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17장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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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장

    검술 대회 결승전이 있는 날 아침. 일리아는 아침 일찍 방문한 손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테시온, 어쩐 일이에요?”

    혹시 카르한도 왔나 싶어서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아가 카르한을 찾는다는 걸 눈치챈 테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 혼자 왔습니다. 혹시…… 잠깐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왠지 심각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응접실로 들어갔다. 일리아는 고용인에게 허브 차를 준비해 달라 일렀다. 일리아와 테시온이 마주 앉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일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테시온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 님께서…… 분쟁 지역으로 떠나시게 생겼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일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말만 분쟁 지역이지, 결국 전쟁터가 아닌가. 일리아는 놀라서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무슨 일로요?”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름이 끝난 후라는 말씀밖에…….”

    테시온이 말을 흐리자,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명 공작 부부의 소행일 것이다. 카르한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치워버리려는 속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르한은 공식적인 에반테온 가문 후계자였다. 게다가 이제 평판도 좋아졌고 입지도 어느 정도 다진 상황이었다. 거절하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물어볼게요. 그런 다음 함께 대책을 찾아 봐요.”

    “감사합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테시온이 울먹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대회 준비를 하러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테시온이 떠나고, 일리아는 이미 식어버린 허브 차를 바라보았다. 심란하다 못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카르한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무슨 연유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정해진 일인지, 아니면 제게 비밀로 한 것인지.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었다고 또…….

    “아가씨, 준비하셔야 합니다.”

    말렉이 일리아를 불렀다.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고민하다 보니 벌써 늦은 오전이었다.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경기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말렉, 프란체 불러주고 마차 대기시켜줘.”

    “예.”

    일리아는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연무장에서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일리아는 폭이 좁고 활동하기 편한 드레스를 입었다.

    현관으로 내려오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볼일을 본 후에 황궁으로 곧장 간다고 들었고, 헤인리는 아침 일찍 황궁에 출근했다. 자신만 따로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일리아는 간이 계단을 밟고 마차에 올라탔다. 프란체와 말렉이 맞은편에 앉자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을 빠져나온 마차는 황궁으로 향했다.

    창밖을 바라보자 묘하게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올해 들어 황궁을 방문하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블로든 저택에서 황궁으로 가는 지름길은 하나뿐이었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마차는 대로로 나가기 전, 한적한 골목을 통과했다.

    “!”

    잘 달리던 마차가 급하게 멈추었다. 내부가 크게 흔들리자,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마차 손잡이를 붙들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말렉이 다급히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설마 또 사고가 난 건가?”

    그때 밖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서……!”

    왠지 바깥이 시끄러웠다. 날카로운 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프란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형님.”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프란체가 조용히 말렉을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챈 말렉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란체와 말렉이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마차 주위로 검을 든 사내 여럿이 둘러싸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훈련 받은 용병으로 보였다. 프란체와 말렉이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공격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프란체는 제게 덤비는 두 놈을 단숨에 제압했다. 덩치 큰 용병들도 프란체와 정면으로 붙으니 금방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프란체가 완전히 우세한 것도 아니었다. 머릿수도 많고 좁은 골목인지라 상대하기 번거로웠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니, 한눈팔 수가 없었다.

    프란체가 대다수의 용병을 맡는 사이, 말렉은 마차 문에 딱 달라붙어서 접근하는 놈들을 상대했다. 용병들은 마치 일리아의 호위기사들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유독 프란체에게 인원이 많이 붙은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프란체와 말렉이 밀리지 않자, 용병들은 슬슬 당황하는 눈치였다.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고작 발을 묶어두는 것이 전부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불리할 뿐이었다.

    “형님! 창문 쪽에……!”

    한 번에 네 사람을 상대하던 프란체가 그사이 말렉 쪽을 보고 소리쳤다. 말렉은 마차 창문을 건드리는 놈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프란체의 발을 묶어 놓던 용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이다!”

    외침과 함께 다른 방향에서 두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중 하나가 연습이라도 한 듯 신속하게 마부를 끌어내렸다. 마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다른 남자가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 돼!!”

    “아가씨!”

    프란체와 말렉이 소리 질렀다. 마부석에 앉은 남자가 채찍을 휘두르자, 말이 흥분해서 날뛰었다. 말렉이 재빨리 손을 뻗어 마차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들었다.

    그러나 용병들은 말렉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 손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말렉은 결국 마차를 놓치고 말았다.

    프란체와 말렉이 용병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는 사이, 마차는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움직이지 마.”

    마차 안으로 들이닥친 사내가 단도를 들이밀며 말했다. 일리아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그저 침묵했다. 사내가 단도를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호위기사들이 예상보다 더 괴물이었잖아.”

    일리아는 사내를 살폈다. 단순한 용병 같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 계획적으로 움직인 듯했다. 하필이면 딱 그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도 그렇고, 프란체와 말렉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내 정보를 잘 아는 사람과 결탁한 모양인데…….’

    머릿속에 의심되는 인물이 스쳐지나갔다.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 마차가 멈추었다.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사내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예 다른 방향으로 틀었으니,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들키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 빠져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계획과 많이 틀어졌는지 그들은 인상을 썼다.

    “마차가 너무 눈에 띄어서 버리고 가야 할 것 같아.”

    “이걸 버리자고? 아까운데. 마음 같아서는 내다 팔고 싶구만.”

    일리아에게 단도를 들이민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어차피 일리아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쩔까. 계획대로 데리고 가?”

    “솔직히 말해서 꼭 데려다 줄 필요 없는 거 아냐?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야 정보만 얻었으니 됐지.”

    “그래도 귀족인데, 나중에 보복 당하면?”

    “보복은 무슨. 이미 망했다고 유명하던데.”

    단도를 든 사내가 코웃음 쳤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이 일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아채게 되었다.

    ‘리하트 테르시안.’

    문득 스텔라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 저지를 것 같아서. 경고해주는 거야.

    기껏해야 저를 찾아와서 난동 부릴 줄 알았는데…… 결국 갈 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용병들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용병들에게 일리아의 정보를 주며 납치해달라고 부탁한 듯했다. 몇 년을 교제했으니 일리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용병들의 경우에는 일리아를 납치하기만 하면 블로든 가문에서 돈을 왕창 뜯어낼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돈을 노리고 납치당한 적이 많았기에, 이런 상황은 익숙했다. 어찌 되었든 계획대로 납치하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납치만큼은 나를 따를 경력자가 없을걸.’

    일리아는 납치라면 도가 텄다는 것이었다.

    일리아를 앞에 두고 숙덕거리던 용병들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서 돈 나눠 먹자.”

    “뭐?”

    “어차피 인질은 여기 있으니까, 우리가 직접 몸값을 요구하면 되지.”

