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이른 아침, 헤인리는 황궁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헤인리는 품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미간을 좁혔다. 직접 작성한 사표 봉투 때문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도 정돈했다.
“안녕하십니까.”
헤인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사마저 특별하게 느껴졌다. 복도를 쭉 걸어간 헤인리는 팻말에 ‘제2행정부서’라고 적힌 문을 열었다.
일찍 도착했더니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은 헤인리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테르시안 후작을 만나러 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헤인리는 책상 위에 올려둔 자그마한 초상화를 확인했다. 어릴 적의 일리아가 환히 웃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며칠 전, 술을 잔뜩 먹고 집으로 돌아가 일리아와 대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리아가 자책하기에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좀 더 제대로 달래줄 것을 그랬다.
헤인리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후작이 출근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사무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인리 블로든 님 계십니까?”
이름이 불린 헤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비친 사내가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내였기에 헤인리는 의아해하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사내는 복도를 걸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복도 귀퉁이에 멈춰 선 그가 등을 돌려, 헤인리를 마주 보았다.
“유보되었던 승진은 한 달 뒤에 처리될 겁니다.”
“……예?”
예상치 못한 말에 헤인리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직 술이 덜 깼나? 하고 얼떨떨해하는데,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를 다녀오시라는 전언입니다.”
“그게 무슨…….”
헤인리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 사내를 쳐다보았다. 테르시안 후작이 대놓고 승진을 막았는데, 갑작스레 마음을 바꿨을 리 없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누가 보낸 사람이지? 그런 헤인리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사내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저를 소개했다.
“저는 에반테온 공작 각하의 비서관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헤인리가 멈칫했다.
“그럼 이만.”
사내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후 곧장 자리를 떴다. 우두커니 홀로 서 있던 헤인리는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에반테온 공작이라니. 공작과는 어떠한 친분도 없는데, 어째서 그가 나섰단 말인가.
“……카르한 에반테온.”
헤인리는 뒤늦게 카르한을 떠올렸다.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는 카르한은 에반테온 소공자이자 후계자였다. 아무래도 그가 아버지인 에반테온 공작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헤인리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저를 도와주다니……. 물론 일리아 때문이겠지만, 지금까지 카르한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복도에 홀로 서 있던 헤인리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 그사이 출근한 사람들이 헤인리를 힐끔거렸다. 헤인리는 바로 제 옆 책상을 쓰는 이에게 물었다.
“후작께서는?”
“아직 출근하지 않으셨습니다.”
헤인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가방을 챙겼다. 오늘부터 휴가를 받았으니 당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어…….”
옆자리에 앉은 이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헤인리가 고개를 들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어제 후작님께서 공작 각하의 집무실로 불려 가는 걸 봤습니다.”
“…….”
“얼굴이 완전히 해쓱해져서 돌아오셨거든요.”
그래서 오늘 출근 안 할지도 모른다고 그가 말해주었다. 잠시 말이 없던 헤인리는 대답 대신 환히 웃어 보였다.
데구르르, 톡. 처음 보는 헤인리의 환한 미소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치고 말았다.
***
일리아는 온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헤인리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현관이 훤히 보였다. 현관에 세워진 마차가 무척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헤인리의 마차였다.
“……!”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퇴근하기엔 너무 이른 오후였다. 설마 오늘 사표를 내고 온 건가 싶어, 일리아는 곧장 현관으로 내려갔다.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일리아는 중앙 홀로 들어오는 헤인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라버니!!”
다급히 내려오는 일리아의 모습에 헤인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일리아!”
순간 일리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단숨에 다가온 헤인리가 일리아를 붙들었다. 헤인리의 품에 반쯤 안긴 일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번쩍 든 채 물었다.
“원래 이 시간에 오지 않으시잖아요. 설마 사표 내고 오신 거예요?”
“휴가를 받았다.”
“……네?”
헤인리는 일리아를 똑바로 세워주었다. 주위를 둘러본 헤인리가 조용히 제안했다.
“잠깐 정원을 걸을까?”
일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만개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걷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일리아는 괜히 불안해져서 손톱으로 손바닥만 지그시 눌렀다. 정원을 거닐던 헤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사히 승진하게 되었다.”
그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홱 들었다. 헤인리는 옅게 웃고 있었다.
“네 덕이야.”
“제 덕이라뇨……?”
“에반테온 공작이 직접 나섰거든. 네가 소공자에게 말한 거 아니냐.”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헤인리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날, 카르한이 벽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서 배웅도 못 해주었다.
일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럼 카르한이 대화를 듣고 에반테온 공작을 찾아간 걸까. 하지만 카르한은 가족들과 사이가 나빠 보였는데…… 공작이 순순히 들어줬을 리가.
“그래서 소공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구나.”
“……그게.”
일리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니, 카르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
덩달아 멈춰 선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리아의 안색이 평소에 비해 창백해 보였다. 사표 이야기를 꺼낸 후로 계속 저를 걱정하더니,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헤인리는 회상에 잠겼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조용한 속삭임에 일리아가 생각을 멈추고 헤인리를 마주 보았다. 왠지 쑥스러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온화한 얼굴이었다. 헤인리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뚝뚝하게 굴어서, 상처를 많이 입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사실 그동안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일리아가 리하트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헤인리는 일리아에게 많이 실망했다. 말 잘 듣던 착한 동생이 저와 싸워 가면서까지 리하트와 만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일리아가 원망스러웠지만, 계속 걱정했고 행보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리하트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까 싶어, 일부러 본심을 숨기고 차갑게 굴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서먹해진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전처럼 대하고 싶은데, 그때는 어떤 식으로 일리아를 대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계속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리고 일리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날부터, 비틀어졌던 관계가 조금 회복되었다.
