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28)
  • 14장

    ***

    완연한 여름이 찾아오고, 수도가 떠들썩해졌다. 황궁에서 여름 연회가 열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황후에게 직접 초대장을 받게 된 일리아는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카르한은 갈지 말지 망설이기에, 꼭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번에야말로 이전과 달라진 카르한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였다. 나쁜 소문을 걷어내고, 그의 평판을 높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다들 힘주고 올 테지만, 황궁 연회 주인공은 카르한이 될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카르한과 함께 입장할지 고민이 되었다. 일리아는 아직 파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하트 쪽의 평판이 완전히 무너졌고, 카르한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도 제법 퍼졌을 테니 차라리 같이 입장하는 게 나았다. 괜히 따로 행동했다간 온갖 추측이 난무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부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초대장을 받은 후로 연습에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연회장에서 지켜야 할 예의, 표정 관리. 그리고 연회의 꽃이라 불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둘이서 춤을 맞춰보기로 했다.

    “……춤을 춰본 적이 없다고요?”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당신 한 번 배우면 바로 익히잖아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다른 공부처럼 춤도 금방 익힐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가볍게 춤을 맞춰 보았고……. 일리아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선언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죠.”

    뭐든 척척 배우던 카르한이었지만, 춤은 도통 늘지 않았다. 동선과 박자는 전부 외웠으면서 부드럽게 이어나가질 못했다. 뻣뻣하고 어색한 몸짓에 웃음만 나왔다. 나중엔 카르한이 하도 발을 많이 밟아서, 자진해서 맨발로 춤을 추었다.

    일리아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시간을 내 집중적으로 연습 시켰다. 열심히 연습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 앞에 선보여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리고 연회 전날, 바네사가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에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바네사가 제안했을 때만 해도 순전히 재밌을 것 같아서 승낙했는데, 완성된 것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드레스 밑자락에 꽃밭이 펼쳐진 것처럼 섬세한 꽃이 그려져 있었다. 굵직하고 파격적인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는데, 천재는 역시 달랐다.

    마침내 연회 당일이 왔다. 잘 차려입은 가족들이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일리아가 연회에 간다 하니 전부 참석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따로 탈게요.”

    가족들이 같이 타자고 조르자, 일리아는 선을 그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안 그래도 카르한은 잔뜩 긴장해 있는데, 여기서 더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을 떼어놓고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카르한을 가볍게 살폈다. 몸에 딱 맞는 밝은 와인 색 연회복을 입고 머리는 깔끔하게 손질한 상태였다. 평소에도 잘생겼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작정하고 꾸며 놓으니 아주 빛이 났다.

    ‘연회장에서 말없이 서 있으면 조각상인 줄 아는 거 아냐?’

    일리아는 그의 외모에 연신 감탄했다. 홀린 듯이 카르한을 살피던 일리아가 어, 하고 입을 열었다.

    “커프스단추 했네요?”

    소매에 묘하게 익숙한 커프스단추가 달려 있다 싶었는데, 이전에 일리아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일리아가 알아보자,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고 나오면 든든할 것 같아서…….”

    카르한은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황궁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마침내 멈추었다. 늦은 오후였지만, 해가 길어진 터라 아직 주위가 밝았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블로든 백작 부부가 걸음을 뗐다. 새로운 은테 안경을 쓴 헤인리가 뒤따랐다. 가장 늦게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가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카르한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팔짱을 꼈다. 맞닿은 몸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그제야 자신도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대규모 연회는 오랜만이었다.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앙숙인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두고 열심히 입방아를 찧어댈 사람들이 벌써 눈에 선했다.

    마침 연회장 안쪽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멎었다.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가 먼저 입장했다.

    “들어가요.”

    일리아의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연회장이 펼쳐졌다. 드넓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무리지어 있었다. 순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모든 이들이 일리아와 카르한을 주목하고 있었다.

    시선의 압박 속에서 일리아는 가볍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몇 보였다. 그리고 일리아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스텔라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른 척하자는 건가.’

    어차피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일리아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두려는데, 스텔라가 다시금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마치 아닌 척하면서 의식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왜 저래?’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연회장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먼저 입장한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는 일리아의 곁에 섰다. 오랜만에 블로든 가문 모두가 모이자, 모두들 정신없이 살피느라 바빴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환한 금발이 셋이나 있으니 절로 시선이 갔다. 거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른 것은 전부 최고급이었다. 환산하자면 성 한 채씩은 업고 입장한 셈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재력에 귀족들은 입만 떡 벌렸다.

    그들은 일리아의 옆에 선 카르한을 뒤늦게 보고 흠칫했다.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일리아는 제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가족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다들 각자 볼일 보시는 건 어때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거라.”

    “제가 신경 쓰여요.”

    단호한 말에 가족들은 아쉬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걸음을 뗐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거라.”

    일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주었다. 팔짱 낀 블로든 백작 부부는 연배가 비슷한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헤인리는 직장 동료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겨우 둘만 남게 되자, 일리아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긴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아 보였다.

    일리아는 뺨이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받았다. 다들 제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 옆에 있는 사람이 카르한이라는 것을 알고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옆에 계신 분, 에반테온 소공자 맞지요?”

    “왜 두 분이서 같이 입장하신 걸까요?”

    “블로든 영애께 말을 걸고 싶은데, 소공자가 좀 무서워서…….”

    “그래도 이전보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지 않아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소문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일리아가 알기론 카르한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구른 후, 수도로 귀환하고 나서는 얼굴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모임에 나갈 때마다 나쁜 소문만 더 쌓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다들 눈치만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데, 어떤 영식 하나가 호기롭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블로든 영애. 이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일리아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하트 쪽 사람은 아니었고, 모임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물론이에요. 오랜만이죠?”

    일리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덩달아 웃던 영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눈높이가 다르니 압박감이 대단했다. 그래도 안색이 환해져서 이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영식이 용기를 내어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멀리서만 뵈었는데……,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카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 카르한이 다물린 입매를 열고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짧은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카르한이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괜히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영식의 얼굴도 밝아졌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한 번쯤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영식은 적당히 예의를 갖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긴장했던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

    칼바람이 멎고 잔잔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말을 걸어왔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전부터 계속…….”

    “소공자, 저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에반테온 소공자였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목이 썰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남자가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준다는 사실에 다들 흥분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자 카르한이 당황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점점 굳어져 가는데, 일리아가 팔짱 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돌리자 일리아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강아지.’

    강아지와 들판을 뛰어노는 걸 상상해 보라는, 둘만의 암호였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팔에 힘이 조금 풀어졌다. 카르한의 입꼬리에 희미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본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카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들 지금껏 서늘하다 못해 살기등등한 분위기와 위압감에 억눌려, 본능적으로 얼굴 보는 걸 피해왔다. 그런데 매서운 기운이 걷히고 평범하게 웃고 있으니, 가슴을 흔들어 놓을 미남이었다.

    넋 놓고 바라보던 귀족들이 잔뜩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근처를 배회하던 이들도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누가 보아도 지금 연회의 주인공은 카르한이었다.

    물론 일리아도 예외는 아닌지라, 한참 질문 공세를 받아야 했다. 일리아는 옆에서 대화의 흐름을 잡아주었다. 카르한이 부담스럽지 않을 선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두 분 교제하시는 겁니까?”