    단도를 든 남자의 설득에 수염을 기른 사내는 침묵했다. 그러자 남자가 부추겼다.

    “다른 놈들이랑 나누면 손에 얼마나 들어올 것 같아?”

    “……만약에 보복 당하면?”

    “우린 돈만 받고 잠적하면 그만이지. 외국으로 도망치면 어떻게 찾겠어.”

    그가 일리아를 힐끗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려 블로든이야. 부르는 대로 돈을 줄 테니,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좋아.”

    결국 수염 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용병들이 의리가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로 동료들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돈이 목적이어서 다행이었다. 제게 원한을 품었더라면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테니까.

    “몸값으로 얼마를 요구하지?”

    꿈에 부푼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100만 크로엘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거 아냐?”

    듣고 있던 일리아는 어이없어졌다.

    ‘내 몸값이 그거밖에 안 돼?’

    고작 그 돈을 받으려고 저를 납치했다니.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던 일리아는 지난 납치 경력을 총 동원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황금빛 미래를 꿈꾸던 두 남자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이, 아가씨. 돈만 받으면 풀어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우리 얼굴 봤는데, 그냥 풀어줘도 돼?”

    “먼 곳에 떨어뜨려놓고 떠나면 되지. 다들 이 아가씨 찾는 동안 우린 도망가면 되는 거야.”

    일리아를 살려두면 돈 버린 셈 치고 자신들을 찾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죽여 버리면 외국까지 추격이 붙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다시 숙덕거렸다. 어떻게 블로든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무사히 도망칠지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일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이 근처에 비자금을 숨겨둔 곳이 있어요.”

    두 남자가 동시에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받고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있는데?”

    “최소 100만 크로엘 이상이에요.”

    용병들의 눈이 금방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아까 그들이 너무 거금이지 않느냐고 낄낄대던 금액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비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면 블로든과 따로 접선할 필요도 없었다. 돈을 찾는 그 즉시 제국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은행 같은 곳은 아니지?”

    “제, 제가 소유한 건물 지하에 있어요.”

    일리아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그러자 수염 기른 사내가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함정이면? 괜히 거기까지 갔는데,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

    “비밀 장소라 아무도 몰라요…….”

    일리아의 대답에 두 쌍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부자들은 부모도 모르게 비자금을 은닉한다잖아. 그 돈인가 보지.”

    “더럽게 해 처먹었군.”

    그들은 자신들이 의적이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였다.

    “한 명이 돈을 가져오는 사이, 남은 사람이 인질을 감시하자.”

    수염 난 사내의 말에 단도 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돈 가져올 테니, 네가 감시하고 있어.”

    “무슨 소리야? 내가 가는 게 훨씬 낫지. 넌 인상이 험악하잖아.”

    누가 돈을 가지러 갈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다. 돈으로 맺어진 동맹답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구경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납치범끼리 분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적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수도 경비대에서 날 찾고 있겠지.’

    적어도 30분 이상은 흘렀으니, 수도 경비대 전체에 연락이 들어갔을 것이다. 결국 서로를 불신하던 용병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함께 가자고.”

    “그래, 괜히 흩어졌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겉보기엔 타협한 듯하나,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는 깨져버린 듯했다. 용병들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음을 깨닫고 다급히 움직였다.

    수염 난 사내가 마부석에서 모자 달린 외투를 주워왔다. 남자 옷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넉넉하게 감추어졌다.

    “어이, 빨리 내려!”

    남자가 일리아의 손목을 틀어쥐고 끌어내렸다. 손목이 아파서 일리아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위치는?”

    일리아가 우물쭈물하자 그가 단도를 고쳐 쥐며 윽박질렀다.

    “똑바로 말해!”

    “14번가예요…….”

    일리아가 겁에 질린 척하며 대답했다.

    “멀진 않지만 그렇게 가깝지도 않군. 앞장서.”

    남자가 고갯짓하자 일리아가 먼저 걸어갔다. 수염 난 사내가 일리아의 옆에 섰다. 단도를 치운 사내는 일리아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섰다.

    세 사람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다른 사람과 마주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용병들은 일리아를 호위하는 기사인 척했다.

    ‘지금쯤이면 마차가 발견되었을지도.’

    크고 화려한 마차였기에 금방 눈에 띄었을 것이다. 일리아는 얌전히 걷는 척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 경비대 건물이 있었지.’

    일리아는 수도 지리를 대강 알고 있었다. 워낙 납치당하거나 유괴당하는 일이 많다 보니, 부모님이 외우게 한 덕분이었다. 용병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서로를 감시하느라 바빴다. 혹시 한쪽이 불순한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구둣발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경비대원을 발견한 남자가 짤막하게 소리쳤다.

    “숨어!”

    일리아는 팔이 붙들린 채 용병들과 함께 골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뭐야, 벌써부터 수색이 들어간 거야?”

    “설마. 그냥 우연인 거 아닐까.”

    당황한 용병들이 벽에 등을 붙였다. 금방 지나가겠거니 했지만, 우연이 아닌 듯 경비대원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이 근처를 싹 뒤져 봐라!”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길목을 전부 막아!”

    용병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경비대가 자신들을 찾는 것이 분명해졌다.

    “빌어먹을, 이제 어쩌지?”

    그들은 초조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상한 것보다 너무 일렀다.

    ‘우리 가문이 괜히 후원금을 기부하는 줄 아나.’

    블로든 가문은 경비대에 지금껏 천문학적인 금액을 후원했다. 제일가는 후원자 집안 딸이 납치당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여전히 겁에 질린 척 연기하며 고개를 숙였다. 방심할 틈을 줘야 했다. 기회가 있으면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이다. 괜히 인질극까지 펼쳐지면 골치 아파진다.

    경비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더 많은 추적이 따라붙었다. 골목 어귀에서 숨죽이고 있던 용병들은 이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용병들이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여기까지 와 놓고? 만약 반대편에도 경비대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때 가서 생각해. 여기 있으면 무조건 잡혀!”

    결국 용병들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빨리빨리 걸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일리아를 재촉했다.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된 줄도 모른 채.

    일리아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경비대와 마주치게 되면, 용병들은 서로를 배신할 것이다. 자기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일리아는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잔뜩 긴장한 용병들이 발걸음을 죽여 골목을 걸어 나갔다. 좁은 골목을 한참 걷자, 드디어 출구가 보였다. 출구 쪽은 텅 비어 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주위가 조용했다. 경비대의 발소리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옅은 그늘만 드리운 채였다.

    “아무도 없어!”

    수염 난 사내가 희열에 가득 차 소리쳤다.

    “일단 내가 먼저 나가서 확인해볼게.”

