없는 후회를 곱씹던 레베타는 눈을 감았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저를 어머니라 불러주던 카르한의 마지막 모습을.
겨우 꽃에서 시선을 거둔 레베타는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이만 주어진 일과를 처리해야 했다.
그녀는 후작 가문 살림을 도맡는 대신, 친부인 후작에게 봉급을 받았다. 그 돈은 전부 카르한에게 송금했다. 비록 연락은 하지 않아도 자신이 쓴 사채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내일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였다.
***
신혼여행지에서 돌아온 일리아는 가족들에게 선물을 돌렸다. 비올레에게는 조개껍질을 오려서 칼집에 박아 넣은 단도를, 클리프에게는 레몬 묘목을, 헤인리에게는 남부의 풍경화를 선물했다. 선물을 받고 무척 흡족해하던 가족들은 자기들도 선물이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시계탑을 짓고 있단다.
-네?
깜짝 놀란 일리아는 비올레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신혼여행을 간 사이,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특별한 선물을 주기 위해 얼굴을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다 모두가 두 사람의 결혼을 알 수 있도록 이름이 새겨진 시계탑을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시계탑은 공공시설이니 제국민들도 반기는 눈치였다.
그리고 일리아의 지갑을 훔쳤던 소년은 프란체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에 프란체는 막내 자리를 졸업한다는 사실에 마냥 신이 났지만, 자신이 소년의 스승이 된다는 사실에 진지해졌다. 지금은 매일매일 소년을 데리고 수련에 들어갔다.
일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온천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으며, 일리아는 새로운 후원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자선 행사를 계획했다. 카르한은 공작저 업무를 처리하면서 틈틈이 남부의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오늘, 일찍 업무를 처리한 일리아는 오랜만에 에반테온 공작저로 향했다. 카르한은 신혼여행을 다녀오느라 일이 많이 밀린 탓에, 오늘은 불가피하게 공작저에서 외박할 예정이었다. 그런 카르한을 위해 일리아가 직접 간 것이다.
“카르한, 나 왔어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해요.”
“잠깐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좀 걸을까요? 꽃밭 구경하고 싶어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저를 위해 직접 조성한 라벤더 꽃밭이 잘 있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초겨울로 들어설 무렵이라 그런지 꽃은 전부 진 상태였다. 일리아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년에 만개하면 보러 와야겠어요.”
“그때는 더 많이 심어두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요.”
일리아는 작게 웃으며 카르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의 손을 마주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후원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업무에 대한 것보다는 주로 블로든 가문에서 일어난 일이 화두에 올랐다.
“……그래서 백작님께서 정원 귀퉁이에 양배추 농장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아버지가요?”
“예, 본인이 재배하면 대부분 죽는데, 제가 키운 건 다 잘 자란다고…….”
클리프는 원예를 취미로 삼았으나 키우는 것마다 족족 죽었다. 그나마 오래 키운 것이 순무였는데, 카르한이 분쟁지로 떠나면서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카르한이 순무를 잘 키워온 데다가 그가 준비해준 라벤더 모종도 훌륭한 꽃밭으로 조성해서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당신 바쁘잖아요. 대신 거절해줄게요.”
“그래도 휴일에 틈틈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일엔 나랑 있어야죠.”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같이 농장을 꾸미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나쁘지 않네요.”
일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과 함께 하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한참 후원을 산책하던 중, 일리아가 몸을 짧게 떨었다. 깜짝 놀란 카르한이 멈춰 서서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춥습니까?”
“사실 어제부터 몸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바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카르한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일리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후원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곳으로 들어왔음에도 일리아가 몸을 잘게 떨자, 카르한은 걱정스레 말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이 심각해 보여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반테온 가문의 의원이 단걸음에 달려왔다.
“각하, 무척 오랜만입니다.”
카르한은 원체 건강한 체질이라, 의원을 부를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진 온 지 일 년도 더 넘은 것이다. 진료 가방을 내려놓은 의원이 질문했다.
“전에 제가 드린 약은 다 드셨습니까?”
“약이요?”
대신 대답한 일리아가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잠시 그 일을 잊고 있었던 카르한이 난감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렸다. 이전에 카르한은 심장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약을 처방 받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병이 아니라, 두근거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망설이던 카르한은 전부 실토했다.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몸에 이상 없는데, 약을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사실 제가 그때 드린 건 심장 약이 아닙니다.”
“네?”
일리아와 카르한이 동시에 의원을 쳐다보았다.
