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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 13장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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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장

    늦은 오전의 햇살이 커다란 창문을 통해 느릿하게 타고 들어왔다. 빈틈없이 바닥을 채운 모래가 햇빛에 비쳐 금빛 물결을 만들었다.

    책상 앞에 앉은 일리아는 모래에 발을 묻었다가 꺼내며 발장난 쳤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사르르 흩어졌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모래는 헤인리가 생일 선물로 준 것으로, 감촉이 무척 좋아서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발장난 하던 일리아는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에 생각나는 단어를 모두 적어 넣었다.

    [가게, 위치, 의상, 물건, 건물.]

    아직까지 어떤 가게를 열지 결정 내리지 못해서 고민이 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의견이 들어가는 가게이기에 신중해졌다.

    “음식점도 괜찮은 것 같은데.”

    의상실이나 소품 가게는 여럿 가지고 있으나, 음식점은 아직까지 미지의 분야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껏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펜을 움직여 글자를 적었다. 종이에 음식점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음식점으로 낙점 찍고 나니, 세부적인 문제를 채워나가야 했다.

    어떤 음식을 팔지, 고객층은 어떻게 잡을지 등등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이왕이면 디저트 가게를 차리고 싶었는데, 수도에는 번듯한 디저트 가게가 널리고 널린 상태였다. 맛은 기본이고, 다른 가게와 차별 둘 수 있는 특색을 살려야 했다.

    “정원 느낌으로 꾸미면 어떨까.”

    일리아는 눈을 감고 잠시 상상했다. 한가로운 분위기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평범한 정원이 아닌 좀 더 특별한……. 순간 유리 온실이 번뜩하고 떠올랐다.

    블로든 저택 정원 한복판에는 대형 유리 온실이 있었다. 유리 온실은 부의 상징이자, 웬만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특별했고, 블로든 저택을 방문한 손님들은 유리 온실을 보고 온갖 찬사를 보내왔다.

    일리아도 개인적으로 유리 온실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계절과 상관없이 화초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 특히 비 오는 날에는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

    아직까지 그런 가게가 없으니 나름 특색을 살릴 수 있을 듯했다. 다만 건축비나 유지비가 장난 아니니, 초호화 디저트 가게가 될 것 같지만…….

    [2층 규모, 비밀 정원 느낌, 예약제?]

    종이에 단어를 적어 넣던 일리아는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초안을 잡고 나니 문득 카르한이 떠오른 탓이었다.

    ‘……단 거 좋아하지.’

    일리아와 카르한은 음식 취향이 은근히 갈렸다. 고기가 취향인 자신과 달리 카르한은 채소를 좋아했다. 일리아가 홍차 같은 차 종류를 즐겨 마신다면 카르한은 달달하고 상큼한 과일 음료를 선호했다. 술 같은 경우에도 카르한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생일 때 카르한이 혼자서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었던 게 생각났다.

    일리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최근 들어 다른 일을 하다가도 불쑥불쑥 카르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오늘도 안 오려나.”

    생일 이후로 카르한의 방문이 뚝 끊겼다. 집안 사정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연락이 왔기에 알겠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안 그래도 어색하게 헤어졌는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걱정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거긴 한데…….

    ‘일단 얼굴을 봐야 뭐라도 말하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별관에 들를 생각이었다. 별관에 도착하자, 현관 앞에 익숙한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카르한의 마차를 알아본 일리아가 멈춰 섰다.

    ‘언제 온 거지? 지금 수업 들으러 갔나?’

    머릿속이 복잡해진 일리아는 별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멈춰 선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

    일리아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인사가 튀어나왔을 텐데,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오랜만입니다. 일리아.”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카르한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줄 기회였지만,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이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기에.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르한은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주 봐 왔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말을 걸었다.

    “오늘 올 줄 몰라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거죠?”

    “9일 만입니다.”

    카르한이 냉큼 대답했다. 일리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카르한이 작게 덧붙였다.

    “생일 이후로 처음 보는 거니까요.”

    애써 잊으려던 그날을 떠올리게 된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에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게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리아가 대답했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괜히 어색해진 일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카르한도 마찬가지인 듯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정말 별일 없었는데,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라니.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저지르고 만난 것 같지 않은가.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밝은 대낮에 보는 카르한의 얼굴은 그때와 달랐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처럼 눈동자는 밝은 푸른색을 띠었다. 어둠 한 자락을 덮은 듯 짙고 어둑한 눈동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림으로 옮겨 놓은 듯 그날 밤 풍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흐드러지게 늘어진 등나무꽃잎 아래 서로 마주하던 장면. 두 눈동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와 저를 삼킬 것 같던 눈빛.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던 분위기.

    그 순간을 떠올리자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수런거리는 소리에 일리아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때 카르한의 뺨에 난 희미한 상처를 발견했다.

    “카르한, 다쳤어요?”

    한참 말이 없던 카르한이 조용히 대답했다.

    “……공작부인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공작부인이 그런 거예요?”

    미간을 찌푸린 일리아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쩜 얼굴을 때릴 수 있어요!”

    아니, 얼굴이 아니더라도! 일리아가 분노를 터뜨리자,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언제 어색하게 굴었냐는 듯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다행히 다른 쪽 뺨은 괜찮았지만, 손톱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일리아가 분통한 얼굴로 입술만 잘근잘근 짓씹었다. 만약 때린 사람이 공작부인만 아니었다면, 당장 현상금을 내걸어 범인을 수배한 다음 응징해줄 기세였다. 그런 일리아를 보며 카르한은 설핏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은 그저 일리아가 저를 위해 화내준다는 사실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이래서 자신이 일리아를 좋아하게 되었구나. 그걸 왜 이제야 깨닫게 되었는지.

    “그냥…….”

    카르한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제 뺨을 붙든 일리아의 손등에 손바닥을 조심스레 얹었다.

    “저 대신 화를 내주는 게 좋아서…….”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사뭇 부드러웠다. 당황한 일리아가 눈을 깜빡이다가 급히 손을 거두었다.

    카르한이 아쉽다는 듯 일리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쿵쿵쿵, 심장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겨우 심장을 진정시킨 일리아가 괜히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덩치도 크면서 왜 맞고만 있어요.”

    카르한이 난감한 얼굴로 뺨을 쓸었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만약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확 가출해버려요. 우리 집 방 많으니까.”