    그가 먼저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조용하던 공간에 저벅,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고 짙은 그림자가 골목 안쪽까지 늘어졌다. 마치 골목 끝에 담벼락이 들어선 듯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한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서 다들 굳어져 있을 때, 카르한이 먼저 움직였다.

    “아악!!”

    거대한 몸집이 허공에 들렸다가 짤막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내리꽂혔다. 쿵! 굉음과 함께 수염 난 사내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남은 용병과 일리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일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단도를 꺼내들었다. 이 틈을 타, 먼저 반격하기 위해서 카르한에게 달려들었다.

    “!”

    단도가 카르한의 몸에 닿기도 전, 남자의 팔이 그대로 꺾였다. 남자가 주저앉자, 카르한은 망설임 없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고통에 찬 비명이 골목에 생생히 울려 퍼졌다.

    “끄으윽…….”

    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채였다.

    “살려……,”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 카르한은 구둣발로 그의 다리를 짓뭉갰다. 엄청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가 기절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비명 소리가 멎었다.

    조용해진 골목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지 카르한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골목 안쪽에 홀로 서 있던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

    카르한은 그대로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디 다친 곳 없는지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이윽고 카르한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일리아에게 달려왔다. 다리가 몇 번이고 꺾여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끝내 일리아의 앞까지 다가와, 두 팔로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리아를 끌어안은 단단한 두 팔이 떨려왔다. 귓가에 울음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 소리가 무척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일리아를 끌어안은 카르한이 제 고개를 작은 어깨에 묻었다. 한 자리에 부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일리아는 겨우 팔을 들어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온통 땀투성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다닌 것인지…….

    “카르한, 나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는데, 왜 이렇게 떨어요. 걱정 많이 했어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카르한이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히, 걱정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일리아의 손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울먹이듯 속삭였다.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일리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

    그리고 뒤늦게 카르한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카르한의 머리에 얹힌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카르한 또한 일리아를 끌어안은 팔을 거두었다.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주위가 온통 조용한데, 심장 뛰는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을 때.

    “찾았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경갑을 갖춘 경비대원 셋이 달려왔다. 카르한이 끌어안아 로브가 벗겨진 탓에 환한 금발이 드러난 상태였다. 금발을 확인한 경비대원이 물었다.

    “블로든 영애십니까!”

    달려온 경비대원이 잠시 멈칫했다. 일리아 앞에 서 있는 카르한의 뒷모습을 보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제 연인이에요.”

    “아, 에반테온 소공자십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안심한 듯 긴장을 풀었다. 두 명의 경비대원이 쓰러져 있는 용병들을 일으켰다. 남은 한 명이 일리아와 카르한에게 말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 축 처져있었다. 거기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상태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카르한이 진정한 뒤에 듣는 게 좋을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경비대원을 따라 우선 근처에 위치한 경비대 건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경비대원에게 그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물어보았다.

    “제가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도가 뒤집어졌습니다.”

    대략적인 설명을 들어보니, 프란체와 말렉이 마차를 습격한 놈들을 전부 제압한 후 곧바로 일리아가 납치되었음을 신고했다.

    그때부터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리아의 가족들은 납치라면 도가 텄다. 납치당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이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붙잡힌 용병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즉시 수도 전체에 수배령을 내리고, 황실에서 공문을 받아내 성문을 닫았다. 그리고 용의자를 추린 후, 수도의 용병 집단을 전부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불법 집단을 대거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명분도 있겠다, 이 틈을 타서 미심쩍던 용병 길드를 전부 잡아낸 듯했다.

    “그리고 블로든 백작께서 납치범들에게 거액의 현상금도 거셨던지라…….”

    “얼마나요?”

    경비대원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었다.

    “1,000만 크로엘입니다.”

    일리아를 납치한 용병들이 블로든 가문에 요구하려던 금액의 딱 10배였다.

    ‘내 몸값보다 비싸네.’

    그때 경비대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크게 젖혀졌다. 헤인리와 블로든 백작 부부가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일리아!!!”

    “아이고, 내 딸!!”

    단숨에 일리아의 뺨을 감싼 클리프가 소리쳤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많이 무서웠지? 어디 다친 곳은?”

    헤인리가 곧바로 일리아를 살폈고,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경비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납치범 놈들은 어디에 있죠?”

    그녀의 말 뒤로 ‘죽여 버리게.’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일리아를 살피던 세 사람은 뒤늦게 옆에 앉아있던 카르한을 발견했다. 카르한의 얼굴을 본 그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울었는지 눈도 새빨갛고, 머리카락과 옷도 잔뜩 흐트러져서 엉망이었다.

    아니, 왜 소공자가 납치당한 것 같은 얼굴이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르한이 구해줬어요.”

    “……소공자가?”

    헤인리가 놀라서 묻자, 뒤에 서 있던 경비대원이 입증해주었다.

    “저희가 영애를 찾았을 때, 납치범들은 이미 제압당한 후였습니다.”

    모두가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축 처져 있는 것이,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공자, 일리아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맞아요. 이렇게 빨리 마무리된 건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뒤이어 비올레와 헤인리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기운 없는 얼굴로 일리아의 손만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죠.”

    비올레의 말과 함께 다들 경비대 건물을 빠져나와 마차 한 대에 올라탔다. 워낙 큰 마차라 다섯 명이 앉아도 너끈했다. 푹신한 등받이가 닿자, 순식간에 몸이 피곤해졌다. 납치당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긴장한 모양이었다.

    지쳐버린 일리아는 졸기 시작했다. 카르한이 조심스레 제 어깨를 내주었고, 어느 순간 완전히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마차는 저택 본관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잠에서 깬 일리아가 내리자, 프란체와 말렉이 뛰어왔다.

    “아가씨…….”

    프란체가 일리아의 앞에 멈춰선 채 울먹거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 먼저 들어가 계세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카르한과 가족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현관 앞에는 일리아와 프란체, 말렉만 남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프란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프란체는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호위기사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잘라주십시오.”

    “마찬가지입니다.”

    말렉도 덩달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둘 다 자기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탓했다. 침통한 얼굴의 말렉과 어린아이처럼 우는 프란체를 내려다보던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지 마. 둘 다 나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잖아. 그리고 멀쩡하게 돌아왔는걸.”

    일리아가 괜찮다고 달래주었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던 프란체가 말했다.

    “제가 너무 자만했습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됐는데…….”

    눈앞에서 일리아가 납치당하고, 프란체는 크게 충격 받았다. 스스로가 몹시 무력하게 느껴진 것이다.

    프란체는 제게 달려들던 놈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일리아의 마차를 추격했다. 그러나 이미 떠나버린 마차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던 말렉이 근처 경비대를 찾아가 신고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리아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경비대원들을 따라 정신없이 수도 여기저기를 뒤졌다.

