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5/28)

15장

***

리하트는 정신없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카르한이 붙잡았던 손목이 떨어질 것처럼 시큰거렸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차를 타고 테르시안 후작저택으로 돌아온 리하트는 서류 더미를 헤집었다. 전부 중개업자가 작성해둔 서류로,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장 중개업자에게 연락하려던 리하트는 그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한다며 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젠장…….”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중개업자가 어디로 가는지 주소를 말해놓고 갔으니, 그쪽에 사람을 보내볼 생각이었다. 왕실 측에 공문을 보내서 거래가 성사된 것이 맞는지 사실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리고…….

닳고 닳은 실타래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자꾸 끊겼다. 불안이 그를 좀먹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훑던 리하트는 숨을 삼켰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 얼마나 되더라? 다른 업자에게 치러야 할 대금은? 생활비로 쓰기 위해서 지인들에게 빌린 돈은……?

계산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바위처럼 리하트를 짓눌러왔다.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면 마치 압사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팔 수 있는 건 이미 전부 다 팔았고, 저택을 넘겨도 빚을 다 갚지 못할 것이었다. 심지어 생산했던 1만 개의 상품은 중개업자가 직접 유통시켜주겠다며 가져간 상태였다. 리하트는 핏기가 싹 가신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왜 의심할 생각을 못 한 거지…….”

리하트는 처음 중개업자를 만났을 때를 되짚어 보았다. 중개업자는 신원이 깨끗했다. 귀족은 아니었으나, 상인으로서 평판이 좋았다. 유명 인사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었고, 이전에 맡은 거래도 전부 성공적이었다. 중개업자로서는 완벽할 정도였다. 리하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날이 밝으면 지인을 찾아가면 되겠지.”

그들은 알 것이다. 중개업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분명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정보를 흘렸을 터였다.

리하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마지막으로 봤던 일리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저번 연회에서도 그랬다. 치정사건이 일어나기 전,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일리아가 짜놓은 판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꿎은 종이만 구기고 있는데,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다. 이윽고 침실 문이 발칵 열리고 시오나가 뛰어 들어왔다.

“리하트 테르시안!!”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시오나가 리하트의 멱살을 붙잡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윽박질렀다.

“사기 당했다니!!!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거 놔.”

“내 돈! 내 돈은 어쩔 거냐고!!”

멱살로는 부족했는지, 시오나가 리하트의 머리를 잡고 뜯었다. 손아귀의 힘이 대단해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미쳤어?”

리하트는 거칠게 시오나를 밀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시오나가 소리 질렀다.

“너만 믿고 투자했다고! 이제 어쩔 거야……. 다 너 때문이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시오나가 악을 쓰며 리하트에게 달려들었다. 소란을 듣고 고용인들이 달려와 시오나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내가 투자하랬어? 결혼했으면 그쪽에나 신경 쓸 것이지!”

리하트가 마주 소리치자, 시오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저주에 가까운 상스러운 욕설에, 리하트는 참지 못하고 시오나와 머리채를 잡으며 싸웠다. 소란이 점점 커지자 후작 부부가 나타났다.

“뭐 하는 짓이냐!!”

지팡이를 든 테르시안 후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후작부인이 싸움을 말리려 하자, 시오나가 울면서 말했다.

“리하트 저 자식이 사기 당했다고요!”

“……뭐?”

후작부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섬뜩할 정도로 정색한 후작부인이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중개업자가 사기꾼이었대요!”

털썩, 후작부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그녀가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꿈이겠지. 말도 안 돼…….”

“어머니!”

리하트가 시오나를 밀쳐내고 후작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후작부인이 고개를 홱 돌려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지?”

순간 리하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 쉬듯이 나오던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하트가 대답하지 않자 후작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놀란 세 사람이 후작부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옆에 있던 고용인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혼절한 그녀를 일으켰다. 고용인이 후작부인을 부축해 나가버리자, 소름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훌쩍이던 시오나조차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석상처럼 우뚝 서 있던 후작의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었다. 그는 지팡이를 부러뜨릴 것처럼 쥐었다.

“이, 이…….”

지팡이를 번쩍 치켜 올린 테르시안 후작이 리하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악! 아버지!”

정정한 사내가 쇠 지팡이로 때리니 눈물 나도록 아팠다. 그러나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터뜨리듯 리하트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전부 네 잘못이다!! 황궁 내에서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것도, 유서 깊은 저택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직전이 된 것도……!”

후작이 구부러진 지팡이를 내던지며 소리 질렀다.

“당장 나가!!!”

웅크리고 있던 리하트는 강제로 끌려 나갔다. 사기꾼을 잡아올 때까지 절대 들어올 생각 말라며,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야밤에 그대로 쫓겨난 리하트는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대문을 붙잡고 잘못했다고 빌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리하트는 욱신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 저택에서 벗어났다.

머리는 쥐어뜯기고, 오늘 연회를 위해 새로 맞춘 옷은 누더기나 다름없어졌다. 리하트는 일단 중개업자가 친분을 자랑했던 이들을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중개업자 지인들의 집을 돌기 시작했다. 야밤에 불쑥 찾아온 리하트를 보며 대부분 눈을 찌푸렸지만,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 그 사람? 술친구로 지냈지만 사적으로는 잘 몰라서…….”

“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뭐 하던 사람인지 대충 듣긴 했는데, 확실하진 않아서요.”

다들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고만 답했다. 중개업자와 친분이 있음을 인증해줬던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친하긴 한데 잘은 모른다.’

비틀대며 걷던 리하트는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로서 확실해진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사기 당했다는 사실이.

***

연회장의 화려한 불빛이 점점 멀어졌다. 카르한은 마차로 돌아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연회장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곳인데 신기루처럼 멀게 느껴졌다. 저를 향하던 사람들의 호의나, 일리아와 함께 춤을 추었던 것…….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드니 아까 일리아와 함께 나갔던 테라스가 보였다. 잠깐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테라스에 나온 후로 일리아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열이 있는 듯 얼굴도 붉었고,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근래에 계속 무리했더니 몸살이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카르한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내비쳤고, 일리아도 동의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테라스에서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요.

문득 테라스에서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제대로 고백해보지도 못했는데, 일리아는 이미 카르한과의 관계에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달이 구름에 숨은 것처럼 카르한의 얼굴도 조금 어두워졌다. 전에도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좋은 친구라 말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데, 과연 이 관계가 친구일까. 정말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걸까.

