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외전 1장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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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1장

    녹음이 우거진 정원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았다.

    일과를 마친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라벤더 꽃밭은 바람을 따라 물결치고 있었다.

    카르한은 꽃밭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이 라벤더 꽃밭은 카르한이 직접 조성했다. 공작저에 일리아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하나하나 심은 것이다. 클리프가 모종을 구해주고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카르한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카르한은 혹시 모를 폭우를 대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다음 후원을 빠져나왔다. 날이 흐리니, 비가 오기 전에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마차 속도가 줄어들자, 빗방울이 천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물방울이 겹겹이 흘러내리는 창문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회색빛이었다. 우중충하게 젖은 건물, 웅덩이가 생긴 길바닥에는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파문이 일어났다.

    평소보다 한산한 거리는 우산 든 행인들만 서둘러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마침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깐. 마차를 세워라.”

    카르한의 말에 마차가 멈춰 섰다. 테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

    테시온은 더 묻지 않고, 우산을 챙겼다.

    “혼자 갔다 올 테니 여기 있어라.”

    “예? 하지만…….”

    “둘 다 젖을 필요는 없으니까.”

    테시온에게서 우산을 받은 카르한이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빗방울은 조금씩 굵어지더니 빗줄기가 되었다. 카르한은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가게로 들어섰다. 얼마 전에 일리아에게 줄 선물을 주문해두었는데, 지금 가져갈 수 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마침 오늘 오전에 들어왔습니다.”

    가게 주인은 잘되었다며, 곧바로 물건을 포장해주었다. 주문해둔 물건을 품에 안게 된 카르한은 행복한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아까는 보지 못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마 밑에 놓여 있었으나 바람이 부는 탓에 상자는 반쯤 젖어 있었다. 카르한은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멈춰 선 카르한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열린 상자 속에는 작고 하얀 강아지가 앉아 있었다.

    카르한은 우산을 쥔 채 바짝 굳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는 난감한 얼굴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추운지 낑낑거리던 강아지는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그렁그렁한 시선을 보냈다. 카르한은 우산을 강아지 쪽으로 기울여준 채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뒤늦게 ‘주워주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쓰라렸다.

    “분명 너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버려졌구나. 카르한은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해도 그 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한은 강아지가 재채기하자, 저도 모르게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미 눈에 띈 이상 모른 체하기는 글렀다. 카르한은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골목을 빠져나왔다.

    ***

    일리아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정원은 찻물을 끼얹은 것처럼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채화처럼 흐릿한 빛깔만 남아서 화창한 날과는 대조되었다.

    일리아는 비 내리는 풍경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것도, 운치 있는 정원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던 일리아는 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슬슬 카르한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일리아는 얇은 숄 한 장을 걸친 채 방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막 현관 안으로 들어오는 카르한이 보였다. 일리아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카르한!”

    이름이 불리자, 카르한이 그대로 멈추었다. 평소 같으면 웃으면서 일리아에게 다가왔을 텐데,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그게.”

    카르한이 변명하려는 그때, 그의 품 안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꼬물꼬물 튀어나왔다. 조그마한 새끼 강아지를 품에 안은 카르한이 야단맞기 직전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일리아……. 밖에서 비를 맞고 있길래 데리고 와버렸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아니, 이렇게나 착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거대한 덩치와 비교될 정도로 작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카르한은 무척 귀여웠다. 눈치 보던 카르한이 말을 덧붙였다.

    “내일 제가 공작저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뭐 있어요. 여기서 키워요.”

    일리아가 흔쾌히 승낙하자, 카르한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방에 들어온 일리아와 카르한은 비단 쿠션에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카르한의 품이 따끈따끈하고 좋았는지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금방 쿠션에 적응하고 넙죽 엎드렸다.

    두 사람은 몸을 낮춘 채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작은 동물은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저 신기했다. 강아지가 하품하자, 작은 혓바닥이 보였다.

    “귀여워…….”

    일리아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겨우 시선을 뗀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데려온 거예요?”

    “우연히 상자 속에 담겨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뗀 일리아가 카르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잘 데려왔어요. 우리가 강아지 한 마리쯤 못 먹여 살리겠어요?”

    이전 주인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돌봐주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일리아는 곧바로 수의사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로든 가문의 전속 수의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수의사는 강아지를 이리저리 살핀 후 진단을 내렸다.

    “제가 보기엔 생후 8개월 이상 된 것 같습니다. 덩치가 작은 것은 못 먹어서 그런 모양이고……. 지쳐서 기운이 없는 거니, 잘 먹고 푹 쉬어주면 금방 뛰어다닐 겁니다.”

    수의사는 주의할 사항을 전부 말해준 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가씨……. 사냥개들 간식을 좀 줄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들 뚱뚱해서 이제 토끼도 못 잡겠습니다.”

    블로든 가문은 사냥개를 몇 마리 들였지만, 정작 사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냥개들은 호의호식하며 날이 갈수록 살이 쪘다. 블로든 가문의 복지는 사냥개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속으로 반성한 일리아는 수의사에게 앞으로 간식을 줄이도록 하겠다며 약속했다. 수의사가 물러나고, 뒤이어 고용인들이 꼬질꼬질한 강아지를 데려다 깨끗하게 씻겼다. 방으로 돌아와 먹이까지 먹은 강아지는 통통해진 배를 바닥에 붙인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키우고 싶지만, 털에 예민한 고용인도 있을 테니…….”

    일리아는 강아지에게서 눈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이내 결심했다는 얼굴로 카르한에게 말했다.

    “정원에 강아지 집을 지어줘야겠어요.”

    작은 개집을 생각한 카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우면 무서울 테니까 천장에 샹들리에도 달아주고, 식당이랑 장난감을 모아둔 방도 만들고…….”

    “예?”

    카르한은 자신이 상상했던 개집과 거리가 무척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카르한이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산책로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요?”

    결국 카르한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리아 또한 블로든 가문의 일원이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다른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강아지를 돌보았다. 둘이서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저녁 무렵,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돌아왔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강아지를 들였다는 일리아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정말이지, 둘이 똑같구나.”

    비올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 너는 사람도 데리고 오더니…….”

    둘 다 정이 많아서 그렇다며 클리프가 허허 웃었다. 가족들은 강아지를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잘 키워보라며 응원해주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저녁을 먹은 후 또다시 함께 방에 틀어박혔다.

    “이제 이름을 지어줘야죠.”

    둘은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온갖 이름이 나온 후에 결국 포포라고 짓기로 했다. 빗방울 소리를 뜻하는 고대어였다. 비 오는 날에 찾아왔으니 나름 의미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포포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사방을 뛰어다녔다.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혼자서 호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일리아는 수의사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최고급 간식과 장난감을 사들였다.