    마침내 블로든 영애가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전언이 오고 나서야 둘은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약 일리아가 잘못되었더라면, 프란체는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아가씨, 저는…….”

    프란체가 꺽꺽거렸다.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프란체의 마지막 말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둘 다 일어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렉, 프란체. 나는 두 사람을 자를 생각 없어.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였으니까. 그리고…….”

    일리아는 화가 난 얼굴로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약속 지켜, 프란체.”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프란체는 무척이나 오래된 일을 상기했다. 일리아와 프란체의 첫 만남은, 프란체가 감히 블로든 가문 아가씨의 지갑을 훔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배운 것이 소매치기뿐이라, 평소처럼 아무 지갑이나 훔쳤다. 오늘 치 할당량을 채웠다고 기뻐하는 사이, 빈민가로 경비대가 들이닥쳤다.

    프란체는 곧바로 붙잡혔고, 자신의 형처럼 매 맞아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리아는 깡마른 소년이 붙잡혀온 것을 보더니 오히려 프란체를 감싸주었고, 빈민가에서 꺼내주었다.

    -우리 집에 가자.

    일리아는 프란체를 저택으로 데려가서 먹여주고 씻겨주고 교육도 시켜주었다. 프란체는 매일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블로든 저택 사람들은 다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태생이 빈민가 출신인지라 스스로 눈치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내쫓길지 모른다는 걱정도 자꾸만 들었다. 결국 프란체는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 프란체는 장식품이나 돈 될 만한 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넣은 후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저택이 너무 넓어서 아침이 오기 전까지 탈출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프란체는 결국 일리아와 복도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프란체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주머니 사이로 훔친 장신구가 삐져나왔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일리아는 훔친 물건을 봤음에도 모른 척 물었다.

    -화장실 가니?

    그 말에 프란체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은혜도 모르고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용서를 빌자, 일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집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걸어서 나가긴 힘들 거라며 마차를 불러주었다. 프란체는 그렇게 블로든 저택을 떠났다. 다시 길거리로 돌아온 프란체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후회했다.

    가지고 나온 돈은 어른들에게 전부 빼앗겼고, 반항하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 거리에서 프란체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프란체는 계속 일리아를 생각했다. 그렇게 나오지 말 것을. 인생에 딱 한 번뿐인 기회였는데 죽도록 노력해볼걸. 길거리에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일리아가 다시 찾아왔다.

    -네가 나가고 나니까 심심하더라. 다시 돌아오면 안 돼?

    프란체는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 그리고 그날 맹세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죽기로 했던 목숨, 아가씨께 바치겠습니다.”

    프란체는 입술을 떨었다. 사실 그가 검술을 배운 것도, 전부 일리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프란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결국 옆에 있던 말렉까지 눈물을 보였다. 프란체보다 연장자인 만큼 침착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한바탕 우는 바람에 일리아도 울컥했으나 애써 참았다. 자신이 울면 프란체와 말렉은 더 울 것 같았다. 일리아는 한참 동안 괜찮다고 달래주었다. 겨우 눈물을 거둔 두 사람이 꼬질꼬질한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수련에 들어갈 겁니다.”

    “오늘은 쉬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이 연무장에 가 있는 듯했다. 결국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프란체와 말렉이 연무장으로 가버리고, 일리아는 본관에 들어와 복도를 걸었다.

    ‘많이 놀랐을 테니까, 내일 함께 차라도 마셔야겠네.’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싶었다. 말렉은 일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봐온 사이였고, 프란체는 성장 과정을 함께했기에 둘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런 일로 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일리아는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걸어갔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푹신한 소파에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일리아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카르한은요?”

    “많이 지쳐 보여서 쉬고 오라고 보냈어.”

    헤인리가 대답해주었다. 확실히 피곤할 만했다. 경기 때문에 계속 긴장했을 거고, 직접 저를 찾으러 왔으니.

    ‘나중에 카르한이 깨어나면,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카르한과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분쟁 지역에 관한 것도, 그리고 고백도……. 일리아는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경기는 어떻게 되었어요?”

    “당연히 소공자가 우승을 거뒀단다.”

    “경기가 끝났을 때 네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비올레와 클리프가 나란히 말했다. 헤인리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납치에 가담한 놈들은 전부 체포했어.”

    “…….”

    “아마 재판이 열리면 최대 종신형에 그치겠지만……. 그렇게 끝낼 순 없지.”

    헤인리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돈을 써서라도 이번 납치에 가담한 놈들을 끝까지 짓밟아버릴 생각인 듯했다.

    “그래도 다친 곳이 없어서…….”

    일리아를 꼼꼼히 훑던 헤인리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일리아, 네 손목…….”

    “아.”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의 손목에 닿았다. 흰 손목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아까 용병이 손목을 강제로 잡아끌어서 생긴 자국이었다. 손목을 본 클리프가 대번에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우리 귀한 딸 손목에 무슨!!!”

    “지금 당장 그놈들을 찾아가야겠어요.”

    비올레가 중얼거리자, 헤인리가 말을 받았다.

    “역시 종신형으로는 성이 안 찰 것 같습니다.”

    다들 분노에 가득 차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일리아는 흥분한 가족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 리하트가 주모자예요.”

    “뭐라고?”

    “아직은 심증뿐이지만, 거의 확실해요.”

    아마 용병들을 문책하면 확실한 증거가 나올 거라고 일리아가 말했다. 헤인리의 부드러운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비올레 표정도 무척 싸늘해졌다. 만약 리하트가 눈앞에 있었다면 조각 낼 법한 기세였다. 그런 둘 사이에 앉아 있던 클리프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 일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일리아 너는 걱정 말거라.”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

    침실로 돌아왔을 땐 벌써 저녁이었다. 일리아는 저녁도 먹지 않고, 과일로 대충 배를 채웠다. 피곤해서 그런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일리아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망설임 없이 용병을 짓밟던 카르한……. 일말의 자비 없던 모습과 달리, 그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너졌다. 그렇게나 감정을 쏟아내는 카르한은 또 처음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깨어나면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다.

    한참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일리아는 의아해졌다. 누구냐고 물으려는 그때, 바깥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혹시 깨어 있습니까?”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기 전이었다. 옷매무새만 대충 고친 일리아가 대답했다.

    “깨어있어요.”

    일리아는 곧장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서 있던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애써 진정시켜놓은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괜찮다면……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는 침실을 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후원을 산책하는 대신, 응접실과 이어진 테라스로 나갔다.

