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내고 카르한은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기로 했다. 테시온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술 대회가 끝나고 거취를 결정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잘 들어가요.”
마차에 올라타기 전,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이니까 연인으로서 인사해도 되겠습니까?”
잠깐 멈칫한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한이 팔을 뻗어, 일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자, 카르한이 천천히 입을 맞췄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무척 생생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서, 일리아가 눈만 깜빡였다. 천천히 멀어진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일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잘 자요!”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를 해버린 일리아가 도망치듯 마차에 올라탔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잠시 침묵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헤인리가 먼저 인사를 건넨 후 마차에 올랐다. 그 다음으로 나선 클리프는 카르한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소공자,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꼭 저를 찾아오십시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에 시간이 나면 오케스트라를…….”
사심을 듬뿍 담은 제안에 카르한은 옅게 웃었다. 클리프가 아쉬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자, 비올레와 카르한만 남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비올레였다.
“두 사람 문제에 우리가 너무 나섰지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일리아가 저를 피하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버리니, 카르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만약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일리아와 어긋났을 것이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탄 마차를 바라보다가 다시 비올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비올레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조언해주신 것처럼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보려고 합니다.”
“어떻게요?”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결심을 끝냈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일리아에게 고백할 생각입니다.”
***
오페라를 보러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 바빴다. 카르한은 비올레와 맹훈련에 들어갔고, 일리아 또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과 달리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만나곤 했다. 소소한 이야기만 오갔을 뿐이지만, 그저 좋았다. 헤어질 때는 너무 아쉬워서 괜한 핑계를 댈 정도로 말이다.
“아가씨, 서류 가져왔습니다.”
말렉이 서류를 왕창 들고 들어왔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생각하던 걸 멈추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가장 위에 있던 서류는 장난감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에 일리아는 리하트가 이끌던 장난감 사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경매에 부쳐졌는데, 이미 한 번 망한 사업이라 그런지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일리아는 장난감 사업을 두고 제법 고민했다. 지금까지 사두기만 하면 대박 치곤 했지만, 계속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이면 제 힘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인형극과 장난감을 접목해보기로 결정 내렸다. 인형 탈을 쓴 연극이 아이들에게 인기 있으니, 그걸 이용할까 싶었다. 일리아는 블로든 가문 디자이너에게 인형 하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나무 장난감은 다칠 위험이 크니까, 솜 인형으로 제작하자.
-인형극은 대부분 동물을 주제로 하니까. 흰 토끼는 많으니, 검은 토끼는 어때?
일리아의 의견을 참고해, 디자이너는 도안을 뽑아냈다. 시안을 보기 위해 미리 하나 제작했는데, 일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귀엽다며 사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가장 잘나가는 극단을 찾아갔다.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리아는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늘어놓았다. 일단 블로든 사에서 제작한 인형을 연극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외관도 귀엽고, 확실한 성격까지 부여해주면 분명 인기를 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극장 출구 쪽에 인형을 진열해두어, 자연스러운 구매를 이끌어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안 그래도 다음 시나리오를 받아두었는데, 인형도 귀엽고 괜찮군요.
극단주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표 값 외에도 부가적인 수입을 끌어낼 수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럼 저희 쪽에서는 얼마나 받게 되는 겁니까?
-인형 한 개가 팔리면 극단에 5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5퍼센트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우선 시험 삼아 해보고 인기가 좋으면 다른 인형도 추가 제작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들도 5퍼센트를 떼어드리면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죠.
-…….
-나중에 인형의 인기가 많아지면 도리어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요?
극단주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100개를 선제작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일리아는 곧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리하트가 생산 기반을 전부 갖춰놓은 상태라 딱 좋았다. 분업 체제로 조를 짜서 시간을 정해두고 교대하도록 만드니, 능률이 훨씬 높았다. 덕분에 납기일까지 넉넉하게 맞출 수 있었다.
“오늘이 새 연극 올라가는 날인가?”
“예, 오전과 오후 두 번 한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오후 연극도 끝났을 겁니다.”
말렉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 또한 이번에 새로 올리는 연극의 시나리오를 읽어보았다.
일리아의 인형에 맞춰서 내용이 약간 바뀌긴 했지만, 성인인 일리아가 봐도 제법 재미있었다. 거기다 인형의 성격도 확실하게 부여해주었다. 영웅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심리에 맞춰, 검은 토끼는 정의롭고 씩씩한 성격이었다.
‘나흘 안에 백 개가 다 팔리면 좋겠는데.’
일리아는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극단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아무래도 연극이 끝나자마자 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일리아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간단한 치장을 했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막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극단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일리아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대박!! 대박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극단주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다시금 목소리가 커졌다.
“백 개가 전부 완판되었습니다! 그것도 오전 연극이 끝났을 때요!”
일리아는 얼떨떨해졌다. 아무리 잘되더라도 이틀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디자인이 잘 뽑혀서 그런지 어른들도 고민 않고 구입하더군요.”
신이 난 극단주가 열심히 떠들어대자, 일리아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박을 쳤으나,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재물운도 작용했겠지만, 이번에는 일리아의 노력과 결정 또한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연극 반응도 무척 좋아서 하루에 3회로 늘릴까 싶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예! 그러니 다음 제작은 언제쯤 될까요?”
추가 제작을 부탁한다며 그가 사정사정했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지금 당장이요.”
***
황궁 연회 이후, 리하트 테르시안이 사기 당했다는 소식이 수도에 널리 퍼졌다.
처음에 리하트는 아닐 거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추적하고 있던 중개상인의 행방이 뚝 끊기자, 사기 당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후로는 지옥이었다. 은행에서는 이자와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돈을 빌려준 지인들은 매일매일 테르시안 후작 저택을 찾아왔다. 새벽에도 찾아오니,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잠시 밖에 나와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테르시안 후작은 마지막 희망인 황태자비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 이번에도 도와줄 거라 믿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군요.
그러나 황태자비는 딱 잘라 거절했다. 후작은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었다. 지금까지 혈연을 강조하면 마지못해서 도와주곤 했는데, 이번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계속 이러시면 황태자비궁에 출입하는 걸 막겠어요.
황태자비의 말에 테르시안 후작은 결국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을 찾아가 봤지만, 매몰찬 거절만 돌아왔다. 거기다 시오나는 남편 몰래 추가 대출 받은 것이 들켜서 쫓겨 나왔다.
결국 리하트의 장난감 사업 건물과 부지, 부자재 등은 경매에 넘어갔다. 그래도 내심 본전은 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걸었지만, 낙찰가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안 팔아! 이 돈 받고 어떻게 팔아!
후작부인은 팔 수 없다고 우겼다. 투자한 금액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돈이라도 받고 팔지 않으면 주변 지인들에게 몰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사업을 처분해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고 고용인들에게 밀린 월급을 주고 나니 남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은행에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날, 후작은 결국 파산신청을 냈다. 후작이 그토록 아끼던 테르시안 저택은 결국 은행 소유가 되고 말았다.
-너 같은 자식은 없으니, 당장 나가라!
후작에게 의절 당한 리하트는 지인의 집을 전전했다.