잠시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되돌아왔다. 카르한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달라졌구나…….”

예전이었으면 혼자 실망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안 될 거라고, 이미 끝났다고. 하지만 일리아의 한마디에 물러서기엔 카르한은 이미 너무 많이 바뀌어버렸다.

무엇보다 차근차근 쌓아올려 뒤늦게 알게 된 이 마음을 접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더 커져가는 마음을 어떻게 한순간에 꺼뜨리겠는가. 물론 제 감정을 계속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저 멀리 카르한의 마차가 보였다. 그쪽으로 걷던 카르한은 마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자는 카르한의 모친인 레베타였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레베타가 카르한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 하고 다니는 것이냐.”

레베타의 입에서 차가운 비난이 쏟아졌다.

“내가 눈에 띄지 않게 있으라 하지 않았던가?”

카르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레베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마주해 올 줄 몰랐는지, 레베타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카르한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레베타는 카르한이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다. 순종하고 굴복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때 카르한은 그녀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형인 블레어드처럼 사랑받진 못해도, 그녀에게 이름뿐인 혈육이 아니라 가족임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미련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싫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베타가 되물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이 한 마디를 내뱉기까지 많은 시간을 걸어왔다. 이제 빛이 드는 양지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더 이상 그늘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싫다고……?”

잘못 들었다는 듯 레베타가 되물었다. 카르한은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네 자리도 아닌데, 착각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

레베타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에반테온의 후계자는 블레어드다. 감히 네놈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

“공작부인.”

레베타가 흠칫했다. 마치 타인을 부르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카르한은 지금껏 속으로만 담아왔던 말을 뱉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카르한은 늘 궁금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머니가 그리도 저를 미워하는지. 레베타가 못된 아이라고, 구제 불능이라고 비난할 때마다 카르한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자신을 정의 내렸다.

-구제 불능이라니! 당신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일리아의 말을 믿을 것이다.

“가증스러운 것.”

레베타가 주먹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네놈이 한 짓을 전부 잊은 거냐.”

“…….”

“너 때문에 나는 미칠 것 같았는데.”

증오 어린 눈빛에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어릴 적부터 그랬지. 항상 아닌 척 시치미 떼곤 했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아끼던 물건을 부수고, 난도질한 짐승 사체를 침실에 던져놨으면서……!”

그 일은 카르한도 기억했다. 레베타가 사색이 된 채 저를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레베타가 왜 그러는지, 어째서 제 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했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태연하게 거짓말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하지만 레베타는 당연히 카르한의 짓이라 단정 내린 지 오래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빨리 분쟁지역으로 가버려라.”

이전에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과 거래를 했었다. 헤인리 블로든을 도와주는 대가로 분쟁지역에 다녀오기로 말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침묵하던 카르한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과 레베타가 틀어져서 이득 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그걸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형님을 의심해본 적은 없습니까?”

블레어드 이야기가 나오자, 약점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레베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방금 말씀하신 것들이 형님께서 한 짓이라면…….”

“그 입 다물어!”

황궁 안이라는 것도 잊고 레베타가 소리쳤다. 그녀는 블레어드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다.

“요즘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더니, 혹시 네게 헛바람을 넣은 게 블로든이냐?”

그녀가 일리아를 언급하자, 이번엔 카르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맞구나.”

그냥 델로타와 약혼을 추진했어야 했는데……. 하고 레베타가 혼잣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헤어지라고 하고 싶은데,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블로든 가문과 약혼을 추진해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레베타는 표정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그 말을 듣자 카르한은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저 작은 애정만 바랐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잘못된 것이었나. 카르한은 이제 남아있던 미련을 전부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레베타가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르한이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에반테온 공작이 될 겁니다.”

***

황궁 연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수도에 온갖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단연 화제가 된 것은 카르한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둘러싼 나쁜 소문은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살인귀, 피에 미친 전쟁광, 미친개…….

그러나 이번 연회에서 카르한은 만나본 이들은 하나같이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떠들어댔다. 정중했다, 머리도 좋고 잘생겼더라, 공작가 후계자로서 자질이 충분해 보이더라……. 카르한의 평판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물론 카르한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카르한이 여전히 미친놈인데, 일리아 블로든을 만나서 자제하는 거라 소문을 냈다.

카르한 다음으로 화제가 된 것은 리하트였다. 이미 리하트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치정극을 한 편 썼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연회에 얼굴을 내밀더니, 끝내 일리아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에 다들 분노했다.

더불어 리하트가 사기 당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유서 깊은 테르시안 저택은 은행 소유가 되었으며, 돈을 쏟아 부었던 장난감 사업은 경매에 부쳐졌다.

그럼에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화려한 재기를 꿈꾸던 리하트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후우.”

일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재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 같은데,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탓이었다.

일리아는 머리를 식힐 겸 후원을 산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서류를 왕창 들고 들어온 말렉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산책하려고. 당장 봐야 할 서류는 후원에 가져다줘. 차 마시면서 보게.”

일리아는 곧장 본관을 빠져나왔다. 정오라 그런지 뜨거운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 아래로 피신한 일리아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별관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일리아는 현관을 확인했다. 오늘 수업이 없었는지, 카르한의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관에 들르면 카르한이 있는 게 당연했기에, 텅 빈 현관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연회에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그 후로 카르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또다시 가슴이 갑갑해졌다.

사실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오래전부터 호감을 느꼈고, 점점 끌렸다. 하지만 관계가 변하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에 자물쇠를 걸고 내내 모른 척해왔다. 지금껏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완벽하게 닫혔다 생각했던 문에는 빈틈이 있었다.

카르한은 물안개처럼 조금씩 밀려와 틈에 스며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물안개는 웅덩이가 되었고, 이내 파도가 되어 일리아를 휩쓸어버렸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어쩌지.’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은 일리아를 들뜨게 만들다가도 불안 속으로 처넣어버렸다. 마음 편히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일리아는 항상 처음 시작할 때 끝을 염두에 두곤 했다. 결국에 헤어질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무엇보다 카르한이 저를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 호감이 나와 같은 마음일지는…….’

카르한은 워낙 다정한 남자니까. 거기다 자신은 카르한이 지금껏 받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었다. 그러니 당연히 호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자신을 좋아해줬던 다른 사람들처럼, 돈으로 감정을 사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 괴로웠다.

겨우 카르한 생각을 떨쳐낸 일리아는 천천히 걸어 후원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말렉이 의자를 빼주었다. 일리아가 의자에 앉는 동시에 말렉이 보고를 시작했다.