    문을 닫고 나니 저녁 바람이 밀려왔다. 사방은 온통 어둑한데, 보름달이 떠서 그런지 달빛은 밝았다. 고요한 저녁에 2층 테라스와 높이가 엇비슷한 나무만이 바람결에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뱉었다. 침묵을 깬 것은 카르한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계속 쉬었더니, 이제 멀쩡해졌어요. 당신은요?”

    “저도 한숨 잤더니 괜찮습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안색이 썩 좋진 않았다. 그를 살피던 일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면서요? 정말 축하해요.”

    “……예.”

    일리아의 들뜬 목소리에 그제야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우승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카르한이 말을 흐렸다. 일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가 놓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기에, 무척 아쉬웠다.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해요. 당신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리아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자 카르한은 설핏 미소 지었다. 평소의 카르한 같았다. 일리아는 무슨 말을 먼저 할지 몰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하려던 말을 뒤로 미루고,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절 찾은 거예요?”

    “소식을 듣자마자 황궁을 빠져나와 경비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납치당한 곳부터 추적하다가 버려진 마차를 발견했습니다.”

    그 근처를 전부 수색했다고 그가 대답했다. 일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납치당했던 곳에서 마차가 버려진 곳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거기다 근처를 전부 돌았다면 엄청나게 뛰어야 했을 것이다.

    ‘막 경기까지 치르고 오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리아는 숨을 삼킨 후에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카르한.”

    카르한은 고개만 내저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실은 그때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카르한의 어깨가 미약하게 떨려왔다. 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팔을 뻗어 카르한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피부의 감촉이 느껴지더니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떨림이 점점 가라앉고, 카르한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일리아의 손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두운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멍이 남아있었다.

    “……손목이.”

    카르한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일리아의 손목만 내려다보았다. 일리아는 뒤늦게 제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조금 흉하죠? 약을 바르긴 했는데, 며칠은 있어야 멍이 빠질 거예요.”

    일리아는 아예 팔을 등 뒤로 숨겨버렸다. 그러자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찾았다면…….”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니에요. 아프지도 않은걸요.”

    카르한은 마치 자신이 더 아픈 얼굴이었다. 입술을 잘근 깨문 그가 외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 주십시오.”

    머뭇거리던 일리아가 다시 손목을 보여주었다. 눈에 새기듯 손목을 찬찬히 살피던 카르한이 손수건을 펼쳤다. 일리아가 줬던 그 손수건이었다. 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계속 가지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허리를 숙여 일리아의 팔목에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생각보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전쟁터에서 붕대 감을 일이 많았겠구나.’

    괜히 가슴이 아릿해졌다. 카르한은 작은 리본까지 묶어준 후에 손을 거두었다. 손목에 자리 잡은 멍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다정함이 봄바람처럼 마음에 스며들었다. 머리 위에 흐르는 무수한 별들이 속살거렸다. 지금이 고백할 때라고.

    그때, 카르한도 어떤 결심을 한 것인지 가만히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남색에 가까워진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일리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후, 카르한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찰나였지만 둘은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시선을 마주했다. 작은 테라스는 무대였다. 쏟아지는 달빛은 두 사람을 비춰주는 조명이었다. 수많은 연극에서 쓰인 멋들어진 고백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백사장에 새겨진 단어처럼 전부 썰물에 쓸려 지워졌다. 어떤 대사도 이 마음을 담을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고…….”

    단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는 듯 그는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이 마음을 표현하기 부족했습니다.”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가진 못해도,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일리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로도 부족한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늦여름의 바람처럼 카르한의 목소리가 일리아를 감싸 안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일리아의 눈동자였을지도 몰랐다.

    달빛 아래에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 늘어졌다.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럼에도 온 신경은 서로를 향한 채였다.

    카르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을 풀었다. 검술대회 우승자의 증표인, 황제가 하사한 검이었다. 달빛이 반사되어 칼집 표면에 은하수처럼 길게 빛이 흘렀다.

    “일리아 당신은 제가 운명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당신이 운명이었습니다.”

    카르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일리아에게 칼을 내밀며 말했다.

    “제 인생을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카르한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날이 스쳐지나갔다. 둘이서 서로의 옷을 골라줬던 일, 첫 연극을 보러 갔던 날, 강이 보이는 가게에서 술을 마신 것……. 생각해보면 좋은 날뿐이었다. 아니, 카르한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

    일리아의 기억 속에 카르한은 늘 한결 같았다. 변하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올곧게 서서 일리아를 마주해왔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르한이라면 평생 제 곁에 있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일리아는 인정해야 했다. 이미 그를 마음 깊숙이 품었음을.

    일리아는 조금 떨리는 두 손을 뻗어, 카르한이 내민 검을 받았다. 묵직함이 느껴졌다. 카르한이 지금껏 노력했던 증거이자, 그가 앞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어줄 증표였다. 이것을 건네준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일리아는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에 긴장이 서려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따라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달그락, 대리석 바닥에 검을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의 작은 손바닥이 카르한의 뺨을 감쌌다. 카르한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듯 일리아의 얼굴이 겹쳤다.

    메마른 입술 위로 작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을 때, 카르한은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너무 놀라서 눈만 부릅떠졌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오자, 일리아의 입술이 떨어졌다.

    약간의 거리가 벌어지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눈빛이 닮아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카르한이었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달라지자, 카르한이 두 팔을 벌려 일리아를 안아 올렸다. 일리아는 단숨에 널찍한 난간에 앉혀졌다. 폭이 넓기도 했고, 카르한이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카르한이 먼저 일리아의 입술을 찾았다. 정중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금방 익숙해졌는지, 입꼬리부터 입술 중앙까지 부드럽게 입맞춤을 이어왔다.

    늦여름 바람이 내려앉은 듯 입술에 온기가 전해졌다. 입술 위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촉은 이 순간이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입술을 받아들였다.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주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숨결이 몇 번이나 쏟아지더니,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자, 카르한이 일리아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대신 허리를 숙여 일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 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뺨과 귓불, 목덜미까지 붉은 물이 들었다. 조금 선선해진 바람이 불어왔지만, 열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일리아를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는 없었다. 열락에 찬 눈으로 그 다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하염없이 일리아를 기다렸다. 입술을 작게 달싹이던 일리아는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지금이야말로 계속 품어왔던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저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리아는 두 팔을 뻗어 카르한의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요. 카르한.”

    그러자 카르한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천천히 팔을 거둔 일리아가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일리아는 잠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께부터 시작된 간지러움은 손끝까지 퍼져나갔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마찬가지로 마주 웃어주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한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꿈일까 봐 겁이 납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럼 깨고 나면 또 말해줄게요.”