-너무 오래 머무르는 거 아니야? 내일은 나가줬으면 좋겠어.
몇 안 되는 지인들도 더 이상 리하트를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젠장!”
거리로 쫓겨 나온 리하트는 분에 차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리하트는 문득 스텔라 델로타를 떠올렸다.
이전에 그는 일리아와 카르한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스텔라와 잠깐 협력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스텔라 쪽은 겁이 났는지 금방 발을 빼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스텔라는 돈이 많으니까 뜯어낼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리하트는 곧바로 델로타 저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스텔라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을 사이에 두고 스텔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찾아온 이유는요?”
“……일리아 블로든의 약점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리하트는 일리아와 스텔라의 사이가 무척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텔라의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만 도움을 준다면…….”
“내 돈 먹고 나르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스텔라가 리하트의 말을 잘라냈다. 리하트의 얼굴이 굳어지자, 스텔라가 속삭였다.
“당신이 망했다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하던데요.”
“…….”
“그리고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당신이랑 잠깐 협력하긴 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었어요.”
비아냥거리는 말에 리하트는 철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델로타 가문 문지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리하트는 침을 뱉은 후 뒤돌아서 도망쳤다.
다시 길거리를 전전하게 된 리하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더 이상 찾아가 볼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두가 리하트를 비웃었고, 가지고 있던 것은 전부 빼앗겼다. 이 지옥을 빠져나갈 방도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리하트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곳으로 발걸음하고 말았다. 자신이 사활을 걸었던, 장난감 사업체 부지였다.
번듯한 건물이 세워진 부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기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잘될 수 있었는데. 일리아 블로든의 손바닥에서 놀아나지만 않았더라면 떼부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망설이던 리하트는 마지막으로 건물을 살펴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지 안으로 들어선 리하트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해졌다. 경매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무척 분주해 보였다.
“추가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완성된 100개는 상자에 전부 담았어요.”
안쪽에서 활기찬 대화가 오가고, 리하트는 그대로 멈춰 섰다. 누가 봐도 장난감 사업은 무척 잘되어가는 중이었다.
리하트는 숨을 삼켰다.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망했는데, 사업체를 매입한 사람은 바로 대박을 쳤다고? 부러움과 질투, 시기 같은 감정이 그를 덮쳐왔다.
도대체 누가 사들인 것인가 싶어, 리하트는 건물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건물 벽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말았다.
“!”
리하트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블로든 가문 문장을 노려보았다.
***
카르한은 미리 준비해둔 가죽 경갑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중히 모셔둔 칼집을 집어 들었다. 흔한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았으나, 손잡이에 세밀한 세공이 새겨져 있었다.
카르한은 한 손으로 칼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쥐었다. 스르릉, 날이 칼집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빛 아래에 검날이 드러났다.
진검이 아닌 장식용 검인지라 끝부분이 뭉툭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살상도 가능한 검이었다. 매끄럽게 뻗은 검을 살피던 카르한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 비올레는 연무장이 아닌 본관의 어떤 방으로 카르한을 불렀다. 비올레에게는 검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녀가 직접 수집한 검을 장식해둔 방이었다. 예전에 카르한이 처음 블로든 저택에 초청 받았을 때 안내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검술 대회가 며칠 안 남았죠?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르한을 세워두고 방을 한 바퀴 돌았다. 벽과 장식장에 빼곡하게 진열된 검을 살피던 비올레가 잠시 멈춰 섰다.
비올레는 벽에 걸어둔 검 한 자루를 꺼내,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든 카르한이 비올레를 쳐다보았다.
-이건 왜…….
-응원하는 의미로 주는 거예요.
비올레는 과거를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결혼 전에 썼던 건데, 그 검으로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요.
카르한은 비올레에게 받은 검을 살폈다. 다른 장식용 검과 달리, 손잡이 부분에 사용감이 느껴졌다. 카르한은 검을 손에 꼭 쥐었다. 어떻게든 검술 스승인 비올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꼭 이기겠습니다.
잠깐 그때를 회상한 카르한은 검을 허리춤에 찼다. 모든 준비를 끝내니, 테시온이 방으로 들어왔다.
“카르한 님, 후문에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에반테온 공작이 되겠다고 선언한 후로 공작부인의 감시가 붙었다. 지금까지는 몰래 빠져나가거나, 어떻게든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검술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감시를 피해 볼 생각이었다.
후문 쪽으로 나온 카르한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드디어 황실 검술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드디어 맹훈련한 성과를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분명 잘하실 겁니다.”
카르한이 심호흡을 내뱉자,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이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솔직히 카르한 님만큼 실력이 뛰어나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국 각지에서 실력자들이 모일 텐데…….”
“그 사람들을 전부 이기면 카르한 님이 제일가는 실력자가 되는 거죠.”
테시온이 명쾌하게 말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인데, 간단하다는 듯 말해버리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마차는 어느덧 경기장 앞에 도착했다. 올해 유독 참가자가 많았기에 황궁 밖에서 경기가 치러졌다. 대신 결승전은 황궁 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카르한은 마차에서 내려, 원형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와 잔디가 깔렸고, 주위에 돌계단이 둘려 있는 형태였다.
경기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출전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지들이 응원차 따라온 탓이었다. 거의 축제를 방불케 하는 모습에 카르한은 허리춤에 찬 칼자루만 만지작거렸다.
“출전하실 분들은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한 남자가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그러자 출전자들이 하나둘 그를 따라갔다.
“저는 따라가지 못하니, 관객석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테시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여준 후 남자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안쪽에는 출전자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도 경기장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이미 많은 출전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카르한이 시끌시끌한 대기실로 성큼 들어섰다. 그러자 대기실이 아주 잠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카르한은 최대한 구석으로 향했다.
“번호표 받아가세요!”
대회 안내인의 말에 순식간에 침묵이 깨졌다. 출전자들은 번호표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앞 번호를 받으면 운이 좋다는 미신을 믿는 이들이 많았기에 서로 먼저 받으려고 난리였다. 인파에 밀린 카르한은 뒤늦게 번호를 얻었다.
카르한이 받은 번호는 666이었다. 불길하다 여겨지는 숫자에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다들 번호표를 확인하는 사이, 안내를 돕던 남자가 경기장 중앙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황궁 주최 검술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자가 대회 시작을 알리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힘내라!!”
“발로쟈의 장남 페르난드, 우승하자!”
출전자의 친지들은 나팔을 불거나 현수막을 들고 열띤 응원을 쏟아냈다. 경기 시작 전에는 어떠한 응원도 용인되었기에, 기를 써서라도 튀려고 노력 중이었다.
엄청난 함성과 응원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카르한은 다른 출전자들처럼 경기를 보러 올 사람이 없었다. 가족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아직 예선에 불과했기에 일부러 보러 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테시온마저 보이지 않자, 이 넓은 곳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출전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빰빠밤! 함성을 뒤덮는 관현악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놀라서 그대로 멈추었다. 다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금관악기를 들고,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우렁찬 음악이 경기장을 메우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대낮이라서 불꽃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목을 끌려는 목적인 듯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위쪽을 바라보자, 건장한 사내들이 관객석 최상단에 말뚝을 박고 있었다. 이윽고 말뚝에 붙어 있던 거대한 현수막이 펄럭, 하고 바람에 휘날렸다.
