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19/28)

19장

***

며칠 전, 블로든 저택에서는 파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하는 파티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축하해주었다. 저녁에 시작한 파티는 아침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약혼식은 카르한이 떠나기 전에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가족들만 모여서 올릴 예정이었고, 관청에 서류를 내지 않는 쪽으로 매듭지었다.

레베타가 일리아와 카르한이 빨리 약혼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법적으로 얽히는 순간부터 이런저런 요구를 들이밀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카르한이 분쟁 지역에서 돌아오면 약혼 서약서를 낼 계획이었다.

일리아는 한동안 정말 바빴다. 카르한과 둘이서 약혼식을 준비하는 한편, 벌여둔 사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온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입점 시킬 가게를 검토하고 조율하는 중이었다. 장난감 사업은 너무 잘 돌아가서 아예 가게를 따로 차리게 되었다. 중간에 스텔라와 한 번 만나서 꽃차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시간 나는 틈틈이 분쟁 지역의 정보를 수집했다. 환경, 기후, 인구, 오랫동안 전쟁을 이어온 야만족에 대한 것까지……. 일리아는 카르한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카르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카르한은 저를 지지해줄 원로를 만나, 정보를 얻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내년 봄이라…….”

잠시 하던 일을 멈춘 일리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르한이 원로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내년 봄에 에반테온 후계자를 가릴 총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 전까지 원로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카르한이 떠날 날짜가 정해졌다. 보름 후, 카르한은 수도를 떠나 분쟁 지역으로 갈 것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공작위고 뭐고 다 버리고 블로든 가문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블레어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르한을 제거하려 들 게 분명했다. 어릴 적부터 견제해왔는데,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카르한이 작위를 물려받고 블레어드를 완전히 눌러버려야 했다. 카르한 본인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일리아가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말렉에게 물었다.

“오늘 일정은?”

“서류 결재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

일리아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할 거야.”

“마차 준비해두겠습니다.”

집무실을 나가기 전, 일리아는 책상 위에 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리하트 테르시안과의 파혼 증명서가 든 봉투였다.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리하트를 만날 생각이었다.

이대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역시 파혼 통보는 직접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볼 것도 하나 남아있었다.

‘……정말 리하트가 날 구해준 게 맞을까?’

계속 찝찝하게 남아있던 의심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번 떠보는 식으로 캐봐야 할 것 같았다. 일리아는 봉투를 챙긴 채 곧장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천장과 바닥이 투박한 돌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한쪽 면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고,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무척 어두웠다. 습하고 추운 이곳은 재판을 기다리는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감옥이었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얇은 싸구려 모포를 두른 채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감옥에 수감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인생에서 가장 지옥 같았던 열흘로, 정신과 육체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갇히게 된 건 전부 일리아 탓이었다. 일리아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리하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눈이 뒤집힌 리하트는 일리아에게 복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일리아도 알아야 했다.

리하트는 용병들을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말해준 후 일리아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납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용병들은 리하트를 주모자라고 밝혔다.

체포당한 리하트는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리하트는 일리아를 납치한 죄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하트는 자신의 신분을 믿었다. 테르시안 후작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니 구금된다 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 리하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좁고 더러운 감옥에는 이미 다른 수감자들이 있었다. 리하트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것을 들먹였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아, 그 유명한 리하트 테르시안?

-몰락한 귀족 주제에 아직도 목이 뻣뻣하잖아.

수감자들은 도리어 리하트를 비웃으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구타는 물론이고 리하트의 몫으로 나온 음식을 갈취해, 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리하트는 그 방에서 최하층이었다. 그들이 사자나 늑대 같은 맹수라면 리하트는 개미에 불과했다. 끝나지 않는 조롱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견디다 못한 리하트는 간수에게 살려달라고 빌었고, 어젯밤 독방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독방도 절대 좋다 할 수 없었다. 악질 범죄자들을 가두는 지하 끝 방이었기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리하트는 온종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미쳐가고 있었다.

“흐으…….”

리하트는 울음 같은 신음을 삼켰다. 며칠 전만 해도 가족들이 보석금을 지불해서 저를 이곳에서 꺼내줄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끝끝내 리하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리하트를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똑, 똑, 똑…….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리하트가 귀를 틀어막은 그때, 구둣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동에 서서히 빛이 밀려왔다. 리하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고 말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약간의 빛에도 통증을 느꼈다. 이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멈추었다.

천천히 눈을 뜬 리하트가 웅크렸던 몸을 바로 했다. 리하트의 동공에 빛이 일렁였다. 창살 너머로 램프를 든 여인이 서 있었다. 넋 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리하트 테르시안.”

무척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을 깜빡이던 리하트는 그제야 여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일리아였다.

“수감 생활은 적응되었어요?”

“…….”

“얼굴 보니까 아직 아닌가 보네요.”

뒤늦게 정신 차린 리하트는 무릎걸음으로 쇠창살 앞까지 다가갔다. 먹은 게 없어서 일어설 힘도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쇠창살을 붙든 리하트가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일리아는 그런 리하트를 내려다보았다. 확연히 다른 눈높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제발……, 제발 여기서 날 꺼내줘.”

리하트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빌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 테니까 용서해줘.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아니면 아예 제국을 뜰 테니까…….”

리하트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하트는 절박한 얼굴로 애원했다.

“일리아, 제발.”

“뭘 잘못했는데요? 말해봐요.”

“……전부.”

리하트의 대답에 일리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용서를 비는 법부터 다시 배우는 게 좋겠네요.”

리하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끔찍했던 열흘이 눈앞에 펼쳐졌다. 리하트는 자존심마저 버린 채 일리아에게 자비를 구했다. 함께했던 추억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용서해달라고 빌다가 최후의 수단까지 꺼냈다.

“과거에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줬잖아.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면…….”

“그만.”

말을 자른 일리아가 리하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구해준 거, 아니잖아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리하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일리아가 뭔가 알게 된 것일까.

리하트는 냉큼 발뺌하려 했지만 혀가 굳어지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뭐든 꿰뚫어볼 것같이 날카로웠다. 이미 일리아가 다 알고 왔다는 생각만 들었다. 리하트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쓰레기인 줄 몰랐는데…….”

그 말에 계속 끓고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동정을 호소해도 먹히지 않는다면 비굴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리하트는 쇠창살을 강하게 움켜쥔 채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하러 날 찾아온 거야!! 내 꼴 보고 비웃으려고?!”