    카르한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일리아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이야기와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의 근황까지…….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카르한이 현관 쪽을 힐끗 보았다. 계속 수업을 빠진 탓에 복습해둬야 할 것이 가득했다. 왠지 평소보다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그가 말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오랜만에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무뚝뚝한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허리를 살짝 굽혀 눈높이를 엇비슷하게 만든 후 조용히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

    나직하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긴장했다. 카르한이 뜸을 들이자, 일리아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혹시 여우 좋아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굳어졌던 몸이 단숨에 풀어졌다. 갑자기 웬 여우……?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일리아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는 여우보다 늑대가 더 좋은데요.”

    “늑대…….”

    카르한은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여우는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르한이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항상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재깍 대답해주더니…….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낀 일리아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카르한이 별관으로 들어가 버리고, 일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잠시 산책한 후 본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혹시나 그때 이야기가 나올까 봐 긴장했는데, 카르한 쪽에서도 별말 없었다. 정말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묻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제 쪽에서도 바라던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가슴 아래가 쿡쿡 쑤셔오자,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조금 더워진 바람이 불어와 금빛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일리아는 커다란 손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던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귓불이 조금 붉어진 일리아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괜찮겠지……? 하지만 안 괜찮은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일리아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리하트는 서신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돈을 줄 수 없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돈도 많으면서 고작 이 정도도 못 준다고?”

    리하트는 조각난 종이뭉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일리아에게 파혼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칼 같은 거절이었다.

    조급해진 리하트는 애꿎은 머리만 쓸어 올렸다. 일리아 쪽에서 파혼, 파혼 노래를 불렀으니 이 정도 요구는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일단 선금을 받고 추가로 좀 더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빌어먹을.”

    리하트는 연회장에서 저를 비웃던 일리아를 떠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테르시안 후작은 공직에 다시 복귀했으나, 그의 봉급으로는 예전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 꼬박꼬박 뇌물을 바치던 놈들은 싹 사라졌고, 리하트의 지인들도 연락을 피했다. 돈을 펑펑 쓸 때는 평생 충성할 것처럼 굴더니, 단물이 빠지니 전부 모른 척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건물이나 좀 받아둘걸.”

    너무 대놓고 바라면 일리아가 거부감을 느낄까 싶어서 나름 자제했다. 철면피여도 좋으니 그냥 요구할 걸 그랬다.

    안일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리하트는 방을 서성였다. 지금도 지출을 많이 줄였는데, 여기서 더 졸라맬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남은 돈까지 전부 다 털게 될 것이다. 상황을 한 방에 역전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리하트는 밤낮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며칠 후 리하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어느 부유한 왕국에서 엄청난 수의 장난감을 매입한다는 소식이었다. 왕비가 회임했는데, 경축하기 위해 왕국 내 모든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선물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후작부인이 이끌던 사업이 바로 장난감 제조업이었다. 블로든과 공동 사업을 추진 중이었으나, 후작부인이 고스란히 넘겨받은 것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리하트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하늘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후작부인의 사업은 이미 반 이상 진행되었고, 자금만 있으면 단시간에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만약 일이 잘만 풀리면 앞으로도 왕국 측과 지속적인 거래를 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던 리하트는 곧바로 후작부인과 시오나에게 알렸다. 병석에 앓아누웠던 후작부인은 곧바로 자리를 털고 나왔고, 시오나 또한 흥분해서 방방 뛰었다.

    세 사람은 후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퇴근한 후작이 집에 오자마자 설득을 시작했다.

    “아버지, 이번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요.”

    리하트는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그 블로든이 손을 댔던 사업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공동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블로든은 손을 뗀 상태였다. 하는 사업마다 대박을 치는 블로든이 먼저 제안한 것이니, 성공할 승산이 높았다. 사업에 관심 없던 리하트가 의욕적으로 나서자 후작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어디서 그 돈을 구한단 말이냐.”

    은행에서 대출을 받자니, 신용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기꺼이 보증 서줄 만한 인물도 없었다.

    “담보로 빌리면 되지요.”

    “……무엇을 담보로 삼으려고.”

    리하트는 방 안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비싼 가구는 전부 팔아넘겼지만, 아직 남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저택 말고 더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대번에 눈이 커진 후작이 노성을 질렀다.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 저택은 역대 테르시안 후작들이 살아왔기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어차피 갚으면 그만 아닙니까. 저택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일은 절대 없습니다.”

    리하트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옆에 있던 후작부인과 시오나도 합세했다.

    “맞아요. 당신은 지금까지 쏟은 돈이 아깝지도 않아요?”

    “아버지, 블로든의 콧대를 눌러줄 기회예요. 자기들이 구상한 사업이 성공을 거두면 얼마나 배 아프겠어요?”

    셋이서 작정하고 설득하자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전처럼 호화로운 생활이 그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블로든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계속 고집을 꺾지 않던 후작이 고민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트, 너만 믿겠다.”

    “물론입니다.”

    리하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 사업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럼 저를 욕하던 이들도 전부 입을 다물 게 분명했다. 리하트는 드디어 반격할 때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가게 구상을 끝낸 일리아는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를 불러 함께 도안을 구상하고, 가게 터를 매입했다. 규모가 생각보다 커진 탓에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고르게 되었다.

    일리아는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디저트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상금을 많이 걸면 대단한 실력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우승자와 실력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고용할 계획이었다.

    대회를 열면 나중에 가게를 열 때 입소문을 타기 좋을 터였다. 파티셰 대회 우승자의 디저트를 직접 먹을 수 있는 기회라면서 말이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고민이 하나 있었다. 초기 자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초호화 디저트 가게를 열려고 하다 보니, 수익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명세를 탄다 해도 적자가 나면 실패한 사업이었다. 일리아는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 수익을 낼 방법을 모색했다. 차를 마시며 고민하는데, 자료를 정리하던 말렉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테르시안 고저택이 은행에 저당 잡혔다고 합니다.”

    “그래?”

    일리아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리하트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마지막 기회였으니 말이다.

    그에게 정보를 흘린 사람은 일리아였다. 절대 놓칠 수 없는 미끼를 던졌으니, 리하트는 분명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업권을 따내려 할 것이다. 빚을 져서라도 말이다.

