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20/28)

20장

***

일리아는 카르한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비올레가 붙여준 수족들은 공작령을 밟기 전에 돌아왔다. 공작의 허가 없이 타 가문의 기사가 영지에 들어섰다간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로든 측에서 사병을 보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신 일리아는 블로든과 어떠한 관계도 없는 용병들을 고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나 병력이 모자라면 그들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유통망 설립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여러 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지방을 담당할 상단을 물색 중이었다.

그 외에도 일리아는 자선 사업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경매를 열 적당한 장소를 찾던 끝에, 결국 오페라 극장을 대관하기로 했다.

이번 자선 경매는 크고 화려하게 열 생각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매년 열리는 행사로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다음 자선 사업에 도움을 줄 후원자들을 모집할 계획이었다. 일리아는 잠자는 시간도 줄인 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자선 경매가 있는 날이었다. 일리아는 이른 오후쯤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볼일을 본 후 산책 삼아 걸어가는데, 앞서 걷는 귀부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요즘 자선 경매로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저는 델로타 영애께서 추천해주셔서 한번 구경하러 왔어요.”

“듣기로는 엄청난 규모로 진행한다던데……, 솔직히 자선 경매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어요.”

“맞아요. 아무리 블로든이 주관한다고 해도 말이에요.”

미술품이나 보석 경매보다는 규모가 작을 거라며 그녀들은 입 모아 말했다.

“그래서 편하게 생각하고 왔는데…….”

하하호호 웃던 귀부인들은 잠시 멈춰 섰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페라 극장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입장하려고 줄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장해서, 귀부인들의 얼굴에도 덩달아 긴장이 서렸다. 뒤늦게 도착한 일리아 또한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놀라고 말았다.

“일리아 블로든!”

저 멀리서 스텔라가 뛰어와 일리아 앞에 멈춰 섰다. 인사도 집어치운 그녀가 다짜고짜 물어왔다.

“도대체 경매에 뭘 출품한 거야?”

별로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주위 사람들한테 받은 걸 경매에 올렸을 뿐이다. 바네사의 그림이랑 황후의 브로치, 카르한의 장갑, 클리프가 외국에서 사온 조각상, 비올레의 검, 헤인리가 쓰던 책…….

“목록이 뜨고 나서, 다른 경매장에서 오늘 경매 취소한다는 공문까지 올라왔다고.”

“…….”

일리아가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면, 주위 사람들이 너무 유명 인사라는 것이었다. 결국 일리아는 번호표까지 만들어서 사람들을 입장시켰다.

다행히 수도에서 가장 큰 오페라 극장을 대관한 덕분에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자리가 부족할까 싶어서 의자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입장한 사람들은 내부를 둘러보고 감탄했다. 기존 극장과 달리 안은 환했다. 밝은 색 커튼을 달고, 생화와 크리스털로 장식해두어 눈이 즐거웠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간단한 연주회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말이 간단한 연주회지, 수도 최고 악단들의 공연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일리아가 무대에 오르자, 시끌시끌하던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일리아는 차분히 자신을 소개한 후 설명회를 시작했다.

“오늘 경매 수익은 빈민 구제와 보육원에 쓰일 예정입니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은 대대적인 자선 사업을 펼칠 예정으로, 함께할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발언을 이어나갔다.

“후원자들은 전부 명단에 실릴 것이며, 일정 금액 이상 기부하신 분들은 따로 신문에 게재할 것입니다.”

일리아의 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기부자 명단에 오르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공개적으로 돈이 많다는 걸 과시하는 한편, 좋은 일을 했다고 찬사도 받을 것이다.

사교계는 허영심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세계였다. 지금까지는 누가 더 비싼 옷을 입고 귀한 보석을 찼는지 자랑했지만, 이제는 누가 더 많이 기부했는지 경쟁하게 될 것이다. 발언을 끝낸 일리아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빈 객석을 찾아 앉았다.

“한번 후원해볼까?”

“얼마나 가려나. 자선 단체들은 대부분 1, 2년 하고 그만두던데.”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칭찬만 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차차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일리아의 목표였다.

“그럼 지금부터 자선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느슨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도 자세를 바로 한 채 눈을 빛냈다. 다들 노리고 온 물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첫 경매 물품은 스텔라가 내놓은 로맨스 소설책이었다. 유명한 작가에게 직접 원고를 의뢰해서 만든 특별한 책이었다.

‘그 정도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줄 몰랐지.’

스텔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스텔라는 로맨스 소설 애독자로 지금까지 취미를 숨겨왔다. 자신의 위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놓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로맨스 소설 독서회에 다닌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이 책은 스텔라 델로타 님께서 기증하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팻말을 들었다. 스텔라의 추종자들도 있었고, 정말로 책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도 보였다.

입찰 금액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낙찰가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스텔라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았다. 옆모습만 봐도 무척 뿌듯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로 자잘한 물건들이 경매에 올라갔다. 전부 좋은 가격에 낙찰되었고, 드디어 일리아가 직접 받아온 물건들이 경매에 올라갔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신예 화가인 바네사 님의 습작 그림입니다!!”

“와아악!!”

그때부터 아비규환이었다. 다들 팻말을 흔들고 소리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다. 관심 없던 사람들도 저건 사야 하나? 싶어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가장 앞자리에서 팻말을 치켜드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을 발견했다. 다들 벌떡 일어나서 팻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바네사의 그림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더니, 참지 못하고 경매에 참가한 모양이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금액에 사회자가 당황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경매에서도 손꼽히는 금액이었다.

“네! 550만 크로엘에 낙찰되었습니다!”

엄청난 금액에 객석이 술렁였다. 감히 그 이상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팻말을 내리자, 다음 물건이 경매에 올라갔다.

어떤 물건이 올라오든 경쟁이 치열했다. 클리프의 조각상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중 하나가 사들였고, 비올레의 검은 유명한 사업가의 손에 들어갔다.

특히 헤인리가 아카데미 시절에 썼던 책은 열성 학부모끼리 경쟁이 붙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었고, 목표 금액은 달성된 지 한참 지난 후였다.

마침내, 사회자가 유리 상자에 든 물건을 단상에 올려두었다. 유리 상자 안에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 들어 있었다.

“이 장갑은 아주 특별합니다. 이번 황실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신 카르한 에반테온 님께서 기증해주셨습니다!”

카르한이 떠나기 전에 경매에 내놓고 싶다고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옷도 왕창 넘겨주었는데, 유행이 지났으니 시설에 기부해달라고 말했기에 경매에 올리지 않았다.

옷이 든 가방은 아직도 손대지 못한 상태였다. 카르한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때 열어볼 생각이었다.

“검술 대회 때 꼈던 장갑이래.”

“가지고 싶어.”

거의 대부분의 객석에서 팻말이 올라갔다. 카르한의 인기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카르한이 직접 이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첫 만남 때, 카르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말했었다. 이제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졌다고, 일리아는 알려주고 싶었다.

입찰 금액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감당할 수 없는 금액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몇몇 사람들만 남아서 경쟁을 이어나갔다. 벌써 건물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큼 올라버린 후였다.

“400만 크로엘! 더 이상 안 계십니까?”

400만을 부른 사람은 어느 노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낙찰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일리아가 팻말을 들고 말했다.

“700만 크로엘.”

헉,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최종 금액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금액에 사람들이 기함했다. 사회자마저 놀라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700만 크로엘 나왔습니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렸다.

“블로든 영애가 왜?”

“이거 블로든 가문에서 주최하는 자선 경매 아냐?”

일리아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저도 가지고 싶어서요.”

일리아는 반드시 낙찰가대로 돈을 기부할 것이며, 내역까지 공개하겠다고 못 박아두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전부 조용해졌다.

“더 없으십니까? 그럼 700만 크로엘에 낙찰되었습니다!”