    그 소식이 퍼지자, 온갖 강아지 용품이 블로든 가문으로 배달되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 포포는 길에 버려진 강아지가 아닌 제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일리아와 카르한의 애정을 듬뿍 받은 포포는 두 사람을 가장 잘 따랐다. 카르한이 퇴근할 때가 되면 둘이서 함께 현관으로 마중 나가곤 했다.

    “먹여주고 재워준 값 해야 한다?”

    오전 업무를 끝낸 후, 잠깐 포포와 놀아주던 일리아가 농담 삼아 말했다. 포포는 그저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일리아는 오후 업무를 보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아가씨! 포포가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며 고용인이 울상을 지었다. 일리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밭이라도 헤집었나 싶어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들어선 일리아는 구덩이가 여러 개 파인 정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운도 넘치지.’

    며칠 동안 잘 먹이고 잘 키운 것 같아서 흐뭇해졌다. 그래도 정원사가 고생하지 않게, 교육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뭐지?”

    일리아는 구덩이 속에 묻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표면이 매끄러웠다. 그때 포포가 달려와 다시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포포가 앞발로 흙을 좀 더 파자, 도자기의 표면이 드러났다.

    궁금해진 일리아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하고 흙을 털어냈다. 도자기를 꺼내든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보는 도자기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샅샅이 살피던 일리아는 도자기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입을 벌렸다. 역사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문양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준 값 해야 한다?

    일리아는 자신의 말이 씨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블로든 저택 부지에 매장된 유물이 터진 것이다.

    ***

    블로든 저택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 개도 아니고 다량의 유물이 한꺼번에 발굴된 것이다.

    일리아는 과거에 카르한을 가르쳤던 아카데미 교수, 메즈라 제니어스를 불러들였다. 세기의 천재답게 그는 고고학과 대륙 역사에도 지식이 해박했다.

    휴가까지 내고 단걸음에 달려온 메즈라는 방에 틀어박혀서 유물을 확인했다. 한참 지나서 방을 나온 메즈라가 흥분에 가득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대박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저택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일리아가 놀라서 쳐다보자, 겨우 침착함을 되찾은 메즈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년에 저는 아티카 고대 왕국의 터가 이슈타르 제국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아티카요? 멸망한 지 천 년도 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가설을 받쳐줄 만한 증거가 부족해서 논문 발표를 접었는데…….”

    메즈라가 몸을 바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 보여주신 물건은 고서에 적힌 유물과 전부 일치합니다.”

    메즈라는 아마도 블로든 저택 정원에 왕궁 터가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과거가 묻혀 있는 땅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아가 흔쾌히 말했다.

    “논문 발표하실 때까지 유물을 빌려드릴게요.”

    “……예?”

    메즈라가 놀라서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유물이었지만, 일리아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메즈라에게 받은 도움도 있고, 저보다 더 가치 있게 쓸 것 같았다. 그의 가설이 인정받는다면 제국 학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헉, 이 귀한 것을……!”

    메즈라는 감동한 나머지, 나중에 꼭 보은하겠다고 약조한 후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그날 일리아는 포포에게 포상으로 간식을 듬뿍 주었다. 어쩌면 포포가 유물을 더 많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박물관이라도 하나 지어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눈부셔서,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늦잠 잤다.”

    일리아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세수하고 옷만 갈아입은 후 곧장 카르한의 침실로 향했다.

    “카르한, 준비 다 되었어요?”

    “지금 막 다 했습니다.”

    마지막 단추를 잠근 카르한이 대답했다.

    “좀 더 자지 그랬습니까.”

    “중요한 날이잖아요.”

    오늘만큼은 배웅해주고 싶었다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정답게 침실을 나섰다.

    현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선 카르한은 잠시 벽에 걸린 초상화를 응시했다. 바네사가 그린 가족 초상화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카르한이 다정하게 담겨 있었다.

    초상화가 완성되자마자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이 자리에 걸어두었다. 저택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림 속의 카르한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어색함 하나 없이 환히 웃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은 채 걸음을 옮겼다. 현관 밖으로 나오자, 먼저 도착해 있던 헤인리가 일리아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리아, 좋은 아침이구나.”

    일리아는 헤인리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절반은 나이 차이 많은 동생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럼 둘이 이야기 나누렴.”

    헤인리가 먼저 마차에 올라탄 채 카르한을 기다렸다. 가끔 두 사람이 함께 출근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황궁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일리아는 얌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르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국무회의가 있을 때마다 카르한이 걱정되었다.

    이제는 거절도 곧잘 한다지만, 그래도 착한 본성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중앙 귀족들이 일부러 막 정계에 입문한 귀족의 기를 꺾어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들어서 더욱 걱정이었다.

    “혹시 누가 헛소리하면 한번 노려보고요.”

    일리아가 흘겨보는 시늉을 해 보이자, 카르한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던 카르한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일리아는 카르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와요.”

    “성공하고 오겠습니다.”

    일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카르한이 속삭였다. 마침내 카르한과 헤인리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손을 흔들어주던 일리아는 마차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팔을 내렸다. 새삼 날짜를 계산하던 일리아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시간 참 빠르네…….”

    카르한이 청혼한 지 한 달도 훌쩍 지났다. 일리아는 그의 청혼을 받아주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혼 날짜를 잡지 않았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일리아는 블로든 상단을 물려받기로 한 뒤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블로든 가문의 일원으로서 사업을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이슈타르 제국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의무였다. 카르한과 결혼하는 즉시 일리아 블로든이 아닌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불릴 터였다.

    일리아는 그것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혼은 일리아 개인의 문제였으나, 사업은 블로든과 관련된 문제였다. 에반테온의 성을 달고 블로든 상단의 대표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일리아의 고민을 눈치채고 먼저 제안했다.

    -결혼식은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때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제국에서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은 선례는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남편 쪽이 아내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올 때뿐이었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 쪽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원래 성을 쓰는 경우가 빈번했다.

    카르한은 자신이 법안을 고쳐보겠다고 말했고, 마침내 오늘 국무회의를 통해 결판을 보러 간 것이다.

    오래된 관습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분쟁과 다툼이 있을 테지만, 카르한은 일리아를 위해서 기꺼이 싸움에 참전했다.

    ‘성을 바꾸는 것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는 날이 온다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일리아는 현관까지 뛰어온 포포를 쓰다듬어준 후에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일리아도 외출 준비를 할 때였다.

    ***

    간만에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라, 황궁은 여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후로 국무회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황제의 눈치만 보며 설설 기던 과거와 달리, 발언권이 적었던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둥 좀 더 자유로워진 분위기였다.

    “에반테온 공작님이…….”

    국무회의가 시작되기 전, 회의장은 온통 카르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지 몇 달이 지났으나, 귀족들의 관심사는 단연 카르한이었다.