잔뜩 흥분한 리하트는 욕설과 저주를 내뱉기 시작했다.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르던 리하트는 쇠창살 밖으로 손을 뻗었다. 불쑥 튀어나온 손에, 일리아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굳어져 있는 일리아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한 척하더니, 몇 년씩이나 속은 것도 몰랐지? 멍청한 년.”

“…….”

“운명 타령하더니, 결국 나와 약혼까지 하고 말이야.”

리하트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낄낄거렸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던 일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그의 앞에 떨어뜨렸다. 팔랑, 얇은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리하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 시선을 두었다.

[파혼 증명서]

리하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마지막까지 저를 일리아와 이어주던 관계의 고리가 완전히 끊긴 것이다.

“이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일리아의 속삭임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내가 너 때문에 더 상처받을 것 같아?”

“…….”

“더 짖어봐. 들어보고 널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 내리게.”

일렁이는 램프의 불빛이 리하트를 삼킬 듯했다. 오기와 울분으로 가득 차, 잠시 잊고 있던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입을 다물어버린 리하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 정도면 무척 안락하지. 내가 낸 세금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무슨…….”

“아무래도 여기가 밑바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리고 리하트가 좋아했던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래 밑바닥은 끝도 없어, 개자식아.”

***

일리아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용인 세 명이 달라붙어 일리아를 치장하는 중이었다.

“화관을 쓸 거니까 머리 장식은 하지 말아줘.”

“네, 아가씨.”

일리아는 짤막한 부탁을 늘어놓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감옥에 갇힌 리하트를 만나고 온 뒤로 새로운 의문이 자꾸 떠올랐다.

‘그럼 누가 날 구해준 거지?’

물에 빠진 일리아를 구해준 것은 리하트가 아니었다. 리하트는 그저 숟가락만 얹은 것이었다. 뒤늦게라도 은인을 찾고 싶었지만, 목격자도 없는 데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증거라면 아직도 버리지 못한 단추가 있었다. 공고를 내서라도 단추 주인을 찾을까 했으나, 카르한이 마음에 걸렸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물에 빠진 저를 구해줬어요. 그 사람이 제 운명인 줄 알았어요.

-만약에 나를 구해준 사람이 리하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일리아는 이전에 카르한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리하트가 저를 구해준 것이 아니니, 은인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하면…… 카르한이 신경 쓰여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공고를 낸다면, 리하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 몰려들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고민 끝에 일리아는 묻어버려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목걸이는 어느 것으로 하시겠어요?”

“저 상자에 담아둔 목걸이로 할게.”

고용인이 상자를 열어,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눈부신 자수정 목걸이는 카르한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오늘 아버지 우시면 어쩌지.’

목걸이를 착용하던 일리아는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이 떠날 날이 정해지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가족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카르한이 곧 분쟁 지역으로 떠난다는 것을 밝혔다.

-이렇게 갑자기?

-아니, 어째서!!

가족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주었다. 설명이 끝났을 때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래도…… 이건…….

비올레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주먹만 꽉 쥐었다. 헤인리 또한 무척 침통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니까요.

카르한이 약간의 쑥스러움을 담아 말하자, 비올레와 헤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다들 유독 조용한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클리프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끅끅거리며 애써 눈물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비올레가 조용히 손수건을 내밀자, 클리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울어요! 울면…… 진짜 이별하는 것 같잖아요.

기어코 클리프는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비올레의 말로는, 그날 밤 클리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울었다고 했다. 감성이 워낙 풍부한 분이라, 오늘도 울면 어쩌나 싶었다.

“아가씨, 끝났습니다.”

고용인의 말에 일리아가 정신 차렸다. 일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사하면서도 반짝반짝했다.

“완벽해. 다들 고마워.”

일리아는 생화를 엮어 만든 화관을 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흰색 드레스 자락이 서리처럼 사르륵 흩어졌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꾸민 이유는 오늘 있을 약혼식 때문이었다.

침실을 벗어난 일리아는 본관 앞에 세워진 황금 마차에 올라탔다. 뚜껑이 없는 마차는 탐스러운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프란체가 경쾌하게 외치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맞춰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원 한복판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장미로 가득했다. 새빨간 꽃잎이 바람결에 너울처럼 밀려왔다. 장미로 가득한 정원에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테시온 그리고 카르한이 서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잔뜩 긴장한 카르한이 일리아를 맞이했다. 속으로 웃던 일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많이 긴장했어요?”

“……티 납니까?”

카르한 딴에는 힘껏 숨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일리아는 카르한과 나란히 섰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두 사람의 약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모든 절차를 제하고, 가족들 앞에서 서약서를 읽고 반지 교환만 하기로 하였다.

먼저 카르한이 서약서를 읽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정원 너머까지 흘러갔다. 뒤이어 일리아까지 서약서를 읽고, 둘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 장미 꽃잎 위를 달려온 바람이 일리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가을의 황금빛 밀밭이 펼쳐진 듯했다. 카르한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어오던 바람이 멎고, 카르한은 반지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 크기만 다른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둘이서 함께 고른 것이라 더욱 뜻 깊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카르한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올라간 눈꺼풀 속에 카르한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숨을 삼킨 일리아가 반지를 꺼내, 카르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똑같은 반지가 서로의 손에 자리 잡았다.

“…….”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종착지는 일리아의 가슴 깊은 곳이었다.

지켜보던 가족들이 박수와 축하를 보내왔다. 두 연인은 그들을 향해 똑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기 나흘 전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 틈틈이 서로를 만나곤 했다.

특히 카르한은 일리아의 휴식 시간이 되면 하던 일도 멈추고 집무실로 뛰어올라갔다. 그럼 일리아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는데, 카르한은 그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둘은 짧은 만남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일리아는 사업 외에 다른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일리아의 아버지인 클리프가 그녀에게 항상 해주는 말이 있었다.

‘베풀어라, 그래야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일리아는 어떻게 해야 잘 베풀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듯했다. 블로든 가문 측에서 매년 막대한 금액을 기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단순한 기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뿌리 깊은 가난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실에서 나서주면 좋겠지만, 지금 황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며칠째 혼자 끙끙 앓던 일리아는 결국 카르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기부는 계속 하고 있는데……, 결과가 미미한 것 같아요. 우리 가문만으로는 조금 벅차네요.