“몇 번을 진찰해 봐도 몸에 이상이 없으셔서 영양제를 처방해드렸습니다.”
숨겨진 진실에 카르한은 충격 받은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약을 챙겨 먹었건만, 영양제였다니. 술과 함께 복용해도 문제없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했는데…….
“그래서 오늘은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의원은 일리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카르한이 아플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감기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해서요.”
“바로 진찰해드리겠습니다.”
일리아가 증상을 말하자, 의원은 가방에서 진료 기구를 꺼냈다. 일리아의 팔을 잡고 맥을 짚던 의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다시 눈을 지그시 감은 의원이 맥을 짚었다. 이내 의원이 눈을 번쩍 떴다. 의원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일리아와 카르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의원이 말을 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하셨습니다.”
일리아는 멍하니 의원을 바라보았다. 카르한 또한 그대로 굳어진 채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일리아가 되물었다.
“……다시 말해주겠어요?”
“감기가 아니라 임신하신 겁니다. 초기로 보이니 주의할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임신을 확정 지은 의원이 주의해야 할 것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일리아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의원이 계속 뭐라고 말하는데 머릿속에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넋 놓고 있는 일리아와 카르한을 보며 그가 싱긋 웃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 진료일 때 뵙겠습니다.”
의원이 왕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뒤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뒤늦게 화드득 어깨를 떨며 정신 차렸다. 서서히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 또한 똑같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단, 오늘은 블로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집사를 불러, 해야 할 일을 일러둔 후 일리아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내가 엄마가 된다고?’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리아는 종종 아이를 갖게 될 미래를 막연히 상상해왔다. 그런데 막상 임신했다는 말을 들으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아무 느낌도 없는 이 배에 새로운 생명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어느덧 마차는 블로든 백작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얼마나 깊이 생각에 잠겼던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마차 문이 열리고, 카르한이 먼저 내렸다. 일리아가 발을 뻗자,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다가 팔을 내밀었다.
“제가 안아서 내려드리겠습니다.”
“혼자 내릴 수…….”
카르한의 눈매가 축 처지자 일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카르한은 무척 안정적인 자세로 일리아를 안아들었다. 사뿐히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나왔다.
“일리아, 오늘 자고 온다고 하지 않았니?”
비올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헤인리가 고갯짓했다.
“날이 추우니 일단 들어가는 게 좋겠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니 훈훈한 기운이 일리아를 감쌌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클리프가 따뜻한 차를 준비시켰다.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일리아와 카르한을 보며,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있어요.”
일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다들 긴장했는지 어깨를 굳혔다. 카르한의 손을 잡은 일리아는 쑥스럽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헤인리가 들고 있던 찻잔이 두툼한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찻잔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임, 임신?”
클리프가 더듬거리며 묻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초기래요.”
“맙소사!”
클리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니!!”
멍하니 있던 비올레와 헤인리도 뒤늦게 정신 차렸다.
“네가 아기를 가졌다고……?”
비올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중얼거렸다.
“당장 전 지역 상단에 연락을 돌려서, 임산부에게 좋은 것들을 사들여야겠어.”
“인테리어 전문 업자를 불러야겠습니다. 아예 층 하나를 내어서 아기 방을 만들고…… 화가도 고용하는 게 좋겠지요?”
아기의 성장 일지를 전부 초상화에 담을 거라고, 헤인리는 포부를 품었다. 뒤에서 할아버지가 된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클리프가 소리쳤다.
“인형극장을 사들여야겠어요! 우리 손주가 좋아할 테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의 취향을 멋대로 정해버린 클리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부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의 모습에 일리아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다들 뛸 듯이 기뻐해주니 이제야 실감났다.
“진정하세요. 막 진단 듣고 와서 아무것도 몰라요.”
일리아의 말에 저마다 부푼 꿈을 키워가던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겨우 침착해졌다.
“오늘부터 일은 최대한 줄이렴.”
“그래.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지.”
비올레와 헤인리가 연이어 말했다. 그들의 조언에 일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일리아가 직접 운영하는 사업들은 한창 커져가는 중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의원도 무리하지 말라 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제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은 전부 처리해두었기에 급할 건 없었다.
“알겠어요.”
“잘 생각했다. 일리아, 정말 축하한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웃던 클리프는 빙글 몸을 돌려, 카르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합니다. 천사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와주었군요.”
계속 말이 없던 카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은 푹 쉬렴.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그래, 왔다 갔다 하느라 피곤할 텐데.”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 봐요.”