“소송장은 오늘 아침에 넣었습니다.”

“리하트 쪽은?”

“아마 내일이면 그쪽도 서류를 받아볼 겁니다.”

드디어 파혼 소송이 시작되었다. 리하트 쪽은 변호인을 선임할 돈도 없었고, 재판은 일리아가 훨씬 유리했다. 유래 없는 치정 사건을 일으킨 데다가 이번 연회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았던가.

소송에서 승리해 리하트와 파혼하고 나면, 공작부인이 약혼을 추진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카르한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카르한의 후계자 입지를 완전히 다질 생각이었다.

이번 연회를 통해 평판이 많이 좋아졌으니, 가문 내에서도 발언권이 조금씩 생길 테고 말이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테르시안 가문 측에서 운영하던 사업장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좋아, 사들여.”

“이미 망한 사업체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가문이랑 공동사업 하려던 거였잖아. 다시 되찾아 오는 거지.”

그래도 리하트가 돈을 많이 부어서 그런지 기반은 잘 다져진 상태였다.

“리하트는 한 번 말아먹었지만, 내 재물운이 얼마나 좋은지 어디 한번 보자고.”

고개를 끄덕인 말렉이 다음 보고를 이어나갔다.

“바네사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니, 시간 나시면 방문해달라는 전언입니다.”

황후가 의뢰한 작품을 그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연회에서 황후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다음에 입궁할 일이 생기면 찾아뵈어야 할 듯싶었다.

말렉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이제 온천 부지에 공사가 시작된다고 말해주었다. 이미 지반을 다진 상태에서 온천이 터진 것이었기에, 건물을 올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다음 달에 황궁에서 검술 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서류를 넘기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생각보다 일렀다. 작년에는 가을 이후에 열렸기에 올해도 그때쯤 할 줄 알았다.

황실에서 주최한 검술 대회는 귀족 영식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우승자는 출세가 보장될 정도이니, 만약 이번에 카르한이 우승하게 되면 후계자로서 입지를 완전히 다질 수 있다.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다시 카르한을 떠올린 일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 자신도 없었다.

“아가씨?”

한숨 쉬는 일리아를 본 말렉이 조심스레 불렀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말렉은 저보다 십 년은 더 살았으니,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상담을…….

“아가씨!!”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리아와 말렉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프란체가 후원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프란체!”

말렉의 호통에 프란체는 잠깐 주춤했다가 금방 일리아 앞까지 뛰어왔다. 일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외출한다더니?”

“외출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큰일 났습니다!”

“……뭔데 그래?”

프란체가 해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온천 인근 상인들이 단체로 시위 중입니다!”

“뭐, 시위?”

프란체의 말을 듣자마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지나가다가 너무 소란스러워서 보니까, 온천 사업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봐야겠어.”

일리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을 빠져나온 마차는 어느덧 온천이 터진 부지 근처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팻말을 든 사람들이 단체로 항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블로든의 횡포다!”

“집 앞에 그렇게 큰 건물을 짓다니, 햇빛은 어떻게 보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온천 부지가 주거지역이 아닌지라, 시위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인근 소상인들로 보였다. 그리고 소수의 주민들은 일조권 침해와 이 근처가 너무 시끄러워지는 것을 염려했다.

일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돈 많은 귀족 가문이 주변 상권을 먹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바로 옆에 동종 업계가 들어선다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얌체 같은 귀족들은 어떤 가게가 잘 되는지 알아봐뒀다가 똑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를 근처에 차리는 경우도 많았다. 가격을 저렴하게 매겨 기존 가게에서 손님들을 하나둘 뺏으며 성장했다.

손님을 빼앗긴 가게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나, 감히 귀족에게 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보복 당하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일리아의 온천 사업은 전례 없는 대형 사업이었다. 근처 상인들이 죄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다 같이 작정하고 모인 듯했다.

‘내가 실수했구나.’

지금껏 없던 대형 휴양 시설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주변 상권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어떡하죠? 역시 마님께 연락을 드려야 할까요?”

프란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 또한 비올레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맡은 대형 사업이니 스스로 헤쳐 나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 경영 수업을 듣지 않았던가.

“내가 나서볼게.”

프란체와 말렉이 엄호를 위해 일리아 옆에 딱 달라붙었다. 일리아는 시위하는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시위대들이 잠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온천 사업의 대표인,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일리아 블로든……?”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순간 긴장이 흘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블로든 가문의 실세라던……?”

“미친개를 길들였다던데. 저렇게 작은 체구로…….”

그들의 말에 일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실세? 미친개?’

전부 일리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블로든 가문의 실세는커녕, 자신은 아직 배우는 처지에 불과했다. 미친개는 또 뭐란 말인가. 일리아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사정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최선을 다할 테니,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일리아의 정중한 부탁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일리아는 근처 찻집을 통째로 빌렸다.

“음료는 제가 사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마세요.”

시위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졸지에 음료 수십 잔을 팔게 된 찻집 주인만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일리아는 일단 비슷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아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리고 말렉은 자연스럽게 일리아를 도와, 상황을 정리했다.

“인근 주민들은 건물이 집을 가려서 햇빛을 보지 못하는 문제와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불만이라고 합니다.”

“으음, 어려운 문제네요.”

온천이 여기서 터져버렸으니, 위치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하지만, 집을 저희에게 파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사 비용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뭐, 값만 잘 쳐주신다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어쩌다 보니 여기서 사는 거지, 주거지로는 부적합했고 주변은 낙후된 건물뿐이었다. 팔리지 않는 집을 사준다니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중년 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갑자기 이사 가라니, 돈만 주면 다입니까! 이곳에서 삼 대가……,”

“보상금은 따로 10만 크로엘씩 드리겠습니다.”

“……살아왔으면 많이 살았지!”

돈만 주면 다였다. 중년 남성은 언제 언성 높였냐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인근 주민들이 모두 물러나자, 다음 순서로는 소상인들이 자리했다.

일리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동정을 호소하는 이부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형 복합 시설이 들어서면 손님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제가 조사해보니 이곳은 번화가와 떨어진 곳이라 유동 인구가 적습니다. 휴양 시설이 들어서면 오히려 상권이 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요.”

일리아는 그간 조사했던 자료를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같은 업종의 가게를 여는 것은 피하도록 검토해보겠습니다.”