    이제 리하트를 어떻게 망하게 만들지 고민이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디저트 가게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말렉의 말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자.”

    “아직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그래도 한번 보고 싶어서. 첫 가게잖아.”

    “마차 준비 시키겠습니다.”

    말렉이 곧장 자리를 뜨고, 일리아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리아는 책상 옆에 치워둔 서신 더미를 힐긋 보았다. 아직도 바네사에게 그림 의뢰를 넣고 싶다는 서신이 날아들었다.

    첫 의뢰인 만큼 고심해서 고르는 중인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돈보다는 그림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이제 핑계 댈 것도 다 떨어졌으니, 서신을 보내온 사람들 중에서 고를까 싶었다.

    채비를 마친 일리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프란체는 외출한다는 말에 신이 나서 달려왔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너뿐일 거야.”

    “그냥 일이랑 다릅니다! 아가씨의 호위로 따라 나가는 거니 좋은 겁니다.”

    프란체가 열변을 토하자, 일리아는 그냥 웃고 말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프란체는 조용할 틈이 없도록 떠들어댔다.

    “어제 소공자와 대련을 펼쳤는데, 아가씨께서 보셨으면 참 좋을 뻔했습니다.”

    다시없을 엄청난 승부였다며, 프란체는 자화자찬했다. 카르한 이야기가 나오자 일리아는 잠깐 움찔한 채 프란체의 말을 들었다.

    “그런 괴물, 아니, 어마어마한 실력자가 있을 줄은……. 역시 세상은 넓은 것 같습니다.”

    “말조심해라, 프란체.”

    “예, 형님.”

    말렉의 훈계에 프란체가 냉큼 대답했다. 프란체는 자신의 늘씬한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소공자를 가까이서 보니 제 팔뚝의 두 배는 되던데……. 근육 늘리는 법을 물어봤지만, 역시 고급 정보라 그런지 쉽게 알려주지 않으시더군요.”

    뇌물을 바쳐서라도 알아낼 거라고 프란체가 말했다. 프란체와 말렉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일리아는 계속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보내왔다.

    “아가씨?”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화의 흐름을 대강 짚어낸 일리아가 질문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무승부였습니다. 칼이 동시에 부러졌거든요.”

    다음에는 꼭 이기고 말 거라고 프란체가 승부욕을 불태웠다. 시끌벅적하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걸어서 가게 부지로 향했다. 아직 터를 다지는 중인지 주위가 휑했다.

    일리아는 기둥을 세울 구덩이를 힐끗 보았다. 제법 깊어서 사람 둘은 세울 수 있을 듯했다. 멀찍이 서서 인부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말렉이 말했다.

    “그나저나 요즘 좀 잠잠한 것 같습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일리아의 재물운을 언급하고 있었다. 확실히 말렉의 말처럼 최근 들어 이전과 같은 재물운은 터지지 않았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다거나, 금맥이 발견된다거나…… 그런 경우 말이다.

    “최근에 딱히 벌여둔 게 없으니까. 아니면 이제 운이 다한 걸지도.”

    일리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덕을 많이 보았으니 딱히 미련은 없었다. 소소한 재물운으로도 충분했고, 오히려 가끔씩 예고 없이 터지는 재물운은 일리아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필요 없으니 이번 디저트 가게만 안 망했으면 좋겠어.”

    열심히 준비했다며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인부가 다급히 빠져나왔다.

    ‘뭐지?’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쪽을 응시했다. 구덩이 안에서부터 꼭 연기 같은 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뒤따라 퍽!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물줄기가 하늘을 뚫을 듯 솟구쳤다. 사방으로 열기를 품은 물방울이 튀었다.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금방 일리아의 발치까지 흘러들어왔다. 일리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자, 누군가 소리쳤다.

    “온, 온천이다!!”

    ***

    온천이 터졌다는 소식에 수도가 떠들썩해졌다.

    사실 온천 자체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북부나 남부만 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수도 중심에서 온천이 발견된 것은 최초라 할 수 있었다.

    수도 사람들은 이 소식을 크게 반겼다. 이제 온천을 이용하기 위해 멀리 떠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은 온천이 터진 부지를 매입하려고 성화였다. 그러나 부지 소유자가 블로든이라는 말을 듣고 알아서 조용해졌다.

    모두가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정작 일리아는 울상이었다. 이미 가게 구상을 다 끝냈는데, 갑자기 온천이라니. 다시 부지를 물색할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실의에 빠져있는 일리아를 보며 비올레가 고개를 내저었다.

    “가게 운영해보라고 했더니, 온천을 만들어 올 줄이야…….”

    “저는 디저트 가게를 차릴 생각이었어요.”

    일리아는 쓸모없게 된 도안을 보고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디저트 가게야 다른 곳에 차리면 되지 않겠니.”

    “그보다 더 좋은 위치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온천욕 하면서 케이크를 먹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

    “그건 그래요.”

    투정 부리긴 했지만, 사실 디저트 가게는 반쯤 포기했다. 지금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일단 온천을 중심으로 여관을 세우고, 휴양지처럼 만들까 싶어요.”

    이번에 터진 온천은 규모가 상당했기에, 여관과 더불어 부속 건물을 지을까 싶었다. 온천, 숙박, 쇼핑, 음식점까지…… 모든 걸 갖춘 대형 휴양지가 될 것이다.

    “그럼 추가로 부지를 사들여야겠구나.”

    진지하게 경청하던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의 의견대로 진행된다면 규모가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잘만 하면 독보적인 휴양 시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올레는 일리아를 힐끗 보았다. 아직도 서운해 보였다. 열심히 구상을 다 해뒀는데, 막판에 엎어졌으니……. 잠시 고민하던 비올레가 슬쩍 의견을 덧붙였다.

    “그럼 부속 건물에 네가 생각했던 가게를 여는 건 어떠니? 물론 규모는 많이 작아지겠지만.”

    그녀의 제안에 일리아는 잠시 상상해보았다.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좋아요.”

    일리아는 강제로 안겨진 재물운과 타협하기로 마음먹었다.

    ***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자 사람들은 그늘로 피신했다. 찻집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던 카르한은 더운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성에게 호감 사는 법]

    [늑대 같은 남자란?]

    테이블 위에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쌓여 있었다. 여우보다 늑대가 취향이라는 일리아를 위해 일부러 고른 거였다.

