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
마을 중앙에는 공방이 들어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리아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무사히 공사를 끝낼 수 있도록 꼼꼼히 검토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을 만들지 의논하며 즐거워했다. 원래라면 겨울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을 예정이었으나, 이번 해부터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간만에 마을이 북적북적해지자, 루벤투스는 감동에 가득 차 일리아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일리아는 며칠 더 있다가 수도로 돌아가기로 결정 내렸다. 이왕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확실하게 해두고 가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오르골을 잔뜩 실은 마차가 저택에 줄줄이 들어온 탓이었다. 당황한 카르한은 잘못 배송된 거라 생각하고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뒤따라 나온 일리아가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일리아가 주문한 겁니까?”
“주문한 건 전데, 받을 사람은 당신이에요.”
“제 겁니까?!”
깜짝 놀란 카르한이 고개를 홱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부족하면 말해요.”
절대 부족할 일은 없을 터였다. 이걸로 오르골 가게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오르골을 선물한 까닭을 알고 있었기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오르골이 담긴 상자를 침실로 들고 와 손수 장식하기 시작했다.
선반과 책상 위에 오르골이 그득해졌다. 방이 좀 더 좁아지긴 했으나 어쩐지 카르한은 행복해 보였다.
“또 꿈에서 그놈이 나오면 이걸로 후려 패요.”
일리아가 단단한 오르골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나직하게 웃던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슬쩍 제안했다.
“선물을 많이 받았으니, 저는……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일리아는 이전에 마차 한 대당 카르한이 그린 그림 한 장을 요구했었다. 요즘 열심히 그리는 것 같던데, 그사이 실력이 많이 늘었을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어떤 분야든 배우는 것마다 곧잘 했으니 말이다.
“뭐 그려줄 건데요?”
“최근에 초상화를 연습했습니다. 당신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그리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내심 기대심을 품고 의자에 앉았다. 화구를 가져온 카르한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잘 그리면 어쩌지?’
알고 보면 바네사 같은 신동인 거 아니냐며 일리아는 혼자서 흐뭇해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슬슬 허리가 아플 즈음 카르한이 펜을 내려놓았다.
“다 됐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곧장 그림을 확인했다. 카르한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가요?”
“카르한, 천재 아니에요?”
곧바로 표정을 수습한 일리아가 활짝 웃으며 칭찬했다. 그제야 카르한이 안도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사실 저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테시온과 루벤투스가 괜찮다고 해줘서…….”
“그 두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저도 마음에 들어요.”
이목구비 위치가 한곳에 몰리긴 했지만, 흔해 빠진 초상화와 달리 개성 있고 좋은 듯했다. 언젠가 카르한의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인정해주는 시대가 올지도 몰랐다. 이번 생은 힘들지 몰라도……, 하여튼. 살면서 하나쯤은 못하는 게 있어도 괜찮다.
일리아는 초상화를 돌돌 말아서 소중히 챙겼다. 그렇게 일리아와 카르한은 무척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평생 두고두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추억이 쌓여갔다.
유예해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오늘. 일리아가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알겠죠?”
마차에 올라타기 전, 일리아는 아까 몇 번이고 했던 당부를 꺼냈다. 카르한이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이 시큰해진 일리아는 일부러 밝은 얼굴로 말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잖아요.”
카르한이 수도로 돌아올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에반테온 공작이 카르한에게 처리하라고 했던 야만족과의 분쟁은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이제 야만족 병사를 공격한 범인을 찾아내고,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들을 만나 지지를 얻어내기만 하면 됐다. 일리아는 실로 엮은 끈 팔찌를 내밀었다.
“직접 만들었어요.”
마을 사람에게 배워서 만든 팔찌였다. 팔찌 끄트머리에는 익숙한 단추가 달려있었다. 카르한은 끈 팔찌를 몇 번이고 쥐었다가 놓았다.
“아직 가족들에겐 말 못 했어요. 당신이 날 구해줬다는 거.”
거의 확신하고 온 거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말을 아꼈다.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면 전부 말해줄 생각이었다.
“다들 당신 오면 파티 해줄 거라고 벼르고 있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까지 목적지 없이 떠돌아왔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그가 머무를 곳이자 끝없는 여행의 종착지였다.
오늘부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모두에게 잘 다녀왔노라 말하는 그날을.
“…….”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졌다.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내려앉은 침묵과 동시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입으로는 담지 못한 감정이 눈동자에 차올랐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야 끝에서부터 달려온 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듯했다. 이별의 순간은 늘 가슴이 시렸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위로도 통하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하던 카르한이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시야가 엇비슷해지고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겹치는 순간, 일리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과 달리 입술은 따스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는데, 몇 번 해봤다고 입맞춤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입술 선을 따라가듯 카르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입술이 입술을 삼켰다. 동시에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열기가 얼굴까지 전해지고,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길고 진했다.
숨이 모자라다 싶을 즈음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카르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카르한이 마지막으로 제 뺨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제법 능청스러워진 태도에, 일리아는 활짝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뒤이어 카르한이 일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둘만의 인사법이었다.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창문에 바짝 기댄 일리아는 우두커니 서 있는 카르한을 응시했다. 못 박힌 듯 저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일리아는 팔이 아플 정도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카르한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일리아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막 헤어졌을 뿐인데 벌써 보고 싶었다. 일리아는 아쉬움을 삼킨 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마을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없는 변경 마을이었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지금보다 더 발전해 있을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일단 아메르크 왕국과 제국의 화친은 천천히 해결하기로 했다.
카르한이 작위를 물려받고, 황실 회의에서 발언권이 생기면 그때 제안해도 늦지 않았다. 황제는 어떨지 몰라도, 국가 간의 교류에 관심이 많은 황태자라면 분명 화친 제안을 달갑게 여길 터였다.
‘그 전에 블레어드부터 처리해야겠지만.’
카르한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을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창고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었을 어린 날의 카르한을 떠올리면 블레어드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블레어드가 살해한 남자의 아버지가 카르한을 찾아왔다고 했지.’
일리아는 카르한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여서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과 피해자의 부친인 엘리오드 백작이 은밀하게 카르한을 찾아왔다는 것까지 말이다.
일리아는 엘리오드 백작을 한번 만나볼까 싶었다. 목적이 같다면, 손을 잡아도 될 테니까.