[우승은 어차피 카르한 에반테온]
목청 높여 응원하던 사람들이 잠시 조용해졌다. 카르한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카르한은 현수막 아래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헤인리를 제외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프란체, 말렉 그리고 테시온이 앉아 있었다.
카르한이 그쪽을 바라보자, 클리프와 비올레가 작은 현수막을 들었다.
[최고다, 카르한 에반테온]
[내 제자 힘내라]
카르한은 눈만 깜빡이며 현수막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러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 넓은 경기장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이런 미친 응원은 처음이야. 돈이 남아도는 집안인가?”
“뭐야, 블로든이잖아?”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확인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쓸 만하네.
“그런데 왜 블로든이 에반테온 소공자를 응원해?”
“어디 산골에 박혀 있다가 왔니? 블로든 영애랑 에반테온 소공자 연인 사이잖아.”
웅성거림이 가라앉을 즈음 대회 안내인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럼 바로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경기 대진표는 따로 없었고 1번과 2번, 3번과 4번이 붙는 식이었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다음 경기로 올라가는 승자 진출전이었다.
앞 번호부터 경기장으로 우르르 나갔다. 이번 대회는 출전한 사람이 많은 탓에, 동시에 경기가 치러졌다. 본격적인 시합이 시작되고, 사방에서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대기실에 앉아서 시합을 구경했다. 예선이라 그런지 시합은 금방금방 끝나버렸다. 카르한은 비올레가 준 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검법서에 기록된 자세에서 벗어나면 반칙이에요.
카르한은 비올레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굴러온 카르한은 수많은 실전을 겪어왔다. 거기다 체력이나 힘도 우세해서 누구보다 유리했다.
그러나 카르한에게는 대회가 유독 까다로웠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기에 규칙이 여럿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반칙패를 당할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실전용 검술을 익혀온 카르한은 대회에 부적합한 버릇이 남아 있었기에 조심해야 했다. 한참 기다린 끝에 마침내 카르한의 차례가 되었다.
“665번, 666번 나가주십시오.”
번호가 불린 카르한은 대기실을 벗어나, 경기장으로 나갔다. 카르한이 경기장으로 나오자 주위가 술렁였다. 시합을 치르던 사람도, 구경꾼들도 전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심판의 지시대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
상대방의 얼굴이 익숙했다. 황궁에 대회 출전 접수장을 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봤던 사람이었다. 하인과 함께 왔던 남자는 무척 자신만만한 얼굴로 우승을 확신했었다.
-도련님 실력이 최고입니다.
-당연하지. 벌써부터 나랑 붙을 사람이 불쌍해지는걸.
카르한은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첫 경기인데 벌써부터 어마어마한 실력자와 붙다니……. 긴장한 카르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랜만에 나온 버릇이었다. 그러자 상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의 인사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카르한이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카르한이 검을 빼드는 순간 상대가 소리를 질렀다.
“기권!!!”
카르한과 심판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한쪽 손까지 번쩍 들며 소리쳤다.
“무조건 기권입니다!!!”
왜 그러지. 카르한은 당황한 얼굴로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스스로를 엄청난 실력자라 일컫던 남자는 심판의 옷자락까지 붙들고 말했다.
“기권 받아주실 거죠? 예?”
“일단…… 기권 처리하겠습니다. 이번 시합은 666번의 승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심판의 말에 상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검만 꺼내들었을 뿐인데 얼떨결에 승리하게 된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나.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카르한은 다음 경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예선 대회가 끝났을 때. 카르한은 허리춤에서 검도 뽑지 않은 채 64강에 오르고 말았다.
***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나흘 후에 64강과 32강 경기가 있을 예정이었다.
경기에 참전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우르르 대회장을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희비가 교차했다. 출전한 인원은 천 명이 훌쩍 넘었지만, 예선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추 빠져나갔을 때, 카르한은 대회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리프가 손을 흔들었다.
“소공자!”
카르한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클리프가 잘했다며 카르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오늘 수고 많았지요.”
카르한은 머쓱해졌다. 사실 수고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얼굴만 살짝 비쳤다가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나름 심기일전하고 나왔는데, 검을 휘두를 일이 아예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운도 실력이지요. 그나저나 소공자, 배고프지 않습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리프가 웃었다.
“근처 식당을 잡아두었습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갑시다.”
카르한과 클리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헤인리는 휴가를 낼 수 없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아까 보이지 않아서…….”
“대신 결승전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안 오면 끌고 올 거라며 클리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클리프에게 잡혀오는 헤인리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아서 카르한은 그저 옅게 웃었다.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 도착했다. 외관이 무척 훌륭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점심, 저녁에 딱 한 테이블만 받으며 유명인사가 아니면 아예 예약조차 받아주지 않는 곳이었다.
클리프가 식당에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비올레가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클리프는 냉큼 비올레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나니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카르한은 망설이지 않고 일리아의 옆에 앉았다.
“예선 통과한 거 축하해요.”
일리아의 축하에 카르한이 뒷목을 쓸었다.
“백작부인께서 검까지 주셨는데, 쓸 일이 없어서…….”
“뭐, 솔직히 예선은 손 안 대고 이길 줄 알았어요.”
비올레는 전부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다음 경기는 요행을 기대하기 어렵겠지만요. 하여튼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쑥스러운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흐뭇하게 웃었다.
“바쁘실 텐데, 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말 안 한 거예요. 참고로 테시온도 협조했어요.”
일리아의 설명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테시온이 자연스럽게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앉아 있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아……, 사실 거창한 응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클리프가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관현악과 불꽃만으로도 충분히 거창한 것 같은데……. 카르한은 입 밖에 내뱉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처음 구상한 것은 대회장 입구부터 융단을 쭉 깔고, 꽃가루를 뿌리는 거였습니다. 대회장 입구부터 화한을 세워두려고 했는데…….”
“아무리 응원이 자유라고 해도 그건 좀 민폐니까요. 사실 저도 아쉽긴 해요.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함께 아쉬워하는 일리아와 클리프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비올레가 카르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앞으로 쭉쭉 올라갈 일뿐이에요.”
오늘 시합을 보면서 비올레는 감회에 젖었다. 분명 처음 카르한을 가르칠 때만 해도 괴물이 될지, 영웅이 될지 궁금했었다.
카르한의 검술은 살의를 품은 검이었다. 그랬기에 대련을 치렀을 때, 비올레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련은 살의가 목적이 아니니 말이다. 그때의 카르한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검술로 최고가 되는 거예요.”
비올레가 카르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비올레는 뛰어난 검사였지만, 여검사로서 더 올라갈 길이 없어서 내려왔던 사람이었다. 황궁 대회만 봐도 ‘귀족 영식’만 참가할 수 있다고 못 박아두었고, 비올레가 미혼일 때는 여검사에 대한 대우가 더욱 열악했다.
이제 와서 미련은 없으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카르한이 대신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니 말이다.