    머뭇거리던 카르한은 일리아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잠시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일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닿은 가슴으로부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저녁의 침묵을 깨는 소리였다. 빠르고 커다랗게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마치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달빛 아래, 한참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겨우 떨어졌다. 왠지 아쉬워서 팔을 딱 붙인 채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바람을 쐬던 일리아가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그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굵직한 이목구비와 매끄럽게 활강하는 콧날. 일자로 뻗은 눈썹과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입술. 거기다 듬직한 체구까지. 하나하나 뜯어봐도 전부 제 취향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카르한에게 반할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잠시 카르한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문득 하려고 했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얼마 전에 당신이 분쟁 지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일리아가 가벼운 말투로 화제를 꺼냈다.

    “굳이 당신이 분쟁 지역에 갈 필요는 없잖아요. 검술 대회에서 우승도 했으니까 안 갈 거죠?”

    부드럽던 카르한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딱딱해진 표정을 본 일리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일리아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시온에게 그가 분쟁 지역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이유는 알지 못했다. 카르한이 그 일에 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공작이나 공작부인에게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받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카르한은 거절할 명분이 충분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공작 가문의 후계자였으며, 앞으로 어떤 행보를 하든 주목 받게 될 것이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이제는 공작도 카르한을 쉬이 다루진 못할 터였다.

    그러나 카르한은 일리아의 시선을 피한 채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방금까지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달콤했는데,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아는 입술만 깨물었다. 공작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곤란한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아니면 벌써 가겠다고 말했어요?”

    일리아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카르한은 사실을 말해주는 대신 천천히 테라스에서 등을 떼어냈다.

    “바람이 차가워지니 이만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르한.”

    일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그를 불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그의 새까만 속눈썹이 흔들렸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에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가야 합니다.”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직접 분쟁 지역으로 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대화를 피하려던 카르한이 생각나서 더더욱 그러했다.

    “가지 말아요…….”

    일리아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카르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리아보다 더 아픈 얼굴을 하던 카르한이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카르한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카르한은 입고 있던 얇은 외투를 벗어, 일리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일리아는 꼼짝없이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에,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잠깐, 카르한! 이유라도 말해줘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카르한이 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이윽고 테라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굳어진 얼굴로 닫혀버린 문을 응시했다.

    ***

    검술 대회가 끝나고, 레베타는 곧바로 에반테온 공작저로 돌아왔다. 레베타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한 채 의자에 앉았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혹시 몰라서 중간에 심판까지 매수해두었는데도, 카르한은 기어코 우승을 거두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예법까지 터득했을 리는 없고……, 혹시 블로든 저택에서 검술 교습이라도 받은 것인가. 레베타는 이마를 짚은 채 얕은 침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든 카르한이 우승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너무 손 놓고 있었나.”

    카르한은 제대로 수업도 받지 못한 임시 후계자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전장에 나가 있었지만, 고작 장교로 전역한 것이 전부였다. 소문이나 평판도 나쁘니,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방치해두었다.

    원래는 블레어드가 돌아오면 후계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지난 두어 달 사이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이번 황궁 연회에서 평판을 끌어올린 후, 검술 대회에서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카르한의 입지가 단단해지면 곤란하다. 블레어드를 지지하지 않는 원로들이 카르한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졌다. 에반테온 가문 원로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블레어드를 불러들이자니, 아직은 일렀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기엔 카르한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역시 당장 분쟁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마님…….”

    바깥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레베타가 정신을 차렸다.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고용인의 목소리에 레베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공작저에서 도련님이라 불릴 사람은 카르한뿐이었다.

    대회에서 우승하더니 갑자기 저를 찾아올 이유라도 생긴 건가. 레베타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레베타가 멈칫했다. 열린 문을 통해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베타와 마찬가지로 진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였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블레어드 에반테온이었다.

    ***

    테라스 문이 닫혔다. 카르한은 잠깐 등을 붙였다가 금방 걸음을 뗐다. 응접실을 벗어나 방으로 돌아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테시온이 냉큼 일어났다.

    “카르한 님, 고백은 어찌…….”

    거기까지 말한 테시온이 말을 멈추었다. 카르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예? 지금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시온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가져온 짐이 별로 없었기에 챙길 것도 거의 없었다.

    복도로 나온 카르한은 지나가는 고용인을 붙잡고, 자신이 돌아간다는 걸 일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한밤중에 마차에 올라타게 된 테시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치 빚쟁이에게 쫓기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냐고 묻는 마부의 말에 카르한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번화가 아무 여관으로.”

    공작저에 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룻밤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마차 문이 닫혔다. 이 좋은 블로든 저택을 두고 야밤에 왜 여관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던 테시온이 물었다.

    “혹시 블로든 영애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카르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테시온은 카르한이 고백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황제에게 하사 받은 검까지 챙겨갔으니 분명했다.

    그런데 돌아온 카르한은 뭔가 이상해 보였다. 마치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테시온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딱 소리 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맙소사!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테시온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

    “그, 아무래도 블로든 영애께서 오늘 너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 일도 있었으니…….”

    고백할 시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테시온이 열심히 위로해주었다. 여전히 말없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테시온을 바라보았다.

    “내가 분쟁 지역으로 떠나는 걸 일리아가 알아버렸다.”

    계속 떠들어 대던 테시온이 침묵했다. 카르한은 테시온이 일리아에게 말했을 거라 짐작했으나, 어떤 질책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될 일이었다. 생각보다 조금 일렀을 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밝혀진 것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창가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테르시안 후작 때문에 곤경에 처한 헤인리를 돕는 대신 이루어진 거래였다. 파기했다간 저뿐만 아니라, 블로든 가문 전체가 보복 당할 수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약속만 이행한다면 블로든 가문을 건드리지는 않을 터였다. 아직까지는 쓸모 있는 패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일리아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언제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아무것도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라 장담할 수 없었다.

    “…….”

    눈을 감아도 일리아의 충격 받은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흔들리던 보랏빛 눈동자가 가슴 깊이 박혀서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아무 힘도 없는 제 처지가 무척 한탄스러웠다.

    카르한은 팔을 들어 괜히 제 입술을 쓸어보았다. 온기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감촉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좋아해요. 카르한.

    일리아의 속삭임이 귓가에 흩어졌다. 흔들림 없던 눈빛과 나직한 목소리, 목덜미로 쏟아지던 숨결까지…….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다시 흘러갔다.

    카르한은 그 기억을 붙들기 위해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참 일리아를 생각하던 카르한은 가슴께를 꾹 눌렀다 떼어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만 아팠다.

    아까는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급하게 나왔지만, 일단 여관에 머무르며 분쟁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럴 듯해야 속아줄 테니 말이다.

    일리아에 대한 생각을 겨우 떨쳐냈을 때, 마차가 멈추었다. 카르한과 테시온이 나란히 마차에서 내렸다. 번듯하다 못해서 화려하고 커다란 여관이 보였다.

