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18/28)
  • 18장

    ***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카르한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바라보자, 블레어드는 조금 놀란 듯했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지금의 카르한은 블레어드만 보면 고개를 수그리던 어린 짐승이 아니었다. 블레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만.”

    카르한을 훑던 블레어드가 도리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질책하기 시작했다.

    “카르한, 너야말로 무슨 예의인지 모르겠구나. 여긴 집이 아니다.”

    “…….”

    “대화 중에 난입하다니, 무례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카르한이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역시 블레어드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었다. 항상 말려드는 것은 카르한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먼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깨지더라도 부딪쳐보고 싶었다. 그때 카르한의 등 뒤에 서 있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쁠 만하지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서늘한 시선이 블레어드에게 닿았다. 일리아의 얼굴에선 미소 한 자락도 볼 수 없었다.

    “연인이 다른 남자랑 있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나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팔에 손을 얹었다. 블레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까 말씀만 듣고 두 분 사이가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여기서 일리아가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블레어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빠르게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오갔다. 두 사람은 창과 방패였다. 일리아는 상대의 표정을 잘 파악했지만, 블레어드는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이내 블레어드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어드는 오히려 깔끔하게 사과해왔다. 지적하면 바로 발끈하던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놈이라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카르한 너도, 집에서 보자꾸나.”

    눈도장 찍은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블레어드는 미련 없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분석을 끝냈다.

    ‘여우 같은 놈.’

    블레어드 때문에 피 터지게 당했을 카르한이 뻔히 보였다. 카르한의 자존감이 낮아진 것도 저놈 탓이 컸으리라.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일리아는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뒤늦게 이곳에 찾아오게 된 목적을 상기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

    분명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다. 그러나 카르한의 얼굴을 보니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안색이 무척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에 얹은 손을 거두고 먼저 걸음을 뗐다.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뒤따랐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오르는 동안 기분이 더더욱 나빠졌다.

    아까는 블레어드 때문에 분노가 끓어올랐는데, 이젠 속상함이 밀려왔다. 지금껏 카르한이 어떻게 당해왔을지 보여서…….

    “어느 방이에요?”

    꼭대기 층에 도착한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앞으로 나서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일리아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해요.”

    먼저 사과부터 한 일리아는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일단 블레어드에 대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그런데 장남은 외국에 가있다 하지 않았어요?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거라.”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말을 덧붙였다.

    “이전부터 감시인이 붙었는데, 이번에 급하게 나오느라 따돌리질 못했습니다.”

    아마 감시인이 블레어드한테 이야기해줘서 찾아온 것 같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블레어드가 완전히 돌아온 거라면……, 상황이 나빴다. 카르한의 말로는 적어도 내년쯤에 귀국할 거라 했기 때문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카르한도 블레어드가 어쩌다 돌아온 것인지 모르는 눈치여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카르한은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쓰라렸다.

    “왜 눈치 봐요. 당신 잘못한 거 없잖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색 눈동자는 흙탕물이 떨어진 것처럼 탁했다. 일리아는 팔을 뻗어 카르한의 손을 잡았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 카르한을 자리에 앉혔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는 대신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둘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일리아는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가 지워냈다. 숨을 짧게 들이마신 일리아가 물었다.

    “분쟁 지역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요. 당신의 의도도, 생각도.”

    일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카르한은 다급히 숨을 삼켰다.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떨어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둘러댈 거짓말을 대강 생각해두었지만, 차마 지껄일 수가 없었다. 그런 카르한을 보던 일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마음에 걸린 게 있었는데……, 혹시 헤인리 오라버니를 도와줬던 것 때문이에요?”

    카르한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때로는 눈이 입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일리아는 카르한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진실임을 알아차렸다.

    손끝이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슴 아래에서부터 숨이 차오르고 눈동자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문제였다. 카르한이 괜찮다고 말했기에.

    하지만 카르한을 배척하는 공작이 아무런 대가 없이 헤인리를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아직 블로든과 약혼하지 않은 데다가, 카르한은 결국 버리는 패가 아닌가.

    “……당신 바보예요?”

    일리아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카르한의 눈동자에 일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숨이 막혀왔다. 일리아의 눈물에 온몸이 잠겨버린 듯했다. 꽉 막혔던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카르한은 고장 난 것처럼 몇 번이고 사과를 반복했다. 일리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에 물었다.

    “왜 그랬어요?”

    “그러니까……,”

    카르한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매번 받기만 해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일리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과 거래하고, 카르한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일리아에게는 늘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독단으로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지금 저를 울려서 사과하는 것임을. 카르한은 바보였다.

    일리아는 두 팔을 벌려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서 아예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신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사과하지 마요.”

    카르한은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멈추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두 팔을 뻗어 일리아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카르한의 태도 때문에 다시 눈물이 나왔다. 여기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일리아였다. 카르한이 저 몰래 그런 결정을 내렸다 한들, 결국 일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하려는 그의 태도도 그렇고, 혼자 속앓이 했을 것이 보여서…….

    “미안해요.”

    일리아가 사과하자 카르한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일리아는 겨우 눈물을 거두고,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든 일리아가 카르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거절할 방법을 찾아봐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분쟁 지역으로 떠나지 않으면, 블로든 가문이 곤란해질 겁니다.”

    카르한은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양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손 놓고 보고 있던 공작 부부는 슬슬 위협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버티면 블로든 가문에 화살이 돌아갈 게 분명했다. 카르한의 약점이자, 지금의 기반을 다져준 배경이니 말이다.

    아무리 블로든 가문이 대단하다 한들, 에반테온 공작이 작정하고 나서면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국무 회의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편이었기에, 간접적으로 압박을 가해올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자신을 거둬준 안식처가 자기 때문에 망가지길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분쟁 지역에서 세력을 쌓을 수도 있을 겁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하자,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결국 전쟁터인데, 위험하잖아요.”

    보는 눈 많은 수도와 달리, 분쟁 지역은 무법지대였다. 암살한 뒤에 적의 손에 전사했다고 위장하면 그만인 곳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팔을 들었다. 금방 녹아버릴 눈송이를 건드리듯 손가락으로 살살 일리아의 뺨을 문질렀다.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그래서…….”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서서히 휘어졌다.

    “제 생일엔 일리아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문득 자신의 생일에 카르한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저는 겨울이 생일입니다.