잠시 후 직원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테이블 위에 접시가 빼곡하게 놓였다. 직원들이 물러나자, 클리프가 테이블 밑에서 과실주를 꺼내들었다.
“기쁜 날에는 술이 빠질 수 없지요!”
클리프가 모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다들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접시에 가득했던 음식은 빠르게 비어갔다. 잔에 담긴 술은 그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술 마시는 속도에 감탄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다들 술고래였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비올레와 클리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데이트 좀 하고 들어갈 테니, 일리아 너는 먼저 돌아가렴.”
“알겠어요. 나중에 집에서 봐요.”
두 사람이 가게를 나가버리고, 일리아와 카르한만 남았다. 시끌시끌하던 가게 안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눈만 도르르 굴리던 일리아가 아참, 하고 입을 열었다. 일리아가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지금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한이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하늘색 손수건이 예쁘게 접혀 있었다. 손수건을 집어 들어 살펴보니, 하단에 아기자기한 흰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원래 어제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완성하지 못했어요.”
“……혹시 직접 만드신 겁니까?”
“당연히 손수건은 산 거고, 자수만 놓은 거예요. 저번에 당신이 화분 줬잖아요. 그 꽃을 새겨봤어요.”
카르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일리아에게 받은 건 많지만, 이건 정말 못 쓸 것 같았다. 무려 일리아가 직접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거기다 자수의 의미까지 너무나 특별했다.
“……못 쓸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카르한은 때가 탈까 싶어서 서둘러 상자에 손수건을 넣었다. 그리고는 상자 겉면만 만지작거렸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할 것 같았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응시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카르한이 말했다.
“이번 대회, 꼭 우승하겠습니다.”
***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바쁜 일과를 마친 일리아는 말렉과 티타임을 가졌다. 꽃차를 한 모금 마신 일리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손수건을 받고 정말 좋아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카르한으로 가득해졌다.
연회에서 카르한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후로, 점점 더 그가 좋아졌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겁이 나서 선뜻 나서지 못했다. 또다시 자신의 연애가 실패할까 봐. 카르한은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봐. 무엇보다 그와 어긋나는 것이 무서웠다.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말렉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말렉, 혹시 누군가 좋아해본 적 있어?”
“……음.”
예상 못 한 질문에 말렉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일을 더듬던 그가 대답했다.
“딱 한 번, 있습니다.”
“교제했어? 고백은 누가 했어?”
말렉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분명 상대도 제게 호감을 보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였죠. 연애가 처음이라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말렉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시기를 놓치고 각자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
“결국 상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나중에 우연히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하더군요. 네가 날 좋아하는 줄 몰랐다.”
그 말을 하는 말렉은 왠지 허탈해 보였다.
“저는 열심히 표현한 줄 알았는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랬구나.”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고백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이 일리아의 가슴에 푹 하고 꽂혔다. 일리아는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다. 자신과 카르한도 그렇게 어긋나게 될 것인가. 이미 긴밀하게 얽힌 사이니까 완벽한 타인이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친구라는 자리에 머무를 뿐이다.
머리가 맑아졌다. 오랜 고민 끝에 확신이 섰다.
‘고백하자.’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받아주든 거절당하든 일단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마워, 말렉.”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말렉은 왜 이런 걸 물어보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렉이 알고 있을 정도로 티를 많이 낸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언제 고백할지 고민했다. 카르한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으니, 당장 고백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검술 대회가 끝나고 나서나 리하트와 파혼을 매듭지은 다음이 좋을 듯했다.
파혼 소송은 이미 걸어뒀으니, 재판관에게 약간의 성의만 보이면 다음 달 내로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는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꽃차 향기가 좋았다. 역시 다른 걸 다 마셔 봐도 스텔라가 만든 꽃차만큼 괜찮은 상품은 없었다.
일리아는 향긋한 꽃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할 일이 있었다.
“외출하자.”
그리고 연무장에 가있던 프란체까지 데리고, 말렉과 함께 셋이서 외출했다.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 도착한 일리아는 어느 번듯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화려하지만 촌스럽지 않은 예쁜 가게였다. 색감도 좋고 목도 좋은데,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일리아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가 들려왔다. 가게를 둘러보던 일리아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 왜 여기에…….”
“손님인데?”
일리아의 대답에 스텔라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가게는 스텔라가 운영하는 고급 찻집이었다. 가게 내부를 둘러보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꽃차 팔아 볼 생각 없어?”
스텔라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방금 일리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빈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차는 많은데, 디저트가 몇 개 없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가게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밝고 깔끔한 내부에는 가게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스텔라의 티파티에 초대 받았을 때도 생각했지만, 안목 자체는 훌륭했다.
일리아는 다시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점원을 불렀다.
“주문할게요.”
뒤로 물러서 있던 점원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장미 꽃차와 레몬 케이크 주세요.”
주문을 받은 점원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 차린 스텔라가 빠르게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찾아온 거야?”
“식사는?”
“했, 아니……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스텔라가 소리치자, 일리아는 한쪽 눈썹만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스텔라는 잠깐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일리아는 가만히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쩍 마른 느낌이었는데, 살이 좀 붙은 것 같았다.
잠시 황궁 연회장에서 봤던 스텔라가 떠올랐다. 스텔라의 주변에는 추종자가 바글바글했다. 보기만 해도 피곤해졌지만, 스텔라는 오히려 즐기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그것도 나름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게 벽을 치는 자신과 달리, 스텔라는 적극적으로 사교계에 뛰어들었다. 거기다 감각도 있었기에 수많은 유행을 일으키며, 자사 제품을 완판시키기도 했다.
‘확실히 재능은 있는데…… 사업 운영에 약하단 말이지.’
일리아는 생각을 접어두고 스텔라에게 말했다.
“한 잔 사줄 테니, 시켜.”
“여기 내 가게거든?”
스텔라는 고개를 팩 돌리더니, 똑같은 장미차를 시켰다. 잠시 후 점원이 꽃차와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일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향기가 무척 좋았다. 이 차를 한 번 마신 후로는 다른 차는 맛이 없어서 곤란할 정도였다.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스텔라를 응시했다. 예전이었다면 스텔라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이가 나빴고, 지금도 앙금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앙숙으로 지내온 세월이 길었으니 말이다.
스텔라가 제게 한 짓을 생각하면 선뜻 용서할 수 없었다. 카르한을 못살게 굴었던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일리아는 정말 많이 고민했다.
꼭 스텔라가 만든 꽃차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밤낮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제품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첫 사업인 만큼 무척 공들이고 있었고,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리아는 스텔라의 꽃차가 필요했다.
그러다 며칠 전 카르한과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스텔라 이야기가 나왔다. 오히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델로타 가문과 잠깐 협력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당신은 괜찮아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델로타 영애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스텔라에게 스토킹 당했던 카르한은 오히려 그녀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심한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못해서 스텔라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남자라고 일리아는 다시금 생각했다.
카르한 생각을 그만둔 일리아는 레몬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스텔라의 티파티에서 먹은 디저트도 별로였지만, 이건 더 별로였다.
“케이크 먹어봐.”
“……디저트는 안 먹어.”