    누군가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지자, 다들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싱긋 웃으며 카르한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자 카르한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아아, 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눈치 없이 리하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대충 눈도장 찍는 건 성공했고…….’

    일리아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은 언제 카르한을 기피했냐는 듯 호의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소문 때문에 멀리했을 뿐, 카르한은 친목을 쌓기에 누구보다 훌륭한 상대였다. 공작가 후계자인 데다,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잠시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한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슬슬 카르한과 따로 움직일까 싶었다. 계속 같이 있으니, 그가 다른 영식들과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조금 불안하긴 해도 혼자서도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좋았다.

    주변을 살피던 일리아는 또다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저를 보고 있었는지 스텔라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진짜 뭐지.’

    모르는 척할 거라면 관심을 끄면 될 텐데. 혹시 자신이 소문을 퍼뜨릴까 봐 경계하는 건가. 왠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 일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일리아가 팔짱 낀 팔에 힘을 풀었다. 카르한이 반사적으로 붙잡자, 일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카르한, 저는 잠시 다른 사람들 좀 만나보러 갈게요.”

    카르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척 서운한 얼굴로 그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리아가 손끝으로 카르한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친구를 사귈 기회잖아요.”

    그도 다른 이들과 친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젊은 영식들이나 귀족들은 그의 평판과 권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카르한은 마지못해서 손에 힘을 풀었다. 가지런하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것이 보였다.

    ‘많이 불안한가.’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시 단단히 먹었다.

    “나중에 봐요.”

    일리아는 손을 흔들어준 후 자리를 벗어났다. 그곳에서 조금 멀어졌을 즈음, 일리아가 뒤돌아보았다. 카르한의 주변은 발 디딜 틈 없이 바글거렸다. 그래도 나중에 찾기는 쉬울 것 같았다.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지.’

    부모님이나 헤인리에게 갈 마음은 없었다. 가족들도 각자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의 관계가 피곤해서 일부러 피해왔다. 하지만 평생 사람들과 담을 쌓을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 조금씩 친분을 쌓아볼까 싶었다. 카르한에게 바뀌라고 요구했으면서 저 자신은 제자리걸음이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안쪽으로 걸어가던 일리아는 또다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저를 향하고 있었다. 감시당하는 기분을 지우지 못한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진 일리아가 대놓고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스텔라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일리아가 계속 저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홀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왜 혼자 있어요? 친구도 없어요?”

    첫마디부터 시비였다. 스텔라의 말을 무시한 일리아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자꾸 쳐다보던데, 나한테 할 말 있어요?”

    “……할 말은 무슨.”

    스텔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 가지고 오해하지 말아요.”

    스텔라는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녀의 말투에 독기가 빠져 있었다. 매번 만났다 하면 날카롭게 힐난하기 바빴는데…….

    그러고 보면 스텔라도 좀 바뀐 것 같았다.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본 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속삭였다.

    “그때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감시할 필요 없어요.”

    “감시라니…….”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스텔라가 당황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낼까 봐 지켜보던 거였잖아요.”

    “소문 안 낸다고 했잖아요. 감시 같은 거 안 해요!”

    돌아온 대답에 오히려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말고요.”

    오해가 풀리고, 일리아와 스텔라는 한참 티격태격했다. 서로 만났다 하면 시비 걸기 바빴기에 본능 같은 말싸움이었다. 두 사람 다 성격이 너무 달라서 한마디 꺼냈다 하면 부딪쳤다. 하지만 악의가 담긴 말싸움은 아니었다.

    대화가 길어지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싸우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특히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두 사람이었기에 오해 받을 만했다.

    일리아가 느긋하게 스텔라의 말을 받아치고 있는데, 영애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스텔라의 추종자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블로든 영애,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스텔라와 일리아는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스텔라를 비호하듯 좀 더 앞으로 나섰다.

    “델로타 영애에게 큰소리치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요?”

    주변의 시선이 이쪽에 모였다.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남의 남자 빼앗은 주제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대화를 몰래 엿듣던 이들도 부채질을 멈추었다. 여자의 발언에 일리아는 스텔라를 슥 바라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스텔라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물 먹이려고 일부러 판을 짰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스텔라를 훑자, 여자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델로타 영애의 약혼자였던 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요.”

    일리아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전에 스텔라가 주최한 모임에서 봤던 그 백작영애였다.

    제게 대놓고 시비를 걸더니, 여기서도 이럴 줄이야. 아무래도 그때는 자신이 카르한과 교제 중이라는 걸 몰랐다가 이번에 확신한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방금 들은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는 예측한 일이었다. 카르한과 계약 연애를 제안했을 때만 해도 소문이 좀 더럽게 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앞에서 대놓고 욕할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왜 말씀이 없어요? 피해자인 델로타 영애께 사과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스텔라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백작영애가 움찔했다. 받아칠 준비를 끝낸 일리아가 입을 열려던 때였다.

    “불쾌하네요.”

    일리아와 백작영애가 동시에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먼저 나선 것은 스텔라였다.

    “남자를 뺏겼다니, 내가요?”

    몸을 틀어 백작영애를 마주한 스텔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싸늘한 시선에 백작영애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스텔라는 불쾌함을 팍팍 내비치며 쏘아붙였다.

    “억측하지 말아요. 일리아 블로든은 내가 버린 걸 주웠을 뿐이니까.”

    일리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런 말씀은 없으셨…….”

    당황한 백작영애가 말을 더듬었다. 스텔라는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그런 말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

    “헛소문이나 퍼뜨리지 말아요.”

    완벽하게 선 긋는 말이었다. 스텔라 편에 서서 일리아를 비난했던 백작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많이 창피했는지 그대로 몸을 틀어, 테라스 쪽으로 가버렸다.

    “참나. 편 들어주는 척하면서 물 먹이기는.”

    스텔라는 불쾌하다는 듯 부채를 흔들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잔향을 전부 떨쳐내려는 것 같았다.

    스텔라는 자존심이 무척 센 편이었다. 방금 백작영애의 발언은 스텔라를 남자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텔라 성격이라면 못됐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기가 버리는 입장이어야 했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스텔라가 까칠하게 말했다. 그래도 백작영애를 상대할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였다. 스텔라는 활짝 펼친 부채를 착, 접으며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을 도우려고 한 건 아니니까.”

    “알아요. 그냥 스토커가 그런 말 하는 게 웃겨서요.”

    “아, 정말……!”

    스텔라가 황급히 일리아를 쏘아보았다. 일리아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내렸다. 목소리도 낮췄고, 주변을 둘러싸던 사람들도 가버려서 들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스텔라는 좀 더 안쪽으로 이끌었다. 벽에 딱 달라붙은 스텔라가 아예 편하게 말을 걸었다.

    “너도 욕 안 먹고 좋잖아.”

    카르한과 스텔라는 약혼하지 않았지만,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스텔라가 꼭 사귀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약혼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스텔라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면, 일리아나 카르한이 욕먹을 일은 없었다. 바람이라는 오명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리아는 리하트와 파혼 전이긴 했지만, 지난 연회 사건 덕분에 다들 일리아가 파혼을 요구해도 리하트가 놔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르한이 버림받았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카르한이 먼저 스텔라를 찼다는 말이 도는 것보단 나았다. 겨우 평판이 회복되는 중인데,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실 두 사람은 교제하지 않았답니다! 하고 변론해도 믿지 않을 테고……. 일리아가 침묵하자, 스텔라가 투덜댔다.

