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
“아쉽습니다.”
카르한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루벤투스가 무척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엊그제 오신 것 같은데, 벌써 떠나실 때가 되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카르한은 얼마 전부터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다. 돌아가겠다고 통보한 후 공작의 답신은 받지 못했으나, 늦어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떠날 예정이었다.
“시간이 나면 가끔 들르겠습니다.”
만약에 카르한이 공작이 된다면 이런 변두리 영지까지 신경 쓸 틈 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루벤투스는 카르한이 빈말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소공자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더군요.”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저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인사를 건네 왔고 존경과 호의를 담아 대했다. 카르한도 마을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든지라, 아쉽기만 했다.
“아참. 서신이 왔습니다.”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루벤투스가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럼 저는 식사를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루벤투스가 먼저 방을 나가버리고, 카르한은 편지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일단 짐을 마저 꾸린 후에 확인할 생각이었다. 당장 쓸 일이 없는 물건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한참 짐을 꾸리던 카르한은 자꾸만 늘어나는 상자를 보고 당혹스러워졌다.
“왜 올 때보다 짐이 늘어난 거지?”
카르한은 짐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상자를 확인했다. 하지만 뺄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일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다시 짐을 꾸리려고 소매를 걷어붙이자, 옷에 감춰진 팔찌가 드러났다. 팔찌를 본 카르한은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작별할 때 일리아가 준 팔찌로, 끄트머리에 단추가 달려 있었다.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카르한은 짐을 다시 꾸렸다.
정리가 끝난 후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지를 꺼내든 카르한은 몇 줄만 읽고서 누가 보냈는지 알아차렸다. 엘리오드 백작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엘리오드 백작은 아들의 목숨 값으로 에반테온 공작가에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 블레어드를 무너뜨릴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냥 죽이진 않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진창까지 끌어내린 후에 직접 복수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백작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눈송이가 거침없이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서로를 껴안듯 창문에 겹겹이 들러붙었다. 진눈깨비는 금방 부피를 키워 함박눈이 되었다.
카르한은 편지지를 내려놓고 외투를 걸쳤다. 눈이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고 미리 대비할 생각이었다. 이제 눈이 오지 않을 거라 안심했더니, 분쟁지는 겨울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현관을 나선 카르한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상이 희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땅바닥, 지붕, 메마른 나뭇가지에도……. 심지어 카르한의 검은 머리카락마저도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여갔다.
“밤까지 오겠는데…….”
아무래도 병사들을 동원하여 눈을 치워야 할 듯싶었다. 특히 마을에는 노후한 건물이 많으니, 눈 때문에 지붕이 내려앉을 가능성이 컸다. 카르한은 뒤돌아서서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달려오는 이가 보였다. 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세상 속을 정면으로 가로질러 왔다.
“급보입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퍼져나갔다. 산산이 부서지는 입김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윽고 사내가 카르한의 앞에서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그는 다급히 외쳤다.
“소공자님! 당장 수도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카르한이 넋을 놓은 채 서 있자,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에반테온 공작이 사망하였습니다.”
***
블레어드는 버릇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블레어드는 손등으로 핏방울을 닦았다. 최근 일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아,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이제 총회까지 세 달도 남지 않았다. 황제까지 제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 이룩해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저를 지지해주는 원로 중 한 명이라도 변심하면 승패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최근엔 술과 약 없이는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혹시 카르한 쪽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겠지.”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애써봤으나, 소득이 없었다. 분쟁지에 보내둔 첩자와 연락이 전부 끊겨버린 탓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의 손에 잘려나간 듯했다.
블레어드는 잠자리처럼 방 안을 뱅뱅 맴돌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협탁에 올려둔 약통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약통을 대고 툭툭 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다 떨어졌잖아.”
블레어드가 약통을 바닥에 내던졌다. 금단증상이 나날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약을 하지 않으면 두통이 밀려들었다.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걸친 후 방을 나왔다. 현관 앞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탄 블레어드는 익숙한 장소로 향했다.
비밀 모임에 얼굴만 잠깐 비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이제는 꼬박꼬박 방문하게 되었다.
마차에서 내린 블레어드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입구에서 암호를 대고 입장하자, 안개처럼 자욱한 연기가 그를 맞이해주었다. 장의자에 늘어져 있는 귀족들이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잎담배는 아니었다.
블레어드는 아무 자리나 차지한 후 옆에 앉은 이에게서 약을 받았다. 머리에 못을 박아대는 것 같던 두통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이곳에 있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한심하다는 눈초리도, 어머니의 가식 섞인 걱정도 생각나지 않았다.
블레어드는 뿌연 연기 속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영식들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떠돌던 연기는 어느새 구름이 되었다. 몸이 두둥실 떠올라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블레어드는 다른 이들과 늘어진 채 욕설 섞인 잡담을 나누었다. 이곳에서 교양 있는 언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한창 꿈속을 걷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왠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다들 약과 술에 취해서 모르는 눈치였다. 눈치 빠른 블레어드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주시했다.
“경비대다!!”
누군가의 소리침과 함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쏟아졌다. 블레어드는 본능적으로 자욱한 연기를 뚫고 후문을 향해 달려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잡아라!”
“뭐, 뭐야!!”
“이거 놔라!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당황한 귀족 영식들이 허우적거리며 반항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인지 경비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블레어드는 그들을 뒤로한 채 후문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후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찔러왔다. 정신을 차린 블레어드는 곧장 골목을 걸어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온몸이 벌벌 떨렸다. 겨우 진정한 블레어드는 창문을 통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빨리 출발해!!”
블레어드가 소리치자,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금까지 자신과 시시덕거리던 이들이 경비대원의 손에 붙잡혀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눈이 마주칠까 싶어서 재빨리 커튼을 치고 구석에 웅크렸다. 혹시 전부 꿈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점점 돌아오는 이성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블레어드는 이미 과오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똑같은 비밀 모임에서 말이다. 다행히 묻어버릴 수 있었으나, 두 번은 용서 받을 수 없을 터였다.
“……내가 왜 그랬지?”
조금만 더 참으면 됐는데, 왜 그걸 못 기다려서. 블레어드는 끝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다가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수사가 시작되면 분명히 제 이름이 나올 것이다. 비밀 모임의 회원들은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친구를 밀고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만약 원로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끝이었다.