사이가 괜찮아졌다 한들 아직도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미처 다 허물어지지 못한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그 한 발자국이 어려워서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헤인리는 언젠가 자신의 진심이 통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잠깐의 침묵이 맴돌고, 헤인리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서먹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제야 속으로 계속 해왔던 생각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매몰차게 군 건 본심이 아니었어.”
헤인리는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듯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에 많이 상처 받았을 테지.”
걱정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독설로 상처를 주었다. 가족이니 이 정도 참견은 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듣는 상대에게는 벽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부 잘못했다.”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일리아가 저를 이토록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뻔했다. 저만이 일리아를 걱정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참 멍하니 헤인리의 말을 듣던 일리아가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선명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물안개가 낀 것처럼 잠시 흐려졌다.
“저를 위한 거였잖아요. 제가 오라버니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어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전부 일리아를 위해 쓴소리 한 것뿐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헤인리는 곧바로 품을 뒤져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는 손수건을 손에 쥐여 주는 대신 직접 일리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앞으로 점차 바꾸겠다고 약속하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가 속삭였다.
“말투도 고치고…… 표현도 제대로 하고. 지금까지 못 해준 만큼 노력할게.”
“……저도요.”
일리아는 물 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와르르 무너진 벽 밖에 헤인리가 저를 보며 서 있었다.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루아침에 관계가 완전히 개선될 수는 없다 해도 괜찮았다. 이제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어색하더라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부딪치고 깨지고, 그럼에도 다시 이어붙이면서 나아갈 것이다.
일리아는 참고 있던 눈물을 모두 쏟아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던 헤인리는 조용히 일리아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그의 눈가도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한참 쏟아낸 후, 일리아와 헤인리는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함께 공유한 추억부터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헤인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일리아는 헤인리를 힐끔거렸다. 저를 볼 때마다 차가운 얼굴로 엄하게 말하던 오라버니였다. 오해가 전부 풀려서 그런지 온화하게만 느껴졌다.
‘사과하고 나서도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헤인리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어색해서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헤인리는 버릇처럼 안경을 추어올리려 했다. 손가락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어색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에반테온 소공자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구나.”
일리아는 슬쩍 눈치 보았다. 이전에 헤인리가 카르한 문제로 집을 엎었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카르한이 저택에 매일 들른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데, 왜 제게는 말하지 않았냐며 섭섭해 했었다.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게요.”
갑자기 헤인리가 찾아오면 카르한은 깜짝 놀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문득 헤인리의 마차를 보고 후다닥 숨던 카르한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얼굴이 좋아 보여.”
헤인리의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리하트 테르시안과 교제할 때는 항상 걱정이 많아 보였는데…….”
헤인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봐 왔던 일리아를 떠올렸다. 얼굴에 항상 그늘 한 자락이 드리운 듯했다. 지금 행복하다 말하면서도 표정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네가 행복하면 됐지.”
헤인리의 중얼거림에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헤인리는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내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구나.”
“그렇다고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도 안 믿어줬지만, 하고 일리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카르한을 반대하던 가족들이 점점 그의 진면모를 알아봐줘서 다행이었다. 매번 오해만 사서 속상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오늘부터 휴가니, 쉬실 건가요?”
“아니, 휴가 동안 바쁠 예정이야.”
헤인리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표 내면서 공론화하려던 후작의 비리 자료를 터뜨릴 생각이거든. 에반테온 공작이 내 뒷배라 착각하고 있을 테니, 지금이 적기지.”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거든요.”
카르한 덕분에 잘 해결되었지만,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도화선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그쪽이었다.
“오라버니 휴가 동안 저도 바쁠 것 같네요.”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유독 차갑게 빛났다. 일리아는 현관 앞에서 헤인리와 헤어진 후 별관으로 향했다. 노크한 후 방에 들어가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카르한이 보였다.
“카르한.”
뭔가 열심히 쓰고 있던 펜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울었습니까?”
“아.”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제 눈가를 문질렀다. 헤인리를 붙잡고 엉엉 울고 왔더니 얼굴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곧장 오느라 거울을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을 굳힌 카르한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리하트 테르시안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일리아는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헤인리와 이야기하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울고 왔다고 말하기는 창피했다.
일리아가 자세히 대답해주지 않자, 카르한이 입매를 꾹 다물었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걱정에 가득 찬 눈이었다.
일리아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카르한은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뚜렷했다.
“실은…….”
일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이유를 말해주었다.
“오라버니랑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이번 기회에 전부 풀고 왔어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한 일리아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아참, 오라버니 승진 건이 무사히 통과되었어요. 카르한 당신이 나서 준 거죠?”
카르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표정을 푼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일리아의 환한 미소에 카르한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은 제 몸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혹시 그 일 때문에 곤란해진 건 아니죠?”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르한이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며, 임시 후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점점 커져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요?”
“저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말씀드려 봤는데…… 해결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매끄러운 거짓말이 흘러 나왔다. 카르한은 자신이 뻔뻔하게 거짓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름이 지나거든 분쟁지역에 다녀와라.
