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
전시회가 무사히 끝났다. 일리아는 이번 일이 끝나면 며칠 정도 휴식을 취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저는 후원자인 일리아 블로든 님을 통해서만 작업을 받겠습니다.
바네사의 폭탄 발언이었다. 그 뒤로 블로든 백작가에 작품 의뢰를 하고 싶다는 서신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일리아는 사람들의 요청을 정중하게 물렸다. 처음인 만큼 고심해서 골라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그림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갔다.
궁정 화가가 인정한 그림, 천재 화가, 대형 신인……. 그런 수식들이 따라붙었다. 그 덕에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바네사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도 많았다. 고지식한 귀족들은 평민 출신에 문파도 없는 여성 화가의 그림이 인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존 화가들도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바네사를 헐뜯고 질투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전시회 기간을 늘리기로 했다. 바네사의 작품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싶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전시회에 찾아왔고, 다들 그림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력만큼은 감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논란은 그렇게 종식되는 듯했다.
-저 때문에 죄송해요…….
바네사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일리아에게 은혜 갚고 싶어서 권한을 위임했는데, 오히려 신경 쓰게 만든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일리아는 괜찮다고 바네사를 안심시켰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서신이 쏟아져서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만큼 바네사가 저를 신뢰한다는 증거였다.
거기다 콧대 높은 고위귀족들도 먼저 연락이 오고 있으니…… 나중에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바네사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다.
“답신은 다 썼고…….”
일리아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관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별관으로 향했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공부방에서 나오는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카르한!”
일리아가 반갑게 부르자, 카르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지금부터 시간 있어요?”
“예, 방금 수업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럼 같이 구경하러 갈래요?”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거든요.”
“아……!”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기에 카르한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경기가 한창이었다.
“아가씨!”
일리아를 발견한 기사들이 우르르 나타나서 쇠기둥을 세우고 거대한 차양을 설치했다. 어찌나 신속하고 빠른지 군대에서 훈련받아도 이 정도는 아닐 듯했다.
일리아는 그들이 준비해준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가 레모네이드까지 건네주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경기를 구경했다. 선발전은 승자 진출전으로 치르는데, 경기가 시작된 지 제법 지나서 실력 있는 자들만 남은 듯했다.
한 경기가 끝나고 프란체가 출전했다. 일리아는 겉으로 누구도 응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프란체가 이기길 바랐다. 몇 년 동안 함께해온 만큼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의 바람대로 프란체는 단 두 합 만에 상대를 제압하고 경기를 마쳤다. 다음 경기가 이어지고,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질문했다.
“카르한, 저번에 혹시 원로님이랑 무슨 이야기 나눴어요?”
“그냥…… 지금까지 오해한 것 같다고 사과하셨습니다.”
카르한은 잠시 그날을 떠올렸다.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들은 성향이 둘로 나뉘었다. 장남인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었다.
지지하지 않는 쪽은 카르한을 후계자로 밀어붙였다. 진심으로 따르기 위함이 아닌, 꼭두각시로 세우려는 속셈이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카르한이 공작이 되면 원로가 간섭하기 쉬워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카르한에게 독대를 청한 원로는 중립에 서 있었다. 블레어드를 지지하진 않으나, 카르한도 탐탁지 않아 했다. 장남인 블레어드와 대립하기엔 너무나 수동적이고 의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카르한을 다르게 보는 듯했다.
이 이야기를 테시온에게 해줬을 때, 그는 무척 기뻐했다. 테시온은 한 명이라도 포섭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셨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일리아를 보던 카르한은 가만히 손가락만 매만졌다.
어느덧 마지막 경기가 치러졌다. 끝까지 살아남은 프란체와 척 봐도 강해 보이는 기사가 나란히 섰다. 시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자루의 검이 부딪혔다.
카르한은 프란체에게 주목했다. 프란체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저보다 덩치가 두 배쯤 커 보이는 기사와 싸우는데, 전혀 버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프란체는 빠르게 공격을 가한 후 날렵하게 몸을 뺐다. 반응 속도가 굉장해서, 검이 날아오는 곳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 체구가 호리호리한 편이었기에 그는 속도로 승부를 보고 있었다. 속도보다 힘이 우세한 카르한과는 정반대였다.
지켜보던 카르한의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검을 잡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무척 강하군요.”
“제가 아는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거든요. 아, 어머니를 제외하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의 흐름은 프란체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상대를 몰아붙였다. 타격이 끝없이 쏟아지자, 상대 기사의 팔이 점점 안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채앵, 날이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연무장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프란체의 검 끝이 상대의 목을 향했다. 항복의 의미로 기사가 검을 내리자, 심판을 보던 말렉이 선언했다.
“올해 선발전 우승자는 프란체입니다.”
“또 저 자식이냐.”
“지겹다, 지겨워!”
기사들이 장난스럽게 야유하자, 프란체는 씩 웃으며 소리쳤다.
“다들 너무 해이해진 거 아닙니까! 더 열심히 수련하고 오시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내년에는 내가 우승해주마!”
기사들은 한참 어린 프란체에게 패배했음에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프란체의 도발을 웃고 넘겼다. 말렉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은 프란체가 냉큼 일리아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저 우승했습니다!”
프란체가 팔을 붕붕 돌리며 소리쳤다. 방금까지 경기를 치른 사람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모습에 일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사이 실력이 더 늘었던데.”
“엄청 연습했거든요!”
프란체가 가슴팍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잘했다고 일리아가 칭찬을 쏟아내자, 프란체가 헤헤 웃었다. 프란체는 일리아 옆에 앉아 있던 카르한에게 말을 걸었다.
“소공자께서도 오셨군요! 제 경기 어땠습니까.”
“좋은 경기였습니다.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카르한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칭찬을 받은 프란체는 뿌듯해했다. 그는 카르한을 은근히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비올레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쟁자에게 인정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선발전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규모면 거의 지역 경기 수준이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부모님이 정한 규칙이에요. 제 호위는 무조건 가장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일리아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희 가문이 좀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거든요. 협박이나 납치 같은…….”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의자 팔걸이가 뚝 하고 부러지자, 프란체가 놀라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배상하겠습니다.”
“아니에요. 팔걸이가 약했나 봐요.”
일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프란체는 여전히 입만 떡 벌렸다. 저 의자 팔걸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부순 건가 싶어서 프란체가 의자를 요리조리 살피는데, 일리아가 말했다.
“프란체, 우승 축하하고, 일 년 동안 잘 부탁해.”
“아, 예!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신뢰가 가득했다. 카르한은 문득 프란체가 부러워졌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의 호위기사였다면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텐데…….
언제 이 관계가 끝날지 몰라서 불안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공작가 후계자보다 일리아의 호위기사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프란체와 눈이 마주쳤다. 프란체는 화들짝 놀라더니 뚝 잘려버린 의자 팔걸이와 카르한을 번갈아보았다.
카르한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다들 고생했으니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단체 회식에 기사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
테르시안 후작가문에 암운이 드리웠다. 후작이 근신 처분을 받은 후로, 후작가문은 돈이 궁하게 된 것이다.
대대로 공직 생활을 해온 테르시안 후작가는 자금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 뇌물을 받아서 떵떵거려 왔으나 비리 건이 터진 후로 전부 끊겨버렸다. 헤인리의 승진을 막았다가 도리어 된통 당한 탓이었다.
그나마 있는 돈을 다 끌어서 후작부인의 사업에 투자했지만,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격이었다. 사업이 망하기 일보 직전이 된 후작부인은 저택을 팔자고 성화였다. 후작이 미쳤냐고 거절하자, 단식 투쟁을 하더니 병석에 누워 버렸다.
시오나의 경우에는 남편의 이름으로 대출을 내 어머니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같이 망해버렸다. 그녀는 남편의 분노를 피해 일단 후작저로 피신 왔다. 시오나가 하는 일이라고는 저택에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나 기웃대는 것뿐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나쁜 상황에 처했지만, 그중 가장 최악인 것은 리하트였다. 리하트의 경우에는 저택 밖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외출했다 하면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판이 바닥을 치다 못해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게 된 리하트는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또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들고 있던 술병을 던졌다. 벽에 부딪힌 병이 퍽, 하고 깨졌다. 이전 같으면 입도 대지 않았을 싸구려 술이 카펫을 서서히 적셨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연회장에서 당한 수모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일리아는 매일 파혼 동의서를 보내오고 있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약조했으니, 파혼 동의서에 빨리 서명하라고 재촉했다.