    -기다렸다가 그때 축하해줄게요.

    그때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애써 눈물을 참은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보낼 수 없어요.”

    일리아는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볼게요.”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카르한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리아의 고집을 꺾을 능력이 없었다. 일리아는 손등으로 눈을 꾹 눌렀다 뗀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 생일 파티는 거창하게 할 거예요.”

    “얼마나요?”

    “모두가 축하해줄 만큼.”

    수도 사람들 전부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정도로 크게 열 것이다. 평생 제대로 된 생일 축하도 받아보지 못했던 카르한에게 가장 행복한 날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기대해요.”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파티도, 선물도, 케이크조차 없다 해도. 그저 생일에 일리아가 제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미래를 앞두고, 카르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자신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게 맞았다. 일리아가 수를 쓴다 해도 결국 역풍으로 돌아올 것이다.

    카르한은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일리아의 손등을 조심스레 문지르다가 멈추었다. 오랫동안 묻어두고 잊으려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열네 살, 카르한은 공작저를 떠나 전쟁터로 향했다.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진 짐승처럼, 갑자기 펼쳐진 세계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상관은 카르한을 포함한 소년병들에게 몸에 맞지도 않는 갑옷과 무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적을 죽이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첫 전투에 나갔을 때, 카르한은 방어밖에 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적을 찌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카르한은 도피할 곳이 없어서 전쟁터로 떠밀려 왔다 한들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카르한의 옆에서 싸우던 소년병이 쓰러졌다. 카르한이 머뭇거리다 죽이지 못한 적에게 당한 것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누군가가 카르한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뒈지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나가서 뒈져!

    넋 나가 있던 카르한에게 그가 비난을 퍼부었다.

    -그 애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뺨을 얻어맞는 것보다 더한 충격이 밀려왔다. 그는 덜덜 떠는 카르한을 밀친 후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그날 밤, 카르한은 악몽을 꾸었다. 죽어버린 소년병이 나타나 원망을 토로했고, 카르한은 잘못했다고 하염없이 사과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때부터 며칠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장에 보내진 지 하루, 이틀, 열흘. 쏟아지는 눈처럼 죄책감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카르한은 수많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가장 먼저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주저하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

    그 한마디가 칼을 휘두르는 행위에 정당성을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르한은 전투에 재능이 있었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익힌 검술로, 많은 공을 세웠다. 비록 공적 대부분을 빼앗겼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살인과 죽음에 익숙해지고, 동료들이 오늘은 몇 명을 죽일지 내기하는 동안에도 카르한은 최대한 살생을 피했다. 가끔 다쳐서 낙오된 적을 발견하면, 차마 죽이지 못하고 모른 척 지나갔을 정도였다.

    과거에서 빠져나온 카르한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

    “그래도 몇 년을 머물렀더니 전쟁터는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해질 리 없잖아요.”

    일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일리아의 얼굴은 카르한보다 아파 보였다. 카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닮아가는구나.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고 더 아파하며……, 낯설고 생고한 과정이지만 그저 좋았다.

    카르한은 찌푸려진 일리아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떼어냈다. 그제야 표정을 푼 일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는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

    검술 대회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수도는 카르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결승전을 구경했던 호사가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뜨린 탓이었다.

    전장의 악귀라 불리던 에반테온 소공자. 거기다 666번이라는 불길한 숫자를 달고, 기어코 우승을 거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야기할 거리는 넘쳐났다.

    검술 대회가 끝나고 카르한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서신이 쏟아졌다. 축하 서신과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보려 하는 이들이 보낸 초대장으로 가득했다.

    계속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보던 사람들마저 이번 대회가 끝나자, 역시 에반테온 후계자는 다르다며 태도를 달리했다.

    그에 비해, 블레어드 쪽은 무척 잠잠했다. 블레어드가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비밀리에 돌아온 것이 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일리아를 납치했던 용병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자백을 바탕으로, 리하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연회에서 일리아를 해하려 한 정황이 있었고, 테르시안 후작 가문 측에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리하트는 구금되고 말았다.

    수도는 연신 시끄러웠다. 이전에 일리아의 납치 사건으로 떠들썩했는데, 납치한 주범이 약혼자인 리하트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이미 바닥을 친 리하트의 평판은 너덜너덜하다 못해서, 그 이름이 나쁜 의미로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일리아는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그쪽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요즘 일리아는 카르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할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황후께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셨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일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황후라고 한들 공작 가문의 가정사까지 참견하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황제를 통해, 가벼운 설득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뭐라도 해봐야 할 때였다.

    “아가씨, 서신이 왔습니다.”

    고용인의 말에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렇게 따로 챙겨주는 서신은 중요한 것이거나 일리아가 미리 언질을 준 경우였다. 빳빳한 봉투를 살피던 일리아는 인장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서신이었다.

    일리아는 밀랍 인장을 떼어내고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내용은 간략하다 못해서 무척 짧았다.

    [일리아 블로든과 리하트 테르시안의 파혼을 승인합니다.]

    일리아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차분하다 못해서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드디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처리할 때가 온 것이다.

    ***

    에반테온 공작저 만찬장에는 단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가 흩어졌다.

    레베타는 고개를 들어 제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불쑥 나타난 블레어드가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블레어드가 돌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블레어드가 불쑥 찾아온 날, 레베타는 몹시 당황했다. 최근에 서신을 받았지만, 돌아온다는 언질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이미 돌아온 아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서 오너라.

    레베타는 아들을 꽉 안아주었다. 사람이 그리웠던 그녀는 다른 걸 다 떠나서 블레어드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저 기뻤다.

    -아직 백작과 합의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좋겠구나.

    레베타는 언행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블레어드가 실수로 죽여 버린 영식의 부친인 백작이 여전히 벼르는 중이었다. 합의금이 마련될 때까지는 최대한 조용히 있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래도 합의금은 얼추 맞춰져 가니…….

    남은 금액은 블로든 가문을 통해서 조달 받을 생각이었다. 일리아 블로든이 리하트 테르시안에게 파혼 소송을 냈다 들었으니, 두 사람이 파혼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제가 없던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더군요.

    블레어드의 말에 레베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 검술 대회에서…… 카르한이 우승했단다. 전부 내 잘못이야.

    -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블레어드가 레베타를 위로하듯 속삭였다.