    비올레에게 조언을 들은 후로 카르한은 이전과 달라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여기서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리아의 호감을 쌓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일리아의 이상형에 걸맞은 남자가 되고 싶었기에 늑대란 늑대는 다 찾아보았다.

    [이성을 설레게 하는 방법 – 벽치기를 통해 당신의 박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자.]

    카르한은 잠시 멈칫하며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하단에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한 팔로 벽을 짚어, 상대를 가둔 듯한 그림이었다.

    ……이걸로 상대를 설레게 만들 수 있다고? 그림을 빤히 보던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겁먹을 것 같은데…….”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일리아가 무서워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실제 일화가 실려 있었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고민하던 카르한은 수첩에 ‘벽치기’라고 적은 후 밑줄을 긋고 별을 세 개 그렸다. 중요한 것 같으니 강조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카르한은 남은 키위 주스를 전부 마신 후 수첩을 덮었다. 문득 일리아가 보고 싶어졌다. 벌써 며칠째 일리아를 보지 못했다. 일부러 본관을 찾아가서 기웃거리곤 했는데, 외출했다는 소식만 계속 들려왔다. 혹시 저를 피하는 건가 싶어 괜히 시무룩해졌다.

    주섬주섬 책을 챙기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번에 온천 터졌다는 소문 들었지?”

    “맞아. 소유자가 블로든이라던데.”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흠칫했다가 이내 갈 길 가버렸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곱씹던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온천……?”

    그러고 보니 블로든 가문 부지에서 온천이 터졌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일리아가 바빴던 걸지도 몰랐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 카르한은 짐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의 휴일이었지만 딱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오늘은 수업이 없었기에, 카르한은 별관이 아닌 본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프란체가 카르한을 발견하고 냉큼 달려왔다.

    “소공자님! 오늘 쉬시는 날 아닙니까!”

    혹시 자기랑 대련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냐고 프란체가 눈을 빛냈다. 카르한이 묵묵히 고개를 내젓자, 프란체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육 만드는 법…… 얼마면 되겠습니까……?

    마치 불법 과외 현장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직까지 근육에 집착하는 프란체를 보며 카르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모르는 걸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체격부터 차이가 많이 났다.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현관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

    목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저것은 노란색일 것 같았다. 햇살처럼 저를 휘감아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현관 앞에 선 일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저는 이만…….”

    일리아의 등장에 프란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카르한을 향해 다가온 일리아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막 왔습니다.”

    “혹시 프란체가 귀찮게 군 건 아니죠?”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궁금한 점이 있는지 질문을 해서…….”

    “근육 키우는 법이요?”

    어떻게 알았냐는 눈을 하자, 일리아가 뻔하다는 듯 픽 웃었다.

    “얼마 전부터 노래를 불렀거든요.”

    “……많이 친한 모양입니다.”

    “거의 매일 붙어 다니죠.”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가슴이 괜히 따끔거렸다. 분명 얼마 전만 해도 모르던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안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을. 프란체를 상대로 질투하다니……. 죄책감을 느낀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현관을 벗어나 그 옆을 천천히 걸었다. 건물 벽에 붙어서 걸으니 그리 덥지 않았다.

    “수업은 잘 되어가요?”

    “……이제 거의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매일같이 블로든 저택에 들러 수업을 받은 지 제법 되었다. 카르한은 남들이 몇 년 걸릴 것을 몇 달 만에 끝내버렸다. 교수들도 이제 칭찬할 거리가 떨어졌는지, 혀만 내둘렀다.

    가을이 오기 전, 카르한은 시험을 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 문턱도 밟지 못한 그는 학력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이제 와서 입학하기는 늦었으니,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볼까 싶었다.

    가정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객관적인 지표를 얻고 싶을 때 치는 시험으로 어렵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합격증만 있으면 그를 학력으로 무시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여름이 지나면 일주일에 한두 번씩만 수업을 받을 예정입니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만남이 꾸준히 이어진 것은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을 방문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버리면 더 이상 블로든 저택에 들를 핑계가 없어진다. 아직까지 가짜 연인 행세를 하고 있으나, 굳이 꼬박꼬박 만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 카르한은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공작과 거래했으니, 아무리 짧아도 두 달은 자리를 비워야 할 것이다.

    카르한은 지금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일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일리아가 잠시 멈춰 섰다. 건물 벽을 등지고 선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은 눈을 깜빡였다. 묘하게 익숙한 상황에, 아까 정성껏 밑줄까지 쳤던 단어가 생각났다.

    [벽치기]

    지금이 딱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책에서 본 대로 따라 하려고 하니 머뭇거려졌다. 그 전에 분위기는 어떻게 잡아야 하지? 갑자기 벽을 치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카르한?”

    일리아가 그런 카르한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더워요? 들어갈까요?”

    아무 말 하지 않는 카르한을 보던 일리아가 뒤돌아서려 했다. 다급해진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쿵!! 엄청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고 일리아보다 더 놀라버린 카르한이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카르한이 그대로 숨을 멈추었을 때, 그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금이 쩍 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으로 쪼개진 벽돌 조각이 툭 하고 일리아의 머리에 떨어졌다.

    “아야.”

    카르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바닥에 머리를 박을 듯이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다친 곳은…….”

    카르한은 안절부절못하며 일리아를 살폈다. 두 손은 차마 일리아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하기만 했다.

    “그렇게 아프진 않아요. 괜찮아요.”

    손을 내저은 일리아는 거미줄처럼 금이 간 벽을 살폈다. 일리아는 오, 하고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물었다.

    “우리 집 벽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게 아니라…….”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르한은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중얼거렸다.

    “……벽은 제가 보수하겠습니다.”

    벽치기는 실패인 것 같았다. 카르한은 다시는 벽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카르한은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리아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결심한 후, 그는 연애지침서에서 시킨 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박력 보여주기, 재력으로 환심 사기, 노출 있는 옷을 입어 몸매 부각하기……. 일단 재력으로 환심 사라는 문구는 제외했다. 박력은 재능이 없는지 자꾸만 엇나갔다. 표정 관리도 되지 않았고, 특히 벽을 파손한 뒤로 카르한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노출은 부담스러워서 고민하다가 테시온이 저번에 추천해준 옷을 입었다. 목깃 아래 단추가 없어서 쇄골이 그대로 보이는 셔츠였다. 그건 조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사로잡기는 했어도 딱히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저는 여우보다 늑대가 더 좋은데요.