공작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수도로 돌아온 지 반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터를 떠도는 악몽을 꾸었다.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눈앞을 가리고 이름 모를 이의 단말마가 메아리쳤다. 살려달라는 애원과 죽기 싫다는 외침.
악몽에서 깨고 나면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흔이 과거를 상기시키듯 아우성쳤다. 상처는 카르한이 하루를 더 살아남았다는 증거였다.
공작이 말한 분쟁지역은 제국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살아 나오기 어렵다는 그곳에 칼 한 자루만 가지고 뛰어 들어가야 했다. 카르한은 눈앞에 서 있는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말간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희뿌연 먼지처럼 떠돌던 끔찍한 기억이 빗물에 씻겨나가듯 점점 흐려졌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만 보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작은 희생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물론이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르한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일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온 신경이 미소에 사로잡혔다. 가끔씩 그가 웃을 때마다 가슴께가 가려웠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대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카르한이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카르한과 얼굴을 마주하던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요즘 당신이 저를 피하는 줄 알았어요.”
카르한이 멈칫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답과 달리 카르한은 슬그머니 일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
날이 화창한 오후, 일리아는 평소보다 짙게 화장을 하고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을 본 일리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가 맞은편에 앉은 말렉에게 물었다.
“내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은?”
“전부 뿌렸습니다.”
“잘했어.”
많은 연회를 물색하던 중, 일부러 규모가 큰 것으로 골랐다. 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 이제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될 듯했다.
사실 리하트 문제는 천천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실행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헤인리를 건드린 순간, 일리아는 더 이상 참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마차를 한참 타고 도착한 곳은 수도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저택이었다. 제대로 된 문지기도 없었기에 일리아는 곧바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현관이 보였다. 정원이 이렇게나 짧은 집은 처음이었다.
일리아는 현관 앞에 서서 기둥에 그려진 가문 문장을 보았다. 그날 리하트의 집에서 봤던 문장이었다. 문장을 살피던 일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이지만, 리하트가 낯선 여자와 침대를 뒹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리아는 표정 없이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오늘 일리아가 만날 상대는 바로 리하트와 바람 피웠던 여자였다.
말렉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고용인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말렉의 얼굴을 알아본 고용인이 눈을 크게 떴다.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용인이 금방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아는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 서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여자를 응시했다.
계단을 전부 내려온 여자와 일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 저택의 주인 딸인 로즈 바엘라였다.
“안녕? 나 알지?”
“다, 당신은……!”
일리아의 얼굴을 알아본 로즈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일리아가 짙은 미소를 짓자, 로즈는 당황해하며 고용인에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당장 쫓아내!”
그러나 고용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색이 된 로즈가 고용인을 재촉했다.
“어서!”
“저 지금부터 일 그만둘게요.”
“그게 무슨…….”
고용인은 곧바로 뒤돌아서서 현관을 나가버렸다. 고용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즈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아가 팔짱을 꼈다.
“봉급을 계속 미뤘나 봐? 금방 넘어오던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의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로즈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누구 없느냐!! 얼른 저 여자 끌어내!!”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깊은 적막감이 피부를 파고들어오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집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 고용인이 마지막일걸.”
“뭐……?”
“내가 돈으로 다 처리했거든.”
로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일리아는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부친이 제법 큰 빚을 졌지?”
“어떻게 그걸…….”
“내가 채권을 샀으니까 알지.”
로즈가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좁혀진 거리만큼 로즈가 한 걸음 물러섰다. 걷고, 물러서고…… 거리가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작은 저택 안은 싸구려 장식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이미 다 팔아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너를 길바닥에 앉힐 수 있어.”
“설마 보복하려고…….”
얼어붙어 있던 로즈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원해?”
가벼운 말투였지만 일리아라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로즈는 알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변명이 튀어나왔다.
“나는 정말 몰랐어…….”
“다 알고 왔으니, 피해자인 척은 하지 말고.”
일리아가 딱 잘라 말하자, 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일리아의 말처럼 로즈는 리하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장난을 시작했다. 리하트와 있으면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미한 시골 소귀족인 그녀가 수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리하트 덕분이었다.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일리아에게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로즈는 그대로 리하트에게 잘려나갔다. 아쉬웠지만 그보다 블로든에게 보복당할까 봐 겁이 났다.
다행히 일리아 쪽이 잠잠해서, 잘 넘겼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로즈는 자신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뜻밖의 말에 로즈가 눈을 번쩍 떴다. 차가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일리아가 보였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길바닥을 떠도느냐, 안락한 생활을 지속하느냐가 결정될 거야.”
일리아는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물었다.
“어때, 내 제안 들어볼래?”
***
며칠 전, 테르시안 후작이 죽을상을 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에반테온 공작에게 된통 깨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공작이 직접 헤인리 블로든의 승진을 승인해주었다고 말했다.
-둘이 접점이 전혀 없어 보였는데…….
헤인리의 일에 에반테온 공작이 나설 이유가 하등 없다며 후작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리하트는 설마 싶어졌다. 분명 카르한 에반테온은 가족들에게도 외면 받는 임시 후계자라 하였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한 눈치였고 말이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리하트는 후작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은…….