일리아가 탄 마차는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 수도로 향했다. 마침내 수도에 도착한 마차는 블로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왠지 평소와 다른 느낌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낯선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몰랐다.
“일리아, 어서 오렴.”
“오는 데 힘들진 않았고?”
“많이 피곤하겠구나.”
현관 앞에 서 있던 가족들이 한마디씩 하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언제 도착할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더니, 다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계속 잤더니 괜찮아요.”
“피곤하지 않다면 응접실에 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자꾸나.”
다들 일리아가 카르한을 잘 만나고 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접실에 들어간 그들은 각자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한 달 정도 얼굴을 못 봤을 뿐인데, 다들 그사이 해쓱해져 있었다. 장기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저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렇고 말이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뭔가 있었음을 눈치챈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헤인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단다.”
“무슨 공문이요?”
“일부 물품에 한해 세금을 추가로 받겠다는 내용인데…….”
헤인리는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완벽하게 우리 가문을 겨냥한 공문이야.”
***
황태자비궁에는 작은 유리온실이 딸려 있었다. 덕분에 한겨울에도 화초를 구경하며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둥근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있던 황태자비, 라나엘은 찻잔을 들었다.
찻잔에 담긴 꽃차의 향기가 무척 좋았다. 델로타 가문에서 만든 것으로, 향과 맛이 일품이었다. 라나엘은 이전에 꽃차 납품을 핑계로 일리아와 스텔라를 궁에 초대했던 일을 떠올렸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부디 조심하세요.
라나엘이 일리아에게 전한 경고였다. 블로든 가문 측에서 대대적인 자선 사업을 맡은 이후, 황제는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실이 무능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황후와 황태자가 열심히 블로든을 옹호한 덕분에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황제는 블로든을 제재해야 한다며 날뛰었다. 결국엔 국무회의에서 블로든을 겨냥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라나엘은 기척을 느끼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누군가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전하.”
그는 라나엘의 남편이자, 제국의 황태자였다. 얼굴을 구긴 채 들어온 황태자는 늘 반듯하게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라나엘은 괜찮다고 미소 지으며, 빈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자리에 앉은 황태자는 말없이 라나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남처럼 지내는 황제 부부와 달리, 두 사람은 사이가 제법 좋았다. 정략혼이긴 하나, 어릴 적부터 약혼자로 내정되어 함께해왔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무엇보다 의견도 잘 맞았고 추구하는 목적도 비슷했다. 찻잔이 가득 차자, 황태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제 말은 듣지 않으십니다.”
속이 답답한지 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자기들은 피해가 없다고 생각하니 입 다물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는지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라나엘은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부자였다. 성향부터 추구하는 목적까지 완벽하게 달라, 평소에도 자주 부딪치곤 했다. 황태자는 입버릇처럼 아버지 같은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말해왔을 정도였다.
황제는 탐욕이 강한 편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졌다. 한 번 크게 아프더니, 황금으로 지은 신전에 자신의 관을 안치하겠노라 성화였다. 죽어서까지 권력과 재력을 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후로 재물을 긁어모으기 시작한 황제는 유독 블로든 가문을 거슬려 했다. 다른 귀족들은 아부하지 못해서 난리인데, 블로든은 늘 뻣뻣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황실 측에 납품하는 제품 모두 정가를 받았다.
“누가 봐도 이번 법안은 블로든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까.”
황제는 이번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부 품목에 한해 세금을 더 올리겠다고 공표했다. 문제는 품목이 전부 블로든 가문 측에서 주력으로 판매하는 상품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금도 현재의 두 배로 과세를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블로든이 저렴한 가격에 금을 넘기지 않으니, 세금을 더 거둬서 금고를 아끼겠다는 심산이었다.
속이 시꺼먼 황제와 달리, 황태자는 블로든 가문을 좋게 보고 있었다. 블로든은 지금의 황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빈민들을 돕는 것은 황실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황제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경비대도 귀족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운영할 정도였다.
제국이 빠르게 부패하고 있음에도 빈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블로든의 영향이 컸다. 블로든은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데다가, 권력을 욕심 내지 않았다.
물론 후계자인 헤인리 블로든이 공직에 오르긴 했으나, 사적인 움직임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뒤를 봐주겠다는 고위 귀족의 제안도 전부 쳐냈을 정도였다.
“분명 폐하께서는 블로든을 완전히 치워버리려 하실 겁니다. 만약 블로든이 무너진다면…… 제국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겁니다.”
한때 경쟁자였던 델로타는 블로든의 자리를 이을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격차가 크다는 말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황태자는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폐하께서 에반테온 공자를 자주 궁으로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라나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후로 폐하께서 바뀌셨습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황궁을 드나들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났다. 황제는 말로만 불평을 쏟아내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블로든을 제재하는 것이었다.
“에반테온 공자를 너무 가까이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역정을 내시더군요.”
황제는 이상할 정도로 블레어드를 두둔했다. 눈과 귀를 막은 채 황족들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블레어드의 평가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친절하고 겸손한 데다가 기부 행사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쳤다.
근래에는 블레어드가 다시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블레어드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라나엘은 이전에 블레어드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데 능했다. 주변인들을 이용해서 상황을 자기 뜻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걸 눈치챈 사람은 몇 없을 테지만 말이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라나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황태자는 빈 찻잔을 들여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폐하께서 사욕을 위해 이대로 제국을 외면한다면…….”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라나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저는 언제나 전하의 편이에요.”
라나엘의 속삭임에, 황태자가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제 뒤를 받쳐줄 귀족들을 물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는 온실정원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이 공간 안에도 블로든 가문이 납품한 것들이 몇 보였다.
“블로든부터 도와야겠습니다.”
***
일리아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수도를 떠나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들었다.
황실 측은 일부 상품에 세금을 추가로 부가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다. 귀족들의 사치가 날로 늘어나니, 그것을 제재하기 위해 사치품에 세금을 더 붙이겠다는 이유였다. 그중 하나가 금이었는데, 블로든 가문은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수출하고 있었다.
금으로 제국 제일의 부자가 된 만큼 타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거기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고위 귀족들까지 전부 승인한 일이었다. 블로든 가문이 잘나가는 것이 배가 아팠는지, 입 모아 찬성했다고 들었다.