    -저는 개의치 않으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

    -그저 카르한이 어머니 몰래 행동하는 게 문제지요.

    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에 레베타는 회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블레어드에게서 시선을 뗀 레베타가 왼편을 응시했다. 테이블 쪽으로 바짝 당겨진 의자가 보였다. 카르한의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다.

    검술 대회가 끝나고, 카르한은 공작저로 돌아오지 않았다. 감시인을 통해서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어떻게 할지 아직 고민 중이라, 일단 내버려두고 있긴 했다.

    상석에서 식사하던 공작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뒤에 서있던 고용인이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공작이 블레어드를 바라보았다. 블레어드가 공작저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공작과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돌아온 것이냐.”

    공작의 물음에 블레어드는 식기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면 그럴 예정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공작을 더 닮은 쪽은 카르한이었다.

    “그 일은 사고라고 생각해서 넘어갔지만…….”

    공작이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알아서 처신 잘 하거라.”

    출렁, 와인이 잔 안에서 흔들렸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방금 마시던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공작은 다른 와인을 마셨다. 그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블레어드는 공작이 앉았던 자리에 놓인 두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자신과 카르한 같았다. 언뜻 보기엔 비슷한 성질을 지녔지만, 질이 달랐다. 같은 와인이라도 값어치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공작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블레어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식기를 들었다. 동요를 숨길 수는 없었는지, 포크 끝이 떨려왔다. 장남이라는 명분도 있었고, 아직까지 많은 원로들의 지지를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로 낙점되어 수업을 받아왔으니,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만 보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무능하다고 알려진 카르한이 조금씩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부는 지금껏 카르한의 재능을 몰랐다. 카르한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블레어드였다. 그때부터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누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공작은 현재 원로들이 블레어드를 지지하고 있고, 레베타 또한 블레어드가 후계자이길 원하니 그를 밀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집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귀찮아서 블레어드를 후계자로 밀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소란을 감안하고서라도 카르한을 후계자로 미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블레어드는 끝이 휘어진 포크를 내려놓았다. 역시 공작은 확실하지 않은 패였다. 지금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블레어드? 입맛이 없니?”

    레베타가 걱정스레 물었다. 블레어드는 능숙하게 감정을 숨기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하게 제 편이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인 레베타뿐이었다.

    “네 아버지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레베타는 다 안다는 듯 블레어드를 위로해주었다.

    “아닙니다. 제 잘못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도 그 일만 떠올리면 이가 갈렸다. 과거에 저지른 멍청한 실수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어차피 카르한은 곧 떠날 테니.”

    블레어드가 멈칫했다.

    “어디로요?”

    “분쟁 지역으로 간다더구나.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레베타의 말에 블레어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그의 표정이 개운해졌다.

    “그럼 카르한이 떠나기 전에 후계자 자리를 받아내야겠군요.”

    ***

    일리아에게 고백한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따라 다시 블로든 저택으로 돌아왔다.

    고백까지 했으나, 분쟁 지역 건으로 일리아와 사이가 약간 서먹해졌다. 특히 일리아를 울린 것이 미안해서, 카르한은 일리아의 주변만 맴돌며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일리아가 워낙 바빠서 그 후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리하트 일도 그렇고, 카르한을 분쟁 지역에 보내지 않기 위해 해결 방법을 찾아보는 듯했다.

    그리고 어제,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 주제는 카르한이 앞으로 지낼 곳이었다.

    -방도 많은데, 그냥 우리 집에서 삽시다!

    -맞아요. 굳이 공작저에서 지낼 필요가 있나요?

    백작 부부는 먼저 나서서 카르한에게 제안했다. 뒤이어 헤인리가 무척 잘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함께 살면 수업 시간을 늘릴 수 있겠군요.

    카르한은 헤인리에게 특별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서류 보는 법과 행정 관련 업무를 배우고 있었다. 만약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 머무른다면 헤인리가 퇴근한 후로 수업을 봐줄 수 있었다.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카르한에게 향했다.

    -같이 지내요.

    결국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서 지내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카르한은 왠지 벅찼다. ‘가족회의’에 자신이 참석한 것도, 앞으로 이들과 한 지붕에서 지내게 되는 것도…….

    무엇보다 일리아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카르한은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짐을 챙겨 오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부 사면 되니까!

    클리프가 테이블을 탁, 치더니 어깨를 폈다. 왠지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 뒤로 다시 토론이 펼쳐졌다. 카르한은 당장 필요한 것만 사려 했으나,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가만두질 않았다.

    -옷은 적어도 세 달 내내 겹치지 않을 정도로 구비해둬야지요.

    -차라리 가게를 하나 사서 통째로 옮겨오는 건 어떻습니까.

    -소공자, 가지고 싶은 걸 말하세요!

    비올레와 헤인리, 클리프가 연달아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있던 일리아가 종이를 카르한에게 건넸다. 어마어마하게 긴 종이가 바닥까지 내려왔다. 카르한은 혹시 살 목록을 적은 건가 싶어서 눈만 깜빡였다.

    -영수증이에요.

    이미 구입하고 통보한 것이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보니, 카르한의 방은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카르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매일 이런 날만 있으면 참 좋을 듯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가시질 않았다. 매번 받기만 했으니, 앞으로는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카르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일리아가 다져준 기반을 밟고 서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계속 일방적으로 도움 받는 처지인 거다.

    카르한은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싶었다. 일리아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무엇보다 제 힘으로 일리아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려면 역시…… 자신이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았다. 분쟁 지역에 가서 세력을 쌓고, 자신의 능력으로 정당하게 후계자가 된다면…… 그때는 아무도 저를 얕보지 못할 것이다.

    “카르한 님, 도착했습니다.”

    창밖을 확인한 테시온이 말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카르한은 마차에서 내려,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거리에는 공방과 아틀리에가 드문드문 있었다.

    쭉 걸어가던 카르한은 나무 간판을 확인했다. 약속 장소인 작은 갤러리였다. 카르한은 짧게 심호흡한 후에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카르한이 문을 열었다. 걸음을 내딛자 그림으로 채워진 작은 공간이 카르한을 둘러쌌다. 카르한은 문을 등진 채 그림을 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서서히 몸을 틀었다. 남자는 에반테온 가문의 원로였다.

    어제 가족회의가 끝났을 때, 클리프는 카르한을 따로 불렀다.