일리아가 카르한 에반테온과 교제한다고 실토하자, 후작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느냐!! 쓸모없는 놈.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그날 리하트는 길길이 날뛰는 후작에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다음 날, 후작은 황궁에 발이 묶여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후작의 비리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은 작은 불씨에 불과했다. 그러나 증거 자료들이 속속히 쏟아지고, 증언이 이어지자 불씨는 커다란 불길로 번져갔다. 더 이상 황실 측에서도 손 놓고 방관할 수 없어졌다. 결국 후작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테르시안 후작은 에반테온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후작의 위세는 점점 깎여가고, 황궁 내에서도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뇌물을 바쳤던 이들도 점점 발길을 끊었다.
그나마 든든한 뒷배인 황태자비가 이리저리 힘써준 덕에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일주일간의 근신처분과 약간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사이 리하트의 어머니인 테르시안 후작부인은 앓아누웠다. 심혈을 기울이던 사업이 망하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후작부인은 헤인리를 빌미로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도리어 역풍을 맞은 데다가, 이곳저곳에서 받아오던 자금까지 전부 끊겼다. 비올레의 연줄로 알게 된 협력 업체들이 전부 등을 돌린 탓이었다.
투자금을 회수하기엔 이미 늦었고, 계속 진행하기엔 지금까지 쏟아 부은 만큼의 돈이 필요했다.
-우리도 블로든 같은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 네 잘못이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후작부인은 리하트를 비난하고 탓했다.
그리고 시오나 또한 상황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이번 일이 잘 풀릴 거라 생각해 남편에게 무리하게 투자를 권한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거액을 빌려 어머니의 사업에 투자했는데, 이자를 갚기도 빠듯한 듯했다.
시오나는 곧바로 테르시안 저택에 찾아와 리하트에게 가지고 있는 거라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가족들에게 잔뜩 시달린 리하트는 집에 붙어있지 못하고 바깥을 나돌기만 했다.
“전부 나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았던 거면서!”
시오나와 대판 싸운 리하트는 외투를 집어던졌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가문 사람 전체가 돈, 돈, 해대고 있었다.
리하트는 잘나가던 과거가 무척 그리웠다. 일리아와 교제하던 시절, 그는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리하트를 치켜세워주었으며, 자신이 못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하트는 제가 대단해서 그런 거라 단단히 착각했다. 그것이 전부 일리아의 손으로 세운 금빛 모래성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일리아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잘못한 점이라면 바람피운 것이 전부였다. 처음이니 용서해줄 법도 한데, 일리아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그사이 새로운 남자를 만난 것으로 보아, 때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리하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요즘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비리 사건에 휘말린 것도, 어머니의 사업 건도 일리아가 꾸민 짓이 분명했다. 괘씸하고 분해서 속만 들끓었다.
“찾아가봐야 하나…….”
파혼해주겠다고 말하면 일리아도 저를 만나줄 것이다. 관계를 돌이키기엔 늦었으니 파혼을 대가로 돈을 뜯어내는 게 합리적일지도 몰랐다.
세가 꼬박꼬박 나오는 건물이라도 달라고 할까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찾아왔다. 소식통으로 심어둔 이였다.
“일리아 블로든 님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던 리하트가 고개를 홱 들었다. 지금껏 연회고 뭐고 집에 박혀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일리아였다. 정말로 연회에 참석한다면 이번이 기회였다.
“초대장 받아놔!”
리하트는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지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회 당일. 리하트는 연회에 참석할 채비를 마쳤다. 사치를 끊지 못해서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값비싼 물건은 상당수 팔아치웠지만, 혹시 몰라 남겨둔 옷과 장신구를 착용했다.
거울 앞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던 리하트는 문득 아쉬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물건을 착용하고 나갔을 터였다. 옷장처럼 쓰던 가게들도 전부 출입 금지가 되어버렸으니……. 파혼해주는 대가로 의상실을 몇 개 받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리하트는 곧바로 침실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달려, 그가 탄 마차는 연회장 근처에 멈춰 섰다. 초저녁인데도 건물 안쪽에서 환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요즘 집안 분위기가 나빠지고 돈 나갈 구석이 많아, 자중하고 있었다. 연회는 간만에 참석하는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하트는 당당한 걸음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안으로 들어선 리하트는 인사 받아줄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꿀 냄새 맡은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야 정상이었다. 그 연회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환영 받는 것이 당연했다.
너무 빨리 왔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리하트가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요즘 안 보이더니 오늘 딱 왔네요.”
“그나저나 당신, 테르시안 영식과 좀 친하지 않았어요?”
“돈 좀 쓰기에 대접해줬지, 요즘은 영…….”
“하긴 옷만 봐도……. 유행 다 지난 거네요.”
그들은 사이좋게 리하트를 헐뜯었다. 평소에 리하트를 아니꼽게 보던 이들이었다.
“블로든이랑 파혼한다던데?”
“그게 사실이었어?”
누군가의 발언에 다들 흥미진진해 했다.
“타블로이드지에 뜬 기사도 그렇고…… 블로든 영애가 에반테온 소공자랑 함께 다닌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서.”
“에반테온 소공자 이야기는 헛소문 아니었어? 그럼 테르시안 쪽은 진짜 파혼 당한 건가?”
“하긴 블로든 영애가 아까웠지.”
다들 통쾌한 얼굴로 건배하듯 샴페인 잔을 들었다.
“뭐야…….”