“내가 순순히 파혼해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리하트는 눈앞에 일리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누구 좋으라고 파혼해준단 말인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될 소리였다.
한참 욕설을 퍼붓던 리하트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옷장 앞에 섰다. 텅 빈 옷장에 외투 한 벌이 걸려 있었다.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전부 팔고 나서도 딱 한 벌은 남겨두었다. 리하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혹시 언제 연회에 나갈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다.
리하트는 황금빛으로 가득했던 과거가 그리워졌다. 그때를 상기한 리하트는 한쪽 입매를 비뚤게 치켜 올렸다.
“그래, 파혼해주지.”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을 내놓으면 말이야.”
***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별관 복도를 걷던 카르한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클리프와 눈이 마주쳤다.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클리프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 이런 우연이.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카르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빠르게 주위를 살핀 클리프가 오던 방향으로 쭉 걸어왔다. 그리고 카르한을 스쳐지나가면서 쪽지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가버렸다. 클리프가 그대로 사라지고, 카르한은 공부방에 들어와 쪽지를 꺼내 펼쳤다.
[10분 후, 3층 동쪽 끝 방에서 만납시다. 노크는 네 번 연속으로.]
첩자끼리 접선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가방을 챙긴 후 클리프가 말한 장소로 갔다.
문 앞에 멈춰 선 카르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연속으로 문을 네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지요?”
“예.”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거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만남이었다. 카르한이 안으로 들어서자, 클리프가 문을 잠갔다.
“이해해주세요. 소공자.”
그는 아직도 비올레와 헤인리의 눈치를 보았다. 카르한과 친분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몰래 만나곤 했다.
“앉으시죠.”
카르한이 빈 의자에 앉자, 클리프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이틀 후에 시간 있으십니까?”
카르한은 머릿속으로 수업 일정표를 떠올렸다. 다행히 이틀 뒤는 휴일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럼 함께 외출하지 않겠습니까.”
전시회? 오케스트라? 요즘 바빠서 음악 쪽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빨리 공부해야 하나. 긴장한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케스트라를?”
“그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입니다. 저와 생일 선물을 사러 가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생일이요……?”
“아, 모르셨습니까?”
클리프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일주일 후에 일리아 생일입니다.”
“!”
놀란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서로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 카르한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
그로부터 이틀 후. 카르한과 클리프는 일리아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각자 알아본 후에 번화가에서 보기로 했다.
카르한은 이틀 내내 일리아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리아에게 필요한 물건이 없어 보였다. 전부 다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카르한은 직접 보고 선물을 사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카르한은 버릇처럼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이왕 빨리 나온 거, 생일 선물이나 좀 더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모자를 푹 눌러쓴 클리프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카르한을 불렀다.
“소공자!”
백작 저택에서는 데면데면 굴었지만, 밖이라 그런지 무척 살갑기만 했다. 어느새 카르한 앞에 멈춰 선 클리프가 시계를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기다리고 있었군요.”
“아, 미리 도착해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해서……, 그런데 백작님께서도 일찍 오셨군요.”
“아아, 가족들이 어디 가느냐고 물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일찍 나왔습니다.”
클리프의 말을 들은 카르한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일리아는 휴일에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왔다. 카르한은 집에서 해야 할 공부가 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아직도 가슴이 따끔거렸다. 요즘 자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카르한은 앞으로 거짓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클리프와 함께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나오는 것인데 거리가 익숙했다. 일리아와 여러 번 와서 그런 모양이었다. 처음 데이트 할 때가 생각나서, 카르한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일리아가 옷을 왕창 사주어 어찌나 놀랐는지. 시간이 지나도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게 유리창을 통해 물건을 구경하던 카르한이 멈춰 섰다. 공책이나 펜, 잉크 같은 문구류를 파는 가게였다.
“들어가 보지요.”
클리프 또한 관심을 가지며 카르한을 이끌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갖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천천히 진열대를 살폈다. 유리 잉크병, 세공이 들어간 펜촉, 화려한 편지지…….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 돌아갈 정도로 다양했다.
한참 구경하던 카르한의 눈이 멈추었다. 짙은 남색 표지에 금테를 두른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일기장을 집어 든 카르한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종이 질도 좋았고, 양쪽으로 부드럽게 펼쳐져서 편해 보였다. 전에 일기를 쓴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이거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고른 카르한은 들뜬 얼굴로 클리프를 찾았다. 가게 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작성하는 클리프가 보였다. 카르한의 시선을 느낀 클리프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매입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
클리프가 종이를 집어서 카르한에게 보여주었다. 가게 매매 계약서였다.
“가게가 일리아 취향인 것 같아서 사버렸지 뭡니까.”
클리프는 카르한의 마음도 모르고 허허 웃었다. 카르한은 조용히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게를 통째로 사는 것이 집안 내력인 듯했다.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카르한과 가게 하나를 사버린 클리프는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카르한은 괜히 초조해졌다. 왠지 다들 엄청난 걸 준비할 것 같았다.
괜찮은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금고에 돈이 얼마 있더라……. 사실 전 재산을 털어도 일리아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살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요즘 참 즐겁습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생일을 챙기는 건 오랜만이거든요.”
클리프가 한껏 미소를 머금은 채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전부 소공자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니…….”
카르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리아가 그놈이랑 헤어지고 나서 걱정 많이 했는데……, 금방 괜찮아지더군요. 전부 소공자가 곁에 있어준 덕분이지요.”
“…….”
“요즘 가족들 사이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은 쪽은 카르한이었다. 저 때문에 일리아가 실연의 상처를 회복했다니, 당치 않았다.
“분명 다른 가족들도 소공자를 인정하는 날이 올 겁니다.”
클리프는 비올레와 헤인리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 두 사람이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제가 중간에서 힘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영문도 모르고 일단 인사했다.
“아참, 생일 파티 총괄은 헤인리가 맡는다고 하더군요. 일리아에게는 비밀입니다. 깜짝 파티거든요.”
“혹시 저도 가도 되는 자리인지요?”
“물론! 이지요…….”
냉큼 입을 열었던 클리프는 조금 자신 없는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명색이 남자친구인데, 다들 이해해줄 겁니다.”
카르한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소공자는 어떤 것을 선물할 생각입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다. 아까 본 일기장만큼 마음에 드는 선물이 있을까 싶었다. 그 전에 일기장보다 더 비싸고 좋은 걸 줘야 할 것 같은데…….
길을 걷던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섰다. 카르한은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골랐습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일리아의 생일날이 왔다.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긴장한 상태로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은 카르한과 달리 무척 즐거워 보였다.
“외부인이 블로든 가문 생일 파티에 초대 받은 것은 저희가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생일 연회를 열지 않았다. 가족끼리 조용히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테시온은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일리아 님의 생일이니 엄청나겠죠?”
기대에 가득 찬 테시온과 달리 카르한은 조금 두려워졌다. 헤인리의 주도 하에 준비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지, 자세한 것은 몰랐다.
마차는 드넓은 블로든 저택 정원을 가로질렀다. 창을 통해 정원을 구경하던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일리아는 생일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클리프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혼자만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왜 제게는 말해주지 않았을까. 섭섭함을 느낀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테시온의 설명처럼 가족끼리 생일을 보내려고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고개를 내저은 카르한은 제게 주어진 사명을 떠올렸다. 중요한 임무인 만큼 실수 없이 해내야 했다.
어느덧 마차는 저택 본관에 도착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생일 특유의 들뜬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조용했다.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얼마나 요란한 생일을 보낼지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갈 모양이었다.
테시온을 먼저 보낸 카르한은 본관 건물에 들어섰다. 고용인들에게 물어서 계단을 올라가니, 금방 방에서 나오는 일리아와 마주쳤다.
“카르한? 여긴 어쩐 일이에요?”
놀란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미리 외워둔 대사를 내뱉었다.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서 왔습니다.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럼…… 잠깐 정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카르한은 고민 있어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던 일리아가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본관을 빠져나와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카르한이 맡은 임무는 일리아를 호숫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실은 고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카르한은 최대한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본관에서 호숫가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기에,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야 했다. 카르한은 온갖 고민을 늘어놓았다.
“의자가 딱딱해서 허리가 아픈 게 고민인데…….”