똑같은 가게가 들어올까 우려하던 이들이 안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이들에게 보상을 제안하지 않았다. 아까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약속한 것은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이들에게 보상금을 주면 분명 관계없는 이들까지 돈을 바라고 달려들 것이었다. 차라리 함께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나았다. 신중하게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가게를 이용한 영수증을 가지고 오면 온천 입장권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진행할까 싶은데, 어떠신가요?”

“예?”

다들 깜짝 놀라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런 행사가 생긴다면 온천 이용객들이 인근 가게를 이용할 확률이 높아진다.

“저희는 좋습니다.”

머뭇거리던 상인들은 누군가 대답하자마자 너도나도 동의하기 시작했다. 일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동의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 또한 좋은 가게들과 협력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뚱하게 있던 사람들마저 표정이 사르르 풀리고 말았다. 일이 마무리되고, 일리아는 폐를 끼쳐 미안하다며 다시 사과했다. 그리고 일이 바빠 먼저 돌아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따지러 왔던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은 귀족은 처음이었어.”

“역시 블로든 가문 실세는 다르네.”

“오늘부터 블로든 사에서 나온 물건만 산다.”

다들 호의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떤 여자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띠를 풀었다. ‘온천 사업 결사반대’라고 적은 머리띠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블로든 가문에 취직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

크리스털 잔에 검붉은 와인이 채워져 나갔다. 값비싼 수입 가구와 윤기 흐르는 러그, 실크 벽지…….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 이루어진 방은 주인의 호화로운 생활을 알려주는 듯했다. 원목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와인이 담긴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지루하군.”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처음에는 휴양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좋을 뿐, 일 년이 넘어가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제국 수도와 비교하면 이곳은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박혀 있어야 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사내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누구보다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나, 불만은 점점 쌓여갈 뿐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블레어드 님. 편지가 왔습니다.”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테이블에 편지 봉투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사내, 블레어드 에반테온은 테이블에 놓인 두 통의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는 어머니인 레베타 에반테온이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 수도에 심어둔 정찰자의 편지였다.

약 일 년 전, 블레어드는 사람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왔다. 제국에 있을 때 그는 어느 비밀 모임의 회원이었다. 일탈을 꿈꾸는 귀족 자제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으로 아편과 도박, 수많은 범죄 행위가 성행했다.

블레어드는 평소처럼 술과 약을 먹은 후 카드게임을 즐겼다. 그러다 상대와 시비가 붙었고 홧김에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하고 말았다. 운이 나쁘게도 죽인 상대는 백작의 외동아들이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블레어드는 그 일을 묻으려 했다. 목격자들의 입을 단속했으며, 증거도 전부 은폐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임 회원들은 블레어드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고, 자신이 불법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 들킬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게 된 백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백작은 끈질기게 추적해나갔고, 결국 목격자 중 하나가 양심 고백을 했다. 아들을 죽인 것이 블레어드 에반테온이라고 말이다.

백작은 곧바로 에반테온 가문을 찾아왔다. 고발하겠다고 날뛰는 백작에게 에반테온 가문 측은 합의를 시도했다. 그 틈을 타 블레어드는 외국으로 도망쳤다.

백작은 합의를 거부하고 고발하겠다고 펄펄 뛰었으나, 증거가 없었다. 사실을 털어놓은 목격자조차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이다. 결국 백작 측은 막대한 합의금을 불렀다.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도 블레어드의 평판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합의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워낙 큰 금액이라 아직까지 마련하지 못했다.

블레어드는 테이블에 올려둔 편지 두 통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레베타가 보낸 편지였다.

[잘 지내고 있니? 요즘 들어 네가 참 보고 싶구나.]

안부인사로 시작된 편지는 구구절절 걱정뿐이었다. 혹시 쓸 만한 정보가 있나 싶어 무심한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블레어드의 눈이 멎었다.

[얼추 돈이 마련되어 가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돌아올 즈음에 카르한은 분쟁지역으로 보낼 계획이야.]

블레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생인 카르한이 저를 대신하여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어차피 임시일 뿐이지만. 카르한은 후계자로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니, 염려할 것은 없었다.

블레어드는 어머니의 편지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른 편지를 집었다. 편지에는 최근 제국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 대충 읽어 내려가던 블레어드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았다.

편지에는 카르한의 평판이 무척 좋아졌다는 것과 카르한이 일리아 블로든과 교제한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의 손에 편지지가 단숨에 구겨졌다. 블레어드는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한 동생을 떠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제 자리를 위협하던 존재. 수재라 불리는 자신을 단숨에 뛰어넘을 진정한 천재.

“이제 와서 감히 내 자리를 노리겠다고……?”

공작 부부가 제 편이고, 카르한을 바닥 밑까지 처넣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했다. 방심했다간 놈이 치고 올라올 것 같아서. 편지를 바닥에 내던진 블레어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군.”

***

황궁에서 검술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제국이 떠들썩해졌다. 작위를 받지 못한 귀족 영식들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 우승자는 제국 제일 검으로 인정받았다. 우승자들 중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았기에, 인생 역전을 꿈꾸는 한미한 귀족 자제들까지 대회에 참여하려 몰려들었다.

그리고 약 보름 동안 대회에 출전할 사람들은 접수장을 내야 했다. 접수장만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본인이 직접 오거나 적어도 대리인을 보내야 했다.

대회 출전 접수를 받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왠지 복도가 시끄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도련님께서 꼭 우승하실 겁니다.”

“당연한 소릴.”

옆구리에 화려한 검을 찬 귀족과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도련님이라고 불린 쪽이 건들거리며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여기 접수장.”

남자는 서류를 확인했다. 수도 변두리에 위치한 자작 가문 장남이었다.

“접수되었습니다.”

며칠간 그는 온갖 사람들을 만났다. 자기가 우승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부터 반쯤 떠밀려서 온 사람까지 다양했다.

벌써 몇 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남자는 이런 부류가 무척 가소로웠다. 척 봐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특히 유세를 부렸다.

“그런데…… 이번에 누가 출전하나?”

“접수 기간이 많이 남아서 신청서가 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떠보는 물음에 남자는 에둘러 대답을 거절했다. 자작 영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나마나 실력도 없는 자들이 기회다 싶어서 신청서를 내겠지.”

“맞습니다. 알고 보면 도련님이 대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나서 다들 피한 게 아닐까요?”