-그렇다면 대대적으로 자선사업을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자선사업이요?

-눈에 보이는 선행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일리아가 눈을 깜빡이자, 카르한이 조심스레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판매 수익의 일부를 기부한다는 식으로 홍보하면, 다들 자연스레 동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일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요.

직접 돈을 기부하는 건 부담스러워도, 물건을 사는 행위만으로도 기부가 된다면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카르한.

일리아가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기분 좋은 듯 눈매를 접었다.

-이번에 자선경매를 열어야겠어요.

일단 귀족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리아는 기부를 하나의 유행처럼 일으킬 생각이었다.

-유행을 문화로 정착시키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말하는 일리아는 무척 눈부셨다. 일리아라면 분명히 성공을 거둘 것이다.

-안 쓰는 물건 있으면 줘요. 경매에 부치게요.

-제 물건을요?

-당신 요즘 인기 많아요. 비싸게 팔릴걸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로 카르한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고, 일리아가 말해주었다. 카르한은 그런가……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저를 방문했다. 경매에 내놓을 물건을 가져올 겸, 일리아가 준 선물들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본관에 들어섰다. 깊은 적막감이 카르한을 감싸왔다. 늘 활기찬 블로든 저택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카르한은 스산한 복도를 쭉 걸어, 침실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남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었다. 방 안을 가볍게 둘러본 카르한은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르골, 커프스단추, 책……. 전부 일리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한참 짐을 꾸리던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옷장을 열었다. 일리아가 안겨준 옷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유행 지난 옷이 걸려 있었다.

“……기부할 수 있겠지? 일단 가져가볼까.”

유행은 지났지만, 깨끗하게 입어서 새것 같았다. 카르한은 옷을 꺼내 차곡차곡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단추가 하나 떨어진 옷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몇 년 전 황궁에 입궁했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그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이 옷을 입었던 날, 카르한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서야 단추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뭔가에 걸려서 뜯어진 모양이었다. 수선하려고 했지만, 똑같은 단추를 구하지 못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게 아직도 옷장에 남아 있었구나…….”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은 그 옷도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 챙기고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카르한은 옷 때문에 무게가 상당해진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장정 하나를 매달고 뛴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는 무거운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선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공간이었다. 유년기 내내 머물렀던 곳이었고, 좋았던 추억보단 나쁜 기억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카르한이 머무를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계단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블레어드였다.

“드디어 왔구나.”

블레어드가 웃으며 카르한의 앞으로 걸어왔다. 잠시 멈춰 선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마주 바라보았다.

“소식은 전해 들었겠지?”

블레어드는 내년 봄에 열릴 총회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내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파악한 블레어드가 미소를 지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돌아갈 필요가 전혀 없는데.”

무척 귀찮다는 듯 블레어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르한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한마디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카르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카르한을 응시하던 블레어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블로든 하나만 믿고 덤벼봤자, 과연 그걸 네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어떻게 흔들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카르한을 부족하다고 말해왔다. 마치 세뇌 당하기라도 한 듯 그 말이 오랫동안 카르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기생충 같은 네놈이 이번에는 블로든을 갉아먹을 생각이구나.”

파문이 일었던 카르한의 눈동자가 어느새 덤덤해졌다.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 떠들어 보십시오.”

“……뭐?”

“나한테 겁먹지 않은 척 애쓰는 걸로 들리니까.”

여유롭기만 하던 블레어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블레어드가 카르한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무슨 개소리야.”

“그때 그 일도, 결국 나를 무서워해서 견제한 거잖습니까.”

카르한은 자신과 레베타 사이를 이간질한 것을 언급했다. 서늘한 눈으로 블레어드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지지 않을 겁니다. 그딴 더러운 짓이라도 해야 겨우 설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당신한테는.”

“카르한 에반테온……!”

블레어드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카르한은 그 손이 제 몸에 닿기 전에 손목을 틀어쥐었다.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에 블레어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난 이제 도망치지 않아.”

과거에는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패해도 응원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면 믿어줄 이들이 있었다.

“무슨 짓이야!”

그때 복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과 블레어드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고용인 두 명을 대동한 레베타가 다급히 달려왔다.

“어서 그 손 놓지 못해!”

냉큼 블레어드의 옆에 선 레베타가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블레어드 편을 들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은 블레어드는 단숨에 태도를 달리했다. 그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말에 상처 받았다면 미안하다.”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강하게 밀쳐냈다. 블레어드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레베타가 부축해주었다.

“네가 난폭한 성정인 건 알고 있었지만……! 거리의 무뢰배들도 너 같진 않을 거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레베타는 늘 블레어드만 감쌌고, 모든 것을 카르한 잘못으로 돌렸다. 그때마다 상처 받아 왔지만, 이제는 그녀의 비난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레베타는 블레어드만을 위할 것이고……, 카르한은 더 이상 그녀의 애정이 필요 없었다.

카르한이 덤덤히 레베타를 응시하자, 그녀가 움찔했다.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

“아니라고 부정해도 당신은 믿어주지 않았지요.”

카르한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도 없었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베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할 말을 끝낸 카르한은 먼저 등을 돌려버렸다.

“카르한!”

등 뒤에서 레베타가 소리쳤다. 그러나 카르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침내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캄캄하던 주위는 어느새 푸르스름한 여명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꼭두새벽부터 블로든 저택 현관 앞은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짐을 싣던 고용인들을 뒤로한 채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마주 섰다.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천천히 가요.”

“그 지역은 춥다고 하니, 도착하기 전에 미리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게 좋겠습니다.”

“예, 전부 명심하겠습니다.”

비올레와 헤인리의 조언에 카르한이 대답했다. 내내 기운 없는 얼굴로 서 있던 클리프가 말했다.

“돌아오면…… 저와 오케스트라 감상하러 가는 겁니다. 알겠지요?”

카르한은 옅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선물이 있어요.”

일리아는 뒤에 서 있던 고용인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건넸다. 얼떨결에 검은 곰인형을 품에 안게 된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판매되지 않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만들었어요.”

기간을 맞추느라 조금 힘들었다고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감 사업을 운영하는 일리아가 바쁜 와중에 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준 것이다. 카르한은 솜이 빵빵하게 들어간 곰인형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소중히 데리고 있다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저도 선물이 있습니다.”