    일리아의 말을 떠올린 카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늑대는 운명이 아닌 모양이었다.

    일리아의 이상형에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진 카르한은 검 한 자루만 들고 연무장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겠지 싶었다.

    “소공자님!”

    저 멀리서 카르한을 발견한 프란체가 뛰어왔다. 칼집 끝으로 땅을 파던 카르한은 어깨를 움찔했다.

    “오늘 오후에 연무장을 보수한다고 합니다.”

    쭈그리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연무장 잔디를 새로 교체한다는 말을 들었다. 카르한은 아직도 멀쩡해 보이는 잔디를 한번 둘러보았다.

    몇 년은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은데, 블로든 가문 측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전체적으로 보수 공사를 한다고 했다.

    카르한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연무장 구석에 피어난 작은 야생화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꽃으로 화려하진 않으나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르한은 왠지 일리아의 하얀 뺨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흔한 들꽃이 무척 특별하게 느껴졌다. 오후에 연무장을 싹 갈아엎는다고 했으니 이 꽃도 가차 없이 매몰될 것이 분명했다.

    카르한은 두 손을 뻗어, 흙을 살살 팠다.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캐낸 후에 손수건으로 감쌌다. 이제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

    “이상하단 말이야.”

    펜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카르한의 태도가 이상했다. 갑자기 벽을 치질 않나, 살짝 노출이 있는 옷을 입질 않나……. 물론 그의 몸매가 좋아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연애 소설에 나오는 오만하고 저돌적인 주인공 느낌이랄까…….

    물론 느낌만 그렇고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일리아는 테시온을 슬쩍 불러내서 물었다.

    -요즘 소공자한테 무슨 일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늑대에 꽂히신 것 같습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빨간 모자와 늑대라는 동화까지 샀다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게도 테시온도 카르한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이전에 카르한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갑자기 카르한이 여우를 좋아하느냐 물어 와서 늑대가 좋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카르한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혹시 나 때문인가…….’

    그냥 여우가 좋다고 할 걸 그랬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궁금했다.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은 일리아는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카르한이 선물해 준 것으로, 가볍고 편해서 자주 착용하고 다녔다. 목걸이를 만지고 있으면 목덜미에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길쭉하고 단단한 손가락, 제 피부보다 뜨겁던 체온.

    일리아는 목걸이를 놓고 다시 자료를 읽었다. 온천 사업을 도맡았기 때문에 도안부터 자재까지 제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었다. 그래서 밤낮 없이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한참 글자를 읽던 일리아는 눈이 뻑뻑해져서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창문을 통해 정원까지 훤히 보였다. 멀리서부터 정원을 가로지르는 한 사람이 보였다.

    일리아는 홀린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현관과 가까워진 그가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카르한은 정확히 저를 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한이 본관을 찾아올 이유는 제게 볼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일리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현관 밖에 서 있는 카르한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용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한.”

    일리아가 이름을 부르자,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시종일관 딱딱할 것 같던 얼굴 위로 감정이 서렸다. 기쁜 기색을 띤 푸른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응시했다.

    천천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입꼬리와 반대로 아래로 휘어졌다. 누구라도 시선을 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쁜 미소였다.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선 채 그를 응시했다. 서늘한 얼굴 위로 떠오르는 다정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어수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제 가슴 안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일리아가 계단을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카르한의 손에 들린 작은 화분을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화분 안에 손톱만 한 흰 꽃이 옹기종기 심겨 있었다. 꽃을 제법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일리아조차 처음 보는 꽃이었다. 아무래도 들판에서 자라는 야생화 같았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카르한이 일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화분을 받아들었다. 카르한의 손에 들렸을 때는 분명 작아 보였는데, 일리아에게 넘어오니 그리 작지는 않았다.

    “예쁘다…….”

    일리아가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원에 만개한 화려한 꽃만 보다가 수수한 야생화를 보니 도리어 눈길을 끌었다.

    “연무장에서 발견한 꽃인데, 일리아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잠시 눈을 내리깐 그가 일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최근에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본 풍경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고 그가 쑥스러운 듯 속삭였다. 일리아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카르한이 본 풍경을 함께 본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요. 창가에 두고 잘 길러볼게요.”

    카르한은 환하게 웃는 일리아를 눈에 담았다. 이 순간을 전부 기억하기 위해서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가슴의 떨림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솔직히 일리아가 이렇게 좋아해줄 줄은 몰랐다.

    일리아의 이상형에 가까워지기 위해 책을 참고했을 때와는 무척 다른 반응이었다. 카르한은 이제 늑대 같은 남자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카르한…….”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이 겨우 눈을 깜빡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리아가 말했다.

    “전에 여우 좋아하냐고 물었잖아요.”

    “……예.”

    “역시 저는 늑대보다 여우가 좋은 것 같아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여우, 말입니까……?”

    “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한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참고하겠습니다.”

    왠지 비장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생각했다.

    ‘갑자기 사냥에 관심이 생겼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이제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저번에 여우를 좋아하느냐 물었던 이유는 제게 사냥감을 선물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눈치 없이 여우보다 잡기 어렵다는 늑대를 말해버렸으니…… 카르한은 무척 난감했으리라.

    드디어 깨달음을 얻게 된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조했다.

    “여우면 충분해요.”

    그리고 며칠 후.

    테시온이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찾아왔다.

    “카르한 님께서 이번에는 여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을 전부 사들이시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

    “여우 습성을 알아보시는데, 설마 여우를 기르려고 하시는 건지……. 에반테온 공작저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 없는데 말이죠…….”

    테시온의 말에 일리아는 덩달아 심각해지고 말았다.

    ***

    이른 오후, 일리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창틀에 둔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야생화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테시온에게서 카르한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리아는 결국 대놓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번에 여우 좋아하냐고 물어본 이유가 뭐예요?

    -그게…….

    카르한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일리아가 선수 쳤다.

    -사실 저는 사냥감 이야기하는 줄 알았거든요.

    -……진짜 여우가 좋으신 겁니까?

    -?

    -여우 같은 사람을 비유한 줄 알았는데…….

    카르한은 무척 심각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대화하면 할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결국 이야기는 거기서 매듭지어진 듯했다.

