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22장
23장
24장
21장
시오릭 에반테온은 공작령에 위치한 영지의 영주였다. 그는 에반테온 가문의 원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일부러 수도로 올라가지 않은 몇 안 되는 원로 중 하나였다.
그런 시오릭에게는 커다란 불만이 하나 있었다. 현 에반테온 공작이 자리에 오르면서 영지마다 격차가 심해진 것이었다. 시오릭은 한때 블레어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데다 제 아비와 달리 열정도 있어 보여서, 작위를 계승하면 이 문제를 해소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오릭의 기대와 달리, 블레어드는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제 안위를 지키기 위해 곧바로 제국을 뜨는 모습을 본 시오릭은 블레어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 후로 시오릭은 표면적으로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에 속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그는 내년 봄 무렵 총회가 열린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이 후계자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시오릭은 블레어드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카르한을 지지하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전쟁광이라 소문이 난 소공자에게 공작령을 맡길 수 없었다. 차라리 블레어드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이 분쟁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야만족과의 분쟁만 정리하고 돌아가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자꾸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이 귀에 들어왔다.
사고라도 쳤나 싶었는데, 전부 좋은 말뿐이었다. 거기다 구휼금을 부탁해왔던 마을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긴 시오릭이 알아보니, 상단이 대거 들어왔다고 했다.
시오릭은 오랜만에 마을로 향했고, 카르한과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계속 품고 있던 불만을 전부 쏟아냈다. 무능한 공작 가문에 대한 화풀이였을지도 몰랐다.
“제가 떠난 후에도 이곳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카르한은 시오릭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해왔다. 순간 흔들릴 뻔했지만, 시오릭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말뿐인 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대했다가 또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한번 잘해보십시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길로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려 했다. 현관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화려하진 않았으나, 이 근방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높은 사람이 온 건가 싶어 긴장하고 있는데, 환한 금발을 가진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카르한……!”
그녀가 카르한을 불렀다. 뒤늦게 나와 꼼짝없이 굳어져 있던 카르한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에…….”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여인은 곧장 카르한에게 다가와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안긴 카르한이 여인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시오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내 무뚝뚝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무척 부드러워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을 끌어와 담아낸 것 같았다.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라, 시오릭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쉬운 듯 몸을 떼어낸 카르한이 그녀에게 시오릭과 루벤투스를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에반테온 원로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 마을의 관리인인 루벤투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시오릭과 루벤투스는 숨만 들이켰다. 시오릭이 아는 블로든은 하나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부자이자, 거상 집안.
“블로든이라면 혹시 사업으로…….”
시오릭의 물음에 일리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저 소소하게 장사하는 것뿐이에요.”
시오릭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절대 소소한 장사라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블로든이 맞았다.
그는 곧바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블로든 영애와 무슨 사이인 것이지? 끌어안은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사이인 것은 분명했다.
시오릭은 미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때 일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혹시 식사하셨나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하고 가세요.”
시오릭이 거절하기도 전에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마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놀라서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말했다.
“요리사를 데려왔거든요.”
그 후로 속전속결이었다. 시오릭은 얼떨결에 다시 저택 응접실에 앉게 되었다. 일리아가 데려온 이들은 순식간에 자기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금세 낡고 칙칙한 저택을 바꾸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과 가까운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일리아는 자꾸 희한한 물건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관심 없는 척하던 시오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먼저 이게 뭐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공작령에 처박혀 있던 시오릭에게는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시오릭은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머쓱해졌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카르한에게 모진 소리를 쏟아냈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다 혹시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러는 건가 싶어서, 시오릭은 다시 정신 차렸다.
“식사만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시오릭이 단호히 말했다. 때마침 고용인이 응접실을 찾아왔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좁고 허름하던 식당은 그사이 싹 바뀌어 있었다. 자수가 놓인 식탁보와 은촛대를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듯해 보였다.
음식이 담긴 접시가 하나씩 테이블에 놓이고,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
음식을 한 입 먹은 시오릭과 루벤투스는 그대로 굳어졌다. 혀가 황홀해지는 맛에 잠시 머리가 아찔해졌다. 분명 평범한 고기 요리처럼 보였는데, 부드러운 육즙이 혀끝에서 춤을 추었다.
과일을 갈아서 만든 소스는 고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이렇게나 맛있는 요리는 두 번째였다.
“……오래전에 황궁 만찬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생각납니다.”
시오릭의 말에 일리아가 대답했다.
“이번에 데려온 요리사가 황궁 요리장 출신이라 그런 걸까요?”
시오릭이 놀라서 포크를 떨어뜨렸다. 황궁 요리장 출신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데려온 것이지……. 그런 대단한 요리사를 전속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혀를 내두르던 시오릭은 다시 음식을 한 입 먹었다. 미소를 부르는 맛에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일리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참, 식탁보와 냅킨은 전부 여기에 있는 걸 사용했어요.”
저택 관리인인 루벤투스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까 마차를 타고 오면서 봤는데, 여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문 앞에 달아둔 장식품을 봤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공예품을 만들어 수도에서 판매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일리아의 의견에 시오릭은 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곳은 척박한 땅이라, 농사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다만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다들 공예품을 만들곤 했다. 수요가 적긴 했지만, 근처 영지에서도 찾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긴 했다.
“하지만 수도까지 운송하는 비용이 더 들겠지요.”
아무리 질 좋은 상품이라 한들, 유통 단계에서 가격이 폭등하면 누가 사겠는가. 시오릭이 그것을 짚어주자, 일리아가 대답했다.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운송 업체를 설립했어요. 유통 단계가 많이 줄었고, 시간도 절반 이상 단축되었죠. 물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츰 지역을 늘려가는 중이지만요.”
시오릭은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일리아의 말이 실현된다면…… 공작마저 외면한 이 마을에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다줄지도 몰랐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영지에도 조금씩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일리아의 제안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희망론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일리아가 처음이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시오릭은 다시 스푼을 들었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시오릭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였다.
시오릭이 현관을 나서자 모두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시오릭은 일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일리아는 뭘요,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카르한이 정말 연인 하나는 잘 뒀구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 루벤투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넨 시오릭은 마지막으로 카르한을 응시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찾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카르한의 깍듯한 태도에 시오릭은 흠, 하고 침음을 삼킨 후 뒤돌아섰다. 말에 올라탄 시오릭은 영지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활기찼다. 방문할 때 항상 느껴지던 음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늘 근심걱정에 찌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작 몇 달 사이에 다른 마을이 된 것 같았다.