원로들은 블레어드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건 몰랐다. 보수적인 원로들은 저를 등질 것이 분명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블레어드는 레베타를 찾아갔다.
“어머니.”
금방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블레어드의 얼굴을 본 레베타가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블레어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레베타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준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제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새로 꾸몄다.
친구의 강요를 못 이겨, 잠깐 질 나쁜 모임에 들렀다가 운 나쁘게 휘말린 것 같다고 말이다. 블레어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레베타는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도를 찾아보자꾸나.”
블레어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베타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편이 되어줄 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베타는 힘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었다. 레베타를 앞세운다면, 공작도 마지못해서 블레어드를 도와줄 것이다. 고심 끝에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봐야겠습니다.”
레베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든 블레어드가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혼자는 버거울 것 같으니,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떨떠름해하던 레베타가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경비대의 숫자도 상당했으니, 내일이면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해야 했다.
블레어드는 레베타와 함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져, 사방이 어둑했다. 끝없는 복도를 걸어가던 블레어드는 잠시 창문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 수도에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후우…….”
집무실 앞에 도착한 블레어드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공작을 만나는데, 부탁해야 하는 처지라 떨렸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가 먼저 들어가고 레베타가 뒤따랐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는 에반테온 공작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와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공작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자, 솜털이 곤두섰다. 손끝이 떨려왔으나 애써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약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덜 떨렸다. 문 쪽에 서 있는 레베타를 뒤로한 채, 블레어드는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
블레어드의 부름에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목울대를 움직인 블레어드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블레어드는 레베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자신의 과실은 최대한 줄이고 모든 잘못을 타인에게 돌렸다. 뒤에 서 있던 레베타도 한마디 거들었다.
“실수했다고 하니, 용서해주세요. 총회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레베타가 총회를 언급하자 공작이 미미한 반응을 보였다. 희망을 가진 블레어드가 부탁했다.
“적어도 총회가 끝날 때까지는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블레어드의 말이 끝나자 집무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블레어드는 초조하게 공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 공작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처신 똑바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쿵,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블레어드를 응시하던 공작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공작이 중얼거렸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사고만 치고 다니는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며, 에반테온 공작은 블레어드를 비난했다. 그의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블레어드를 난도질 해왔다. 애써 진정시켰던 손끝이 다시 덜덜 떨려왔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에 가자마자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었는데, 너는 뭐지?”
“…….”
“후계자 자리를 쉽게 생각한 모양이야.”
공작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블레어드의 곪아있던 상처를 건드렸다. 후계자 자리를 쉽게 생각했다고? 그랬다면 이렇게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카르한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면, 남들의 환심을 사려고 스스로를 감추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따지고 보면 약을 하게 된 계기도 전부 공작 탓이었다. 계속 몰아붙이니 숨 쉴 구멍은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블레어드는 공작을 노려보았다. 공작이야말로 위선자였다. 자식에게 관심도 없다가 이제 와서 경쟁을 시키는 주제에, 자신은 고고하고 옳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무능력의 극치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원로들이 권력을 잡게 된 것도 전부 공작 때문이 아닌가.
점점 숨이 차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블레어드를 휘어 감쌌다.
“애초에 후계자 자리가 네게 버거웠는지도 모르지.”
공작의 마지막 말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훅 끼쳐온 약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성이 따라가기도 전, 블레어드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퍽! 조용한 공간을 깨부수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비명이 들려왔으나, 블레어드는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쥔 술병으로 공작을 내리쳤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듯 날뛰었다.
한참 후, 블레어드는 치켜들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의자에 앉아 있던 공작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책상 뒤편에 난 창문 밖으로는 눈발이 장대비처럼 휘몰아쳤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블레어드는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제 손에 들린 와인병은 절반도 남지 않은 채였다.
뾰족한 끄트머리를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눈에 담던 블레어드는 고개를 돌려 문 쪽에 서 있던 레베타를 응시했다. 얼어붙어 있던 레베타가 숨도 쉬지 못한 채 블레어드를 마주 보았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챙그랑, 부서진 와인 잔이 바닥을 굴렀다. 레베타를 바라보던 블레어드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레베타는 움찔했지만, 문을 등지고 있는지라 꼼짝할 수 없었다.
“어머니…….”
블레어드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레베타 앞에 멈춰 선 그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블레어드는 레베타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울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얼어붙은 레베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블레어드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정신이 잠깐 나간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도 블레어드는 사고였다며 변명을 내뱉었다. 울먹이던 블레어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타는 그의 눈에서 광기를 읽었다.
“진, 진정하렴. 나는 네 편이니까.”
레베타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블레어드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레베타는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펫 위에 끔찍하게 난도질 된 시체가 놓여 있었다. 굳이 생사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공작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으니,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하자꾸나.”
겨우 블레어드를 진정시킨 레베타는 가장 신뢰하는 고용인을 불렀다. 그 후로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시체를 수습하고 집무실 정돈까지 끝낸 후, 레베타가 말했다.
“이만 들어가 보마.”
블레어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불안해 보였으나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블레어드의 조용한 속삭임을 들은 레베타는 말없이 돌아섰다. 레베타는 어두워진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나중에는 품위 없이 달리고 있었다.
다급히 자신의 침실로 뛰어 들어온 레베타는 문을 잠그고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레베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전부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내 착한 아들이…….
레베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레베타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덜덜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밖으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을 전부 희게 물들일 듯 유례없는 폭설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더듬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창백한 뺨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레베타는 입술을 깨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야…….”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벌어졌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이전에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였을 때, 억울하게 휘말려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기에 믿었다. 그러나 아까 본 블레어드의 모습은 악귀 그 자체였다. 공작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술병을 내리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레베타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어째서인지 또다시 카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카르한은 뭔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자신이 믿던 것이 정말 신기루에 불과한지 진실을 알고 싶었다. 만약에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전부 잘못되었다면…….
“안 돼.”
레베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외면해왔던 과거를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블레어드가 저를 끔찍이 위하던 착한 아들이 맞는지. 카르한이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를 지탱해오던 것이 무너지더라도, 더 이상 블레어드의 행동을 감싸 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환상 속에서 빠져나갈 때일지도 몰랐다.
***
수도는 한창 시끄러웠다. 귀족 자제들이 모임을 가져,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금지된 약물 복용, 도박, 매춘, 상해……. 온갖 범죄가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들통 났다.