    카르한은 막 정계에 입문한 젊은 공작이지만, 유능했으며 수완이 뛰어났다. 그 증거로 카르한이 내거는 안건은 대부분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카르한은 공식적으로 현 황제를 지지했지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게 황실과 귀족 간의 중립을 적절히 지켰다.

    거기다 다른 고위 귀족들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 덕분에 귀족들 사이에서 카르한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저번 회의에서 어찌나 박력이 넘치시는지. 계속 꼬투리 잡던 백작이 조용해지던 거 다들 보셨지요?”

    “예, 각하께서 슥 쳐다만 보니, 바로 꼬리를 말더군요.”

    카르한을 흠모하는 귀족들은 이전 회의를 언급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저번 회의에서 카르한의 말에 자꾸 헛소리하던 백작이 있었는데, 카르한이 가만히 바라만 보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고작 눈빛 한 번으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카르한의 존재감에, 지켜보던 귀족들은 탄복했다. 특히 몇몇은 아주 감명 깊었는지 남몰래 카르한을 추종했다.

    “그나저나 슬슬 블로든 영애와 결혼하시겠지요?”

    “각하께서 블로든 저택에서 출퇴근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엇보다 헤인리 경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헤인리가 언급되자, 다른 귀족들은 저번 회의를 떠올렸다. 회의에서 카르한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세울 때, 뒤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던 헤인리를 못 본 사람이 없었다. 누가 보면 참관 수업이라도 들어온 보호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거나 말을 섞을 때는 철저히 공적으로 대했기에, 귀족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헤인리 블로든과 카르한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회의장 문이 열렸다. 귀족들은 잠시 떠들던 것을 멈추고 문을 응시했다.

    열린 문으로 카르한이 들어왔다. 각 잡힌 제복 아래에 드러난 떡 벌어진 어깨,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구. 일정한 보폭을 유지한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에 귀족들은 감탄했다.

    카르한이 자리에 앉자, 마지막으로 황제와 헤인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은 황제는 귀족들을 한 번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한쪽의 세력이 갑자기 늘어나면 견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둘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전부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방향이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권력에 욕심내거나 자신의 공을 과신하기보다는 자연스레 황제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황제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식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황제의 비서관이 된 헤인리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미리 올라온 안건을 중심으로 헤인리가 주제를 꺼내면 귀족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너도 나도 카르한과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 의욕이 넘쳤다.

    한창 회의에 불이 붙었을 때였다. 안경을 추어올린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안건은 결혼 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이 술렁였다. 보수파 귀족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안건은 누가 낸 겁니까.”

    술렁이던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침묵 속에서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접니다.”

    회의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안건이라 운운했던 귀족은 카르한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희게 질렸다. 조용히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빛이 매서워서, 그는 숨도 쉬지 못했다.

    회의장에 앉은 귀족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르한이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카르한은 무척 차분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다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릴 때,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왜 말도 안 되는 안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한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안건을 반대했던 보수파 귀족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겨우 숨을 내뱉은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내는 남편 성을 따르며, 그 자식들도 남편의 성을 물려받는다. 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꾸준히 지켜오던 법이었다.

    평민은 성이 없어서 논외였고, 다수의 귀족들은 부인이 성을 바꿈으로써 본적을 지워내고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르한이 반론하자,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와 같은 의견을 가진 보수파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카르한의 기세에 수그러들었던 보수파 귀족들이 슬금슬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각하.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그 법안을 아예 폐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부인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말하는 겁니다.”

    남편 성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은 지금의 법을 따르면 될 터였다. 그러나 원치 않는 사람은 원래 성을 가질 수 있도록 또 다른 선택지를 주자는 말이었다.

    “가주의 권위와 위신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노귀족 하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성이 다르면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겁니다. 호칭 문제도 생기겠지요.”

    “맞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여파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피해자가 속출할 거라며 보수파 귀족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가만히 듣던 카르한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누가 피해를 본다는 말씀입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방금까지 떠들어대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반대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처럼 부풀렸지만, 정작 실질적인 피해자는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기분과 위신만 상할 뿐. 카르한은 그것을 꼬집고 있었다.

    “호칭 문제는 차차 바꾸어 가면 됩니다. 지금의 규정도 자연스럽게 고착된 것이 아닙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들 적응할 겁니다.”

    보수파 귀족들이 카르한을 낯선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카르한을 이해하지 못하듯, 카르한 또한 보수파 귀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귀족들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본적을 전부 두고 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소속해온 가문을 말이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저와 같은 성으로 불리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 제게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했다. 일리아의 동반자가 되고 싶은 거지, 보호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비록 성이 다르더라도, 일리아와 자신은 가족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몇백 년 동안 유지해온 법안을 하루아침에 바꾸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카르한의 주장에도 보수파 귀족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제국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지나친 억측 아니십니까?”

    이윽고 카르한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맞불을 놓으며 순식간에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양측 진영끼리 대화가 통하질 않자, 조용히 지켜보던 황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보수적인 노귀족들은 황위가 바뀐 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황제의 세력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 새로운 세력인 카르한을 중심으로, 평생 따라왔던 규율을 뿌리 뽑자고 말하니 거부감이 생긴 것이다.

    가주로서 권위를 우선시하는 노귀족들이었기에 충분히 심기가 불편할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르한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황제가 바뀌었듯 제국도 바뀔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미간만 좁혔다. 점점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되자, 황제가 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헤인리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만하십시오. 지나치게 과열된 것 같습니다.”

    냉정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에 흥분해서 싸우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헤인리가 중재하자 황제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결론 내릴 만한 사항이 아니니, 다음 국무회의 때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귀족들은 결국 마지못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회의가 얼추 마무리되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어차피 바로 받아들여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법안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면 일리아는 평생 에반테온이라 불리게 될 테니 말이다.

    카르한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블로든 덕분이었다. 그러니 일리아가 끝까지 블로든을 지켰으면 했다.

    막 회의장을 나가려는 헤인리와 눈이 마주쳤다. 회의 내내 차가운 얼굴로 서 있던 헤인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제야 카르한은 표정을 풀고, 마주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서 카르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일리아는 카르한과 헤인리를 배웅한 뒤, 외출할 준비를 끝냈다. 점심 전에 사업장을 돌고 난 후에 신상품 출시에 관해 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비올레는 사업차 지방으로 출장을 가 있었기에, 평소보다 일리아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정표를 확인한 일리아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말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극단주가 찾아왔습니다.”

    “극단주? 웬일이지?”

    뜻밖의 손님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에 일리아는 리하트에게서 장난감 사업을 매입한 후에 인형극 극단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를 통해 블로든 가문에서 디자인한 인형을 연극에 올렸고, 그대로 대박을 쳤다.

    일리아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명한 극작가를 고용하여 세계관을 넓혀갔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인기가 늘어서, 덩달아 일리아의 장난감 사업 또한 쑥쑥 커졌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정도면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일리아는 곧장 극단주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극단주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하소연해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저희 극단 인형을 베낀 상품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세히 말해주세요.”