옆에 대기하던 헤인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헤인리는 길쭉한 원통을 하나 내밀었다. 정체불명의 선물에 카르한이 갸웃거렸다. 그러자 헤인리가 작게 속삭였다.

“일리아 초상화입니다.”

“!”

이 귀한 걸……! 카르한이 눈을 크게 뜬 채 헤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잠시 대여해주는 겁니다.”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은 귀품을 하사 받기라도 한 듯 두 손으로 받았다. 훈훈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일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가 뭐냐고 묻기 전에 클리프가 나섰다. 코끝이 조금 붉어진 클리프는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키운 겁니다.”

순금으로 만든 호화로운 화분에 순무 하나가 심겨 있었다. 클리프가 순무를 건네주자, 블로든 가문 사람들 전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진짜 저걸 주시다니…….”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어보면 순무가 아니라 저택 문서라도 준 것 같았다.

“거기 환경이 척박하여 채소가 귀하다고 들었으니, 비상식량으로 먹어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클리프가 기르는 순무는 뭔가 특별한가 싶었다. 화분까지 받자 이제 남은 손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나섰다.

“내 선물은 지금 없어요.”

비올레는 카르한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짤막한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제 나눴던 대화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온종일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아쉽기만 했다.

카르한이 먼저 손을 뻗어 일리아의 손을 잡았다. 새벽 공기 때문에 조금 차가워진 손바닥에 온기가 옮겨갔다. 두 손에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카르한은 손가락 끝으로 일리아의 반지를 문질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제 생일이 되기 전에 돌아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봄이 오기 직전의 겨울, 그때가 카르한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분쟁 지역에 가서 오랫동안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매듭짓는 것이 카르한의 소임이었다. 카르한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몇 달 만에 끝내겠다고 맹세했다.

가을 초입의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쌀쌀해진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카르한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일리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추우니 빨리 들어가십시오.”

“외투 안 벗어줘도 돼요. 현관 앞인걸요.”

“저는 마차에 실은 외투를 입으면 됩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몹시 그다운 행동에 일리아는 입술을 다물었다. 몇 달 사이, 카르한은 많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구석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카르한 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테시온이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왔는지 테시온의 코끝이 조금 붉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어떤 그늘도 없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카르한이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은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여행 떠나는 사람을 배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모습에 카르한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드디어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블로든 저택 본관이 점점 멀어지고, 흐드러지다 못해 꽃잎이 떨어진 장미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카르한이 눈을 감았다. 곧이어 닫혔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는 결의로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카르한은 홀로 다짐했다.

***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일리아는 카르한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비올레와 상의해서 유통망을 늘려보기로 했다.

카르한이 갈 분쟁 지역은 수도에서 먼 지방이었기에 뭔가 보내려고 해도 오래 걸렸다. 운송비가 비싼 탓에 물건을 잔뜩 실어서 이곳저곳 경유했는데, 차라리 지역마다 운송 업체를 두면 어떨까 싶었다.

경유지에서 재분류해서 운송한다면 지금보다 속도가 빨라질 터였다. 더불어 유통 단계도 대폭 축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는 수도에서 판매되는 물건이 지방에서 열 배 넘는 가격에 팔리는 경우를 봤었다. 유통업자들이 폭리를 취해 가격을 지나치게 높인 것이다.

만약 작은 마을까지 단번에 운송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된다면, 지방 사람들도 지금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구상을 끝낸 일리아는 고민하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실행에 옮겼다.

“후우…….”

바쁘게 일하던 와중, 한숨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는데도, 때때로 카르한이 불쑥 생각났다. 잘 가고 있을지, 식사는 잘 하는지……. 울적해진 일리아는 기분을 전환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디를 가도 카르한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곳곳에 전부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일리아는 어느새 카르한이 머무르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일리아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일리아의 부름에 클리프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어쩐 일로 여기에 있냐고 묻는 대신, 제안을 건넸다.

“잠깐 차라도 마실까요?”

“그러자꾸나.”

클리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응접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와 클리프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화제는 카르한으로 넘어왔다.

“잘 가고 있겠죠?”

“그렇겠지. 네 엄마가 호위까지 붙여줬으니까.”

비올레는 작별 선물로 든든한 비밀 호위를 붙여주었다. 혹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수상한 자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카르한이 알게 되면 신경 쓸까 봐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순무를 주실 줄 몰랐어요.”

클리프는 카르한에게 순무가 심긴 화분을 선물해주었다. 뜬금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그냥 평범한 순무가 아니었다.

클리프는 작년에 취미로 화훼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어간 식물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심지어 저 먼 곳에서 공수해온 선인장까지 단숨에 죽였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상심한 클리프는 텃밭에서 순무 하나를 가져왔는데, 유일하게 죽지 않고 버텼다. 그는 무척 기뻐하며 순무를 애지중지 키웠다. 이름도 지어주고 영양제도 듬뿍 주었다.

노래를 들려주면 잘 큰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노래까지 불러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렇게나 아끼던 순무를 카르한에게 준 것이다.

“순무는 또 키우면 되니까.”

클리프는 왠지 아련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그나저나 자선 사업 건은 잘 되어가고?”

“네, 일단 어떻게 할지 초안은 잡아뒀어요.”

일리아는 자선 경매부터 열기로 했다. 경매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후에, 후원자들을 모을 계획이었다.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꾸준히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일리아는 첫 번째로 빈민가부터 구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빈민가 출신인 프란체와 바네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프란체는 빈민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바네사는 환경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의견을 따라, 일리아는 빈민가에 학교를 세우고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될 것이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흐뭇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던 클리프가 말했다.

“나도 경매에 내놓을 만한 물건을 찾아보마.”

“고마워요. 아버지.”

벌써 출품할 물건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바네사가 습작 그림을 한 점 주기로 했고, 비올레와 헤인리도 동참했다. 황후 또한 소식을 듣고 기꺼이 애장품을 내놓겠노라 약조했다.

‘카르한이 준 옷, 확인도 못 했네.’

카르한은 떠나기 전에,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유행이 지나긴 했는데, 전부 깨끗하게 입어서 가져왔습니다.

-잘했어요. 원단만 잘라서 다시 활용하면 되니까요.

-아, 옷 한 벌은 수선해야 합니다. 단추가 하나 떨어져서…….