    -소공자를 꼭 뵙고 싶다 하셔서…….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인 에반테온 원로가 카르한을 만나고 싶다고 클리프를 통해 부탁한 것이었다. 바네사의 전시회 때 독대한 적이 있긴 하나, 그 후로 엮일 일이 없었다.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전시회 이후로 처음이군요.”

    원로는 카르한 쪽으로 걸어와 멈춰 섰다.

    “이번 대회에 참관했는데, 우승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때 카르한은 일리아 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관객석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감사합니다.”

    카르한이 짤막한 인사를 건네자, 원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카르한을 살피는 듯한 눈이었다. 한참 말이 없던 원로가 물었다.

    “자리가 버겁지는 않습니까?”

    “후계자 자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질문 속에 담긴 원로의 의중이 궁금했다. 본심을 숨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망설임 끝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버겁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 벅찼다.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흔들림 없는 단단한 대답에 원로의 눈꺼풀이 조금 떨렸다. 그는 더듬듯이 첫 만남을 회상했다. 지금 카르한에게서 그때의 어리숙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두 눈동자에 욕심이 서려 있었다. 탐욕이 아닌, 순수하게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욕심이었다. 고작 몇 달 사이, 무뎌서 쓸모없다 생각한 검은 날을 잘 벼린 명검이 되어 있었다. 분명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한참 말이 없던 원로가 중얼거렸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갤러리를 천천히 돌았다.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공간을 채웠다. 한 바퀴를 전부 채운 후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소공자.”

    원로는 카르한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소공자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

    여름 끝자락이 찾아오고, 미처 떠나지 못한 열기가 대지에 머물렀다. 후원에는 이른 오전부터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찻잔을 든 비올레가 먼저 물었다.

    “온천 사업 때문에 어려운 문제는 없고?”

    일리아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공사는 순조롭고요.”

    대형 복합 시설인 만큼 공사는 오래 걸릴 터였다. 돈과 인력을 갈아 넣었으니 몇 년 안에 완공되겠지만, 안전이 우선이었다.

    “반 정도는 우리 가문 가게를 넣고, 나머지는 입찰 공고를 낼까 싶어요.”

    “그것도 괜찮겠지.”

    블로든 가문이 전부 독점하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입점 시켜 거기에 집중할까 싶었다. 한창 사업 이야기가 오가고 비올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고백은 받았니?”

    일리아는 너무 놀라서 마시고 있던 차를 그대로 뱉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니. 소공자가 고백했냐는 질문이었어.”

    일리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비올레는 지금껏 일리아와 카르한이 교제하는 척해왔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어떻게 아셨지? 혹시 카르한이 말했을까. 아니면 눈치 빠른 비올레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걸지도 몰랐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일리아는 결국 숨겨 왔던 사실을 실토했다. 카르한을 만나게 된 계기와 계약 연애를 하게 된 것, 납치당했던 날 저녁에 고백 받았던 것까지…….

    그때의 일리아는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본인이 전부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하트 일로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몰래 카르한에게 계약 연애를 제안했다.

    “혼자 마음고생 많았겠구나.”

    “…….”

    “앞으로는 우리에게 기대주렴.”

    비올레가 팔을 뻗어 일리아의 손등을 감쌌다. 가슴이 뭉클해진 일리아는 자그맣게 알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참 다행이지.”

    카르한을 떠올렸는지, 비올레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요즘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단다. 물론 네 아버지는 제외하고.”

    팔불출 같은 말에 일리아는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마을 축제에서 첫눈에 반했지만, 비올레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클리프의 성격 때문이었다.

    클리프는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잘난 체하지 않고 베푸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비올레는 늘 클리프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일리아와 헤인리에게 말해왔다. 그만큼 카르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비올레였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차피 귀족이니 큰 처벌은 피하겠죠. 거기다 미수에 그쳤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니 발붙일 곳 없도록 만들어줄까 싶어요.”

    납치에 실패한 리하트는 지금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어찌 되었든 귀족이니 그리 박한 대우를 받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 리하트의 수감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간수에게 돈을 쥐여 주면 알아서 굴려줄 것이다. 재판이 열리면 일리아는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 리하트를 평생 감옥에서 썩도록 할 계획이었다.

    “먹기 위해선 일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줘야죠.”

    지금까지 평생 놀고먹기만 했던 놈이니, 손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리하트의 가족들은 보석금으로 리하트를 빼줄 능력이 되지 않았다.

    후작은 꾸역꾸역 황궁에 출근하는 모양이지만, 늘어나는 빚 때문에 무척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들었다.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집을 찾아오니, 제정신이 아닐 터였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헤인리에게 보복하려 했던 테르시안 후작, 저를 부려먹으며 협박을 일삼던 시오나, 블로든 가문을 돈줄로 보던 후작부인……. 전부 업보인 것이다.

    “그리고 저 파혼 승인 났어요.”

    “드디어 승인이 났구나. 축하한다.”

    비올레가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이제 리하트 테르시안과는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된 것이다.

    “카르한에게는 제가 따로 말할게요.”

    “그래, 필요한 게 있다면 꼭 말하렴.”

    “고마워요.”

    화제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비올레와 한창 이야기하던 도중이었다. 고용인이 일리아를 찾아왔다.

    “바네사 님의 대리인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

    일리아는 곧장 바네사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그림이 완성되면 황궁으로 찾아와달라는 황후의 부탁 때문이었다. 평민인 바네사는 입궁이 처음이었기에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요. 황궁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인걸요.”

    일리아가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자, 바네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꿈만 같아요. 제가 입궁하는 날이 오다니…….”

    가족들도 무척 기뻐했다며 바네사가 수줍게 웃었다. 일리아는 그런 바네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와 부를 얻으면 자만하게 되는 사람이 많았는데, 바네사는 여전히 순수했다. 그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 행복해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바네사 덕분에 반사이익을 얻고 있었다. 사업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 귀족들이 바네사에게 그림을 의뢰하려고 먼저 연락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온천 휴양지가 완공되면, 판매하지 않는 그림을 드려도 될까요?”

    “음, 그것도 좋겠네요.”

    바네사가 그린 습작들을 모아서 작은 전시회를 열어도 좋을 터였다. 몇 년 후면 바네사의 이름은 대륙으로 뻗어 나갈 것이고, 그림을 보기 위해 외국에서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값은 치를 거예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일리아가 속삭였다. 마침내 황후궁에 도착한 일리아와 바네사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한 두 사람은 안쪽에 앉아 있는 황후를 보았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일리아 블로든이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바네사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나란히 인사를 건네자,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와요.”