나중에는 고민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일리아는 제법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둘이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둘이 있을 상황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문득 메즈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 후로 계속 생각했지만,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자신이 품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책으로 본 사랑은 좀 더 거창하고 위대했는데, 제 것은 형편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만약에 자신이 일리아를 사랑하게 된다면……. 카르한은 근심 어린 얼굴로 침묵했다. 일리아를 호숫가로 유인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호숫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펑!! 엄청난 굉음에 카르한이 숨을 멈추었다. 일리아 또한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넓은 하늘에 엄청난 양의 불꽃이 연이어 터졌다. 어찌나 크고 화려한지, 구름이 가려질 정도였다.
이윽고 웅장한 음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잠시 넋을 놓은 카르한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바로 했다. 장미 꽃잎이 잔뜩 뿌려진 호숫가는 마치 융단을 깔아둔 듯했다.
길목에는 양옆으로 검을 치켜든 기사들이 정렬했고, 다른 한쪽에는 고용인들이 질서 있게 서있었다. 그 옆으로 화려한 테이블과 의자, 일리아의 초상화 등이 보였다.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호숫가에 띄워진 엄청난 크기의 배를 목격했다. 배에 타고 있던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일리아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일리아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긴 했으나,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그러했듯, 조용히 케이크만 자르고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는데…….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저보다 카르한이 더 놀란 얼굴이었다.
호수 중앙에 떠있던 배의 선미 부분이 열리더니, 다리가 놓였다. 배에서 내린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일리아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눈만 깜빡이는 일리아를 보며 클리프가 웃었다.
“놀래키는 데 성공한 모양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 녀석이 기획한 거란다.”
비올레가 헤인리를 가리켰다. 평소에도 좀 적극적으로 나서보지 그러냐며 비올레가 혀를 찼다. 비올레의 잔소리를 무시한 헤인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일리아는 아직도 헤인리의 태도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저를 쌀쌀맞게 대하던 모습이 더 익숙했다. 가족들의 인사가 끝나자, 정렬해 있던 고용인들이 다 함께 소리쳤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다들 자신이 축하 받는 것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일리아는 덩달아 웃었다.
“먼저 케이크부터 자르자.”
헤인리가 일리아를 이끌었다. 배에 오르게 된 일리아는 어마어마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그중 압권인 것은 엄청난 크기의 케이크였다. 5단으로 이루어진 케이크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어도 될 정도였다.
일리아가 케이크 밑단을 조금 자르자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고 일리아는 커다란 원목 의자에 앉혀졌다. 다음 차례는 선물 증정식이었다.
가장 먼저 프란체가 나섰다.
“제가 직접 깎아서 만든 나무 인형입니다!”
“다람쥐 꼬리 정말 귀엽다. 고마워, 프란체.”
“아가씨 제 선물은…….”
고용인들이 저마다 정성 담은 선물을 건넸다. 선물을 주는 이들이 더 들뜬 얼굴이었다. 한참 만에 고용인들의 선물 증정이 끝나고, 클리프가 나섰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71번가에 위치한 가게를 네게 선물하마.”
문구류를 파는 가게 매입서였다. 일리아가 클리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자, 비올레의 차례가 왔다.
“내 선물은 북부 별장이란다.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니, 눈이 보고 싶을 때 가보렴.”
비올레가 별장 정경이 그려진 그림 한 장을 건넨 후, 일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물러나고, 헤인리가 앞으로 나섰다.
“예전에 모래를 가득 채운 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래서 황금 모래를 준비했다.”
무려 남부 소왕국에서 공수해온 모래였다. 구하고 싶어도 희소성 때문에 왕국에서 반출을 제재했다. 아무래도 모래를 구입하기 위해서 남부 소왕국과 협상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서관 4층에 가 보거라.”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번거로웠을 텐데, 저를 위한 마음이 고마웠다.
선물 증정이 얼추 끝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하필이면 제 앞에 엄청난 선물들이 쏟아져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카르한이 주춤주춤 일리아 앞에 섰다.
“일리아,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도 준비했어요?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는데…….”
일리아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카르한은 한참 만지작거리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르한. 나중에 열어볼게요.”
궁금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조금 있다가 열어볼 생각이었다. 특히 비올레와 헤인리가 관심 많아 보였다. 한참 웅장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이 잔잔해졌다. 지금부터는 식사 시간이었다.
음식은 갑판 위에 차려져 있었고, 모두들 자유롭게 배를 오가며 음식을 담았다.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백작가 사람들, 기사, 고용인들 구역은 따로 나뉘어 있었다. 대신 모든 고용인들이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음식 담는 것은 직접 해야 했다.
“일리아, 너는 앉아 있거라. 우리가 담아 갈 테니까.”
일리아가 다가오자, 헤인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멈칫한 일리아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르한은 접시 하나만 들고 고민에 잠겼다.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담아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러자 비올레가 참견했다.
“양고기 구이가 맛있어요. 내일도 훈련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죠.”
“……오늘 양배추 샐러드가 신선합니다.”
옆에서 음식을 담던 헤인리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비올레와 헤인리가 카르한의 옆에 달라붙어서 살갑게 대하자, 그 모습을 본 클리프는 그대로 멈추었다.
“아니……, 둘 다 소공자와 언제부터 친해진 거지?”
분명 싫어하지 않았던가? 혹시 나만 몰랐나? 클리프는 어리둥절하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흠흠, 디저트는 당근 케이크가 괜찮습니다.”
덕분에 카르한은 고민 않고, 추천 받은 음식을 전부 담았다. 접시를 가득 채운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시온이 프란체, 말렉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기대 많이 했는데, 역시 상상 이상입니다! 웬만한 생일 연회는 발도 못 내밀겠습니다.”
“당연하지요. 블로든이니까요. 몇 년 전에는 이보다 더 화려했습니다.”
테시온의 칭찬에 프란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한은 그쪽에 합류하려 했다. 그때, 비올레가 냉큼 카르한을 붙잡았다.
“소공자, 어디 가시나요? 저희와 함께 식사하지요.”
카르한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비올레의 뒤를 따랐다.
“많이 담아왔네요.”
자리에 앉아 있던 일리아가 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클리프와 헤인리까지 착석하자, 테이블이 북적해졌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하게 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처음 블로든 저택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카르한은 식사하기 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 파티에 초대된 사람 중, 외부인은 카르한과 테시온뿐이었다. 일부러 초청해주었다는 사실이, 카르한은 무척 고마웠다.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블로든 가문의 일원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전에 초대 받았을 때만 해도 화목하고 따뜻해 보이는 일리아의 가정이 부러웠다. 이제는 부럽기보다는 이곳에 속할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평소보다 한껏 부드러워진 카르한의 얼굴을 본 클리프가 농담 삼아 말했다.
“와주셔서 우리야 고맙지요. 그나저나 평소보다 좀 들떠 보이십니다?”
“아, 그게 제가 다른 사람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라서…….”
카르한이 조금 쑥스러워하자, 다들 멈칫했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묘한 눈으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카르한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일리아가 소리쳤다.
“많이 먹어요, 카르한!”
일리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접시를 그에게 양보했다. 그것을 본 헤인리는 음식을 좀 더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저택 요리사들이 혼신의 힘을 발휘해서 그런지, 한 입 먹을 때마다 혀가 황홀해졌다. 깔끔하게 접시를 비워나가던 카르한은 어떤 음식을 먹고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말에 일리아의 가족들은 자기가 먹은 것 중에 맛있었던 음식을 내밀기 시작했다. 묵묵한 얼굴에 생기가 돌 때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어서 그런지, 지켜보는 사람이 뿌듯해졌다.
길고 긴 식사가 끝나고, 온갖 행사가 이어졌다. 유명한 서커스단의 묘기를 본 후에 이국에서 온 무희들의 춤도 구경했다. 이쯤 되면 축제나 다름없었다.
오후부터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다. 다들 주당인지라,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해졌을 무렵. 다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했던 생일 파티가 끝난 것이다.
다들 뒷정리 하는 사이, 카르한은 별관에 들러 물건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호숫가로 돌아와 저택에 들어가려는 일리아를 불렀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산책하겠습니까?”