역대 최고 금액에 사람들은 놀라서 눈만 깜빡였다. 정원 딸린 성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카르한의 물건을 손에 넣게 된 일리아는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까 고민했지만, 역시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후원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따로 남아주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설명회를 한 후에 후원자들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이 부분은 클리프가 담당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기부해온 클리프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앉아 있던 사람 중에 반절 정도가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출발이 아주 순조로웠다. 그때 누군가 일리아를 불렀다.

“블로든 영애.”

일리아는 제 앞으로 걸어온 블레어드를 보았다. 블레어드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후원 건으로 면담을 요청합니다.”

일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르한이 떠나면 분명 저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자선 경매에 왔을 줄이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볼 생각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일리아는 극장의 뒤편으로 그를 안내했다. 배우 대기실로 쓰이는 공간에 일리아와 블레어드가 들어섰다. 혹시 몰라, 문 밖에 프란체와 말렉을 대기시켰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목적이신가요?”

후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말이 잘 통해서 좋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첫 만남 후로 계속 지켜봐왔습니다. 탁월한 사업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블레어드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신분에 비해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은근슬쩍 집어넣었다.

“저는 영애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드디어 본론을 꺼낸 블레어드가 뱀처럼 속삭였다.

“저를 택하신다면, 당신을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

얼마 전, 레베타는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리아를 찾아갔다. 카르한과 약혼을 추진시키고 부족한 합의금을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레베타는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일리아 블로든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온종일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레베타는 기어코 돈을 마련해 백작에게 합의금을 전달했다.

그 많은 돈을 구해왔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블레어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레베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싶었다. 블레어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내년 봄, 모든 원로들이 모이는 총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가리는 것으로.

내년 봄에 있을 총회의를 위해, 원로들을 확실하게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블레어드는 저를 지지하는 원로들을 찾아갔다. 취향에 맞는 선물을 주고,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확실히 챙겨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중 한 명은 공작령에 있었는데, 거리가 멀었기에 서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정도 성의면 충분할 터였다. 이미 과반수의 원로들이 블레어드를 지지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시간이 남은 김에 중립 측 원로들까지 끌어들여야 했다.

레베타는 끝까지 저를 지지해줄 테지만, 공작은……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꿀 수 있어서 불안했다.

블레어드는 버릇처럼 선반 위를 더듬거리다가 멈칫했다. 약을 끊은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조금만 초조해지면 자연스럽게 약을 찾게 되었다.

“젠장.”

블레어드는 아직도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어떠한 흠집도 만들어선 안 됐기에 꾸역꾸역 참았다.

원로들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백작 아들을 죽인 거라 둘러댔다. 그런데 약에 손댔다는 것을 들키면 문제가 달라진다. 보수적인 원로들은 이것을 흠으로 잡을 터였다.

“그냥 죽여 버릴까.”

총회의 전까지 카르한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마침 분쟁 지역으로 보내버렸으니, 핑계 댈 것도 충분했다. 블레어드는 손가락으로 탁자만 톡톡 두드렸다. 거기까지 생각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카르한의 뒤에는 블로든 가문이 있었다. 카르한이 수도에서 입지를 다지고,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것도 블로든 가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앞으로도 블로든이 가장 큰 변수가 될 터였다.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카르한이 믿고 있는 구석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서 카르한을 선택한 거겠지.”

일리아 블로든이 카르한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올해 처음 만났다고 했고, 그때의 카르한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카르한이 공작가의 후계자이니 신분 상승을 노리고 교제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리아는 블레어드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터였다.

“신분이 아쉽긴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일리아는 백작 가문 영애였다. 거기다 공직과 거리가 먼 가문이라, 황실에 줄이 없었다. 뒤를 받쳐줄 세력이 없으니 혼사로 정치적인 이득은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고위 귀족도 무시할 수 없는 재력을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때마침 블레어드는 일리아가 자선 경매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곧장 경매에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블레어드는 눈앞에 앉은 일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택하신다면, 당신을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블레어드의 제안에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카르한이 지금 후계자라 하나, 원래는 제 자리였습니다.”

금방 되찾아올 거라며 블레어드가 자신했다.

“영애께서 하시는 사업도 제가 뒤를 봐줄 수 있습니다.”

에반테온 가문은 대대로 국무회의에서 발언권이 강했다. 공신 가문에 공작이라는 지위가 상당한 힘을 실어주어, 법안을 심의할 때도 유리한 쪽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낫지요.”

블레어드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며 자신 있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가 블레어드에게 향했다. 내내 침묵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는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블레어드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블레어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당신의 부인은 되고 싶진 않아요.”

거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카르한이 공작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으나 눈동자엔 불쾌함이 서렸다.

“그 애의 무엇을 믿는 겁니까?”

“진실성이요. 적어도 당신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죠.”

“…….”

“그리고 이렇게 멋없는 약혼 제안은 질색이라서요.”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신분 상승 시켜준다는 약조를 하면 조금이라도 흔들릴 줄 알았건만.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공직자라 들었는데.”

블레어드가 다른 화제를 꺼내자, 일리아의 속눈썹이 떨렸다.

“앞으로 공직 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르겠군요.”

네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가족이 힘들어질 거라는 협박은 언제나 잘 먹혀들었다. 블레어드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일리아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이런 더러운 수법밖에 못 쓰는 사람이라니. 저열하기 짝이 없네요.”

일리아는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소공자가 반드시 공작이 되어야겠어요.”

일리아가 흔들리지 않고 받아쳐오자, 그가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블레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리아의 앞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그리고 후원하고 싶다는 말은 진짜입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일리아 블로든부터 치워야 했다.

***

레베타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소공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걸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 번쯤은 현장에서 잡힐 만하잖아요.

-소공자가 스스로 집을 떠날 때까지 누군가가 죄를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죠.

일리아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레베타는 발작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어.”

한 번쯤 의심은 했지만, 내내 묻어두었던 문제였다. 레베타는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지금까지 전부 카르한 탓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만약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후회하지 않아.”

스스로를 세뇌하듯 중얼거려 보지만, 자꾸 카르한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여태 카르한은 단 한 번도 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분쟁 지역으로 떠나기 전, 공작저를 찾아온 카르한은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레베타를 마주해왔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선을 긋듯, 카르한은 레베타를 공작부인이라 불렀다. 제법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카르한에게서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레베타는 이미 블레어드를 선택했고, 카르한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었다.

-난 그 애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결국 레베타는 일리아에게 했던 말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후계 문제로 다투는 두 아들을 남 일처럼 방관하는 공작을 대신하여, 그녀가 뭐라도 해야 했다.

레베타는 백작에게 줄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갔다. 은행에서 그렇게 큰 돈을 빌리려면 공작저라도 담보로 걸어야 했고, 그럼 소문이 나기 십상이었다. 블레어드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공작가 평판이 나빠지면 곤란해진다.

레베타는 일단 사채를 끌어 쓴 후에 스텔라를 찾아가 약혼을 미끼로 지참금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틀 전, 레베타는 빌린 돈으로 백작에게 합의금을 건넸다.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을 끝낸 기분이었다.

“아…….”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을 때, 레베타는 입술을 씹는 것을 멈추었다. 입술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걸음소리에 레베타가 문 쪽을 응시했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에반테온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 언성을 높이는 일 없던 공작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미쳤소? 사채를 쓰다니!!”

레베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수행원도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은행도 아니고,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공작은 화를 내며 레베타를 몰아붙였다. 잘게 어깨를 떨던 레베타는 순간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까지 손 놓고 방관해온 사람이 누군데!!”

레베타가 마주 소리 지르자, 공작이 멈칫했다. 그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공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낳기만 하면 다인 줄 알아요? 여태 방관한 주제에!”