일리아는 가족들에게 미리 저녁 인사를 한 후에 응접실을 나왔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문득 오늘따라 카르한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의 얼굴은 경직되다 못해 심각해 보였다. 혹시 카르한은 임신 소식이 달갑지 않은 걸까. 침묵 속에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기쁘지 않아요?”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혼자만 들뜬 것 같아서 좋았던 기분마저 가라앉았다.
“그게 아니라.”
다급하게 말을 꺼낸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중얼거렸다.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뭔데요? 말해 봐요.”
“실은, 길에서 우연히 점술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카르한은 이전에 만난 점술사에게서 들었던 점괘를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일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세쌍둥이요?”
“예…….”
카르한이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오자 뒤늦게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점술사가 틀렸을 수도 있고…….”
“제 과거를 전부 맞추었습니다.”
나름 신뢰할 만했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이전에 자신의 운명을 점쳐주었던 점술사가 생각났다. 그 점술사가 저보고 세쌍둥이를 낳을 거라 말했다면 자신도 믿었을지 몰랐다.
“한 명도 힘든데……, 분명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카르한의 눈동자는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일리아는 손을 뻗어 카르한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괜찮을 거예요. 나보고 큰일이 생긴다고 한 건 아니었잖아요.”
카르한은 침묵했다. 일리아의 말처럼 점술사는 고생할 거라 했지, 어디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긴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이렇게 작은 체구로 아이를 품고 낳을 일리아를 떠올리면 미안했다. 할 수만 있다면 건장한 자신이 대신 낳아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데요? 여기 우리 아이가 있다는데, 감상 좀 말해 봐요.”
일리아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배를 내려다보며 능청스레 물었다. 잠시 말없던 카르한이 허리를 숙여 일리아의 어깨에 이마를 얹었다. 그리고 일리아의 두 손을 꼭 쥔 채 속삭였다.
“당신이 아프지만 않다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합니다.”
사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카르한은 가슴이 벅차서 숨도 쉴 수 없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건 카르한의 인생에서 손꼽힐 정도로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라면 더더욱. 아직 어떤 정보도 모르지만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웠다.
카르한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 거예요.”
겨우 안심한 카르한이 일리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 사이로 흩어졌다.
“고맙습니다. 일리아.”
커다랗게 부푼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카르한은 고맙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작게 웃다가 카르한을 마주 안아주었다.
“나도 고마워요.”
함께 노력해서 좋은 부모가 되자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
일리아의 임신 소식이 전해지고, 블로든 저택은 평소보다 활기를 띠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일리아를 오냐오냐 하다 못해서 극단적으로 보호했다.
팔목 아플까 싶어 펜도 들지 말라며 대필하는 사람을 붙여주었고, 태교 음악을 연주할 악사를 항시 대기시켰다. 겨울에도 화초를 감상할 수 있도록 실내 정원을 만들었으며,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황족에게 진상할 상품까지 전부 쓸어와 일리아에게 먹였다.
카르한은 그날 이후 공작저로 출퇴근하지 않고, 블로든 백작저에서 업무를 보았다. 하지만 원로 회의나 국무 회의 때는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떨어지기 싫은지 한참 서성이다가 겨우 외출했다.
카르한은 일이 끝나면 곧장 일리아에게 달려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일리아의 손발이 된 것처럼 하나하나 보살펴주었다.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결국 일리아가 한 소리하자 조금 자제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람이 불면 날아갈 깃털처럼 대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카르한의 과보호에 시달린 지 두 달이 지났다.
카르한이 가문 회의로 외출하고, 혼자 침대에 누워있던 일리아는 배를 쓰다듬었다. 날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는 것이 신기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빨리 배가 불러오는 듯해서, 정말 세쌍둥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는 손을 뻗어 옆에 비치된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카르한이 열심히 읽는 육아 서적이었다. 하루에도 두세 권씩 꼬박꼬박 읽는 게 신기해서 자신도 한번 읽어볼까 싶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나야.”
“네, 들어오세요.”
일리아는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헤인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괜찮다면 함께 외출할까? 너도 답답할 테니 바람 쐴 겸.”
“외출이요?”
뜻밖의 제안에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생각해보면 헤인리와 단둘이 외출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다며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나가서 뭐 하는데요?”
일리아의 물음에 헤인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카 장난감이나 조금 살까 싶어서.”
일리아는 얼마 전에 비올레와 클리프가 아기 옷을 왕창 사들인 것을 떠올렸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갈아입혀도 남아돌 정도로 말이다. 이번엔 정말 조금만 사는 거겠지……?