마침 일리아도 술을 깰 겸 바람을 쐬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목련이 줄지어 심긴 후원은 계절상 다른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저 멀리 보랏빛으로 수놓인 길이 보였다. 풍성한 꽃잎을 늘어뜨린 등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발걸음을 나란히 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속도에 맞춰서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일리아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막 일어난 사람처럼 몽롱해 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풍경이었는데, 지금껏 잊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모두가 시끌벅적한 생일을 보낸 건 간만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헤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생일날에는 리하트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저녁에 부모님이 준비해둔 케이크를 자르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아참, 선물 지금 열어봐도 돼요?”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물었다. 그가 준 상자는 손바닥 크기여서 일부러 가지고 왔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었다.
부드러운 벨벳 사이에 자수정이 총총 박힌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사방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서 그런지, 자수정 위로 푸른 물이 들었다. 목걸이를 매만지던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매일 하고 다닐게요.”
일리아는 지금 바로 목걸이를 걸어보려다가 포기했다. 구조가 약간 복잡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듯했다. 다시 상자에 넣으려는데, 카르한이 조용히 일리아를 불렀다.
“저기……. 일리아.”
일리아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속눈썹에 가려졌던 푸른색 눈동자가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처럼 어스름한 빛을 띠었다. 일리아를 두 눈에 담은 카르한이 물었다.
“제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리아는 멍하니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일리아는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 카르한에게 넘겨주었다. 천천히 뒤돌아선 일리아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희고 가는 목덜미가 드러났다.
카르한은 계속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목걸이를 해준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목걸이를 즐겨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더더욱 낯설었다.
카르한은 조금 긴장한 채 목걸이 양쪽 끝을 잡았다. 손이 워낙 커서, 목걸이 체인이 가느다란 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쪽을 잡은 채 앞으로 반 바퀴 둘렀다. 목걸이 끝과 끝을 확인한 카르한은 천천히 맞춰 나갔다. 착용 구조가 꽤 복잡했기에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카르한은 고리를 잡은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고리가 부러질 듯 활짝 열렸다. 깜짝 놀라 손에서 힘을 빼자, 그제야 적당히 벌어졌다. 휴우, 하고 카르한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자칫했으면 선물하자마자 제 손으로 부술 뻔했다.
카르한은 좀 더 집중해서 목걸이를 채웠다. 한창 끙끙대는데, 향기가 훅 끼쳐왔다. 꽃향기가 아닌 햇볕에 잘 말린 이불처럼 포근한 냄새였다.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집중하느라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간 줄 몰랐다.
그는 급히 얼굴을 물렸다. 동시에 달칵 하고 목걸이가 단단히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요?”
뒤돌아 서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분명 주변이 온통 조용한데, 제 가슴만 시끄러웠다.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뗀 카르한이 뒤늦게 대답했다.
“……다 됐습니다.”
일리아가 천천히 뒤돌았다. 어둠이 완전히 깔려오기 전의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자수정 목걸이가 존재를 드러냈다. 한눈에 반해 덜컥 사버린 목걸이답게 처음부터 일리아 것인 듯 어울렸다.
카르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손수 고른 물건을 착용한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서 다들 선물을 주고받는 듯했다.
“어때요?”
일리아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물었다. 카르한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
말하고 보니 목걸이를 칭찬한 것 같았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정정했다.
“아니, 무척 잘 어울립니다.”
진심 가득한 얼굴에 일리아는 괜히 쑥스러운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요. 나중에 거울로 한번 봐야겠어요. 그런데 계속 들고 다니던 그건 뭐예요?”
“아.”
카르한이 바닥에 내려놓은 물건을 집어서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사실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도 제 거예요?”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시기를 맞추지 못해서…….”
이전에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커프스단추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답례할 겸 양산을 구입해서 블로든 저택을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날, 리하트와 사건이 일어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그때 샀던 양산을 지금껏 주지 못한 채였다.
“이건 뭐예요?”
“뜯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선물을 받은 일리아가 리본 끈을 풀었다. 포장지가 벗겨지자, 새하얀 양산이 드러났다. 끄트머리에 달린 레이스가 인상적이었다. 카르한이 자신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미 많이 갖고 계실 것 같지만…….”
“이건 없어요.”
일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양산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리아의 취향이었다. 양산을 직접 골랐을 카르한이 상상되지 않아, 일리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시 강매 당해서 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카르한은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은근히 뿌듯해 보이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점원이 다른 걸 추천해주긴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일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거절했을 카르한을 상상했다. 거절을 못해서 강매 당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카르한의 손에 들렸을 때 작아 보이던 양산은 일리아의 손에 들어오니 크기가 적당했다. 일리아는 양산을 이리저리 살피다, 한번 펼쳐보았다. 움푹한 그릇처럼 둥글게 펼쳐진 양산은 가볍고 튼튼해서 들고 다니기 딱 좋았다.
“햇볕이 점점 뜨겁던데, 잘 쓸게요.”
일리아는 다시 양산을 접어서 손에 쥐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준 커프스단추 달아 봤어요?”
“아까워서 아직은…….”
착용한다고 닳는 소모품도 아니지만, 그것마저도 아까운 듯했다. 그의 마음을 알듯도 했기에 일리아는 더 이상 별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멀게만 느껴지던 등나무 터널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백작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일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려고 생각했거든요. 괜히 말했다가 부담 줄까 봐 그랬어요.”
“오히려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선물을 챙길 수 있었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카르한은 생일이 언제예요?”
“저는 겨울이 생일입니다.”
이제 초여름이 오고 있었다. 겨울이 오려면 반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기다렸다가 그때 축하해줄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함께할 수 있음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등나무가 양옆으로 펼쳐진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보랏빛 커튼을 촘촘히 달아둔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하늘을 뒤덮었다.
“요즘 계속 당신이 날 피한다고 생각했어요.”
툭 던져진 한마디에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춰 선 일리아가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혹시 나 피하는 거 아니죠?”
카르한은 냉큼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일리아를 피해 다녔으니 말이다.
“내가 뭔가 실수했어요?”
“아닙니다.”
그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피해 다녔다고 묻는다면 카르한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스스로도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와 일리아의 머리카락에 앉았다. 그것을 본 카르한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굽이치는 금빛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던 꽃잎이 떨어져 나가, 아주 느리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카르한은 홀린 듯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황혼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는 초저녁과 밤의 경계를 품은 듯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눈동자를 통해 한 폭의 풍경을 보았다. 다시는 저것보다 더 황홀한 장면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얽혀드는 시선 깊은 곳에서 거대한 파도가 한껏 밀려왔다. 흠뻑 빠져버릴 것 같아서 두렵지만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꽃잎은 어깨에서 허리로, 무릎으로…… 마침내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로 늘어진 등나무 꽃잎이 몇 장 더 떨어졌다. 기밀하고 촘촘해서 무엇도 침입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꽃잎 하나가 내려왔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단단히 얽혀들었던 눈빛이 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구 뛰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누군가 제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카르한은 물속에 잠겼다 나온 사람처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먼저 가십시오.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일리아는 괜찮으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리는 핑계라는 걸 알아챈 눈치였다.
“멀리 안 갈 테니까 천천히 와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자, 카르한은 품에서 급히 약통을 꺼냈다. 물도 없이 알약을 씹어 삼켰다. 숨을 천천히 내뱉어도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던 그는 멀어져가는 일리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발치를 휘돌던 바람이 하늘로 치솟더니, 세차게 내리꽂혔다. 주렁주렁 달린 등나무 꽃잎이 보랏빛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시야를 가리는 어마어마한 꽃비에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꽃잎이 머리와 얼굴을 스치는 감각이 생생했다.
서서히 바람이 멎고 허공을 맴돌던 꽃잎이 바닥에 전부 내려앉았을 때. 카르한은 서서히 눈을 떴다. 사방이 온통 어둑했다. 잔잔하게 깔려있던 황혼도 전부 물러나고 없었다. 빈틈없이 바닥을 메운 꽃잎이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유독 선명한 한 사람이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쏟아지는 꽃잎을 막기 위해 양산을 쓴 일리아가 뒤돌아 선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쿵, 가슴 언저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카르한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놓쳤다. 알약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빈 약통이 꽃잎 위를 뒹굴었다.
어째서인지 메즈라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젠가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날이 온다면…… 그때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은 간혹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지금처럼.
그리고 그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가 이름을 불러왔다.
“……카르한?”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이었다.