지금까지 응어리져있던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편으로서는 소임을 다하라 하지 않을 테니,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세요.”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그는 누구보다 최악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 때문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확실하게 블레어드를 후계자로 밀어줄 생각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백작과 합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 주제에 원로들에게 휘둘려서 카르한을 수도로 불러들이는 악수를 두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달려가는데, 정작 공작은 아직도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관망 중이었다.

공작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레베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누구를 후계자로 밀어줄 건지, 확실하게 정하세요.”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못 정하겠다면, 제가 무엇을 하든 건드리지 말아요.”

***

카르한은 두 시간 만에 서류 분류 작업을 끝냈다. 문서에 따로 주석까지 달아주자, 루벤투스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모시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카르한은 뒷목을 쓸었다. 딱히 칭찬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쑥스러워진 카르한은 고개만 가만히 내저었다.

카르한과 테시온 그리고 루벤투스는 응접실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이 마을에서 자신의 소문과 평판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곧 소공자께서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루벤투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아차 싶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붙잡아두어 죄송합니다. 이만 주무십시오.”

카르한과 테시온은 응접실을 빠져나와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 전, 테시온이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 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테시온을 바라보았다. 테시온은 가볍게 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무엇을 맡겨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카르한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온 카르한은 침대에 앉아, 곰인형을 제 옆에 두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지…….”

마을에 도착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 무너져가는 집, 생기 없던 사람들. 심지어 카르한이 머무르는 저택도 낡고 허름했다.

일리아가 준 곰인형을 쓰다듬던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오기 전, 글로시아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중립에 선 원로들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저와 성향이 비슷한 자들이고…… 그들도 소공자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더군요.

중립 쪽 원로들은 글로시아를 포함해 3명이었다. 13명의 원로 중 적은 숫자였지만,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카르한은 빠르게 분쟁 지역 문제를 정리하고 수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전까지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들과 접촉할 생각이었다.

몸을 일으킨 카르한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책상 앞에 앉았다. 잔뜩 챙겨온 편지지를 꺼낸 후 펜을 쥐었다. 빈 종이를 한참 바라보던 카르한은 천천히 펜을 놀렸다.

[이곳 사람들은 제 생각보다 좋은 분들 같습니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아, 가져온 외투로 충분할 듯합니다.]

일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쓰던 카르한은 주머니에서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아까 마을을 돌다가 주운 것으로,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마을에 이런 돌멩이가 많습니다. 제가 본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 같이 보내드립니다.]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적고 한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두 장을 꽉 채웠음에도 왠지 부족했다.

“역시 그림이라도 배워올 걸 그랬나.”

오늘 본 풍경을 그려서 보여주고 싶었다. 카르한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이렇게나 그림에 재능이 없을 줄이야…….

잠깐 충격 받은 카르한은 편지지를 곱게 접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아가 제게 준 곰인형을 옆자리에 눕히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내일을 위해 이만 자야 했다.

***

이른 아침, 눈이 번쩍 뜨였다. 카르한은 간단하게 씻은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제보다 가짓수가 많아진 음식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테시온과 루벤투스는 자리에 없었다. 아무래도 일찍 나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홀로 식사를 한 카르한은 마을을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어제처럼 자신이 도와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저택을 나섰을 때, 마을 사람들이 카르한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분이 동료를 백 명 이상 구했다잖아.”

“이번 황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셨다던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다들 호의에 가득 찬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루아침에 달라진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카르한은 얼떨떨해졌다. 루벤투스의 말로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아직까지 나쁘다고 하던데.

그때였다. 동네 꼬마들이 굵은 나뭇가지를 들고 우르르 뛰어갔다.

“내가 소공자님 할래!”

“나도, 나도!”

역할 놀이에 심취한 아이들이 너도나도 카르한이 되겠다고 난리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소문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제가 다리를 다쳐서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을 때! 소공자께서 찾아와주신 겁니다!”

“오오……!”

카르한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영웅담을 펼치는 테시온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기한테 맡기라더니…… 이걸 말한 건가. 그리고 옆에 있던 루벤투스도 열심히 미담을 쏟아냈다.

“소공자께서 겨울을 날 식량도 나눠주셨답니다.”

“그런 고마운 일이.”

조금 있으면 테시온과 루벤투스는 찬양가라도 부를 기세였다. 귓불이 붉어지다 못해 얼굴까지 뜨끈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진 카르한이 나직하게 테시온을 불렀다.

“테시온.”

그러자 모두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카르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그만해라.”

루벤투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싫어하시는 걸까요? 제가 너무 지나치게…….”

“부끄러워하시는 겁니다.”

카르한의 표정을 전보다 더 잘 읽게 된 테시온이 루벤투스를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어제 다 돌지 못한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루벤투스가 앞장서고, 카르한과 테시온이 뒤따랐다.

“다들 카르한 님을 좋게 보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테시온이 소곤거렸다. 카르한은 조용히 테시온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테시온 덕분에 사람들의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진 것 같았다.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두 남자가 보였다. 흙먼지로 뒤덮인 갑옷을 본 카르한이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얹었다.

“저희 쪽 병사들입니다.”

루벤투스의 말에 카르한은 검에서 손을 떼어냈다. 루벤투스는 곧바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주저앉은 병사들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세 사람은 곧장 병사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음식을 차려주니, 둘 다 접시에 코를 박을 기세로 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굶은 듯했다.

“아니, 어쩌다 이 마을까지 오게 된 겁니까?”

가끔씩 부상병들이 마차에 실려 오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부상병도 아니었고, 전투지에서 직접 걸어서 온 듯했다. 루벤투스의 물음에 병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시, 신고하지 말아주십시오.”

탈영병인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자세하게 듣기 위해 물어보았다.

“전투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머뭇거리던 병사 하나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요즘엔 감자 한 알로 끼니를 때울 때가 잦아져서, 이러다 싸우다 죽는 게 아니라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빠져나왔습니다.”

“새로운 지휘관이 오고 나서부터 보급품이 반절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다른 병사의 말에 카르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카르한은 오랫동안 전쟁터를 돌며, 수많은 상관을 만났다. 가장 최악이었던 상관은 병사들에게 돌아갈 보급품을 빼돌리는 이였다.

상관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동료가 굶어 죽었다. 약이 없어 상처가 곪아,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는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나약했던 카르한은 감히 상관에게 맞서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울분만 삼켰다. 그것이 오랫동안 후회로 남아 있었다.

“소공자님?”

루벤투스의 부름에 병사들이 숨을 삼켰다. 에반테온 영지인 이곳에서 소공자라 불릴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두 병사는 사색이 되어 덜덜 떨었다. 그러나 카르한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소공자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쟁터로 끌려가면 지휘관에게 처형당할 거라고 그들은 울면서 애원했다.

“전투지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카르한은 병사들에게 안심하라 말한 후 루벤투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이 두 사람을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루벤투스에게 병사들을 맡기고 테시온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분쟁지로 떠난다.”

“준비하겠습니다.”

테시온은 군소리 없이 곧장 침실로 올라갔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루벤투스는 무척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카르한 또한 침실로 올라가 짐을 꾸렸다. 곰인형을 가지고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역시 두고 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혹시 실수로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무척 슬플 것 같았다.

가방 하나를 짊어진 카르한은 현관에 준비된 말에 올라탔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나란히 말을 몰아 전투지로 향했다. 반나절 정도 달렸을 때, 깃발과 막사가 보였다. 카르한이 부대 반경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소속을 밝혀라.”

“카르한 에반테온이다.”

카르한의 이름을 들은 병사들이 곧바로 창을 치웠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병사 하나가 카르한을 안내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자, 막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낡고 해져서 몇 번이나 천을 덧댄 막사와 식사를 준비하러 나온 병사들이 보였다.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마르고 앙상한 이들이 유독 많았다.

어느 화려한 막사 앞에 멈춰 선 병사가 안으로 안내했다.