    “나도 내 평판이 있단 말이야.”

    사실 스텔라가 카르한에게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을까 싶었는데,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정말 단순히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서 카르한을 택한 모양이었다.

    옆에 서 있던 스텔라가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이제 그만 다른 볼일을 보러 가도 될 텐데, 스텔라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많은 친구들이나 보러 가지?”

    일리아가 툭 말하자, 스텔라는 길게 늘어뜨린 남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계속 상대하는 것도 피곤하니까 잠깐 쉬려고.”

    스텔라의 시선이 일리아의 드레스에 꽂혔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 위로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시선을 느낀 일리아가 물었다.

    “왜, 또 따라하게?”

    “내가 언제 따라했다고……!”

    스텔라가 발끈했다. 머릿속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지만, 일리아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는 화가가 그려준 거야.”

    “솜씨 좋네.”

    “소개해줘?”

    스텔라는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일리아를 살폈다. 일리아는 자본주의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바네사에게 말해둬야겠다. 스텔라라면 거금을 불러도 선뜻 수락할 테니까.

    일리아와 스텔라는 생각보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항상 먼저 시비 걸어와서 받아쳤는데, 스텔라의 태도가 바뀌니 일리아도 덩달아 유해진 것 같았다. 이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이 그러고 있는데, 근처를 배회하던 어린 영애들이 와르르 몰려와서 말을 걸었다. 사교계에 막 입문했는지 다들 들뜬 얼굴이었다.

    “블로든 영애, 드레스 정말 예뻐요!”

    “어쩜 드레스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셨어요?”

    일리아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사근사근 대답해주었다. 미래의 손님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존재감 없이 늘 웃기만 하던 일리아가 달라지자, 다들 놀라워하면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스텔라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으나, 이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귀부인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눈도장 찍으려는 속셈이 다분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일리아와 스텔라는 이 연회장에서 가장 돈 많은 영애였으니 말이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이 잘 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연회장 입구로 누군가 입장하는 것이 보였다. 리하트였다.

    ***

    일리아와 따로 행동하기로 한 후, 카르한은 혼자서 귀족들을 상대했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여전히 버거웠지만, 일리아 얼굴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대화를 받아주었다.

    그러다가 다방면으로 제법 수준 높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전부 아는 내용이라 카르한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소공자께서는 여러 분야를 잘 알고 계시군요.”

    무식한 칼잡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카르한을 달리 보았다. 전쟁터에서 오래 굴렀다더니, 그래도 공작의 후계자는 남다르다며 감탄했다. 후계자 수업을 열심히 받은 성과가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카르한은 칭찬 받고 싶어서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리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카르한의 눈매가 축 내려가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주인 잃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잠깐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곧장 일리아를 찾으러 나섰다. 언제 만나자고 정해두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일리아에게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카르한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워낙 넓고 사람이 많아서 일리아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카르한은 샴페인이 늘어져 있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일리아가 즐겨 마시는 술병이 보였다.

    일리아에게 갈 핑곗거리를 생각해낸 카르한이 유리잔을 하나 들었다. 다시 일리아를 찾으려는데, 멀찍이서 구경하던 영식들이 몰려들었다.

    “에반테온 소공자.”

    잘 차려입은 영식들이 카르한에게 말을 걸었다. 바쁘다고 거절할까 고민하던 카르한은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아가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만큼 이들과 친분을 쌓으면 좋을 듯했다. 그럼 나중에 일리아가 칭찬해줄지도 몰랐다.

    “혹시 승마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제가 봐둔 숲이 있는데, 사냥하기 딱 좋은 곳이라…….”

    카르한은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태도에 영식들은 난리가 났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이런 개차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다들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난리였는데, 유독 카르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다. 카르한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깨를 움츠린 남자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 소공자,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카르한은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 그는 재빨리 대화에 끼었다.

    “괜찮으시다면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누군가의 부탁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단번에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카르한은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했다.

    “제가 있었던 전장은…….”

    카르한은 과장 없이 덤덤히 사실만 말해주었다. 짧은 이야기였지만, 카르한의 말이 끝났을 때 다들 흠모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수도에서 귀하게 자란 귀족 영식들은 전쟁 자체에 환상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영웅을 동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은 자신의 이야기가 왠지 영웅담처럼 소모된 것 같아서 입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굳이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카르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남자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저번에 뵈었을 때 무작정 자리를 피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융통성 있고 신사적일 줄 몰랐다며, 그가 칭찬 아닌 칭찬을 내뱉었다. 그 말에 카르한은 그제야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이전에 일리아가 마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상대 마차 주인이었다.

    물론 카르한은 현장에 늦게 도착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일리아에게 들었다. 그때 이 남자는 카르한이 오자마자 놀라서 황급히 도망갔었다. 카르한이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열심히 나불거렸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블로든 영애께서 무슨 말을 하셨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피해자는 저였는데…….”

    그가 억울하다며 속사정을 토로했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으니, 카르한이 제 억울함을 이해해주고 일리아에게 한마디 해줬으면 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카르한이 묵묵히 들어주자, 그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은근히 일리아를 비난하는 어조였다.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보지 못한 남자는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호위기사들은 뒷골목 왈패라도 데리고 온 줄 알았습니다. 블로든의 안목도 참…….”

    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두터운 유리잔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진 것이 보였다. 카르한이 들고 있던 유리잔이 부서진 것이었다.

    카르한은 표정 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베인 곳은 없으나, 잔에 담겨 있던 술이 소매를 적셨다. 일리아가 준 커프스단추에도 묻고 말았다.

    카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흉흉한 분위기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무표정한 얼굴로 깨진 술잔을 든 카르한은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씻어야겠습니다.”

    그 말이 경고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대로 굳어진 남자가 딸꾹질했다. 카르한은 그를 힐끗 본 후에 말없이 돌아섰다.

    일리아를 모욕하자마자 태도가 돌변한 카르한의 모습에, 영식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들은 카르한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거짓말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미친개인데, 일리아 블로든이 목줄을 잡은 거였구나……!

    ***

    얼마 전, 리하트 테르시안은 한 남자를 소개 받았다. 제법 이름 있는 중개상인이었다. 마침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끙끙대던 참이었다. 왕국에서 장난감을 대량으로 사들인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사업권을 따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국어도 문제인데, 무엇보다 그쪽에 연줄이 없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금방 벽에 가로막힌 리하트는 지금이라도 빚을 갚고 사업을 접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한 줄기 햇살처럼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외국어도 능숙했으며, 왕국의 귀족과 친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절묘한 시기에 소개를 받아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경력도 제법 되었고, 제국 유명 인사들과 두루두루 친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과의 친분이 신원을 증명하는 거라고, 리하트는 생각했다. 그래도 리하트는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사업권을 먼저 따내면 중개료를 내겠다고 제안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자는 진짜로 교섭권을 따왔다. 왕실 측에서 보내온 서류는 아무리 봐도 진짜 같았다. 심지어 1만 개의 장난감을 선주문하겠다고 제안해왔다.

