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24/28)

24장

***

총회가 끝나고, 곧바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논의 주제는 블레어드의 처벌과 카르한의 작위 계승이었다.

공작을 살해한 블레어드는 만인의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터였다. 제국법대로라면 그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존속 살해는 황족 시해와 더불어 가장 큰 죄였으니 말이다.

“공작위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 없으니, 사흘 후에 작위를 계승하도록 하지요.”

레베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공작의 장례식도 남아 있으니, 계승식은 따로 치르지 않을 예정이었다. 간소하게 위임 절차를 치른 후 황실에 보고하기로 매듭지었다.

논의가 얼추 끝났을 때,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이 카르한의 눈치를 보았다.

“소공자, 저희는 협박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소공자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총회에서 블레어드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던 원로들이 변명을 쏟아냈다. 글로시아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로들의 변명을 들어주던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불이익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은 대번에 안색이 밝아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단숨에 태도를 달리한 그들이 축하 인사를 해왔다. 하나하나 대답해준 카르한은 고개를 돌려 저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로시아와 시오릭을 포함한 원로들이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과묵한 글로시아가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카르한을 찾았던 만큼 이번 결과가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글로시아의 옆에 서 있던 시오릭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겠습니다. 에반테온 공작 각하.”

“……감사합니다.”

벌써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카르한이 뒷목을 쓸어내리자, 글로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럼 사흘 후에 뵙지요.”

원로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회의장에 남은 사람은 카르한과 레베타뿐이었다. 카르한은 희미한 미소를 갈무리한 후에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을 직접 기사들에게 넘기던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고, 가여운 여인만 남아있었다. 레베타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저를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르한이 먼저 말문을 트자, 그제야 레베타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저 늦게나마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레베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서서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그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나,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저번 대화에서 전부 했다. 이제 와서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작위를 계승하면…… 나는 공작저를 떠날 거란다.”

레베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러나 이미 생각을 마쳤는지,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죄는 내가 가지고 갈 거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받겠다고, 레베타가 말했다.

“그런 후에…….”

레베타는 숨을 한 번 삼킨 후에 말을 이었다.

“이제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마.”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남편과 아들을 잃게 된 그녀는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다. 두고두고 후회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칠 터였다. 그것이 레베타가 속죄하는 길이었으며, 업보였다.

불쌍한 사람. 과거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감정이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 카르한은 수많은 감정을 알게 되었고, 지금 레베타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게 준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카르한은 레베타가 내린 결정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고수했을 뿐이었다.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는지 레베타가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카르한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지내십시오.”

망설이던 카르한이 희미한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카르한의 마지막 인사에 레베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라 불린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이기도 했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레베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간 무릎을 꿇고서라도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 것이 분명했으니까.

회의장을 빠져나오자 그제야 꽉 막혔던 울음이 새어나왔다. 레베타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꼈다. 혹시 문 너머에 있는 카르한에게 들릴까 싶어서, 소리 내어 울 수는 없었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레베타는 겨우 눈물을 추슬렀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길게 뻗어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드리운 먹구름은 어느새 물러나고, 한 줄기의 햇빛이 창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늘진 복도를 지나, 빛 속을 걸어가던 레베타는 잠시 멈춰 섰다.

총회 내내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레베타 혼자 잊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던 남자. 첫눈에 반한 후로 쭉 외사랑 해왔던 사람.

오랜 시간이 흘러 실망하고 원망하며, 결국 증오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마음 한구석엔 그가 남아 있었다. 증오마저 사랑이었던 것이다.

레베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그날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레베타는 공작의 시신을 자신이 잘 수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속죄였다.

다시 발을 떼어낸 레베타는 그늘진 복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황궁에서는 간만에 국무회의가 열렸다. 황제가 블로든 가문을 대상으로 세무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처음이었다. 회의장으로 향하던 귀족들은 복도를 걸으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저도 소공자보다는 공자 쪽이 좀 더 승산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얼마 전,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는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공표했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총회였기에, 결과가 나왔을 때 희비가 교차했다. 황제 쪽에 서 있던 이들은 당혹했고, 황태자 측은 세력 불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며칠 전, 에반테온 가문에서는 간소한 계승식이 있었다. 정말로 카르한 에반테온이 공작이 된 것이다. 복도를 걷던 남자들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소공자 정도면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지요.”

“작년 황궁 검술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공로도 많이 세웠다지요?”

“예전에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돌아서 기피했는데……, 요즘은 평판도 좋더군요. 교제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 딸이라도…….”

한 남자가 은근슬쩍 욕심내자, 다른 남자가 바로 말을 잘랐다.

“소공자께는 이미 연인이 있으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해준 남자가 혀를 찼다. 어찌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남자가 대답해주었다.

“블로든 영애입니다.”

카르한에게 딸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이가 침묵했다. 이름만 들어도 벌써 승산이 없어 보였다.

블로든은 백작 가문이었지만, 후계자인 헤인리 블로든이 황태자의 비서관이 되면서 실세라는 말이 돌았다. 만약 황태자가 실권을 잡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블로든 쪽에도 크게 힘이 실릴 터였다.

“그런데 에반테온 공자는 요즘 뭐 합니까? 소식이 통 들려오지 않는군요.”

“작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니 떠난 거 아닙니까? 불법 모임에 연루된 것이 들켜서 평판도 바닥을 쳤으니…… 차라리 수도를 떠나는 쪽이 낫겠지요.”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회의장 앞에 도착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입을 다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대부분의 자리가 차 있었다.

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귀족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이전 회의 때 황제와 황태자가 싸우는 걸 전부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힘겨루기 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실이었다.

황태자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황제의 권한이 더 강했다. 그런 이유로 황태자는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중립에 서 있던 에반테온 공작이 사망했고, 황태자와 접선이 있던 카르한 에반테온이 작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현재 상황을 모르는 아둔한 귀족들을 제외하고, 황제를 따르던 이들이 빠르게 황태자 쪽으로 돌아섰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황태자와 헤인리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황태자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귀족들을 스쳐지나,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가볍게 주위를 둘러본 황태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오지 않았나.”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회의장으로 한 발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목이 쏠렸다.

짙은 어둠이 흐르는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누구라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체구. 새로운 에반테온 공작의 첫 출사였다.

***

에반테온 가문의 총회가 있는 당일. 출근한 헤인리를 제외하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직접 카르한을 배웅해주었다.

그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클리프가 말했다.

“잘 될 거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얼굴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비올레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깐 침묵이 돌자, 일리아는 다른 화젯거리를 꺼냈다.

“……그래도 세무 조사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황실에서 보내온 조사원들은 블로든을 끈질기게 괴롭혔지만,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오히려 블로든이 세금을 더 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결국 조사원들은 이전에 떠돌던 헛소문을 바탕 삼아, 블로든 가문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을 취조했다. 혹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는지 캐물었으나, 전부 고개를 내저었다.

봉급이나 복지는 제국 내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블로든이었다. 고용인들은 도리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거나, 이상한 걸 묻는다며 화를 냈다. 그렇게 황제가 보낸 조사원들은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황제는 분명 또 다른 방식으로 블로든을 억압하려 들 터였다. 그러기 전에 황태자가 실권을 잡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일찍 퇴근한 헤인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총회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 명 더 늘게 된 것이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카르한을 기다렸다.

석양이 세상을 뒤덮어올 즈음, 버릇처럼 창밖을 살피던 일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숨에 현관까지 뛰어내려온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는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

카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묻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일리아가 달려가자, 카르한이 그녀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수고했어요.”

카르한을 마주 안은 일리아가 속삭였다. 그러자 카르한이 눈꼬리를 휘며 대답했다.