마을을 둘러보던 시오릭은 잠시 멈춰 섰다. 일리아가 말한 대로 집집마다 걸려 있는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장식품을 볼 때마다 잘 만들었다고 감탄했으나, 그걸 팔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시오릭은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들 웃는 얼굴로 카르한을 칭찬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카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나, 반쯤은 성공한 듯했다. 시오릭이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는 자신의 영지로 가기 위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변화의 기회가 찾아온 걸지도 몰랐다.
***
시오릭이 가버리자, 모두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루벤투스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벤투스마저 가버리고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가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말이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일리아의 손을 살짝 잡아 보았다.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웠다.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일리아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그래서 왔어요.”
그 한마디가 일리아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또다시 일리아를 끌어안고 싶어진 카르한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제 방으로 가겠습니까?”
“좋아요.”
두 사람은 카르한이 침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카르한이 잠깐 멈칫했다. 벽에 일리아의 초상화를 걸어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들어오기 전에 후다닥 뛰어가 초상화를 걷어냈다. 그러나 일리아는 이미 봤는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웬 초상화예요?”
“그게…….”
헤인리에게 받은 초상화를 손에 쥔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비화를 들은 일리아가 불쑥 물었다.
“그래도 실물이 더 좋죠?”
카르한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화가 수백 점 있다 해도 역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카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그저 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카르한이 속삭였다.
“오느라 힘들진 않았습니까.”
“즐거웠어요. 당신 보러 오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이어서 재밌었다며 일리아가 웃었다. 황무지에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에 카르한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등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떠날 때보다 살 빠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식사는 평소와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도 딱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본인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일리아의 변화는 알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좀 더 길어진 것이나, 이전보다 야윈 것까지 말이다.
그것이 안쓰러워서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제 손목의 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일리아도 자신과 헤어진 후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한 팔을 거둬 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카르한이 일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일리아, 고맙습니다.”
카르한의 품에 안겨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계속 신경 써주어서 여기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만나러 와준 것도 고맙고…….”
심지어 오늘도 일리아의 도움을 받았다. 제게 까칠하게 굴던 원로의 태도가 한층 누그러진 것도 일리아 덕분이었다. 늘 그랬다. 일리아는 항상 카르한에게 부족하지 않게 나누어주고 베풀었다.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었다.
“매번 당신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속삭이자, 일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깐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도움을 받은 건 나예요.”
서서히 카르한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일리아가 눈을 똑바로 마주해왔다.
“당신이 날 구해줬으니까요.”
일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르한이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일리아가 손을 뻗어, 카르한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나란히 침대에 앉게 되자 일리아가 입술을 한참 달싹였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께 들었는데, 당신 과거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해했지만, 카르한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한 번 있습니다.”
“장소는요?”
“정확한 장소는 기억나지 않지만……, 황궁 정원이었습니다.”
카르한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전쟁에 나가 있을 때였는데, 잠깐 수도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전장을 떠돌던 카르한은 공작의 호출을 받아 수도에 귀환했었다. 그때 공작 가문 사람들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러 갔었다. 황제는 카르한에게 관심을 주었고, 블레어드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눈치를 살피던 카르한은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빠진 소녀를 발견했다.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카르한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카르한의 대답에 일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굴은…… 봤어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볼 새도 없이 급하게 호수에서 건져냈다. 직접 의원에게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저를 찾아온 블레어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사라진 후여서…….”
그 후로는 시간이 오래 흘러 잊고 있었다. 카르한이 과거를 더듬듯 대답해주자, 일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일리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눈동자에 물기가 장막처럼 차올랐다. 그것을 본 카르한은 자신이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일리아…….”
카르한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숨을 내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물에 빠진 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리하트 테르시안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나를 구해준 사람은, 내 운명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카르한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일리아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작고 둥근 물건이 놓였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바라보다가 제 손에 쥐어진 것을 확인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단추였다.
“내 운명은 당신이었어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손을 감싸며 속삭였다.
“당신이 구해준 사람이 나라고요.”
확신에 가득 찬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걸 돌려주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지만……, 고마워요. 날 구해줘서.”
그제야 일리아가 하는 말이 전부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신이 일리아를 구해준 은인이라고……? 그 순간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작은 소녀. 카르한은 곧장 그녀를 물 밖으로 끌고 나왔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소녀는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속눈썹 사이에 숨어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물에 젖어도 환히 빛나던 금색 머리카락이 생각났다. 일리아가 말하던 운명의 상대는 바로……. 카르한의 입술이 떨려왔다.
“제가…….”
카르한은 목이 메어서 한 번 숨을 삼킨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제가…… 당신을…….”
그러나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서 내쉬어지는 숨조차 흔들렸다.
카르한은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일리아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카르한은 리하트 테르시안이 그토록 부러웠다. 동시에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을 느꼈다.
자격조차 없으면서 질투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면서 한편으로 괴로웠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를 구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카르한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꼬리에는 희미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일리아 또한 카르한을 보며 활짝 웃었다. 웃고 있는데 계속 눈물이 나왔다. 기뻐서, 가슴이 벅차서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카르한은 두 팔을 벌려, 일리아를 와락 안았다. 안겨 있던 일리아가 카르한의 뺨을 감쌌다.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차오르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리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받아들였다. 잠시 잊고 있던 감촉이지만, 금방 익숙하게 서로를 탐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부드러운 입술을 눌렀다가 가볍게 삼켰다. 제 감정을 일리아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환희에 가득 찬 심장소리가 가슴 밖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침대에 풀썩 눕게 되었다. 좀 더 깊어진 입맞춤과 함께, 거친 손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입꼬리까지 빗겨간 입술이 어느새 목덜미에 파묻혔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온몸에 키스할 듯 입을 맞추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가 조금 붉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눈부신 모습이었다. 카르한은 침대에 누운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한 번도, 과거의 제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귓불을 살짝 만졌다가 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저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늘 스스로에게 인색했던 카르한이었다. 아무리 봐도 칭찬할 구석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카르한은 아까 하다 만 감사 인사를 다시 이었다.
“무사해주어 고맙고, 저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
한참을 엇갈린 끝에 결국 다시 만났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카르한은 생각했다.