“그런가? 이해는 되는군.”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손발이 척척 맞는 주인과 하인이라니. 나중에 대회에서 떨어지면 둘 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자작 영식이 돌아가고 남자는 접수장을 정리했다. 아까 자작 영식에게 대답했던 것과 달리, 벌써부터 쟁쟁한 인물들이 보였다. 아카데미 검술부 수석과 검술로 유명한 가문의 차남 등……. 올해는 누가 우승을 거머쥘지 궁금했다.

똑똑,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남자가 대답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바삐 움직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는 숨을 쉬는 법도 잊고 말았다.

존재만으로도 뚜렷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수많은 검사들을 만나왔지만, 이런 기백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워낙 장신이라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여기서 접수장을 내면 됩니까?”

정중한 말투에 남자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어마한 기세와 달리 무척 예의 발랐다. 지금까지 성격 더러운 귀족들을 많이 봐 왔던 남자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편견에 휩싸였구나 하고 반성했다.

남자는 그가 내민 접수장을 받았다. 이름을 확인하던 남자가 멈칫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요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한이 물었다.

“혹시 진검 말고 날이 뭉툭한 검을 써도 되는지요.”

남자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상부와 논의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묵묵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 카르한이 곧장 뒤돌아섰다. 멍하니 있던 남자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그는 생각했다. 왠지 이번 대회 우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고.

***

검술대회 출전 접수를 끝낸 카르한은 오랜만에 블로든 저택에 방문했다. 스승인 비올레에게 이 소식을 전해줄 생각이었다. 미약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보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레베타 앞에서 후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레베타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 내쫓겠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레베타는 더 이상 마음대로 카르한을 내칠 수 없었다. 현재 카르한에게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고, 후계자 자리를 가져갈 블레어드는 아직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번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면, 저를 탐탁지 않게 보던 원로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차는 어느새 블로든 저택 정원으로 들어섰다. 상념에서 벗어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오늘이야말로 일리아를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이럴 때마다 말주변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하고 아쉬워졌다.

어느새 마차는 본관에 도착했다. 카르한은 가벼운 심호흡을 내뱉은 후 마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더니, 막 나오는 비올레와 눈이 마주쳤다.

“간만에 보네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백작부인.”

“좀 전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고개를 끄덕인 카르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올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일리아는 아침 일찍 외출했어요.”

카르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축 처진 어깨를 본 비올레는 웃음을 머금은 채 이유를 말해주었다.

“온천 사업 건으로 한창 바쁠 때거든요. 그나저나 할 말이 있다니,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카르한과 비올레는 후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환한 햇살이 사방을 밝히고,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카르한은 비올레를 찾아온 목적을 말해주었다.

“오늘 검술대회 신청서를 냈습니다.”

느긋하던 비올레의 눈빛이 돌변했다.

“당장 특별 훈련에 들어가야겠군요.”

우승은 당연히 자신의 제자가 차지해야 한다며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인 프란체는 귀족이 아니어서 참가할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쟁쟁한 실력자들만 모인 것 같았습니다. 다들 자기가 우승할 거라 확신하더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소공자를 누가 가르쳤죠?”

“백작부인이십니다.”

“그럼 우승해야지요.”

무척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카르한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저택 뒤쪽에 위치한 호숫가에 도착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호숫가는 유독 색감이 짙었다. 새파란 하늘과 우거진 녹음, 햇빛에 비친 물결…….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는데, 문득 일리아의 생일이 떠올랐다. 그때 호수에 거대한 배가 띄워져 있어서 어찌나 놀랐던지. 사실 아직도 의문이었다. 도대체 배는 어떻게 끌고 온 걸까.

덩달아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던 비올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일리아가 물에 빠진 적이 있어요.”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비올레를 응시했다.

“구해준 사람이 리하트였죠.”

카르한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블로든 저택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일리아가 직접 말해줬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

“우리가 리하트를 크게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그가 일리아의 목숨을 구해줘서였어요.”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뜯어 말렸을 거라고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를 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일리아의 운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르한의 운명이 일리아인 것처럼 말이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과거에 저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비올레가 관심을 가졌다.

“황궁 정원을 돌아다니다 발견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카르한은 기억을 더듬거리며 그때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긴 했는데, 마침 블레어드가 저를 찾아오는 바람에 눈 뜨는 것까진 보지 못했다. 제법 된 일이지만 아직까지 죄책감이 남아있었다.

“잘했어요. 상대는 분명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둘이 연회에서 분위기 괜찮아 보이던데, 진전은 좀 있어요?”

비올레가 슬그머니 물었다.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째서요?”

“아직 고백은 하지 않았는데,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해서…….”

날은 화창한데 그의 얼굴에만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비올레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이상하네, 분명 연회장에서 봤을 때만 해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는데……. 거기다 요즘 일리아의 상태도 좀 이상하지 않던가.

카르한 이야기만 꺼내면 화들짝 놀라거나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이건 분명 가능성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계속 마음을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리아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어서…….”

“소공자.”

“예.”

“포기하지 말아요. 알았죠?”

카르한은 멀뚱멀뚱 서 있다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런 카르한을 보며 비올레는 생각했다. 이 귀여운 연인을 위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말이다.

***

다음 날 오후, 지난 몇 달 동안 열리지 않던 회의장에 세 사람이 모였다. 비올레는 양옆에 앉은 클리프와 헤인리를 바라보았다.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분명 몇 달 전에 이곳에서 일리아의 새로운 남자친구를 어떻게 퇴치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들 제가 왜 모이라고 했는지 알지요?”

헤인리는 안경만 추어올렸고, 클리프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였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비올레가 말했다.

“요즘 일리아랑 소공자 사이가 서먹해 보이는 거 다들 느꼈죠? 우리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발언권을 얻기 위해 클리프가 손을 들었다. 비올레가 대답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혹시 싸운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뒤이어 헤인리가 손을 들었다.

“어차피 둘이 교제하는 사이인데, 굳이 저희가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클리프와 헤인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 전에 교제를 시작했다는 것을. 비올레 또한 자세한 사정은 몰랐기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둘이 벌써 열흘 넘게 서로를 피하는데, 이러다가 헤어질까 싶어서 그래요.”

“안 돼!”

클리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클리프의 꿈은 카르한이랑 제국의 모든 미술관을 순회하는 것이었다.

“당장 두 사람을 불러서 물어봅시다.”

“그건 취조하는 것 같지 않을까요.”

헤인리가 곧바로 클리프를 진정시켰다. 덩달아 심각해진 헤인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참에 헤어지게 두자며 웃었을 헤인리였지만, 그 또한 카르한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클리프와 헤인리가 끙끙대자 비올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일리아는 바쁘다는 핑계로 카르한을 피해 다녔고, 순진한 카르한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니 둘을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부를 생각이었다.