    세 사람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끝낸 후, 고용인이 흰 천으로 덮인 그림을 가지고 왔다.

    “의뢰해주신 ‘자유’라는 주제로 그려봤습니다.”

    바네사가 직접 흰 천을 걷어내자, 그림이 드러났다. 유화 그림은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한 쪽에 가까웠다.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이 흐릿해서 안개가 끼어 있는 듯했다.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다에는 조각배 하나가 떠 있었다. 묶어둔 줄이 끊겨서 금방 파도에 몸을 싣고 떠나갈 듯한 모양새였다.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바네사의 기교가 돋보였다. 섬세한 물결 묘사와 흐릿하나 밝은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황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바네사는 긴장해서 손가락으로 옷자락만 꼭 쥐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이군요.”

    황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일리아와 바네사는 속으로 안도했다.

    바네사와 황후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끝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황후가 바네사에게 말했다.

    “궁정 화가를 불러두었어요. 한번 만나보세요.”

    황후의 말에 바네사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어릴 적부터 궁정 화가를 만나는 것이 꿈이었던 바네사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거듭한 후에 물러났다. 응접실에는 일리아와 황후만 남게 되었다.

    “오랜만이지요. 저번 연회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황후가 아쉽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근황과 요즘 수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잠깐 정적이 흘렀다. 소소한 이야기는 다 나누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황후 폐하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후는 이전에 일리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노라 약조했다. 그 약속을 떠올렸는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일리아의 부탁에 황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일리아는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이전에 그녀가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겠노라 약조했지만, 곤란한 요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리아는 그만큼 절박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정적을 깨고 황후가 입을 열었다. 나름 긍정적인 반응이었기에, 일리아는 지금 카르한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가정사는 언급하지 않았고, 후계자 문제와 분쟁 지역 건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황후가 직접 에반테온 공작을 불러내서 가문 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리아가 바라는 것은 황후가 황제에게 이 문제를 언급해주는 거였다.

    이번 검술 대회에서 카르한이 우승을 거두었으니 황제도 유능한 인재가 분쟁 지역으로 떠밀려 나가는 것을 원치 않을 터였다. 황제가 카르한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 에반테온 공작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폐하께서 제 말을 들어주실지 모르겠군요.”

    황후는 에둘러서 황제와의 관계를 밝혔다. 일리아는 이전에 황궁 연회에서 봤던 황제 부부를 떠올렸다. 함께 입장하긴 했으나 왠지 서먹해 보였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 싶어, 일리아는 입술 안쪽만 짓씹었다.

    “그래도 폐하께서 에반테온 소공자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니, 이야기는 해보겠어요.”

    황후의 대답에 일리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황후는 잠시 바네사가 두고 간 그림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훌쩍 떠날 것 같은 얼굴로 그림을 보던 그녀가 다시 일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 대회에 저도 참관했었죠. 확실히 에반테온 소공자가 눈에 띄더군요.”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에 나갔는데, 좋은 성과를 거둬서 저도 기뻤습니다.”

    일리아가 은근슬쩍 카르한 자랑을 하자, 황후가 나직하게 웃었다.

    “성실함이 몸에 뱄더군요. 그런 사람이 이 나라를 이끌 인재가 되어줘야 하는데…….”

    순식간에 황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이슈타르 제국은 이번 황제가 즉위한 후 조금씩 부패하고 있었다. 황제는 권력과 재력에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제게 아첨하는 이를 가까이했다. 블로든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도 알아서 굽히고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그런 황제와 자주 부딪쳤고, 결국 공식 석상이 아니면 얼굴도 마주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황태자가 즉위하고 나면, 좀 더 좋은 세상이 올지 모르죠.”

    황후의 눈동자에 황태자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물론 황태자비도 제 역할을 잘 해줘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황궁 연회에서 만났던 황태자비를 떠올렸다. 테르시안 가문 출신이어서 한 번쯤 큰 사달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좋게 넘어갔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태도로 보아 황후는 황태자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황궁을 새로 꾸몄어요. 바쁘지 않다면 구경하고 가요.”

    황후의 권유에 일리아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적하던 차에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니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보도록 해요.”

    일리아는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후 응접실을 나왔다. 황후궁을 빠져나오자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바로 달려왔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음……, 산책 좀 하고 가자.”

    황후의 허락도 받았으니, 황궁을 가볍게 돌아볼 생각이었다. 아무 방해 없이 황궁을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세 사람은 천천히 황궁을 거닐기 시작했다. 화창한 날씨에 햇빛도 너무 강하지 않아, 산책하기 딱 좋았다.

    이곳저곳 황궁을 돌아다니던 일리아는 기시감을 느끼고 잠깐 멈춰 섰다. 왠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일리아는 발이 이끌리는 대로 정원 안쪽에 들어섰다. 인적이 드문 정원에 돌다리가 놓인 연못이 하나 있었다. 연못을 발견한 일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아가씨?”

    프란체가 의아한 얼굴로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연못을 빤히 바라보았다. 딱 한 번 왔는데도, 정경이 그림으로 옮겨 놓은 듯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과거에 일리아가 빠졌던 그 연못이었다.

    “…….”

    맑은 수면 위로 일리아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일리아는 잠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돌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진 자신. 익사 직전의 자신을 구해준 리하트. 그것을 운명이라고 느낀 일리아는 리하트와 결국 약혼까지 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맞물려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리하트가 날 구해준 게 맞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문제였다. 눈을 떴을 때 리하트가 옆에 있었고, 그는 일리아를 구해준 게 자신이라고 대답했었다.

    기억이 흐릿해서 리하트의 증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리하트의 실체를 알고 나니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리하트의 성격이라면 사람이 죽든 말든 자기가 피해 볼까 싶어, 자리를 떴을 가능성이 높았다. 절대 타인을 위해 희생할 유형은 아니었다.

    뭔가를 놓친 것처럼 찝찝해졌다. 의심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만약에 정말 그 자식이 날 구해준 게 아니라면…….’

    일리아의 표정이 고요한 수면처럼 가라앉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일리아가 프란체와 말렉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

    정원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바네사는 궁정 화가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따로 나오기로 하였다.