그에 비해 블로든 측은 황실에 적극적으로 항의할 만한 힘조차 없었다. 도리어 황실은 자꾸만 비올레를 불러들여 귀찮게 굴었다. 마치 공문을 거부했다간 더 귀찮은 일이 있을 거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리아가 수도에 도착한 그날 저녁. 블로든 저택에서는 오랜만에 가족회의가 열렸다.
“다른 상품은 그렇다고 치고, 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비올레의 말에 클리프가 말을 받았다.
“세금이 오른 만큼 마땅히 가격을 올려야겠지만……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겠지요.”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것이다. 금 가격이 상승하면 블로든 책임으로 돌릴 게 뻔했다. 황실은 이것을 노렸을지도 몰랐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동시에 블로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외국에 나가면 화폐로 통용하기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장 가격이 형성되어 있으니, 멋대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금맥을 발견하고 채굴한 지 얼마나 되었죠?”
“10년은 넘었지?”
헤인리가 그건 왜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금으로 거둬들이는 수익 비율은요?”
“요즘 다른 사업이 번창한 덕에 20퍼센트 정도로 내려갔단다.”
비중이 제법 되나, 상당히 큰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손해를 메꿀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황제의 배를 불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까지 금 수출에 매달릴 수는 없으니, 조금 일찍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일리아가 결정을 내렸다.
“금맥 채굴, 중단하도록 해요.”
“……뭐?”
가족들이 전부 놀란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장 손해는 보겠지만, 장기적으론 이쪽이 유리해요.”
채굴을 잠시 중단한다 해도 금은 달아나지 않는다. 생산량이 정해져있으니,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금의 가치는 여전할 것이다. 거기다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금맥을 발견한 후 시간이 흘러 채굴할 금의 양이 대폭 감소했으니, 새 광산을 물색한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될 것이다.
황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광산을 수색하고 싶어도 다른 귀족들이 반발할 게 분명하다.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언제든 공개하라는 말과 같으니까.
“무엇보다 금은 필수품이 아니잖아요?”
일리아의 말에 입만 벌리고 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 같은 필수품이었으면 일리아도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있는 자들의 싸움이었다.
“그럼 황실 뜻에 따른다는 공문을 보내마.”
비올레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블로든이 금 채굴을 중단한 순간부터 제국에서는 넘치던 금이 싹 사라져버렸고……. 귀족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
달그락, 식기 소리가 들려왔다. 단 둘만 앉은 기다란 테이블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차려져 있었다.
“고기가 질기군.”
황제가 거칠게 포크를 내려놓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움찔했다.
“요리사는 이걸 음식이라고 내놓은 건가?”
황제는 당장 요리사를 불러오라고 할 기세로 호통 쳤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요리사가 의욕이 넘친 모양입니다.”
황제의 시선을 받은 블레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이니, 긴장되겠지요.”
“……흠, 공자를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황제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런 황제를 가볍게 훑은 블레어드는 속으로 비웃었다. 황제의 사고방식은 무척 단순해서 다루기 쉬웠다.
블레어드는 최근 들어 황제를 자주 만났다. 고위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서 황제와 독대할 기회를 만들었는데, 그 후로 황제는 종종 블레어드를 황궁으로 불렀다. 괴팍한 성미를 전부 받아주었더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블레어드는 계획적으로 황제에게 접근한 만큼, 그의 취향에 맞춰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 능한 블레어드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블레어드는 황제를 구슬려 제 입맛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목적은 블로든을 제재하는 것이었다. 블로든이 곤경에 처하면 카르한은 가장 큰 패를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제 또한 블로든 가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서 일은 쉽게 풀렸다.
-일부 품목의 세금을 올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치세를 매기는 거지요.
사업을 하는 가문이니, 역시 돈과 연관된 협박이 가장 잘 먹힐 터였다. 황제는 블레어드의 말에 넘어가, 결국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요즘 금 때문에 귀족들이 시끄럽더군.”
값비싼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황제가 중얼거렸다.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난리라니.”
블레어드는 눈을 내리깐 채 금으로 만들어진 식기를 내려다보았다. 블로든 측이 금맥 채굴을 완전히 중지할 줄이야……. 매장량이 줄어서 그렇다고 둘러댔지만, 뻔히 보이는 핑계였다.
블레어드는 블로든이 취할 만한 행동을 몇 가지 예상했으나,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 했다 금 채굴이 중단되면 가장 손해 보는 쪽은 블로든이니 말이다.
현재 제국에선 금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수요는 늘 많은데 공급이 대폭 줄어든 탓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눈이 많이 온 탓에 산사태가 일어나 광산 몇 군데가 봉쇄되어버렸다. 금이 완전히 씨가 마른 것이다.
귀족들은 이제 와서 우는 소리 하며, 황실이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게 아니냐고 떠들어댔다.
“금이 부족해서 신전 공사도 중단되었으니…….”
황제의 불평이 이어지자, 블레어드는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어차피 일시적일 겁니다. 블로든 측도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금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몇 달만 지나면 알아서 물량을 풀 거라고 블레어드가 말했다. 그제야 안심되는지 황제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역시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지는군.”
황제는 그때부터 다른 이들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특히 황태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가, 지금이라도 후계자를 새로 낳는 것이 좋겠다며 망언을 했다.
황제의 한참 동안 이어지는 불만을 전부 들어준 후에야 오찬이 끝났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던 블레어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귀찮게…….”
무엇 하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분쟁 지역에 사람을 보내 휴전 협정에 훼방을 놓았지만, 생각보다 잠잠했다. 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복도를 걷던 블레어드는 문득 일리아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면 안 되지.”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듯했다. 여론을 움직여 블로든을 매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예를 들어 탈세같이 민감한 주제를 건드려서 말이다. 블레어드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
분쟁 지역은 일리아가 떠난 후,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메마른 땅 위로 눈이 가득 쌓여서 하루아침에 설원이 되었다.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에, 카르한은 일리아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았던 건 딱 하루뿐이었다. 생각보다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온종일 눈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카르한은 진영에 머무르던 병사들을 마을에 데려가, 제설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지붕이 내려앉을 수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무척 고마워했다.