외출하기로 마음먹은 일리아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헤인리는 감기 걸리면 안 된다며, 가장 두꺼운 외투를 껴입게 하고 목도리까지 둘러주었다. 다 입고 나니 뚱뚱한 아기 곰 같았다. 너무 과하다고 말하려는데, 헤인리가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모자도 하나 더 쓸까?”
“……그냥 이대로 나갈래요.”
하나 벗으면 두 개를 더 씌울 것 같아서 포기했다. 두 사람은 곧장 현관으로 내려왔다.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본격적인 외출이었다.
그들이 탄 마차는 아주 느리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한참 지나, 번화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달 만에 저택 밖으로 나왔더니 조금씩 바뀐 구석이 보였다. 특히 일리아와 카르한의 결혼을 기념 삼아 기증한 시계탑 공사가 제법 진행된 상태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일리아는 제 옆에 선 헤인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둘이서만 외출하기는 무척 오랜만이라 괜히 어색했다. 신경이 온통 헤인리에게 쏠려 있을 때였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
“앗.”
일리아의 몸이 휘청거린 순간, 헤인리와 프란체, 말렉이 동시에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헤인리가 일리아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프란체와 말렉이 빠르게 일리아를 살폈다. 헤인리가 일리아의 팔목을 놓아주며 물었다.
“일리아, 다친 곳은?”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셔서 괜찮아요.”
“……많이 놀랐겠어.”
그제야 헤인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일리아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돌부리를 노려보았다.
“뽑아버려야겠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 있다니.”
프란체는 돌부리를 위험물 취급하며 화를 냈다.
“관청에서 시설 관리를 소홀히 한 탓으로 보입니다. 당장 민원을 넣어야겠습니다.”
말렉이 말을 받자, 마지막으로 헤인리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매년 겨울마다 예산이 넘쳐서 애꿎은 도로를 엎더니, 정작 보수가 필요한 곳은 하지 않은 모양이야.”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공직자를 찾아내서 문초라도 할 기세였다. 세 남자가 돌부리 하나를 두고 난리 치자, 일리아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니, 이만 가요.”
돌부리를 맹렬하게 노려보던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리아를 둘러싼 채 걸으며 연신 두리번거렸다. 뭔가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당장 치워버릴 듯한 태도였다.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융단을 구해서 바닥에 깔아줄 것 같았다.
행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일리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일리아는 일단 가게라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 어느 가게부터 가실 거예요?”
“음, 도착했구나.”
헤인리가 멈춰 서자, 일리아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의 건물은 장난감 가게가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찻집이었다.
“쇼핑은요?”
“굳이 다리 아프게 걸을 필요는 없지.”
“?”
헤인리는 의아해하는 일리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일리아가 먼저 푹신한 소파에 앉고 헤인리가 옆에 앉았다. 공간은 넓었으나 손님이 없어서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메뉴판을 집어 든 헤인리가 물었다.
“뭐 마실래?”
“……과일 음료요.”
헤인리는 곧장 점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내려놓은 헤인리가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나는 부모님처럼 무턱대고 가게를 사는 건 좋아하지 않아.”
“…….”
“그럼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떠맡아야 하니까.”
일리아는 헤인리의 소비 습관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블로든 가문 사람치고 헤인리는 검소한 편이었다. 뭔가에 욕심낸 적이 드물었으며 쇼핑도 즐기지 않았다. 취미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니 돈 들어갈 구석이 적었다.
그나마 가끔 가족들 생일 선물을 살 때나 목돈을 쓰곤 했다. 뭔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게부터 사들이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는 성향부터 달랐다. 일리아가 그럴 수 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편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 시켰단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게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상자 몇 개씩 들고 온 그들은 일리아와 헤인리 앞으로 걸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특별히 엄선한 상품만 가져왔습니다!”
헤인리가 일리아를 보며 눈매를 접었다.
“고르기만 하렴, 일리아.”
헤인리는 외출 전, 수도의 가게들에 연락을 싹 돌렸다. 가장 좋은 물건만 선별해서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말이다. 판매업자들은 줄을 서서 상품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딸랑이를 보시면 안에 금가루와 다이아몬드를 넣어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우아하게 찻잔을 든 헤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딸랑이를 팔게 된 남자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음 물건을 꺼냈다.
“다음 물건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안목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헤인리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기회였다.
‘무슨 최고의 장난감 선발 대회도 아니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일리아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헤인리가 속삭였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니?”
“그냥 이 사람들을 저택으로 부르지 그랬어요.”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너랑 외출하고 싶었거든.”