    그제야 극단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리아와 극단주가 합작한 인형극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후로, 극에 출연한 인형과 흡사한 상품이 시중에 많이 쏟아졌다. 인기에 편승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지만, 정품과 차이가 뚜렷했고 소송을 걸 수도 없어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품과 거의 똑같은 인형이 시중에 풀렸다는 것이다. 눈동자 색깔과 귀 끄트머리만 달라서, 가품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가품을 생산한 업체 측은 몰래몰래 상품을 팔아오다가, 이제는 대범하게 대형 잡화점까지 진출했다. 정품보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가 품질이나 모양까지 비슷하니, 블로든 측 인형의 판매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극단주의 설명이 끝나자,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말렉이 분노했다.

    “아니, 그렇게 뻔뻔한 놈들이 있단 말입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말렉이 호응해주자 극단주도 다시 흥분해서 펄펄 날뛰었다. 만약 이 자리에 다혈질인 프란체가 있었으면 벌써 뛰쳐나가고도 남았을 듯했다. 길길이 날뛰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예상했지만…….’

    제국은 유행이 하나 생기면 너도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세업자가 대박을 터뜨렸다가 다른 경쟁 업체가 교묘하게 따라 해서 망하는 일도 다분했다. 그런데도 원조라고 호소할 수 없는 이유는 전부 법이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베끼지 않는 이상은 승소하기 어려웠고, 재판 과정 또한 무척 길었다. 그나마 다들 블로든이라는 이름이 무서워서 자중하는 편이었으나…….

    “블로든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야.”

    일리아의 혼잣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쪽은 물 들어왔으니 열심히 노 젓는 중이겠지.”

    “예,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진열대에 저희 물건보다 가품이 더 많이 놓인 상점도 있습니다.”

    지금도 뻔뻔하게 생산 중일 거라며 극단주가 중얼거렸다.

    “아가씨, 신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놈들은 고소장을 받아야 합니다.”

    일리아는 괘씸해하는 말렉을 차분히 응시하다가 극단주에게 물었다.

    “인형극 속편을 제작 중이라고 했죠?”

    “……아, 각본이 절반 정도 나왔습니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어요.”

    “예에?”

    극단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리아는 남들이 보기에 무척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각났거든요.”

    그러나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말렉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욕했던 상대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

    “이제 떼돈을 벌겠군.”

    값비싼 펜으로 서명을 적어 넣은 남자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금고에 돈 쌓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남자는 아랫사람을 시켜 계약서를 전달하도록 한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로 단장한 집무실을 보니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영지도 없는 한미한 귀족 자식으로 태어나,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뎠던가.

    “이렇게 돈 벌기 쉬운데 말이야.”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그는 얼마 되지 않은 유산으로 사업을 하나 차렸다. 커다란 상단 밑에서 하청 일을 했는데, 저보다 더 작은 사업체를 짓밟으면서 목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어떤 사업을 할지 고민하던 그때, 인형을 팔아서 떼돈 벌었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남자는 무턱대고 장난감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상품과 비교해 장점 하나 없는 조잡한 인형이 잘 팔릴 리 없었다. 조급해진 남자는 인기 있는 상품을 베끼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판매량이 급격하게 늘었다.

    돈 맛을 본 남자는 점점 과감해졌다. 그러다 그는 블로든 상단에서 만든 인형과 거의 똑같은 상품을 출시했다.

    처음에는 보복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법이 허술한 만큼 블로든과 극단 측은 별다른 대응을 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남자의 사업은 원작 인형극의 인기에 편승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계약서도 보냈으니…….”

    그는 지금껏 벌어들인 돈에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합쳐, 사업에 투자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으니, 생산량을 대폭 늘릴 생각이었다.

    바짝 벌어뒀다가 블로든이나 극단 측에서 고소해오면 외국으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어차피 판결이 나오려면 최소 1년은 걸릴 테니 문제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관리인이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소란을 피우는 거냐.”

    “지금 환불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환불? 제품에 하자라도 생긴 건가?”

    그제야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관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며칠 전에 인형극 속편이 나왔는데…….”

    관리인이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남자가 베낀 인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형극의 속편이 공연을 시작했다. 속편 내용은 주인공인 검은 토끼가 거울 나라에 들어가, 자신과 닮은 악당과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악당 역으로 무대에 오른 인형은 남자가 판매하는 인형과 똑같았다. 원래 인형에서 눈동자 색깔과 귀 끝만 다른 것이다.

    무대에서 대놓고 가품을 악당이라고 선언하니, 가품을 산 아이들은 자기 인형이 악당이라며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이다.

    “그리고…….”

    관리인이 신문을 넘겨주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남자가 신문을 받아 읽었다. 상단에 인형 광고가 실려 있었다. 아예 지면 하나를 전부 사용한 광고였다.

    [최고의 인기 상품! 블로든 상단에서 나온 인형을 만나보세요.]

    [세탁 시에 물이 빠진다고요? 솜이 금방 꺼진다고요? 전부 가품입니다. 외양은 따라할 수 있어도 품질까지는 따라할 수 없습니다.]

    [정품은 우리 아이의 안전을 위해 좋은 원단, 좋은 솜을 사용했습니다. 구입 시에 상품에 붙은 상표를 확인하세요.]

    광고는 가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정품 구별법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으니, 뒤늦게 가품이라는 걸 알게 된 부모들이 뿔이 난 것이다. 남자는 신문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젠장. 단순 변심으로 인한 반품은 안 된다고 공문 띄워!”

    “항의가 들어올 텐데요.”

    “무시하면 되잖아!”

    “그럼 생산장은 어떻게 할까요?”

    환불 문의가 쏟아지는 지금도 생산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재고만 남아돌 것이다. 남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전 재산을 투자했는데…….”

    그는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생산장으로 향했다. 생산장 옆 창고에는 아직 판매하지 못한 상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당장 중지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직원들이 일을 멈추었다. 그는 창고에 산처럼 쌓인 상자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격을 대폭 인하하면 재고를 어느 정도 털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당장 손해를 메우고…….

    다시 마차에 올라탄 남자는 계약을 체결했던 상점으로 향했다. 상점 측에도 항의가 들어와서 달래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도착하자마자 가게 주인은 길길이 날뛰었다.

    “지금 당장 물건 다 빼세요!! 우리 가게 평판이 얼마나 떨어진 줄 아십니까!”

    “아니……, 갑자기 다 빼라니요.”

    “환불 문의를 받느라, 장사를 못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어떡하라고요. 물건을 안 받아주시면 오늘부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남자가 하소연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신 사정은 알 바 아니니, 전부 가져가세요!”