“전부 일리아 덕분입니다.”

카르한은 항상 일리아 덕분이라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 손으로 이룬 거예요.”

카르한은 흙 속에 묻힌 진주였다. 언젠가는 이렇게 빛나게 될 사람이었다. 일리아는 그저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겨주었을 뿐이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카르한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가장 바라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리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카르한은 늘 일리아와 나란히 서게 될 순간만을 바랐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가 아닌,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그리고 오늘, 오랫동안 품어온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셈이다.

“소공……,”

뒤늦게 뛰쳐나온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카르한이 품에 안은 일리아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잔뜩 들떠 있는 일리아와 카르한의 얼굴을 본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축하는 다 함께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즉시 블로든 저택 사람들은 분주해졌다. 급조된 파티였지만, 웬만한 귀족들의 파티보다 호화로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카르한은 총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결국 원로 한 분께서 오시지 못했습니다.”

블레어드 짓인 것 같다고 카르한이 말하자, 일리아의 가족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미친 자식 아니에요!”

일리아는 욕을 하며 화냈고, 비올레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구부러뜨렸다. 그리고 헤인리는 알고 있는 법 조항을 줄줄 읊으며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클리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발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보던 카르한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럴 때마다 든든한 제 편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카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레베타를 입에 올렸다. 그녀가 먼저 사과해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수도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까지.

“아마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떤 심경이었을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클리프가 눈물을 글썽이자, 비올레가 빠르게 냅킨을 건넸다. 잠시 지켜보던 카르한이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제 가족은…… 여러분이니까요.”

냅킨으로 자연스럽게 눈물을 닦은 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소공자. 아니, 이제 각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이미 소공자가 입에 붙었는데, 적응하려면 좀 걸리겠어요.”

비올레가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늦은 밤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며 축하 파티를 즐겼다. 평소보다 과음한 일리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들어버렸다.

카르한은 잠든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결같은 시선에 일리아의 가족들은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일리아, 방에서 자야지.”

헤인리가 일리아를 깨우려 하자, 카르한이 말했다.

“제가 침실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카르한이 일리아를 안아들었다. 곤히 잠들어버린 일리아는 깨어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카르한은 만찬장을 나가기 전에, 자리에 앉아 있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비올레가 묻자, 카르한은 제 품에 안긴 일리아를 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만간 일리아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

총회가 끝나고 사흘 후, 카르한은 공작위를 승계했다. 따로 식은 치르지 않고 간단한 절차를 밟은 후 전대 공작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더 이상 소공자가 아닌, 에반테온 공작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카르한은 공작령 전체에 공문을 돌리고, 전대 공작이 죽고 나서 밀린 서류를 처리했다. 원로들과 가문의 대소사까지 의논하고 나니,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직 블레어드의 처분을 확실히 결정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블레어드를 정식으로 기소하려면 그의 죄를 낱낱이 알려야 했다.

분명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터였다. 원로들은 공작가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가문 내에서 처벌하자고 부탁했다. 그들의 말을 따라 카르한은 블레어드의 처분을 잠시 보류해두었다. 겉보기엔 원로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으로 보였지만, 속내는 달랐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블레어드 에반테온의 신변을 넘겨주십시오.

이제야 엘리오드 백작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리고 오늘, 카르한은 첫 출사를 하게 되었다. 황궁에 도착한 카르한은 조용한 복도를 걸어 회의장으로 향했다. 버릇처럼 일찍 도착하려 했으나, 헤인리는 최대한 정각에 맞춰서 오라고 조언해주었다.

회의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선 카르한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차가웠다. 첫 출사 때문에 긴장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대한 이유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해주십시오.

시작은 헤인리의 부탁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공자에게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과거였다면 그럴 수 없다고 회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이야 말로 제국의 운명을 바꿀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회의장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카르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빈자리에 앉고 나니 시선이 따가웠다. 관심과 호의, 호기심 등이 섞인 눈빛이었다.

카르한이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가 등장했다. 신경질 가득한 얼굴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카르한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결국 그렇게 됐나.”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모두에게 들렸다. 여기서 황제가 대놓고 블레어드를 밀어주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는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에반테온 공작. 진심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오늘의 의제가 하나씩 올라왔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 의견을 말하면 발언권 강한 귀족들이 결론을 내거나 채택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카르한은 처음 국무 회의에 참석했지만, 중요한 발언을 이어가며 영향력을 키워갔다.

“올해 눈이 많이 내렸으니, 마을마다 구조금을 재측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제가 예상하기에 비용은…….”

“말씀하신 병력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봄이 오면 물자를 보내는 식으로 왕국 측에 서신을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병력이 부족하다면 물자도 넉넉하지 않을 테니, 충분히 고마워할 겁니다.”

군사와 세율, 외교문제까지 섭렵하자 귀족들은 입을 벌렸다. 카르한이 공작이 되었다지만, 아직도 속으로 그를 무시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풋내기 공작에, 검술 말고는 특출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만 보면 전대 공작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런저런 핑계로 퇴짜를 놓던 황제도 결국엔 카르한의 제안이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황제가 새 안건을 꺼냈다.

“다들 최근 들어 금 가격이 폭등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요.”

귀족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한꺼번에 여러 광산에서 금맥이 바닥나다니, 수상쩍지 않소.”

“…….”

“폭리를 취하는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조사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광산을 수색하겠다는 황제의 말에 황태자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지나친 간섭입니다. 이미 블로든을 상대로 세무 조사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블로든만 조사하겠다는 게 아니다.”

공평하게 모든 광산을 수색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블로든을 겨냥한 것이었다.

“안 됩니다. 그건…….”

“에반테온 공작의 생각은 어떤가.”

황제는 황태자의 말을 잘라내고, 카르한에게 질문했다. 덤덤히 황제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황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졌다. 덤덤하던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서늘한 시선에 황제는 움찔하며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르한에게 말려든 것이 못내 분한지, 황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평소에 제 비위를 잘 맞춰주던 백작에게 물었다.

“광산을 수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백작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평소 같았으면 황제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백작은 평소와 달리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저도……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백작마저 부정적인 답을 내놓자, 황제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황제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결국 원하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황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잠깐 쉬었다 하도록 하지.”

황제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순식간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누구도 황제를 따라 나가지 않았다. 황제의 최측근들마저도 자리에 붙어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황제가 아닌, 카르한과 황태자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황태자의 뒤편에 서 있던 헤인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선택하십시오.”

귀족들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오늘 카르한의 출사를 통해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귀족들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것을.

귀족들은 조용히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품은 뜻은 명확했다.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이고 복종하겠다는 눈빛이었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모두의 생각이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제국을 위한 일이니, 다들 뜻을 모아주길 바랍니다.”

아직까지 망설이는 귀족들이 변심할 새도 없이, 황태자는 곧장 밀어붙였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니.”

준비는 오래전에 끝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누구의 희생도 없는 조용한 황위 찬탈. 그것이 황태자의 목표였다.

***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황제는 바람을 쐬기 위해 중정으로 향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애꿎은 꽃만 걷어차고 짓밟았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감히…….”

이제 막 공작위를 계승한 주제에, 황제인 저와 동등해진 척 구는 꼴이 무척이나 같잖았다.

“어찌 한 놈도 없는 건가.”

평소 같았다면 그의 발언을 뒷받침해줄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추진하려 했는데, 오늘은 모두가 그를 외면했다. 마치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황제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황궁 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 듯했다. 다른 일이 바빠서 계속 무시했으나 더 이상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궁 내에 심어둔 사람도 요즘 소식을 전해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고가 올라온 지 일주일도 넘은 듯했다. 속이 답답해진 황제는 저를 뒤따라 나온 비서관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근래 황태자가 이상하지 않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네 눈은 발바닥에 달린 게로군.”