평판이 좋던 귀족들의 더러운 민낯이 밝혀지자, 제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중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이었다.
체포된 귀족 자제 중 하나가 비밀 모임에 대해 진술하다가,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음을 밝혔다. 그때부터 모든 관심은 블레어드에게 쏠렸다.
증인 몇을 제외하고는 증거가 없었으나, 일리아가 사교 모임에서 했던 발언이 재조명되면서 사교계에서는 진실처럼 퍼져나갔다. 덕분에 블로든 가문을 둘러싼 추문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비밀 모임 회원들은 거물 아버지를 두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나왔다. 그러나 소문은 사그라질 만하면 재점화되었다. 신문은 연일 그것에 대해 떠들었고, 조직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었다. 논란이 식지 않게 장작을 넣는 것처럼 말이다.
고위 귀족을 상대로 이토록 꾸준히 의혹을 제기하는 건 뒤에서 엄청난 돈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논란 속에서 또 하나의 비보가 들려왔다. 에반테온 공작이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오랜 지병을 앓다가 수면 중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가 났다.
또 한 번 수도가 크게 뒤집히고, 황실까지 어수선해졌다. 황제와 황태자의 세력 싸움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에반테온 공작이 죽으며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다들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이 누가 될지를 두고 왈가왈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에반테온 가문 측은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이 작위를 계승하고 나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올 때가 되었는데.”
현관 앞을 서성거리던 클리프가 중얼거렸다. 정원을 응시하던 비올레도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애가 탔다. 잠시 후, 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왔어요!”
일리아의 외침에 다들 시선을 고정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던 마차가 마침내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세 사람은 다급히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 문이 열리더니, 그토록 기다렸던 이가 내렸다.
“카르한!!”
“어서 와요. 소공자.”
“소공자, 참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환영에 카르한은 쑥스러워하다가 이내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다는 말 한 마디가 왠지 뭉클했다. 클리프가 먼저 카르한을 안아주었다. 뒤이어 비올레가 가볍게 카르한의 등을 토닥이며 잘 다녀왔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카르한은 곧장 다가와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폭 감싸인 일리아는 카르한을 마주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작은 속삭임에 카르한의 두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부모님의 시선을 느낀 일리아가 먼저 팔을 내렸다. 천천히 떨어져 나간 카르한이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아가 눈치채고 말했다.
“오라버니는 황궁에 출근하셨어요. 아마 내일 돌아오실 거예요.”
말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다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오늘은 푹 쉬어요.”
비올레와 클리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카르한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카르한이 무척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올레와 클리프가 가버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을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한숨 자고 나중에 봐요.”
그때 카르한이 일리아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카르한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방에 들어왔다. 침실에 들어선 카르한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떠나기 전과 바뀐 것이 없었다. 매일 청소를 해두었는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카르한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물었다.
“여기로 곧장 온 거예요?”
“예, 아직 공작저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공작저가 언급되자 잠깐 침묵이 돌았다. 카르한이 예상보다 일찍 귀환한 이유는 공작의 죽음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다.
한 번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카르한이 어떤 심정일지 헤아릴 수 없었다. 카르한과 공작의 관계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였다.
침묵하던 일리아는 두 팔을 뻗어 카르한의 등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태산같이 솟은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카르한은 무척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슬프지는 않은데……,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
“제가 정상이 아닌 걸까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굳이 당신의 감정을 정의 내릴 필요 없어요.”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난할 이유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어깨를 짧게 떨었다.
“그 사람은 한 번도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었습니다.”
카르한은 공작과 연관된 기억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에반테온 공작은 카르한에게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진 냉대에 미움이라는 감정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공작저를 나온 순간부터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허망함이 밀려왔다.
한참 기억을 쏟아내고 나서야 더러운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감정이 점차 씻겨나갔다. 부친이었던 남자를 떠나보내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마음이 진정된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눈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카르한은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앉아서 이야기 좀 해요.”
잘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두 사람이 침대에 앉으려고 할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 님.”
테시온의 목소리에 일리아와 카르한이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이 대답하자 굳어진 얼굴을 한 테시온이 들어왔다.
“총회가 앞당겨졌습니다.”
총회가 앞당겨졌다는 말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그대로 굳어졌다. 테시온은 공작부인과 원로들이 긴급회의를 열어 결정 내렸다고 설명해주었다.
“총회는 언제 열리지?”
“2주 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조만간 글로시아를 만나야 할 듯싶었다. 수도는 글로시아에게 맡겨두었는데, 그를 포함한 중립파 원로들은 전부 카르한 쪽으로 돌아섰다.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시오릭 또한 분쟁지에서 카르한의 활약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공작령에 머무르고 있던 또 다른 원로마저 카르한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확실하게 제 편이 된 사람은 총 다섯 명이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블레어드가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뒤돌아설 원로들이 많을 터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푹 쉬십시오.”
테시온이 방을 나가버리고, 일리아가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일단 원로님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공작이 죽어버렸으니, 그 권한은 레베타에게 넘어올 터였다. 레베타가 이번 총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블레어드만을 끔찍이 위했다. 카르한 편을 들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걱정 마십시오. 예정보다 조금 앞당겨질 뿐이니.”
카르한은 일리아를 안심시켜주었다. 그제야 일리아가 표정을 풀었다.
“일단 짐부터 풀까 싶습니다.”
“도와줄게요.”
이윽고 고용인들이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습니다.”
카르한은 들뜬 아이처럼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선물로 준 겁니다.”
카르한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기억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런 후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건 제가 연습한 그림입니다.”
엄청난 양의 그림을 확인한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만큼이나 그렸는데, 실력이 늘지 않다니.’
그림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서 일리아는 작게 웃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도란도란 물건을 정돈해나갔다. 카르한은 순무 화분을 창가에 올려둔 후에 헤인리에게 받은 초상화를 꺼냈다. 나중에 헤인리가 오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얼추 짐정리가 끝나자 방이 북적북적해졌다. 일리아가 준 오르골까지 전부 가지고 왔더니 짐이 많았다.
“침실에 두기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 옆방을 쓰면 되죠.”
뭐가 문제냐는 듯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이 부족하면 다른 방을 쓰면 된다는 사실을, 블로든 저택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당장 쓰지 않을 짐은 고용인들에게 맡겼다. 정돈하는 과정이 즐거워 둘이서 전부 하다 보니, 일리아와 카르한은 정말로 지쳐버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한참을 노닥거렸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밤을 새워도 모자랄 듯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카르한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자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졸음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냥 자요. 어차피 내일 아침에 가장 먼저 볼 텐데요.”