    카르한은 여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옆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블로든 가문 문장이었다.

    “…….”

    카르한은 다시 슬퍼졌다.

    ***

    일리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전부 카르한 때문이었다. 뒤늦게 카르한을 쫓아갔지만, 이미 그는 저택을 떠난 후였다. 일리아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고백도 했고 마음도 통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심지어 카르한은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 일리아는 카르한이 준 검만 노려보았다. 문득 예전에 점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애운은…… 아주 씨가 말랐네요.

    심지어 약혼자는 없어진다고 말했다.

    “전 약혼자는 바람 피워서 없어지고……, 이번엔 고백하자마자 전쟁터로 떠날 줄 누가 알았겠어.”

    자조 어린 혼잣말을 내뱉고 나니 더욱 우울해졌다. 일리아는 안 되겠다 싶어서 벌떡 일어났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다.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별관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카르한이 수업을 듣기 위해 계속 들락날락했던 곳이었다.

    카르한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혼자 회상에 잠겨있는데, 막 별관 건물을 나오는 메즈라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블로든 영애.”

    “안녕하세요. 교수님.”

    “짐을 챙기려고 잠깐 들렀는데, 인사까지 드릴 수 있다니 운이 좋았군요.”

    일리아는 그의 양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닫히지 않은 가방에서 책이 비죽 튀어나왔다.

    “짐이 많네요. 어디 가시나요?”

    “여름도 끝나가니, 저도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싶어,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수업도 마무리되었습니다. 고작 몇 달 사이에 몇 년 치 공부를 끝내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처음 카르한을 만났을 때를 상기한 듯 메즈라는 감회에 젖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에반테온 님께서 말하신 기간보다 일찍 끝나서 다행입니다.”

    “네?”

    “여름 이후로는 시간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어딜 가셔야 한다고…….”

    그 말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르한은 이미 떠날 준비를 전부 해두었구나. 지금까지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메즈라는 말실수했나 싶어서 눈동자만 굴리다 말했다.

    “……설마 에반테온 소공자께서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메즈라는 근심에 가득 차 보이는 일리아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

    “가끔은 제삼자에게 털어놓는 것도 좋으니까요.”

    메즈라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연애 상담은 제 전문입니다.”

    일리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메즈라는 이런 반응이 익숙했다. 다들 자신이 공부하느라 연애와 담을 쌓은 줄 알고 있었다.

    “제가 바로 연애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메즈라가 손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신뢰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사실 일리아는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가족들은 난리가 날 터였고,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었다.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고백을 받았는데요.”

    메즈라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드디어 소공자가 고백을……! 예전에 카르한의 연애 상담을 해주었던 메즈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전쟁터로 떠날 거라는데, 이유도 말해주지 않아요.”

    “…….”

    “무슨 생각일까요?”

    메즈라는 지금껏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은 연인 사이가 깨지는 나쁜 선례만 남겼다. 하지만 자신이 봐온 소공자는 그들과 달랐다.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평소의 카르한을 떠올리며 메즈라가 말을 이었다.

    “고백까지 하셨다면, 적어도 그 마음에 거짓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리아는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카르한의 눈동자만 봐도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혹시 분쟁 지역에 가는 것이 나와 연관된 문제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설마, 아니겠지……?

    “일단 그분과 만나서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메즈라의 조언에 따라, 카르한을 만나서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관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공작저로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카르한은 어제부터 부재중이라고 전해왔다.

    ‘공작저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나 싶어 의아해하던 차에 우연히 그의 소식이 들어왔다. 카르한이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부르면 안 오겠지?’

    그럼 직접 갈 수밖에. 일리아는 곧바로 침실로 뛰어올라가 치장을 끝냈다. 마차에 올라타자, 자연스레 프란체와 말렉이 붙었다. 특히 프란체는 검이 두 자루였다. 요즘 두 명 몫을 할 거라며 양손으로 검 쓰는 법을 익히고 있다 들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금방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생각에 잠겼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인근 건물에 비해 우뚝 솟은 여관이 보였다. 마차는 여관 앞에서 멈춰 섰다. 일리아는 간이 계단을 밟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 여관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든 순간 상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딘가 익숙한데…….’

    왠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상대도 일리아를 보고 똑같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상대가 먼저 알아차렸는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먼저 아는 척을 해오자, 일리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이름을 밝히는 동시에 일리아는 누군지 알아차렸다.

    “제 이름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입니다.”

    에반테온 공작저 복도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이었다.

    일리아는 제 앞에 멈춰 선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버릇처럼 지었던 미소가 싸늘해졌다.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카르한의 말로는 사고 치고 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는데. 후계자 자리를 내놓을 정도면 큰 사고였을 텐데, 벌써 돌아오다니.

    일리아는 빠르게 블레어드를 살폈다. 차가운 인상인 카르한과 달리, 서글서글한 얼굴이었다. 제법 잘생기기도 했고, 웃는 상이라 그런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리아가 그에 대해 몰랐다면 첫인상만 보고 좋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잠깐의 공백을 두고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어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빈말로도 반갑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계속 이야기는 전해 들어왔습니다.”

    블레어드가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다. 일리아는 서늘한 미소만 머금은 채 그를 응시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가시 돋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개의치 않는 듯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마치 운명 같지 않습니까?”

    일리아가 조용히 여관 문을 가리켰다.

    “우연이 아니라,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요.”

    손가락을 따라 블레어드가 고개를 돌렸다. 도금된 블로든 가문 문장이 박혀 있었다.

    “저희 가문 소유의 여관이거든요.”

    일리아가 단칼에 차단해버리자, 블레어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무척 훌륭한 여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칭찬이 몸에 밴 듯했다. 어쩌면 리하트보다 더 아부에 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제 동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블레어드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었다. 일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블레어드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간 사정이 있어 계속 떨어져 있었기에…….”

    일리아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형제지간인 줄 알겠네.’

    일리아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사이가 좋으신가 보군요?”

    내심 찔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레베타와 달리,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형제지간이니까요. 제가 형이니 챙겨야지요.”

    이런 뻔뻔한 놈을 봤나.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뱉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일리아는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얼굴을 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때, 여관 문이 부서질 듯이 젖혀졌다. 그 소리에 일리아와 블레어드가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다급히 나왔다. 카르한이었다.

    카르한은 굳어지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블레어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

    카르한은 어젯밤,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에 도착했다. 프런트에 서 있던 직원이 친절한 얼굴로 카르한과 테시온을 맞이해주었다.

    “죄송하지만 신분패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급 여관일수록 신분 확인은 필수였다. 카르한은 품에서 신분패를 꺼내 내밀었다. 신분패를 확인한 직원이 반색했다.