일리아는 아직도 가방을 열어보지 못했다. 겨우 그의 빈자리에 익숙해지려 하는 참이었다. 괜히 카르한의 옷을 보면 더 보고 싶을까 봐 참고 있었다.

클리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그래, 일찍 들어오거라. 저녁에는 다 같이 식사할 거니까.”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여준 후에 응접실을 나섰다. 외출 준비를 끝낸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을 대동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일리아가 향한 곳은 델로타 저택이었다. 저택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문 앞에 서 있던 스텔라를 발견했다.

“오랜만이네.”

일리아가 먼저 인사하자, 스텔라는 팔짱 낀 팔을 풀었다.

“오랜만은 무슨. 보름 전에 봤잖아.”

스텔라가 정확한 날짜를 상기시켜주었다. 그런 걸 전부 외우나 싶어서 일리아가 신기한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따라 와.”

스텔라가 먼저 등을 돌린 채 걸어갔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따라, 잘 꾸며진 응접실로 들어섰다. 밝고 화사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는데,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오늘 이렇게 스텔라를 찾아온 것은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둘은 이전에 일리아가 제안한 꽃차 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었다.

뒤에 서 있던 고용인이 둥근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찻잔 안에서 주홍색 꽃잎이 서서히 피어났다. 더불어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완성된 거야?”

“맞아. 시음해봐.”

스텔라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눈요기도 되고, 향기도 좋았다. 일리아가 한 모금 마시자, 스텔라의 얼굴에 기대감과 초조함이 서렸다. 맛과 향을 음미하는데 스텔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때?”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대답했다.

“맛있네. 쓴맛 없이 부드러운 데다가 색도 예쁘고.”

일리아가 칭찬을 늘어놓자, 스텔라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누가 만든 건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스텔라가 양 어깨를 펴고 말하자 일리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이대로 가?”

“먼저 수요층부터 확실하게 정하자.”

고급화로 갈지, 대중성을 노릴지 노선부터 정해야 했다. 일리아와 스텔라는 그것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꽃차는 특정 가게에서만 판매하기로 결정 내렸다.

아주 비싸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디서나 구할 수는 없는 상품. 선물로 주기도 좋고, 사람들은 일부러 이 차를 마시기 위해서 가게를 찾을 터였다. 무엇보다 대중성을 노리기엔 아직까지 꽃잎 재배량이 많지 않았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끝냈을 때, 스텔라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여태껏 지켜봐온 바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소공자가 떠났다는 소식 들었어.”

카르한 이야기가 나오자 일리아가 멈칫했다. 일부러 소식을 알리진 않았으나, 이미 알음알음 퍼져나간 상태였다.

“이번에 정말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떠나버려서…….”

시기가 안 좋았다고 스텔라가 꿍얼거렸다.

“돌아오면 꼭 사과할 거야.”

거짓말하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일리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하려던 이야기가 있었지.’

사교계의 유행을 꽉 잡고 있는 스텔라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일리아는 가죽 가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스텔라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대대적인 자선 사업을 해볼까 싶어.”

“웬 자선 사업?”

“많이 벌었으니 환원해야지. 경매부터 열 생각인데, 너도 참가하는 건 어때.”

계속 생각했지만, 역시 입소문을 타는 일은 스텔라를 빼놓고 논할 수가 없었다. 잠깐 흥미를 보였던 스텔라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팩 돌렸다.

“내가 왜? 너랑 손잡는 건 꽃차 사업뿐이야!”

“두고 갈 테니, 싫으면 버리든지.”

일리아는 자선 사업안을 적어둔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둔 후 가방을 챙겼다.

“이만 간다.”

스텔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가 응접실을 나가버리고, 스텔라는 문을 쳐다보다가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

냉큼 종이를 집어 든 스텔라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정독하기 시작했다.

***

저택을 떠난 지 하루가 흘렀다. 수도를 막 벗어났을 즈음 사방이 캄캄해졌다. 카르한은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테시온에게 말했다.

“오늘은 근처 마을에서 쉬고, 아침 일찍 떠나자.”

“여관을 물색해보겠습니다.”

테시온은 금방 괜찮아 보이는 여관 하나를 찾아냈다.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처럼 으리으리하진 않았지만, 하룻밤 묵기엔 나쁘지 않았다.

카르한은 곧바로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침대에 앉고 나니 일리아 생각이 절실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나 보고 싶으면 어쩌나 싶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준 검은 곰인형을 제 무릎에 올려두고 끌어안았다. 푹신한 감촉이 좋아서 카르한은 잠깐 그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씻을까 하는데,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카르한은 곰인형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을 빼든 기사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싼 채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깐 멈춰 서 있자,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에반테온 소공자.”

그가 곧바로 카르한을 알아보았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검 때문에 거기서 꼼짝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카르한은 사내가 누구인지 몰라 미간을 좁혔다.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인가. 잠시 생각하는데,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입니다.”

뜻밖의 발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블레어드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이라니……. 기묘한 대치 끝에 카르한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저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단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여관 복도는 대화하기 마땅치 않은 공간이었다. 카르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 방으로 들어가지요.”

그리고 여전히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을 슥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블로든 저택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를 따라오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붙잡고 추궁하자, 비올레의 수족이라 밝혔다. 그때서야 카르한은 비올레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기묘한 동행이 이어졌고, 이들은 카르한의 주위를 엄호해주었다. 지금 기사들이 검을 겨눈 것도 중년의 사내가 수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손님들이 볼 수도 있으니 검은 내려놓으십시오.”

카르한의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거두었다. 카르한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테시온이 머무르고 있을 옆방을 한번 쳐다보았다. 초저녁부터 피곤해했으니 벌써 잠들어버렸을 것이다.

카르한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자 뒤이어 중년의 사내가 따라왔다. 문이 닫히고 카르한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절대 평범하다 할 수 없었다. 마치 묵은 원한을 품은 뱀처럼 독기가 가득했다. 카르한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제레인 엘리오드입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카르한은 그가 엘리오드 백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르한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까 엘리오드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입니다.

카르한은 블레어드가 정확히 어떤 사고를 쳤는지 몰랐다. 자신이 수도로 돌아왔을 때, 블레어드는 이미 외국으로 도망간 후였다.