리하트는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을 눈치채고 그쪽에 눈길을 주었다. 제법 신분 높은 귀족 가문 자제들이었다. 그럭저럭 친분이 있었는데, 다들 평소와 달리 먼저 인사를 건네러 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먼저 인사하러 가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며, 리하트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하트가 다가오자, 다들 바쁜 척하거나 무시했다. 몇몇은 아예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띤 채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리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래? 리하트가 물어보려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후작 영식이 말을 걸었다.
“요즘 잘 보이지 않더니,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가 리하트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불쾌해진 리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리하트는 발끈한 나머지 과도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후작 영식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정말 파혼하신 겁니까?”
그가 이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잘난 약혼자 덕분에 왕 노릇 하지 않았습니까.”
리하트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사이가 나쁘긴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적은 드물었다.
리하트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재미있다는 얼굴로 관망했다. 당혹스러웠다. 저를 치켜세워주고 아첨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그때 연회장이 술렁였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하트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리하트는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 블로든이었다.
***
일리아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리하트가 있었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리하트를 마주한 일리아는 이내 눈을 돌려버렸다.
한 걸음씩 옮기자, 분홍빛 드레스가 만개한 꽃잎처럼 퍼져나갔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블로든 영애, 간만에 뵙는군요.”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이전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모두들 일리아에게 잘 보이고 싶어 꼬리를 살랑댔다. 인사를 받아주던 일리아가 미소 지었다. 한층 상냥해진 얼굴을 본 사람들은 넋을 놓고 덩달아 웃었다.
‘오랜만이라 벌써 피곤하네.’
웃고 있던 일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에 참석하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다들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보려고 눈이 발갰다. 피로했지만 사교계에 집착하던 리하트를 생각하면, 장소는 연회장이어야만 했다. 예상대로 꼼짝없이 서 있던 리하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리아.”
그가 일리아를 불렀을 때, 주위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하트를 응시했다.
“이야기 좀 해.”
잠시 테라스로 나가자는 의미였지만, 일리아는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우리 사이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나요?”
“남처럼 굴지 마. 아직 난 네 약혼자라고.”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제 편을 들어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망하는 입장이었다. 중립에 선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했다.
일리아는 진흙탕 싸움으로 함께 추락하는 것보단 철저한 피해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욕을 듣는 것보단 동정이 낫지.’
일리아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처연한 느낌을 자아냈다. 일리아는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리하트. 사실 나는…… 당신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나왔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일리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제가 지겨워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놓고…… 이제 와서…….”
리하트는 일리아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듣고 있던 이들이 리하트를 쓰레기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데요……?”
일리아가 고개를 살짝 들고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축 내려간 눈매가 불쌍하게 보이는 데 한몫했다.
“그건 오해라니까.”
리하트가 다급히 지껄였다.
“몇 번이나 해명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래?”
“다른 여자랑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는데, 오해라고요……?”
일리아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영애 하나가 리하트의 머리를 쥐어뜯듯 부채를 잡아당겼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부채 깃털이 손바닥에 잡혔다. 주위가 술렁였다. 분위기가 점점 불리한 쪽으로 흐르자, 리하트가 재빠르게 부정했다.
“내가 바람이라고? 생사람 잡지 마.”
어차피 바람 피웠다는 증거도 없었다. 비록 일리아에게 현장을 들켰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일리아뿐이었다. 증인으로 내세울 사람도 없으니,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바람 피웠다고 인정했다 한들 일리아와 저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리하트는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오히려 일리아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왜 나를 못 믿는 건데? 난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어.”
“…….”
“예전부터 계속 집착하더니 이제는 이상한 피해망상까지 생긴 거야?”
리하트가 태도를 달리하자,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리하트는 증거가 없으니 자기가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대로 잡아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지금까지 증거를 모으기만 하고 터뜨리지 않았던 이유를 모르고 저러는 것이었다.
리하트의 바람을 공론화하는 순간부터 블로든 가와 테르시안 가는 전쟁 시작이었다. 혹여나 가족들에게, 특히 헤인리에게 피해 갈까 싶어서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리하트가 먼저 헤인리를 건드린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일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약혼녀처럼 리하트에게 말했다.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아직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일리아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주위가 술렁였다. 다들 불쌍하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리하트도 지지 않았다. 그는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듯 제 가슴을 내리쳤다.
“해명해도 믿지 않으니, 내가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일리아는 손을 들어 눈가를 쓸었다. 눈물을 닦은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리하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말로…… 바람피우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물론.”
“그럼 바람을 피운 게 확실해지면 파혼해줘요.”
리하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 듣고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더했다.
“떳떳하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했다간 바람 피웠다고 낙인찍힐 판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리하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리아는 아주 잠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금방 사라졌지만, 리하트는 똑똑히 보았다.
리하트는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입을 여는 그때였다.
“리하트!”
저 멀리서 누군가가 리하트를 살갑게 불렀다. 여자 목소리에 사람들이 전부 그쪽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리하트는 여자를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왜 여기에…….”
허상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리하트가 말을 더듬거렸다. 냉큼 다가온 로즈가 리하트의 팔 한쪽을 꿰찼다. 그리고 일리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왜 둘이 같이 있어요? 헤어졌다면서요!”
연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딱 한 번 맞춰 봤는데, 연기력이 상당했다. 나중에 지방으로 내려가서 극단 배우를 해도 될 정도였다.