    그리고 어제, 카르한은 진짜 여우 한 마리를 잡아왔다.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생포해온 것인지 무척 신기했다.

    백작저 사람들이 전부 그걸 구경하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온 비올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카르한을 그대로 끌고 나가버렸다. 한참 후에 돌아온 카르한은 비 맞은 여우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어머니랑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도통 알려주질 않아서 아직까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일리아는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서신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중 반절 이상이 바네사와 연관된 청탁 편지였다.

    ‘이제 슬슬 결정 내려야겠네.’

    전시회 이후로 아직까지 다음 의뢰를 받지 않았다. 신비주의도 좋으나,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기껏 모아둔 관심이 흩어질 터였다. 반짝 뜨는 화가로 만들지 않으려면 다음 작품을 내야 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일리아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결정권은 일리아에게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바네사의 다음 의뢰를 결정해야 할 듯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오늘 저를 찾아올 방문객은 없었다.

    “작품 의뢰 때문에 찾아오셨다는데…….”

    아무래도 애가 달아서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고민하지 않고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용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는 옷매무새를 고친 후 곧바로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기척을 느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미안해요.”

    문가에 멈춰 선 일리아가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일리아 블로든이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일리아는 잔뜩 긴장한 채 손님을 맞이했다. 가족들도 없이 혼자서 황족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황후가 방문한 목적이 저를 만나기 위함이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집 주인 같은 태도였으나,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문가에 서 있던 일리아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황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리아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를 취한 채 조심스레 황후를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연회에서 먼발치로 몇 번 본 것이 전부일 텐데, 어째서 낯익은지 알 수 없었다.

    ‘……아.’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일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전에 바네사의 작품이 걸린 전시회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수수한 차림새에도 기품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고귀한 사람일 거라 멋대로 추측했는데……, 황후였을 줄이야.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뒤에 대기해 있던 고용인이 차를 내어왔다. 찻물이 우러나자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찻잔을 든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블로든이 주최한 전시회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제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보았죠.”

    일리아는 말의 서두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림을 의뢰하러 왔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달랐다.

    “본론부터 꺼내자면…… 그대가 데리고 있는 화가를 궁정 화가로 불러들이고 싶어요.”

    그 말에 찻잔을 내려다보던 일리아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후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계약금의 세 배를 지불한 뒤에 보상으로 그대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겠어요.”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후의 제안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계약금은 둘째 치고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니. 황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니, 리하트와의 파혼 정도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바네사에게도 무척 좋은 기회였다. 평민이 궁정 화가가 되다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만약 궁정 화가가 된다면 돈과 명예를 전부 거머쥘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장점을 제외하고라도 이 제안은 받아들여야 했다. 안 그래도 블로든 가문은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여기서 더 눈 밖에 났다간 온갖 제재가 들어올 것이 뻔했다.

    한참 말이 없던 일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취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제안은 제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전적으로 바네사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황후의 탄식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나,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일리아는 서서히 눈을 떴다. 예상과 달리 그녀에게서 불쾌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 되었어요. 그녀에게는 이미 거절당했답니다.”

    “……네?”

    “그대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제안을 재고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영애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하고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후는 이내 미련을 버렸는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떨쳐냈다.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마침내 그녀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내 의뢰를 첫 번째로 받아주겠어요?”

    바네사가 권한을 위임한 덕에 일리아는 첫 의뢰인을 고를 권리가 있었다. 일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수많은 청탁을 받았지만, 바네사의 이름을 알리는 데 황후보다 더 나은 의뢰인은 없었다. 앞으로 모든 이들이 바네사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일리아는 서서히 긴장을 풀고, 마주 웃어 보였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황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일리아와 황후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 차이가 두 배 이상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예술 작품에 대해 간단한 견해를 나누다 보니 은근히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황후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름에 황궁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거, 알고 있지요?”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황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귀족 영식, 영애만 참석했던 저번 연회와 달리, 여름 연회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귀부인과 귀족들 그리고 지방의 소귀족들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녀가 직접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반드시 참석해달라는 의미였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그때 만나도록 하지요.”

    ***

    며칠 전, 카르한은 수도 외곽까지 나가서 여우를 잡아왔다. 생포하느라 애 먹긴 했지만 일리아에게 뭔가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카르한은 직접 잡아온 여우를 일리아에게 선물했고, 그는 그대로 비올레에게 끌려 나가서 잔소리를 들었다.

    -여우가 되라고 했더니, 진짜 여우를 잡아오면 어떡해요?

    -일리아가 진짜 여우를 원하는 것 같아서…….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비올레는 황당해했다. 비올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소공자, 여우 짓이라는 거 알아요?

    카르한이 모른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비올레는 그 의미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대놓고 말고 은근슬쩍 환심을 사는 거예요.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때로는 과장이나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죠.

    그제야 카르한은 비올레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곰처럼 둔하게 굴지 말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카르한이 잡은 여우는 숲에 풀어주었다. 살아있는 여우는 처음 본다며 일리아가 좋아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덜컹덜컹, 바깥에서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기댄 채 멍하니 햇살을 쬐던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을 힐끗 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카르한을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카르한은 요즘 테시온이 저를 많이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해서 염려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테시온.”

    “예, 카르한 님.”

    “계속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카르한이 머뭇거리자 테시온이 덩달아 긴장했다. 이윽고 그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 몰래 빚이라도 지셨는지…….”

    금고에 얼마가 있더라, 하고 테시온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둘밖에 없는 마차 안이었지만, 카르한은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일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차마 일리아에게는 하지 못한 고백이 흘러나왔다. 뜻밖의 말에 테시온은 그대로 굳어졌다.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던 테시온은 혼자서 ‘아아…… 그래서…….’ 하고 혼자 납득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두 분께서 진짜 교제를 시작하시는 겁니까?”

    테시온이 내심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그는 일리아와 카르한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목에 쓴맛이 올라오는 듯했다. 카르한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 혼자 좋아하고 있어서.”

    “……앞으로 저도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테시온이 열의를 불태우자, 카르한은 괜히 불안해졌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테시온은 두근거림을 심장병으로 착각한 전적이 있었다.

    어느덧 마차는 블로든 저택 본관 앞에서 멈추었다. 별관에 가기 전, 잠시 일리아를 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일이 바쁜데 방해될까 싶어 주저했지만, 비올레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늘 상주해 있는 고용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현관문이 발칵 열리더니 일리아가 나왔다.