공작 가문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해서 쉬쉬했던지라,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저를 불러들일 정도로 큰 사고를 쳤나 보구나 하고 어림짐작했다. 카르한이 아는 거라곤, 레베타가 거금이 필요해서 자신을 스텔라와 약혼시키려 했다는 것뿐이었다.

카르한의 표정이 좀 더 딱딱해졌다. 만약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은 둘로 나뉠 수 있었다. 블레어드의 형제인 제게 보복하거나, 자신을 이용해서 다른 목적을 달성하거나.

눈에 서린 독기와 달리 엘리오드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진작 찾아뵙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분쟁 지역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따라왔습니다.”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난다는 소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수도를 떠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개인적으로 정보를 알아낸 듯했다. 계속해서 엘리오드가 말을 이었다.

“계속 전쟁터에 머무르다가 작년에 에반테온 가문 후계자가 되었고……, 올해 황궁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셨지요.”

“…….”

“소공자께서 후계자 자리에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보를 보이신 거라 생각했습니다.”

엘리오드는 카르한을 살피듯이 눈동자를 굴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분쟁 지역으로 떠나시는 까닭은……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까?”

민감한 문제를 파고들어오자, 카르한의 눈썹머리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아직 엘리오드의 의중을 알지 못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려서 실수할까 싶어서였다. 카르한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엘리오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소공자께서 욕심이 있고, 서로의 목적이 일치한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카르한이 그제야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블레어드 에반테온의 신변을 넘겨주십시오.”

카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들의 복수는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뿐입니다.”

“……만약 제가 형님과 사이가 좋다면 어쩌실 겁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엘리오드가 딱 잘라 대답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쫓기듯 분쟁 지역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엘리오드가 확신을 담아 속삭였다.

“아들이 말해준 것이니 확실합니다.”

엘리오드의 하나뿐인 아들은 블레어드가 속해있던 비밀 모임의 회원이었다. 유독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아들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에반테온 공자는 술만 마시면 동생 욕을 그렇게 한다니까요.

-이건 비밀인데, 지금 소공자가 전쟁터를 전전하는 것도 전부 블레어드 에반테온 때문인가 봐요.

물론 그때의 엘리오드는 아들이 다니는 모임이 평범한 사교 모임인 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계자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어도 분명 소공자께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카르한은 섣불리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엘리오드가 카르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를 신뢰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는 서늘한 얼굴로 속삭였다.

“기회를 만들어드리면, 그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주시면 됩니다.”

***

일리아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자선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로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였다.

경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스텔라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처음 제안을 꺼냈을 때만 해도 관심 없어 하더니 이틀 후에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후원할까 생각 중이었어. 뭐, 한 번 정도는 참석해줄게.

마지못해서 참석하는 척하더니, 자기가 더 신이 나서 여기저기 홍보하고 다녔다.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스텔라가 나선 후로 금방 소문이 돌았다. 요즘 가장 주목 받는 행사가 되었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끝내놓고 펜을 들었다. 지금부터 카르한에게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펜을 든 채 한참 종이만 내려다보았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는데, 뭐부터 적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일단 안부를 물은 후에 근황을 말해주고…….

한참 끙끙거리고 있는데,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방문할 사람이 있던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사람인가 싶어서 일리아가 다시 물었다.

“누군데?”

“에반테온 공작부인이십니다.”

익숙한 이름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조만간 에반테온 공작저로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응접실로 안내해드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옷매무새만 간단하게 고친 후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는 레베타가 보였다.

“간만에 뵙습니다. 공작부인.”

“오랜만이군요.”

일리아의 인사에 레베타가 미소 지으며 반겨주었다. 일리아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베타였다.

“카르한이 떠나고 적적할까 싶어서 찾아와봤어요.”

일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위해주는 척하고 있으나,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훤히 보였다. 레베타는 유감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애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쟁 지역에 갔다 해도 금방 돌아올 거예요.”

“…….”

“어찌 되었든 가문의 후계자인걸요.”

레베타는 지금 일리아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카르한이 금방 돌아와 공작이 될 거라는 희망을 주려고 말이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레베타를 보며 일리아가 미소 지었다.

“공작부인 말씀을 믿어요.”

레베타의 얼굴에 언뜻 안도가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카르한이 근래에 블로든 저택에 머물렀나요?”

“네, 제가 최근에 좋지 않은 일을 겪은지라…… 걱정이 되었나 봐요.”

“저런.”

레베타도 일리아의 납치 사건을 알고 있는지 별말 하지 않았다. 사실 카르한이 에반테온 공작저를 나온 이유는 공작 가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카르한의 사정을 알게 된 일리아의 가족들이 블로든 저택으로 들어오라고 성화를 부린 탓도 있었다.

일리아는 레베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불안해할 것이다. 카르한이 혹시 가정사에 대해 말했을까 봐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걱정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혹시 스스로의 행동을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일리아는 카르한의 말에 의지해서 공작 가문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가문 사람들의 학대도, 그가 전쟁터로 가야 했던 이유도……. 일리아는 카르한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감돌고, 레베타가 질문했다.

“그런데 리하트 테르시안과 파혼했다죠?”

레베타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전에 일리아는 리하트 핑계를 대며 카르한과 약혼을 미루었다.

“빨리 약혼해야지 않겠어요?”

“하지만 소공자가 분쟁 지역으로 떠나버렸는걸요.”

“식은 늦게 치르더라도, 서류는 미리 올릴 수 있으니까요.”

즉, 카르한이 없는 지금 빨리 약혼 서약서를 쓰라는 말이었다. 블로든에게서 합법적으로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일리아는 말없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에반테온 공자께서 돌아오셨던데요.”

일리아가 블레어드를 언급하자, 레베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자께서 오시자마자 소공자가 분쟁 지역으로 보내졌는데, 불안해서 제가 어떻게 약혼을 할 수 있을까요.”

“……장남은 잠깐 제국에 들른 것뿐이에요. 그대가 걱정할 일은 없어요.”

레베타는 동요한 얼굴을 감추려 애썼지만, 일리아의 눈에 전부 보였다. 아무래도 블레어드와 일리아가 만났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저도 공작부인의 말씀이 사실일 거라 믿어요.”

“…….”

“하지만 제가 사업하는 집안 사람이라 그런지…… 구두 약속은 믿을 수가 없어서요.”