    남자는 왕실에서 대금의 10퍼센트를 먼저 지불했다며 수표를 건네주었다. 돈까지 받고 나니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리하트는 그대로 사업을 진행시켰고, 은행에서 추가로 돈을 빌려 1만 개의 상품을 생산했다.

    그러는 동안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졌는데, 남자는 자신이 아는 화물선 업체가 있다며 추천해주었다. 평균보다 가격이 저렴했기에, 리하트는 운송비로 왕실에서 받은 선금을 전부 주었다.

    그리고 포장 부자재나 유통 등등 남자가 추천하는 업체를 이용했다. 남자는 모든 분야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넓게 손을 뻗고 있었다. 한 번 얽히기 시작하니, 점점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다른 왕국 측에도 추천서를 넣어 보겠습니다.

    불어나는 빚 때문에 리하트가 걱정하자, 남자는 바로 다음 거래처까지 터주겠노라 말했다. 그의 말에 불안함이 가시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어차피 잔금을 받으면 빚 정도는 단번에 상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업을 확장할 때였고, 다음 거래처를 통해 기반을 완전히 다질 수 있을 터였다.

    리하트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사업이 성공하면 뒤돌아섰던 이들이 다시 저를 우러러볼 것이 분명했다.

    한창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던 중, 황궁 연회 초대장이 날아왔다. 리하트는 고민하다가 참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연회장에서 망신당한 후로 시간이 조금 흐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재기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제 일리아가 없어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리하트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값비싼 옷을 한 벌 지어 입었다. 새 옷을 입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 연회는 이미 한창이었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괜히 위축되었다. 한참 저를 욕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이내 정신 차린 리하트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섰다.

    수많은 시선들이 리하트에게 꽂혀들었다. 부채를 펼친 귀부인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영식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뻔뻔하네요.”

    “어떻게 여기에 얼굴을 내밀 생각을 한 걸까요.”

    “그러니까요. 블로든 영애가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리하트는 그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테르시안 후작은 이미 끈 떨어진 신세였고, 리하트가 블로든과 척을 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괜히 블로든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다면 리하트와 거리 둘 필요가 있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리하트의 눈에 일리아가 들어왔다. 일리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다. 리하트는 입술을 비틀었다. 원래라면 저곳이 제 자리였어야 했다.

    제게 잘 보이려던 사람들은 이제 일리아에게 아부하기 바빠 보였다. 마치 일리아에게 자신의 몫을 전부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리하트가 성큼성큼 일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일리아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일리아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살피던 리하트는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이었다.

    스텔라에게서 시선을 거둔 리하트가 일리아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멈추었다. 리하트를 마주한 일리아가 무척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돈 필요하다고 계속 서신 보내더니, 답장 안 해줘서 직접 찾아온 건가요?”

    “아니,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내 손으로 벌 테니까.”

    무척 자신만만한 말투에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버린 걸 곧 후회하게 될 거야.”

    “바람피운 주제에 파혼도 안 해주면서 버리기는 무슨.”

    여전히 미소를 띤 일리아가 못을 박았다. 일리아는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싸늘한 눈빛으로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편하게 말 걸지 말아줄래요?”

    “아무런 사이가 아니긴. 아직 파혼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잖아.”

    일리아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리하트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어차피 이제 자신도 부자가 될 테니, 일리아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없었다. 리하트는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자신의 화려한 재기를 알렸다.

    “사업이 무척 잘 되고 있어. 겨울쯤이면 테르시안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지긋지긋하게 나올걸?”

    리하트의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이 술렁였다. 테르시안 가문은 사업이 아닌, 공직으로 이름을 알린 가문이었다. 갑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하니 의아하게 여길 만했다.

    “겨울에 별장을 사서 파티 열 생각인데, 관심 있으면 오든지.”

    몇몇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그들은 리하트의 씀씀이가 얼마나 큰지 옆에서 지켜본 자들이었다. 그저 아부만 조금 해줘도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일리아는 팔짱을 낀 채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사업으로 돈 벌 건데요?”

    “네 가문이 손 놓은 장난감 사업.”

    리하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너도 들어봤을걸? 소왕국에서 장난감을 다량으로 매입한다는 소식. 내가 그 사업권을 따냈다고.”

    “…….”

    “무려 1만 개나 선주문을 받아뒀지. 그리고 다음 거래처까지 텄으니 내년에는 더 확장할 거야.”

    어떤 상품이든 1만 개라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주문도 주문이지만, 1만 개를 생산할 기반이 갖춰져 있다는 것만 해도 재력이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리하트는 일리아를 힐끗 보았다. 뭔가 놀라거나 다른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일리아는 평온해 보였다.

    “그래요? 어떤 소왕국인데요?”

    “아델다.”

    리하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부유하기로 유명한 소왕국이니 일리아도 알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아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제가 들은 이야기랑 다른 것 같네요.”

    “뭐?”

    리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영식 하나가 손을 들었다.

    “아델다라면 저희 가문과 계약이 체결되었는데요?”

    리하트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 하냐는 표정을 짓자, 영식이 말했다.

    “외교관인 사촌 덕분에 얼마 전에 아델다 왕국 측과 논의해 장난감 사업권을 따냈거든요.”

    리하트가 추진 중인 사업 내용과 같았다. 리하트의 얼굴이 버쩍 굳어졌다. 그것을 본 영식이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선주문 1만 개는 말도 안 되지요.”

    “……웃기지 마. 계약서까지 받아뒀다고. 내가 고용한 중개상인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아?!”

    리하트는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소리쳤다. 중개상인의 신원은 확실했고, 왕국에서 직접 보낸 계약서와 선금도 받았다. 거기다 중개상인은 마치 자기 일처럼 제작부터 유통, 운송까지 모든 분야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 사람이 사기를 칠 리가…….

    “…….”

    리하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게 되었던 걸까.

    “요즘 사기꾼들이 기승이라 하던데…… 혹시……?”

    영식이 슬그머니 사기꾼을 언급하자,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리하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떨었다. 며칠 전, 중개상인은 다음 거래를 매듭지으러 가기 위해 승선했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까지 해주었는데 설마…….

    그때 리하트는 일리아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서린 웃음을 보았다. 뭔가를 깨달은 리하트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네 짓이지!!”

    눈이 뒤집힌 리하트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을 밀쳐냈다. 그는 잔뜩 성난 얼굴로 일리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누가 봐도 뭔가 저지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멈춰요! 뭐 하는 짓이에요!”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스텔라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리하트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일어설 마지막 기회였다.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 넣었고, 심지어 빚까지 졌다. 그런데 또다시 일리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리하트가 길길이 날뛰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렸다. 빨리 경비병을 불러오라는 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리하트가 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절대 나만 안 죽어. 죽더라도 같이 죽어야지!”

    리하트가 일리아의 멱살을 잡아채려던 순간이었다. 치켜 올라간 리하트의 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리하트의 손목을 틀어쥔 것이었다.

    “빌어먹을! 누구야!”

    흥분한 리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리하트 테르시안.”

    카르한이 리하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바닥이 울릴 듯 몹시 낮은 목소리에 리하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리하트는 뒤늦게 카르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팔을 뒤틀었다. 그러나 팔이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르한이 리하트의 손목을 좀 더 세게 붙들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에 리하트가 신음을 삼켰다. 고통이 파고들자, 그제야 잃어버린 이성이 돌아왔다.