반쯤 잠든 카르한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내일…….”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속으로 웃다가 작게 속삭였다.
“잘 자요.”
훅, 램프의 불빛이 꺼지며 방 안에 스며들어온 어둠이 카르한을 꿈으로 인도했다.
***
다음 날 저녁 무렵, 블로든 저택 만찬장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기쁜 날이라며, 클리프는 직접 키운 채소를 기꺼이 내놓았다. 비올레는 카르한을 환영하기 위해 아끼던 술을 땄다.
마지막으로 헤인리는 황궁 수석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받은 쿠키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카르한을 환영하고 있었다.
“소공자, 그사이 야윈 것 같습니다.”
클리프가 호들갑 떨며 음식을 권하고, 비올레는 몸에 좋은 음식을 전부 카르한 쪽으로 내밀었다. 헤인리는 조용히 카르한이 잘 먹는 음식을 봐두었다가 고용인에게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즐거운 식사가 이어지고, 일리아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일리아가 스푼을 내려놓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할 말이 있어요.”
일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제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던 일, 기억하시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구해준 사람이 카르한이었어요.”
“……뭐라고?”
헤인리가 되묻자, 일리아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주었다.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클리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공자가 은인이었다니!!”
비올레는 흥분한 클리프를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구나.”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비올레조차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소공자라면 그럴 법하군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실컷 떠들어 댔을 텐데, 원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헤인리는 혀를 내둘렀다.
“소공자, 정말 고맙습니다.”
헤인리가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어요.”
비올레와 클리프도 덩달아 감사를 표했다. 만약 카르한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일리아는 이 자리에 없었을 터였다. 카르한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잠시 리하트를 떠올렸다. 일리아를 구해줬다는 것으로 거들먹거리며 돈을 뜯어내던 리하트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어느새 식사는 뒷전이 되고, 다들 카르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분쟁지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났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헤인리가 카르한을 불렀다.
“소공자, 잠깐 시간을 내어주겠습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헤인리에게 줄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카르한의 방으로 향했다. 카르한이 초상화가 들어 있는 원통을 내밀며 말했다.
“귀중한 것을 선뜻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인리는 원통을 가볍게 쓸었다. 옅은 미소를 띠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헤인리는 간만이었기에 카르한은 긴장하고 말았다.
“소공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가볍게 숨을 삼킨 헤인리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해주십시오.”
뜻밖의 부탁에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인리는 침착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맡아 줄 사람은 소공자뿐입니다.”
황태자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막 정계에 입문한 젊은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고위 귀족들까지 휘어잡기 위해서는 황태자 측에서도 대표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다.
마침 카르한은 공작의 후계자였고, 제국 내에서 평판이 많이 좋아졌다. 공작이 사망한 지금,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저도 정치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카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헤인리는 카르한이 아직도 블로든 가문이 처한 형편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쟁지까지 거리가 제법 있기도 했고, 일리아가 일부러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헤인리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여 지금 세무 조사가 들어온 상태입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났을 때, 카르한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일리아가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참 바닥만 내려다보던 카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의 새파란 눈동자를 본 헤인리가 숨을 삼켰다. 자책 위로 분노와 다짐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디어 일리아에게 도움이 될 차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총회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카르한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에반테온 공작이 되겠습니다.”
***
에반테온 공작저는 짙은 음울함이 맴돌았다.
공작이 죽고 난 후, 블레어드는 며칠 내내 방에 처박혀 있다가 발작하듯 난동을 피웠다. 불법 모임이 들통 난 뒤에도, 블레어드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모임 회원의 부모들이 권력과 돈으로 입막음 한 탓이었다.
하지만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진 상태였다. 블레어드의 평판은 한없이 추락했다.
그사이 레베타는 공작과 외양이 비슷한 시체를 구하고 고용인들을 단단히 입막음 했다. 자신 또한 공작과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선 블레어드를 돕긴 했으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할 일을 마친 레베타는 자신이 묻어버렸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집사와 고용인들을 파헤쳐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고된 고용인이 제법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용인을 해고하려면 공작가 안주인인 레베타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승인도 없이 무단으로 쫓아낸 것이다.
수소문 끝에, 레베타는 해고된 고용인들을 찾아냈다.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으나, 다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돈을 두둑이 주겠다는 말에 단 두 명만이 겨우 요청에 응했다.
레베타는 제 앞에 앉은 여자들을 보았다.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뭔가가 나올까 봐 겁먹은 것 같았다. 레베타는 그녀들을 보며 물었다.
“누가 당신들을 자른 거지?”
“큰 도련님께서 해고하셨어요.”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하자, 레베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입을 열었다.
“해고되면서 협박도 받았어요.”
“저도요. 우연히 그걸 봤는데, 전부 잊으라고……. 말하고 다니면 죽여 버리겠다고…….”
아직도 두려운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거라니……?”
레베타가 묻자, 한 명이 대답했다.
“큰 도련님께서 새를 죽여서 공작부인의 화장대에 올려둔 것이요.”
레베타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반박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저도 몇 번 수상쩍은 장면을 목격했어요.”
다른 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레베타의 반지가 없어졌던 날, 블레어드가 레베타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온 모습을 본 것. 짐승을 난도질해서 전시한 것. 레베타가 아끼던 물건을 부수고 카르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말하자면 끝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작은 도련님을 종종 괴롭히는 걸 봤어요.”
안 그래도 파리하던 레베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때 에반테온 공작저의 고용인이었던 여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돈보다는…… 작은 도련님 때문에 나온 거예요.”
“저희는 지금껏 모른 척해왔으니까요.”
그녀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혹시 불똥이 튈까 싶어서 애써 카르한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야 양심 고백을 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침울한 얼굴을 한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작은 도련님이 너무 불쌍해서…….”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레베타의 가슴에 꽂혔다. 그리고는 가슴 안쪽을 저미다가 거세게 난도질해왔다.
“아니야……, 그럴 리가…….”
레베타는 힘껏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듯한 거짓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이 너무나 끔찍해서 눈앞이 깜깜했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일하게 저를 위해준다 생각했던 블레어드는……. 그리고 카르한은…….