비서관마저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황제는 분풀이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비서관은 끝까지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비서관을 쳐다보았다. 비서관은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슬슬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하자, 황제는 코웃음 쳤다.

“좀 더 기다리라지.”

어차피 자신이 없으면 회의조차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블레어드가 이런 문제에 조언을 해주었을 텐데……. 황제는 자신이 공작 가문의 일에 직접 개입해서라도, 블레어드를 밀어줄 걸 하며 후회했다. 그랬다면 국무 회의에서도 저를 무시하는 자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로, 블레어드는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계속 말이 많았으니 자숙하는 걸지도 몰랐다. 고민 끝에 황제는 블레어드를 한번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의논해야 할 것이 잔뜩 있었다.

한참 중정을 돌아다니던 황제는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고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부 꼼짝없이 앉아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복도는 온통 조용하기만 했다. 지나가는 시종조차 없었다.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회의장 앞에 멈춰 서자, 비서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

안으로 들어선 황제는 그대로 멈칫했다.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일제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척 낯선 눈빛에, 이질감이 들었다.

스산함을 느낀 황제가 입을 여는 동시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그 소리가 바깥과의 단절을 알려주었다.

황제는 제게 예를 갖추지 않는 귀족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피고인으로서 재판장에 출석한 기분이었다.

훈계라도 하려고 할 때, 홀로 서 있던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비서관이자, 황궁 행정관인 헤인리 블로든이 모든 관료를 대표하여 제국의 황제에게 죄를 묻겠습니다.”

“……뭐라?”

잔뜩 굳어져 있던 황제가 겨우 반응했다. 그러자 헤인리는 종이 한 장을 펼쳐 죄목을 읊기 시작했다.

“흉년에도 지나치게 세율을 올려 폭리를 취한 죄. 귀족들의 후원금을 갈취한 죄.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넘긴 죄. 그리고…….”

헤인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귀족들의 반대에도 독선으로 법안을 개정한 죄.”

헤인리가 읊어나가는 죄목들을 듣던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제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데, 누구도 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황제는 주먹을 움켜쥐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부딪치자, 황태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이 섬뜩해서 황제는 어깨를 떨었다.

“이 모든 죄를 인정한다면, 스스로 물러나십시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헛소리를 하느냐!”

헤인리의 마지막 발언에 황제가 노성을 질렀다.

“네놈이 미쳤구나. 안 그래도 블로든 놈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당장 내쫓겠다며 황제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뚝 솟은 몸을 본 황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르한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산처럼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전대 에반테온 공작조차 저 정도의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이제 막 공작위에 오른 애송이라 무시했으나, 착각이었다. 이미 카르한 에반테온은 포식자의 상위층에 도달한 자였다. 다른 귀족들이 카르한을 보는 눈빛이 그러했다.

“더 이상 당신의 폭정을 눈감아줄 수 없습니다.”

카르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황제를 찔러왔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 카르한은 마치 귀족들의 대표라도 되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말했다.

“에반테온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카르한을 시작으로 귀족들이 하나씩 일어나서 그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란체스터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벨리언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에 황제의 입술이 떨려왔다. 그들 가운데 황제를 지지하던 이들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아니,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괜찮을 거라며 현실에 안주했던 것은 황제 본인이었다. 황제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어서 반역자들을 끌어내라!!”

황제의 외침이 회의장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이 고요했다.

“어서, 누구든 좋으니!!”

황제가 절박하게 소리 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는 마치 관중 속에서 독백을 지껄이는 배우가 된 것 같았다. 소리를 너무 질러 헉헉대니, 그제야 회의장을 지키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붙잡아라!”

황제가 반색하며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장식장 인형처럼 서 있던 기사들이 걸음을 옮기자,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기사들이 향한 곳은 귀족들이 아닌, 황제의 양옆이었다.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황제의 팔을 붙들었다.

“이, 이거 놔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바동거리는 황제를 향해 황태자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폐하의 과욕은 제국을 병들게 할 뿐입니다.”

“감히, 네가, 어떻게 나를…….”

“저는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황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노쇠한 육체는 지나친 분노를 담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있으면 네놈이 내 뒤를 이을 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기억하십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딱 한 번, 제게 동화책을 읽어주셨지요.”

“…….”

“욕심 많은 여우가 끝없이 탐욕을 부리다가 전부 잃고 마는 교훈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황제는 제대로 서질 못하고 자꾸만 무너졌다. 황제를 응시하던 황태자가 팔을 뻗어, 그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스스로 왕관을 쓴 황태자가 속삭였다.

“아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황위를 승계하겠습니다.”

***

에반테온 공작저 뒤편에는 창고가 하나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이곳은 이전에 블레어드가 카르한을 가두었던 곳이기도 했다.

총회가 있던 날, 블레어드는 기사들에게 끌려나와 이곳에 갇히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워도 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처분이 정해질 때까지 대기하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빌어먹을.”

손톱을 물어뜯던 블레어드는 기어코 피를 보고 나서야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고요함 속에 내던져지니 지금껏 있었던 일이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들었다.

-넌 공작이 될 수 없다.

증오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레베타가 아직도 선연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의심을 사든 말든 그냥 카르한을 죽였어야 했다. 괜히 신중하게 굴어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국법대로 죗값을 치르게 된다면 사형 당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블레어드는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역시 황제뿐인가…….”

황제 정도면 판결을 미루고, 자신이 재기할 때까지 지원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아둔한 황제를 움직여서 저를 지지해줄 새로운 세력을 만든 후, 그걸 바탕으로 카르한을 끌어내린다면…….

“그 전에 어떻게 여길 나가지?”

계획이고 뭐고 일단 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문은 지나치게 튼튼했으며, 창문은 턱없이 작았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고용인은 제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블레어드는 고용인을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쪽을 공략하는 편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미약한 햇빛이 창고 안까지 길게 늘어졌을 즈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용인이 점심 식사를 가지고 온 것이다.

“잠깐!”

블레어드는 고용인이 떠나기 전에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를 여기서 꺼내주면 10만 크로엘을 주겠다!”

블레어드의 외침이 창고 안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블레어드가 문 앞에 다가갔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상대가 말했다.

“준비가 필요하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상대의 대답에 블레어드는 희열에 떨었다. 역시 하늘은 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블레어드는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 밖에 기척이 느껴지자 블레어드의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빗장이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절대 움직이지 않던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햇빛이 눈꺼풀을 찔러왔다. 블레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창고 밖에는 고용인 한 명만 서 있었다.

“말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고맙다.”

블레어드는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한 후 어색하게 말에 올라탔다. 평소에 마차를 타고 다녔더니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다 늘 호위를 여럿 대동하고 다녔기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낯설기만 했다.

곧바로 공작 저택을 벗어난 블레어드는 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다. 거리에는 푸른색 깃발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푸른색은 황실을 상징하는 색이었기에, 황실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황궁에 도착한 블레어드는 신분을 밝힌 후, 황제궁으로 향했다. 블레어드는 황제궁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전해라.”

병사들은 무척 이상하다는 듯 블레어드를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직접 나왔다.

“황궁 출입을 허한 적이 없으니 속히 돌아가시라는 명입니다.”

“……뭐?”

블레어드는 잘못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잘못 전달된 게 아닙니까?”