그러는 동안 제국군과 야만족 양쪽 진영은 막사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휴전 협상을 끝내고 마침내 휴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나,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카르한은 남고 싶어 하는 이들만 추려 진영에 남게 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전력을 남겨둘 생각이었다.
야만족과의 문제가 얼추 해결되고, 카르한은 천천히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떻게 원로들을 제 편으로 회유할지 고민했다.
이미 공작령 전체에 카르한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평판도 좋아졌으니 어느 정도 승산은 있을 터였다.
“카르한 님! 드디어 잡혔습니다.”
테시온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일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던 카르한이 멈칫했다. 곧장 그의 말을 알아들은 카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 있지?”
“일단 창고에 가둬두었습니다.”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걸친 카르한은 테시온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어느새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고 저택 뒤편에 위치한 창고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온몸이 밧줄에 묶인 남자가 있었다.
카르한은 지금껏 블레어드가 보냈을 첩자를 수색해왔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바로 휴전 협정을 깨뜨리기 위해, 야만족 병사를 습격한 첩자였다.
“상처를 입었는지, 바로 도망치지 못하고 인근 마을에 숨어 있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테시온이 말했다.
“외양도 야만족 병사가 증언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자꾸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카르한이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만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응시했다.
“누가 보냈지?”
바닥이 울릴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떨었다. 꽉 막힌 공간에서 카르한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오한이 들었다. 이내 남자는 카르한의 시선을 피한 채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직접 보면 알겠지.”
카르한은 남자를 추궁하는 대신, 뒤돌아서며 테시온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이자를 야만족에게 보내도록.”
“!”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고문까지는 예상했지만, 야만족에게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야만족에게 가는 것은 맨몸으로 사자 우리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거기다 동료를 위해서는 한없이 잔인해지는 것이 야만족이었다. 차라리 곱게 죽는 편이 나을 터였다. 카르한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를 힐끗 본 후 싸늘히 속삭였다.
“어차피 블레어드는 널 꺼내주지 않을 거다.”
카르한이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남자가 그대로 굳어졌다. 이미 카르한이 배후를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입을 다물 필요가 없었다. 충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자, 잠깐!”
창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 카르한을 남자가 다급히 불렀다. 카르한이 뒤돌아서서 바라보자, 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는 걸 말하면…… 살려줄 겁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아는 것을 전부 불었다.
“저는 블레어드 에반테온 님의 명령을 받고…….”
전부 카르한이 예상한 대로였다. 남자는 블레어드가 보내온 첩자였으며, 평화 협정을 깨뜨리기 위해 일부러 야만족 병사를 공격한 것이었다.
카르한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블레어드라면 이미 꼬리 자르기를 끝낸 후일 것이다. 이 남자를 데리고 가봤자, 누구냐며 발뺌할 게 분명했다. 도리어 모함하지 말라며 교묘하게 상황을 움직일 터였다.
“일단 가둬 놔라.”
카르한은 테시온에게 명령을 내린 후 창고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어찌 되었든 아메르크 왕에게 범인을 찾아서 넘기겠노라 약조했다. 처분은 저쪽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저택 현관으로 향한 카르한은 못 보던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소공자님,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루벤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카르한을 안내했다. 카르한은 루벤투스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 에반테온 원로인 시오릭이 있었다.
“간만입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일리아가 왔을 때 그를 처음 만났으니, 벌써 보름도 더 지나버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시오릭을 찾아갈 생각이었기에, 카르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에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오릭이었다.
“……휴전 협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완전히 마무리된 것입니까?”
“예. 양측 진영을 절반 이상 철수했습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물릴 예정입니다.”
카르한은 아메르크 왕을 만나, 화친을 제안 받았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가만히 듣던 시오릭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럼 야만족 언어를 배웠다는 겁니까?”
“아직 미흡합니다.”
무력으로 얻어낸 평화가 아니라는 것에 시오릭은 놀라워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잠잠했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시오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을에 공방이 들어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제 약혼녀가 진행한 일입니다.”
카르한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마을이니 휴전 협정을 맺으면 뿔뿔이 흩어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마을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 머무르길 원했습니다.”
“…….”
“그래서 저번에 원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떠난 후에도 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줘야겠다고 약혼녀와 이야기를 매듭지었습니다.”
카르한은 단단한 눈으로 시오릭을 마주 바라보았다.
“비록 제 능력이 한참 부족하나,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새파란 눈동자를 응시하던 시오릭은 눈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처럼 타인의 감정을 곧잘 읽어낼 수 없었기에, 속으로 긴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오릭이 입을 열었다.
“다시는 공작 가문 사람들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지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명망 높은 에반테온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기대감을 품었다가 실망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시오릭은 처음으로 카르한을 향해 미소 지어주었다.
“소공자는 믿어보고 싶습니다.”
***
일리아는 그득하게 쌓인 서신을 힐끗 보았다. 서신의 반절 이상이 금을 팔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더 이상 금을 채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블로든이 채굴하는 금의 양은 전체의 20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금 광산도 많았고, 그 정도는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드디어 블로든 천하가 끝나고 델로타가 부상할 때라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금이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때마침 산사태로 광산 몇 군데가 매몰된 데다, 세금이 오르자 남아 있던 금마저 외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은 밀수출을 일일이 잡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금 품귀현상이 일어났고 거래량은 뚝 떨어졌다. 귀족들은 얼마든지 지불할 의사가 있으니 제발 팔아달라고 성화였다.
원래라면 돈을 쓸어 담을 기회였지만, 블로든은 입장을 고수했다. 전체 매출이 대폭 줄긴 했으나, 다른 사업이 잘 굴러가고 있어 어떻게든 손해를 메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블로든을 욕하던 귀족들은 서서히 비난의 화살을 황실로 돌리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금 가격을 올릴 거라 생각했던 황실 측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블로든을 치졸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공직자인 헤인리를 이런저런 핑계로 불러낸다거나, 비올레의 거래 상대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는 식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사교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블로든이 탈세를 했다거나, 직원에게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먹는 악덕한 가문이라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대응했지만 헛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문을 추적하던 일리아는 결국 근원지가 어디인지 찾아냈다.
“아가씨, 마차 준비되었습니다.”