    가게 주인은 직원들을 시켜 상자를 가게 밖으로 내놓게 했다. 직원에게 떠밀린 남자는 가게 앞에 서서, 넋 놓고 상자를 바라보았다. 탑처럼 그득하게 쌓인 상자에는 인형이 꽉꽉 차 있었다. 심지어 창고에도 재고품이 가득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남자가 다시 가게 주인을 찾아 호소하려는 그때, 가게 앞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환한 금발을 가진 여인과 호위 기사로 보이는 장정 둘이었다. 그들은 남자를 힐끗 본 후에 가게 입구로 향했다.

    “아이고, 블로든 님.”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방금 남자를 매몰차게 내쫓아낸 가게 주인이 달려 나왔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는 가게 주인의 태도에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 블로든이라니…….

    “저희가 가품을 일부러 팔려고 한 건 아니고…….”

    열심히 변명을 내뱉던 가게 주인이 남자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품이랑 너무 비슷해서 헷갈렸지 뭡니까! 저 남자가 저희 가게에 가품을 넣은 자인데…….”

    금발의 여인과 호위 기사 둘이 동시에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윽고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옆구리에 찬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달그락,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에 남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금발의 여인이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계약은 해지하겠어요.”

    가게 주인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인형뿐만 아니라, 블로든 상단에서 출하하는 모든 상품을 빼겠다는 말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신나게 가품을 팔아서 돈을 벌다가, 더 큰 물고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금발의 여인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가게 주인을 뒤로한 채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대강 상황을 눈치 챈 남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그녀가 이름을 밝히자, 가슴이 철렁해졌다. 일리아 블로든이라면 블로든 가문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자, 새로운 에반테온 공작의 연인이었다. 그런 엄청난 상대가 눈앞에 서 있으니, 이마와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 물건을 베낀 게 그쪽인가요?”

    직설적인 물음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블로든 쪽에서 고소장을 보내오는 경우는 상상해본 적이 있지만, 직접 찾아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가 대답하지 못하자, 일리아의 호위 기사들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서 제 목을 칠 것 같은 시선에 남자가 소리쳤다.

    “잘못했습니다!!”

    남자는 넙죽 엎드려서 잘못을 빌었다.

    “제가 욕심이 생겨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자, 일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남자의 옆에 잔뜩 쌓인 상자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재고가 많아 보이네요. 전부 버리기는 아까운데.”

    일리아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부 제 피 같은 돈을 투자해서 만든 상품이었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물건은 악성 재고나 다름없었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창고 대관비가 들어가니 여기서 더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버리는 것이 맞았다. 참담해진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말렉, 보육원에 기부할 솜이불이 몇 채 필요하다고 했지?”

    “300채 정도입니다.”

    “좋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다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보는 방법이 있어요.”

    “……예?”

    놀란 남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한테 재고품 전부 팔아요. 물론 유통비 빼고 재료 원가로.”

    “그럼 남은 빚은 어떻게…….”

    직원들 봉급과 부자재 값, 토지 대여비 등등 들어간 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재료 원가만 받으라니……. 남자가 뒤늦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자, 일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정직하게 갚아야지 않겠어요?”

    일리아는 빨리 선택하라는 듯 눈짓했다. 남자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말렉이 말했다.

    “이미 수도의 모든 가게에 공문이 돌았으니, 상품을 받아주는 곳은 없을 겁니다.”

    “이야, 쓰레기 매립비용도 만만찮겠네요.”

    “버리는 것도 돈이니까.”

    호위 기사 둘이서 들으라는 듯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자는 결국 남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겠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일리아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남들이 보기엔 무척이나 상냥해 보이는 미소였으나, 호위 기사 둘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먼저 걸음을 뗀 일리아가 말했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계약서 쓸까요?”

    ***

    오랜만에 돌아온 휴일이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한여름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자연스럽게 카르한이 생각났다.

    요즘 카르한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일이 많이 바쁜가 싶어서 걱정하니, 헤인리가 그 이유를 대신 말해주었다.

    -안건이 아직도 통과되지 못했거든.

    카르한은 결혼 시에 아내가 남편 성을 따라야 하는 법안을 개정한 후에 결혼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안건을 꺼낸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흘렀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어제도 카르한은 어깨가 축 처져서 들어왔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일리아는 카르한도 오늘 휴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카르한.”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뚝뚝하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맺혔다. 카르한은 곧장 일리아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이라기엔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아요?”

    “일리아가 방금 일어났으니 아침이지요.”

    그 말에 일리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카르한의 시간은 늘 일리아를 중심으로 흘렀다.

    “안 바쁘면 후원이라도 좀 걸을까요? 포포 산책 시킬 겸.”

    카르한은 하던 일을 미뤄두고 일리아와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정원에서 뛰어놀던 포포가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작은 목화솜 같던 포포는 잘 먹고 잘 자더니 구름처럼 몽실몽실하게 자랐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후원 그늘 아래를 걷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꽃 위를 맴돌았다. 후원의 풍경을 응시하던 일리아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피곤해 보여요. 많이 힘들어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지만, 카르한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법안 개정 건을 발의한 이후로 소회의가 몇 번 더 열렸다. 그러나 반대하던 이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신흥세력과 구세력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한 보수파 귀족들은 이전보다 더 심하게 반대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황제는 안건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보수파 귀족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르한과 황제가 과실을 맺을 가지라면, 그들은 제국을 받치는 뿌리였다. 제국을 균형 있게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보수파 귀족들과 척을 질 수 없었다. 카르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고 계속 조율 중이었다.

    “힘들지는 않습니다.”

    카르한이 짧은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카르한의 거뭇한 눈 밑을 바라보던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어요?”

    “…….”

    “우리의 일이잖아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카르한만의 문제가 아닌, 두 사람이 함께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망설이던 카르한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조율을 하지 못했습니다.”

    카르한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설명이 끝났을 때 카르한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내년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면 어쩌지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일리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잠깐 생각에 잠긴 일리아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받는 게 어떨까요? 반대하는 분들을 잘 아는 사람들 위주로요.”

    “아.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께 이야기해봐야겠습니다.”

    카르한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프가 주도하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은 보수 성향의 노귀족들로 구성돼 있었다. 대부분 정계에서 물러난 이들이었지만, 아직도 제국 각지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카르한을 손자처럼 예뻐해 주는 이들이니, 조언을 구하면 도와줄 것이다.

    “저도 조만간 황궁에 가려고요.”

    “황궁은 왜…….”

    “태후를 뵐까 싶어요.”

    전 황제는 깊은 곳에 유폐되었지만, 부인이었던 태후는 아직 황실에 남아 있었다. 황제를 보필하며, 보수파 귀족들을 통솔했다. 정계에 직접 나서진 않았으나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이번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갈피가 잡히자 카르한의 축 처진 어깨가 돌아왔다. 속으로 웃던 일리아는 저 멀리까지 뛰어간 포포를 응시했다. 열심히 뛰어다니던 포포는 지쳤는지 부드러운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포포.”