“일찍 오셨군요.”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풍채 좋은 남자가 카르한을 반겨주었다. 제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것이, 전투지에서 입을 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카르한은 유독 호화로워 보이는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그득하게 쌓인 상자는 그가 사리사욕을 얼마나 채워왔는지 보여주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르한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에반테온 공작 휘하의 기사였는데, 이곳에 와서 지휘관이 되었다고 한다. 카르한이 왔으니, 지휘관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카르한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말했다.

“바로 지휘관 자리를 위임 받고 싶은데.”

남자가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소공자께서는 수도에 있다 오셔서 이곳 실정을 잘 모르실 테니, 당분간은 지금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괜히 병사들의 위계질서가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남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지휘관 자리를 바로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말투에서 은근히 카르한을 깔보며 무시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에서 지내온 이가 뭘 알겠냐는 식이었다.

“모쪼록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경험은 제가 더 많으니 앞으로 차근차근 알려드리면서…….”

“그래서?”

남자의 말을 잘라낸 카르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 지휘관은 나다.”

순식간에 뽑혀 나온 검이 남자의 목을 겨누었다. 굳어진 남자를 보며 카르한이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할 시 즉결처형 하겠다.”

***

자선 경매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경매로 거둔 수익금은 황실에서 배정하는 1년 치 빈민 구제금보다 많았다. 경매에 내놓은 매물들이 상상 이상으로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후원자 모집도 성공적이었다. 귀족뿐만 아니라, 돈 좀 있다 하는 평민들도 어떻게 후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일리아는 모인 후원금으로 빈민 구제 사업을 펼쳤다. 특히 프란체와 바네사의 도움이 컸다. 바네사는 자신이 살던 빈민가 초입에 벽화를 그려주기로 약속했다. 빈민가의 환경과 분위기를 바꾸는 첫걸음이 될 터였다.

일리아는 빈민가 거리를 깨끗하게 만든 후 다 허물어져가는 집들을 보수해주었다. 그런 후에 임시 학교를 지어,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었다. 처음에는 낯설어 했지만, 학교에 오면 식료품을 주는 것으로 출석률을 높였다.

직장이 없는 이들에게는 취업을 알선해주었다.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수업을 열어주고, 마침 일손이 부족한 사업에 투입시켰다.

그들은 블로든사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임금이 높을 뿐만 아니라 성과급 제도를 도입해서 그런지 게으름 피우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고 나서도 돈이 많이 남아, 보육원에 물품을 기부했다. 사비로 인형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니, 무척 좋아해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단 하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정말로 후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참 열심히 돌아다니네.”

블레어드의 근황을 보고 받은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교계부터 소모임까지 안 끼는 곳이 없었다. 대외적인 평판을 관리하는 건지, 자선 사업과 후원 행사도 열심히 나가고 있었다. 저와 사이가 틀어졌음에도 끝까지 후원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도 그 때문일 터였다.

일리아는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가족들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들 바쁜 탓에 함께 점심을 먹는 건 정말 간만이었다.

만찬장으로 가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리아가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한창 식사하던 중, 클리프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유독 샐러드가 맛있네요. 소공자가 이걸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자 비올레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 채소가 부족하다던데, 고기만 먹고 있는 건 아닐지.”

“역시 짐을 너무 적게 꾸려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인리마저 후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대화 주제는 카르한으로 넘어왔다. 클리프가 카르한과 함께했던 추억을 꺼내자, 식사는 뒷전이 되었다. 카르한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나오고, 비올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소공자랑 호숫가를 걷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소공자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다더구나.”

포크로 고기를 찍어 누르던 일리아의 손이 멈칫했다.

“신기한 우연이지 않니?”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카르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해준 적도 없으면서 자기가 은인이라 사기 친 리하트와 참 비교되었다.

“아가씨.”

그때 고용인 한 명이 만찬장으로 들어오더니, 일리아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소공자한테서 온 거니?”

가족들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서 열어보자며 재촉했다. 일리아는 봉투를 열어 두툼한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낭독회가 시작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제 생각보다 좋은 분들 같습니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아, 가져온 외투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일리아는 낭랑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순무는 창가에 두고 키우고 있는데, 꽃이 피었습니다.”

클리프가 오, 하고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저는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또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일리아의 낭독이 끝났을 때,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추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일리아는 귓불을 붉히며 편지지를 곱게 접었다. 뒷부분은 일부러 읽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봉투만 만지작거리던 일리아는 안에 종이 한 장이 더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이를 펼친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일리아가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가족들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린 것 같은데…….”

“개성이 넘치는구나.”

“길쭉한 건…… 나무인가?”

뭔가 뭉텅뭉텅 그려진 게 마을 같기도 했다. 다들 퀴즈 정답 맞히듯 그림을 분석하고 있을 때, 고용인이 편지와 함께 왔다며 돌멩이 하나를 전달해주었다.

‘풍경의 일부를 보냈다더니, 이거구나.’

일리아는 돌멩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특이한 무늬가 들어간 돌멩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돌멩이였는데, 광물에 가까워 보였다.

“평범한 돌멩이 같지 않은데.”

일리아의 한마디에 다들 귀가 쫑긋해졌다. 그들은 일리아의 재물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한번 조사해보는 건 어떠니?”

“알고 보면 귀한 광물일지도 모르지.”

감정을 받아보자는 비올레의 제안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광물에 대해 잘 아는 업자를 물색해 돌멩이를 감정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답변서가 왔다.

[몇몇 광산에서 극소량만 나오는 희귀 원석입니다. 염료에 쓰이는 광물로, 값어치는 금보다 비싸며…….]

결과는 대박이었다.

***

카르한은 병사들에게 지휘관을 묶어서 구금하라고 명령 내렸다. 그리고 반강제로 지휘관 자리를 위임 받은 후, 전 지휘관이 된 남자를 군법에 따라 처벌했다.

그가 보급품을 빼돌렸다는 명백한 증거와 증인들이 있었다. 좀 더 깊숙이 파고드니, 그에게 뇌물을 바친 놈들이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뇌물 바친 놈들까지 줄줄이 묶어서 군법으로 처리한 후, 카르한은 대대적으로 군을 개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루아침에 지휘관부터 시작해 많은 이들이 물갈이되자,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도 카르한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 다들 알아서 복종했다. 덕분에 새로 개편한 체제에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변화를 지켜보던 카르한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카르한은 다른 병사들처럼 복종하고 순응하는 데 익숙했다. 그런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바꾸려 하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이전 지휘관에게 반강제로 자리를 위임 받은 것도 그러했다. 예전이었다면 항의할 생각도 못 하고 수긍했을 터였다.

카르한은 과거와 달라진 자신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과거를 부정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그때보다 좀 더 옳은 선택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지금쯤 잘 가고 있겠지.”

카르한은 이틀 전, 일리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투리 시간에 열심히 연습한 그림도 한 장 넣었다. 테시온이 이 정도면 잘 그린 거라 말해, 용기를 내어 동봉한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은 막사를 나와, 부대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병사들은 줄을 서서 배식 받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카르한의 표정이 흐려졌다. 분위기는 아직도 어수선했고, 병력은 미미했다. 다들 오랜 전쟁에 지친 데다가 전투에서 연패한 탓에 아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이전 지휘관이 보급품까지 빼돌렸으니…….

카르한은 아직까지 전투를 치른 적이 없어서, 야만족의 병력을 알지 못했다. 참모에게 전해 듣기로는 이쪽 병력의 두 배 이상은 되는 모양이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작전을 잘 짠다 해도, 병력이 많이 차이 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다시 막사로 들어가려던 그때, 저 멀리서부터 흙먼지가 일어났다. 말발굽 소리에 식사하던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카르한 또한 얼굴이 굳어진 채 칼집에 손을 얹었다.

혹시 습격인가. 카르한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테시온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원군이 온 모양입니다!”

테시온이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미리 연락을 돌렸는데, 정말 와줄 줄은…….”