***
에반테온 공작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카르한이 보낸 것으로, 야만족과 휴전 협상을 맺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성과였다.
야만족과의 분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문제였다. 첫 전쟁이 언제였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느라 지금껏 막대한 손해를 봐왔다. 최근 들어 재정문제로 골머리 앓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평화적으로 전쟁을 매듭지을 방법을 찾은 것이다.
공작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전쟁이었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기회를 걷어찰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들어갈 돈이 많아져서 골치였는데, 비용을 대폭 아낄 수 있었다. 입으로만 떠들어대던 원로들도 잠시 조용해질 것이다.
“적어도 1년 이상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공작은 카르한이 떠난 날짜를 계산했다. 고작 두 달이 더 지났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지막으로 독대했을 때의 카르한이 떠올랐다. 눈도 못 마주치던 예전과 달리, 카르한은 그를 똑바로 마주해왔다. 나약하고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했건만, 그때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거기다 카르한은 황실에서 연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훌륭한 행보였다.
그에 비해 블레어드는 조금 평범했다. 성적이나 평판도 괜찮아서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카르한과 나란히 두고 보니 확실히 차이가 났다.
-검술 대회 우승 축하하오. 차남이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청년이더군.
황제 또한 카르한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넌지시 언급하곤 했다. 툭, 툭…….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느려졌다.
그는 일찍 은퇴하고 후계자에게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었다. 원래부터 원치 않았던 자리로, 후계자였던 형이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반강제로 작위를 계승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교제해온 애인을 두고 레베타와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뜻이 없었기에 두 아들이 장성할 동안, 그는 가정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혼외자식을 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남인 블레어드를 후계자로 낙점해둔 후 그저 레베타가 하는 대로 지켜봤을 뿐이었다.
-낳기만 하면 다인 줄 알아요? 여태 방관한 주제에!
레베타의 쨍한 소리침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그날 후로 레베타와는 말도 섞지 않았다. 원래도 남보다 못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다.
“분명 블레어드를 밀어주겠지.”
레베타는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해도 블레어드를 지지할 것이다. 만약 블레어드가 후계자가 된다면…… 원로들을 완전히 꺾을 수 있을까.
지금 원로들의 입김이 너무 강해진 탓에, 은퇴한다고 해도 휘둘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작위를 물려주기 전에 원로들의 기세를 꺾어두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내년 봄에 있을 후계자 총회는 에반테온 공작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지율이 비등비등하다면 공작의 의견이 중시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기에 블레어드를 밀어주었지만, 이만큼 격차가 나버린다면…….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 소리가 멎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지켜볼까.”
공작은 펜을 집어 들어, 휴전 협상에 동의한다는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
블레어드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응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가득했는데, 전부 털어내고 마른 나뭇가지만 보였다. 벌써 겨울이 온 것이었다.
블레어드는 잠시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내년 봄에 있을 총회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동안 블레어드는 평판을 올리기 위해 애썼다. 기부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사교 모임이나 연회장에도 얼굴을 비쳤다.
그러나 모두들 카르한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분쟁 지역으로 떠난 지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카르한을 잊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잠깐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 카르한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졌음을 깨달은 블레어드는 초조해졌다. 분쟁 지역으로 암살자라도 보낼까 싶었지만, 결국 단념했다. 자신이 부담해야 할 위험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뒤돌아선 블레어드는 옷장을 열어,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후 만날 사람이 있었다. 고용인의 도움 없이 혼자 준비하던 블레어드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블레어드는 이전에 일리아를 찾아가, 공작부인 자리를 제안했다. 내심 기대했지만 거절당했고, 곧장 일리아를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군으로 만들 수 없다면 누구보다 골치 아픈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일리아의 약점을 찾던 블레어드는 리하트 테르시안을 찾아갔다. 파혼 당했지만 일리아의 약혼자였으니, 쓸모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간수를 매수해서 지하 감옥에 들어간 블레어드는 리하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더럽고 앙상하게 메마른 남자는 더 이상 귀족이라 보기 어려웠다. 차라리 노예가 더 번듯해 보일 정도였다.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여기서 꺼내만 주십시오.
리하트는 비굴할 정도로 납작 엎드린 채 빌었다. 그러나 리하트는 생각보다 쓸모가 없었다. 블레어드가 알고 있는 정보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리해서 리하트를 빼내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블레어드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에반테온 공자!!
블레어드는 저를 향해 부르짖는 리하트를 내버려두고 지하 감옥에서 나와 버렸다. 그 후에 블레어드는 스텔라를 따로 찾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블로든 가문에 대적할 만한 상대는 델로타 가문뿐이었다. 두 가문은 앙숙으로 유명했고, 일리아와 스텔라는 사이가 나쁘기로 소문났으니 적합했다.
-얼마 전에 공작부인께서도 찾아오셨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스텔라는 냉담한 태도로 블레어드를 맞이해주었다. 블레어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목적을 밝혔다.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뭐지요?
-제가 델로타 가문을 제국 제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블레어드는 뱀처럼 입을 놀렸다.
-원래는 델로타 가문이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지요. 하지만 지난 십 년 사이 그 자리를 블로든에게 내어주었고요.
-…….
-분하지 않습니까?
블레어드는 스텔라의 아픈 부분을 긁어내렸다. 자존심 강한 스텔라라면 분명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었다. 제 뒤를 따라오던 블로든에게 추월당했으니 말이다. 블레어드는 곧바로 스텔라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일리아 블로든을 견제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게 약간의 도움을 주신다면, 은혜를 갚겠습니다.
작위를 계승한 후에 델로타에게 유리한 법안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노라 약조했다.
블레어드는 스텔라가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스텔라의 입장에서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델로타 가문을 최고로 만드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스텔라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블레어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른 방법으로 회유해보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블레어드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몸을 사리는 건가.”
스텔라를 떠올린 블레어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머리 손질까지 끝낸 블레어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 없는 것으로 보아, 심복인 듯했다.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블레어드는 사내가 내민 편지를 받아, 밀랍 인장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안에 들어있던 편지봉투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점점 가라앉았다. 공작이 카르한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휴전 협상에 동의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카르한이 야만족을 상대하며 고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휴전 협상이라니. 만약 카르한이 협상을 맺는 데 성공하면, 해야 할 소임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즉, 수도로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었다.
블레어드는 저도 모르게 서신을 구길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후우…….”