비올레와 클리프가 동시에 헤인리를 바라보았다. 다시 안경을 추어올린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소공자를 맡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새로운 임무를 맡은 헤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헤인리는 반차까지 써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 왔다는 소식까지 입수한 후였다. 별관 앞에 마차를 세운 헤인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운 좋게도 막 방에서 나오는 카르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공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르한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한때 헤인리를 피해 도망 다닌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이 조금 긴장한 채 헤인리를 바라보았다. 헤인리가 카르한의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혹시 지금부터 시간 있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우연히 표가 생겼는데, 오페라를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평소에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제게 같이 오페라를 보자고 제안하는지, 카르한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싫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그럼 바로 출발하지요.”

카르한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헤인리는 그를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혹시 몰라 같은 마차에 올라타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헤인리가 작정하고 밀어붙이자, 카르한은 순식간에 휘말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도망갈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마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헤인리는 구석에 구겨 앉은 카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저만 보면 초식동물에게 겁먹은 곰처럼 굴었다.

헤인리는 속으로 반성했다. 카르한이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전부 제 잘못이었다. 예전보다 사이가 가까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헤인리는 망설이다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계속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번에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반듯하나 진심을 담은 인사에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인리는 테르시안 후작의 횡포에 사표를 쓰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카르한이 에반테온 공작에게 이야기해주어, 일이 잘 풀렸다.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듯 겸손한 태도였다. 예전 같았으면 연기하는 거라고 의심했을 테지만, 헤인리는 이제 카르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리하트 그놈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편견에 휩싸여서 카르한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헤인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안했습니다. 제 태도 때문에 소공자께서 많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오히려 저를 배려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계속 저택에 들락날락했는데도, 이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투였기에 헤인리는 입술만 달싹였다. 일리아가 에반테온 공작저로 가는 꼴은 볼 수 없어서 내버려둔 것일 뿐이었다.

계속 호시탐탐 쫓아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걸 배려라고 말하다니. 양심의 가책이 더욱 깊어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차 안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헤인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리아가 소공자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 카르한의 얼굴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 표정 하나로 카르한이 일리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카르한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많이 흔들렸다. 천천히 눈을 내리깐 카르한이 작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미숙하지만 대화를 시도했다. 금방 화제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졌다.

두 사람은 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아카데미 수석에 공직자가 된 헤인리는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고, 카르한은 오랫동안 전장을 구르며 귀족치고 험난하게 살아왔다.

각자 살아온 이야기도 흥미로운 데다, 카르한이 헤인리의 전공 분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서 잘 통했다.

카르한은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헤인리는 클리프가 그토록 소공자, 소공자,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덜컹, 하고 마차가 크게 흔들리더니 멈추고 말았다. 헤인리는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새벽에 비가 왔는지, 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부의 대답에 헤인리가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카르한이 내리고, 세 사람이 마차 바퀴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깊은걸.”

마차 바퀴 반절이 구덩이에 파묻힌 상태였다. 헤인리는 어떻게 해야 마차를 빼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마차의 무게와 구덩이의 깊이를 생각하면 고작 세 사람 힘으로는 절대 빼낼 수 없었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인적이 드문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헤인리가 팔짱을 낀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카르한이 마차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팔로 마차를 힘껏 밀기 시작했다.

“……헉.”

마부가 숨을 삼켰다. 마차 바퀴가 조금씩 진창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헤인리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마차가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진흙 구덩이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쿵, 하고 마른 땅에 마차가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했다. 헤인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걸.

***

일리아는 아침 일찍 저택을 나왔다. 사실 이렇게 일찍 나올 이유는 없었는데, 카르한이 저택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나오고 말았다.

언제까지고 만남을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한 가지 일로 이렇게까지 고민한 적이 드물어서 더더욱 그랬다.

한참 고민하며 가게 순회를 돌고 온천 부지로 향하니, 그곳에 비올레와 클리프가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오페라를 보러 갈까 하는데, 함께 가지 않으련?”

“지금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일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가족끼리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잖니.”

“……그건 그렇죠.”

일리아의 생일 이후로 다들 너무 바빠서 저녁 식사나 가끔 하는 정도였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서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비올레와 클리프는 일리아를 마차에 태웠다. 어느새 마차는 오페라 극장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차에 찍힌 가문 인장과 환한 금발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뭐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잖아.”

“혹시 극장을 사러 온 거 아냐?”

“그럴 듯한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일리아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다른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보니, 마차 안에서 헤인리와 카르한이 내렸다. 당황한 일리아가 그대로 굳어졌다.

“오, 딱 맞춰 왔구나.”

클리프가 냉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소공자, 간만에 보는 거지요!”

격한 환영을 받은 카르한은 얼떨떨해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일리아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내내 잠잠하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목덜미까지 열이 확 오르더니, 건조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목이 말랐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말이다.

당황한 일리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올레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표가 다섯 장이어서 소공자를 초대했단다.”

비올레의 느긋한 대답에 일리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족들은 카르한을 제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를 초대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지금 카르한을 피하고 있다는 것뿐.

“일리아, 오랜만입니다.”

일리아의 눈치를 보던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요. 요즘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요.”

저도 모르게 변명이 튀어나왔다. 사실 연락하려면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비올레가 일리아와 카르한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자, 시간이 다 되었으니 들어가요.”

일리아는 얼떨결에 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극장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1층은 반원형으로 좌석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는데, 비올레가 향한 곳은 2층 박스석이었다. 표 값이 가장 비싸고 외부와 분리되어 있었다.

“두 곳을 예약했는데…….”

비올레가 일리아와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한 곳은 세 자리였고 다른 한 곳은 두 자리뿐이었다.

“우리끼리 여길 쓸게요.”

비올레가 클리프와 헤인리의 양 어깨를 잡고 말했다. 순식간에 그들이 박스석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물론 이게 제일 낫긴 한데…….’

자신이 카르한과 같이 앉지 않으면 그림이 이상해지긴 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본 후에 입을 열었다.

“우리도 들어가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박스석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2층 박스석은 시야가 탁 트여 무대가 훤히 보였다. 밀폐되진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카르한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되었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요즘 뭐 했어요?”

“얼마 전에 검술 대회 참가 신청을 냈습니다. 그래서 검술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아, 소식은 들었어요.”

검술 대회 이야기로 몇 마디가 오가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미치겠네.’