    일리아는 그늘에서 벗어나 포포에게 다가갔다. 잔디를 뒹굴던 포포가 혓바닥만 내민 채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따로 옷 안 입어도 되겠네.”

    일리아는 웃다가 풀물이 들까 싶어, 하얀 털에 묻은 잔디를 떼어주었다. 그렇게 한참 포포에게 열중할 때였다.

    일리아는 뒤늦게 제 위로 드리운 그늘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햇빛을 등지고 선 카르한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일리아가 놀라서 물었다.

    “덥지 않아요? 그늘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그렇게 덥지 않습니다.”

    카르한은 우직하게 선 채 대답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도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르한과 마주 섰다. 새파란 눈동자가 일리아를 깨끗하게 비추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카르한은 날이 쌀쌀하면 항상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일리아에게 벗어 주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일리아 쪽으로 기울여 자기만 홀딱 젖었다. 더운 날에는 그늘이 되어주었고, 바람이 불어오면 몸으로 막아주었다.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선 지금도 그의 배려와 다정함은 한결같았다. 일리아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하나였다. 세상 모두가 바뀌어도 카르한은 그대로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일리아의 중얼거림에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식으로 자꾸 받아주니까 내가 제멋대로 굴게 되잖아요.”

    가벼운 타박에 카르한이 미소 지었다.

    “그럼 저는 바보 하겠습니다.”

    “…….”

    “제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요.”

    “……그늘로 가요.”

    카르한을 말로 이기지 못한 일리아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날도 덥고 체온도 뜨거웠지만, 놓기 싫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의 미련함이 옮은 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다정히 손을 잡은 채 후원을 따라 걸어갔다.

    ***

    해답을 얻은 카르한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그들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으니, 평생 동안 지녀온 생각을 바꾸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집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하나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괜히 불안해지지요. 자기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으니.

    카르한은 그들의 조언을 따라, 원점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접근 방식이 달라져서 그런지, 몇몇 보수파 귀족들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사업 일로 찾아온 스텔라와 이번 안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후계자가 되면 남편은 강제로 성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데, 생각해보니 어이없네.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 스텔라는 일리아의 말에 동조해주었다. 델로타 가문의 외동딸인 그녀는 가문의 후계자가 될 생각이었다. 나중에 결혼할 상대가 생기면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일 생각이었으나, 우습게도 남편은 아내의 성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스텔라는 그것을 꼬집고 있었다.

    스텔라는 곧장 자신이 주도하는 모임에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 많은 귀족 영애와 귀부인들은 스텔라의 말에 동의했고, 국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귀족들까지 이번 안건을 알게 되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태후궁이 보였다. 오랜만에 황궁을 방문하게 된 일리아는 시종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알현실에서 태후가 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못 본 사이 표정이 밝아진 태후가 일리아를 맞이해주었다.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일리아는 태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황후는 행사가 있어서 자리를 비웠어요. 그대를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더군요.”

    일리아는 이제 황후가 된 황태자비를 떠올렸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녀는 황후로 즉위하자마자 모든 소임을 다했다. 특히 제국민에게 인기가 좋아서, 여러 행사에 나가느라 바빠 보였다.

    일리아와 태후는 근황 위주로 담소를 나누었다. 바네사 이야기까지 끝내자 잠깐 대화가 끊어지고, 태후가 본론을 꺼냈다.

    “저번 국무 회의에서 나온 안건에 대해 들었어요.”

    태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몇백 년 동안 유지해온 법안을 바꾼다니, 분명 쉽지 않은 길이겠지요.”

    태후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그림을 응시했다. 바네사가 그린 그림으로, 하늘과 경계가 흐릿한 바다에 조각배 하나가 떠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도에 몸을 싣고 떠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늘 자유롭고 싶었어요.”

    태후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정략혼으로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참 서러웠어요. 이 넓은 황궁이 내게는 새장 같았지요.”

    그림을 응시하던 태후가 일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 그대에게 그림 의뢰를 청탁하면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나요?”

    태후는 바네사의 첫 의뢰인이 되기를 바라며,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노라 말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지 않도록 황제에게 말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카르한은 결국 떠나게 되었고, 태후는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귀한 것을 받았으니,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왔어요.”

    “그 말씀은…….”

    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더 이상 그 사람의 아내로는 살고 싶지 않아요.”

    태후가 말하는 그 사람은 깊은 곳에 유폐된 전 황제일 터였다. 일리아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만간 공표하도록 하지요. 황족의 성을 버리고 원래 성을 되찾겠다고.”

    일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국은 이혼하지 않는 한, 아내는 사별하더라도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황족인 그녀가 성을 버리겠다는 것은 무척 파격적인 행보였다.

    “호칭은 여전히 태후로 남겠지만,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니까요.”

    태후는 놀란 일리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 남은 삶을 위해,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내가 앞장서겠어요.”

    ***

    일리아가 황궁에 입궁한 지 며칠이 지나고, 태후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슈타르 성을 버리고, 내 원래 성을 되찾겠습니다.’

    카르한이 요구한 법안 개정에 태후가 불씨를 붙인 것이다. 사방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왔으나, 태후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때부터 예법과 규율, 전통을 앞세우며 안건을 반대하던 보수파 귀족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태후는 평소에 보수파 귀족들과 가까웠기에, 친분이 있던 이들이 법안을 바꾸는 데 찬성한 것이다.

    단합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레 반대를 외치던 이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황제 또한 적극적으로 태후의 발언을 지지해주자, 반대하던 이들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국무 회의가 열렸다. 저번 회의와 달리, 대다수가 카르한이 내세운 안건에 찬성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안 된다며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법입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바꾸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자 차분히 설득해나가던 카르한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자, 날뛰던 노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전통은 버려야 합니다.”

    묵직한 저음이 조용한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기세에 눌린 소수의 보수파 노귀족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두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이번 안건은 카르한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더 우겨봤자 아무런 소득 없이 반감만 살 뿐이었다. 결국 끝까지 반대하던 노귀족들은 마지못해서 애매한 찬성을 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자, 황제의 뒤편에 서 있던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의 찬성을 받아,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마침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낸 카르한은 표정을 풀었다. 국무 회의가 끝나고, 소수의 노귀족들은 굳어진 얼굴로 황궁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보수 성향을 가진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장으로 향했다.

    “어쩜 이럴 수 있습니까. 저희가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충성해온 시간이 얼마인데.”

    안건에 반대했던 귀족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여자가 결혼하면 당연히 남편 성을 따라야 하건만.”

    “젊은 공작이라 그런지 의욕만 넘쳐서 그런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국에 망조가 들 건가 봅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분위기를 타다 보니 과격한 언사까지 나오고 말았다. 비판을 넘어 비난의 경계를 밟을 때였다.