    마차는 황궁을 벗어나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한참 후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관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카르한을 발견했다.

    “카르한?”

    일리아가 그를 부르자, 카르한이 냉큼 다가왔다. 마중 나온 모양새였다.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궁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막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기서 계속 기다린 거예요?”

    카르한이 눈치 보며 대답했다.

    “빨리 보고 싶어서…….”

    일리아의 속눈썹이 짧게 흔들렸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전부 해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르한이 변명을 덧붙였다. 일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 걸을래요?”

    카르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대답이 들려오는 듯했다. 일리아는 목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두 사람은 후원이 아닌,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여름 햇살을 받아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여관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는 것이었다. 요 며칠 동안 식사시간 또는 가족회의 때나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동안 서로 바쁘기도 했고, 미묘한 기류를 떨칠 수가 없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저 때문에 울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이 지금껏 혼자 속앓이 해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전에 황후 폐하를 뵈었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일리아만 힐끔거리던 카르한의 시선이 완전히 고정되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침묵했다. 늦여름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장미 꽃잎을 건드리자, 은은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향기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카르한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멈춰 선 일리아가 몸을 틀어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일리아, 저는…….”

    카르한이 말을 흐렸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 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떠나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지금껏 생각해두었던 것을 천천히 말해주었다.

    “분쟁 지역은 분명 척박한 곳이나, 중요한 지대입니다.”

    에반테온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야만족과 전쟁을 벌여왔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을 두고 다투는 까닭은 그곳이 방어하기 최적인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변방이라는 이유로 야만족에게 그곳을 내어주었다간 단숨에 공작령까지 밀고 들어올지 몰랐다.

    “그곳에서 제 세력을 새로 쌓을 생각입니다.”

    어찌 되었든 분쟁 지역은 공작령에 속한 지대였다. 그곳에 가면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들과 접촉하기 쉬울 터였다. 카르한은 그쪽 원로들을 공략해 자신만의 세력을 키울 계획이었다.

    이번 대 에반테온 공작은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강하지 않았다. 적당히 본분만 지켰던지라, 그사이 원로들의 입김이 강해져버렸다.

    카르한이 블레어드 대신 후계자가 된 것도,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두면 안 된다는 원로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설명해준 카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전시회에서 뵈었던 원로께서 저를 지지해주기로 하셨습니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아군이 생겼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분쟁 지역으로 떠나 있는 동안, 수도 쪽은 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카르한은 여전히 말이 없는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카르한은 떨리는 팔을 뻗어, 일리아의 손을 감쌌다. 조금만 힘주면 부러질 나뭇가지를 만지듯, 손목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납치당했던 날에 생겼던 멍은 이제 흔적만 겨우 남아있을 정도였다.

    “당신이 제게 준 것들은 너무 과분하고……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지만…….”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목을 문지르다가 두 손으로 꼭 잡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아닌,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제가 쟁취한 힘으로 당신을 지킬 겁니다.”

    올곧은 푸른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그러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일리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부채질 하듯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장미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지금껏 일리아가 시킨 것을 전부 수행해 왔다. 먼저 요구하는 법 없이, 그저 주어진 과제만 묵묵히 해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부탁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하염없이 무거웠다.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한참 후 일리아는 차분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래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날개를 꺾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의 결정을 만류하고 억압한다면 공작가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으로 비행을 배운 그는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오랜 비행 끝에 마지막 종착지는…….

    “돌아오면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요.”

    잔뜩 긴장해 있던 카르한의 얼굴에 서서히 꽃이 피었다. 정원의 만개한 장미처럼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카르한이 뒤늦게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죠. 매일 같이 다닐 거예요.”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붙어 있을 것이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이다. 일리아는 복잡한 마음을 떨쳐낸 채 애써 괜찮은 척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도울게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자신이 처리하고 싶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일리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일리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저 파혼 승인 났어요.”

    카르한이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드디어 리하트와 파혼했다니 무척 기쁜 일이었으나, 카르한은 곧 떠날 사람이었다. 약혼해달라는 말도 못 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첫 고백은 카르한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니까, 약혼하자는 말은 자신이 먼저 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성대하게 말이다.

    ***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일리아는 온종일 골머리를 앓았다. 분위기를 잡고 카르한에게 약혼해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막상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다. 정작 일리아도 제대로 된 청혼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속으로 리하트 욕을 늘어놓은 일리아는 결국 조언을 구하기 위해 비올레를 찾아갔다. 마침 집에 돌아온 비올레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었다.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시게 된 거예요?”

    “우린 따로 약혼 없이 바로 결혼식부터 올렸지. 서로 청혼을 준비 중이었는데, 내가 먼저 하게 되었고.”

    비올레의 말에 일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정원에 데리고 가서 혼신의 검술을 보여준 뒤에, 당신을 평생 지켜주겠다고 청혼했단다.”

    “…….”

    “그때 네 아버지가 어찌나 감동하던지.”

    비올레는 잠시 그날을 회상하는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왠지 경험담을 더 들어봐도 건질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일리아는 고맙다고 인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가 너무 없었기에, 일리아는 결국 책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때부터 카르한에게 떠넘겨줬던 연애 지침서를 사서 정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책은 지식의 창고였다. 일리아는 드디어 계획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완벽해.”

    카르한이 감동 받아서 또 울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다음 날,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끝냈다.

    복도에서부터 응접실까지 양옆으로 촛불을 세워둔 후 카펫과 장미 꽃잎을 깔아두었다. 아쉬워서 금가루까지 뿌려두니, 그야말로 호화 그 자체였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일리아는 고용인을 시켜, 카르한을 불렀다. 응접실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카르한이 오기만을 기다릴 때였다.

    “불이야!”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복도 중앙에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초 하나가 쓰러지면서 카펫에 불이 붙어, 불길이 치솟은 것이다.

    맙소사.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굳어져 있는데, 저 멀리서 카르한이 걸어왔다.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했는지,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가 왔던 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사이 프란체와 말렉이 다급하게 물을 떠왔다. 화재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진압하기엔 물이 부족한지 꺼질 듯하면서 꺼지지 않았다. 그때 욕조 절반만 한 통을 든 카르한이 나타났다.

    촤악, 어마어마한 물이 한꺼번에 끼얹어지자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통을 내던진 카르한이 곧바로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일리아, 괜찮습니까?”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충격 받아서 말을 못 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카르한이 미간을 좁혔다.