순간 1년 가까이 끊은 약이 절실하게 생각났다. 총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상기하며, 겨우 인내했다. 블레어드는 서신을 반듯하게 접은 후 다시 봉투에 넣고 밀랍인장을 정교하게 봉인했다.
“차질 없이 보내도록.”
사내는 블레어드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블레어드는 고개를 숙여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두에 묶인 리본은 오차 없이 반듯했으나, 한쪽을 당기면 균형이 어긋날 터였다.
“협정이야, 깨뜨리면 그만이지.”
아직 신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얄팍한 협정이었다. 약간만 손을 쓰면 카르한이 세운 성과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를 분쟁 지역에 처박아둘 수 있었다. 블레어드는 명령을 기다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더 해야 할 게 있다.”
블레어드의 명령을 받은 사내는 곧장 사라졌다.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친 블레어드는 마차에 올라탔다. 곧장 공작저를 빠져나온 마차는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도로 돌아온 블레어드는 그동안 고위 귀족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기회를 마련해 두었다. 드디어 오늘 그 사람을 만날 때였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마차가 마침내 멈추었다. 황궁 안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궁 앞에서 내린 블레어드는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이 어느 방 앞에서 멈추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남자가 블레어드를 바라보았다. 블레어드는 곧장 예를 갖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궁금했지만 선뜻 물어보기 어려웠던 것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당신이 준 옷을 보면서 상상했어요. 어렸을 땐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정말요?”
상상이 안 간다며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키도 작았고, 손발도 작았습니다.”
“초상화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일리아는 손을 들어 카르한의 손에 겹쳐 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 이상은 컸다. 어린아이 시절 카르한을 상상하던 일리아는 속으로 웃다가 그의 귓불과 뺨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운 듯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내 그의 목덜미가 조금 붉어졌다.
일리아는 목덜미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수도를 떠날 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뒷목을 반쯤 덮고 있었다. 까슬까슬하던 느낌도 없어졌다.
일리아가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가 눈썹을 아래로 내린 채 물었다.
“언제 돌아갑니까?”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요.”
거리가 멀어서 왔다 갔다 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임시 휴가를 내긴 했지만, 자리를 계속 비워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3일 정도 머무른 후에 갈까 싶어요.”
“3일…….”
카르한이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의 손끝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곧 돌아올 거잖아요. 그때는 매일 같이 있어요.”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일리아가 말했다. 카르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가족분들은 잘 계십니까?”
“다들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각자 표현하는 게 다르긴 하지만…….”
카르한이 떠나고 한참 우울해하던 클리프는 요즘 새로운 식물을 키우는 데 재미를 붙였다. 나중에 카르한이 돌아오면 깜짝 선물을 줄 거라면서 말이다.
비올레의 경우에는 연무장을 둘러보는 시간이 늘었다. 카르한과 대련했던 것을 상기하는 듯했다.
헤인리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자주 일리아를 찾아와 카르한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카르한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냐고 질문해왔다.
“그나저나 일은 잘 되어가요?”
“야만족과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보고는 올려뒀으니, 잘하면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정말요?”
피를 보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니, 그보다 좋은 결말은 없었다. 왠지 카르한다운 행보라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예정보다 더 일찍 올 수도 있겠네요!”
“공작령의 다른 영지를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그곳에 원로께서 한 분 더 계시니까요.”
“오늘 오신 분은요?”
일리아가 시오릭을 언급하자, 카르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직까지는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카르한은 시오릭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시오릭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지 말라고 했다. 카르한이 떠나면 다들 버려지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먼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카르한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 끝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편지에 동봉한 돌멩이, 어디서 난 거예요?”
일리아가 갑자기 돌멩이 이야기를 꺼내자,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해주었다.
“그냥 마을을 산책하면서 주웠습니다. 길바닥에 흔히 널려 있습니다.”
“보고 싶어요.”
일리아의 한마디에 카르한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주워 오겠습니다.”
“내일 같이 보러 가요. 벌써 밤이에요.”
창밖을 바라본 카르한은 사방이 어둑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만 자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잠들기 아쉽지만, 내일 늦잠을 자는 것보단 일찍 자는 게 나았다.
“생각해보니 아직 방을 안내 받지 못했네요.”
침실을 안내 받기 위해, 일리아와 카르한은 루벤투스를 찾아갔다. 그런데 루벤투스가 난감한 얼굴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준비된 방이 없습니다.”
“……네?”
“손님용 방은 소공자님과 테시온 님께 내어드렸고, 나머지는 창고로 쓰이고 있어서……. 특히 이번에 짐이 부쩍 늘어난 탓에 옮길 수도 없는지라.”
일리아는 충격 받았다.
‘어떻게 방이 없을 수 있지……?’
대저택에서 평생 살아온 일리아는 방이 부족하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블로든 저택은 남아도는 게 방이었다. 거기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이라 들었는데……, 손님용 방이 두 개뿐이란 말인가?
“제가 집무실에서 자겠습니다.”
카르한이 냉큼 말했다. 순간 일리아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리아는 그의 팔목을 냉큼 잡고, 힘주어 속삭였다.
“같이 자요.”
그 말에 카르한의 팔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싫어요?”
일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카르한이 숨을 들이켰다.
“그게 아니라…….”
“아니면 날 집무실에 재울 셈이에요?”
“제가 집무실에서…….”
“그럼 나도 집무실에서 잘래요.”
일리아가 팔을 단단히 붙들고 말하자, 카르한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무척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일리아의 속눈썹이 점점 아래로 처졌다. 안절부절못하던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고 결정 내렸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일리아는 언제 눈을 내리깔았냐는 듯 웃어 보였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는데, 어떻게든 해결을 보았다. 프란체와 말렉은 테시온의 방에서 자고, 일리아가 데려온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재워주기로 한 것이다.
일리아는 간단하게 씻은 후 카르한의 침실로 들어갔다. 책을 읽던 카르한이 일리아를 반겨주었다. 왠지 긴장한 기색이라,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침대에 앉는데, 아까 보지 못한 검은 곰인형이 누워 있었다.
“아.”
뒤늦게 깨달은 카르한이 곰인형을 의자에 앉혔다. 왠지 감시당하는 기분이어서 카르한은 인형을 슬쩍 뒤로 돌렸다. 벌써 잠들 시간이었기에,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 누웠다. 램프 하나만 켜둔 채 일리아와 카르한은 낮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로 돌아오면 뭐부터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이랑 가고 싶은 곳 전부 적어뒀어요.”