카르한은 가만히 그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윽고 카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묘하게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과거에 함께 전쟁터를 굴렀던 동료들이었다. 부대 입구에 도착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자님.”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그중에는 카르한이 목숨을 구해준 이도 있었다.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이들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도로 귀환한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으니 말이다.

카르한과 지원군이 인사를 나누는 그때, 저 멀리서 또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왔다.

“저들도 테시온 네가 불렀나?”

“아니오……?”

이번에는 테시온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르한은 다시 검집에 손을 얹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데, 선두에서 달리던 남자가 말에서 내렸다. 남자는 무기를 바닥에 내려둔 후에 입을 열었다.

“저희는 소공자를 도우러 온 용병단입니다.”

용병? 뜻밖의 정체에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일리아 블로든 님께서 저희를 고용하셨습니다.”

***

일리아는 손수건 위에 놓인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전문가의 답변서를 통해, 이 돌멩이가 금보다 비싼 광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를 들은 가족들은 역시 무서운 재물운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게 널려 있다고?”

카르한의 말로는 이런 돌멩이가 무수히 많다 했다. 광산에서 나오는 희귀한 광물이 길바닥에 굴러다닌다니. 그쯤 되면 다들 알아봐야 정상이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게 뭔지 알지도 못했다.

보석으로 가공하는 게 아니라, 고급 안료를 제작하는 데 쓰였기에 전문가들이나 아는 광물이었다. 원래도 수량이 극히 적어서 부르는 것이 값이라 했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공작령에서 주운 물건이니, 에반테온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사람을 보내 마을을 헤집으려 들 게 분명했다. 일단 어떻게 할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일리아는 결론 내렸다.

“바네사가 좋아하겠네.”

바네사는 가난했던 과거 때문인지, 돈을 많이 벌고 나서도 안료를 무척 아껴서 사용했다. 일리아가 지원해준다고 해도 습관이 고쳐지질 않았다. 나중에 원석이 많이 풀리면 안료 가격도 떨어질 테니, 바네사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일리아는 반질반질한 돌멩이를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휴식 시간이었다. 버릇처럼 창밖을 내다본 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카르한이 하던 일도 집어던지고 뛰어왔을 텐데.

“아가씨, 스텔라 델로타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고용인의 목소리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텔라?”

오늘 방문한다는 말이 없었는데. 며칠 전에 새로운 꽃차 상품을 출시한 것 때문에 찾아왔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스텔라가 벌떡 일어났다.

“대박이야!!”

대뜸 소리치는 스텔라의 모습에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스텔라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출시 하루 만에 전부 다 팔렸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다며 스텔라가 방방 뛰었다. 스텔라의 꽃차는 원래도 잘 팔리는 상품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출시와 동시에 매진되기는 처음이었기에, 흥분할 만했다.

“얼마 전에 꽃차 효능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어서 그런 것 같아.”

“잘됐네.”

좀 전에 광물 대박을 터뜨리고 온 일리아는 덤덤히 말했다. 그러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역시 나한텐 재능이 있나 봐.”

스텔라는 한껏 우쭐해져서 자화자찬했다. 그녀의 모습에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야심차게 꽃차를 내놨다가 생각보다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더니…….’

역시 스텔라 델로타는 알면 알수록 특이했다.

“아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뭔데?”

“황실 측에서 이번에 나온 꽃차 납품해달래.”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황실에서 쓰이는 물건이나 식료품은 모두 까다로운 선별을 거친 후 채택했다. 출시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품을 납품 받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그건 좀 신기하네.’

일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가 양 어깨를 활짝 펴며 말했다.

“그리고 황태자비궁에 초청 받았어. 너도 가야 해.”

***

다음 날, 일리아는 반강제로 황궁에 입궁했다. 연회나 만찬회를 제외하고 따로 초청 받은 것은 처음인지, 스텔라는 들뜬 기색이었다. 일리아 또한 바네사와 함께 황후를 알현한 후로 간만에 황궁에 오는 것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황태자비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와 스텔라는 예를 갖춰 나란히 인사했다. 인사를 받아준 황태자비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와주어서 고마워요.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일리아와 스텔라가 앉자, 황태자비는 차를 대접해주었다. 이번에 출시한 꽃차였다.

“선물로 받았는데, 향이 무척 좋더군요. 그래서 황실에 납품 받는 걸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았어요.”

황태자비가 꽃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스텔라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황태자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교성 좋은 스텔라는 분위기를 띄울 줄 알았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중, 일리아는 가만히 황태자비를 살폈다. 사실 꽃차를 납품 받고 싶다는 이유로 굳이 황궁에 초청한 것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꽃차는 핑계인 듯했다.

“다음 상품도 기대하고 있겠어요.”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일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황태자비궁이라도 구경하면서 기다려주겠어요?”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빼놓고 둘이서 할 이야기가 뭐 있나 싶은 얼굴이었다. 이내 스텔라는 황태자비가 리하트 테르시안의 사촌이라는 것을 떠올렸는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황태자비는 시녀를 불러, 스텔라를 안내하도록 했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 스텔라가 일리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텔라가 퇴장하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침묵이 밀려들었다.

“계속 자리를 마련하려 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먼저 입을 연 것은 황태자비였다. 일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했어요.”

그녀의 사과에 일리아는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비의 표정과 눈빛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숙부와 사촌의 말만 믿고, 그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네요.”

황태자비는 테르시안 후작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헤인리가 후작의 비리를 터뜨린 후에도, 그녀는 후작을 감싸주었다. 그 때문에 후작은 공직에서 퇴출당하지 않고 가벼운 징계만 받았다.

“변명을 하자면…… 부모님을 일찍 잃고 숙부께서 그 자리를 대신해주었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어요.”

“…….”

“그러다 점점 내가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땐 이미 황후께 밉보인 지 오래였고요.”

황후는 정의롭고 어진 사람이었다. 황태자비가 대놓고 후작을 두둔해주었으니, 두 사람이 부딪칠 만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테르시안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청산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자신이 그들을 도와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황태자비가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서 본 황태자비라면 굳이 리하트를 도와줄 것 같진 않았으나, 혹시 몰라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듯싶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대가 주최한 자선 경매에 참석했어요.”

“……전하께서 오셨다고요?”

“바네사의 그림을 산 것이 나예요.”

낙찰 받은 이름이 생소해서 그냥 넘겼는데, 대리인이 대신 낙찰 받은 모양이었다.

“황후께 선물하고 사과하고 싶어서요.”

“좋아하실 거예요.”

황후는 바네사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림 의뢰를 넣는 대가로 일리아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분쟁 지역에 가기 전에 황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본인의 뜻으로 분쟁 지역에 가게 되었지만, 부탁을 철회하진 않았다. 황후가 황제에게 넌지시 카르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무의식중에라도 인지하게 될 터였다. 후계자 싸움을 하는 데 황제가 직접 끼어들 순 없어도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황태자비는 망설이듯 한참 머뭇거리다 입술을 열었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불편하다니. 일리아가 이번에 자선 사업을 계획한 까닭도 전부 황실 측에서 손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블로든이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달갑지 않으신 듯해요. 그러니…….”

황태자비가 경고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부디 조심하세요.”

***

카르한은 지원 병력이 당도한 후 군을 재정비했다. 지원군에 용병들까지 가세하자, 이제야 싸울 만해졌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상대 쪽 진영에 푸른색 깃발이 걸리고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양쪽 진영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 전투는 카르한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적군에 비해 아군의 피해가 적었을 뿐이지, 대승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두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전투에 참전한 카르한은 공방을 치르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군도 적군도 치열하지 않았다. 검을 맞대야 하니 맞대고, 싸워야 하니 싸울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전쟁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지고, 어느덧 네 번째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

언제까지 전투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로 비등비등한 세력이라면 과연 무력으로 꺾을 수는 있는가. 대화로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협상도 할 수 없었다.