일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헤인리와 사이가 좋아진 후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안하면서 한편으로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목마는 황실에 납품하려고 했던 것인데, 특별히 먼저 선보이는 겁니다.”
“괜찮아 보이네요.”
일리아가 처음으로 거들자, 헤인리는 식사하지 않아도 배부른 것처럼 미소 지었다.
“우리 가문에만 파는 조건으로 세 개 사도록 하지요.”
“세, 세 개나!”
판매업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납품한다 해도, 블로든 가문만큼 값을 잘 쳐줄 것 같진 않았다. 판매업자가 고맙다고 인사하려는데, 헤인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망가질 수도 있으니 전부 세 개씩 사야겠구나.”
그 말에 판매업자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만족스러운 쇼핑이 끝나고 판매업자들은 전부 되돌아갔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헤인리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계속 앉아 있었으니 좀 걸을까?”
일리아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찻집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가게를 발견한 헤인리가 혼잣말했다.
“나중에 각하께 드릴 건강식품을 사야겠어.”
일리아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처음 카르한을 만났을 때 천적을 상대하듯 탐탁지 않아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챙겨주고 있었다. 헤인리만 보면 도망치던 카르한도 요즘은 함께 외출할 정도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라버니.”
“응?”
일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충동적으로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물을까 말까 계속 고민해왔고, 가족이니 한 번쯤은 짚고 갈 문제이기도 했다. 그대로 멈춰 선 헤인리가 대답했다.
“별로 생각이 없구나. 아직은 일하는 게 좋거든.”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희 두 사람이 잘 사는 건 보기 좋지만, 나는 아직 가정을 꾸려야 할 필요성을 모르겠어.”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줄곧 하던 생각을 내놓았다.
“부모님도 재촉하지 않으니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정략혼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정략혼은 저도 반대예요.”
일리아가 미간을 좁히자 헤인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후계자 문제가 있으니 부모님도 고민이 많으시겠지.”
“그건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눈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헤인리가 속삭였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네 아이에게 물려주는 건 어떨까?”
깜짝 놀란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에요?”
“그래. 네가 둘 이상 낳아야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조카의 의견도 중요하겠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 생각을 해둔 듯했다. 일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나눠 봐요. 아직 모르잖아요.”
헤인리에게도 운명처럼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만약 헤인리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저는 오라버니의 생각을 존중하고 싶어요.”
헤인리는 팔을 들어 일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다정한 손길이었다.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조금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마차가 어찌나 느리게 달리는지, 저녁이 되어서야 블로든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거라.”
현관까지 마중 나온 클리프가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둘이 외출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요.”
헤인리가 덤덤히 받아치자 클리프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클리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선물을 샀단다.”
“……또 무슨 선물이요?”
“아까 나간 김에 아기 장난감을 구입했는데, 네 엄마도 똑같은 걸 사왔지 뭐냐.”
그래서 두 개가 되었다고 웃던 클리프는 지금 당장 보여주겠다며 먼저 걸음을 뗐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아까 헤인리가 사들였던 것과 똑같은 장난감이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클리프가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들긴 한데, 오늘 저도 똑같은 장난감을 샀거든요.”
“그래? 별 희한한 일이 다 있구나.”
신기하다며 다들 웃고 있을 때였다. 막 집으로 돌아온 카르한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퇴근하는 길에 사왔습니다.”
“뭔데요?”
“아기 장난감입니다.”
카르한이 들뜬 얼굴로 상자를 여는 순간, 모두가 웃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카르한만이 어리둥절해했다.
“제가 잘못 사왔습니까?”
“아뇨, 딱 좋아요.”
어쩜 다들 똑같은 장난감을 사온 건지……. 이래서 가족인 모양이라고, 일리아는 웃음을 삼켰다.
***
일리아는 마침내 온천 시설이 완공되었다는 서신을 받았다. 아직 본관과 여관만 지어졌을 뿐이나, 오랫동안 추진해온 대규모 사업이었기에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카르한.”
옆에서 뜨개질 하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온천 공사가 끝났다는데, 한번 가볼래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카르한이 작은 바늘처럼 보이는 뜨개바늘을 내려놓았다.
“개장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잘 지어졌는지 직접 보고 싶어요.”