    “일리아, 좋은 아침입니다.”

    카르한은 환한 얼굴로 일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일리아가 인사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카르한, 서신 못 받았어요?”

    “서신을 보내셨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엇갈렸나 보네요. 그게……. 저택에 독감이 돌아서요.”

    일리아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 고용인들이 독감으로 앓고 있거든요. 혹시 옮을지도 모르니까 방문하지 말라고 적은 서신이었어요.”

    “많이 심각합니까?”

    “여름 감기라 그런지 제법 독하네요. 생전 아프지 않던 말렉도 앓아누웠어요.”

    일리아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카르한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카르한을 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독감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오지 말아요.”

    쿠쿵, 하고 머리 위로 벼락이 친 것 같았다. 카르한은 충격 받은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독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오지 말라니…… 그럼 그동안 일리아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괜찮다고 우겨 봤자 일리아는 안 된다고 돌려보낼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카르한은 곧바로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일자로 뻗어진 눈썹이 아래로 휘어졌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부터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테시온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아주 멀쩡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카르한은 원체 튼튼한 체질이라, 평생 감기 같은 것은 걸려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테시온을 보지 못한 일리아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설마 당신도 독감 걸린 거예요?”

    카르한은 양심이 많이 찔렸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갔다간 한참 동안 일리아를 만날 수 없을 게 뻔히 보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비올레가 말한 대로 여우 짓이라는 걸 해볼 생각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은데…….”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으니 증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카르한은 헛기침 비슷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테시온은 그런 카르한을 보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데리고 본관에 들어왔다. 카르한을 신속하게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

    “매번 제가 감기 걸릴까 봐 걱정하더니, 당신이 걸리면 어떡해요.”

    가벼운 타박처럼 들려왔으나, 속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카르한은 알고 있었다.

    “날이 더워졌다고 가볍게 입어서 감기 걸린 건 아니에요?”

    카르한은 조용히 눈만 내리깔았다. 더워서 노출 있는 옷을 입은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미하게 효과를 보았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카르한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일리아가 저를 걱정해주는 건 좋았으나, 괜히 마음을 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감기 걸린 척은 어떻게 하는 건지…….

    “주치의 불러뒀으니, 곧 올 거예요. 진료 받는 거만 보고 갈게요.”

    그 말에 카르한은 이불만 살짝 쥔 채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를 붙잡고 싶었지만 감기 걸린 사람과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카르한의 절박한 눈을 본 테시온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 생각엔 카르한 님께서는 감기가 아니라…… 과로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로요?”

    일리아는 납득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얼마 전에 여우 잡으러 갔었죠. 몸살일지도 모르겠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은 주치의는 먼저 맥부터 쟀다.

    “흐음?”

    카르한을 진찰하던 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워있던 카르한은 나름대로 열심히 아픈 척했다. 그러자 테시온이 짠한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하시니, 일단 피로 회복에 좋은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독감은 아니라며 주치의가 선을 그었다. 카르한은 꾀병이 탄로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요즘 독감이 워낙 유행이라서요.”

    오늘도 열 명 넘게 진찰했다며,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주치의가 일리아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주치의는 일리아를 가만히 살폈다.

    “아니, 얼굴이 조금 붉으신 것 같은데…….”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주치의가 일리아 쪽으로 돌아앉았다.

    “혹시 아프다거나, 별다른 증상이 느껴지지는 않으셨습니까?”

    “피곤한 것 말고는……. 그러고 보니 약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주치의는 양해를 구한 후 열을 쟀다. 이윽고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열이 생각보다 높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깜짝 놀란 카르한이 단숨에 이불을 걷어냈다.

    “괜찮…….”

    일리아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 카르한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쉬어야 합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일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침실이 어디인지 알아낸 카르한이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던 고용인들이 잠시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다.

    부끄러워진 일리아가 혼자 걸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카르한은 꿋꿋했다. 그 태도 때문에 마치 중병이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카르한은 침대에 일리아를 눕혔다. 여름 이불 두 장을 겹쳐서 일리아의 어깨선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대로 침대에 눕게 된 일리아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막상 침대에 누우니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어제부터 무리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을 받아 올 테니, 잠시 눈 감고 계십시오.”

    딱딱하게 굳어진 카르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일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열이 확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고용인에게서 독감이 옮은 모양이었다.

    눈앞이 어지러워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주치의가 약을 가져다주었다. 일리아는 미지근한 물과 약을 함께 삼킨 후 잠깐 잠들었다. 그러나 푹 잠들진 못하고 중간중간 깨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증상은 점점 악화되는 듯했다. 마치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했다. 기침은 나오지 않았으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아파서 몸을 뒤척이면 그때마다 시원한 물수건이 이마에 놓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제 이마를 덮을 때마다 일리아는 찌푸려진 미간을 풀었다. 누구의 손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물렁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아서 감촉이 좋았다. 이상하게도 그 손길이 익숙하게 느껴졌는데,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는 듯했다.

    깜빡 잠이 든 일리아는 평소에 잘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 꿈속의 일리아는 리하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홀로 황궁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연못 중앙에 놓인 돌다리를 건넜다. 바닥이 미끄러워 균형을 잡지 못한 일리아는 그대로 연못에 빠져버렸다.

    아무리 헤엄쳐도 장신구와 거추장한 드레스 때문에 몸은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치 깊숙한 곳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점점 의식이 흐려질 즈음, 커다란 손이 일리아를 물속에서 끌어올렸다. 단단하게 끌어안은 품이 차가운 물속에서도 뜨겁게 느껴졌다. 잔뜩 젖은 몸이 잔디에 놓이고, 일리아는 물을 뱉어냈다. 겨우 눈을 떴으나,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햇살을 등진 상대의 얼굴이 까맣게 보였다. 다시 눈이 감기는 그때, 일리아는 보고 말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 떠오르는 여명 같은 푸른색 눈동자를.

    ‘뭐지…….’

    꿈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꾼 것 같은데…… 구해진 뒤의 기억은 낯설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내 머리가 몽롱해져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마에 손바닥이 얹혔다. 익숙한 감촉이었으나 평소와 달리 체온이 서늘했다. 뒤이어 새로운 물수건이 이마에 놓였다. 손바닥과 물수건의 온도는 엇비슷했다. 일리아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 후로 잠들었다 깨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누군가가 있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가진 상대가 수프와 약을 틈틈이 먹여주었다.