스텔라가 거절했다. 아직까지 체중 조절을 하는 모양이었다.
‘안 먹어보니까 자기 집 디저트가 맛없다는 걸 모르는 거 아냐?’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스텔라는 오해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어.”
“뭐, 그건 됐고.”
일리아는 꽃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헹궈냈다.
“이번에 온천 사업 이야기 들었지?”
스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블로든 가문 부지에서 온천이 터졌다는 이야기는 소문이 워낙 크게 나서, 모를 수가 없었다.
“대형 휴양지를 짓는 중인데, 거기에 디저트 가게를 하나 열려고 해.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뭔데?”
“정기적으로 꽃차를 납품 받고 싶어.”
“제정신이야?”
스텔라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기 찻집에서 디저트 가게 이야기를 하니 발끈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스텔라가 꽃차로 대박쳐서 직접 디저트 가게와 찻집을 몇 번 운영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는 가게마다 족족 망했다. 차는 잘 만드는데, 가게 운영에 재능이 없는 것이었다. 아마 이 찻집도 몇 달 내로 접게 될 것 같았다.
협상하러 온 이상, 일리아는 스텔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신 다른 쪽으로 말을 꺼냈다.
“물론 네 꽃차 홍보도 넣어주고, 진열대에 상품을 비치할 생각이야.”
스텔라가 잠시 움찔했다.
“너도 가게 운영보다 꽃차 생산과 납품에 신경 쓰면 지금보다 더 잘될걸.”
“…….”
스텔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 정도는 대박을 쳐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꾸역꾸역 가게를 열긴 했지만, 손해만 보고 있었다.
연달아 망하니, 부모님도 이제 슬슬 찻집 사업은 접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 왔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스텔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경쟁자인 일리아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여는 디저트 가게는 냅킨 하나까지 최고급으로 구성할 거야.”
일리아의 말에 스텔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꽃차가 필요해.”
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리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찻잎을 계속 찾아보는데, 네 꽃차만 한 게 없더라고.”
“…….”
“맛도 좋은데 상품 포장도 예뻐서 마음에 들어. 넌 안목이 좋으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겠지.”
“내가 안목이 좋다고……?”
스텔라가 무척 얼떨떨한 말투로 되물었다. 일리아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다기도 가게랑 잘 어울리고 색감 배치도 훌륭해.”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느슨한 시선을 보냈다.
“저번에 보니까 정원도 잘 꾸며 놨던데.”
물론 그 정원에 심어놓은 꽃은 일리아가 팔아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꾸미는 것은 스텔라의 능력이었다.
“난 그런 거 잘 못하거든.”
일리아의 마지막 말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멎었다. 아무 말 않던 스텔라는 두 손으로 드레스자락만 움켜쥐었다. 어느새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델로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라온 스텔라는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다. 그러나 다들 스텔라를 인정해주는 대신, 일리아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해 왔다.
죽기 살기로 일리아를 뒤따라갔지만, 재능과 운은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리아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를 걸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쟁자인 일리아가 자신을 인정해준 것이었다.
혼자만 경쟁자라 생각하고 일리아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줄 알았는데……. 어떤 순간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텔라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민할 시간을 줘.”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의 감각이 있으면 블로든 가문에서 개량한 꽃을 이용해 새로운 꽃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꽃차일 터였다. 스텔라는 움켜쥐고 있던 드레스자락을 놓으며 웅얼거렸다.
“만약 내가 꽃차를 납품한다고 해도, 넌 계속 경쟁자야.”
“걱정 마. 나도 너랑 친구처럼 지낼 마음은 없으니까.”
단칼에 돌아온 대답에 스텔라의 속눈썹이 잠깐 흔들렸다. 일리아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셨다.
앞으로도 스텔라와 허물없는 친구처럼은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서로에게 상처 받아온 기억은 완전히 지워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스텔라는 계속 경쟁자로 남아줬으면 했다. 그편이 훨씬 재밌을 것 같았다.
차를 전부 마신 일리아는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리하트 테르시안 말인데.”
일리아가 멈칫하자,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집 찾아왔었어.”
“왜?”
“네 약점을 알려줄 테니까 돈 달라고.”
일리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둘이 아무 접점도 없을 텐데, 이제 하다 하다 스텔라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무슨 일 저지를 것 같아서. 경고해주는 거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스텔라가 덧붙였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사실, 이전에 리하트 테르시안하고 잠깐 협력한 적이 있는데…….”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레 놀란 스텔라가 빠르게 외쳤다.
“나도 좀 아닌 것 같아서 금방 발 뺐어. 내가 도운 건 에반테온 공작가 고용인을 매수해준 거뿐이야……!”
스텔라의 변명에 일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하트가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카르한이 임시 후계자라는 걸 알아내서 제게 일러바치러 오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카르한을 진짜 후계자로 앉혀야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이제야 의문이 전부 풀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아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스텔라가 우물쭈물하다가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사과보다는 인정에 가까웠지만, 자존심이 강한 스텔라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큰 발전이었다.
“그래.”
일리아는 덤덤히 대답해주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딱히 손해 본 것은 없었다. 도리어 리하트가 난동을 부렸기에 카르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텔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에반테온 소공자 말인데…….”
카르한이 언급되자, 일리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스텔라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여, 참았던 숨과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다고 전해줘.”
일리아는 스텔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척 단호히 말했다.
“네가 직접 만나서 제대로 사과해.”
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금화 한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 잘 마셨어. 찻값 두고 간다.”
일리아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딸랑, 하고 문에 달아둔 종 소리가 들려왔다. 스텔라는 일리아가 마셨던 찻잔을 바라보았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
에반테온 공작저 후원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촘촘히 드리운 나무 그늘 아래, 티세트가 놓였다. 작은 테이블 앞에는 레베타 에반테온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레베타는 다음 문장을 읽지 못하고 그대로 시집을 덮었다. 또다시 이전에 있었던 일이 불쑥 생각난 탓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남편인 에반테온 공작과 함께 잠깐 외출했다. 황제께 직접 받은 오페라 표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페라 극장에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카르한을 만났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학대하겠어요. 그렇죠?
간혹 일리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후로 레베타는 카르한을 대했던 자신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방에서 나오지 마!
-정말 구제 불능이야.
-어쩌다 너 같은 걸 낳았을까.
너무 화가 나는 날에는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자신의 행동은 학대가 분명했다. 레베타는 다시금 괴로워졌다. 마치 카르한의 이상 행동을 처음 목격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내 아들은 착한 아이니까 잘 달래줘야지, 자신이 이해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거짓말을 일삼았고, 점점 손버릇이 나빠졌다.
한번 의심하고 나니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전부 카르한의 소행 같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레베타가 취한 행동은 도피였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짓을 하든 품어줘야 한다고? 아니, 그랬으면 자신이 먼저 미쳤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카르한이었고, 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다들 자신처럼 행동했을 터였다.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간혹 아주 먼 과거가 떠올랐다. 카르한을 처음 품에 품었던 날. 관심 없어하는 공작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던 일. 장남인 블레어드와 달리 카르한은 온전히 저 혼자 키워냈기에 그만큼 애착이 컸다.