    리하트는 정신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리하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윽!”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리하트는 다시 카르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리하트는 천적을 만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지그시 리하트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카르한의 입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목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살을 에었다.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카르한이 리하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경고가 확실하게 전달되었는지, 리하트는 손목을 움찔거렸다. 카르한이 그의 손목을 놓으며 밀쳐냈다.

    “꺼지십시오.”

    리하트가 주춤거렸다. 그는 더 이상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몸을 틀었다. 입구 쪽으로 뛰어가는 꼴이 포식자를 피해 도망치는 초식동물 같았다.

    카르한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카르한은 날선 기운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르한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사고 쳤다는 생각에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일리아가 서 있었다.

    “일리아.”

    부드럽게 흩어지는 이름이 카르한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카르한이 일리아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구석구석 시선이 닿자,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심장 뛰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카르한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르한은 서서히 몸을 숙였다. 시야를 나란히 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많이 놀랐습니까? 혹시 다친 곳이라도…….”

    그가 안절부절못하자, 일리아는 겨우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고마워요.”

    그제야 카르한이 심각한 표정을 풀고 눈을 둥글게 떴다.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자, 멀어졌던 사람들도 눈치 보며 다시 다가왔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빠져나간 입구를 잠깐 바라보았다.

    ‘끝났네…….’

    리하트가 당한 사기꾼은 일리아가 엄선해서 보낸 사람이었다. 제대로 해먹었는지 떠나기 전에 일리아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러 왔었다. 지금쯤이면 그 사기꾼은 제국을 떠난 후일 것이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그를 찾으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남은 것은 테르시안 가문의 몰락이었다. 아무리 후작이 녹봉을 벌어온다 해도, 이자가 더 빨리 쌓일 것이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스텔라는 유독 조용했다. 마치 충격 받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스텔라는 무턱대고 찾아와서 소리 지르는 리하트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카르한을 쫓아다니던 제 모습을 말이다. 그때 스텔라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

    스텔라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무척 간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스텔라가 언질 없이 에반테온 공작저에 쳐들어갔을 때였다. 그 이후 일방적으로 약혼 취소 통보를 받았다.

    당황한 스텔라와 달리, 카르한은 무척 덤덤한 얼굴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눈동자가 스텔라를 담았다.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스텔라는 카르한이 무서웠다. 남들이 떠들어대는 소문을 믿었고, 세상에 다시없을 나쁜 남자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저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스텔라는 카르한의 변화가 누구보다 뚜렷하게 느껴졌다. 분위기나 표정, 인상, 말투까지……. 전부 일리아를 만난 후로 바뀐 것이었다. 스텔라는 아까 일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스토커가 그런 말 하는 게 웃겨서요.

    일리아가 저를 스토커 취급할 때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짧았다. 카르한은 스텔라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의 눈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리아를 향했다. 그때 일리아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카르한, 소매가…….”

    카르한이 뒤늦게 일리아를 따라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일리아는 주위에 몰려 있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르한과 함께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술 냄새 나는데, 어쩌다가 쏟은 거예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술을 즐기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술이 있어서 가져오다가, 들고 있던 잔이 깨져서…….”

    “잔이 깨져요?”

    일리아가 깜짝 놀라서 묻자, 카르한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유리잔이 조금 약한 것 같았습니다.”

    “다친 곳은요?”

    카르한은 고개를 흔들려다가 멈칫했다. 그가 슬그머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좀 봐주시겠습니까?”

    일리아는 순순히 카르한의 손바닥을 잡고 살폈다. 희미하게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피는 비치지 않았다. 혹시 유리가 박혔을까 싶어, 일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꼼꼼히 확인했다. 일리아가 꼼질거리며 손바닥을 만지자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의원을 불러 달라 할까요?”

    “아닙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으니.”

    일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황궁 연회인데 그렇게 약한 유리잔을 내놓다니…….”

    일리아가 대신 화를 내주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람들이랑 대화는 좀 했어요?”

    “생각보다 많이 했습니다.”

    “안 그래도 다들 당신 이야기 하느라 바쁘더라고요. 이참에 친분을 많이 쌓아두면 좋죠.”

    카르한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가슴이 뜨끔해졌다. 영식들이랑 대화하다가 막판에 유리잔을 깨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일리아를 모욕하는데, 어찌 듣고만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를 욕하던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르한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요즘 폭력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듯했다.

    ***

    연회장 입장과 동시에 블로든 백작 부부는 주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한 쌍의 잉꼬부부라 불리는 비올레와 클리프는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이들이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비올레 블로든을 모를 수가 없었고, 예술에 관심 있는 자들은 클리프의 이름을 외워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워낙 바쁜 탓에 웬만한 연회나 모임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다들 이번 연회를 기회라 생각하며, 줄을 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블로든 백작님, 저번 전시회 정말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백작부인. 저는…….”

    단단히 팔짱 낀 비올레와 클리프는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먼 곳을 힐긋거렸다. 일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성년식도 치른 다 큰 딸이었으나,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번 연회도 꼭 참석할 필요는 없었는데, 일리아가 간다 하니 일부러 따라 나온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일리아는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왔다. 배신은 일상이었고, 주변 사람 때문에 납치당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타인을 경계하며 불신하는 편이었는데, 리하트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리하트 그놈이 무려 바람을 피운 것이다.

    그들은 일리아가 힘들어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한 달 동안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을 때 어찌나 불안하던지. 물론 지금은 카르한을 만나고 많이 좋아졌지만, 부모인 비올레와 클리프는 여전히 일리아가 걱정되었다.

    비올레는 일리아의 옆에 서 있는 카르한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거둔 비올레는 귀족들과 적당한 사교를 이어나갔다.

    “부인, 축하드려요. 이번에 온천 개발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건 딸아이 거라서요.”

    비올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다들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딸에게 온천 사업을 전부 넘겨줄 정도면 도대체 블로든이 가진 부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다들 감탄하며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어느 중년 귀족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따님께서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비올레와 클리프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주목받게 된 귀족이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자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걱정하는 척하면서 블로든 부부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혹시 에반테온 가문을 통해 정계 쪽에 발을 뻗치려는 속셈인가 떠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소 짓고 있던 비올레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소문과 달리 에반테온 소공자는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예?”

    “성실하고 겸손한 데다가 성품마저 훌륭하지요.”

    거기다 예술도 좋아한다며 클리프가 자연스럽게 사심을 넣어 거들었다. 블로든 부부의 말에 귀족들은 잠시 옆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서로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나……?

    비올레가 더 할 말 있냐는 시선을 보냈다. 먼저 화제를 꺼낸 중년 귀족이 머뭇거렸다.

    “아니 그래도…….”

    “아참, 저희는 재력이나 신분은 안 봅니다. 성격만 좋으면 됐죠.”

    그쪽이 재력을 따지면 황족 외에 결혼할 상대가 없지 않나……? 귀족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올레는 멀찍이 서 있는 일리아와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그런데.”

    “…….”

    결국 중년 귀족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이상 무슨 말도 꺼낼 수 없게 원천 봉쇄 당한 탓이었다.

    비올레와 클리프는 처음에 카르한을 반대했던 것도 잊어버린 채 그를 칭찬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듣던 귀족들은 나중에는 진짜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르한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고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금맥 건으로 논의를 드리고 싶은데…….”