***
에반테온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도서관보다 조용했다. 문밖에서 간간이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구석에 처박혀 앉은 카르한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뜨거운 숨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얼굴부터 목덜미, 귓불, 어디 할 것 없이 뜨거웠다. 만약 지금이 환한 대낮이었다면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들켰을 터였다.
“…….”
아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마차에 올라탔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그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껏 아닐 거라고 외면하고 부정해온 감정이었다. 일리아를 향한 마음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한편으론 계속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어질까 봐.
그러나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지만, 모래알처럼 조금씩 쌓이다 자각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려서, 부정할 수 없도록 말이다.
카르한은 이제 자신이 품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는 평생 사랑을 모를 것이다.
“차라리 계속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일리아를 향한 감정은 감히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요구할 수도, 바랄 수도 없는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받기만 해온 주제에, 감히 사랑을 갈구할 생각을 하다니 염치도 없지. 형태 없는 목소리가 자꾸만 카르한을 괴롭혔다.
카르한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리아는 이름뿐인 후계자에 불과한 저를 거둬준 사람이었다.
여러 이유로 아직까지 가짜 연인인 척하고 있을 뿐, 처음부터 계약으로 얽힌 이 관계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사욕 때문에 일리아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한참 구석에 웅크리듯 앉아있던 카르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렸다.
카르한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밤중이라 정원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현관에 달린 등불이 그나마 건물 앞을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카르한은 안으로 들어가기 머뭇거려졌다. 아까 먼저 집으로 돌아간 테시온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직도 얼굴에 열기가 가지 않았기에,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한참 바람을 쐬던 카르한은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단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게 들어오는구나.”
레베타가 가벼운 팔짱을 낀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대로 얼어붙었던 카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계속해서 제 존재를 알리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허튼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매서운 눈빛이 카르한에게 꽂혔다. 카르한은 긴장한 상태로 침묵했다. 매일같이 블로든 저택을 방문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의심을 살 법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수업 받는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블로든 백작부부도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고용인도 대동하지 않은 레베타가 램프 하나만 든 채 한 걸음씩 내려왔다. 퍼져 보이던 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레베타가 카르한 앞에 멈춰 섰다.
“네 본분을 망각하지 말거라. 곧 있으면 블레어드가 돌아올 테니.”
카르한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블레어드 에반테온. 에반테온 공작가의 장남이자, 진짜 후계자. 카르한이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수도로 귀환했을 때, 그는 이미 외국으로 도망친 후였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자는 잔상처럼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대놓고 카르한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레베타와 달리, 블레어드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역겨우니 꺼지라는 소리를 내뱉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카르한은 블레어드와 친해지고 싶어서 열심히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형제가 아닌 경쟁자로 여기고 끝없이 경계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상냥한 형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가차 없었다.
언어폭력은 당연했고, 가끔씩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창고에 갇혔을 때였다.
-내가 열어줄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내일은 함께 놀아주마.
거의 쓰이지 않는 창고에 들어가 얌전히 기다렸다. 한두 시간만 참으면 내일은 형과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냥 설렜다.
시간이 한참 지나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왔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응시하던 카르한은 깨달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블레어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카르한은 열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저택과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추위가 몰아쳤다. 카르한은 덜덜 떨면서 잘못했으니 열어달라고 울며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지나가던 고용인이 창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카르한은 지금쯤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 후로 카르한은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방에는 항상 램프를 켜두거나, 오르골 상자를 열어두었다.
오래전 일을 떠올린 카르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네가 할 일이라고는 블로든과 빨리 약혼하는 것뿐이다.”
서늘한 눈으로 카르한을 살피던 레베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쪽도 꿍꿍이가 있어서 널 선택했겠지만. 그러니 들키기 전에 약혼을 서둘러야지.”
레베타는 일리아가 스텔라와 마찬가지로, 공작부인이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카르한과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드가 돌아오면 후계자 자리를 내놓아야 할 테니, 그 전에 약혼식을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만났던 일리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델로타처럼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많은 모양이야.”
“그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침묵하던 카르한이 처음으로 대꾸하자, 레베타가 멈칫했다. 그녀는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카르한을 살폈다. 저를 내려다보는 단단한 눈빛을 마주한 레베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망설임 없이 손을 올린 레베타가 카르한의 뺨을 후려갈겼다. 피부를 내리치는 매서운 소리가 중앙 홀 구석구석에 전해졌다. 레베타는 고개가 살짝 돌아간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막상 뺨을 맞은 카르한은 덤덤했다. 일리아에 대한 모욕을 듣는 것보다 이쪽이 편하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흥분을 가라앉힌 레베타가 차게 웃었다.
“블로든이 진심으로 널 사랑할 것 같으냐.”
카르한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레베타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미인 나조차 이렇게나 네가 끔찍한데.”
그녀는 지금 카르한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순진하고 맑은 얼굴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시치미 떼던 모습. 아직도 새만 보면 난자된 사체가 생각나서 깜짝 놀라곤 했다. 레베타는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홱 뒤돌아서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레베타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녀가 내뱉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진심으로 널 사랑할 것 같으냐.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캄캄한 중앙 홀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생일 파티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저택 사람들은 아직도 그날을 벗어나지 못한 듯 들뜬 모습이었다. 일리아 또한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잦았다. 물론 그들과 다른 이유였다.
정작 생일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오직 그날 밤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황혼이 잔잔히 밀려오는 초저녁, 카르한과 함께 걷던 후원. 꽃이 만개한 등나무와 불어오는 바람.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날 본 꽃비처럼 끝없이 쏟아졌다.
일리아는 요즘 카르한이 저를 피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카르한과 눈을 마주했을 때, 하려던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동자는 무척 깊었다. 여름 호수처럼 깨끗하게 저를 비추는데, 속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렬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보는 듯 애틋한 눈빛이었다.
솔직히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여름 밤의 꿈 같았던 순간이 끝나고 일리아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거울 앞에 선 일리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보았다. 누가 봐도 무슨 일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
일리아는 카르한이 선물로 준 목걸이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함께 있다 보니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만 바라보는 눈빛이라거나, 다정한 태도가 일리아의 마음을 조금씩 부수어 나갔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를 서서히 깎아나가듯 그에게 끌려들었다.
그때마다 일리아는 선을 긋고,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일리아는 아직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섣불리 시작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여겼기에.
일리아는 카르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집안 사정이 있다며 며칠째 저택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 또한 어색해서 핑계를 대는 건지, 아니면 뭔가 일이 생긴 건지 괜히 걱정되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테르시안 가문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말렉이었다. 일리아는 그가 건네준 서신을 받았다. 얼마 전부터 파혼 동의서를 다시 보내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답신이 온 걸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구구절절 원망과 분노가 적혀 있었는데 핵심은 한 줄이었다. 파혼해줄 테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미친놈.”
일리아는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 분명했다.
“돈이 많이 궁한가 봐. 자존심도 버릴 정도면.”
일리아의 혼잣말에 말렉이 자신이 들은 정보를 대답해주었다.
“가족들 전체가 후작부인이 담당하던 사업에 돈을 투자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자금이 끊겨서 중단한 상태입니다.”
“그럼 아예 싹을 밟…….”
일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후작부인의 사업을 완전히 짓밟을 생각이었지만, 더 좋은 생각이 났다. 사업은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받쳐줘야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나쁠 경우에는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가장 피 말리는 것은 희망고문을 당할 때였다. 잘 될지 안 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 자꾸 이어지는 것이다.
일리아는 지금껏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쓰다가 끝내 빚더미에 오르는 이들을 여럿 보았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일리아가 말렉에게 말했다.
“후작부인 사업, 어떻게 되었는지 좀 알아봐.”
“예?”
말렉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일리아가 태평히 대답해주었다.
“지금껏 다들 내 돈으로 푹신한 침대에서 잤잖아. 이제 길바닥에서 자는 법을 배울 때지.”
***
생일 이후로 집에 박혀 있던 일리아는 오랜만에 외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비올레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네게 사업을 맡겨볼 생각이란다.
사업을 물려받기로 매듭지은 후, 일리아는 틈틈이 경영 공부를 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경영에 참가하지 않고 있어, 후계자라는 이름을 내밀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상단을 맡길 수는 없으니, 가게 운영부터 시작해보자꾸나.
-이미 가게를 운영 중인데요?
-그럼 매출표 뽑아오거라.