저를 향해 웃어주던 어린 카르한을 떠올린 레베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과거의 환영을 쫓아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마님, 서신이 왔습니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고용인이 후원에 찾아왔다. 서신을 받은 레베타는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반색했다. 블레어드가 보낸 것이었다. 곱게 봉투를 뜯은 레베타가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첫 글귀는 구구절절한 안부인사로 시작되었다. 레베타는 글자 하나하나 소중히 읽어 내렸다.
[저는 어머니께서 돌봐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만, 오랫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니 무척 그립습니다.]
[여름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감기가 지독하다 하니 몸조심하십시오. 어머니께서 아프시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편지는 온통 레베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레베타는 편지지를 곱게 접어서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 세상에서 레베타를 위해 줄 사람은 오직 블레어드뿐이었다.
레베타는 답장을 쓰기 위해 고용인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고용인이 잠시 후원을 떠난 사이, 한 남자가 찾아왔다. 카르한에게 붙여두었던 감시인이었다.
“마님, 소공자께서 검술 대회에 출전했다는 정보입니다.”
“검술 대회?”
“예. 황실에서 주최한 검술 대회인데, 벌써 64강에 올랐다고 합니다.”
카르한이 매일같이 어디론가 빠져나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블로든 저택만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블로든 가문과 약혼시켜야 했고, 고작 저택 안에서 뭘 하겠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검술 대회에 출전했다니. 한참 생각하던 레베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카르한이 우승할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요행으로 올라갔다 한들, 쟁쟁한 수재들이 전부 모이는 대회가 아닌가.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볐다 한들, 훈련 받지 않은 검술은 시정잡배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죽여 사고를 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렇게 되면 잠시 수그러든 나쁜 소문에 확신을 심어줄 것이 분명했다.
“내버려두거라.”
오히려 카르한의 평판을 떨어뜨릴 기회일지도 몰랐다.
***
검술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카르한은 그사이 16강까지 올라왔다. 예선전과 달리, 상대가 카르한을 보자마자 기권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카르한과 맞붙어서 세 합을 넘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아직 결승도 아니건만, 사람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666번이 괴물 같은 실력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말이다.
경기가 끝나고 블로든 저택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카르한은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일주일이 흐른 오늘. 16강과 8강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출전자가 적은 만큼 관중석은 친지보다는 진짜 검술대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르한은 대기실에 앉아서 앞 경기를 지켜보았다. 실력이 비등비등해서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한 시합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방이 오간 끝에 결국 45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막 경기를 치른 두 사람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45번은 잔뜩 들뜬 얼굴이었고, 그와 붙었던 172번은 의자에 털썩 앉더니 겨우 울음을 삼켰다.
대기실과 이어진 통로에서 172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만 내쉬던 172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으로 향했다.
카르한도 덩달아 그쪽을 응시했다. 제법 극성인 가족들이어서 카르한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꾸 대기실 통로까지 찾아와서 응원하거나, 힘내라며 이런저런 간식을 쥐여 주곤 했었다. 이윽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대기실 안까지 들려왔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
“벌써 지다니, 네 친척들을 볼 낯이 없구나!”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자신이 야단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5번, 666번 대기해주세요.”
대회 안내인의 말에 카르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쿵쿵,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대기실을 벗어나 완전히 경기장으로 나서자,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원형으로 둘러싸인 관중석에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카르한은 겨우 고개를 들어,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응시했다. 다들 웃으며 카르한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들과 똑같이 마주 손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경례.”
어느새 상대가 마주 서고,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친 카르한은 칼집에서 검을 뽑으려 했다.
“…….”
검 손잡이에 닿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르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러나 떨림은 쉽사리 멎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이미 수많은 경기를 치러오지 않았던가. 가야 할 길이 먼데 벌써부터 긴장하게 되면…….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일리아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카르한은 두려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카르한은 지금껏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뭐든 실패 없이 해내왔다. 예술 분야부터 후계자 수업, 검술 훈련까지……. 다들 잘하고 있다고, 이대로만 하면 된다고 칭찬해주었다.
만약 여기서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경기에서 진 사람처럼 되는 걸까. 온갖 상념과 함께 막대한 부담이 카르한을 짓눌러왔다.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지금껏 누구도 카르한에게 기대를 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실패해도 덤덤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카르한을 끝까지 믿고 응원해주었다. 자신이 보답할 길은 우승뿐이었고,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666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카르한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상대는 이미 검을 뽑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한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빼들었다. 어찌나 손 떨림이 심한지, 쭉 뻗은 칼날이 바람에 휘날리는 꽃대처럼 보였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카르한은 단 한 합 만에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공격을 할까, 방어를 할까. 혹시 자세가 어긋나지는 않았을까. 카르한이 머뭇거리는 사이, 상대의 검은 점점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그에 비해 카르한은 방어하기 급급했다. 누가 보아도 카르한이 밀리는 모양새였다. 카르한은 애써 잡념을 떨쳐내고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잔뜩 힘을 실어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상대의 팔이 크게 흔들리더니, 결국 검을 놓치고 말았다.
“……666번 승리!”
심판의 판정에 카르한은 숨을 내뱉었다. 고전 끝에 겨우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자세에 유의해주십시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구석으로 향한 카르한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앉았다. 손 떨림은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아직도 경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한참 그러고 있던 카르한은 저를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카르한.”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대기실 안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일리아가 보였다.
일리아를 발견한 카르한은 표정이 확 풀어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은 일리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실망시키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일리아를 저대로 세워둘 수 없었기에, 카르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복도로 나오자 일리아가 카르한을 구석구석 살폈다.
“뭔가 이상해 보여서 내려왔어요. 몸 상태가 안 좋은 거예요?”
“……아닙니다.”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에요. 다들 걱정했어요.”
카르한이 입술을 잘근 깨문 채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일리아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일리아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카르한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일리아가 저렇게 물을 때마다 카르한은 숨길 수 없어졌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실패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모두를 실망시킬까 봐.”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에 잔뜩 위축된 카르한의 모습이 비쳤다.
“우리는 완벽한 당신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르한을 마주 보던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아, 그의 떨리는 손을 보았다.
“지더라도 괜찮아요.”
“…….”
“당신은 지금까지 충분히 노력했고, 우린 그걸 알고 있어요.”
손을 뻗은 일리아가 카르한의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보다 차가운 두 손이 일리아의 작은 손에 붙잡혔다.
“처음 대회에 출전해서 여기까지 오른 게 얼마나 대단한데요.”
벌써 8강이었다. 천 명이 넘는 사람 중, 여덟 번째 안에 든 것이다. 우승하지 않더라도 카르한의 강함은 입증되었다. 그리고 찾아보면 검술 대회 말고도 입지를 다질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주며 씩 웃었다.
“경기에서 지는 건 실패가 아니라, 다음 기회를 남겨두는 거예요. 내년 대회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함께할 거잖아요.”
“계속…….”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둠에 드리우는 햇살처럼 일리아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카르한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떨림이 멎은 채였다.