    “최상층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바로 다른 직원들을 불렀다. 테시온이 들고 있던 짐이 순식간에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방값은…….”

    “이전에 에반테온 소공자님께는 돈을 받지 말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카르한은 거절의 의미로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직원의 태도는 강경했다.

    “공문을 따르지 않으면 제가 잘립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잘린다는 말에 카르한은 머뭇거리며 지갑을 다시 넣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얼떨결에 최상층에 위치한 방을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다. 귀빈을 대접하기 위해 평소에 비워두는 방인 듯했다.

    방을 안내해준 직원이 짐을 내려놓자, 다른 직원이 다과가 담긴 접시와 음료를 가져왔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이 줄을 당겨주십시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깍듯한 인사와 함께 직원들이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카르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혼자 쓰기에 민망할 정도로 넓고 좋은 방이었다. 그러나 블로든 저택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일리아에게 상처를 주고 나왔는데,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가. 카르한은 시무룩하게 처져서 침대에 앉았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니, 망망대해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익숙하던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벌써부터 일리아가 보고 싶었다. 나중에 분쟁 지역으로 떠나게 되면 이 그리움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카르한은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

    저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카르한이 문을 열어주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셨는데, 들여보낼까요?”

    “손님이라니…….”

    혹시 일리아가 왔나 싶어서 카르한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쁘긴 한데, 아직 변명거리를 생각해두지 못해서 난감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직원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블레어드 에반테온 님이십니다.”

    그 이름에 카르한은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왜 여기를……?

    “1층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직원은 카르한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흐렸다.

    “돌려보낼까요?”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멈추었던 숨이 천천히 새어나왔다. 카르한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이 아는 블레어드라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서 저를 만나러 올 것이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직접 내려가서 만나겠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한 카르한은 곧장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블레어드가 귀환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몰래 돌아온 것일까.

    납덩이를 단 것처럼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카르한은 1층에 따로 마련된 찻집으로 들어갔다. 애매한 시간대라 손님은 없고, 직원 둘만 보였다. 안쪽으로 걸어가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블레어드가 손을 들었다.

    “이쪽이야.”

    카르한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기억하던 것과 달라진 부분도 있었으나 거의 변함이 없었다. 블레어드의 얼굴을 마주하자, 순간 과거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다정한 형인 것처럼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블레어드는 앉으라는 의미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카르한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블레어드는 질책하지 않고 반듯하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카르한과 태생부터 다르다는 것을 몸짓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못 본 사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블레어드가 카르한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래도 네 이야기는 계속 들어왔지.”

    “왜 찾아오신 겁니까.”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카르한은 에반테온 가문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지만, 특히 블레어드는 최악이었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훌륭한 형이었다. 그러나 둘만 남을 때는 가차 없어졌다. 지금도 블레어드가 제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왔다.

    블레어드는 말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직원이 물러나고, 정적이 흘렀다.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놓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느새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다정한 미소가 사라지고 서늘함이 감돌았다.

    “버거워 보이는군.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당연하겠지.”

    나직한 목소리가 흐릿해진 상처를 헤집었다.

    “일주일 줄 테니, 알아서 정리하고 물러나라.”

    “…….”

    “이미 부모님과도 이야기가 끝난 일이니, 조용히 해결하고 싶구나.”

    카르한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 뒤틀린 것이 전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블레어드는 빛 속에 머무를 것이고, 카르한은 에반테온 가문의 그림자로 남을 터였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카르한은 그들의 명령에 순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은 일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싫습니다.”

    블레어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에게 내어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블레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척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던 블레어드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버릇이 잘못 들었군.”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그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버릇을 고쳐주마.

    그러고 나면 괴로운 일들이 펼쳐졌다. 괴롭힘이라는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블레어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의 옆에 선 그가 속삭였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 한번 하고 나니 세상을 얻은 것 같지?”

    “…….”

    “평판이 조금 좋아졌다고 자만하는가 본데……. 그까짓 것은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는데 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블레어드와 카르한은 출발 노선부터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로 자라온 그와 변방으로 몰려났던 자신.

    블레어드가 문제를 일으켰다 한들,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카르한은 지금까지 평판이 나쁘다가 최근에야 겨우 회복했다.

    “무엇보다 원로들이 널 지지해줄 것 같으냐.”

    블레어드는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에는 흔들렸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단단해져갔다. 예상 밖의 태도에 블레어드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저와 닮지 않은 형제를 보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블레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저 사이에 일어난 일들, 당신이 꾸민 겁니까?”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블레어드는 곧장 알아들었다. 직원이 다시 다가오는 것을 보며 블레어드가 환히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걸 이제 알았어?”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예상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충격이 컸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오해로 인해 자신을 혼내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니, 누군가 저를 모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한은 한때 블레어드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었고, 블레어드는 도리어 교묘하게 카르한의 잘못으로 몰아붙였다.

    카르한은 제게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하며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그 후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 덮어두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블레어드의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아 도피해 온 것이다.

    “…….”

    카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왜 그랬던 겁니까.”

    블레어드는 삐딱하게 마주 선 채 속삭였다.

    “내 자리를 넘보는 게 거슬리니까.”

    “저는 한 번도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블레어드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바늘처럼 카르한을 찔러왔다.

    “때로는 존재만으로도 해로운 것이 있지.”

    어느새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어차피 어머니는 네 말 같은 건 믿어주지 않을 거다. 증거도 없으니.”

    직원과 눈이 마주쳤는지 블레어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손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곧 나갈 테니,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스레 하대하는 귀족들과 달리 정중한 태도에 직원의 얼굴에 호감이 피어올랐다. 블레어드는 카르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 힘이 실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 오늘 못 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하자.”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블레어드가 걸음을 옮겨, 카르한을 지나쳤다. 두어 걸음 걷던 그가 멈춰 섰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블로든 영애께 안부 부탁하지.”

    블레어드가 그 이름을 담는 순간,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지금 일리아를 언급한 이유는 뻔했다. 그는 카르한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빼앗아갈 것이다.

    “블레어드……!”

    카르한이 언성을 높이자, 뒤에 서 있던 직원이 흠칫했다. 이곳이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이라는 것을 떠올린 카르한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블레어드는 그런 카르한을 보고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미숙한 놈. 블레어드는 다시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블레어드가 완전히 나가버리자 카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그에게 휘둘릴 뿐이었다. 카르한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때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점원이 안으로 들어와, 다른 직원에게 말했다.

    “블로든 영애께서 오셨으니까, 맞이할 준비 하자.”

    “정말? 서둘러야겠네.”

    “방금 오셨던 손님분이랑 대화 중이시니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직원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르한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여관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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