연회가 있던 그날, 혹시 분위기에 취해서 착각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막상 카르한을 보니 그때보다 더 의식되었다. 그의 눈빛이나 목소리가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온 신경이 그에게 몰린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오랜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카르한이 저와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너무 설레발을 치는 것 같았다.

일리아가 혼자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무대에 불이 켜졌다. 오페라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연을 보는 동안은 저쪽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었다.

일리아가 망원경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손등에 단단한 손끝이 느껴졌다. 놀란 일리아가 고개를 들자, 카르한이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리아. 혹시…… 제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한이 좀 더 낮게 속삭였다.

“왜 자꾸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일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마음이 복잡한 나머지 카르한을 피해 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차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기에, 일리아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대답을 들은 카르한이 가만히 일리아를 응시해왔다. 어둑한 공간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유독 새파랗게 빛났다. 일자로 뻗은 카르한의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아무래도 제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일리아의 손등에 얹은 손가락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혹시라도 저를 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제게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고칠 테니…….”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저를 멀리하면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일리아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항상 숨겨왔던 불안함이었다. 혹시나 일리아가 저를 버릴까 봐,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할까 봐 무서웠다.

일리아는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고, 카르한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런 날이 오면 카르한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카르한은 비겁한 핑계를 내뱉었다.

“아직까지는 제가 연인이지 않습니까.”

일리아는 침묵했다. 그의 말처럼 ‘아직까지는’ 연인 사이였다. 진짜 교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두 사람을 이어준 관계성이었다. 괜히 가슴이 따끔거렸다. 언제까지 계약 연애라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카르한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 저와 어떤 사이로 남고 싶은지 궁금했다. 좋은 친구로 남자고 말했던 걸 후회하며, 일리아는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요. 이제 안 그럴게요.”

대화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카르한은 일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너무 강요했나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일리아가 미소 지었다. 카르한이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부드러운 눈빛이 일리아를 향했다. 저를 감싸오는 눈빛이 간지러워,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대를 응시했다.

커튼이 오르더니, 한껏 치장한 배우들이 등장했다. 무대는 이전에 본 연극과 달리 무척 화려했다.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리아만 바라보던 카르한도 그제야 무대를 응시했다.

‘다른 생각 못 할 정도로 재밌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끌려오는 바람에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왔다. 정말 재미있어서 카르한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으면 했다.

일리아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주인공을 응시했다. 왠지 처음 만났을 때의 카르한이 떠올랐다.

‘많이 바뀌었지…….’

그때의 카르한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거절을 못해서 강매당하고,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맸다. 그리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도 어두웠다.

몇 달 사이, 카르한은 많이 변했지만 본질은 여전했다. 상대를 배려해주고, 겸손했으며 한편으로 무척 다정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몰랐다. 잘해주면 변심하던 이들과 달리 늘 한결같아서.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과거 회상 부분이 나왔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맡을 아역 배우와 중년 남녀 배우가 등장했다.

중년 배우들은 아역 배우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함인 듯했다. 학대 장면이 생각보다 자세해서 조금 불편해졌다.

“…….”

일리아는 잠시 카르한을 살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주먹을 살짝 쥐고 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가족사를 조금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어린 카르한을 정서적으로 학대했다는 것도 말이다.

입술을 잘근 깨문 일리아가 손을 뻗었다. 작은 손바닥으로 팔걸이에 놓인 카르한의 손등을 덮었다. 온기가 전해지자,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리아는 그를 보지 않고 일부러 무대만 직시했다.

손등이 천천히 뒤집어졌다. 두 손바닥이 맞닿고, 카르한의 손가락이 일리아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왔다. 깍지 껴진 손가락으로 맥박이 빗방울처럼 튀어올랐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 잡은 손바닥만으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혹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이 들었다.

일리아는 다시 무대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온 신경이 온통 카르한에게 향해서 번번이 실패했다.

마침내 배우들의 합창을 끝으로 오페라가 막을 내렸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램프가 켜지고 커튼이 완전히 내려갔다.

멍하니 있던 일리아가 손가락을 움찔거리자, 카르한이 맞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손을 빼긴 했지만, 왠지 아쉬웠다. 그리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일리아였다.

“어땠어요?”

“재미있었습니다.”

카르한이 짤막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어떤 장면이 좋았어요?”

카르한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결국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 한마디에 일리아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혹시 카르한도 저를 의식했을까 싶어서.

일 층에 앉아 있던 이들이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만 일어날까요.”

먼저 몸을 일으킨 일리아가 커튼을 걷어냈다. 그러자 커튼 뒤에 서 있던 가족들이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언제 오셨어요?”

“막 왔단다.”

클리프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일리아와 카르한을 살폈다. 왠지 수상쩍은 태도였다. 일리아는 그제야 가족들이 일부러 이 자리를 만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계속 카르한을 피해서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가족들 덕분에 자연스레 카르한과 만날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들은 박스석을 벗어나 극장 입구를 향해 걸었다. 입구 쪽은 거의 만남의 장이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귀족들이 보였다.

일부러 늦게 나가려고 걸음을 늦추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중년 남녀가 있었다. 좁은 통로였기에 딱 맞닥뜨리고 말았다.

“!”

카르한이 그대로 멈추었다. 에반테온 공작 부부였다.

“에반테온 공작님 아니십니까.”

에반테온 공작을 알아본 클리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클리프와 안면이 있었는지, 공작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이군요. 블로든 백작.”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레베타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닿았다. 서늘하게 가라앉는 눈동자는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빠르게 레베타를 살핀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에반테온 공작저에 초대 받았을 때, 카르한은 레베타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그녀가 앉으라고 말하기 전까지 자리에 앉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카르한은 그때와 달리 레베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딱딱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에반테온 공작과 사담을 나누던 클리프가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척 호의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속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자제분과 좋은 연을 맺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리프는 공작 부부 앞에서 카르한의 칭찬을 쏟아냈다. 성격 좋고, 성실하고, 역시 공작 가문의 후계자라며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나 칭찬을 듣는 공작 부부의 표정이 점점 떨떠름해졌다.

심지어 레베타는 악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딱딱해졌다. 절대 자식 칭찬을 들은 부모의 반응이 아니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클리프는 잠시 자신이 실수라도 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 부부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은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에반테온 공작이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부족한 자식 놈을 좋게 봐주셨다니, 고맙군요.”