긴장이 완전히 달아났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부담은 훨씬 덜어졌다. 전신을 억누르던 승리에 대한 압박감이 사라진 것이다. 카르한이 움츠러든 어깨를 서서히 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응원 대신 가벼운 한마디를 남겼다.
“나중에 맛있는 거 먹어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가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가고, 카르한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폐부를 찔러오는 공기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조금씩 머릿속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666번 대기해주세요.”
손바닥을 한번 폈다가 접은 카르한이 경기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함성과 시선이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경기장 중앙까지 걸어간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경례.”
상대와 마주 선 카르한이 반듯한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칼을 빼들었다. 곧게 뻗은 칼날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목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가 경기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잡념 하나 섞이지 않은 검이 곧바로 흐름을 탔다.
비올레에게 배운 대로 힘을 빼고 부드럽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검의 궤적이 별자리처럼 한 점으로 이어졌다. 상대가 방어하기 위해서 몸을 뒤로 뺐을 때, 카르한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
카르한의 검이 상대의 목 아래에서 멈추었다. 순식간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666번 승리!!”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어마어마한 응원을 들으며 카르한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일리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쏟아지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보답하듯 카르한이 마주 웃었다.
***
“적어도 이틀은 푹 쉬도록 해요.”
준결승과 결승만을 앞두고 있는 카르한에게 비올레가 말했다.
“잘 쉬는 것도 훈련이니까요.”
간만에 훈련을 쉬게 된 카르한은 일리아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리아는 아침 일찍 일이 생겨서 외출한 상태였다.
카르한은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따로 수업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작저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산책이나 하며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소공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편안한 복장을 한 헤인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쉬는 날인 듯했다.
“바쁘십니까?”
헤인리의 물음에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잠깐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예.”
카르한은 조금 긴장한 채 대답했다. 헤인리와 마차를 함께 탄 이후로 제법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카르한은 헤인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서관 복도 끝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문이 하나 있었다. 헤인리가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제가 무척 아끼는 공간입니다.”
헤인리는 카르한에게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평소에 과시욕이 없던 헤인리였기에 이 방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내부가 보였다. 커다란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수십 개의 액자였다.
“!”
액자에 담긴 그림을 확인한 카르한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전부 일리아의 초상화였다.
“분기마다 초상화를 그려두었지요.”
헤인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리아가 작은 아기일 때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된 모습까지 순차적으로 걸려 있었다. 카르한은 초상화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어릴 적의 일리아는 정말로 천사 같았다. 발그레하고 통통한 뺨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까지, 어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무척…… 귀엽습니다.”
미사여구를 곁들일 줄 모르는 카르한이 순수하게 칭찬했다. 정신없이 초상화를 구경하던 카르한이 질문했다.
“이 초상화는 몇 살 때입니까?”
“8살 때입니다. 이 사이 많이 자랐지요?”
헤인리는 그 시절에 있었던 비화를 줄줄 말해주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지 사소한 이야기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카르한은 토씨 하나 잊지 않으려고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초상화를 감상했다. 그러던 카르한은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있는 일리아의 초상화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토끼인형보단 곰인형을 좋아하더군요.”
제 몸집만 한 곰인형을 안고 있는 일리아는 행복해 보였다. 카르한은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일리아에게 안겨있는 저 곰인형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초상화를 구경하던 카르한은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추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카르한은 소녀 시절의 일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상화 외에 다른 물건도 있습니다.”
헤인리는 이어진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 있었다. 그가 구석에 놓여 있던 거대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전부 일리아가 제게 써준 편지입니다.”
카르한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가 직접 써준 편지라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카르한의 반응에 헤인리는 무척 뿌듯해하며 말했다.
“아카데미에 가 있을 때 일주일에 한두 통은 꼬박꼬박 보내왔지요.”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매일 편지만 기다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헤인리의 표정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창 방을 구경했다. 일리아가 과거에 쓰던 물건부터 헤인리에게 선물했던 것까지 다양했다. 보물 창고를 찾은 것처럼 카르한의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다시 액자가 걸린 방으로 나온 헤인리는 성인이 된 일리아의 초상화 앞에서 멈춰 섰다. 훌쩍 커버린 일리아는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릴 적의 환한 미소와 사뭇 달라 보였다. 초상화를 바라보던 헤인리가 중얼거렸다.
“일리아가 누구와 결혼해도 마음에 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공자라면 왠지 안심이 됩니다.”
일리아를 행복하게 해줄 것 같다고, 헤인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린 그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연녹색 눈동자에 카르한이 비쳤다.
“어머니께 따로 검술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저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카르한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작위를 이어받으려면 행정이나 서류 처리 능력도 필수지요.”
“……예, 그건 전부 테시온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카르한이 처리해야 할 서류는 테시온이 도맡았다. 초대장이나 서신 같은 것도 그가 1차적으로 분류해주었다.
“소공자의 보좌관이 유능하긴 하나, 본인이 직접 처리할 줄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확실히 작위를 계승하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량이 늘어날 것이다. 테시온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을 터였다.
지금껏 너무 테시온에게만 의지한 것 같아서 카르한은 속으로 반성했다. 그런 카르한을 바라보던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행정 업무와 서류 결재는 제가 전문입니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헤인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에서도 못 받는 수업, 받아보시겠습니까?”
***
결승 경기를 하루 남겨둔 저녁, 에반테온 공작의 호출이 있었다. 전에 헤인리의 문제로 찾아갔던 후로 독대는 처음이었다.
카르한은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두 번 노크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불빛으로 가득 찬 방이 드러났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에반테온 공작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공작은 왔느냐는 흔한 인사말조차도 없이 입을 열었다.
“요즘 헛짓거리를 하더군.”
검술 대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네 본분을 망각하지 마라.”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 임시 후계자일 뿐이니, 알아서 기권하라는 경고였다. 카르한은 친부인 에반테온 공작을 바라보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카르한과 공작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카르한에게 에반테온 공작은 레베타보다 더 먼 사람이었다.
에반테온 공작은 오래전부터 가정에 관심이 없었다. 레베타와 결혼한 뒤로도 여전히 애인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작으로서 본분만 지켰고,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과 상관없다고 선을 긋고 귀를 막았다.
공작은 레베타와 마찬가지로 카르한을 꺼려했다. 블레어드의 경우에는 후계자가 필요해 낳았지만, 카르한은 그의 계획에 없던 자식이었다. 심지어 레베타를 사랑하는 애인으로 착각하여 품었다가 생긴 오점이었다.
철저한 방관자였던 그는 레베타의 소원대로 카르한을 전쟁터로 보냈다. 카르한은 쓸모없는 여분의 존재와 같았기에, 전쟁터에서 죽어도 딱히 아쉬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침묵하던 카르한이 덤덤히 대답했다.
“하실 말씀은 끝나신 겁니까.”
제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가만히 카르한을 노려보다가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분쟁 지역에 다녀와야 하는 건 잊지 않았을 테지?”