“이, 이 팔 좀 놓아봐.”
당황한 리하트가 말을 더듬으며 로즈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로즈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일리아를 견제했다.
“당신 아직도 파혼 안 해줬어요? 그만 좀 놔줘요.”
일리아는 곧바로 자신의 역할에 몰입했다. 충격 받은 표정으로 로즈와 리하트를 번갈아 보던 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해갔다.
“지금까지 뻔뻔하게 거짓말한 거였어?”
“나쁜 자식!”
“어서 파혼하세요, 블로든 영애!”
비난이 쏟아지자, 리하트는 힘으로 로즈를 떼어낸 후 밀쳤다.
“무슨 헛소리야. 미친 여자 같으니!”
아예 처음 보는 여자로 취급하자, 로즈가 소리를 질렀다.
“어쩜 나한테 이래요? 나 당신 몸에 있는 점 위치까지 안다고요!”
소란이 점점 커지고, 멀찍이서 관망하던 이들까지 다가왔다. 그러더니 하나둘, 여자들이 리하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리하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바람피워요?”
“요즘 연락이 없어서 설마 했더니……!”
리하트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왠지 낯이 익다 싶었더니 과거에 자신과 놀아난 여자들이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할 텐데, 윤락가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끼어 있었다.
“아니, 당신은 누구기에 남의 애인 이름을 막 불러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리하트의 진짜 애인이에요.”
리하트를 둘러싼 여자들이 자기가 진짜라며 싸우기 시작했다. 다투던 중에 리하트의 난잡한 사생활이 낱낱이 밝혀졌다. 리하트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멍하니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장 난 것 같았다.
“나는 일 년 넘게 만났다고요!”
“뭐라고요? 이런 쓰레기가!”
흥분한 한 여자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대로 리하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생생한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놀랄 틈도 없이, 너도나도 리하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밖에 없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악을 쓰던 여자가 리하트의 멱살을 잡았다. 사방에서 마구잡이로 손이 튀어나왔다. 리하트는 단추가 뜯기고 머리채마저 잡혔다. 유례없을 치정싸움은 어느새 난투극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입만 크게 벌렸다. 지금까지 겪었던 치정싸움은 발도 못 내밀 정도였다.
‘다들 적극적이네…….’
한 걸음 물러나서 관망하던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리하트가 여자들에게 원한이라도 샀나 싶을 정도였다.
한창 리하트가 쥐어뜯기고 있는데, 고용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여자들을 말렸다. 씩씩거리는 여자들이 착용하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당신이 사준 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
일리아는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나 몰래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 거예요……? 그것도 내 돈으로……?”
“블로든 영애!”
일리아가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부축해주었다.
“……저 물건들 전부 제가 사준 거예요.”
그 말에 모두가 리하트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머리와 옷이 엉망이 된 리하트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는 이 모든 게 일리아가 짜놓은 판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 판을 뒤집을 만한 패는 리하트에게 없었다. 일리아는 비웃음을 삼키며 가엾은 표정을 짓고서 물었다.
“이제 파혼해줄 거죠?”
***
비 내리는 오전이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덧칠하듯 쉼 없이 흘러내렸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정원을 감싸고, 만개한 꽃들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어제만 해도 화창하던 태양은 회색빛을 머금은 먹구름 뒤에 숨어, 희미한 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숄을 두르고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든 여인은 말없이 창밖만 응시했다. 우울한 정원의 정경은 레베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며칠 전, 그녀는 카르한이 공작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상대가 없었다.
그녀는 카르한과 더불어 남편인 에반테온 공작과도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오래전, 레베타는 정략결혼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과거의 기억은 정원을 떠도는 물안개처럼 흐릿한데, 공작과의 첫 만남은 아직도 생생했다.
-본분만 지켜준다면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도 내게 무엇도 기대하지 마시오.
불행하게도 레베타는 쌀쌀한 말을 내뱉던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서 어떠한 보답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공작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베타는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함께 살다 보면 제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철옹성 같아서, 결혼 후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중, 후계자를 만들라는 가신들의 성화에 레베타는 그와 첫날밤을 보냈다. 그날 잉태한 아이가 장남인 블레어드였다. 레베타는 아이도 생겼으니 남편이 가정에 좀 더 충실해지지 않을까 고대했다.
-아들인가.
블레어드를 처음 본 공작이 무심히 말했다.
-후계자가 생겼으니 더 이상 잠자리는 필요 없겠군.
그때 레베타는 모든 희망을 접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마음을 갈구하지 않고, 공작부인으로서의 소임에만 충실했다. 외로운 공작저에서 기댈 곳은 오직 아들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밤중, 술에 왕창 취한 에반테온 공작이 그녀의 침실에 찾아왔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레베타를 끌어안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던 레베타는 공작이 하는 대로 끌려갔다.
그는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몸을 겹쳐왔다. 그 말에 이미 제 안에서 꺼져버린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레베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다.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공작이 그딴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그대가 내 침실에 있는 거지?
레베타는 치욕스러웠다. 공작이 정부와 자신을 혼동했다는 것보다, 고작 그 하룻밤 때문에 연정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레베타는 공작을 원망하며 제 침실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하필이면 한 번의 관계로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고 말았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떼어내기는 늦은 후였다. 공작은 레베타의 임신을 불쾌해했다. 자신의 연인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한 것이다.