진지를 물리고 퇴각하자니, 야만족이 언제 습격할지 몰라서 대치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기묘한 규칙이 몇 있었다.

푸른 깃발이 올라가면 그날 정오에 전투가 있었고, 붉은 깃발이 올라가면 일주일간 정비할 시간을 가졌다. 오랜 전투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해진 규칙이었다.

카르한은 영토 분쟁을 빠르게 정리하고 싶었다. 여기서 더 끌어봤자, 양쪽의 피해만 커질 뿐이었다. 최대한 살생을 피하고 승리를 거둘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르한은 야만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 모았고, 전투 때마다 그들의 행동과 말에 집중했다. 눈치껏 습득한 덕분에 이제 단어 몇 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야만족 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저 단어는 퇴각하라는 말일 터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군이 소리쳤다.

“적들이 퇴각한다!”

카르한은 옆에 있던 테시온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쫓지 마라.”

경계를 넘어가면 적들의 막사와 너무 가까워진다. 쫓다가 도리어 물릴지도 몰랐다. 테시온이 나팔을 들고 쫓지 말라고 소리치자, 모두가 멈춰 섰다.

적들이 퇴각하는 것을 지켜보던 카르한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를 발견했다. 야만족 병사들이 그를 이끌어주었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말에 올라타지도 못했다. 그러다 카르한 쪽 병사들이 점차 가까워지자, 남자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죽이지 마라!”

카르한은 남자를 칼로 찌르려던 병사를 제지했다. 병사가 물러나자 카르한은 남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죽음을 각오한 남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뭐라 소리쳤다.

“---! --!”

나를 죽여라, 뭐 그런 말이 아닐까 싶었다. 카르한은 무릎을 굽혀, 남자를 직접 둘러멨다. 얼떨떨해하는 남자와 기겁한 테시온의 표정이 대조를 이루었다.

“카르한 님, 이자는 적입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일단 치료해주고…….”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야만족의 언어를 배워야겠다.”

카르한은 다친 야만족 병사를 진영에 데리고 왔다. 누구보다 카르한의 성품을 잘 아는 테시온은 만류하진 않았으나, 우려를 표했다. 군사 기밀이 누출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카르한은 자신이 직접 야만족 병사를 감시하겠다고 말했다. 함께 지내며 야만족의 언어를 배워볼 생각이었다.

카르한은 일단 그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반항이 심해서 카르한은 어쩔 수 없이 힘으로 눌러 제압했다. 맨손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그는 눈만 끔뻑였다.

“……미안합니다.”

왠지 겁을 준 것 같아서 사과하자, 야만족은 도리어 두 눈을 빛내왔다. 그때부터 얌전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카르한을 따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야만족은 힘을 숭배한다고 했다. 카르한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한 것이었다.

그 후로 열흘이 지났다. 카르한은 온종일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의외로 야만족은 제국어를 조금 알고 있었다. 제국 사람들은 야만족을 멸시했기에 언어를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저쪽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간단한 제국어와 몸짓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한과 야만족 병사는 서로에 대한 정보부터 교환했다. 그의 이름은 엄청나게 길었는데, 줄여서 우르시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르시오는 적군 지휘관의 차남이자 왕족 출신이었다. 우르시오가 잡혀온 다음 날, 적군 진지에는 처음으로 검은 깃발과 붉은 깃발이 나란히 걸렸다.

검은 깃발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전사했을 때 추모하기 위해 쓰였다. 아무래도 저쪽은 우르시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카르한은 우르시오에게 다음 전투 때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살아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우르시오는 무척 놀라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카르한 님, 푸른 깃발이 걸렸습니다.”

이른 새벽, 테시온이 카르한을 찾아와 상황을 말해주었다. 푸른 깃발이 걸리면 그날 정오에 전투를 치르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드디어 놈이 돌아가는군요.”

테시온은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이었다. 우르시오는 힘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는데, 유독 테시온을 업신여겼다. 화가 난 테시온은 그날부터 근력 운동을 시작했지만, 비웃음만 당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이 되었다.

속 시원해 하는 테시온에게서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저 먼 곳에 위치한 상대 진영을 응시했다. 바람을 따라 두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카르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드디어 이날이 오고 말았다. 우르시오가 머무르는 동안, 카르한은 열심히 제 의견을 피력했다. 평화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휘관끼리 협상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뜻이 전해지긴 했는지, 우르시오 또한 노력해보겠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태양이 머리 위로 떴을 때. 양쪽 진영에서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에 올라탄 카르한은 우르시오와 나란히 선두에 섰다.

야만족 병사들이 거센 파도처럼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앞선 전투와 달리,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파도가 육지에 도달하기 직전처럼 양쪽 진영이 바짝 가까워졌을 때였다. 우르시오를 발견한 야만족이 소리쳤다.

“멈춰라!!”

순식간에 야만족 병사들이 멈추었다. 팽팽한 기류 속에서 두 진영이 약간의 거리만 두고 대치를 이루었다. 카르한은 대열을 뒤로 물리고 우르시오에게 고갯짓했다.

우르시오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자신이 속한 진영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지휘관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우르시오를 바라보았다.

우르시오가 그에게 다가가자, 남자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와락 안아주었다. 그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

카르한은 말없이 부자를 바라보았다. 에반테온 공작은 이들을 야만족이라 불렀지만, 카르한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다.

잠시 얼싸안고 있던 두 사람은 뭐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야만족 지휘관은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우르시오는 또다시 카르한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손짓과 간단한 단어를 내뱉으며 지휘관의 뜻을 전달해주었다.

“일주일, 쉰다, 그리고, 우두머리, 만난다.”

일주일간 휴전한 후에, 협상 자리를 마련하자는 말이었다.

***

일주일간의 공백이 생기자, 카르한은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결정 내렸다.

카르한은 곧장 마을로 향했다. 이전 지휘관이 보급품을 많이 빼돌려, 약과 식량이 부족했다. 보급품을 지원 받기 위해 에반테온 공작에게 서신을 보낼 계획이었다.

순순히 보내주진 않을 것 같으나,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했다. 그런 다음 지금 상황을 보고할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마을을 비웠으니 한번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마을 어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카르한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사람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카르한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환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택에 도착하자, 루벤투스가 곧장 현관으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루벤투스는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카르한을 맞이해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지요?”

“예. 그때 그 병사들은 잘 지냅니까?”

“뭐라도 하고 싶다며, 마을 일을 돕고 있습니다.”

루벤투스의 대답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서 내린 카르한은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틀었다.

“일단 마을을 좀 둘러봐야겠습니다.”

“쉬시질 않고…….”

루벤투스가 감동 어린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장 저택을 빠져나와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한 달이 못 되는 사이에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카르한이 식량을 배급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 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걷고 있는데, 쿵쿵쿵 천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는 다름 아닌 짐마차의 행렬이었다. 상단 마차라는 것을 알아본 루벤투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여기에 상단이 어떻게…….”

외진 마을이라, 상단의 방문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이렇게나 많은 짐마차들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상단 마차가 멈추고, 한 남자가 내렸다.

“여기 영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남자의 말에 카르한과 루벤투스가 앞으로 나섰다.

“영주는 없고, 제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에반테온 소공자님입니다.”

“오! 반갑습니다.”

카르한의 이름을 들은 남자가 반색했다. 남자는 곧장 자신을 소개한 후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블로든 상단입니다.”

그 이름에 카르한과 루벤투스의 눈이 커졌다.

“앞으로 마을에 저희 상품을 납품하고 싶습니다.”

“예?!”

루벤투스가 너무 놀라서 새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런 변방에도 블로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대형 상단이 직접 물건을 납품하고 싶다고 제안하다니.

“그리고 지불하실 금액은…….”

남자는 시선을 빗겨 카르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차 한 대당, 소공자님의 그림 한 장입니다.”