공작의 시선이 잠깐 카르한에게 닿았다가 거두어졌다. 레베타는 카르한의 칭찬에는 한 마디도 답하지 않고, 곧장 일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지요?”

일리아는 레베타의 미소가 무척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공작저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카르한의 가정사를 몰라서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뒤늦게 카르한의 자존감이 낮아진 까닭이 가족들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속적인 학대 끝에 카르한은 떠밀리듯 전쟁터로 떠났다. 어린 소년의 숨구멍이 전장이었던 것이다.

일리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들이 부모 자격이 있느냐고 비난하고 싶었다. 카르한이 받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길 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분했다. 일리아는 표정을 관리한 후 레베타에게 사과했다.

“저번에 찾아 뵌 후로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요즘 바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레베타는 괜찮다는 듯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리아가 온천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려요. 그런데 오페라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표를 보내드릴 걸 그랬어요.”

“가끔 바람 쐴 겸 보러 오는 정도예요. 그대도 오페라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레베타의 물음에 일리아가 미소 지었다.

“저도 마음에 드는 줄거리가 있을 때 종종 관람하러 오곤 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 극은 조금 실망이었어요. 허구라지만 말도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죠?”

일리아가 레베타를 똑바로 보며 대답해주었다.

“부모가 주인공을 학대하는 부분이요.”

“…….”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학대하겠어요. 그렇죠?”

도자기처럼 매끄럽던 레베타의 표정이 깨졌다. 레베타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빠르게 일리아를 살폈다. 그러나 일리아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레베타를 응시할 뿐이었다. 탐색하는 것을 멈춘 레베타가 대답했다.

“동의하는 바예요.”

순간 카르한의 속눈썹이 떨렸다. 레베타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파혼한다는 이야기가 자자하더군요.”

“네, 소송은 걸어두었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레베타가 블로든 가문 사람들에게 잠깐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럼 그때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죠.”

일리아와 카르한을 하루라도 빨리 약혼시키고 싶은 눈치였다. 레베타는 블로든 백작부부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다음에 뵙지요.”

“살펴 가십시오.”

에반테온 공작 부부가 가버리고,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다들 찝찝한 얼굴이었다. 특히 비올레와 헤인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 부부가 카르한을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이다.

“혹시 제가 실수했습니까?”

클리프가 카르한에게 물었다. 고개를 저은 카르한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공작 부부께서는 그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런 겁니다.”

“……그게 무슨.”

클리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일리아는 이제 가족들에게 카르한의 이야기를 해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일단 여길 나가서 이야기해요.”

일리아의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극장을 빠져나온 그들은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비올레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 시간대에 딱 한 테이블만 예약 받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다행히 지금 시간 대에는 예약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손님 받지 말아요.”

비올레의 말에 직원들이 문을 잠그고 팻말을 걸었다. 음식 대신 모두의 앞에 따뜻한 차가 한 잔씩 놓였다. 직원들마저 나가버리자, 정적이 흘렀다.

극장을 나와 레스토랑에 앉는 순간까지,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그저 고개만 숙인 채였다. 마음 아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일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어머니는 저를 증오했으며 하나뿐인 형님은 끝없이 시기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남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시기에, 카르한은 쫓기듯이 전쟁터로 떠났다.

공작 가문의 배경도 업지 못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게 10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을 전쟁터에 머물렀다. 갑자기 공작가에서 저를 찾는 서신이 오지 않았다면 카르한은 지금도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 저는 후계자가 되어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부탁이 아닌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카르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에반테온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고 말았다. 야욕 때문에 장남을 밀어냈다는 소문까지 뒤집어쓰고 말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카르한은 후계자였지만, 언젠가 내놓아야 할 임시직에 불과했다. 에반테온 공작 부부는 블레어드가 돌아오면, 카르한에게 후계자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쫓아낼 계획이었다.

일리아 덕분에 후계자 공부를 하며 자격은 대강 갖추긴 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공작 부부와 원로회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블레어드에게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카르한의 얼굴이 좀 더 어두워졌다.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는 이런 속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비올레는 얼굴이 굳어진 채였고, 헤인리 또한 심각한 표정이었다. 일리아 또한 가라앉은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침묵을 깨고 비올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소공자 잘못이 아니잖아요.”

비올레는 티스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가족이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 차가웠다. 순간 둥근 티스푼이 날카로운 검처럼 보였다. 뒤이어 헤인리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번에 저를 도와주시느라 공작께 부당한 짓이라도 당하신 것은…….”

“블로든 가문과 연을 맺으면 나쁠 것 없으니 도와주신 듯합니다.”

카르한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헤인리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리아는 자신이 나설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것을 털어놓을 차례였다.

“사실…… 카르한이 진짜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고 있었어요.”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지난 몇 달간 별관 저택에서 후계자 수업을 들었고요.”

“…….”

“지금까지 비밀로 해서 죄송해요.”

비올레와 헤인리는 침묵했다. 비올레는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랐을 것이다. 조용하던 그때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모두가 클리프를 돌아보았다. 그가 냅킨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클리프는 냅킨을 왕창 꺼내들었다. 보다 못한 비올레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클리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소리쳤다.

“소공자, 그냥 우리 집에서 삽시다!”

케이크도 한 판씩 먹을 수 있고, 자기가 애지중지 키우던 순무도 주겠다고 클리프가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비올레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블로든 저택으로 들어와요. 우리도 도울게요.”

헤인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저도 괜찮습니다.”

세 사람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제각기 달랐지만, 카르한을 걱정해주는 것은 같았다. 비올레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우리를 가족처럼 생각해요.”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물었다. 너무 뜻밖의 반응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턱 막혔다.

솔직히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거라 생각했다. 이들을 속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조차 외면한 저를 받아들여줄 거라고는…….

묵묵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졌다. 곧게 펴고 있던 허리가 조금씩 굽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잘게 떨리더니 그의 발치에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따뜻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무척 생경했다.

사람들의 말처럼 전장을 오래 굴러, 감정이 사라진 줄만 알았다. 닳고 닳아버린지라 앞으로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

카르한은 소리 없이 울었다. 그는 지금껏 저 자신을 차갑고 모난 얼음이라 여겼다. 모닥불 같은 블로든 백작가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 판단했다. 따스함에 빠져들었다가 후회할까 봐 늘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카르한을 품어주었다. 날카롭기만 하던 귀퉁이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더 이상 카르한은 얼음조각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눈물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일리아는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 하나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카르한은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남들보다 많이 늦긴 했지만, 처음 가져보는 가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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