일리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증해주시겠어요? 에반테온 소공자에게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일리아가 공증 운운하자, 레베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작위 문제로 공증을 받을 때는, 황제가 직접 승인해주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레베타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형식적인 미소도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보기보다 철저하군요.”

“제가 의심이 많아서요.”

“나는 영애가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레베타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일리아는 스텔라보다 장점이 많아서 선택한 패였다. 하지만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레베타에게는 스텔라가 있었다. 약혼을 취소하고 싶지 않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던 스텔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델로타 영애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결국 스텔라가 언급되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언제든 카르한의 약혼자를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들이라는 밑천을 두고 장사하려는 레베타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소공자가 분쟁 지역으로 가 있는 사이에 다시 약혼자를 바꾸시려고요?”

더 이상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레베타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쳤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소공자는 공작부인께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요?”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레베타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죠.”

“에반테온 공자와 똑같이요?”

레베타의 반듯하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질색이었기에, 일리아는 계속 궁금했던 것을 대놓고 물었다.

“공작부인께서 왜 소공자에게만 매몰차게 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대가 무엇을 안다고!”

레베타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에는 불안함과 분노가 가득했다. 마치 지금껏 꼭꼭 숨겨온 본심이 파헤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거짓말이에요.”

“아뇨,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한 거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레베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래서 그 애가 내가 자기를 괴롭혔다고 하던가요?”

“…….”

“분쟁 지역으로 떠난 것도 내 잘못이라고 탓할 거냐고요!”

일리아가 침묵하자, 레베타는 입술만 짓씹었다. 그녀가 의자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우아한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불안해하는 여인만 있을 뿐이었다.

“……잘못은 그 애가 한 거예요.”

레베타는 숨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카르한이 저질렀던 잘못을 늘어놓았다. 무척 아끼던 물건을 훔친 것, 짐승의 사체를 침실에 던져둔 것, 옷을 난도질한 것……. 거기까지 말한 레베타가 좀 더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대도 내 입장이 되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레베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에 가까웠다. 한 명을 괴롭히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리아가 아는 카르한은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블레어드의 소행이겠지.’

그러나 레베타는 블레어드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제 앞에서 여우처럼 굴던 블레어드를 떠올렸다가 지워냈다. 그놈이라면 충분히 레베타를 구워삶았을 것 같았다.

“소공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걸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 번쯤은 현장에서 잡힐 만하잖아요.”

레베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이어진 기행이었지만,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던 레베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카르한이 집을 떠난 후로 그런 일이 뚝 끊겼어요.”

“소공자가 스스로 집을 떠날 때까지 누군가가 죄를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죠.”

레베타가 입술을 짓씹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녀의 입술에 핏물이 맺혔다.

“……무례하군요.”

레베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내가 오해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틀리지 않았어요.”

결국 그녀가 취한 것은 회피였다. 지금까지 굳게 믿어온 진실을 함부로 파헤쳤다가, 저 자신이 무너질까 싶어서였다. 레베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약혼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죠.”

레베타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공작부인.”

일리아의 부름에 그녀가 멈춰 섰다.

“후회하지 마세요.”

“내가 후회할 것 같아요?”

레베타가 비웃었다.

“아까 했던 말은 정정하죠. 내 아들은 블레어드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잠깐이라도 흔들렸다는 사실을 떨쳐내듯, 단호히 말했다.

“난 그 애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

카르한이 수도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마차는 열심히 달렸다.

처음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거리를 꽉 채웠지만, 수도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거리는 쇠퇴해갔다.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로……. 그러다 작은 촌락만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카르한은 황량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도착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에 테시온이 엉덩이를 들었다 뗐다. 며칠 내내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지 불편한 모양이었다. 마차가 워낙 크고 넓어서 누워도 될 정도였지만, 어찌 그러겠냐며 끝끝내 사양했다.

창문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엘리오드 백작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기묘한 만남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버렸다. 카르한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요구한 게 있다면 블레어드의 신변이었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복수를 매듭짓고 싶은 듯했다. 카르한은 일단 엘리오드 백작의 말이 진실인지부터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하면 편지부터 보내야지.”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편지의 반절 이상은 보고 싶다는 말로 가득할 것이다.

뒤늦게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초입인데도 잎사귀 없는 마른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사라졌다. 이곳은 에반테온 공작령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마차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고용인들이 카르한을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르한이 가만히 바라보자, 남자가 움찔했다.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도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만나자마자 저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익숙했던 반응이었는데, 그간 잊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마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한 관리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짐은 저희가 옮길 테니, 먼저 침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마을을 둘러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인은 망설이다가 마지못해서 걸음을 뗐다.

“초행이시니,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관리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가를 살펴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카르한과 테시온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삭막하다 못해서 쓰러지기 직전의 집들이 즐비했다. 심한 경우에는 집터에 지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무언가만 세워져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와 가까운 마을이라 한들, 정도가 심했다.

“이대로 방치되어 온 겁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관리인이 어깨를 움찔하며 대답해주었다.

“이 마을은 세금을 낼 형편조차 되지 않아서, 도리어 구휼금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그조차 받기가 어려워…….”

잦은 전쟁과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토지 탓에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단체로 이주하자니, 공작이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예 땅을 비워두면 몰래 들어온 야만족들이 터를 잡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저희는 계속 이렇게 지내왔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관리인의 목소리는 묘하게 차가웠다. 알량한 동정을 하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도에서 좋은 것만 보고 살아온 귀족들에게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카르한이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어떤 이들은 카르한과 마주치자마자 주저앉았다.

“역병 환자도 이 정도 취급은 아닐 텐데…….”

테시온이 미간을 좁힌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카르한은 자신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은 분홍색 셔츠를 입어야지.

혼자 다짐한 카르한은 잠시 멈춰 섰다. 반쯤 무너진 담벼락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된 겁니까?”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와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짓자니, 일할 사람이 없어서…….”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버려, 마을엔 노약자만 남아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이 말했다.

“그럼 제가 고쳐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너진 돌덩이들은 장정 둘 이상이 붙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막 와서 의욕이 넘쳐서 저러나, 하고 다들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돌무더기 앞에 선 카르한이 큼직한 바위를 붙들었다.

“!!”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거대한 바위가 단숨에 담벼락 위에 놓인 것이다. 다들 경악하는 사이, 카르한은 다시 두 번째 돌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녁 안으로 다 쌓아드리겠습니다.”