***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일리아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문득 황태자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국고를 아끼고 싶지만, 블로든이 나서는 것은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블로든은 너무 커버렸고, 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 한들, 블로든을 쉽게 내칠 수는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황태자비를 통해 황실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황제와 황태자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올해 들어 황제의 건강이 나빠지며 더욱 탐욕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

일리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

완연한 가을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녹음 짙던 나뭇잎은 어느새 울긋불긋하게 물들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았다.

분명 카르한이 떠날 때 막 여름에서 벗어난 가을 초입이었는데……, 벌써 겨울 초입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르한이 떠난 지 벌써 두 달도 더 지난 것이다. 일리아는 창틀에 올려둔 화분을 바라보았다.

-제가 본 풍경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카르한은 그 말과 함께 이 화분을 일리아에게 선물해주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을 떠올리자, 꾹꾹 눌러 삼킨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한참 화분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옷장 문을 여니 깊숙한 구석에 가방 하나가 있었다. 카르한이 제게 맡기고 간 가방이었다.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보고 싶을 때 열어보려 했다.

조심스레 가방을 꺼낸 일리아는 천천히 열어보았다. 곱게 접힌 옷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옷을 펼치자, 희미하게 남은 잔향이 끼쳐왔다. 유행이 지난 디자인부터 지금 체격보다 한참 작아 보이는 옷까지 다양했다.

일리아는 이 옷을 입었을 카르한을 상상했다. 어린 카르한은 어땠을까. 초상화라도 보고 싶지만, 없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일리아는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 옷을 꺼냈다. 옷을 펼쳐든 일리아는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부하기 전에 수선해야 한다는 옷이 이건가?”

카르한이 남긴 말을 상기한 일리아는 단추를 살폈다. 비슷한 단추가 있으면 찾아서 달아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

옷에 달린 단추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일리아는 옷을 그러쥔 채 한참 굳어있었다. 단추에 새겨진 특이한 무늬까지 똑같았다. 다음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일리아는 이미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서랍장 안쪽에 넣어둔 보석함이 손에 잡혔다. 보석함을 꺼낸 일리아는 잠깐 그렇게 있다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뒤이어 떨리는 손끝으로 뚜껑을 열었다. 버릴 거라고 다짐해놓고 결국 버리지 못한 단추가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단추를 꺼내려 했으나, 손이 떨려서 자꾸만 헛손질했다. 몇 번이나 떨어뜨린 후에야 겨우 잡혔다.

일리아는 단추를 빈자리에 대어보았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간 것처럼 딱 맞았다.

“말도 안 돼…….”

너무 놀라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한참 굳어있던 일리아는 문득 비올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공자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다더구나.

그때는 신기한 우연이라 치부하고 넘겼다. 혹시 카르한이 자신을 구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넘겼던 일들이 하나둘 기억났다. 예전에 독감에 걸려 크게 앓았을 때, 일리아는 물에 빠졌던 과거를 꿈으로 꾸었다. 저를 구해준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직도 또렷했다.

진짜 있었던 일처럼 선명했지만, 그때는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리하트가 저를 구해준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일리아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손을 뻗어 단추가 뜯겨나간 자국을 손으로 쓸었다.

“……당신이었어요?”

손의 떨림은 어깨까지 번져가고 서서히 시야가 잠기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차오른 눈물을 담아내지 못한 채 툭, 툭…… 떨구어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턱으로 이어져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추락한 작은 물방울이 옷감 사이로 스며들었다.

“당신이……, 당신이 내 운명이었어요?”

일리아가 그토록 믿었던 운명은 리하트가 아닌, 카르한이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진짜 은인을 눈앞에 두고, 리하트가 저를 구해준 거라 의심치 않았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럼 이렇게 오랫동안 엇갈리지 않았을 텐데. 서로 힘들고 아파했던 시간에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바보 같고 원망스러웠다.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리아는 테이블에 올려둔 옷을 품에 밀어 넣었다. 지금 이곳에 없는 카르한을 끌어안듯 꽉 안고서 흐느꼈다. 잔뜩 구겨진 옷이 눈물로 흠뻑 젖어갔다. 지금 당장 그를 안아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카르한은 저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말해주었지만, 구원받은 쪽은 자신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도 카르한이었다. 그로 인해 일리아는 변화했고,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실은……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전에 카르한이 고백했을 때, 그는 일리아가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그러나 일리아는 내 운명도 당신이라고 선뜻 화답하지 못했다.

가끔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말해줄걸, 하면서 말이다.

“보고 싶어. 너무…….”

지금까지 눌러 삼켜온 그리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주위 사람들에겐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일리아는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흘러넘치진 않았다. 일리아는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단추를 손에 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을 만나러 가자. 이제 자신이 말해줄 차례였다.

***

블로든 상단이 마을에 도착하자, 축제가 벌어졌다. 상단은 아낌없이 물건을 풀었다. 식료품뿐만 아니라, 옷감이나 질 좋은 포도주도 있었다.

오랜만의 축제에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카르한이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루벤투스는 포도주 한 병을 가지고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포도주 좀 드시겠습니까?”

“술은 잘 못 마십니다.”

카르한은 스스로가 술이 약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주량은 평균보다 높은 편이었으나, 술고래인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편견이 생겼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었고 말이다.

결국 혼자 포도주를 홀짝이게 된 루벤투스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는지, 줄곧 궁금해하던 것을 슬쩍 물었다.

“그런데 블로든 가문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왠지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워, 카르한은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누군가에게 직접 밝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블로든 영애가…… 제 약혼녀입니다.”

그 말에 루벤투스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술이 확 깬 얼굴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루벤투스가 중얼거렸다.

“그럼 블로든 상단이 우리 마을에 온 것도 소공자님이 힘써주신 거군요.”

“아닙니다. 제 약혼녀가 애써준 겁니다.”

카르한은 루벤투스의 말을 바로 정정해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왁자지껄한 거리의 풍경을 응시했다. 기뻐하는 그들을 보며,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안 그래도 물자가 부족해 곤란한 상황이었다. 공작의 답신이 올 때까지 어떻게 버틸지 고민하던 사이, 일리아가 보낸 상단이 도착했다. 어찌나 물자를 많이 보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서도 진지에 가져갈 것이 넉넉했다.

거기다 일리아의 대리인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요청하라고 말해주었다. 유통체계가 잘 잡혀서 마을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데 며칠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일리아가 거기까지 신경 써준 것이다.

카르한은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래서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림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리아는 마차 한 대당 그림 한 장을 요구했다. 열심히 연습해서 나중에 일리아의 초상화를 그려줄까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야만족과 협상을 해야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양쪽 진영 한가운데 막사를 세우고, 정오에 지휘관끼리 자리를 가질 예정이었다. 카르한은 갑옷 대신 제복을 입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막사를 나오자 다들 긴장과 기대감 어린 눈으로 카르한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카르한이 하기에 따라,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날지도 몰랐다. 카르한의 어깨에 막중한 책임감이 달린 것이다.

카르한은 테시온을 대동한 채 진영을 벗어났다. 저 멀리 맞은편에서도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야만족 지휘관과 아들인 우르시오였다. 협상이 이루어질 막사와 가까워지자, 긴장이 몰려왔다.

카르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광활하게 뻗어나간 대지를 응시했다. 풀 한 포기조차 보기 어려운 황야였으나, 그의 시야에는 한여름의 녹음 짙은 풍경이 아른거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름. 일리아와 함께했던 그날을 되찾기 위해, 카르한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호흡을 내뱉은 카르한은 다시 걸음을 떼, 막사 앞에 도착했다. 소지한 무기가 있는지 서로 확인한 후 그들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휘관끼리 마주 앉았다.

카르한은 짧은 시간 동안 익힌 야만족 언어와 제국어를 섞어서 의견을 제시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전쟁을 휴전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자 우르시오가 어설프게나마 통역을 해주었다.