    “누가 위험하게 복도에 촛불을 켜둔 건지…….”

    카르한의 말에 프란체와 말렉이 숙연해졌다.

    “그러게요…….”

    일리아는 차마 자신이 그런 거라 말도 못 하고, 맞장구치고 말았다. 결국 완벽하다 생각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그 후로 일리아는 몇 번이나 계획을 세웠지만 전부 망하고 말았다. 대량의 폭죽을 준비해두니 전날에 비가 와서 터지지 않거나, 오페라 극장을 대관하려는데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서 급히 공사에 들어가거나…….

    오기가 생긴 일리아는 본관에 대형 현수막이라도 걸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헤인리가 정색하며 별로라고 말했기에 포기했다. 평소에 일리아가 하는 일이라면 다 좋다고 하는 헤인리였기에, 정말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벌써 다섯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일리아는 울적해졌다. 연애운이 최악이라더니, 이 정도면 세상이 자신의 연애를 방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점술사나 다시 찾아가볼까.’

    이쯤 되니 약혼은 할 수 있는지, 점술사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 일리아의 상황을 알고 있는 헤인리가 제안했다.

    “뱃놀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식히는 건 어떨까.”

    그러고 보니 올해는 뱃놀이를 할 생각도 못 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내년 여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야겠어요. 고마워요.”

    일리아는 오랜만에 카르한과 데이트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멋지게 고백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를 방치해버렸다. 일리아는 스스로의 무심함을 타박했다.

    침실로 올라간 일리아는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고용인에게 카르한을 불러달라 부탁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찾아왔다. 뛰어온 모양인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뱃놀이 하러 갈래요?”

    일리아의 제안에 카르한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본관을 빠져나와 후원에 위치한 호수로 향했다.

    호숫가는 녹음 짙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햇빛이 물결 위로 물방울 같은 얼룩을 만들었다. 잔잔한 호수 끝자락에 작은 나룻배가 떠 있었다.

    일리아가 먼저 배에 올라타고, 카르한이 맞은편에 앉아 노를 잡았다. 그 모습이 왠지 신나 보여서 일리아는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나룻배는 잔잔한 수면을 부수고 힘차게 나아갔다. 호수는 제법 컸지만 카르한이 열심히 노를 저은 덕에 금방 중앙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어디선가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떠다니는 조각구름이 호수에 그대로 비쳤다. 사방이 탁 트인 이곳엔 일리아와 카르한, 단 둘뿐이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평화로운 정경에 심란하던 마음이 조금씩 씻겨나갔다. 헤인리의 조언대로 뱃놀이를 하러 온 것이 정답일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카르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 또한 가만히 일리아를 응시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솨아아, 호숫가에서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일리아의 모자를 낚아챘다.

    “아!”

    뒤늦게 붙잡아 보려 했으나, 모자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상태였다. 챙이 넓어서 가라앉지 않고 수면에 둥둥 떠다녔다. 카르한은 노를 뻗어 모자를 건지려 했다. 얄밉게도 모자는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아쉬운 얼굴로 모자를 응시하던 일리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좋아하던 모자였는데……, 어쩔 수 없죠.”

    “제가 건져오겠습니다.”

    일리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카르한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카르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그를 불렀다. 한쪽으로 무게가 쏠린 배가 기우뚱했다가 금방 균형을 잡았다. 카르한은 기어코 도망간 모자를 건져왔다.

    다시 헤엄쳐서 돌아온 카르한은 나룻배에 두 팔을 가볍게 얹었다. 올라타자니 배가 기울어져서 일리아도 함께 빠질 것 같았다. 반쯤 물에 잠겨 있던 카르한이 난감한 얼굴로 젖은 모자를 내밀었다.

    “당신이 씌워줘요.”

    그가 일부러 가져다주었으니, 젖었더라도 지금 쓰고 싶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한쪽 팔을 뻗은 카르한이 금빛 머리카락 위에 모자를 씌워주었다.

    균형이 맞지 않아, 챙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비뚜름했다. 모자를 고쳐주려는데 일리아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깨끗한 두 눈동자가 서로를 반듯하게 비추었다. 시선의 간격이 좁아, 피부 위로 숨결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머리카락에 닿던 커다란 손바닥이 서서히 내려와 일리아의 뺨을 감쌌다. 메마른 입술 위로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닿았다. 나뭇잎 결을 만지듯 입술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눌러오는 입술은 차가웠으나, 파고드는 숨결은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툭, 툭…… 젖은 모자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까지 이어졌다.

    일리아의 입술에 맺힌 물기를 카르한이 제 입술로 닦아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더 떨렸다.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과 달리,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 쏟아질 거라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능선을 따라가듯 카르한의 입술이 일리아의 입술산을 눌러왔다. 차가웠던 입술은 어느새 열기를 띠었다. 서로의 체온을 삼키며 더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제는 입술에서 거리가 먼 손끝조차 뜨거운 것 같았다.

    끝나지 않는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나룻배는 목적지 없이 흘러갔다.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이 점점 늘어나 하늘을 뒤덮었다.

    기울어진 모자는 좀 더 흘러내려, 넓은 챙이 커튼처럼 두 사람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들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 팔로 몸을 지탱하던 카르한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일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카르한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룻배가 그늘을 벗어나며 막혔던 빛이 쏟아졌다. 밝은 햇빛 아래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일리아는 오랜 고민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카르한, 나랑 약혼해줘요.”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바람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일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카르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 위로 붉은 물이 들었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멋없는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리아의 입매가 서서히 올라가자,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끌어안고 싶은데…….”

    “거기 깊어요?”

    “……발은 닿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르한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일리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배에서 뛰어내렸다. 풍덩,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잠겨들었다.

    이내 물속에서 빠져나온 일리아가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카르한이 일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다행히 호수 언저리까지 떠내려 온 탓에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았다.

    힘껏 끌어안자,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흠뻑 젖어버린 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서히 몸을 떼어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까지 다 젖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가 호숫가를 맴돌다 후원까지 울려 퍼졌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한참 노닥거리다가 뭍으로 올라왔다. 둘 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쫄딱 젖은 채였다. 카르한이 셔츠 자락을 비틀어 물을 짜냈다.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딱 달라붙은 얇은 셔츠 아래로 몸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함께 꿈틀거렸다. 일리아의 귓불이 조금 더 붉게 달아올랐다.