블레어드가 시종장에게 따지자, 그가 귀찮다는 시선을 보냈다. 시종장의 태도에 블레어드는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에 허락 받았습니다. 언제든 황궁을 출입해도 좋다고…….”

“그건 전대 황제께서 약조하신 것이겠지요.”

“……전대 황제라니.”

블레어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어디 산골이라도 틀어박혔다 왔느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궁의 주인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블레어드는 아까 길에서 봤던 푸른색 깃발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현실을 부정한 블레어드는 시종장을 밀쳐냈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를 향해 창을 들이밀었다. 블레어드가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시종장이 비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에 불복한다면 무력으로 내쫓겠습니다.”

어깨를 떨던 블레어드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섰다. 소란을 일으켰다간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 알게 될 것이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블레어드가 말했다.

“제가 왔다는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블레어드는 결국 뒤돌아서서 황궁을 빠져나왔다. 번화가까지 흘러 들어온 블레어드는 말을 맡긴 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야 하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지라, 당장 머무를 곳조차 구할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지인이 누가 있더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블레어드는 우뚝 멈춰 섰다. 어느덧 막다른 골목까지 걸어 들어온 것이다.

골목은 유독 조용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만이 전부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블레어드는 다시 뒤돌아섰다.

“!”

뭔가가 얼굴에 씌워지더니, 순식간에 주위가 깜깜해졌다. 비명을 지르려는 그때, 엄청난 힘이 복부를 강타했다.

신음조차 뱉지 못하고 몸이 고꾸라졌다. 누군가가 억센 손으로 블레어드를 바닥에 엎어뜨리고 밧줄 같은 것으로 온몸을 결박했다. 그리고는 거칠게 그를 끌어당겨 들쳐 업었다.

블레어드는 공포에 질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어딘가에 내던져졌다. 탁, 뭔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고 욱신거리는 통증과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껏 예민해진 청각은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까지 전부 담아냈다.

“누, 누구야.”

블레어드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시야가 트이더니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블레어드가 멍하니 있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전혀 기억에 없었다. 얼굴을 봐도 낯설기만 했다. 블레어드는 애써 의연한 척 고개를 들고 말했다.

“목적이 뭐야. 카르한이 보낸 거라면…….”

“질문에 대답을 해야지.”

남자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독기 서린 눈동자를 본 블레어드는 바짝 굳어졌다. 분명 평범한 중년 남자일 뿐인데 저 눈빛만큼은 절대 평범하다 볼 수 없었다.

“…….”

블레어드가 침묵하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손을 쓰긴 했지만, 추락이 빠르더군.”

“!”

블레어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현장에서 도망친다 한들, 끝까지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블레어드는 곧바로 불법 모임이 적발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도망쳤지만, 검은 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정체 모를 누군가는 블레어드의 모든 죄를 낱낱이 밝혔으며, 소문이 사그라질 법 하면 꾸준히 장작을 넣었다. 설마…… 뒤에서 계속 들쑤시던 자가…….

무심히 블레어드를 응시하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있지.”

뜬금없는 말에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 아들도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니, 지옥에 있을 테고.”

그가 아들타령을 하자 블레어드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굳게 다물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설마…….

“이제 기억나나?”

“……엘리오드, 백작?”

블레어드가 더듬거리며 이름을 확인하자 백작이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네가 죽인 그 애의 아비다.”

속삭임이 뱀처럼 블레어드를 휘감았다. 뒤이어 지독한 한기가 밀려왔다. 온몸이 떨리며, 이가 딱딱 부딪쳤다.

“지금쯤 그 애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

엘리오드 백작이 단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잘 벼린 칼날이 블레어드에게 향했다.

“널 죽이고 이제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

***

이슈타르 제국은 갑작스럽게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실 측은 황제가 돌연히 쓰러진 후 계속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알렸다. 황제가 도무지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태라, 황태자가 황위를 승계한다고 공표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고위 귀족들 외에도, 귀족들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황태자는 이미 황제의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황제를 끌어내릴 시기만 노리고 있었고, 이번에 카르한이 공작위를 계승하면서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국 역사 속에서 몇 번의 반란이 있었으나, 피를 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면 그만큼의 희생이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도 죽지 않고 황위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황위에 오른 황태자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전 황제의 흔적을 지우고, 주요직에 제 사람을 올렸다.

원래라면 화려한 대관식을 치렀어야 했으나, 간소한 절차만 따르기로 매듭지었다. 대신 대관식에 들어갈 비용과 황제가 고혈을 짜서 모아둔 돈은 전부 제국민에게 베풀었다.

전 황제의 폭정에 지쳐 있던 제국민은 새로운 황제를 환영했다. 여론이 새로운 황제 쪽으로 치우쳐지자, 마지못해서 황태자 쪽으로 뒤돌아섰던 귀족들마저 충성을 맹세했다.

대강 상황 정리가 끝난 후, 황실은 블로든 가문에 직접 사과해왔다. 그 과정에 블로든이 세금을 더 냈다는 것이 알려지고, 탈세 의혹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카르한, 준비 다 되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차림을 한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일리아는 작년의 카르한을 떠올렸다. 만날 때마다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와서, 보다 못해 옷가게로 끌고 갔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옷을 입어도 그때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분위기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져서 그런 듯했다.

“그럼 출발해요.”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라타, 에반테온 공작저로 향했다. 겨울임에도 유독 화창한 날씨였다. 일리아는 오늘과 어울리지 않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공작의 장례식이었으니 말이다.

에반테온 공작저는 발 디딜 틈 없이 조문객으로 가득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와 카르한은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연회 이후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제 이름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카르한에게 한 번이라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온 조문객이 많았다. 카르한은 적당히 인사를 받아준 후, 후원으로 걸음 했다. 선대 에반테온 공작의 장례식은 후원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화창한 날씨와 달리, 주위는 엄숙한 분위기였다. 온통 조용한 가운데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석관이 놓인 단상이 있었다.

석관 주위에는 백합이 수북하게 쌓인 채였다. 이미 많은 조문객들이 왔다 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손꼽혔던 권력자의 장례식치고는 무척 간소한 편이었다.

카르한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친척들이나 원로도 몇몇 보였으나, 레베타는 없었다. 다시는 카르한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총회가 끝나고 레베타는 친가에 내려갔다고 들었다. 그녀의 친가는 수도에서 먼 동쪽이니,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평생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결국 공작의 직계 가족 중, 카르한만이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받아요.”

일리아가 백합 한 송이를 내밀었다. 백합을 받아든 카르한은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르한은 백합을 손에 쥔 채 석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텐데.”

희미한 혼잣말이 흩어졌다. 누가 보아도 선대 에반테온 공작은 최악의 아버지였다. 가정에 관심조차 없던 그는 오직 제게 이득이 되는지만 따졌다.

공작과의 추억을 더듬어봤지만, 빈약한 기억뿐이었다. 함께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곱씹을 것도 없었다.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백합을 내려놓았다.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다음 생에는, 타인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카르한은 마지막 말을 삼킨 채 뒤돌아섰다.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가 관 앞으로 걸어갔다. 카르한은 가만히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공자께서는 오지 않으셨네요.”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말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 카르한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들의 말처럼 총회 이후로 블레어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카르한 또한 블레어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고용인을 시켜 창고 문을 열어주게 하였으니……, 그 뒤는 엘리오드 백작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다.

“카르한.”

일리아가 자그맣게 그를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요.”

카르한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문객들의 헌화가 마무리 되는 동안, 공작의 애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공작은 그녀를 위해 가족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뿐인 관계였던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화가 끝나자 추도사가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손을 맞잡은 채 추도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관을 안치하고 나서야 장례식이 모두 끝이 났다.