레베타는 눈치 없이 찾아온 아이가 야속했다. 하룻밤의 실수로 생긴 아이를 사랑해줄 자신이 없었다. 막상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제 품에 안게 되었을 때, 레베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이는 제 얼굴을 쏙 닮아 있었다.
-그래…… 너는 내 아이야.
레베타는 둘째를 마음에 품기로 결심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레베타는 관심 없어하는 공작을 대신해, 아이에게 카르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샛별이라는 뜻으로, 아이의 눈동자가 꼭 새벽녘의 샛별을 닮아서였다.
시간이 지나도 공작은 후계자인 장남과 달리 카르한을 냉대했다. 미움 받는 카르한의 처지가 마치 저 자신을 보는 듯했다. 불쌍해서 조금이라도 더 안아주려 노력하면, 카르한은 제 마음을 아는 것처럼 방싯방싯 웃어주었다.
한때 카르한은 레베타의 자랑거리였다. 착한 아들이었던 카르한이 이상해진 것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물건을 부수고 사고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귀중품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일삼았다.
-네 주머니에서 반지가 나왔는데, 이래도 아니라고 할 셈이니?
-……아니에요. 제가 안 훔쳤어요.
-방에서 반성하거라.
레베타는 다른 어머니들이 그렇듯 적절한 체벌로 훈육했다. 어린아이니 이해해주려고 했지만, 점점 도가 지나쳤다. 남편의 냉대와 카르한의 말썽으로 지쳐가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뭐 하는 짓이야!
레베타는 정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구멍을 파는 카르한에게 소리쳤다. 흠칫 놀란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서 남편의 얼굴이 짙게 보이는 듯했다.
자랄수록 남편의 얼굴을 닮아가다니……. 레베타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구제 불능이야.
카르한은 상처 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레베타는 치장하려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화장대에 난도질당한 새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깃털은 전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핏물이 사방에 튄 채였다. 레베타의 비명을 들은 고용인들과 블레어드가 먼저 달려왔다.
부축 받던 레베타는 뒤늦게 들어온 카르한을 발견했다. 카르한은 작은 새장을 든 채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제 아들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이상한 일이 반복되었다. 모든 정황이 카르한을 가리켰지만, 아니라고 발뺌하니 가증스럽기만 했다. 레베타는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자식을 의심하는 스스로가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결국 우울증까지 온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포기하고 미워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결국 레베타는 카르한을 놓아버렸다. 더 이상 안아주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느껴졌다. 미움은 증오가 되었고, 나중에는 눈앞에 두는 것조차 끔찍했다. 레베타는 공작에게 말해 카르한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에 비해 블레어드는 의젓하고 착한 아이였다. 언젠가 많이 아팠던 날이 있었다. 혼자 앓고 일어났더니 이마에 물수건이 놓인 채였다. 거기다 머리맡에는 레베타가 좋아하는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중에 고용인들에게 물어봤으나 다들 자기는 아니라며 고개만 내저었다. 이후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늘 꽃 한 송이가 문가에 놓였다. 별 것 아닐지 모르나, 레베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레베타는 당연히 블레어드가 그런 거라 생각했고, 자연스레 그를 의지하게 되었다.
“……보고 싶구나.”
레베타의 시선이 정원을 부유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먼 타국에 있을 블레어드가 그려졌다. 비록 쫓기듯이 외국으로 떠났지만, 일이 수습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사고 쳤다 한들 레베타가 보기엔 실수에 불과했다. 그 착한 아이가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죽일 리 없지 않은가. 다만 죽은 상대가 하필 백작의 외동아들인지라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그래도 백작과 합의를 보고 있었고, 막대한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카르한과 스텔라 델로타를 약혼 시키려 했다.
그러던 와중 카르한이 일리아 블로든과 교제하고 있다는 말에, 재빠르게 델로타를 버렸다. 이대로 무사히 약혼식을 치르면 합의금은 블로든 측이 마련해줄 터였다.
레베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카르한이 계속 밖을 나돌아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뭘 하고 다니나 궁금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싶진 않아서 알아보는 것을 관뒀다.
“얌전히 제 역할만 해주면 바랄 게 없는데…….”
카르한은 후계자 수업도 받지 못한 임시에 불과했다. 후계자를 공석으로 둘 수 없다는 원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주긴 했지만, 진짜 후계자는 블레어드였다. 그러니 블레어드가 돌아올 때까지는 죽은 듯이 지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레베타는 천천히 걸음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
햇볕이 잘 드는 오후, 일리아는 후원에 나와 차를 마셨다. 일리아의 옆에 선 말렉은 자신이 들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됐네.”
일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연회에서 한바탕 치정싸움을 벌이고 며칠이 지났다. 그곳에서 개망신 당한 리하트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소문은 쏜살같이 퍼져나갔고, 모두가 리하트 이야기를 했다.
바람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그 규모가 남달랐다. 심지어 결혼을 앞둔 약혼녀의 돈으로 떵떵거렸으면서 바람을 피운 탓에, 한심하고 파렴치한 놈이 되어버렸다. 사교계에 목숨 걸던 리하트가 생각나서 일리아는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기가 잘 맞았어.”