일리아는 곧장 현관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자리 잡은 말렉이 편지를 내밀었다. 카르한이 보낸 편지였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편지지를 꺼낸 일리아는 내용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이곳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세상이 온통 하얀데, 일리아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공방은 마을 사람들도 함께 일을 해서 금방 완공될 것 같습니다. 다들 작업장이 생긴다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뵌 원로께서 저를 지지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원로님을 소개해주셨습니다.]
편지를 읽던 일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듯했다. 잘하면 한 달 내로 정리하고 수도로 귀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해는 일리아와 함께 맞이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글귀를 확인한 일리아는 편지지를 꼭 쥔 채 나도요, 하고 중얼거렸다. 가슴 안쪽에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지 않을까 했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덩치를 키워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 했던가. 하지만 일리아의 마음은 오히려 깊어져만 갔다. 만나면 꼭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쪽도 신경 쓸 게 많을 테니, 말하지 말아야지.’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지금 블로든 가문의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걱정하느라 밤을 지새울 것이 뻔히 보였다.
편지를 봉투에 넣은 일리아는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카르한이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아직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계속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며칠 전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한 날. 헤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놀라서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헤인리는 침착히 말했다.
-제게 힘이 되어달라고 하시더군요.
헤인리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황태자는 친황제파 귀족들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사람이 되어줄 이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헤인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블로든은 유명세에 비해 정계에 연줄도 없었고, 권력도 미미한 편이었다. 역대 블로든 백작들이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후계자인 헤인리가 마침 공직에 올라 있으니, 제 편으로 삼아 중앙 귀족계를 개편할 생각인 듯했다.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잠자코 있던 비올레의 질문에 헤인리는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 달리, 헤인리는 불안한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 때문에 가문이 위험해진다면…….
-우린 너를 믿는다.
클리프가 헤인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라버니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해왔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마지막으로 일리아가 건넨 말에 헤인리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황제가 작정하고 블로든을 제재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에 맞설 사람은 황태자뿐이었다. 헤인리의 판단대로 황태자와 손을 잡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때 일을 지워낸 일리아는 또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수도로 돌아온 일리아는 엘리오드 백작에게 몇 번 연락을 취했다.
그는 블레어드에게 아들을 잃었으며, 복수를 위해 카르한을 찾아갔다고 들었다. 백작을 통해 블레어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건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카르한의 말로는 백작이 블레어드를 내몰 기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엘리오드 백작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일리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슬슬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마차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수도 귀족들의 사교장으로 쓰이는 건물로, 어느 정도 자격이 있는 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블로든 가문과 연관된 헛소문의 근원지였다.
일리아는 사교장 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에게 신분을 밝혔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프란체와 말렉을 데려갈 수는 없는 곳인지라, 일리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줘.”
“예, 아가씨.”
일리아는 홀로 사교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할 일 없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샴페인 한 잔씩 손에 든 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서 블로든이 지금까지 탈세한 금액만 해도…….”
“아니, 돈도 많으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일리아도 모르는 일이 진짜처럼 포장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또각, 구둣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가 완전히 사교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잠깐 정적이 흘렀다.
“…….”
모두의 시선을 받은 일리아는 부채 하나만 손에 쥔 채 느긋하게 장의자에 앉았다. 서 있던 이들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들도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블로든을 험담하던 사람들은 서로를 힐끗거리며 눈치 보았다. 일리아가 올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아는 사교 모임을 싫어해 초대장을 보내도 전부 거절했다. 그나마 황궁 연회 때나 얼굴을 비칠 정도였다.
목소리가 끊기고 음악만이 공간을 채우자, 일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제 앞에서도 허튼 이야기를 지껄이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떠들어대던 이들은 헛기침하더니 뒤쪽으로 물러섰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몇몇 이들이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블로든 영애 아니십니까.”
일리아에게 아부해서 뭐라도 얻어내려는 심산이 그득해 보이는 부류였다. 일리아가 적당히 그들을 상대해주자, 다른 이들까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중에는 방금까지 블로든 가문을 헐뜯던 이도 있었다.
무리가 다시 형성되고,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이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름 목소리를 낮추려고 한 것 같지만, 전부 들렸다.
“소공자랑 헤어진 건 아닌지…….”
“이제 에반테온 공자께서 수도로 돌아오셨으니, 후계자 자리는 당연히…….”
사교장은 일리아와 카르한 그리고 블레어드 이야기로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블레어드를 치켜세우고, 카르한과 일리아를 낮추었다. 그것만으로도 블레어드가 얼마나 사람들을 구워삶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잠자코 앉아있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에반테온 공자!”
“언제 오시나 기다렸어요.”
블레어드 에반테온의 등장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금방 그쪽으로 몰려갔다. 한 명 한 명 상대해주던 블레어드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몸을 일으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지요?”
당황한 블레어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 블레어드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 몰라서 놀랐을 뿐입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이곳에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죠.”
“블로든 영애라면 어느 모임에서도 반길 겁니다.”
“고마워요.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한번 와봐야 할 것 같았거든요.”
일리아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다들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저희 가문이 탈세를 한다거나,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말까지.”
일리아의 말에 몇몇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궁금해서 직접 확인하러 왔어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일리아가 블레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니 소문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네요. 입 밖으로 나오면 진실처럼 포장되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일리아가 미소를 거둔 채 속삭였다.
“에반테온 공자가 사람을 죽였다.”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일리아는 다시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렇게 말해버리면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장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일리아는 여전히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이윽고 블레어드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섰다.
“아무리 예를 들었다지만 경솔한 발언입니다.”
방금 발언으로 이상한 말이 돌면 어쩔 거냐고, 남자가 열을 냈다.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던 일리아가 물었다.
“그럼 블로든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증거가 있어서 떠들었나요?”
남자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일리아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헛소문을 정정하느라 많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어요.”
“…….”
“다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실 수 있으시죠?”
하나하나 기억해두겠다는 눈빛에 사람들은 어깨를 움찔했다. 소문내고 헐뜯을 때는 재밌었지만,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는 블레어드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에반테온 공자. 제가 너무 무례한 발언을 한 것 같네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블레어드가 일리아를 샅샅이 살폈다.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이내 블레어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가문이 그런 소문에 휘말렸으니 당혹스러울 만하지요.”
너그러운 용서에 사람들은 역시 에반테온 공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리아는 웃지 않는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날 선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아까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들이 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블로든 영애께서는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하고 계시죠? 요즘 소공자께서 통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던데요.”