두 사람은 곧장 울적한 기운이 감도는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평소와 달리 일리아도 말이 없었다. 창가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공작저를 눈에 담았다.

왠지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에반테온 저택에 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긴 했으나, 혈육을 전부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어느새 마차는 에반테온 공작저를 벗어났다. 한참을 달린 끝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블로든 백작 저택이 보이자, 축 가라앉은 기분이 점점 나아졌다. 장소가 주는 위안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비올레와 클리프가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한때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인사였다. 서서히 미소를 지은 카르한이 대답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그가 있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

세무 조사 결과가 나온 후, 일리아는 한동안 미뤄두었던 업무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온천 사업은 건물을 올리는 단계였기에 내년쯤이면 본관이 완공될 듯했다. 개장 후에 건물을 증축할 계획이었다. 장난감 사업은 순탄하게 잘 흘러가, 이번 기회에 규모를 확장했다. 내년쯤에는 외국에도 수출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날 때 설립했던 유통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물류 업체를 증설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최종 목표는 산간 지역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어느 지역에 살든 편의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블로든 가문은 다시 금을 시장에 내놓았다. 시세는 이전과 엇비슷하게 맞추어 서서히 양을 늘려갔다. 그사이 제국에는 금이 씨가 말랐기에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금값 안정을 위해, 황실 측에서 신전을 허물어 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산사태로 매몰된 광산도 다시 운영을 시작했다.

사치세도 없애버리니 외국으로 밀수출된 금이 돌아오면서 더 이상 금이 부족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좋아.”

서류 하단에 서명을 적은 후 펜을 내려놓았다. 일리아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회의실로 쓰이는 홀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이미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앉아서 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니?”

“여기에 앉으렴.”

일리아가 빈자리에 앉자, 헤인리가 헛기침을 내뱉은 후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블로든 가문 회의가 있겠습니다.”

헤인리는 바퀴 달린 코르크나무 판 앞에 서서, 종이 한 장을 붙였다.

“오늘의 주제는…… 소공, 아니 카르한의 생일 파티입니다.”

소공자라고 부르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헤인리가 어색하게 정정했다.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던 일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에 카르한과 약속한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 생일 파티는 거창하게 할 거예요.

-얼마나요?

-모두가 축하해줄 만큼.

그때 일리아는 수도 사람들 모두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정도로 크게 열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제대로 된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 없는 그를 위해 가장 행복한 날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들 뭐 해줄지 생각해보셨어요?”

일리아가 가족들을 보며 물었다.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가 빠듯해서 공문을 돌린다고 애먹었단다.”

비올레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클리프가 가볍게 턱을 문질렀다.

“그나저나 생일 선물이 고민이구나. 평범한 건 주고 싶지 않은데.”

“건물 같은 건 이제 식상하니까요.”

헤인리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정해 봐요. 그러려고 모였으니까요.”

일리아의 말에 클리프와 비올레가 나란히 의견을 냈다.

“그래서 포도 농장을 선물할까 싶은데.”

“나는 단독 수련장을 지어줄까 생각 중이란다.”

헤인리는 두 사람의 의견을 적어서 판에 붙이며 말했다.

“제 생각엔 당장 쓸 수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뭐지?”

“업무에 도움이 되는 실무서적이나…….”

비올레와 클리프는 헤인리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미리 생각해둔 의견을 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일리아는 선물을 고른 이유까지 곁들어서 그들을 설득했다.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좋은 생각이구나.”

“저 재미없는 놈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은데.”

클리프의 타박에도 헤인리는 전혀 타격 받지 않은 얼굴로 일리아에게 속삭였다.

“네 의견이 제일 괜찮은 것 같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모두의 동의를 얻은 일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윽고 주제는 생일날 어떤 케이크를 올릴지, 어디서 파티를 열 것인지로 바뀌었다. 깜짝 파티지만 아주 화려하고 크게 열어줄 계획이었다.

한참 후, 회의가 끝나고 클리프와 헤인리가 먼저 자리를 떴다.

“어머니.”

일리아는 막 나가려는 비올레를 붙잡았다. 계속 고민했지만, 역시 같은 여자인 어머니께 물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역시 제가 따로 선물을 챙겨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비올레가 무척 간단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생일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어주렴.”

눈만 깜빡이는 일리아를 보며 비올레가 미소 지었다.

“그게 최고의 선물 아니겠니.”

***

어느덧 겨울 끝자락이 왔다. 여명이 점점 밝아오더니, 하루의 가장 이른 햇살이 커다란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햇살이 눈꺼풀 위를 덮어오자, 카르한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깨워주지 않아도 이 시간쯤이면 절로 눈이 뜨였다.

카르한은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는 짐승처럼 서서히 몸을 폈다. 거대한 몸이 쭉쭉 뻗어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은 잠시 창문 앞에 섰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창문 틈으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정원의 메마른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미약한 싹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곧 있으면 봄이 올 듯싶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을 즈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용인은 세숫물과 신문, 따뜻한 수프 한 접시를 내려놓은 후 물러났다. 카르한은 간단하게 세수를 한 후에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을 펴기도 전에, 그의 몸이 멈칫했다. 카르한은 혹시 꿈을 꾸나 싶은 얼굴로 눈가를 비볐다.

[축! 에반테온 공작 탄신일]

신문 1면이 온통 카르한의 생일을 축하하는 문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신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깐 굳어져 있던 카르한은 상단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왠지 낯익은 날짜가 박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제 생일이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생일을 챙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은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신문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그것도 가장 중요한 소식을 싣는다는 1면을…….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들어왔다.

“카르한! 생일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쏟아지는 인사에 카르한은 잠시 정신이 없었다.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생일 파티 하러 가요.”

일리아의 손에 붙잡힌 카르한은 곧바로 거울 앞에 앉혀졌다. 순식간에 옷이 입혀지고 머리 손질까지 끝났다.

거울 속에 비친 카르한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였다. 누가 봐도 힘을 잔뜩 준 모양새라, 카르한은 어색한 듯 뒷목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자, 나가요.”

어어, 하는 사이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현관으로 나왔다. 현관에는 천장이 없는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대기해 있던 테시온이 히죽히죽 웃었다. 테시온은 이 일을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르한 님. 드디어 둘이서 축하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군요.”

매년 카르한의 생일 때마다 속상해하던 테시온은 소원이라도 이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르한은 보석과 꽃으로 장식한 마차에 올랐다. 일리아가 그 옆에 앉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다른 마차를 이용했다. 카르한은 설렘과 불안함을 담아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관해둔 연회장이 있어요. 저택에서 하자니 뭔가 아쉬워서요.”

단단히 작정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몰랐다니. 지금껏 행사가 있을 때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벌이는 규모를 옆에서 봐 왔던 카르한은 긴장하고 말았다.

마차는 어느덧 저택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그러자 흰 제복을 입고 붉은색 모자를 쓴 관악대가 나타났다. 관악대는 마차 앞에서 걸음을 일정하게 맞춰 행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규모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번화가로 나오니,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들은 마차가 지나가는 길마다 꽃가루를 뿌리며 환영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쏟아지는 함성에 카르한은 정신이 없었다. 공휴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나 의아해하는데, 일리아가 대답해주었다.

“블로든 상단 직원들은 오늘 휴무예요.”

“예……?”

“어머니께서 당신 생일이라고 전 직원에게 휴가를 주셨거든요.”

카르한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행사도 여러 개 열어뒀어요. 거의 축제 규모니까 다들 구경하러 나온 거죠.”