일리아는 매출표를 뽑아왔고, 그것을 확인한 비올레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나치게 잘 되잖아?
대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가게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일리아의 재물운을 알고 있음에도, 숫자로 보니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부 기존 가게를 인수한 거지?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전부 있던 가게를 매입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직접 참여해보렴.
무엇을 팔 건지, 매장 위치와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비올레는 온전히 일리아의 손으로 만들어낸 가게를 요구했다. 그래서 오늘 일리아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어떤 가게를 운영할지 구상해볼 생각이었다.
마차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니 여러 상념이 밀려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리하트도 생각났다.
‘돈을 주면 파혼해주겠다고?’
서신의 내용을 떠올린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구질구질하다 못해서 진절머리가 났다. 돈에 환장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일리아는 오랜만에 지나간 과거를 끄집어내고 후회했다. 돈보다는 리하트와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이 아까웠다. 혼자 바보같이 좋아했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정작 약혼자라는 놈은 저를 물주로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속으로 열심히 욕설을 내뱉은 일리아는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막 강가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리하트와의 첫 인연이 생각났다.
황궁에 놀러갔다가 물에 빠졌던 날, 원체 정신이 없어서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찢어진 책처럼 단편적인 것만 떠올렸다. 물에 빠진 저를 끌어당기던 커다란 손……. 저를 구해준 사람이 리하트였다는 것도, 나중에 가족들이 말해줘서 알았다.
만약 리하트가 저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를 운명의 상대라고 믿었을 일도 없었을 테고, 얽힐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추 돌려줘야 하는데.’
일리아는 서랍장에 고이 보관해둔 단추를 떠올렸다. 그날 집에 돌아가고 보니 단추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대다가 리하트의 단추를 뜯은 것 같았다.
일리아는 그 단추를 보물처럼 여겼다. 보는 것도 아까워서 가끔씩만 꺼내놓곤 했다. 나중에 리하트의 바람을 알게 된 후, 일리아는 그와 연관된 모든 물건을 처분했지만 단추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리하트에게 직접 돌려주면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지난 탓에, 남아 있던 감정은 찌꺼기 하나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냥 버리자.’
일리아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리하트를 어떻게 거지꼴로 만들지 고민하는 쪽이 나았다.
빈털터리가 되면 변호사도 제대로 고용할 수 없을 테니, 재판을 걸어 파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바람피운 증거도 생겼고, 승소하기까지 몇 년씩이나 걸리진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당장 파혼을 서두르지 않는 까닭은 에반테온 공작부인 때문이었다. 리하트와 파혼하고 나면 그녀는 카르한과의 약혼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카르한을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전에 카르한이 입지를 다지고 발언권도 얻어야 했다.
“근래 에반테온 소공자께서 통 오시질 않는군요.”
말렉의 말에 마차 창가에 기대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프란체가 냉큼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겠죠? 이번에 오시면 검을 겨뤄보고 싶었는데…….”
“일이 바쁜 모양이야.”
일리아의 대답에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말렉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날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요즘 한숨도 자주 쉬시고 혼잣말도 느신 것 같아서…….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정곡이 찔린 일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한참 만에 일리아가 대답해주었다. 그 말처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밤에 둘이서 산책한 것이 전부였다. 어색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아직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한 까닭은…… 그날 본 카르한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 탓일 터였다.
어느덧 마차가 멈춰 섰다. 일리아는 가장 먼저 클리프가 생일에 선물해 준 문구 가게에 들렀다.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채광이 잘 들어와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가게를 구경하던 일리아는 일기장 하나를 집었다. 남색 표지에 금테가 둘린 고급스러운 일기장이었다.
“괜찮은데?”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얻게 된 일리아는 가게를 나와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길을 걷다 보니 유행의 변화가 한눈에 보였다. 한창 반짝하고 인기 많던 가게는 한산했고, 몇몇 가게는 아예 다른 업종으로 바뀐 상태였다.
골목 구석구석 다니니 제법 괜찮아 보이는 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위치 때문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한참 돌아다니던 일리아는 소품 가게를 발견했다. 온갖 잡화를 파는 가게였는데 분위기가 독특했다. 일리아는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더 특이했다. 도서관처럼 기다란 책장 모양의 진열대가 주르륵 놓여 있었다. 진열대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제작자의 성명인 듯했다.
‘공간을 빌려주는 건가. 제법 괜찮은데…….’
여러 작가의 물건을 위탁받아 판매하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물건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때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일리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겉에 문양이 새겨진 데다가 뚜껑이 색색의 유리로 덮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모양새라,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옆에서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덩달아 고개를 든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동시에 물건을 집은 상대는 다름 아닌 스텔라 델로타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먼저 상황을 파악한 스텔라가 한쪽 팔로 허리를 짚었다.
“블로든 영애 아니에요?”
티파티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에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쩜 많고 많은 가게 중에서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스텔라를 가볍게 훑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안색도 눈에 띄게 나빠 보이는데, 왜 굳이 외출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일리아는 스텔라를 무시하고 물건을 집으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빽 소리쳤다.
“그거 먼저 눈독 들인 건 나거든요?”
“잡은 건 내가 더 빨랐어요.”
“웃기지 말아요.”
스텔라가 지지 않고 손을 뻗어 물건을 붙잡았다. 양쪽에서 당기는 힘이 팽팽해졌다. 일리아와 스텔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앙숙인 그들이었기에, 지금 이건 물건을 갖고 싶은 것보단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손님……!”
소란을 듣고 온 가게 주인이 일리아와 스텔라를 불렀다. 일리아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물건이 스텔라의 손에 넘어갔다. 스텔라가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자, 일리아가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원래 가격의 10배에 살게요.”
일리아가 돈으로 승부를 보자, 스텔라가 냉큼 외쳤다.
“고작 10배로 뭘 하려고요? 30배에 팔아요!”
“그럼 100배.”
경매로 변질되자, 가게 주인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식하게 돈으로 밀어붙이다니…….”
스텔라는 정해진 결말을 알고 있었다. 돈으로 일리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바들거리던 스텔라가 의미 없는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150배!”
“200배.”
“그럼 300배!”
스텔라가 홧김에 외친 금액에, 일리아는 물건을 다시 확인했다. 사실 처음부터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물건은 아니었다. 내부를 살펴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저 물건을 300배까지 지불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였다.
‘때로는 지는 게 이기는 걸 수도 있지.’
일리아는 마음을 돌려 먹었다. 델로타 가문을 상대로 가위바위보도 지지 말라고 했지만, 저걸 300배 주고 사는 게 지는 거였다. 만약 정말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다면 물러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요. 내가 양보할게요.”
일리아가 물러서자, 스텔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얘가 왜 이러지?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무슨 꿍꿍이예요?”
“정말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한 번쯤 양보하려고요.”
“……언제부터 양보씩이나 했다고!”
“싫으면 말고요.”
일리아가 말을 바꿀까 싶어, 스텔라는 냉큼 물건을 품에 안았다.
“후회하지 말아요.”
스텔라가 입꼬리를 비죽 올린 채 경고했다. 일리아는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300배 주고 사면 후회할 것 같은데.’
뭐, 저쪽도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으니 걱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스텔라는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뒤돌아섰다. 계산대를 향해 걸어가는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지던 때였다.
박자를 맞춘 구둣발 소리가 끊기더니, 그녀의 걸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일리아는 스텔라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허물어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바닥을 울리는 소리에 일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가씨!”
입구에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계산대 앞에서 지켜보던 가게 주인도 다급히 다가왔다.
일리아는 곧바로 무릎을 굽혀, 스텔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그 아래로 비쩍 마른 몸이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문득 스텔라가 주최한 티파티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쿠키 하나를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정원 구석에서 구토하던 모습.
‘아무래도 이건…….’
한숨을 내뱉은 일리아가 명령했다.
“일단 우리 가문 병원으로 가자.”
***
델로타 백작가는 대대로 부유하기로 이름이 난 가문이었다. 제국에서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부유한 가문을 꼽을 때면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블로든은 델로타를 뒤따라오는 2인자였다.
두 가문의 영애인 스텔라와 일리아는 늘 비교 대상에 올랐다. 똑같은 신분에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가문, 거기다 엇비슷한 환경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스텔라는 일리아를 상대로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정점에 서 있는 것은 델로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블로든이 치고 올라오더니, 결국 역전되고 말았다. 비등비등하게 힘겨루기 하던 중 블로든이 델로타를 뛰어넘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일리아와 비교 당하는 것은 스텔라의 일상이었다.