순식간에 따스한 환상 속에서 차가운 현실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몸이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어, 레베타는 겨우 의자 팔걸이를 붙들었다. 묻어버린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기억 속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 제발 믿어달라고 우는 아이를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자신이 있었다. 얼굴조차 보기 싫다며 그 어린 아이를 전쟁터로 떠나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구제불능이구나.
-왜 내 자식으로 태어나서…….
-거짓말하지 마!
그때 내뱉은 말이 지금에서야 레베타에게 돌아왔다. 어차피 카르한은 저를 싫어하니, 자신이 카르한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놓아버리면 편할 거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레베타는 팔걸이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나만, 나만…….”
끝까지 믿어줄걸. 좀 더 알아볼걸. 지금까지 카르한에게 얼마나 많이 상처 줬는데…….
레베타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외롭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작 정말로 외로웠을 사람은 카르한이었다. 이 저택에서 카르한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금 카르한이 분쟁지로 떠나기 전에 내뱉었던 말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아니라고 부정해도 당신은 믿어주지 않았지요.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레베타는 가슴을 움켜쥔 채 울부짖었다. 밀려오는 격통이 그녀를 찢어놓았다.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는 레베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들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아아……!!”
제 손으로 무너뜨린 관계였다. 돌이키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려서 쫓아갈 수도 없었다. 어리석었던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눈보라처럼 몰아쳤다.
레베타는 제 가슴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결국 그녀는 혼절하고 말았다.
***
카르한의 귀환에 수도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난 몇 달 동안 무수한 뜬소문이 떠돌았다. 후계자 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쳤다느니, 전쟁터가 그리워서 돌아갔다느니……. 다음 에반테온 공작은 블레어드가 될 거라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수도로 돌아온 카르한은 블로든 저택에서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가장 먼저, 수도에 머무르던 원로인 글로시아를 만났다.
-다른 원로들도 마음을 돌린 상태입니다.
열세 명의 원로 중 과반수가 카르한에게 넘어왔다. 그럼에도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이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있었다.
레베타의 표를 받지 못한다면 원로들이라도 확실하게 포섭해야 승산이 있었다. 그쪽은 시오릭이 직접 수도로 올라와 공략해보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리고 오늘, 카르한은 헤인리와 함께 황궁에 입궁하기로 했다. 황태자를 알현하기 위함이었다.
“잘 다녀와요.”
작게 하품하던 일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블로든 가문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무 조사가 들어가고, 일리아는 쉴 틈도 없었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가 안쓰러워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헤인리가 일리아에게 말했다.
“오늘도 저녁은 함께 먹자꾸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리아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해주었다. 그 길로 카르한과 헤인리는 황궁으로 향했다. 블로든 저택 정원을 가로지른 마차가 금방 속도를 높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 밖으로 황궁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눈이 많이 내렸다더니, 아직도 듬성듬성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를 바라보던 카르한은 마차가 멈추자 고개를 바로 했다. 긴장되어서 그런지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대로만 하셔도 됩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헤인리가 말했다. 그제야 손에 힘이 풀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황태자궁으로 걸어갔다.
걷기만 해도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카르한을 알아본 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일이면 에반테온 소공자가 황태자를 찾아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날 터였다.
황태자궁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던 황태자가 직접 카르한과 헤인리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테온 소공자.”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카르한 에반테온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는 일단 앉아서 대화하자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카르한과 헤인리가 나란히 앉고, 황태자가 맞은편에 자리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황태자였다.
“비서관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카르한은 헤인리를 통해 황태자를 지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가리는 총회가 있음을 말해주었다.
“열흘 후에 결판이 나겠군요.”
에반테온 공작의 죽음 이후, 귀족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제국에서 공작 가문은 고작 셋이었다. 그중 정계에서 온전히 힘을 쓰는 자는 에반테온 가문뿐이었다. 다른 두 가문은 명예직에 불과한 신세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에반테온 공자가 작위를 계승하면 무척…… 곤란한 일이 생길 겁니다.”
지금도 황제는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대놓고 두둔하고 있었다. 만약 블레어드가 에반테온 공작이 되어버리면,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황태자 쪽으로 넘어온 이들도 대거 탈선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일에 가담한 모두가 위험해질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직 황제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블로든을 탄압하느라 혈안이 되어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황제도 이상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소공자에게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부담 가득한 말이었지만, 카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일리아를, 블로든 가문을……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총회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분쟁 지역에 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겠습니까?”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황태자가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물었다. 카르한은 입을 열어 분쟁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야만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메르크 왕국에서 직접 화친을 제안해왔습니다.”
“……아메르크 쪽에서?”
황태자는 무척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제국령과 인접한 나라인 아메르크 왕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오랜 분쟁 때문에 양측 사신이 왕래한 지 백 년도 넘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아메르크 왕까지 만나고 왔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황태자는 새삼 다시 보았다는 눈으로 카르한을 살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화친을 제안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메르크의 문물은 오랫동안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제국을 새롭게 적셔줄 것이다.
황태자와의 독대가 끝나고, 카르한과 헤인리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황태자궁을 빠져나왔을 때, 카르한은 마차에 올라타지 않은 채 말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어디 가십니까?”
“공작저에 들러볼까 싶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헤인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석찬을 준비해두고 기다리겠습니다.”
“그 전에는 꼭 돌아가겠습니다.”
따로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저로 향했다. 공작저 정원은 음울함이 감돌았다. 꽃밭은 눈으로 뒤덮인 채였고,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저택은 칙칙하고 어두컴컴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가만히 정원을 응시하던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카르한은 공작의 죽음이 계속 미심쩍었다. 에반테온 공작에게 지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장례를 늦추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뭔가 자꾸 숨기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은 혹시나 하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블레어드가 의심되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공작은 지금까지 계속 블레어드를 지지하지 않았나. 굳이 그런 악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어느덧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저택 위로 새까만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고목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걷는데, 등 뒤로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인가? 카르한이 그대로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을 때.
“카르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레베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카르한은 복도 저편에 서 있는 레베타를 응시했다. 그녀는 카르한의 반경으로 넘어오지 못한 채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레베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카르한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도, 제 가슴을 할퀴어대던 독설도 없었다. 예상과 다른 태도에 카르한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럼, 일단 방으로…….”
레베타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카르한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복도 끝, 고용인도 오지 않는 응접실에 도착한 레베타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카르한도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는 정말 지병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그 물음에 레베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래.”