검술 대회에서 우승해봤자, 곧장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카르한의 속눈썹이 짧게 흔들렸다. 그제야 공작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결국 제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가봐라.”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카르한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왔다. 카르한의 표정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벌써 늦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거든 분쟁 지역으로 떠나라 했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르한은 아직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적어도 비올레나 일리아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계속 미루고 말았다. 완벽하게 숨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인리 때문에 분쟁지역으로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면 일리아가 죄책감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카르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카르한을 기다리고 있던 테시온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테시온이 봐도 제 얼굴이 무척 심각해 보인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테시온을 바라보다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조만간 분쟁 지역에 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째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시온이 물었다.
“에반테온 공작께서 결정하신 일입니까?”
카르한은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대신 단호히 말했다.
“나만 가면 되는 일이니 따라올 필요는 없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카르한 님께서 가시는 곳은 전부 따라갈 겁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르한은 더 이상 테시온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단칼에 거절당한 테시온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블로든 영애께서는 아십니까?”
카르한은 침묵했다. 테시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왠지 화가 난 얼굴로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이미 각오한 일이니까 말리지 마십시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르한 님을 따라갈 겁니다.”
테시온은 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오후. 검술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라 황궁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카르한은 경기 준비를 하러 아침 일찍 황궁에 입궁했다. 오늘 준결승을 치른 다음 곧바로 결승전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황궁 연무장을 가운데 두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검술 대회를 구경하러 온 귀족들로 가득 차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에는 황족들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에반테온 공작 부부가 자리했다. 낯이 익은 이들도 제법 보였다. 미술관에서 연을 맺게 된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 에반테온 원로들, 연회에서 친분을 다진 이들.
마지막으로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가 카르한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일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올 모양인 듯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 대기해주십시오.”
666번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올라왔구나 싶었다.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간 카르한은 곧바로 준결승을 치렀다. 상대는 프란체와 마찬가지로 속공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었다. 프란체와 대련한 경험이 있는 카르한은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카르한은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르한은 레베타를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그녀의 표정은 무척 나빠 보였다. 카르한이 결승전까지 올라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다시 일리아를 찾았다. 여전히 일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서 괜히 걱정되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고민하던 카르한은 의자에 앉아 다음 경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저 경기에서 이긴 사람과 결승에서 맞붙게 되는 것이었다.
심판이 시작을 알리고,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을 때, 카르한은 누가 이길지 바로 알아차렸다. 카르한이 예상한 대로 검푸른 머리카락을 한 사내가 승리를 차지했다.
“하베론 라베르트 님의 승리!”
주위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하베론이라 불린 사내는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대대로 기사를 배출한 가문의 장남이자, 아카데미 검술부에서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결승전은 하베론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즈음 이루어졌다.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가는 카르한의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이제 결승인데, 아직도 일리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판이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미묘해서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경례.”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자마자, 카르한은 곧바로 공격을 가했다. 묵직한 힘이 실린 검이었지만, 하베론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공격을 받아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공방이 오갔다. 카르한은 하베론이 자신과 완전히 상반된 검술을 지녔다는 걸 눈치챘다.
하베론의 검술은 정석 그 자체였다. 대회에 가장 적합했으며, 이어지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기본기 없이 사람을 베는 법을 먼저 배웠던 카르한과 너무나 달랐다. 비올레조차 교과서적인 검법에서 약간 변형된 검술을 사용했기에, 유독 까다롭게 느껴졌다.
카르한은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의 검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씩 밀려나던 카르한은 마침내 하베론의 검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르한은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반격에 들어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몇 번이나 검이 맞부딪쳤다. 팽팽한 기류에 전신이 오싹거렸다. 공략을 찾은 카르한이 자신 있게 공격을 가했다. 막상막하로 보이던 경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르한이 승기를 잡은 순간이었다.
“잠깐!”
심판의 외침에 카르한과 하베론이 동시에 멈추었다. 경기가 잠시 중단되자, 심판이 외쳤다.
“방금 자세는 반칙패를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십시오.”
심판이 카르한에게 경고를 주었다. 카르한은 자신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는지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심판이 그렇다고 하니 유의할 생각이었다. 시합이 재개되고, 끊어진 흐름을 찾아오기 위해서 애썼다. 하지만 카르한 쪽이 우세해질 때마다 심판은 자꾸 경기를 끊고 경고를 주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카르한의 행동 범위가 점점 좁아졌다. 혹시 이것도 경고를 받을까 싶어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 경고가 이어지자, 카르한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심판이 자신에게만 불리한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공방이 너무 빠르게 오가니, 반칙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몇몇 사람들만 고개를 갸웃하거나 소곤거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체력은 자신 있지요?
비올레의 말을 떠올린 카르한은 자세를 바로 잡고 방어에 주력했다. 시합이 길어지자 하베론의 검이 조금씩 둔탁해지기 시작했다.
“…….”
공격이 통하지 않자, 하베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을 공격하면 곧장 막혀버렸다. 거기다 카르한은 지치지도 않는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칼 한 자루로 철옹성을 베어내는 기분이었다.
하베론은 이대로라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꼈다. 이를 꽉 깨문 그는 일격으로 시합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단단히 틀어 쥔 하베론이 온 힘을 다해 카르한에게 파고들었다.
그때 웅크리고 있던 맹수가 이를 드러내듯, 카르한이 처음으로 공격을 취했다. 강한 힘이 실린 검이 동시에 맞붙었다.
카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칼날이 허공을 베어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검 반쪽이 하베론의 동공에 비쳤다. 카르한의 검은 이미 하베론의 목 아래에 자리 잡은 후였다. 부러진 것은 하베론의 검이었다.
툭, 날붙이가 잔디 위로 떨어지고 주위가 침묵에 휩싸였다. 멍하니 지켜보던 심판이 입술을 달싹였다. 꼬투리 잡을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심판이 결국 승리를 선언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의 승리……!”
심판의 판정과 함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승을 차지하자마자 카르한은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 틈에서 햇살처럼 환한 금발을 찾았다. 그러나 일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한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분명 지금쯤이면 일리아가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승전에는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그랬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카르한이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자, 안내인이 그를 불렀다.
“바로 우승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 갈 틈도 없이, 카르한은 곧바로 황제의 앞으로 불려 나갔다. 카르한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무척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실력이었다.”
황제는 연설에 가까울 정도로 공로를 치하한 뒤, 시종관에게 눈짓했다. 시종관이 다가와 검을 내밀었다. 검을 받아든 황제가 말했다.
“앞으로도 제국을 빛내주도록.”
카르한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황제는 카르한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에 퇴장했다. 카르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많은 이들이 카르한의 주변을 둘러싸고 축하해주었다.
“소공자가 이길 줄 알았습니다!”
“무척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다가와, 눈물을 글썽이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에반테온 공작 부부는 이미 자리를 뜬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말을 걸어왔으나, 카르한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 카르한은 양해를 구한 후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는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카르한이 다가오자 세 사람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굳어진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소공자, 일리아가 납치된 것 같아요.”
카르한이 우뚝 멈추었다. 멈춰버린 심장이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수도 경비대 전체에 연락을 넣어두었는데, 지금 우리도 수색에 나설…….”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멎은 것 같았다. 비올레의 말조차 아득하게 들려왔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카르한의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던 카르한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제에게 받은 검을 움켜쥔 채 곧바로 달려 나갔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