    “아, 딸아이가 지분 반을 가지고 있어서 상의하고 말씀드릴게요.”

    “저는 바네사라는 화가에게 의뢰를 하고 싶은데…….”

    “미안합니다. 그 화가는 일리아랑 개인적으로 계약해서 저희는 권한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일리아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듣고 있던 귀족들은 생각했다. 이쯤 되면 블로든 가문의 실세는 일리아 블로든이 아니냐고.

    ***

    카르한은 술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연회장에 홀로 남은 일리아는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웅장한 음악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에 웅성거리던 이들이 곧바로 양옆으로 갈라졌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통해 남녀가 팔짱을 낀 채 내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계절도 잊은 듯 연회복에 기다란 남색 벨벳 망토를 두른 채였고, 황후는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층계참에 멈춰 서자, 귀족들이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일리아는 뒤늦게 정신 차렸다. 고개 숙이려는 그때,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인사하듯 황후가 눈웃음을 지었다.

    마주 웃어준 일리아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적당히 예를 갖춘 후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황제 부부의 뒤편으로 걸어오는 젊은 남녀가 보였다. 황태자와 황태자비였다.

    일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일리아는 이전에 황태자비와 대화해본 적이 있었다. 황태자비가 리하트의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하트와 틀어진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바쁜 와중에 모두들 이렇게 자리해 주어서 고맙소.”

    주름이 자글자글한 황제는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는 제게 예를 갖추는 귀족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 후로 제법 긴 연설이 이어졌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감히 황제의 말을 끊어낼 사람은 없었다.

    찬찬히 귀족들을 살피던 황제의 눈길이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서 멎었다. 이마에 주름이 좀 더 깊이 패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황제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전부터 황제는 블로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황실과 거래할 때도 칼같이 정산해버리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블로든을 제재하기는 어려웠다. 블로든이 망하면 제국이 휘청거릴 것이었다. 장황한 연설을 끝낸 황제가 뒤돌아섰다. 그가 그대로 퇴장해버리고, 남은 황족들은 계단 아래로 내려와 측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족들이 흩어지고, 일리아도 걸음을 떼려 했다. 그때 제 쪽으로 다가오는 헤인리를 발견했다. 일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불렀다.

    “헤인리 오라버니.”

    목소리를 들었는지 헤인리가 바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장식이 달린 연회복을 입은 헤인리가 냉큼 일리아 앞으로 왔다.

    “계속 널 찾아다녔단다.”

    “너무 넓어서 엇갈렸나 봐요.”

    “그래, 언제 돌아갈 예정이니.”

    헤인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은근히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조금 있다가 가려고요.”

    아직 황후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일리아와 헤인리는 잠시 옆으로 빠져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공자는?”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래. 아까 리하트를 보고 깜짝 놀라서 널 찾아다녔다.”

    “카르한이 도와줘서 별일 없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헤인리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둘이 서 있으니, 주변 영애들이 힐긋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전부 헤인리에게 보내는 눈빛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헤인리는 훌륭한 남편감이었다. 비록 혼인 시기를 놓치긴 했지만, 제국 제일 부자인 블로든 가문 후계자인 데다가 나이에 비해 직급도 높았다.

    거기다 외모도 훌륭한 편이었다. 비올레를 닮아 선이 고왔고, 환한 금발과 연녹색 눈동자는 주변의 이목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영애들이 오라버니한테 관심 많아 보이는걸요?”

    “전부 돈만 보고 그러는 거지.”

    냉소적일 정도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일리아는 잠시 헤인리를 쳐다보았다. 언제 결혼할 건지, 연애에 관심은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드디어 오라버니랑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오는구나! 하고 일리아는 두근거렸다. 그러나 헤인리는 그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걱정 마라. 당분간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일리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만히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헤인리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네가 연회에 참석할 줄은 몰랐어.”

    “어째서요?”

    “넌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일리아는 꼭 참석해야 할 의무가 없으면 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리하트와 연애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사교계에 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반복되는 대화에 피로감을 느꼈고,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버렸다.

    사실 이번 연회에 참석한 까닭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의 평판을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일리아는 이전부터 계속 바뀌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왕 사업을 물려받기로 했으니, 다른 사람과 친분을 차근차근 쌓아 볼 생각이었다. 타인을 분석하고 의심하는 것도 줄이고…… 이 기회에 남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걸 극복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부러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싫다고 영영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헤인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소공자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일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헤인리를 살폈다. 확실히 헤인리의 카르한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왠지 카르한을 반대하던 과거의 헤인리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카르한을 알고 지낸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 카르한은 제게도, 가족들에게도 깊숙이 파고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헤인리는 잠시 한곳을 가만히 보았다. 중년 남성에게 붙잡혀서 쩔쩔매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옆 부서 사람이랑 내 부하.”

    이래서 공직자는 불편하다며 헤인리가 혀를 찼다. 다들 황궁에서 일하니, 황궁 연회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저 젊은 남자는 연회까지 와서 옆 부서 사람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헤인리가 그쪽을 신경 쓰자, 일리아가 등을 밀었다.

    “가보세요.”

    “……미안하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고.”

    헤인리가 자리를 뜨고, 일리아는 카르한을 기다렸다. 그때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지더니, 남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가 곧바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일리아 블로든이 황태자비를 뵙습니다.”

    일리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 뒤쪽에 서 있는 리하트의 누나, 시오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시오나가 샐쭉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황태자비와 사촌지간이니, 그녀에게 자신의 험담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아직도 연회장에 남아 있었네.’

    아까 리하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퇴장한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한참 늦어서야 입장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황태자비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으나 묘하게 피로에 젖어 보였다. 싸늘한 눈빛으로 일리아를 바라보던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영광입니다.”

    황태자비는 잠시 일리아를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황태자비를 만났을 때와 지금 제 모습이 너무 다르긴 했다. 화장이나 옷차림뿐만 아니라, 행동마저도 말이다. 관찰을 마친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테르시안 가문이 저의 과거 본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요?”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비의 아버지는 선대 테르시안 후작이었다. 그러나 후작 부부는 어린 딸만 두고 마차 사고로 죽고 말았다. 지금은 선대 후작의 동생인 현 테르시안 후작이 작위를 계승 받은 상태였다.

    현 테르시안 후작은 조카를 황태자비로 추대하려 힘썼다. 물론 황태자비가 선대 후작 생전에 황태자의 약혼녀로 내정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턱을 치켜든 황태자비가 다시 질문했다.

    “그대가 테르시안 가문을 모욕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일리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황태자비가 시오나를 힐끗 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로는 언쟁이 있었다던데요.”

    뜻밖의 말에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쟁이라니? 혹시…….

    “설마 일전에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태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전에 일리아는 길거리에서 시오나와 마주쳐, 육아용품 가게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지갑 취급 했었지.’

    실컷 물건을 고른 후 저보고 계산하라던 뻔뻔함을 잊을 수 없었다. 분명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떠들어 댔을 것이 훤히 보였다.

    “언쟁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는걸요.”

    일리아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가게에 끌려갔으며, 계산을 요구 받은 일. 그리고 자신이 계산해주지 않자, 시오나가 일방적으로 난동을 피운 것까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태자비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싸늘하던 눈동자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정말인가요?”