전부 가줘야 한다고 일리아가 웃었다. 그날이 오기까지 아직 멀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잠깐 대화가 끊기고, 눈이 마주쳤다. 의식하고 보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을 맞췄다간 거기서 끝나지 않을 듯했다.
‘나쁘진 않은데……?’
일리아의 흑심을 모르는 것인지, 카르한이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산뜻한 입맞춤에, 일리아는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쉽긴 한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카르한.”
카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일리아가 속삭였다.
“일어나면 또 해줄게요.”
조용한 방 안에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는 스르륵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꺼풀 위로 밝은 빛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이 깬 일리아가 눈을 떴다.
“…….”
일리아는 꿈인가 싶어서 눈만 깜빡였다. 코가 맞닿을 거리에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갑자기 깨어나자 당황한 눈치였다.
“잘 잤어요?”
일리아의 아침 인사에 카르한이 대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카르한이 한쪽 뺨을 내밀더니 손끝으로 가리켰다. 뭔가 싶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어제 했던 말을 떠올린 일리아가 카르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카르한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제대로 못 잤습니다.”
자버리면 전부 꿈일 것 같았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가만히 보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다른 건 부끄러워하면서 좋다는 말은 왜 저렇게 쉽게 내뱉는지.
두 사람은 일어나기 싫어서 한참 침대에 누워 있다가 꾸물꾸물 일어났다. 언젠가 이 풍경이 매일 지속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침실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은 후,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일리아가 냉큼 카르한의 팔을 붙들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자, 카르한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카르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팔짱을 풀어도 되겠습니까.”
“왜요? 불편해요?”
“아침이라 추울 겁니다. 이곳 바람은 매서우니까요.”
일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팔을 거두었다. 카르한이 가방을 뒤져, 외투부터 목도리까지 전부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전부 입혀주고 씌워주었다. 그제야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너무 많이 겹쳐 입어서 갑갑했지만, 카르한의 표정을 본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라도 벗겠다고 하면 걱정할 것이 눈에 선했다.
“당신도 장갑 껴요.”
일리아는 가죽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워주었다. 팔짱을 끼는 대신 손을 맞잡은 채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섰다.
아침 햇살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카르한과 발맞추어 걷던 일리아의 입술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맙소사. 진짜 굴러다니잖아?’
금보다 비싼 원석이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이 정도면 공예고 뭐고, 원석만 팔아도 마을 전체가 호의호식할 터였다.
일리아가 돌멩이만 바라보자, 카르한이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그의 한 손에 돌멩이가 쌓여가자, 일리아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카르한.”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는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 금보다 비싼 원석이에요.”
그 말에 카르한은 들고 있던 돌멩이를 전부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내 카르한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이 떨어뜨린 돌멩이를 살폈다.
“……제가 몇 개 부순 것 같습니다. 어쩌죠?”
안절부절못하는 카르한과 달리, 일리아는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괜찮아요.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카르한은 많이 놀랐는지 심호흡을 내뱉은 후 돌멩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처음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카르한에게는 작은 것도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말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눈치니까 비밀로 해요.”
카르한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을 어귀까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때 보내준 돌멩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감정을 맡겨봤어요.”
“…….”
“고급 안료에 쓰이는 재료인데, 전문가들이나 알아볼 수 있는 희귀한 원석이라 지금껏 몰랐나 봐요.”
그걸 알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마을은 공작의 소유였다. 분쟁 지역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민간인에게는 토지를 매매하지 않았다.
“분쟁 지역 건을 매듭짓고, 이 땅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해요.”
수익도 나지 않는 척박한 땅이니, 공작은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카르한이 야만족과 화친을 맺으며 관리하는 쪽이 나았다. 완전히 카르한의 소유로 넘어오고 나면 그때 공개해도 늦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 된 공작은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공작은 평생 몰랐을 일이었다.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재물운이 옮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좋죠. 두 배가 되는 거잖아요.”
작게 웃던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원석에 기댈 수는 없으니, 공예품을 수출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요.”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금보다 비싼 이유가, 무척 희귀해서 그런 거였거든요.”
광산에서도 소량만 나오는 희귀한 원석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원석이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양이 한꺼번에 시중에 풀리면 가격이 폭락할 것이 뻔했다.
금은 꾸준히 수요가 많고 널리 쓰이지만, 이 원석은 쓰이는 곳이나 수요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씩만 판매하면 수익이 크지 않을 테니…….
“마을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석에 너무 기대는 건 좋지 않을 듯해요.”
“사람들과 한번 이야기해봐야겠습니다.”
“그건 제게 맡겨요. 전문이잖아요.”
일리아가 양어깨를 펴고 말하자, 카르한은 나직하게 웃었다. 아침 산책 겸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왠지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그때 루벤투스가 다급한 얼굴로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소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루벤투스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야만족들이 평화 협정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해왔습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놀라서 굳어졌다. 먼저 정신 차린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어젯밤에 저희 쪽 병사가 야만족 병사를 공격한 모양입니다.”
카르한의 표정이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그는 야만족과 협상 자리를 가진 후, 군 전체에 평화 협정에 대해 알려두었다. 휴전할지도 모르니, 당분간 진영을 떠나지도 말고 적군을 만나더라도 그냥 보내주라고 명령해두었다. 그런데 누가 명을 어겼단 말인가.
“……경계선을 넘어갔나.”
두 진영 사이엔 경계가 있었다. 거리도 제법 있었기에 일부러 거기까지 가지 않는 이상 충돌할 일은 없었다. 한밤중에 진영을 빠져나갔다는 것도 그렇고, 뭔가 꺼림칙했다.
“일리아, 미안하지만 잠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갔다 와요.”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로 돌아온 카르한은 곧장 짐을 꾸린 후, 말을 타고 분쟁지로 향했다. 도착할 즈음, 카르한은 야만족 진영에 올라간 깃발을 확인했다. 전쟁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진영에 도착한 카르한이 말에서 내렸다. 막사 앞에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르한은 곧장 테시온을 찾았다.
“테시온.”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굴이 해쓱해진 테시온이 나타났다. 카르한이 자리를 비운 동안 테시온이 대리인으로 이곳을 지켰는데, 밤을 꼴딱 새운 듯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곧장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아침에 우르시오가 찾아왔습니다.”