카르한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마차는 아주 천천히 번화가를 달렸다. 인파는 점점 늘어났고, 환호성도 더욱 커져갔다. 생일 파티가 아니라 승전식이라도 치르는 모양새였다.

정작 공작 계승식은 간소하게 치렀는데, 생일은 황제의 탄신일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정말로 일리아의 계획처럼 모두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하늘을 찌르는 카르한의 인기에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요즘 들어 카르한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를 둘러싼 나쁜 소문이 걷히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식량 부족으로 굶고 있던 제국민을 구휼한 것. 혈혈단신으로 야만족과 평화 협정을 이루어낸 것. 그리고 방탕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장남을 밀어내고 공작이 된 카르한은 권선징악을 좋아하는 제국민들에게 딱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한참 번화가를 가로지를 때였다. 펄럭, 하고 종이 한 장이 마차 안으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잡은 카르한은 그림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자신의 얼굴이 아주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겨울 끝자락에 태어난 카르한 에반테온, 생일 축하합니다.]

유려한 필체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판화 장인에게 맡겼어요. 직접 그린 것 같죠?”

잘 나오지 않았냐며 일리아가 슬쩍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보이는 벽에도 똑같은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신문 안 보는 사람도 많잖아요.”

“…….”

“나중에 수거할 거니 쓰레기는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자,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담스러워요?”

카르한은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축하 받는 게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제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가족들이 축하해주기는커녕, 주변 사람들 모두 카르한의 생일을 몰랐다. 그나마 테시온이 생일을 챙겨주긴 했지만, 둘이서 파티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간질거리는 손끝만 매만지던 카르한은 일리아를 마주한 채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제 생애 최고의 생일인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한데요. 내년에는 더 최고로 해줄 거거든요.”

일리아의 대답에 카르한은 마주 웃고 말았다. 마차는 어느덧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사교장으로 쓰였으나, 오늘만큼은 카르한을 위한 생일 파티가 열릴 것이다.

“각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평생 들을 축하를 전부 듣는 것 같았다.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카르한이 도움을 주었던 이부터 그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카르한은 하나하나 인사를 받아주다가 일리아의 손에 끌려 나왔다.

“케이크 잘라야죠.”

이윽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케이크가 등장했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만들었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르한의 손에는 케이크용 칼이 아닌, 연습용 목검 크기의 칼이 들렸다.

“실력을 보여줘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듯하게 케이크를 잘랐다.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숨만 쉬어도 칭찬 받는 것 같아서, 카르한의 귓불이 붉어졌다.

그러고 나서 가벼운 연회가 열렸다. 말만 가벼운 연회지, 황궁 연회보다 더 화려하고 볼거리가 넘쳐났다. 가장 먼저 비올레의 지도하에 블로든 가문 기사들이 절도 있는 검술을 선보였다.

클리프는 이국에서 자라는 수목을 곳곳에 비치해두었다. 간단한 사회를 맡은 헤인리는 연회가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진행을 보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생일 파티가 끝나고,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산처럼 쌓인 상자를 보고 기겁했다.

“당신 앞으로 온 선물인가 봐요.”

일리아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마차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직도 오고 있네요.”

마차가 줄줄이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상자가 끝없이 증식하는데, 유독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사내가 카르한에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카르한이 얼떨결에 상자를 받자, 그가 말을 이었다.

“폐하의 전언입니다. 공작, 생일 파티에 참석 못 해서 미안합니다. 다음번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황제 또한 카르한의 생일 파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제가 보낸 대리인이 떠나고, 카르한은 산처럼 쌓인 선물을 바라보았다. 상자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많아서 다 못 쓸 것 같습니다.”

“그럼 기부해요. 감사 인사를 보내면서 더 좋은 곳에 쓰겠다고 양해를 구하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보내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라고, 일리아가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도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생일 파티도 엄청났는데 또 무엇을 준비했단 말인가. 작년에 일리아가 받은 생일 선물을 떠올린 카르한은 어깨를 떨었다.

카르한은 새로 옷을 갈아입은 후 일리아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리 도착해 있던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보였다. 말쑥한 차림새를 한 채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뒤늦게 장의자를 발견했다.

“?”

후원에 웬 장의자란 말인가.

“지금 바로 시작할 거예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은 아직도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여기로 와요.”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사이, 비올레와 클리프가 신속하게 장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왼편에 헤인리가 섰고, 일리아는 카르한과 팔짱을 낀 채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 배치가 끝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네사가 등장했다.

“완성까지 한 달은 걸릴 것 같아요. 그럼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네사가 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카르한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닫고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옅은 미소를 띤 일리아가 속삭였다.

“가족 초상화를 그릴 거예요.”

“…….”

“본관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고요.”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잘게 떨었다. 이전에 일리아가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공작부부와 블레어드가 그려진 초상화 속에는 카르한만 존재하지 않았다. 버려진 존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달랐다. 그걸 일리아에게 보여준 것이 서럽고 부끄러웠다.

카르한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정말로 카르한에게는 큰 의미였고, 최고의 선물이었다.

“앞을 봐주세요.”

바네사의 요구에 모두가 정면을 응시했다. 어색하게 서 있던 카르한의 몸이 일리아 쪽으로 살짝 허물어졌다.

“좋아요. 그럼 이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어주세요.”

카르한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석양이 지기 시작하자 정원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겨울 끝자락이긴 해도 밤은 쌀쌀했기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이만하기로 했다.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두세 시간씩 초상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매듭지었다. 실물을 옮겨 그리는 것 정도는 금방 끝낼 수 있다며, 바네사는 자신만만해 했다.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저택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블로든 저택에서 뒤풀이 파티를 할 시간이었다.

규모는 낮보다 작아졌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한 차림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르한 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에 취한 테시온은 했던 말을 다섯 번째 반복 중이었다. 처음 카르한을 만났던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에반테온 공작이 되기까지, 그 역사를 되풀이했다.

테시온은 자신이 몇 년 동안 곁을 지켜온 카르한이 공작위에 올랐다는 것이 무척 감격스러운 듯했다. 열심히 떠들던 테시온이 잔을 쥔 채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축하해주는 사람도 많고…… 저는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죽다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똑같이 술에 취한 프란체가 소리쳤다.

“두 분이 결혼하시는 걸 봐야죠!”

“……!”

테시온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말렉은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 바람 쐬러 나갑시다.”

산책하면서 술 좀 깨고 들어오자며, 말렉이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을 웃으면서 지켜보던 일리아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멈칫했다.

이제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으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볼 때였다. 하지만 일리아와 카르한은 각자 바쁘게 지내느라, 둘이서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청혼도 내가 해야 하나.’

어떻게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를 꺼내볼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클리프와 대화 중인 카르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클리프가 뭐라 말하고, 카르한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슬그머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요?”

카르한과 클리프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동시에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별것 아닙니다.”

수상쩍은 반응에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자꾸 딴청을 피워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뭔가 저 몰래 진행 중인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다.

달이 마른 가지 위에 걸렸을 즈음, 길었던 생일 파티가 끝났다.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하나둘 잠자리에 들었다. 일리아는 침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보송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카르한의 생일이 끝나기까지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손에 램프를 든 일리아는 침실을 빠져나와, 어두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밀회를 가지는 것 같아서 괜히 두근거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일리아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카르한, 들어가도 돼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절로 열렸다. 카르한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밤이 늦었는데…… 졸리지 않습니까?”

“아직 잠이 안 와서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설핏 미소 지은 카르한이 일리아를 안으로 들였다.

“당신은 왜 안 잤어요?”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들기가 아쉬워서 조금 더 깨어있고 싶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전부 꿈이었을까 봐…….”