    “사실 그대로입니다. 원하신다면 가게 점원에게 증언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시오나를 쳐다보았다. 시오나는 초조하게 부채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황태자비가 다시 일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당신 오라버니가 제 숙부를 고발한 건 알고 있겠죠?”

    “테르시안 후작 측이 먼저 제 오라버니의 승진을 막았습니다. 제가 파혼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보복한 거지요.”

    일리아가 사실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없는 사실을 꾸며낸 것도 아닌걸요.”

    헤인리는 그저 후작이 저지른 일을 폭로했을 뿐이었다. 황태자비는 생각이 많은 듯 침묵했다. 사실 일리아는 황태자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거의 엮일 일이 없으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황태자비가 테르시안 후작을 위해 애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번에 비리 사건이 터진 후로도 후작이 공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그녀가 힘써준 덕분이었다.

    테르시안 후작은 황실과의 연줄을 공공연히 자랑했고, 그 때문에 일리아는 리하트의 바람을 알고 나서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당당하게 대답하긴 했으나, 일리아는 속으로 조금 긴장했다. 늘 테르시안 후작 편을 들어주던 황태자비였으니, 이번 기회에 저를 압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태자비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황태자비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시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아와 황태자비가 언쟁을 벌이지 않으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시오나는 참지 못하고 직접 이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일리아는 시오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차단해버렸다.

    “아까 당신 동생, 급하게 돌아가던데요. 사기당한 것 같다면서.”

    “뭐?”

    시오나가 그대로 멈춰 서자, 일리아가 능청스레 대답했다.

    “중개상인이 사기꾼이었나 보더라고요.”

    잠깐 멍하니 있던 시오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일리아는 시오나 또한 후작가 사업에 거금을 투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시오나의 손에서 부채가 툭 떨어졌다. 비명을 삼킨 시오나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부딪힌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회장을 나가는 시오나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아…….”

    황태자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픈지 그녀가 머리를 짚었다. 아까부터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눈 밑에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웠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거짓말이었을 줄은.”

    황태자비는 차가운 눈으로 시오나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일리아도 덩달아 그쪽을 보는데,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왔는지 카르한이 서 있었다. 그러자 황태자비가 카르한을 흘긋 보며 아는 체했다.

    “에반테온 소공자로군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교제한다고 했던가요?”

    일리아를 대신하여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비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음악 소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깨닫고 속삭였다.

    “곧 무도회가 있을 시간이네요.”

    황태자비가 일리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무척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연이 있으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황태자비는 그대로 뒤돌아서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설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좋게 해결된 것 같았다. 얼떨떨해하는 사이,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체격에 맞는 옷을 고르느라…….”

    일리아는 셔츠를 갈아입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전부 새로 갈아입었네요?”

    “예. 술 냄새가 많이 나서 갈아입었습니다.”

    “잘했어요. 이 옷도 잘 어울려요.”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쑥스러울 때 나오는 미소였다. 연회장 분위기가 무르익고, 홀이 북적북적해졌다. 그리고 황태자비의 말처럼 무도회를 알리는 음악이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짝을 지은 남녀가 곧바로 중앙 홀로 나왔다. 은근한 자리 쟁탈전을 끝낸 후 그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다들 칼을 갈고 나왔는지 실력이 제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영애와 영식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었다.

    “일리아.”

    카르한의 부름에 일리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고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카르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무도회의 첫 곡을 제게 주십시오.”

    일리아는 잠시 제게 뻗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긴장했는지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둘은 적당히 한적해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중앙은 이목이 집중될 뿐더러, 남들과 비교 당하기 십상이었다. 일리아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지만, 문제는 카르한이었다. 피 나는 연습 끝에 겨우 웃음거리는 면할 정도가 되었으나 아직도 실수가 잦았다.

    ‘마지막 연습 때도 불안했었지.’

    동작도 전부 외웠고, 박자도 이해하는데 막상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면 잘 맞지 않았다. 신장 차이가 제법 나서 그럴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자신이 천천히 그를 이끌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에 손을 얹자,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틀려도 괜찮아요.”

    일리아의 속삭임에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직된 어깨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경쾌한 왈츠에 맞춰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갔다. 맞잡은 두 손이 매끄럽게 뻗어 나갔다.

    일리아는 카르한에 맞춰서 움직였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대신 신장 차이 때문에, 카르한이 일리아에게 몸을 살짝 기울인 채로 출 수밖에 없었다.

    박자가 조금 빨라지고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잡은 채 팔을 돌렸다. 작은 회오리처럼 빙그르르 돌자, 일리아의 드레스가 곱게 접은 양산처럼 말려들어갔다.

    ‘잘 따라올까 걱정했는데.’

    일리아는 속으로 놀랐다. 연습 때처럼 어설플 줄 알았는데, 그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꼭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금 반대쪽으로 몸이 돌아가자 드레스 자락이 접시꽃처럼 활짝 펼쳐졌다. 밑자락에 화려한 색으로 수놓인 꽃잎들이 일리아와 함께 춤을 췄다. 사방에서 따끔거릴 정도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무도회장 중심과 떨어진 곳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카르한과 박자를 맞춰 움직이던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주 느리게 굴러가는 마차를 탄 것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가 잠시 다른 곳을 보자, 카르한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마치 집중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어느새 카르한에게 리듬이 넘어가자, 일리아는 정신 차렸다.

    음악은 어느새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빠르고 까다로워서 카르한이 항상 틀리던 부분이었다. 오늘은 구두를 신었으니 밟히면 좀 아프겠구나 하고, 일리아는 속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카르한은 완벽할 정도로 매끄럽게 동작을 구사했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좁혀졌다가 멀어졌다가……. 거리는 계속 달라졌지만, 시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단단히 맞물린 사슬처럼 한쪽이 멀어지면 그대로 끌어당겨졌다.

    들려오는 음악마저 희미해지고,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주변의 시선조차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둘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의 허리를 붙들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허리를 감싸오자, 일리아는 불에 덴 듯 반사적으로 뒤로 빠졌다. 그 순간 카르한이 일리아의 허리를 받치고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당겼다.

    뒤로 넘어질 것 같던 몸이 대번에 카르한의 가슴팍으로 기울어졌다. 그대로 그의 품에 폭 안기게 된 일리아는 잠시 멈추었다. 단단한 가슴팍을 뚫고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게 울리는 왈츠보다 더 빠르고 크게. 그것이 마치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한참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카르한은 좀 더 고개를 숙여 일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곡이 남았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 제 어깨에 얹게 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춤보다 느린 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박자는 얼추 들어맞았다.

    카르한은 철저하게 일리아에게 맞추고 있었다. 더 많이 움직이면서도 일리아를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유려한 춤 선이 자수를 놓듯 이어졌다. 맞닿은 손으로부터 고조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부드럽게 당겼다. 마치 끌어안은 것처럼 몸이 밀착되고, 동시에 음악이 멎었다.

    “…….”

    일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언제 그렇게 연습했냐는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상을 입은 듯 손끝에 아직도 열기가 묻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감촉을 애써 지우기 위해, 일리아는 손으로 드레스자락을 문질렀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우려 했다. 일리아가 도망가려는 순간, 카르한이 붙잡았다.

    “잠시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 쐬지 않겠습니까.”

    ***

    아까 리하트가 도망친 후, 카르한은 잠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소매가 술에 젖어, 셔츠를 갈아입기 위함이었다.