카르한은 테시온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았다. 루벤투스가 해준 말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상세했다. 새벽 무렵 카르한 쪽 병사가 경계를 넘어가, 야만족 병사를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갑옷까지 갖춰 입었던 모양입니다.”
“습격당한 병사는?”
카르한은 먼저 야만족 병사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부상을 크게 입은 모양입니다. 사실 그쪽 말을 제가 잘 몰라서 제국어만 드문드문 알아들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대 쪽 병사가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크게 다쳤다니…….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알아내도록.”
카르한의 얼굴을 본 테시온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표정은 처음 보는 걸지도 몰랐다. 테시온은 카르한의 눈치를 보다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공작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카르한이 봉투를 받자, 테시온은 곧장 막사를 나가버렸다. 혼자 막사에 남게 된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새벽에 경계선을 밟고 넘어가 야만족 병사를 공격하다니. 누가 위험하게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뭔가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혹시나 하는 의심이 금방 뿌리를 내렸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카르한은 테시온이 두고 간 봉투를 열어보았다. 공작이 보낸 서신이 들어있었다.
카르한은 빠르게 서신을 훑었다. 휴전 협정에 승인한다는 말뿐이었다. 적어도 공작이 꾸민 일은 아닌 듯했다. 굳이 번거롭게 그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신으로 허가하지 않겠다는 말만 적어 보내도, 이 협정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블레어드…….”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블레어드뿐이었다. 분명 이쪽에도 감시자를 보내왔을 터였다. 상황이 제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니 훼방을 놓았을 확률이 높았다.
어찌 되었든 이번 일은 카르한이 수습해야 했다. 변명 같은 것은 통하지 않을 테고,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떠올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사람이었다.
카르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이리저리 바쁘게 명령을 내리던 테시온이 곧장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부대를 샅샅이 뒤져 범인을 색출 중입니다. 혹시 진영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니, 인근 마을까지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래, 잘했다.”
“카르한 님께서는…….”
카르한의 얼굴을 본 테시온이 잠시 말을 흐렸다. 카르한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재협상을 하러 간다.”
“위험합니다!”
테시온이 곧바로 만류했다. 이번 일로 야만족들이 잔뜩 흥분해서 공격해올지도 그가 설득했다.
“우르시오 그 녀석도……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았고요.”
“그러니 내가 수습해야지.”
만약 블레어드가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결국 카르한이 해결해야 했다. 카르한이 이 진영의 우두머리이니 말이다. 해명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은 나중에 할 일이었다.
“보라색 깃발을 올리도록.”
“……알겠습니다.”
결국 카르한을 말리지 못한 테시온은 터덜터덜 걸어가, 보라색 깃발을 올렸다. 보라색 깃발은 두 진영의 중앙에 있는 막사에서 대화를 하자는 표시였다.
깃발이 올라가고, 야만족 진영 쪽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은 협상 자리에 나가기 위해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지휘관님…….”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휴전한다는 소식에 얼싸안고 기뻐하던 병사들이었다. 고향에 돌아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즐겁게 대화하곤 했다. 그런 그들은 다시 전쟁이 발발할까 싶어 불안해하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들을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오겠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병사들이 예를 갖춰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테시온을 대동한 채, 진영 중앙에 위치한 막사로 향했다.
반대쪽에서 우르시오와 야만족 지휘관 그리고 병사 두 명이 걸어왔다. 머릿수가 다르긴 했지만, 경계할 만한 상황인지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첫 협상 자리와 달리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 굳어진 얼굴로 서 있던 우르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믿었다! 카르한, 우리 배신.”
먼저 휴전 협정을 제안한 쪽이 공격을 가했으니, 화가 날 만했다. 카르한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야만족 언어를 최대한 섞어서 사과했다.
“우리 쪽 잘못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전부 제 책임입니다.”
카르한의 사과에 우르시오는 멈칫했다가 짧은 제국어로 항의했다.
“우리 부족 전사, 다쳤다!”
“다친 병사를 위해 보상하겠습니다. 그리고 범인이 잡히는 즉시 조사하고…….”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지휘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처분은 당신들께 맡기겠습니다.”
그제야 씩씩거리던 우르시오가 조용해졌다. 카르한이라면 자기 쪽 병사를 두둔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 정도가 카르한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만약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다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 블레어드가 바라는 일일 테고 말이다.
침묵이 막사 안을 맴돌았다. 계속 조용하던 야만족 지휘관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우르시오에게 뭐라고 말했다. 우르시오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던 카르한에게 말해주었다.
“우리 왕, 카르한, 만나길 원해.”
야만족 왕이 카르한을 찾는다는 말이었다.
***
카르한이 분쟁지로 떠나고, 일리아는 침실을 계속 서성였다. 야만족과 평화적으로 전쟁을 매듭지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는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온갖 걱정이 밀려와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신발이 닳을 정도로 방을 빙글빙글 돌던 일리아는 멈춰 섰다.
“……그만 생각하자.”
카르한이라면 분명 잘 해낼 것이다. 그저 그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프란체, 말렉. 나가자.”
문 밖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냉큼 일리아의 양옆에 섰다. 세 사람은 그 길로 곧장 저택을 나왔다. 아침에 카르한과 마을을 가볍게 둘러보긴 했지만, 이번엔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한적한 마을을 걷던 일리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뭔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일리아가 먼저 인사하자,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일리아의 외관이 워낙 눈에 띄는지라 다들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누구십니까?”
일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프란체가 척 하고 나서서 말했다.
“이분은 블로든 가문의 아가씨입니다.”
프란체의 말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블로든 가문?”
“소공자님의 연인!”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경계했냐는 듯 무척 호의적인 태도였다.
“감사합니다. 지금껏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귀하신 분께서 어찌 여기까지…….”
다들 일리아를 둘러싸고 감사 인사를 건네 왔다.
‘카르한이 나를 소개해줬구나.’
일리아는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저를 연인이라 소개했을 카르한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일리아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방긋 웃어주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뭘 만들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여인 하나가 방금까지 뜨고 있던 목도리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뜨신 거예요? 정말 예뻐요.”
일리아는 감탄하며 목도리를 살폈다. 흔히 볼 수 없는 섬세한 목도리였다. 싸구려 털실을 사용해서 촉감은 거칠거칠해 보였지만, 정교한 무늬는 아무나 따라할 수 없었다.