안 하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카르한은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정말로 블레어드가 공작을 해친 것이라면……. 카르한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베타가 다시금 이름을 불러왔다.
“카르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시선에 카르한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카르한이 기억하는 레베타는 늘 지긋지긋하다는 듯 매몰찬 시선만을 보내왔었다. 단 한 번도, 카르한을 저런 시선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다.”
카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어리석어서…… 지금까지 너를 잘못 알고 있었어. 상처 줘서 미안하다.”
독기 빠진 목소리는 형편없이 하느작거렸다.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생, 죽어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말을 지금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네게 용서를 빌고 싶구나.”
레베타의 마지막 말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카르한은 가라앉은 눈으로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용서라뇨.”
“블레어드 말만 믿고, 너를 오해하고…….”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점 끊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레베타는 울고 있었다. 희게 질린 뺨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레베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절절히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용서해주겠니…….”
한참 대답 없던 카르한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그러니까…… 제가 수도에 돌아왔을 때 사과했다면…… 아마 저는 받아주었을 겁니다.”
작년에 전쟁터에서 막 귀환했을 때 레베타가 잘 돌아왔냐는 말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카르한은 그녀를 용서했을 것이다. 과거의 아팠던 기억은 전부 묻어버린 채 미련하게도 그녀를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만큼 카르한은 애정이 고팠다.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사랑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레베타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고, 그사이 카르한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이제는 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레베타를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동자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투명하게 비치는 새파란 눈동자가 레베타를 가득 담았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평생을 그랬듯이 그냥 저를 미워하십시오.”
“…….”
“더 이상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카르한의 말에 레베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친 말 한 마디 없이 담담하기만 한 말투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카르한이 품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레베타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 날 용서하지 마라.”
고개를 숙인 레베타가 중얼거렸다. 용서는 상대가 해줄 마음이 들 때 비로소 비는 것이었다. 그녀는 용서 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카르한이 뒤돌아서자, 레베타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그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어.”
레베타가 절박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종종 꽃을 두었던 거…… 혹시 너였니?”
“문 앞에 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카르한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레베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아…….”
레베타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러나 카르한은 손을 내밀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의 다정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레베타가 떠나보내 버렸기에.
레베타의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졌다. 한참을 오열하던 레베타는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레베타는 하염없이 문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 문이 열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정말로 저를 놓아버린 것이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엔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끈조차도 말이다.
***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한 걸음 옮겼다가 멈춰 섰다. 곧게 펴진 등이 차갑고 딱딱한 벽에 닿았다. 카르한은 벽에 기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
후회는 없었다. 어그러진 관계를 돌이키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이제 그의 가족은 블로든이었다. 가만히 숨만 내뱉던 카르한은 다시 몸을 바로한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그저 앞만 응시했다.
한참 복도를 걸어가던 카르한은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계단 끝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과 레베타 그리고 블레어드가 그려진 초상화였다. 문득 일리아가 공작저에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제가 전장에 나가있을 때 그린 거라서.
가족 초상화를 보고 의아해하는 일리아에게 카르한은 무심코 변명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걸 일리아가 몰랐으면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카르한은 침실을 빠져나와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자리에 자신만 없다는 것이 속상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제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아 씁쓸했다.
덤덤한 눈으로 초상화를 바라보던 카르한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고용인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공작의 죽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 싶었지만, 이미 뒷수습이 전부 끝난 것 같았다.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밑에서부터 올라오던 이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
블레어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카르한의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길 온 거냐.”
“제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카르한이 받아치자 블레어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 탓인지 그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내 집에서 썩 꺼져!”
묵묵히 블레어드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대답했다.
“이곳이 왜 당신 집입니까. 조만간 쫓겨날 텐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고 블레어드를 내려다보았다.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블레어드가 몸을 떨었다. 카르한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있을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블레어드가 독기 품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전부 다 가졌잖아!!”
지독한 열등감이 토사물처럼 꾸역꾸역 쏟아졌다.
눈빛으로부터 진득한 원망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넌 평생 모를 거다! 네 존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블레어드가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자, 카르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쪽도 영영 모를 겁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존재로 취급 받는 기분을.”
서로를 이해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존재로 인해 밑바닥을 찍어보았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침묵마저 따끔거릴 때, 카르한이 조용히 질문했다.
“당신입니까?”
“…….”
“당신이 죽였습니까.”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려는 게 보였으나 동요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가 짓씹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소릴…….”
형편없는 부정에 카르한은 입매를 단단히 다물었다. 블레어드는 끝내 제 손으로 아버지까지 죽인 것이다. 그러고도 탐욕을 부리는 블레어드가 역겨웠다.
“쓰레기 자식.”
나직한 중얼거림이 블레어드를 찌르고 헤집었다. 그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분쟁지에서 죽어버릴 것이지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는……!”
그 말은 카르한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카르한을 흔들 수 있을 만한 말을 필사적으로 찾던 블레어드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블로든이 위험해진 건 알고 있겠지?”
내내 차분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좁혀진 미간을 본 블레어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과연 세무 조사로 끝날 것 같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블레어드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의 발이 허공을 더듬었다. 카르한은 숨통이 막혀서 컥컥거리는 블레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블레어드의 온몸을 조여 왔다.
블레어드의 말에 벌벌 떨던 나약한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살의를 품은 시선만이 블레어드를 향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커흑……!”
카르한은 그대로 블레어드를 내던졌다.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그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곧장 뒤돌아섰다.
“어디 가!”
겨우 몸을 일으킨 블레어드가 도망치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카르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역겨운 곳에서 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총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열흘.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날이 블레어드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
공작의 죽음 이후, 에반테온 공작 가문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후계자를 가릴 총회가 다음 대 공작을 뽑는 자리로 변한 것이다. 가주 자리를 오랫동안 공석으로 둘 수 없었기에, 레베타와 원로들은 총회를 앞당기기로 결론 내렸다.
그때부터 원로들은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두고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은 남몰래 따로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전부 왔습니까?”
수염을 길게 기른 원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제외하고 다섯 명의 원로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빈자리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시오릭 님은 오지 않았군요.”
“그쪽은 이미 돌아선 지 오랩니다. 연락을 보내도 전부 무시하더군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소공자를 지지할 모양입니다.”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열세 명의 원로 중에서 블레어드를 지지하던 원로는 총 일곱 명이었다.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면 과반수가 무너져, 카르한 쪽이 우세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공작부인께서는 공자를 지지할 테니…….”