-블로든 영애와 동갑이라지요?
-블로든 영애에 비하면…… 으음.
스텔라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뒤에서 일리아를 언급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교는 블로든이 델로타를 확실하게 앞질러 나가면서 더욱 심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선명하게 와 닿았다. 스텔라 델로타에게는 늘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무엇을 할 때마다 일리아의 이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자존심 강한 스텔라는 일리아를 이기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춤, 공부, 예법, 사교까지……. 그러나 번번이 일리아라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히곤 했다.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스텔라는 일리아가 원망스러워졌다. 동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부터 스텔라는 탐욕을 드러냈다. 재능으로 이기지 못하면 가진 거라도 빼앗아야 했고, 일리아가 눈독 들인 것은 자신이 먼저 가져야 성미가 풀렸다.
그러나 일리아는 스텔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치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성격 나쁜 계집애.
스텔라는 자신만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것이 억울했다.
일리아의 뒤만 쫓는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일리아에게 약혼자가 생겼다. 일리아는 약혼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인지, 착하고 얌전한 척하기 바빴다. 스텔라는 그것이 무척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장담했지만, 일리아의 착한 척은 계속 진행되었다. 말수도 적어졌으며 말을 걸어도 가만히 웃고 말았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일리아의 존재감은 점점 흐릿해져갔다. 가만히 있어도 사교계의 주인공이던 그때의 일리아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사이 스텔라는 좋아하던 소설의 여주인공을 따라 하기 위해 살을 뺐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더니, 스텔라는 단숨에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일리아 때문에 늘 조연에 불과하던 스텔라는 비로소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즐거움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이 자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스텔라는 일리아가 언제 다시 자신의 자리를 넘볼지 몰라서 불안하기만 했다.
강박관념에 시달리듯 자기 관리에 힘쓰는 한편, 그녀는 계속해서 일리아를 넘어설 방법을 찾았다. 카르한 에반테온과의 약혼이었다. 만약 카르한과 결혼하게 된다면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될 수 있었다. 일리아보다 더 높은 신분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스텔라는 카르한 에반테온과 약혼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다행히 에반테온 가문 쪽에서도 싫지 않은 듯,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스텔라는 이 약혼이 성사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스텔라가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두통이 밀려와, 스텔라는 잠시 심호흡을 내뱉었다. 몸이 좀 괜찮아졌을 즈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화려한 벽지에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자신의 침실과 달리, 하얀 벽지에 가구도 거의 없는 방이었다. 스텔라가 누워있는 침대와 협탁 그리고 의자가 전부였다.
“꿈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스텔라는 가장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 눈독 들였던 가게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깼네.”
깜짝 놀란 스텔라가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일리아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우리 가문 병원.”
느슨하게 팔짱을 푼 일리아가 스텔라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 같아서, 스텔라는 이불만 끌어올렸다. 침대 맡에 멈춰 선 일리아가 스텔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내 앞에서 쓰러진 건 기억나? 일단 치료는 끝냈어.”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까칠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일리아가 입술을 비뚤게 끌어올렸다.
“싸가지 없는 것.”
일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텔라가 잠시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정작 험한 말을 한 일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스텔라를 슥 훑었다.
“약 끊는 게 좋을 거야.”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스텔라는 설마 하는 눈으로 일리아를 응시했다.
“무, 무슨 약?”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해봤지만, 일리아는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계속 복용하면 나중에 제대로 못 걸을 거라고 의원이 그러더라. 그리고 거기서 더 뺄 필요 없잖아.”
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일리아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부작용은 있지만, 살을 빼는 데 효과적인 약을 복용해왔다. 그러면서도 혹시 살이 찔까 두려워했고, 최근에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되었다. 약을 끊을까 고민했으나 체형이 원래대로 돌아갈까 싶어서 복용을 멈추지 못한 상태였다.
입술만 세게 깨무는데, 일리아는 지나가듯 툭 말했다.
“필요하면 내가 아는 상담사 붙여줄게.”
스텔라는 혼란스러워졌다. 항상 저를 무시하던 일리아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혹시 약점을 잡았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알량한 동정일지도 몰랐다. 스텔라는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속으로는 비웃고 있을 게 분명하면서!”
스텔라가 소리 지르자,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꾹꾹 삼켜왔던 말을 퍼부었다.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인데? 전부 네 탓이야, 내가 이렇게 된 건!!”
금방 숨이 차서 헐떡이는데, 가만히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내 탓이라고?”
“…….”
“내가 뭘 했는데.”
여전히 침착한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눈을 마주한 스텔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일리아는 딱히 제게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을.
스텔라를 벼랑까지 내몬 것은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비교였다. 스텔라는 그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내가 너보고 살 빼래? 아니면 뒤에서 네 험담이라도 했어?”
스텔라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렇게 화난 얼굴로 말을 쏟아내는 일리아는 처음이었다. 늘 웃는 낯으로 저를 무시하거나 비꼬는 모습만 봐 왔었다.
“오냐오냐도 한두 번이지. 내가 네 부모님도 아니고, 언제까지 징징거림을 받아줘야 하는데.”
스텔라는 얼어붙은 채 침묵했다. 반박해야 하는데,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스텔라는 이불만 꼭 쥐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난 네가 싫어.”
“처음으로 서로 의견이 맞네. 나도.”
냉큼 돌아온 대답에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대놓고 싫다 말한 적은 처음이었는데, 바로 받아칠 줄이야. 일리아가 제게 잘못한 점을 떠올리던 스텔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약혼자도 채갔잖아.”
“말은 똑바로 하자. 약혼 이야기만 오가고 있었을 뿐, 그냥 스토커였잖아.”
“스토커라니!”
“밤낮으로 찾아가고 따라다니는 게 스토커지, 아님 뭐야?”
스텔라는 입술을 깨문 채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한 마디도 지질 않아서 짜증이 났다. 스텔라는 쥐고 있던 이불을 내던졌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자꾸 내가 할 말 네가 한다?”
“아, 좀, 그냥 들어!”
스텔라가 발칵 화내자, 일리아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병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스텔라는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에 네가 날 도와줬다고 해서 고맙진 않아.”
일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입 모양으로 ‘싸가지.’ 하고 말한 것 같았다. 도대체 저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거람. 스텔라는 인상 쓴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도 지금껏 나 무시했잖아. 그리고 너랑 있으면 맨날 비교 당해서 짜증 난다고.”
스텔라는 자신이 지금껏 받아온 상처를 떠올렸다. 일리아는 평생 모를 열등감이었다.
“열심히 노력해도 들려오는 건 네 이야기뿐인데…….”
예절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 정도로 되겠어요? 블로든 영애께서는 이틀 만에 습득하셨어요.
눈을 꾹 감았다 뜬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전부 다 쥐고 있었으면서…… 잘난 척하고…….”
“…….”
“그래서 네가 싫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만났다 하면 시비 걸기 바빴는데, 속에 있던 감정을 전부 꺼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 말한 거야?”
조용히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나도 너 싫어해.”
스텔라가 발끈하자, 일리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는데 시비 걸고, 우리 가문 도안 훔쳐서 출시하고. 이번 티파티에 초대한 것만 봐도 나 망신 주려던 속셈이었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에 스텔라는 뜨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특히 마차 도안을 훔친 것은 범죄나 다름없었다.
물론 스텔라가 직접 시킨 일은 아니었다. 블로든 가문 디자이너가 직접 델로타 저택에 찾아와 도안을 팔겠다고 제안했고, 그걸 사들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둑질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이 찝찝했다. 스텔라는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건 안 미안한데, 도안 훔친 건 사과할게.”
고개를 뻣뻣하게 든 상태였기에 미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하지만 이건 스텔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과하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리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리하트와 협력했던 것도 그렇고…….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을 빼긴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리하트와 너무 성급하게 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쪽에서 오는 연락을 전부 무시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협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스텔라 델로타.”
조용한 부름에 스텔라가 움찔했다.
“수프는 삼킬 수 있어?”
“몰라.”
일리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스텔라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수프가 걸쭉하면 토해서.”
“그럼 최대한 묽은 수프로 준비하는 걸로 하고.”