    해가 지고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을 채울 즈음, 잠깐 시끌시끌해졌다. 아무래도 일 나간 가족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소공자, 이만 쉬어요. 우리가 돌볼게요.”

    “제가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독감이 옮으면 어쩌려고요.”

    “……건강 체질이라 괜찮을 겁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오다가 끊어졌다. 그리고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 끙끙 앓던 일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일리아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이 온통 캄캄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달빛에 의지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침대 맡에 고개만 기대어 잠든 남자가 보였다.

    일리아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밤의 끝자락을 뚝 떼어놓은 듯 새까만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단정하던 셔츠도 구겨진 채였다. 그제야 일리아는 베개 옆에 떨어진 물수건을 발견했다.

    축축한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새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계속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카르한이 곁에서 간병해준 모양이었다.

    ‘자기도 몸 상태가 안 좋았으면서…….’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살짝 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젖은 물수건처럼 제 가슴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일리아는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이불을 걷어냈다. 깨워서 침대에서 자라고 할지, 아니면 뭔가 덮을 것을 줄지 고민되었다. 결국 일리아는 그를 깨우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내일 아침에 온몸이 쑤실 터였다.

    “카르한.”

    고요한 공간을 가르고, 일리아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직한 소리에 카르한이 반응했다. 어깨를 움찔거린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눈으로 그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침대 맡에 있는 램프를 켰다. 달빛을 대신하여 환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빛에 카르한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침대에 걸터앉은 일리아가 입을 여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저를 걱정하는 거라니. 바보 같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일리아가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약 기운 때문인지 나른하긴 해도…….”

    “다행입니다.”

    카르한이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아팠던 것은 일리아였지만, 카르한이 크게 앓고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목울대를 움직였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뻗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카르한은 손을 타는 강아지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매서운 얼굴로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었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 정돈이 끝나자 일리아는 손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불편하니까 침대에서 자요.”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쉬움 가득한 눈이었으나, 더 만져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리광 피우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 같았다.

    일리아는 다시 손을 뻗어 카르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기분 좋은 듯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좀 괜찮아요?”

    분명 카르한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했다. 독감은 아니어도 가벼운 몸살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대형견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의 눈꼬리가 반으로 접혔다. 목이 살짝 잠긴 듯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그 말이 마치 일리아가 괜찮아졌으니 자기도 괜찮다는 말로 들려왔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덜컥. 단단히 닫아둔 줄 알았던 마음의 문이 다시금 느슨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일리아는 크게 앓고 난 후,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제발 좀 쉬라고 성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밤에 몰래 램프를 켜두고 일하다가 들켜서 잔뜩 혼이 났다. 결국 강제로 쉴 수밖에 없었다.

    나흘 정도 푹 쉬자,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다행히 저택 내에서 유행하던 독감도 갈무리되고 있었다. 짧았던 휴식이 끝나고 일리아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온천 일로 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근처 부지는 전부 매입해뒀고, 이름 난 건축가들을 모집하여 함께 도안을 짰다. 대략적인 초안을 잡아둔 후에 아랫사람들이 올린 서류를 검토했다. 최종 결재는 전부 일리아가 맡고 있었기에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워낙 바쁘다 보니 카르한을 만날 시간이 없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를 보면 많이 흔들릴 것 같았다. 잠깐 거리를 두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아가씨.”

    서류를 확인하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말렉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최종 선택한 자입니다.”

    일리아는 말렉이 내민 종이를 확인했다. 종이에 어느 남자의 신원이 적혀 있었다. 신분과 이름 같은 기본적인 정보 외에도, 어떤 사람과 친분이 있고 무엇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괜찮네. 만나보겠다고 전해.”

    일리아의 말에 말렉이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일리아는 종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블로든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났을 때부터 일리아에게는 온갖 날벌레가 꼬였다. 아첨하며 은근히 요구하는 이들부터 대놓고 사기 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그나마 근래에는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서 잠잠해졌지만, 온천이 터진 후로 전국에서 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수법도 어찌나 다양한지. 옛날 같았으면 가차 없이 돌려보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일리아는 말렉에게 사기꾼들을 직접 만나게 한 후에 그중 괜찮은 놈들을 몇몇 추렸다. 엄격한 선별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을 지금 만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말렉이 준비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응접실로 향했다. 번듯한 차림새를 한 사기꾼이 앉아 있었다. 사치품을 과하게 둘렀으면 거부감이 들었을 텐데, 역시 마지막까지 남은 놈답게 적절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기꾼이 활짝 웃었다. 일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준 후에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온천이 터졌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일단 칭찬부터 꺼낸 남자가 차근차근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목적을 꺼냈다. 입담이 좋아서 그런지 자연스레 대화가 흘러갔다.

    그는 온천과 연계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사업을 접목시키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설명이 체계적이고 상세한 것이, 오랫동안 조사하고 공들인 티가 났다.

    일리아가 뭔가 아는 척하면 곧바로 그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식으로 전문성을 더했다. 사업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그대로 넘어갈 정도로 그럴 듯했다. 거기다 그는 은근슬쩍 유명 인사와 친분이 있다고 자랑했다. 자신의 신원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 보였다.

    ‘역시 사기꾼 중의 사기꾼답네.’

    일리아는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괜찮네요.”

    일리아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쐐기를 박기 위해 남자가 입을 여는 그때, 일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되면 그대로 밀항할 생각인가요?”

    “……예?”

    “한 달 전에 불법 상선을 매수한 기록이 있더군요.”

    사기꾼이 크게 당황했다. 그는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졌다.

    “태어난 곳이 외국이던데, 지금 신분은 가짜일 거고……. 여기서 한탕하고 고국으로 떠날 생각인가요?”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대화 내내 출신지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반평생을 제국에서 살아온지라, 모두들 그가 제국민일 거라 믿었다.

    “그, 그게…….”

    이미 일리아에게 말려들어버린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이대로 도망치자니, 블로든 저택을 무사히 벗어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일리아를 눈에 담았다. 남자가 싹싹 빌려는 그때, 느긋하게 앉아있던 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제안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더 큰물에서 놀아보는 거,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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