에반테온 공작이 죽어버렸으니, 결정권은 레베타가 쥐고 있었다. 한 명 정도의 근소한 차이는 레베타의 권한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레베타는 블레어드를 대놓고 편애했다. 이대로라면 총회에서 블레어드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지만, 다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공자에게 가문의 운명을 맡겨도 괜찮은 걸까요?”
이들 중 가장 젊은 원로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껏 공작께서 지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원로들 모두가 납득하고 넘어간 문제가 아닌가. 거기다 주치의도 지병으로 타계하셨다 진단 내렸으니…….”
“하지만 전해들은 것이 전부이지 않습니까.”
공작의 시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젊은 원로가 말했다. 그는 발언을 이어가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의심이 가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말을 보태기 망설여졌다.
“그보다 이번에 공자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말을 꺼낸 원로는 보수적이라 자자한 이였다. 블레어드가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내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추문으로 가문에 먹칠을 했으니…… 망설여지는군요.”
“그래도 황제 폐하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까.”
수염 난 원로가 반박했다. 황제는 에반테온 공작가 총회에 관심을 보였다. 종종 블레어드를 언급하며 지지 의사를 내비칠 정도였다.
“황제는 지는 해입니다.”
누군가의 서슴없는 발언에 원로들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작 위험한 발언을 꺼낸 남자는 태평하게 말을 이어갔다.
“곧 있으면 황태자가 제국의 주인이 될 겁니다.”
“…….”
“얼마 전에 소공자가 황태자와 접선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남자는 원로들을 둘러보며 주장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소공자를 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소공자를 지지한다 한들, 소공자가 우리를 챙겨주려 할까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오랫동안 블레어드를 지지해왔다. 만약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하면 배척당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르지요.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셈이니.”
남자의 발언에 다들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론이 난 셈이었다.
“그럼 제가 소공자에게 따로 연락할 테니…….”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바깥이 시끄러운 탓이었다.
“뭐지?”
고용인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터였기에, 원로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쾅, 문짝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얼어붙은 원로들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블레어드를 응시했다. 테이블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가 원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 섭섭합니다.”
“…….”
“중요한 모임인 것 같은데, 저를 빼놓으시다니요.”
번들거리는 안광을 본 원로들은 숨을 삼켰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혓바닥이 잘려나갈지도 몰랐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지 않습니까.”
블레어드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미소가 아닌 음습함이 가득한 조소였다.
“혹시 이제 와서 저를 등지려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긴장한 원로들이 침묵했다.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가라앉은 눈동자 심연엔 아가리를 벌린 짐승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배신한다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원로들을 보며 블레어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들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
카르한이 총회로 정신없는 사이, 일리아도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블로든 가문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무 조사가 들어온 것이다. 황후 덕분에 시기를 어느 정도 늦추긴 했으나, 아예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황실에서 파견된 조사원들은 블로든 가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는지, 먼지 하나까지 털 기세였다.
그러나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이 마땅히 보이지 않자, 일리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 중 그나마 어리고 만만해 보인 탓이었다.
특히 조사원들은 일리아의 온천 사업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별것 아닌 문제를 끈질기게 추궁하거나 조사가 남았다며 온종일 대기시키는 둥, 피를 말렸다. 보다 못한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항의하자, 그제야 조사원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일리아는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어제도 조사원들에게 잔뜩 시달린지라 피곤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제 세무 조사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장부까지 뒤진 그들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황제가 순순히 블로든을 놓아주려 할 것 같진 않았다. 그전에 헤인리가 황태자와 함께 황제의 폭거를 멈추게 해야 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리아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문이 살짝 열리며, 카르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일리아, 많이 바쁩니까?”
일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괜찮아요.”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한을 맞이했다. 그와 함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장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몸이 살짝 기울어지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노란 햇살과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카르한이 쏟아지는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넘겨주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게 무척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평온한 침묵이 감돌았다. 말 한마디 없어도 어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일리아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내일이네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카르한의 손이 멈칫했다. 드디어 내일, 에반테온 가문의 총회가 열린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상황은 좀 어때요?”
“원로들을 전부 포섭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승산이 있을 듯합니다.”
카르한의 편인 원로들은 가문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인 글로시아는 외부에서도 힘이 상당했다. 열세 명의 원로 중 일곱이 확실하게 카르한 쪽에 섰으니, 총회 때는 더 넘어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레베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레베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 왔다. 카르한은 받아주지 않았고, 그대로 끝이 났다.
그 뒤로 레베타는 아무 연락 없이 조용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온다면 무력으로 탈환하는 방법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정당하게 작위를 계승하고 싶었다.
“잘될 거예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약간 남은 불안함마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그런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던 카르한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전부 일리아 덕분입니다.”
카르한은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혹시 지금까지 길고 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과 너무나 달라진 저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카르한은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감출 필요도, 애정을 갈구하며 타인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었다.
“당신이 노력한 거예요. 기회를 줘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잘한 걸까요?”
“잘해왔어요. 정말.”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환히 웃던 카르한이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말했다.
“일리아, 실은 거짓말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빨리 실토하라는 눈빛에 카르한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게…….”
이전에 카르한은 일리아가 저를 칭찬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일리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았고, 얼떨결에 강아지와 뛰어노는 걸 상상했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남들 앞에서 웃어야 할 일이 필요할 때마다 ‘강아지’가 암호가 되고 말았다.
카르한의 말이 끝났을 때,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좋아했나 봅니다.”
카르한이 비밀이라도 꺼내놓는 것처럼 쑥스럽게 속삭였다. 그 모습에 일리아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카르한의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닿아오자, 카르한은 곧바로 응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한 발자국 물러날 때까지, 그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서서히 입술이 떨어지고,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카르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총회가 끝나고 자신이 공작이 되면, 일리아에게 청혼하겠다고.
그리고 마침내. 총회 당일이 찾아왔다.