***

루벤투스는 공작령 끄트머리에 위치한 마을의 관리인이었다. 마을을 돌보며 공작 가문에 보고를 올리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바쁜 나날을 보내던 루벤투스는 얼마 전에 위로부터 지령을 전달 받았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앞으로 분쟁 지역에 머무를 테니, 적당히 대우해주라는 명령이었다.

루벤투스는 그때부터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공자는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이름 뒤에는 항상 전쟁광, 살인귀, 개차반…… 그런 말들이 붙었다. 분명 작년에 수도로 귀환한 것으로 아는데, 살육을 못 잊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오는 걸까 싶었다.

한참 걱정하던 루벤투스는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어차피 이렇게 작은 마을은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지금까지 이곳을 들렀던 귀족들은 더럽고 불쾌한 곳에 있기 싫다며 금방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카르한이 도착했을 때, 루벤투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차갑고 매서운 인상이긴 했으나 말투와 행동은 무척 정중했다. 작은 마을의 관리인인 그에게도 꼬박꼬박 존대해주었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카르한은 곧장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반쯤 무너진 담장을 보던 카르한이 말했다.

-그럼 제가 고쳐보겠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 셋이 겨우 달라붙어야 들 수 있는 돌을, 카르한이 번쩍 든 것이다.

그는 힘들지도 않는지 척척 담장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루벤투스는 충격 받았다. 어마어마한 괴력도 놀라웠지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묵묵히 돌을 쌓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카르한은 정말로 저녁이 오기 전까지 담장을 전부 말끔하게 보수해놓았다. 뒤늦게 정신 차린 루벤투스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목욕물을 준비해두었다.

“씻고 나오시는 동안, 저녁을 준비해두겠습니다.”

카르한이 씻는 동안, 루벤투스는 고용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식량 창고를 탈탈 털어 그나마 번듯한 음식을 마련했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상한 분이야. 행패 부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첫인상이 날카로워서 긴장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소문은 부풀려진 모양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카르한과 테시온이 새로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도착했다. 아까와 달리 분홍색 셔츠를 입은 카르한의 모습에 루벤투스는 잠시 멈칫했다.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고 제법 어울렸다.

“앉으십시오.”

카르한이 상석에 앉자, 접시가 테이블에 하나씩 놓였다. 옥수수 수프, 밀빵, 닭고기 구이, 약간의 과일이 전부였다. 높으신 분을 대접하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특식이었다. 카르한의 눈치를 보던 루벤투스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가장 앞에 있던 접시부터 깔끔하게 비워나갔다. 음식이 형편없다고 포크를 던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루벤투스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가 뒤늦게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언제쯤 전장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사흘 후에 떠날까 싶습니다.”

이곳은 변경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분쟁 지역이라 해도 매일 전투가 벌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카르한은 이곳에서 사흘 정도 머무른 후에 전투지로 떠날 생각이었다. 가서 상황을 살핀 후, 전투가 없을 때는 이곳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루벤투스는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깨작거렸다. 창고에 남아 있는 식료품을 떠올리면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카르한이 조용히 물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원래라면 루벤투스가 해야 할 말을 카르한이 하고 있었다. 당황한 루벤투스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이제 곧 겨울이라, 식량을 비축해두어야 합니다. 그래도 귀하신 분께서 오셨으니…….”

카르한이 미간을 좁혔다.

“근처 영지에서 식량을 조달 받지 못하는 겁니까.”

“작년에 흉년이라며 구휼금이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와 가깝기에 병사들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올 때가 잦습니다.”

요즘 들어 군영지에서 이탈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들까지 챙기다 보니 물자가 부족해졌다. 루벤투스는 순식간에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올해는 유독 힘든 겨울을 나게 될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뒤늦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본의 아니게 이 땅의 주인인 공작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버렸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공작의 차남이었다. 황급히 변명하려는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예?”

카르한이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벤투스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현관 앞으로 나갔다. 깜깜해진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 여러 대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루벤투스가 입만 떡 벌리고 있자, 카르한이 마차로 다가가 천 덮개를 벗겼다. 곡식, 건조 과일, 육포, 간식까지 다양했다. 짐마다 어떤 품목인지 적혀 있어서 분류하기 쉬웠다.

카르한은 포장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혼자 감동에 젖어서 포장지 위의 글씨를 손끝으로 쓸었다. 고개를 든 카르한이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예, 겨울은 충분히 날 수 있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루벤투스는 무척 밝은 얼굴이었다. 카르한은 짐마차를 힐끗 보았다.

어차피 혼자서 다 쓸 수 없는 양이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일부러 짐을 과하게 꾸려준 것이었다.

이걸로 이번 겨울은 어찌 넘길 수 있을 것 같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공작이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면 이 마을은 결국 쇠락할 것이다.

카르한이 맡은 임무는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 마을을 구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잠깐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분명 일리아도 자신의 고민을 들었더라면 망설이지 말라고 응원해주었을 것이다. 고심하던 카르한이 루벤투스에게 물었다.

“행정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게…….”

루벤투스는 우물쭈물했다. 이곳 관리인은 루벤투스 혼자뿐이라 행정 쪽은 손 놓은 지 오래였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루벤투스는 카르한을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창고나 다름없어 보이는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카르한은 어마어마하게 쌓인 서류탑을 목격했다. 전투 보고서, 자금 계획서, 마을에 출입한 사람 명단까지……. 서류가 분류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섞여있었다.

“이런 실정이라……,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루벤투스는 잠시 망설였다. 저렇게 많은 걸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자칫 잘못 건드리면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이 겨우 빈자리를 확보해 책상 앞에 앉고, 테시온이 보조해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

루벤투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카르한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넋 놓고 서 있던 루벤투스는 카르한의 손이 스치고 간 서류를 확인했다. 같은 범주끼리 분류해둔 데다가 안건까지 세부적으로 재정리해두었다.

조용히 경탄하는 루벤투스의 눈빛엔 이미 존경이 가득했다. 도대체 누가 소공자를 개차반이라고 했던가! 그딴 소문을 낸 놈을 찾으면 바로 멱살을 쥐고 흔들어줄 수 있었다.

“엣취.”

그때 테시온이 재채기하자, 카르한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루벤투스를 바라보았다. 루벤투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른 채 목청 높여 말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성심성의껏 소공자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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