    카르한은 마차로 돌아가 여벌로 가져온 옷을 뒤졌다. 몇 달 전에 맞춰둔 옷인데, 지금 입어 보니 잘 맞지 않았다. 훈련을 열심히 했더니 그사이 근육이 더 붙은 모양이었다.

    혼자 기다리고 있을 일리아를 생각하자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카르한은 가장 넉넉해 보이는 옷을 골랐고, 다행히 딱 맞았다. 겉옷과 바지까지 갈아입은 카르한은 급히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남들이 보든 말든 무던한 편이었지만, 시선이 절로 느껴졌다. 모두들 호감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연회장에 입장한 후로, 제 얼굴을 보고 무턱대고 도망가는 사람은 없었다. 경계하던 이들도 말 몇 마디를 섞어본 후에 태도를 달리했다. 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던 과분한 호의였다. 전부 일리아가 바꿔준 것이었다.

    “블로든 영애가…….”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귀족 영식, 영애들이 모인 곳에서 일리아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혹시 험담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들었다.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그렇죠? 전에는 워낙 조용하셔서…….”

    카르한은 과거의 일리아를 몰랐다. 블로든 가문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종종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직접 만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이 모르는 일리아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일리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잠자코 들었다.

    “이전에는 약간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는데, 오늘은 잘 받아주시더라고요.”

    “그래도 상냥하시잖아요. 계속 웃어주셔서 좋아요.”

    다들 일리아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일리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한 번 대화해본 것으로 판단하고 재고 있었다.

    카르한이 알고 있는 일리아는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늘 당당했고 무너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리아는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일리아는 제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일리아가 아니었다면 카르한은 평생 저를 가둔 작은 상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카르한은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멀리서도 눈에 띄는 환한 금발이 보였다. 일리아를 발견한 카르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일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여자가 황태자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대화를 방해할 수 없어서 잠시 멈춰 섰다.

    “…….”

    카르한은 찬찬히 일리아를 살폈다. 일리아는 마치 그림을 그린 듯한 미소를 띤 채 황태자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늘 연회장에 입장한 순간부터,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일리아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일리아의 미소 아래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첫 만남에 일리아가 제 표정을 읽었듯, 카르한도 이제 일리아의 진짜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아까 누군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상냥하시잖아요. 계속 웃어주셔서 좋아요.

    왜 몰랐을까. 계속 웃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연회 따위 별 거 아니에요. 괜찮을 거예요.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일리아가 했던 말이었다. 일리아는 내내 카르한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본인도 긴장했으면서 말이다.

    아.

    카르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긴장하고 상처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그녀의 다정함은 자신보다 타인을 위할 때 나오는 것이었다.

    ***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잘근 짓씹었다. 멀리서 무도회 음악이 들려왔다. 다음 곡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춤이 끝나자마자 도망가려고 했는데, 카르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서 테라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역시 자신은 그의 부탁에 약했다.

    테라스로 나오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로 덮인 문이 닫혔다. 일리아는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급하게 저를 찾을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여름이어도 저녁은 제법 시원한 편이어서,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를 식혀주었다.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간 바람이 일리아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열기가 가시고 나니 그제야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로 나온 건 잘못된 선택인 듯했다. 둘만 있으니 아까보다 더 의식되었다.

    카르한은 여전히 말없이 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리아는 묘한 침묵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황궁은 자주 와 봤어요?”

    “수도로 귀환하고 세 번 정도 왔습니다.”

    “그 전에는요?”

    카르한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지 말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이라면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비공식적으로 수도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카르한이 더듬거리며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일리아는 경청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의 이야기가 한참 이어지고 그제야 열기가 완전히 가셨다.

    일리아는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유리문을 응시했다.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 찬 연회장이 보였다. 문 한 겹을 두고서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제국의 귀족이란 귀족은 다 모인 것 같네요.”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유리문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리하트 그 자식이 올 줄 몰랐어요.”

    일리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기 위해 일부러 과격한 언사를 사용했다. 리하트 이야기가 나오자 카르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그러기 전에 당신이 도와줬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리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뛰었다. 보는 사람도 많은 곳에서 리하트가 저를 해하려고 할 줄은 몰랐으니까. 일리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테르시안 후작가는 길바닥에 나앉을 테니, 파혼 소송이라도 걸어볼까 싶어요.”

    이전에는 재판을 신청하기 어려웠다. 테르시안 후작의 세력도 강했고, 그쪽도 이름 있는 변호인을 쓸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후작의 세력은 미미해졌고, 리하트의 집은 쫄딱 망해버렸다. 변호인을 구할 돈도 없을 것이다. 잘만 하면 세 달 안으로 판결 날 듯했다.

    ‘드디어 끝났구나.’

    리하트가 몰락하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의 밑바닥을 보고 나니 기분이 더러웠다. 일리아는 환상만 보고 그를 쫓았고, 리하트는 제 돈만 보고 환상을 빚어냈다.

    ‘남들은 첫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던데. 나는 다른 의미로 못 잊을 판이네.’

    왠지 입맛이 썼다.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것이 안녕을 고하는 것처럼 들린 탓이었다. 처음 두 사람이 얽힌 이유는 일리아의 약혼자, 그리고 카르한의 약혼자가 될 사람과 헤어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이었다.

    “우리 앞으로도…….”

    일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파혼 이후 카르한과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카르한이 진짜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있긴 하나 그것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후계자 수업도 슬슬 끝나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 무수한 별이 흘렀기에.

    등나무 아래에서 저를 놓아주지 않던 눈빛이 여전히 화상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불붙기 직전의 나뭇가지가 된 것처럼 온몸이 쓰라렸다.

    “좋은 친구로 지내요.”

    매듭지어진 말에 흔들리던 카르한의 눈동자가 멎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꾹꾹 눌러 삼킨 채 걸음을 뗐다.

    “이제 들어가요.”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나 일리아는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일리아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대규모 연회는 오랜만이라서 좀 피곤하네요.”

    일리아는 고개만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좀 더 있다가 가려는데, 당신 먼저 돌아갈래요?”

    연회 내내 짓고 있던 미소가 버릇처럼 나왔다. 그러자 카르한이 성큼 다가왔다. 단 한 발자국만 남긴 채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일리아의 얼굴 위로 카르한의 그림자가 쏟아졌다.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어깨가 굳어졌다. 이윽고 그가 두 팔을 뻗었다.

    “무리해서 웃을 필요도 없습니다.”

    카르한의 팔이 일리아의 어깨를 스쳤다. 바로 뒤에서 커튼 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회장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테라스를 몰래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전부 차단되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일리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정말로 단 둘뿐이었다. 누구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카르한은 웃지 않는 일리아를 보며 서서히 미소 지었다. 웃는 것이 어색했던 과거와 달리, 무척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저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직한 속삭임이 달빛처럼 일리아를 부드럽게 감싸왔다. 평소에 뭔가 바라는 게 없던 카르한의 소망에 일리아는 그제야 입술을 떨었다. 감추어 왔던 제 속마음이 모두 꿰뚫린 것 같았다.

    일리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어느새 느슨해진 자물쇠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활짝 열린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문 틈새에 꽁꽁 감추어왔던 본심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계속 외면해 왔지만,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카르한을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지금 알게 되었다. 이래서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