카르한은 일리아의 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도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했으니……,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남들보다 배가 빠르게 불러왔지만, 아직까지는 문제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무섭다는 입덧도 일리아가 아닌 클리프가 해버렸으니 말이다. 물도 못 마시는 클리프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곰처럼 퉁퉁하던 그는 살이 쭉 빠져서 평균 체중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에 비올레는 슬퍼하며 온갖 산해진미를 사들였다. 하지만 산해진미는 식욕이 늘어난 일리아의 입으로 전부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임신 전과 비교해서 불편한 점은 많았다. 그래도 몸이 아픈 건 아니니 다행이라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온천 부지로 향했다.
일리아는 건물 외관을 둘러보고 감탄했다. 원형으로 지어진 건물은 햇빛을 받아 흰색으로 반짝거렸다. 규모가 크다 보니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안을 받았을 때도 만족스러웠는데, 완공된 걸 두 눈으로 보니 훨씬 마음에 들었다.
“도안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옆에 서 있던 카르한도 덩달아 감탄했다. 기둥에 새겨진 문양이 무척 섬세해서 미술관에라도 온 것 같았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당신이 첫 손님이에요.”
“돈 내야 할까요?”
카르한의 물음에 일리아는 작게 웃다가 제 뺨을 가리켰다.
“입장료는 입맞춤으로 받을게요.”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뺨이 아닌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일주일 치로 쳐줄게요.”
인심 썼다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정식으로 개장하지 않아서 주요 시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쭉 이어진 회랑을 걸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호수처럼 커다란 온천탕과 그 주위를 둘러싼 건물이 한눈에 보였다.
“여기에 가게들을 입점시킬 거예요. 실컷 놀다가 바로 식사하거나, 휴식 공간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데리고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카르한은 일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시선에 일리아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온천 이용해 볼래요?”
“……지금 말입니까?”
카르한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시험해보니 피부가 미끈해지더라고요. 발만 담가 봐요.”
일리아는 작은 탕으로 카르한을 이끌었다. 가족끼리 이용하기 좋아 보이는 탕에는 온천이 쉴 새 없이 퐁퐁 솟아나는 중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임신한 후로 항상 들고 다니는 가방에서 방석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방석에 일리아를 앉힌 카르한은 치맛자락을 잡고 묶어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탕에 발을 담갔다. 예상보다 뜨거웠는지 카르한이 흠칫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온천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습니다.”
카르한은 신기한 듯 온천을 살폈다. 금방 온도에 적응했는지 카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온천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깐 온천을 즐기던 카르한은 허리를 숙여 일리아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었다. 손에 힘을 다 빼서 그런지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왠지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발을 카르한에게 내어준 일리아가 다른 쪽 발을 들었다. 그대로 발을 내리치자 촤악, 하고 물이 사방에 튀었다. 순식간에 카르한의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일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 젖어버렸는데 이제 어떡해요?”
서서히 허리를 편 카르한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검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내리깔았던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가고,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담았다. 그 시선에 일리아는 웃음을 멈추었다.
외투 안에 입고 있던 셔츠가 점점 젖어들자 그의 몸이 드러났다. 저 아래에 숨겨진 몸이 얼마나 좋은지는 일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군살 없는 탄탄한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자 숨이 턱, 막혀왔다. 말없이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같이 가주실 겁니까?”
“……이제 여관도 사용할 수 있어요.”
카르한은 두 팔을 뻗어 일리아를 안정적으로 안아들었다. 그가 제 품에 쏙 안긴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두 사람은 곧바로 온천과 이어진 여관 건물로 향했다. 아직 개장하지 않아서 썰렁한 느낌이었으나, 다행히 침대와 침구는 구비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깃털처럼 사뿐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뒤돌아선 그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일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발을 짚고 일어선 일리아가 뒤에서 카르한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셔츠 마를 때까지 쉬다 갈까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그의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젖은 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카르한이 천천히 뒤돌았다. 일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경직된 근육이 풀어져서 그런지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를 내려다보는 카르한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겨우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안정기에는 괜찮다고 했어요.”
“……그럼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은 카르한이 일리아를 침대에 눕혔다. 일리아는 어느새 제 위로 올라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쭉 뻗은 목덜미와 옴폭 팬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손을 뻗어 쇄골을 살살 만지자, 카르한의 어깨가 움칠했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짝 거친 입술이 피부 위를 문질러왔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큼직한 손이 일리아의 원피스 리본 끈을 빠르게 풀어 헤쳤다. 원래도 품이 넉넉하던 임부복은 리본 끈이 풀리자 금방 벗겨졌다.
입술을 떼어낸 카르한은 일리아의 흐트러진 금발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마주했다. 달뜬 시선은 앞으로 주어질 쾌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