카르한은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속으로 웃던 일리아는 침대 위에 잔뜩 쌓인 편지더미를 보았다.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카르한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분쟁 지역 마을 사람들이 보내준 겁니다.”

생일을 맞이해 마을 관리인인 루벤투스가 한 번에 묶어서 보내준 것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침대에 앉아서 편지를 함께 읽고 떠들었다.

“다들 바쁘겠는걸요. 주문이 왕창 들어왔거든요.”

얼마 전, 스텔라는 일리아가 선물로 준 공예품을 착용하고 사교장에 등장했다. 머리장식부터 팔찌, 손수건까지…….

스텔라를 추종하는 영애들과 귀부인들은 똑같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일리아만 신이 났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오늘 있었던 일들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말을 경청하는 게 좋은 듯 손등을 문지르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말을 멈춘 일리아는 카르한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약혼식을 치렀을 때 나눠 가진 반지였다. 이제 슬슬 결혼반지로 바꿀 시기가 온 듯했다. 과연 카르한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슬쩍 물어볼까?’

간접적으로 결혼을 언급하려던 일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히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다른 고민까지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카르한의 상황이 정리되면, 은근슬쩍 결혼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말이다.

‘정 안 되면 청혼도 내가 하지, 뭐.’

일리아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계를 확인한 일리아는 오늘이 5분도 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리아는 두 팔을 벌려 카르한을 꼭 안았다. 단단한 몸이 제 품에 꽉 찼다. 맞닿은 몸으로부터 심장 소리가 두근두근 들려왔다.

“생일 축하해요. 카르한.”

올해 생일의 마지막 축하 인사였다. 일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카르한이 마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최고의 생일을 보내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일리아와 카르한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찾았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두 사람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했다.

***

길었던 겨울이 물러나고, 멀리 떠났던 봄이 다시 걸음 했다. 봄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가지에 싹이 트고 생명이 움텄다. 블로든 저택에도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공작저로 출근한 카르한은 회의장으로 향했다. 총회 이후로 원로들이 모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작위 인수인계가 끝난 카르한은 얼마 전에 막대한 빚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은행이 아닌 고리대금업자에게서 사채를 쓴 것이었다. 원로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장부까지 조작하는 치밀함을 보였지만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었다.

카르한은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했고, 레베타가 사채를 빌려 엘리오드 백작에게 합의금을 내어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카르한은 고민에 빠졌다. 원로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가는 가문이 뒤집힐 것이 뻔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기에, 카르한은 결단을 내렸다. 원로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주기로 말이다.

회의가 시작되고 원로들이 의제를 꺼내기도 전에 카르한은 전대 공작부부가 사채를 썼음을 밝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원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은행도 아니고 고리대금업자라뇨!”

“그럼 지금도 이자가 붙는 거 아닙니까.”

회의장이 한바탕 난리 나자, 카르한은 차분하게 한마디 했다.

“전부 갚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말입니까. 안 그래도 공작령의 세수가 줄었는데…….”

일을 벌인 것은 레베타와 블레어드였지만, 몇몇 원로들은 카르한에게 은근히 책임을 강요했다.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 후 일부 원로들과 카르한은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글로시아나 시오릭처럼 카르한을 지지했던 원로들은 조용했으나,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서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이제 막 작위를 계승한 젊은 공작이니, 제 입맛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기회에 카르한의 약점을 잡으려는 듯 꼬치꼬치 캐물어왔다.

“그만하십시오.”

묵직한 저음에, 원로들이 입을 다물었다. 카르한은 원로들을 슥 둘러본 후에 말을 꺼냈다.

“이자를 포함한 원금은 다음 달 내로 갚을 수 있습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과 선대 공작의 물건을 전부 팔면 일부 상환이 되더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들 제가 야만족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들어주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카르한은 처음으로 원로의 말을 잘랐다.

“방위비가 대폭 감소했으니, 앞으로 분쟁 지역에 들어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 인근 마을에 공방을 차린 것과 유통망을 늘린 것까지 전부 세세히 말해주었다.

“경작을 할 수 없는 마을에 공방을 하나씩 늘려볼까 싶습니다. 그럼 공작령 주민들은 스스로 생산 활동을 하고 세금을 내게 될 겁니다.”

지금껏 척박한 땅에 사는 주민들은 공작 가문에서 구휼금을 받아서 생활했다. 주민들이 생산 활동을 시작한다면 구휼금을 환수할 수 있을뿐더러 세금까지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잠깐 말을 망설였다. 어제 일리아와 이야기가 끝났으니, 말해도 괜찮을 터였다.

“이번에 분쟁지에서 희귀 원석을 대량 발견했습니다.”

“!”

원로들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금보다 값어치가 높으니 그것만으로도 수익이 상당할 거라 예상합니다.”

공작령에는 광산이 드물었다. 극소량의 금이 매장된 광산 하나 외에, 값어치가 높지 않은 원석이 채굴되는 광산이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 카르한의 발언은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머리를 굴리던 원로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카르한을 견제하던 원로들도 단숨에 조용해졌다.

의제가 바뀌고, 카르한과 원로들은 회의를 이어갔다. 어느새 회의는 카르한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가끔 지나치게 간섭하는 원로가 있으면, 글로시아나 시오릭이 막아주었다. 회의가 길어지자, 카르한은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언제 결혼하실 생각이십니까?”

“슬슬 결혼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회의보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원로들은 카르한이 일리아와 교제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블로든은 이제 재력뿐만 아니라, 권력도 가지게 된 상태였다. 원로들이 결혼을 종용하자, 카르한이 대답했다.

“그럼 여러분 말씀대로 회의는 이만하겠습니다.”

“예?”

원로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이 처음으로 웃었다.

“지금 청혼 반지를 찾으러 갈 거니까요.”

***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창문 틈새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카르한의 생일을 기점으로 날씨가 따뜻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꽃이 피었다. 벌써 장미가 움트는 것으로 보아 올해는 여름이 일찍 찾아올 모양이었다.

온천 사업 일로 오랜만에 외출한 일리아는 비올레를 대신하여 거래처 사람들을 만났다. 비올레는 슬슬 일리아에게 사업 권한을 넘기는 중이었다. 일찍 은퇴한 후에 클리프와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만약 비올레가 바람대로 일찍 은퇴한다면, 일리아가 블로든 상단의 대표자가 될 터였다. 백작위는 헤인리가 계승하고, 상단은 일리아가 물려받는 것이다.

볼일을 마친 일리아는 오랜만에 오르골 가게로 향했다. 매입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가게 앞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아직도 제국은 오르골에 반지를 넣어서 청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요즘 청혼하기 좋은 달이라 그런지 저번 달보다 손님이 많아 보였다.

줄을 선 손님들의 얼굴에는 들뜸과 설렘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들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중에 신혼여행 가면 어디가 좋을까요?

기다릴 만큼 기다린 일리아는 먼저 결혼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러나 카르한은 일리아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착실하게 여행지만 읊었다. 답답해진 일리아는 대놓고 물었다.

-우리 슬슬 결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카르한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일리아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혹시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 건지, 아니면 고민 중인 건지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빙빙 돌리는 걸 싫어하는 일리아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카르한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번엔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은데.”

그 후로 둘 다 바빠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거기다 최근 들어, 카르한은 저녁 식사가 끝나면 금방 잠들어버렸다. 식사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아서, 안쓰러운 나머지 붙잡지도 못했다.

“일이 그렇게 바쁜가.”