***
에반테온 공작 저택 위로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구름 사이에 가려진 햇빛은 존재만 미약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정오가 지났을 때, 마차가 줄줄이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현관 앞에 멈춘 마차에서 에반테온 원로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로 눈이 마주친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침묵을 유지한 채 회의장으로 걸어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글로시아였다. 빈자리가 하나씩 채워지자, 글로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엄숙한 얼굴이었다. 특히 블레어드를 지지하던 이들은 평소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눈만 내리깐 채였다. 글로시아는 그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지막 설득에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늦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에 억압된 사람처럼 그들은 끝내 침묵을 선택했다. 그때 열린 문을 통해 카르한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카르한이 자리에 앉자, 분위기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글로시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고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에서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레베타와 블레어드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무표정하다 못해 냉랭해 보이는 레베타와 자신만만해 보이는 블레어드의 얼굴이 대비되어 보였다.
나란히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 나뉘어 앉았다. 레베타가 상석에 앉고, 블레어드는 조금 떨어진 오른편에 앉았다.
카르한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블레어드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척하던 것은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그 표정에서 오만함이 느껴졌다. 레베타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 참석했습니까?”
“아직 한 분이 오지 않았습니다.”
글로시아가 빈자리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카르한을 지지해줄 원로 하나가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기다려보지요.”
레베타의 말을 끝으로 회의장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카르한을 지지하는 원로들은 초조한 얼굴로 문만 힐끔거렸다. 시계가 약속된 시간을 가리키자, 레베타가 입을 열었다.
“……이만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양측 원로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계속 기다리던 원로가 아닌, 테시온이었다. 테시온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카르한의 뒤에서 멈춰 섰다.
“카르한 님. 원로께서 사고를 당하신 듯합니다.”
테시온의 속삭임에 카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자세한 정황은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카르한이 직접 가보라며 눈짓했다. 테시온은 불안한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괜찮겠냐는 시선에, 카르한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례했습니다.”
테시온이 회의장을 나갔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워낙 조용한 탓에 주위에 앉아있던 이들에게도 테시온의 말이 들린 듯했다.
약간의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원로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한 명이 빠졌으니, 최종적으로 모인 원로는 열두 명이었다. 두 후계자의 지지 세력이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것이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블레어드를 응시했다. 블레어드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조용히 주먹만 움켜쥐었다. 이번 사고를 일으킨 것이 블레어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라면 공작이 해야 할 말을 레베타가 대신 했다. 공작의 죽음으로 앞당겨진 총회이나, 공작을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마치 그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기묘한 분위기였다.
“오늘 총회는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가리는 자리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사람이 에반테온 공작이 될 겁니다.”
레베타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공작께서 타계하셨으니 가문의 규율에 따라, 부인인 제게 권한이 위임되는 것을 동의하시는지요.”
레베타의 물음에 모두가 동의했다. 가주가 죽으면 아내가 임시직을 맡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레베타는 공작과 버금가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카르한은 묵묵히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어떠한 감정도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 한 분씩 말씀해주십시오.”
레베타의 말이 끝나고, 왼편에 앉은 시오릭부터 입을 열었다.
“저 시오릭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작년까지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시오릭이 정말로 카르한 쪽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의 선언이 끝나고, 다음 원로가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다르스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이로써 카르한은 두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공개적인 선언인 만큼 남은 열 명의 원로들이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은 블레어드를 밀어주던 원로였다.
그는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가, 블레어드와 눈이 마주치고 숨을 들이켰다. 결심을 끝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멜리어드 에반테온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블레어드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남은 이들이 차례대로 선언을 이어갔다. 예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카르한의 편에 선 이들은 카르한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블레어드를 밀어주던 이들은 블레어드를 지지하겠노라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글로시아의 차례가 왔다.
“저 글로시아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에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지지 세력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린 것이다. 오늘 오지 못한 원로까지 있었다면 카르한에게 승산이 있었을 테지만, 그의 부재로 결과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레베타에게 향했다. 이제 레베타의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어느덧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공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베타만큼은 블레어드의 편이 되어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조용했다. 레베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블레어드가 재촉하듯 불렀다.
“어머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공식 석상에 맞지 않는 호칭을 입에 올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블레어드와 마주친 눈에는 매서운 독기가 서려있었다.
“……!”
시선을 받은 블레어드는 가슴이 철렁했다. 언제나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는 듯한 눈길을 보내왔다. 단 한 번도,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블레어드를 본 적이 없었다. 레베타가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넌 공작이 될 수 없다.”
블레어드가 멍하니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레베타는 고개를 돌려, 원로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저 레베타 에반테온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지지합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카르한마저 놀란 눈으로 레베타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휩쓸고 지나가기도 전에, 레베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블레어드의 몸이 덜덜 떨렸다. 레베타의 입을 막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에반테온 공작을 살해한 것은 블레어드입니다.”
잔뜩 굳어진 원로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블레어드를 의심한 자들조차 입만 떡 벌린 채였다.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다급해진 블레어드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레베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목격자이며, 공조자로서 공작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레베타의 증언이 이어지자, 블레어드가 달려들었다. 블레어드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카르한이 곧바로 달려가 그를 붙들었다.
“이거 놔!”
눈이 반쯤 뒤집힌 블레어드가 거세게 반항했다. 카르한은 손아귀에 세게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파서 멈추었을 테지만, 블레어드는 계속 발악하며 레베타에게 소리 질렀다.
“어떻게 당신이!!”
세상 모두가 등진다 해도, 레베타만큼은 블레어드의 편을 들어줬어야 했다. 지금까지 레베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블레어드가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레베타를 노려보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영영 모를 거라고 생각했니?”
발작하듯 날뛰던 블레어드의 몸이 잠시 멈추었다. 레베타의 눈이 블레어드에게로 향했다. 눈동자 아래에 침전한 원망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네 손에 놀아났던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그제야 블레어드는 알아차렸다. 레베타가 자신이 감춰온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숨을 헐떡이던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카르한은 힘을 주어 그를 강제로 바닥에 꿇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떨쳐낼 수 없었다.
소란을 듣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베타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체포해라.”
“어머니!!!”
마지막까지 블레어드는 레베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레베타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제국법에 따라 처벌할 테니, 그때까지 별관에 구금해놓도록.”
“아아악!!”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블레어드는 괴성을 내질렀다. 돌아오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그가 쩌렁쩌렁 고함쳤다.
이윽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의 숨겨진 민낯을 보게 된 원로들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었다.
레베타는 원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두었다.
“……총회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베타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건조하기만 하던 목소리에 미약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 순간, 그녀는 또 한 명의 아들을 잃은 것이다.
“다음 대 공작은,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