    “망조는 당신네들이 계속 공직에 남아 있을 때 들겠지요.”

    그 말에 보수파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낯이 익숙한 노귀족들이 여럿 서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인가 뭔가 하는 곳에 소속된 노인네들이었다. 발끈한 보수파 귀족 하나가 바로 대응했다.

    “아니, 말씀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지나쳐?”

    머리가 희끗한 노귀족이 비웃음을 띠었다. 그 모습에 보수파 귀족들은 움찔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은 정계에서 물러난 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각 가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말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하는 게 뭐란 말이오. 봉급이나 축내는 거?”

    “에반테온 공작 앞에서는 말 못 하니까 뒤에서 험담하는 꼴이란.”

    “적어도 당신들보다는 에반테온 공작이 훨씬 제국에 도움이 될 거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억지로 꼬투리 잡기는.”

    노귀족들이 카르한을 두둔하고 나서자, 보수파 귀족들은 입만 벙긋거렸다. 이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줄 줄이야. 그때 회원들 사이에서 침묵하던 귀족 하나가 나섰다. 에반테온 공작 가문의 원로인 글로시아였다.

    “이제 와서 제국을 위하는 척이라니. 당신들은 에반테온 공작이 전 황제를 끌어내리는 동안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지 않았습니까.”

    글로시아는 보수파 귀족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런 황실이 싫으면 관료가 떠나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

    일과를 끝내 둔 일리아는 카르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카르한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보겠다고 말했었다. 제 밑을 맴돌던 포포를 안아든 일리아가 혼잣말했다.

    “이번에는 잘 되어야 할 텐데.”

    아무리 다른 이들이 도와준다 해도,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의사조차 밝히지 못하던 카르한이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실망하지 않을 거야.’

    카르한과 함께 또 다른 길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은 원하는 바를 이루어낼 테니 말이다.

    일리아는 포포를 내려놓고, 후원을 걸었다. 그때 누군가 후원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리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멈춰 섰다. 성큼성큼 걸어온 카르한은 두 팔로 단숨에 일리아를 들어올렸다. 훌쩍 높아진 눈높이에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깨끗하게 일리아를 비추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카르한이 먼저 입술을 찾았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그의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술에서부터 손끝까지 고동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입술이 떨어지고, 카르한이 속삭였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일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침내 카르한이 안건을 통과시킨 것이다. 일리아는 두 팔로 카르한의 목을 끌어안고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격한 입맞춤이었으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전부 해소할 수 없었다.

    한참 일리아를 끌어안고 있던 카르한이 팔을 내렸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일리아가 카르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정말 수고했어요.”

    “일리아 덕분이지요. 그리고 다른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가장 많이 고생했는걸요.”

    카르한은 말없이 웃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일리아가 잠깐 걷자고 제안했다. 일리아와 카르한 그리고 포포는 후원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결혼식 준비는 어느 정도 해둬서 날짜만 잡으면 될 것 같아요.”

    “가을 초입은 너무 빠를까요?”

    “마음 같아서는 내일 당장 하고 싶은데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잠시 마주 보고 웃다가 일리아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신혼여행지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했었죠?”

    “예.”

    “남부로 내려가면 좋겠어요.”

    남부는 가장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 사시사철 따뜻한 데다가 에메랄드빛 바다가 유명했다. 관광 도시인지라 구경할 것도 많았고, 거리도 그리 멀진 않았다. 그래도 신혼여행지만큼은 평범하구나, 하고 카르한이 생각할 때였다.

    “남부에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섬이 있거든요.”

    “……예?”

    카르한이 멈칫했다. 카르한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일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제 전용 배가 있으니까 섬으로 들어가는 건 걱정 말아요.”

    “그게 아니라…….”

    카르한이 머뭇거리자, 일리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물었다.

    “아무 방해 없이 둘이서 시간 보내고 싶은데……, 싫어요?”

    카르한이 목울대를 움직였다. 아무리 그쪽에 무지한 카르한이라도 숨겨진 뜻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헤인리가 지나갈까 싶어서 주위를 휘휘 둘러본 카르한이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섬으로 여행 가보는 것이 제 소원이었습니다.”

    ***

    결혼식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일리아는 잠깐 휴가를 내고 결혼식 준비에 열을 올렸다. 카르한 또한 일과를 마치면 바로 달려와서 일리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었다.

    “음, 이게 전부인가?”

    하객 목록을 본 일리아는 조금 머쓱해졌다. 워낙 남들과 교류를 하지 않아서 직접 청첩장을 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던 중, 고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델로타 님께서 오셨습니다.”

    일리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스텔라와 사업 건으로 약속이 있었다. 응접실에 도착한 일리아는 스텔라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왔네.”

    “뭐, 어쩌다 보니.”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태도에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꽃차 사업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새로 출시된 꽃차가 잘 팔린 덕에 외국으로 수출할 계획이었다. 지분을 어떻게 나눌지, 유통은 어떻게 할지 차근차근 의논했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다른 화제로 넘어왔다. 둘 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운영하는지라, 대화거리가 많았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까워 죽겠다는 듯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이번에 블로든과 델로타 가문에서 신제품이 출시되었는데, 블로든의 판매량이 약간 우세했다.

    “우리 가문이 조금 더 일찍 출시했으면 이겼을지도 몰라.”

    “그건 아닐걸? 우린 뒤에 더 잘 팔았으니까.”

    “짜증 나, 정말.”

    일리아는 툴툴대는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협력 관계라 해도 결국은 경쟁하는 사이였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텔라는 열등감을 표출하거나 과하게 질투하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스텔라의 투덜거림을 듣던 일리아는 준비해둔 청첩장을 건넸다.

    “자.”

    눈을 동그랗게 뜬 스텔라가 의심하듯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전해달라고?”

    “너한테 주는 거야.”

    “나?”

    깜짝 놀란 스텔라는 몇 번이나 진짜냐고 물어보았다.

    “오기 싫으면 말고.”

    “그게 아니라!”

    일리아가 청첩장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스텔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스텔라는 한참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빳빳한 종이에 유려한 필체로 일리아와 카르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각하께서 날 불편해하진 않을까?”

    이전에 스텔라는 카르한을 만나서 직접 사과했다. 카르한은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둘의 관계는 완전히 매듭지어졌다.

    “오히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괜찮다고 초청하자고 하던데.”

    그제야 스텔라는 안심했는지 청첩장을 가방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뭐, 바쁘지만 가줄게.”

    “그거 고맙네.”

    스텔라의 화법에 익숙해진 일리아가 대답했다. 스텔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결혼 선물이야.”

    “뭔데?”

    “신제품 내려고 만든 향료인데…….”