일리아가 칭찬하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만들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나무 조각을 깎아 만든 장식품, 끈을 엮어 만든 팔찌……. 하나하나가 예술품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자급자족하다 보니 한 가지 분야에 통달한 모양이었다.
‘손재주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괜찮은걸.’
수도에서도 이렇게 정교한 공예품은 흔히 볼 수 없었다. 재료를 좀 더 좋은 걸 쓴다면, 수요는 차고 넘칠 게 분명했다. 상품성을 알아본 일리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제안했다.
“제가 여러분의 작품을 전부 구입하고 싶어요.”
“예?”
다들 놀란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수도에 가져가서 판매하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을 저만 알기 아쉬워서 그래요.”
“…….”
“물론 자재 공급은 저희 쪽에서 할 거고요.”
일리아가 의견을 내놓자,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중 누군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런 게 정말 팔릴까요? 수도엔 더 좋은 것이 널려 있을 텐데…….”
“그럼 제가 쓰죠, 뭐.”
“이, 이걸 전부 다요?”
일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린 채 저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일리아는 수익 구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정좌해서 듣던 사람들은 공예품을 파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들뜨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 생산되지도 않는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농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저희는 좋습니다!”
모두의 동의에 일리아는 싱긋 웃어 보였다.
“믿고 거래해주셔서 감사해요. 첫 거래니까 일단…….”
일리아는 의자 하나 없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여기에 공방을 차려드리면 어떨까요?”
***
저녁 무렵, 카르한은 마을로 돌아왔다. 일리아는 지쳐 보이는 카르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먼저 해주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두 팔을 벌려 가볍게 안았다. 그의 몸이 무너지듯 일리아를 감싸왔다.
“블레어드가 이번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
일리아가 놀라서 굳어지자,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아직은 심증뿐이라,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쪽에서는 뭐래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주니 대강 납득한 눈치였습니다.”
카르한은 오랜 시간 동안 야만족 지휘관에게 해명했다. 오해는 풀렸지만, 병사들의 불안함을 단번에 잠재울 수는 없었다.
“휴전 협정은 유지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긴 한데……. 내일 저쪽 왕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일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뢰를 깨버린 건 우리 쪽이니, 직접 얼굴을 봐야 믿을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괜찮은 거예요?”
카르한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야만족 변경에 막사를 하나 지어, 그곳에서 왕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막사 앞에 양측 병사들을 대기시킬 예정이며, 주변이 탁 트여 있어 습격당할 위험은 없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심각한 얼굴로 듣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그건…….”
“만약 그쪽에서 안 된다고 하면 포기할 테니, 물어는 봐줘요.”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카르한을 보내고 홀로 불안에 떨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르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곧장 야만족 진영에 서신을 보냈다. 듣고 말하는 건 곧잘 하지만, 글자는 많이 알지 못했다. 겨우 뜻만 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늦은 밤 무렵 답신이 왔다. 알겠다는 말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서신을 확인한 일리아와 카르한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다음 날 점심때쯤, 일리아와 카르한은 함께 분쟁지로 향했다.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을 추려, 야만족 땅을 밟았다. 막사 앞에 도착하자, 대기해 있던 시종이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안쪽에 화려한 털옷을 입은 이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야만족 지휘관이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신료들이 도열한 상태였다. 왕의 왼편에 서 있던 우르시오가 카르한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오시게나.」
야만족 언어를 알아들은 카르한이 곧장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 에반테온이 아메르크의 왕을 뵙습니다.」
왕은 카르한이 아메르크어로 인사해오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은 미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오.」
제국은 아메르크인들을 야만족이라 불렀지만, 아메르크 쪽은 도리어 제국민을 미개인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일전에 휴전 협상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소.」
카르한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쪽에서 협정을 제안하고 깨뜨렸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왕이 턱을 치켜든 채 카르한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그 문제는 지휘관과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대답을 잘 해야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목숨을 다해 일리아를 지키겠지만, 마찰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카르한은 제 옆에 있는 일리아를 한 번 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와 눈을 맞춘 카르한이 다시 왕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겠습니다.」
부족한 단어는 우르시오의 도움을 받아,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의미 없는 전쟁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도 죽지 않고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았습니다.」
카르한의 새파란 눈동자가 왕을 응시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과거를 되풀이하게 될 겁니다.」
카르한은 대화가 무력보다 강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짓밟고 꺾으면서 평화를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야만족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잠시 침묵하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미 왕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고 온 듯했다. 그는 카르한에게 앉으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카르한은 어색하게 바닥에 앉았다. 야만족은 바닥에 앉는 문화가 정착된 것 같았다.
「사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대를 불렀소.」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왕을 쳐다보았다.
「이번 기회에 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우리가 모르는 것들도 많더군.」
카르한은 우르시오를 돌보는 동안, 제국의 문물을 가르쳐주었다. 왕족인 우르시오가 왕에게 그것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우리는 제국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교환하면 어떨까 싶소.」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왕은 아예 직설적으로 말했다.
「제국과 화친을 맺고 싶다는 거요.」
카르한의 눈이 커졌다. 화친은 국가 간의 문제였다. 카르한은 그저 공작령의 변경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었기에, 이쪽 소관은 아니었다.
「그대의 왕에게 잘 말해주시오.」
황실은 아메르크 왕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나, 일종의 기회였다. 지금껏 닫혀 있던 세계가 열릴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대가 아주 강하다던데.」
카르한은 우르시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떠들고 다닌 건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보여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시종이 굵은 쇠막대기를 가져왔다. 그러자 우르시오가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흡! 하고 기합을 주자, 팔뚝만 한 쇠막대기가 휘어졌다. 왕과 신료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우르시오는 새 막대기를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막대기 양쪽을 잡은 카르한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종이 접듯 쇠막대기가 반듯하게 접혔다.
「오오!!」
「대단해.」
왕과 신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답게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내 딸을 주고 싶을 정도로.」
왕의 말에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걸 본 일리아가 슬쩍 물었다.
“뭐라고 하신 거예요?”
“그게…….”
카르한이 어물거리자, 눈치 없는 우르시오가 대신 말해주었다.
“카르한, 공주님 남편 삼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일리아는 고개를 홱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일리아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던 카르한이 우르시오에게 말했다.