“우리는 평화, 원한다.”

우르시오는 지휘관의 뜻을 전달했다.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저쪽도 평화 협정을 바라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카르한과 야만족 지휘관은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카르한이 알고 있는 사실과 제법 달랐다. 카르한은 야만족이 먼저 공작령을 침범해왔고, 그들이 땅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해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르시오의 말로는 공작의 병사들이 먼저 공격해왔으며, 자신들의 땅을 빼앗길까 싶어서 전쟁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그동안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한은 오해를 풀기 위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조용히 카르한의 말을 경청하던 야만족 지휘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쟁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카르한은 1년 정도 휴전하며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만약 서로가 약속을 잘 지킨다면 기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고, 오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잠깐 침묵하던 야만족 지휘관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르시오가 통역해주기도 전에 야만족 언어를 알아들은 카르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뒤이어 우르시오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 왕,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말해준다.”

카르한 또한 에반테온 공작에게 이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만약 공작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 협상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공작이 협상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

쓸모없는 변경을 지키기 위해 지금껏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공작은 누구보다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었다.

협의가 끝나고,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야만족 왕과 에반테온 공작의 의견을 구한 후, 다시 만날 계획이었다. 카르한이 막사를 나가려 하자, 우르시오가 그를 불러 세웠다.

“힘, 보여 달라.”

아무래도 우르시오가 지휘관에게 카르한에 대해 떠들어댄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카르한은 단단한 나무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테이블이 두 동강 나자, 지휘관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잔뜩 흥분한 지휘관이 뭐라고 소리쳤다. 우르시오는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야만족 언어로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대충 그런 말이었다.

***

레베타는 얼마 전에 스텔라를 찾아갔다. 약혼을 다시 추진해보기 위함이었다.

-저번엔 미안했어요.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지요?

스텔라는 레베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많이 후회했답니다. 분명 영애같이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긴 어려울 텐데 말이에요.

레베타는 은근슬쩍 자신의 목적을 스텔라에게 내비쳤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스텔라는 이내 노련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공작부인 덕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어요.

-……?

-약혼이 취소되고, 제가 가문을 잇기로 결정 났거든요.

스텔라는 델로타 가문의 무남독녀였다. 결국 스텔라가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 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데릴사위가 필요한데…… 소공자께서 작위를 계승하시면 데릴사위는 될 수 없잖아요.

스텔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된 일이죠.

내심 기대를 걸었던 스텔라가 완전히 발을 빼버린 것이다. 이전에 스텔라에게 카르한이 공작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해두었기에,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레베타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레베타는 고민에 빠졌다. 사채 이자는 점점 불어나는데, 어떻게 메워야 할지 걱정이었다. 공작령에서 세금을 좀 더 걷으면 원금을 어느 정도 상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도 영지들이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어, 갑자기 세금을 올리면 반발이 심할 것 같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익숙한 목소리에 레베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니, 그곳에 블레어드가 서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블레어드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레베타의 생일이었다. 이번에 공작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기억해준 모양이었다.

“너밖에 없구나.”

레베타는 감동한 눈으로 블레어드를 바라보았다. 블레어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보세요.”

레베타는 자리에 앉아, 리본 끈을 풀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보석 브로치 하나가 보였다. 화려한 브로치는 한눈에도 비싸 보였다.

“정말 예쁘구나. 고맙다.”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레베타는 블레어드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문 앞에 두었던 꽃 한 송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뚝 끊겼지만 말이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무리한 건 아니니?”

“어머니 생신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다 컸구나. 이런 선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니. 네가 꽃 한 송이씩 전해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기억나지?”

블레어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입니다.”

블레어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레베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과거의 그녀는 여러 이유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때 종종 문가에 놓인 꽃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레베타는 꽃을 둔 사람이 블레어드일 거라 믿었다. 공작저에서 저를 위해줄 사람은 블레어드뿐이었다. 그것이 블레어드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게 된 계기였다.

오래되었으니 잊어버렸을 법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레베타는 애써 서운함을 떨쳐냈다.

***

무사히 협상을 마친 후, 카르한은 공작에게 서신을 보냈다.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을과 진영을 오가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카르한은 틈틈이 일리아에게 줄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다. 그러다가 가끔 일리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 아껴둔 초상화를 벽에 걸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소공자님!”

집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루벤투스는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웃 도시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영주?”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루벤투스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 마을은 영주가 없다 보니, 가끔씩 방문하셔서 도움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심하던 카르한은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온 손님이고, 지금은 카르한이 공작의 대리인으로 마을에 머무르고 있으니 마중하는 것이 도리일 듯했다.

카르한은 저택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막 저택으로 들어선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잠시 카르한을 살피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시오릭 에반테온입니다.”

왠지 낯익은 이름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카르한은 그가 에반테온 원로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만간 야만족과 협상을 완전히 매듭지으면 시간 내어 찾아가볼 계획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 카르한이 머뭇거리다가 문 앞에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소공자께서 이 마을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그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깐깐한 눈빛에 카르한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책 속에서 자주 나오던 까칠한 사감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관리인은 이쪽입니다. 저는 도움만 약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시오릭은 루벤투스를 힐끗 보았다. 아는 사이여서인지 그는 별말 없이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고용인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시오릭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근방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 차로군요.”

“제가 이곳에 올 때 가져온 것입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공자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영지까지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칭찬을 내뱉는데도 어쩐지 그의 눈빛과 말투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카르한이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시오릭이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돈으로 산 환심 아닙니까.”

“영주님……!”

루벤투스가 놀라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르한은 딱딱하게 굳어진 입매를 다물었다.

제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이는 간만이었다. 그것도 카르한이 도움을 받아야 할 원로였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블레어드를 지지한다고는 들었는데, 그것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혹시 제가…… 뭔가 실수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카르한의 정중한 부탁에 시오릭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내 그가 단호히 말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곳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

“소공자께서는 곧 떠나실 분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카르한은 야만족과의 분쟁을 매듭지으면 수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늦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귀환하려 했다.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소공자께서 떠나시면 이 마을은 다시 버려질 겁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카르한의 방문은 가뭄의 단비였다. 그러나 카르한이 가버리면 다시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기대감을 심어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마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 했다. 하지만 더 먼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시오릭이 움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해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카르한의 심지 굳은 눈빛을 본 시오릭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대 공작이 자리에 오르고, 영지마다 불균형이 더 심해진 건 알고 있습니까?”

과감한 발언에 루벤투스는 또다시 숨을 삼켰다. 시오릭은 지금껏 품고 있던 불만이 많은 듯 카르한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수익이 나지 않는 땅은 버려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제 영지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는 공작 가문에 소속한 원로였지만, 공작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후계자 지지를 받고 싶어서 호의를 베푸는 거라면 그만둬 주십시오. 저희는 그런 도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카르한이 다물린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사심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곳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

“제가 떠난 후에도 이곳이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시오릭은 잠시 침묵했다. 카르한이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깨달았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한번 잘해보십시오.”

시오릭이 먼저 응접실을 나가버리자, 루벤투스가 안절부절못하더니 그를 따라갔다. 카르한은 한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속이 답답해져서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안겨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했다.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곳에서 수익을 창출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사람들을 이주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다들 마을에 대한 애착이 커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계속 구휼금을 지원하자니 일리아에게 무작정 기대는 것 같아서 싫었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이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채 가지 못한 시오릭과 루벤투스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마차 두 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였다. 시오릭도 이런 마차는 흔히 보지 못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일리아가 또 뭔가를 보내온 것일까. 지금까지 받은 것으로도 충분한데…….

카르한은 빠르게 마차를 훑었으나, 어디에도 블로든 가문 문장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마부가 설치해준 간이계단을 밟으며 누군가가 내렸다.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여인은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카르한……!”

일리아였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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