계속 꼭두새벽에 저택을 나가던데……. 걱정과 서운함이 함께 밀려왔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아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에 재산이 크게 늘어서 은행 금고를 증설해야 했다. 이러다가 은행 옆에 블로든 가문 전용 금고를 새로 지어야 할 판이었다.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나오자,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왔다.

“블로든 영애!”

깜짝 놀란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여기서 테시온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르한도 같이 왔나 확인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공작저로 와주십시오.”

“무슨 일 있어요?”

“예, 아주 급한 일입니다.”

테시온이 비장하게 말하자, 일리아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최근 카르한이 무척 피곤해했던 것이 생각났다.

일부 에반테온 원로들이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혹시 그들 때문에 성과를 내려고 무리했다가 과로로 쓰러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이놈의 원로들을 그냥…….’

일리아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공작저로 가요!”

일리아는 곧바로 테시온과 함께 공작저로 향했다. 마차가 번화가를 달리는 동안, 온갖 걱정이 들었다.

‘건강식이라도 먹여야 하나. 당분간 쉬라고 말해야겠다.’

혼자 결론을 내릴 즈음,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달 사이, 에반테온 공작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서 깊은 에반테온 공작저는 장엄하나 한편으로 쓸쓸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원부터 건물까지 싹 손을 봤는지 한결 밝아 보였다. 공작가의 주인이 바뀐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어디선가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짙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잠깐 향기에 정신이 팔린 일리아는 고개를 내젓고 테시온에게 물었다.

“카르한은 어디에 있어요?”

“후원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원이요?”

뜻밖의 대답에 일리아가 되물었다. 테시온은 그저 이유 모를 미소만 지은 채 후원 쪽으로 손짓했다.

“가보십시오.”

의아한 얼굴로 테시온을 쳐다보던 일리아는 후원 쪽으로 걸음을 뗐다. 사박사박, 새로 자란 잔디가 발에 밟혔다. 후원과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짙어졌다. 일리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후원에 들어선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보라색 융단이 너울처럼 펼쳐져 있었다. 보랏빛으로 가득한 라벤더 꽃밭에 일리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이렇게나 많은 라벤더는 처음 보았다. 마치 보라색 밀밭 사이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화려하고 대단한 정원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 광경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했다. 두근거리는 가슴 부근을 꾹 누른 채 꽃밭을 둘러볼 때였다. 저 멀리 바람이 불어오는 끝에 카르한이 서 있었다.

“일리아.”

나직한 저음이 일리아를 불러왔다. 일리아는 꽃밭에 세워진 이정표처럼 꼼짝 없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카르한도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물결을 부수듯 라벤더가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금 모였다. 라벤더 사이를 가로질러 온 카르한이 마침내 일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카르한은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쓴 듯했다. 중요한 날에만 착용하는 커프스단추까지 소매에 달려 있었다.

일리아는 입술만 달싹였다. 머릿속이 꽉 차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일리아와 함께 만개한 등나무 아래를 걸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리아는 곧바로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렸다. 둘이서 걸었던 등나무 터널. 한 장 두 장 떨어지는 꽃잎은 바닥이 아닌 제 가슴에 쌓였고……, 한여름 밤처럼 아름다웠던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저는 그날, 제가 몰랐던 감정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한의 목소리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카르한 또한 그날을 다시 곱씹는 것처럼.

“그 후로 등나무를 볼 때마다 일리아가 생각났습니다.”

“…….”

“아마 평생, 제게 등나무의 의미는 사랑으로 남을 겁니다.”

다시금 눈앞에 등나무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듯했다. 그때와 풍경은 달랐지만, 일리아는 카르한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일리아 또한 라벤더를 볼 때마다 카르한을 떠올릴 것이다.

“…….”

카르한은 눈시울이 붉어진 일리아를 응시하다가 작은 오르골을 꺼내들었다. 불어오던 바람이 멎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통통 튀는 맑은 소리가 라벤더 위를 뛰노는 듯했다.

일리아는 이 음악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과 처음 오르골 가게에서 만났을 때, 일리아가 추천해준 음악이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음악이 멈추고 상자가 덮였다. 숨겨져 있던 공간에 반지가 놓여 있었다.

“제가 평생 당신 곁을 지켜도 되겠습니까?”

카르한의 청혼에 일리아는 가슴이 벅차서 숨만 들이켰다. 제 안에서부터 선율이 들려왔다.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일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의 손을 붙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딱 맞게 들어간 반지가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일리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카르한.”

완벽한 순간이었다.

***

어느 날씨 좋은 날, 오랜만에 외출한 카르한은 일찍 볼일을 끝내고 움직였다. 오늘 마침 일리아와 시간이 맞아서, 밖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이전에 일리아와 만났던 시계탑 아래였다.

카르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약속시간까지 아직 멀었으니, 꽃이라도 사 갈까 싶었다. 꽃집을 향해 걷던 카르한은 끙끙거리며 가방을 옮기는 여자를 보았다. 카르한은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제가 짐을 옮겨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여자는 살았다는 듯 반색했다.

“저기까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자가 가리킨 곳은 은행이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었기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 가뿐하게 가방을 든 카르한은 척척 걸어갔다. 연신 감탄하던 여자는 은행 앞에 도착하자 고맙다고 인사했다.

“도와주셨는데, 이대로 보내기는 그렇고…….”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더니 카르한에게 말했다.

“점을 안 본 지 오래되긴 했지만, 고마우니까 한번 봐드릴게요.”

카르한은 그제야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수상함을 느낀 카르한은 생각했다.

이단인가……? 카르한은 거절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자 여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주변에서 소문난 점술사였습니다.”

그걸로 떼돈을 벌었다며, 그녀가 자신만만해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잘 지낼 수 있는지도 점칠 수 있지요.”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여자는 금방 끝난다며 카르한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은 여자가 그 위에 카드를 펼쳤다.

“자, 뽑아보세요.”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게 된 카르한은 조심스레 카드를 뽑았다. 여자가 카드를 하나씩 뒤집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박복한 운명이로군요. 태어날 때부터 재물운이랑 가족운은 최악이고…….”

어떻게 알았지. 여자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하지만 연애운만큼은 모든 걸 상쇄할 정도로 좋습니다.”

“…….”

“딱 한 명, 운명의 상대가 있군요. 그 사람이 당신을 꽃피울 겁니다.”

카르한은 곧바로 일리아를 떠올렸다. 그 말처럼 일리아를 만난 후로 카르한의 운명은 바뀌었다.

“으음……, 뭔가 예전에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튼 당신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 행복해질 겁니다.”

카르한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더 봐드릴까요?”

“……결혼 생활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여자는 카드 두 장을 더 뽑았다. 눈을 가늘게 뜬 여자가 말했다.

“결혼식은 아직이지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자가 혀를 찼다.

“주변에서 방해가 들어올 운세예요. 그래도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게 될 겁니다.”

여자는 카드 몇 장을 더 뽑았다. 그러더니 눈을 크게 뜬 채 중얼거렸다.

“부인 되실 분이 고생하겠는데요?”

“예?”

카르한이 심각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인상이 험악해지자, 여자는 움찔했다.

“아이가…….”

“아이가?”

“좀 많네요. 그것도…… 세쌍둥이?”

그녀는 확신 없는 말투였다.

“제가 자식 운은 틀릴 때가 종종 있으니, 이건 너무 귀담아듣진 말아요.”

주섬주섬 카드를 챙긴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이만.”

매번 금화를 은행에 가지고 가는 것도 일이라고 중얼중얼하던 여자는 이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카르한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세쌍둥이라고……?”

다사다난했던 카르한의 인생에 찾아올, 새로운 파란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돈으로 약혼자를 키웠습니다 完 / 7권(외전)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