일리아가 스텔라를 똑바로 보며 단호히 말했다.
“상담 받아.”
“…….”
“섭식장애는 심리적인 요소가 크다고 하더라.”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뱉은 일리아가 뒤돌아섰다.
“나 바쁘니까 이만 갈 거야. 쉬다가 알아서 가.”
손톱을 물어뜯던 스텔라가 조용히 물었다.
“……소문 퍼뜨릴 거야?”
“그럴 생각이었으면 저번 티파티 때 퍼뜨렸지.”
일리아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티파티 후로 제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일리아가 비밀을 지켜준 것이었다.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일리아는 그런 스텔라를 힐끗 본 후에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스텔라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뭐야…….”
얼굴이 붉어진 스텔라는 애꿎은 베개만 쥐었다.
***
카르한은 거울을 들어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부기가 많이 빠져서 외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전만 해도 붉은 자국이 가시질 않아서 괜히 신경 쓰였다. 싸워서 생긴 상처 같아서 사납던 인상이 더욱 흉흉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느릿느릿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만 더 쉴까 싶었지만, 더 이상 수업을 빠질 수 없었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유독 선명하게 남은 그날 밤. 카르한은 지금까지 품고 있던 감정을 완전히 자각했다. 이전부터 일리아를 의식해온 것도, 그녀가 불러주는 제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지던 것도……. 전부 일리아를 사랑해서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카르한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방황했다. 감정을 자각하긴 했지만, 그 후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카르한은 객관적일 정도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도움만 받는 형편에 일리아와 나란히 설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부족하기만 했다. 그런 주제에 저를 좋아해달라고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거기다 일리아가 제 마음을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이미 한쪽이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데, 어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이 관계가 변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분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카르한은 제 마음이 죽었으면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전부 사라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흘러도, 사그라지기는커녕 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
탁, 힘없이 옷장 문이 닫혔다. 나갈 채비를 마친 카르한은 조용히 침실을 나선 후 마차에 올라탔다. 창가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고요한 공간에 있으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더니, 눈꺼풀에 추를 단 듯 무겁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지……. 만약 오늘 일리아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레베타가 했던 말이 불쑥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블로든이 진심으로 널 사랑할 것 같으냐.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카르한은 눈을 꾹 감았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마차는 블로든 가문의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초여름이 달려오는 중인 듯 저 끝에서부터 짙은 녹음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방문했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정원이 적응되질 않았다. 한참을 달려 별관 현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주위를 가볍게 살폈다.
“오셨습니까.”
그러나 그를 반기는 것은 고용인뿐이었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쉬우면서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일리아를 만났더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카르한은 수업을 듣는 방에 가방을 갖다놓은 후,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블로든 가문 기사들이 한창 훈련 중이었다. 연습용 검을 고른 카르한이 합류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소공자.”
가벼운 차림을 한 비올레가 서 있었다. 카르한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비올레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대련할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은 검에 집중해서 잡념을 떨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연무장 가운데에 섰다. 훈련하던 기사들이 잠시 멈춘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검을 고쳐 쥔 카르한이 심호흡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비올레와 몇 번이나 붙었으나,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체격과 힘의 차이가 뚜렷한데, 실력으로 전부 상쇄한 것이다.
마주 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맞부딪친 검이 날카로운 음을 연주했다. 공방이 빠르게 오갔다. 그러나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비올레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흔들리는 칼날 끝을 본 비올레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을 휙 거두었다. 카르한이 당황해하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는 것 같군요.”
뜨끔한 카르한이 서서히 검을 내려놓았다. 비올레는 그런 카르한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을 이었다.
“검에서 복잡한 상념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어요. 혹시 그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카르한은 침묵했다. 뒤늦게 사랑을 깨달아서 방황하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상대는 짝사랑 상대의 어머니였다.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비올레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소공자.”
나직하나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 연무장에서만큼은 당신을 내 제자라고 생각해요.”
“…….”
“스승으로서 제자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카르한의 입매는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올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해결이 안 되는 고민거리라면 부수는 것도 해답이에요.”
카르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르한의 고민거리는 일리아였기 때문에.
“……그건 안 됩니다.”
열심히 머리 굴리던 카르한은 한숨을 삼켰다. 마땅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에 재능이 없어서 오히려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실은 제가…….”
카르한은 아주 어렵게 입을 뗐다.
“일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비올레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카르한이 우물쭈물했다.
“계속 이 감정이 뭔지 몰라서 답답했는데, 얼마 전에 깨닫게 되어서…….”
고백하고 나니 귀 끝이 붉어졌다.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카르한을 쳐다보던 비올레가 한쪽 팔을 허리에 짚었다.
“아니, 그럼 진심으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교제한 건가요? 둘이 연회에서 첫눈에 반해서 교제했다면서……?”
카르한은 말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일리아와 카르한을 연인 사이라고 알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계약 연애를 그만두지 못한 탓이었다.
“일단 검 들어요.”
어느새 비올레는 검을 단단히 쥔 상태였다. 카르한은 긴장한 상태로 검을 들었다. 그 후로 카르한은 비올레에게 열심히 굴려졌다. 말만 대련이지 실컷 얻어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참 후에 카르한이 잔뜩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비올레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제라도 좋아하게 되었다니까 여기서 끝낸 거예요.”
만약 마음이 식었다는 둥 괘씸한 이야기가 나왔더라면 진즉 쫓아냈을 거라고 말한 뒤, 비올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처음에는 둘이 서로 마음도 없는 상태에서 교제를 시작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카르한이 먼저 일리아를 좋아하게 되었고 말이다.
하긴 일리아가 갑자기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며 덜컥 카르한을 소개해준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듯했다. 뭐, 귀여우니 봐줄까…….
사실 이 정도로 마무리한 것은 카르한에게서 어떠한 사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탐욕을 드러내던 리하트와 달리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바라는 게 딱히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본인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일리아를 바라볼 때 카르한은 늘 애정 어린 눈이었다. 비올레 또한 일리아의 남편감으로 카르한 정도면 괜찮다고 내심 생각하기도 했고 말이다.
흙먼지를 털어낸 비올레가 바닥에 주저앉은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뭐가 고민이에요?”
카르한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눈을 내리깐 카르한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제가 좋아할 자격이 있을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좋아하는 데 자격이 어디 있나요.”
“……!”
“그렇게 땅 팔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표현해요! 지레 혼자 겁먹지 말고.”
비올레는 손에 들린 검을 힐끗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예요.”
비올레의 외침에 카르한은 잠시 멍해졌다. 그런 카르한을 보며 비올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긴 것만 곰인 줄 알았는데, 성격까지 물렁한 곰이었잖아.”
전장의 악귀니, 성격이 더럽다느니, 제멋대로 군다느니……. 도대체 그딴 소문은 누가 낸 건지. 혀를 차던 비올레가 단호히 말했다.
“소공자, 곰처럼 굴지 말고 여우가 되어요.”
“예. ……예?”
카르한이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달리, 눈을 순하게 깜빡였다.
“적극적으로 나서보란 말이에요. 너무 대놓고 말고 은근하게.”
무척 어려운 요구 사항이었지만, 카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았다. 그제야 비올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도 소공자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니 교제하는 거겠죠.”
카르한은 침묵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열심히 해봐요.”
비올레는 언제 몰아붙였냐는 듯 짤막한 응원을 남긴 채 연무장을 떠나버렸다. 멀어져가는 비올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어찌 되었든 비올레는 카르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포기하라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채찍질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조각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저 하늘처럼 머릿속이 화창해졌다. 복잡하기만 하던 마음이나 걱정도 떠나간 상태였다. 지금은 그저 일리아가 보고 싶었다.
카르한은 수건으로 땀을 닦은 후에 간단히 몸을 씻었다. 별관으로 향하던 카르한은 일단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부담 주고 싶지는 않으니, 조금씩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나아갈 뿐, 받아주는 것은 일리아의 몫이었다. 그러는 동안 부족한 점을 메워나가며 일리아와 나란히 설 자격을 갖출 생각이었다. 비올레가 해준 말을 천천히 곱씹던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여우가 되라는 건 뭐지…….”
비유 같은데, 여우의 습성에 특별한 점이 있나? 지금까지 본 여우들은 그냥 짐승이던데. 아무래도 나중에 집에 돌아가기 전에 서점에 들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한은 별관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 현관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일리아였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