    연인끼리 쓰기 좋다고 스텔라가 작게 속삭였다. 솔깃해진 일리아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스텔라는 조향에 재능이 있었다. 델로타가 블로든 가문보다 잘나가는 사업이 몇 개 있었는데, 향수와 화장품이 그랬다.

    “잘 쓸게.”

    스텔라는 흡족해하는 일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어.”

    응접실 문까지 걸어간 스텔라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왕 결혼까지 하니, 잘 먹고 잘 살든가.”

    스텔라에게 저런 말을 듣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앙숙이었는데, 엄청난 발전이었다.

    “결혼식 때 보자.”

    일리아의 말에 스텔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뺨을 붉힌 스텔라는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일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그로부터 정신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결혼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빡빡한 일과표였으나 들뜸과 설렘이 더 커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왔다.

    “깃은 왼쪽을 약간만 더 세우고.”

    “브로치는 너무 튀지 않는 색으로.”

    “굽은 지금보다 낮은 것으로 준비해주세요.”

    고용인들은 특별한 사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최선을 다해 카르한을 치장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고용인들은 역작을 빚기라도 한 것처럼 흡족한 얼굴로 물러났다.

    카르한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렸고, 남색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딱 맞는 예복은 그의 체격과 몸 선을 도드라지게 했다. 누가 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카르한은 시계를 확인했다. 결혼식까지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기껏 준비한 차림새가 흐트러질까 봐 꼼짝도 하지 않고 대기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비올레와 클리프가 들어왔다.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던 카르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을 본 클리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책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가 온갖 칭찬을 쏟아내자, 카르한은 쑥스러워서 뒷목을 쓸어내리려다가 멈칫했다. 한 시간 가까이 손질한 머리를 흐트러뜨릴 순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비올레가 웃으며 말했다.

    “일리아도 긴장했던데, 둘이 똑같네요.”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일리아는 긴장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기에, 왠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가만히 카르한을 바라보던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카르한, 일리아를 잘 부탁해요. 그리고……,”

    비올레가 카르한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요.”

    카르한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아직 결혼식을 치르진 않았으나, 카르한은 이미 이들의 가족이었다.

    “오늘 드디어 법적으로도 가족이 되는군요. 결혼 축하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클리프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까 일리아를 봤는데,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내 딸이지만 얼마나 예쁘던지!”

    비올레는 호들갑 떠는 클리프의 팔을 붙잡았다.

    “하객들을 맞이해야 하니,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럼 이따 봅시다.”

    단단히 팔짱을 낀 두 사람이 방을 나갔다. 채 닫히지 않은 문 틈새로 그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괜히 우리 결혼할 때가 생각나네요.”

    “또 할까요?”

    “주책은.”

    타박하는 비올레의 목소리는 왠지 즐겁게 들렸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카르한은 옅게 미소 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일리아와 자신도 저런 미래를 맞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용인이 카르한을 불렀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카르한은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쭉 걸어 나갔다. 저택을 나서자 엄청난 크기의 조각상들이 먼저 눈에 보였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예술품이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녹음 짙은 정원은 흰 장미와 레이스로 장식했으며, 나뭇가지마다 비단으로 만든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돈과 정성으로 꾸민 결혼식장이었다.

    정원 입구에 도착한 카르한은 양옆으로 도열한 블로든 가문 기사들을 발견했다. 카르한이 잠깐 멈춰 서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사선으로 들어올렸다. 햇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마치 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카르한이 걸음을 옮기자, 검이 절도 있게 내려갔다. 그 끝에는 붉은 양단으로 만든 길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하객들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긴장을 눌러 삼킨 카르한은 양단 위로 첫걸음을 내딛었다. 꽃잎과 금가루가 사방에 뿌려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카르한은 지금껏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황궁 정원에서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해줬던 일. 오르골 가게에서 처음 일리아를 만났던 것. 처음으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의사를 결정했던 일.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지금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침내 단상 앞에서 카르한의 걸음이 멈추었다.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이윽고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앞을 바라보던 카르한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

    붉은 양단 끝에 일리아가 서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일리아는 햇빛을 받아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눈이 부셨다. 일리아가 걷기 시작하자 드레스 밑자락에 그려진 꽃이 끝없이 피어났다.

    하객들의 감탄이 아득하게 들려오며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사방에 장식해둔 꽃잎을 쓸어왔다. 꽃잎이 나비처럼 날아와 하늘하늘 떨어졌다. 마치 등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바라보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의 얼굴에 사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의 울렁임이 파문처럼 점점 크게 번져나갔다.

    “카르한, 왜 그래요?”

    한참 넋 놓고 있는 카르한에게 일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카르한이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이…… 너무 예뻐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카르한을 보며 일리아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르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빼곡하게 앉은 하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 클리프와 비올레가 앉아 있었고, 그 뒤로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이 자리했다.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보좌관인 테시온, 바네사, 스텔라,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 에반테온 공작가 원로들, 분쟁지역 마을의 관리인인 루벤투스, 전쟁터를 함께 굴러온 동료들…….

    일리아를 만난 후에 맺게 된 인연들이 훨씬 많았다. 이제 이들 앞에서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벌써부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가 미리 산처럼 쌓아둔 손수건을 클리프에게 건넸다. 클리프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하객들이 웃음을 삼켰다.

    이윽고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지 않은 헤인리가 단상 앞에 섰다. 헤인리는 일리아와 카르한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일리아를 바라보는 눈빛엔 다정함이 담겨 있었으며, 카르한을 보는 시선엔 신뢰가 가득했다.

    “오늘 주례를 맡게 된 헤인리 블로든입니다.”

    시선을 거둔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카르한은 뻣뻣하게 선 채 헤인리의 축사를 경청했다. 그때 손등에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살짝 내리깔자, 일리아가 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카르한은 지그시 일리아의 새끼손가락을 쥐었다. 그것만으로도 떨림이 멎고 가슴속에 온기가 가득 차올랐다.

    축사가 끝났을 때, 헤인리가 일리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행복하렴.”

    하객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에 미약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내 고개를 돌린 헤인리가 카르한을 응시하며 물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에게 묻겠습니다. 아내인 일리아 블로든에게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헤인리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일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리아 블로든에게 묻겠습니다. 남편인 카르한 에반테온에게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그럼 마지막으로 맹세의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헤인리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 속에 두 쌍의 반지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카르한이 직접 고르고 주문한 청혼 반지로, 중앙에는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일리아의 손을 감쌌다. 레이스 장갑을 벗겨내자 손끝에서부터 맥박이 뛰었다. 부드럽게 손을 쥐고 천천히 반지를 밀어 넣었다.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반지가 딱 맞게 떨어졌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그러쥐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경애와 애정이 담긴 입맞춤에 일리아의 뺨이 상기되었다. 일리아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카르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똑같은 반지 한 쌍이 같은 자리에서 반짝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벅참을 이기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찾았다.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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