    “빨리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아직 여름인데도 카르한은 일리아가 감기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손을 맞잡은 채 호숫가를 빠져나왔다. 본관에 도착했을 때, 막 외출하려던 헤인리와 마주쳤다.

    “…….”

    계단을 내려오던 헤인리는 그대로 멈춰 섰다.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과 상기된 얼굴을 확인한 헤인리가 배신감 넘치는 얼굴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어깨를 움찔한 카르한은 고개를 숙였다.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일리아를 키워온 헤인리는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다. 리하트와 연애할 때도 외박은 죽어도 안 된다고 소리쳤던 그였다. 일리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헤인리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저희…… 약혼하기로 했어요.”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몇 번이나 안경을 추어올리던 헤인리가 중얼거렸다.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혹시 반대하는 건가 싶어, 일리아도 긴장하고 말았다. 이내 고개를 든 헤인리가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축하 파티다.”

    ***

    에반테온 공작 저택에는 소회의장이 있었다. 가끔 원로들을 불러 회의하는 장소로 쓰여 왔다.

    에반테온 가문의 원로는 총 열세 명으로, 에반테온을 섬기며 가문을 유지하고 부흥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공작가문이 잘되는 만큼 그들에게 떨어지는 이익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가주와 원로는 군신 관계이자, 공생 관계인 것이었다.

    전대 에반테온 공작까지만 해도, 원로들이 치고 들어올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작의 권한이 커서, 안건에 첨언하는 정도로 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 에반테온 공작이 작위를 계승하면서 원로의 권력이 비대해지고 말았다.

    공작은 원로들과 힘겨루기 하지도 않았고, 대체로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 탓에 원로들의 발언권이 강해져버렸다.

    공작이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으나, 열세 명의 원로를 탄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권력을 얻게 된 원로들은 후계자 문제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블레어드가 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몇몇 원로들은 기회를 틈타 카르한을 후계자로 밀어붙였다. 카르한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공작가를 멋대로 주무르려는 생각이었다.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은 그가 저지른 실수가 너무 커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결국 사고를 수습할 때까지 카르한을 앉혀놓자는 식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카르한이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다 왔나?”

    소회의장을 둘러보던 에반테온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한 명이 오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하여…….”

    다른 원로가 대답해주었다. 오늘 오지 못한 원로는 블레어드를 지지하긴 하나, 수도가 아닌 공작령에 머물렀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결과를 통보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블레어드가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원로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럼 논의를…….”

    공작이 입을 여는 그때, 문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회의장 입구를 쳐다보았다. 백발을 쓸어 넘긴 노귀족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중요한 논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너무 늦었습니까?”

    당황한 원로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가 발설했냐고 눈짓했지만, 다들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노귀족이 서 있자, 블레어드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글로시아 원로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글로시아는 원로 중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편이었다.

    오늘 부르지 않은 이유는 그가 중립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른 이들은 오지 않았습니까?”

    글로시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다른 원로가 대답해주었다.

    “예, 그냥 우리끼리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나 하려고 모인 것이었습니다.”

    “후계자 문제를 논의할 거라고 들었는데……, 소공자는 자리에 없군요.”

    “꼭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래도 바쁜 모양입니다.”

    블레어드가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미 카르한에게 공작저로 오라는 연락을 몇 번 했으나, 응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쪽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글로시아가 자리에 앉고, 마침내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정당한 후계자가 돌아왔으니, 다시 자리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원로들은 입을 모아, 블레어드를 후계자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작 부부 또한 블레어드를 다시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기에, 어떻게든 밀어붙여 볼 계획이었다.

    블레어드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머리를 굴렸다. 만약 글로시아의 지지까지 얻게 되면 후계자 자리는 손쉽게 넘어올지도 몰랐다.

    특히 글로시아는 발언권이 강한 편이니 반대파 원로들도 마지못해 수긍할 것이다. 미술품을 좋아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비싼 그림이라도 안겨줄까 고민하는 사이, 가만히 듣고 있던 글로시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결정을 내린다 한들, 다른 원로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글로시아는 고개를 돌려, 블레어드를 응시했다.

    “분명 반발이 있을 겁니다. 밀어붙인다 한들 계속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

    “그리고 저 또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블레어드의 입매가 굳어졌다. 글로시아는 시선을 옮겨 공작을 보며 말했다.

    “제가 의견 하나를 내어도 되겠습니까?”

    공작이 말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두 공자께서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날짜를 정해두고 그날 모두가 모여서 다수결에 따라 후계자를 택하는 겁니다.”

    글로시아의 말에 원로들이 조용해졌다. 후계자를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할 수 있다면 원로들은 이득이었다. 그만큼 원로의 권한이 커지는 것이니 말이다. 반대로 공작 부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각하와 공작부인의 의견입니다.”

    공작은 침묵했다. 원로들도 후계자 문제에 간섭하나, 최종 결정권은 제게 준다는 말이었다. 물론 원로들이 전부 반대하는데 제 의견을 밀어붙일 수는 없겠지만, 결과가 비등비등하다면 자신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원로들도 각자 지지하는 후계자가 다르니 이 기회에 그들을 갈라놓고, 양분된 권력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습니까?”

    “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먼저 찬성표를 던진 것은 블레어드였다. 모두의 시선이 블레어드에게 향했다.

    “그 편이 공평한 것 같지 않습니까?”

    블레어드가 에반테온 공작과 레베타를 보며 물었다. 레베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어버렸고, 공작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블레어드는 자신 있었다. 어차피 열세 명의 원로 중, 일곱 명이 제 편이었다. 만약 글로시아가 계속 중립을 유지한다 해도, 공작 부부를 내세워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 후계자 자리를 내놓았던 블레어드는 다시 후계자가 될 정당성이 필요했다.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후계자 자리를 쟁취한다면 더 이상 저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카르한은 곧 분쟁 지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전쟁터에 나가면 원로들과 접촉하기도 어려울 테니, 제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블레어드는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 원로들을 가볍게 훑었다. 이번 일로 원로들의 권한이 더 커질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공작위를 계승한 후에 제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마침내 에반테온 공작이 결정을 내렸다.

    “내년 봄, 모든 원로들이 모이는 총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가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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