“저는 소공자가 잠시 수도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저마다 알고 있는 정보를 들이밀며, 카르한에 대해 물어보았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곧 돌아올 거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저마다 수군거렸다.
“1년 이상 자리를 비우신다 들었는데…….”
“저는 전쟁터가 그리워서 자진하여 가신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검술 대회가 끝나고 카르한이 자취를 감춰버리자, 온갖 소문이 돌고 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이 사교장은 블레어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은근슬쩍 카르한을 깎아내리기 바빴고, 블레어드는 그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부추겼다.
“무섭진 않으세요? 성격이 좀…… 그렇다는 말이 있어서.”
쏟아지는 유언비어에 일리아는 웃는 얼굴로 차근차근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요. 소공자께서는 제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친절하신 분인걸요.”
일리아는 카르한에 대해 온갖 칭찬을 쏟아냈다. 꽃을 꺾지 않고 제게 선물했던 일. 전쟁터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준 것. 끼어들 틈 없이 칭찬을 늘어놓자, 헐뜯던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이에요.”
일리아와 눈이 마주친 블레어드는 심기가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일리아의 칭찬이 끝나자, 누군가 잽싸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에반테온 소공자께서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신다면…… 어쩌실 건가요?”
잠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질문을 던진 이는 슬쩍 블레어드를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소공자께서 후계자이시지만, 그래도 작위는 장남이 계승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질문의 저의가 뻔히 보였다. 만약 카르한이 공작이 되지 못하면, 헤어질 거냐는 물음이었다. 특히 일리아는 이미 파혼한 전적이 있었기에 편견이 있었다. 일리아는 한 치의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요. 후계자가 못 되어도 계속 함께할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신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요.”
일리아의 대답에 블레어드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자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헛소리였다. 그건 부모조차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친부인 에반테온 공작은 언제나 블레어드의 가치를 가늠해왔다. 기준에 미달된다면 자식이라도 매몰차게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레베타 또한 카르한이 태어나고 나서 점점 블레어드를 등한시했다.
집에서 제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블레어드는 동생인 카르한을 내몰고, 레베타를 확실하게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일리아의 발언은 제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과 같았다. 심지어 일리아는 치졸한 짓까지 벌여서라도 자리를 보존하려는 블레어드를 비웃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서늘한 눈으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가증스러웠다. 일리아는 지금 모두를 기만하고 있었다. 카르한과 교제하는 것도 전부 신분 상승을 노리는 거면서, 아닌 척 뻔뻔하게 구는 꼴이 역겨웠다.
블레어드는 겨우 숨을 삼켰다. 여태까지 꾹꾹 눌러온 열등감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벌써요?”
“사실 이곳에 들른 건 헛소문을 정정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일리아는 여전히 블레어드를 쳐다보며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로 인해 피해가 커지면, 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말에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던 몇몇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일리아였다. 일리아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숨을 토해낸 블레어드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도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블레어드는 곧장 사교장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올라탄 그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얼굴을 구겼다.
고작 백작 가문 출신이면서 우위에 있는 척하는 꼴이 같잖았다.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넙죽 엎드려야 할 신세일 텐데 말이다.
“증거가 없으니 입 조심하라고?”
그럼 헛소문이 아닌, 진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마차는 어느덧 황궁에 도착했다. 시종장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자, 금방 황제궁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에반테온 공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블레어드를 맞이했다. 블레어드가 자리에 앉자마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늙은 황제가 이렇게까지 블레어드를 의지하게 된 것은 동질감 때문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두 사람은 뛰어난 동생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황위에 오른 지 제법 되었음에도 황제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비슷한 열등감을 품고 있던 블레어드는 황제의 마음을 깊이 공감해주었고, 그 덕분에 빠르게 신임을 얻어낼 수 있었다.
“황태자가 자꾸만 반대해서 말이지…….”
황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황제와 황태자는 자주 부딪쳤다. 늙은 황제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제국민의 고혈을 짜내 왔다. 황태자는 그런 황제를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했다.
그러나 그건 블레어드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블레어드는 그저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며 잇속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께서 아직 정무에 밝지 않으셔서 그러신 모양입니다.”
“그런 놈에게 어떻게 내 뒤를 맡길지.”
황제가 혀를 차자, 블레어드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폐하. 요즘 도는 소문을 들어보셨습니까?”
“소문?”
“블로든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말이 파다합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설명하자, 황제는 몰랐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까지 도는데, 세무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핑계도 있다며, 블레어드가 부추겼다. 마침 황제는 금 채굴 중단 사건으로 인해 블로든에게 악감정이 쌓인 상태였다.
“이대로 묵인하면 황실 측에서 탈세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만약 세무 조사까지 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블레어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속삭였다.
“증거야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눈이 커졌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본보기가 될 겁니다. 탈세를 일삼던 다른 가문들도 몸을 사릴 테니, 세수를 확보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턱수염을 쓰다듬던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황제에게서 답을 받아낸 블레어드는 적당히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몸을 일으켰다. 목적도 이루었으니,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시 마차에 올라탄 블레어드는 황궁을 빠져나왔다. 공작저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블레어드는 차근차근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다가 피식 웃었다.
“과연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도 지금처럼 대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이 분명했다.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블레어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일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하자, 잠깐 잊고 있던 약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함께 약을 했던 놈을 만나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한 번 생각나자 금단 증상이 밀려왔다.
“총회가 있을 때까지는 참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잘 참아오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블레어드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애써 생각을 떨쳐내려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잠깐 멈춰라!”
블레어드의 말에 마차가 멈추었다. 충동적으로 마차를 세운 블레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에 한때 블레어드가 자주 들르던 모임 장소가 있었다.
블레어드는 마차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잠깐 얼굴을 비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 회원들과 다시 친분을 쌓아야 하고 말이다.
망설이던 블레어드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길을 끊은 지 1년도 넘었건만, 그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건물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는 암호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블레어드가 들어간 곳을 확인한 후 다시금 조용히 사라졌다.
***
집무실에 앉아있던 레베타는 현관 앞에 도착한 마차를 보았다. 블레어드가 돌아온 것이다.