“저는 연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 남편 둘 가진다. 가질 수 있다?”
우르시오가 제국어로 말해주자, 일리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협상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난 괜찮아요.”
일리아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한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일리아의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깐 일리아의 눈을 마주한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카르한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이 사람뿐이니, 상처 주고 싶지 않습니다.」
막사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카르한을 바라보던 왕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별생각 없이 말한 것 같군.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우르시오는 묘한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우르시오가 입을 열었다.
“카르한, 고백했다.”
“우르시오.”
카르한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제발 입을 다물어달라는 의미였지만, 일리아는 이미 들어버린 후였다.
“무슨 고백이요?”
“당신, 카르한의 소중한 사람!”
카르한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부끄러운지 묵묵히 있던 카르한이 눈만 내리깔았다.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일리아는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잠시 후 바깥에 대기해 있던 시종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중요한 손님에게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며, 식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줄줄이 늘어진 술독을 보았다.
‘설마 저걸 다 마시려고……?’
왕이 잔을 들자, 모두가 잔을 치켜들었다. 꽃으로 담근 술인지 향이 좋았다. 카르한은 술을 홀짝였다가 생각보다 독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본 몇몇 신료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잔이 다시 채워지고 모두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강요하진 않았지만, 마시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 일리아가 카르한의 잔을 들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우르시오에게 말했다.
“앞으로 술은 저한테 주세요. 전부 마실 테니까.”
***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침실로 들어가자, 카르한이 물이 담긴 컵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일리아는 컵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시간 정도 대작하다 보니 평소보다 과음하긴 했다.
야만족들은 일리아를 보며 화끈하다며 무척 좋아했다. 술을 잘 마시면 존경하는 문화라도 있는지, 나중엔 다들 일리아만 바라봐서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일리아, 팔 들어주십시오.”
일리아는 카르한의 말대로 두 팔을 들었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얇은 옷 한 장만 남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주었다. 그가 마지막 단추를 채워주었을 때, 고개를 꾸벅꾸벅하던 일리아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있잖아요, 카르한. 전에 우리 술 마셨던 거…… 생각나요?”
일리아가 슬쩍 말을 꺼내자, 옷을 정리하던 카르한이 멈추었다.
“기억납니다.”
함께 술을 마셨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일리아가 어느 날을 이야기하는지 카르한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클리프의 전시회를 구경하러 갔던 날, 강이 보이는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다.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카르한도 그때는 제법 취했다.
“그때 당신 귀여웠는데.”
일리아가 중얼거리자, 카르한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어떤 칭찬보다 낯간지러웠다.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그래요? 왜 그렇지?”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르한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인상도 사납고…… 덩치도 크고…….”
당황한 카르한이 더듬더듬 말하자, 일리아가 씩 웃었다.
“난 좋은데요.”
곰인형을 안듯 일리아가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적극적인 일리아의 모습에 카르한은 숨만 들이마셨다.
일리아에게 안겨 있던 카르한은 팔을 들어 밝은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쓸어주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따뜻했다.
한참 그렇게 있던 카르한은 겨우 일리아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러다가 앉아서 잠들 판이었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일리아는 제대로 재우고 싶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불을 꺼내왔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리아는 의자에 앉혀둔 곰인형을 안고 있었다.
“…….”
카르한은 그쪽으로 다가가, 일리아가 안고 있던 곰인형을 조심스레 빼냈다.
“내 인형인데.”
일리아가 웅얼거리자, 카르한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곰인형을 대신하여 일리아의 품에 안겼다. 카르한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인형 말고…… 저로 하십시오.”
“뭔가 크기가 다른 것 같은데. 이것도 좋네요.”
등과 어깨를 더듬더듬하던 일리아는 이내 납득했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눕게 되자, 코가 닿을 듯 가까웠다. 일리아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눈에 담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아, 맞다.”
침대에 누운 일리아가 몸을 반쯤 일으켜, 카르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카르한.”
헤실헤실 웃는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숨을 삼켰다. 카르한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일리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제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일리아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었다. 일리아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춘 카르한이 속삭였다.
“좋은 꿈 꾸십시오.”
훅, 방 안을 밝히던 램프가 꺼졌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이 밤손님처럼 창가를 넘어오는 새벽쯤. 일리아는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취기로 그렇게 들뜨기는 오랜만이었다. 일리아는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일리아는 머리맡에 떠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방 안을 채웠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어느새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요한 공간에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듯하게 누워있던 카르한은 이불을 그러쥔 채 앓는 것처럼 흐느끼는 소리만 내뱉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지도 몰랐다.
“카르한.”
조용히 불러보았으나,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리아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좀 더 크게 소리쳤다.
“카르한!”
카르한이 번쩍 눈을 떴다. 천장을 응시한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카르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형님……, 제발…….”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카르한이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날 봐요, 카르한!”
고장 난 것처럼 그의 몸이 멈추었다. 일리아는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내려,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이 두 팔에 가득 들어왔다. 일리아는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고요한 공간에 토닥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잔뜩 굳어져 있던 카르한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의 젖은 이마가 일리아의 어깨에 닿았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고, 일리아는 한 팔을 거두어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괜찮아요.”
일리아의 몸에 기대어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눈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한참 정적이 이어지다가 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악몽으로 꾸었습니다. 형님, 아니 블레어드와 연관된…….”
카르한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 카르한은 블레어드 때문에 인적이 드문 창고에 갇힌 적이 있었다. 얌전히 기다리면 놀아주겠다는 블레어드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돌아오지 않았고, 창고에서 밤을 꼬박 새우게 되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고용인이 열어주었지만, 카르한은 그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둡고 조용한 공간은 거부감이 듭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
“계속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다가 수도로 돌아오니 적막감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오르골을 사러 간 거였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오르골을 사러 간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오르골 가게에서 일리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카르한은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무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저를 도와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다시 일리아와 얽히게 되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카르한을 이루고 있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바뀌고 싶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지금처럼 악몽을 꾸어도 금방 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일리아 덕분이었다. 늦든 빠르든…… 결국 일리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일리아를 응시했다. 어두컴컴한 방에는 달빛이 전부였으나, 분노로 가라앉은 눈동자는 선명히 보였다. 저를 대신해서 화내주는 일리아를 보며 카르한은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카르한은 정말 괜찮았다. 더 이상 누구도 카르한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이제 그를 고통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리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