근래 들어 레베타는 블레어드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블레어드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쟁 지역에서 보고가 올라오면서 에반테온 공작은 카르한에게 관심 갖기 시작했다. 공작이 지금껏 손 놓고 있던 일을, 카르한이 고작 몇 달 사이에 해낸 것이다. 그때부터 공작은 카르한과 블레어드를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블레어드는 불안해했다. 원로들을 끌어들여도 공작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전부 수포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레베타는 어깨에 숄을 걸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어드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복도로 나온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블레어드의 방 앞에 도착한 레베타가 가볍게 노크했다. 안쪽에서 승낙이 떨어지자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었구나. 저녁은 먹고 들어온 거니?”
“예, 황궁에서 식사했습니다.”
“요즘 자주 황궁에 들르는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추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로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레베타가 당황하자, 블레어드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오랜만에 이야기나 해볼까 싶어서…….”
순간 블레어드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레베타는 보고 말았다. 항상 다정한 미소를 띤 채 사근사근한 말로 대답해주던 아들은 이곳에 없었다. 그저 신경이 잔뜩 곤두선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많이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블레어드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공작저에서 믿을 사람은 블레어드뿐인데……. 레베타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주렴. 내가 힘써볼 테니.”
“지금도 충분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
그제야 블레어드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베타는 속으로 안도하며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인 약통을 발견했다.
“블레어드, 어디 아프니? 웬 약을…….”
레베타의 물음에 블레어드가 황급히 약통을 치웠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치의는 불렀니?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블레어드가 고함치자 레베타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듯 블레어드 또한 덩달아 굳어졌다. 그가 금방 변명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레베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프니 그럴 수 있다며,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레베타는 블레어드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렇게나 착한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괜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어릴 적부터 너는 참 얌전하고 착했지.”
항상 사고 치고 다니는 카르한과 달리 의젓하고 다정했다며 레베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블레어드를 더듬듯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
“내게 종종 꽃을 가져다주었던 거, 아직도 기억나질 않니? 한 송이씩 말이야.”
“아아. 생각났습니다.”
“그래?”
레베타가 반색하자, 블레어드가 말을 이었다.
“꽃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꽃을 사서 어머니께 드렸지요.”
레베타는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비 오는 날마다 문가에 놓인 꽃은 다듬어지지 않은 엉성한 꽃이었다. 항상 수수한 들꽃이었는데, 어떤 꽃집에서 그런 꽃을 판단 말인가.
“내가 크게 아팠을 때도 네가 나를 간호해줬고…….”
레베타가 집착하듯 추억을 늘어놓았다. 블레어드와 자신만이 공유하는 기억이었다. 말을 전부 끝냈을 때, 레베타는 정말 생경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블레어드를 보고야 말았다.
“어머니.”
블레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자꾸 그런 일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죄송하지만 피곤해서 이만 쉬고 싶습니다.”
블레어드가 나가달라고 돌려 말하자, 레베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푹 쉬렴.”
레베타가 방을 빠져나오고, 문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복도를 울렸다. 서서히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고, 어깨와 머리가 차가운 벽에 닿았다.
자신이 알던 블레어드의 모습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카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어깨를 잘게 떨던 레베타는 겨우 걸음을 뗐다.
***
헤인리 블로든은 근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황태자의 비서관이 된 후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황태자는 직접 헤인리를 찾아와 힘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황제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는 헤인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황제가 블로든을 탄압하려 한다는 건 헤인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가문이 위험해질까 싶어, 황태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민 끝에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니, 모두들 뜻대로 하라며 지지해주었다. 덕분에 헤인리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황태자는 헤인리를 곧장 자신의 전속 비서관으로 삼았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 때문에 뒤에서 말이 많이 나왔으나, 헤인리의 업무 처리 능력을 본 사람들은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신 블로든 가문이 황태자 편에 서기로 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비서관이 된 헤인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대강 눈치채긴 했으나, 물밑으로는 이미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고인 물은 덜어내고 맑은 물로 채워야 한다.’
황태자의 지론이었다. 그것을 따르듯 황태자를 중심으로 황제파 귀족들을 밀어낼 새로운 세력이 조금씩 영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거기다 헤인리가 황태자의 비서관이 되면서 젊은 귀족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블로든이라는 이름과 헤인리의 평판이 가진 영향력이 큰 덕분이었다.
상황을 눈치챈 몇몇 고위 귀족들은 줄타기를 시작했다. 아둔한 황제를 버리고 황태자 쪽에 줄을 대보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황제와 현실에 안주하는 늙은 귀족뿐이었다.
“한 시간 후에 국무 회의가 있습니다.”
헤인리의 말에 황태자가 몸을 일으켰다. 반듯하게 제복을 갖춰 입은 황태자가 헤인리를 마주 바라보았다.
“국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그렇습니다.”
“긴장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어느덧 황태자의 표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황제와 자주 부딪쳤는데, 국무 회의 때도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무척 컸다.
황태자를 따라 집무실을 나온 헤인리는 길게 뻗어진 복도를 걸었다. 주위는 온통 조용했다. 앞서 걷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며칠 전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헤인리는 황태자를 신뢰하지만,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만약 황태자가 실권을 잡게 되면 블로든도 세력이 커질 것이다.
황실이 지금껏 블로든을 내버려둔 까닭은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블로든이 권력과 재력을 전부 거머쥐게 된다면 황태자도 거슬려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며칠 전, 황태자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그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까닭은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황태자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인리가 권력을 쥐고 나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망설이던 헤인리는 지금까지 하던 생각을 전부 밝혔다.
블로든은 권력에 관심 없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으리라는 것. 지금은 황제가 블로든을 탄압하는 움직임을 보여 나서는 것이며,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늘 그랬듯이 블로든은 정계를 멀리할 계획이라는 것까지.
-가업은 여동생이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비록 헤인리는 공직에 올랐지만, 가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기다 백작 가문에 불과하니, 공작이나 후작보다 덜 위협적일 터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지금은 젊은 귀족들뿐이니, 기존의 귀족들을 이끌어줄 인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헤인리는 카르한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무려 공작의 후계자이니 내세울 명분도 충분했다. 카르한이 황태자 쪽에 서면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다.
에반테온 공작은 항상 중립이었으나, 카르한이 정계에 진출하면 고위 귀족들도 더 이상 황태자를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은 황제 쪽에 서버렸고, 마음 같아서는 에반테온 소공자를 회유하고 싶지만…….
황태자 또한 카르한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소공자에게는 제가 연락해보겠습니다.
일리아에게 카르한이 곧 수도로 돌아온다는 말도 들었으니 연락하기 수월할 터였다.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헤인리와 황태자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참석할 사람들은 전부 도착했는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는 그들을 가로질러 상석의 오른편에 앉았다. 헤인리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의 뒤에 섰다.
마지막으로 황제가 들어오더니, 회의장의 문이 닫혔다.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헤인리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황제파로 가득하던 회의장에는 어느덧 황태자 측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모두가 자리에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다음 의제를…….”
회의는 생각보다 무난하게 흘러갔다. 누군가 의제를 꺼내면 적당히 결론을 낸 후 다음 의제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회의가 막바지에 달하고,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황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닿자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
황제는 느릿하게 귀족들을 훑다가 헤인리를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뜬 황제가 말을 이었다.
“블로든 가문이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는 내용인데…….”
회의 내내 차분하던 헤인리의 연녹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넘어가면 황실의 기강이 서지 않으니, 블로든을 상대로 대대적인 세무 조사를 할까 싶소.”
“말도 안 됩니다!”
황태자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어찌 소문만 믿고 수사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황태자가 곧장 반대하자 황제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황태자는 항상 반대만 하는군.”
“반대할 만한 사안이니 그렇습니다. 블로든 가문은 지금까지……,”
“시끄럽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황제가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이미 소문이 파다한데, 그냥 넘어가란 말인가?”
“…….”
“만약 무죄라는 것이 밝혀지면, 블로든도 누명을 벗을 수 있으니 좋지 않나.”
헤인리는 바로 눈치챘다. 증거가 없다면 만들어내겠다는 황제의 본심을.
***
수도는 매일매일 시끄러웠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제국의 수도였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단연 블로든 가문이었다. 블로든이 탈세를 일삼으며, 고용인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말이 돌면서 수도는 떠들썩해졌다.
아무리 일리아가 경고해도 호사가들의 입을 전부 다물게 할 수 없었다. 싸구려 타블로이드지는 추측성 정보로 가득했고, 확인되지 않은 일이 사실처럼 떠돌아다녔다.
모두가 그 소문을 믿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블로든 가문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서자, 이때다 싶어서 헐뜯는 자들도 좀 더 지켜보자는 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일리아는 헤인리로부터 국무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을 들었다.
-우리 가문을 상대로 세무조사를 하겠다는구나.
그야말로 가문의 위기였다. 블로든 가문은 정식으로 황실에 항의했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찔릴 게 없다면 받아들이라는 식이었다.
물론 블로든은 누구보다 떳떳했다. 그러나 황실이 세무조사에 나서려는 것은 없던 죄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무엇이든 꼬투리 잡을 터였다.
그 후에 바네사를 통해 황후가 연락을 취해왔다. 황후는 자신이 최대한 막아보겠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해왔다. 덕분에 세무조사 시기가 조금이나마 늦춰졌다.
-어쩔 수 없지. 우리는 평소대로 하던 일을 하자꾸나.
비올레의 말처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오늘, 일리아는 스텔라를 만나기로 했다. 꽃차 사업이 지나치게 잘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스텔라의 찻집에 도착한 일리아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소문 퍼뜨리지 말아요. 내가 아는 블로든은 소문과 다르니까.”
가게 안으로 들어온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스텔라에게 한 소리 듣던 여인은 일리아를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앞, 앞으로는 조심하겠어요. 그럼 저는 이만…….”
일리아는 제 옆을 스쳐지나가는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스텔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언제 왔어?”
“방금.”
“너 좋으라고 변호한 거 아니야.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면 우리 가문까지 피해 볼 수도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찔렸는지 스텔라가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스텔라가 사교계에 떠도는 블로든 가문의 소문을 정정하고 다닌다는 걸.
먼저 자리에 앉은 일리아가 메뉴판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
스텔라가 자리에 앉고, 느긋하게 메뉴판을 확인하던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디저트 메뉴 추가되었네?”
저번에 디저트 부분을 보강하라고 조언했을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어느새 메뉴가 세 개나 늘어나 있었다.
“네가 직접 먹어보고 넣은 거야?”
“당연하지! 신메뉴인데.”
냉큼 대답한 스텔라는 이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 큰일 난 거 아냐? 왜 이렇게 태평하게 굴어?”
“내가 호들갑 떤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그렇게 했겠지. 걱정은 네가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너랑 같이 하는 사업도 있는데, 당연히 걱정되지.”
나까지 망하는 거 아니냐며 스텔라가 툴툴거렸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얄밉게 할 때가 가끔 있지만, 아주 나쁜 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블로든을 옹호해준 것도 그렇고 말이다. 물론 스텔라와 친구가 될 마음은 아직도 없었다.
“아, 맞아.”
일리아가 마침 생각났다는 얼굴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선물.”
“……뭐야.”
“잠깐 지방에 다녀오면서 구입했어.”
상자를 요리조리 살피던 스텔라가 리본을 풀었다. 팔찌와 손수건, 나무 공예품 등이 들어 있었다. 일리아가 분쟁 지역에 다녀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서 산 물건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
스텔라는 냉큼 팔찌를 차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텔라가 사교계의 유명인사인 만큼 홍보 효과가 상당할 터였다. 공방에 주문을 왕창 넣어두고 오길 잘했다.
“마음에 들면 몇 개 더 줄게.”
“……무슨 꿍꿍이야?”
“동업자에게 선물 정도는 줄 수 있지.”
스텔라는 수상하다는 듯 일리아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디저트에 차를 곁들여 티타임을 가진 후, 일리아와 스텔라는 본격적으로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존 상품을 조금 더 줄이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울까 싶어.”
스텔라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그녀의 말을 듣던 일리아는 창밖으로 경비대가 우르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또다시 한 무리의 경비대가 지나갔다.
스텔라도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경비대원의 숫자만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듯했다.
일리아와 스텔라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수송 마차가 줄줄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잠시 멈춰 선 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여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말도 마세요.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에요.”
일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받았다.
“불법 모임을 가진 귀족 자제들이 체포되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