일리아는 이전부터 리하트와 바람 난 여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개인적인 복수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녀들을 이용해 리하트를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블로든이 무섭긴 한 모양인지, 다들 잘 협조해주었다. 특히 로즈 바엘라가 열연을 펼친 덕에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리하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여자들은 전부 수도를 떠났다. 리하트가 무섭기보다는 일리아의 눈에 안 띄려는 것이었다. 다들 자진해서 죽은 듯이 살겠다는 각서를 쓴 후에 시골로 내려갔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제게 이를 갈고 있을 모습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테르시안 후작이 횡령과 비리 건으로 몸을 사리고 있어서, 제게 보복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거기다 카르한이 임시 후계자라 생각해 배제하고 있었는데, 에반테온 공작이 직접 움직였으니…… 당분간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번 일은 리하트 스스로가 뿌린 씨앗을 거둔 것에 불과했다.
“끝을 봐야지.”
이제부터 조금씩 리하트를 금전적으로 압박해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제게 받은 것들로 연명했겠지만, 들어오는 게 없으면 금방 바닥날 터였다. 씀씀이를 줄이지도 못할 테니 그의 말로가 뻔히 보였다.
증인도 있겠다, 여기서 명예가 더 실추되고 싶지 않다면 파혼 동의서에 순순히 서명해줘야 할 것이다.
“주최자한테 고맙다는 서신 보냈어?”
“예. 선물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일리아는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번에 리하트와 관련한 여자들을 전부 연회에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최자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일리아의 계획을 들은 주최자가 재밌겠다며 흔쾌히 승낙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윽한 향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델로타 가문에서 판매하는 찻잎을 우린 것이었다.
이전에 스텔라가 주최한 티파티에 참석했다가 제법 괜찮아서 주문을 넣어두었다. 그쪽도 꽃모종을 계속 사들이고 있는 중이니, 상부상조 아니겠는가. 말렉은 음흉한 미소를 짓는 일리아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음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틀리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자, 말렉이 말을 이었다.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다 합니다.”
드디어 바네사의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일리아는 곧바로 후원을 빠져나와, 서관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일리아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서서 관상용 순무에 물을 주던 클리프가 일리아를 반겨주었다.
“일리아, 무슨 일이니.”
일리아는 잠시 화분에 심긴 순무를 쳐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오, 드디어 완성된 건가.”
분무기를 내려놓은 그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지금 보러 가는 게냐.”
“맞아요. 시간 있으세요?”
“물론이지. 그럼 잠깐만 기다리거라.”
한껏 신난 클리프가 빠르게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그가 문밖에서 고개만 내민 채 소리쳤다.
“가자꾸나!”
그 길로 일리아와 클리프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마차를 타고 향한 곳은 바네사가 머무르는 아틀리에였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인데, 왠지 이전보다 거리가 더 활기차 보였다.
일리아는 골목 어귀에 마차를 세워놓고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행인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엄청 북적거리네.”
“예술가의 거리라면서 요즘 뜨고 있잖아. 이 일대 임대료가 엄청 올랐다지?”
“이득 많이 봤겠어. 건물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참 부럽군.”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팔 생각이 없어서 사두고 잊고 있었는데, 그사이 시세가 많이 오른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아틀리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가자, 마음껏 뛰어도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발걸음소리를 들었는지 바네사가 곧바로 다가왔다.
“일리아 님!”
“바네사, 오랜만이에요.”
두 사람은 짤막한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일리아는 제 뒤에 서 있던 아버지를 소개해주었다.
“아참, 제 아버지예요.”
“헉.”
바네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 유명한 블로든 가문의 가주라는 말에 바네사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클리프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클리프 블로든입니다. 딸을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정중한 인사에 바네사가 자그맣게 ‘저도…….’ 하고 대답했다. 클리프는 예술가에게 아주 너그러운 편이었고, 외모만 보면 성격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금방 그에게 익숙해진 바네사는 쑥스러운 미소만 지었다.
“그림 완성했다는 말 들었어요.”
“아, 맞아요! 아직 동생들도 못 봤는데, 보여달라고 성화예요.”
“보여주지 그랬어요.”
“일리아 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바네사가 활짝 웃다가 캔버스를 올려둔 이젤 쪽으로 걸어갔다. 흰 천으로 덮어둔 캔버스가 보였다. 바네사가 천을 걷어내자 그림이 드러났다.
“……!”
클리프는 동상이 된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림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일리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캔버스에 담긴 그림을 찬찬히 살폈다. 완성되기 전에 한 번 봤지만, 역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참 조용하던 클리프가 흥분에 가득 차 방방 뛰며 소리쳤다.
“일리아!! 당장 전시회를 열자꾸나!”
***
그 후로 일리아는 클리프를 도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네사의 그림에 푹 빠진 클리프는 하루빨리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고 성화였다. 이런 그림을 묵혀두는 건 죄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바네사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완성된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부 습작에 가까웠다. 의견을 나눈 끝에 바네사의 작품은 클리프가 기획하던 전시회에 출품하기로 하였다.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실력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대신 일리아는 작은 행사를 기획했다. 화가의 이름은 전부 익명으로 하고, 관람객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장미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장미를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은 화가가 직접 와서 인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전시회 개관 당일,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작품에 장미를 한 송이씩 내려놓았다. 아직 오전이었는데 바네사의 그림 앞에는 장미 언덕이 만들어졌다.
“정말…… 대단한 그림입니다.”
바네사의 작품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프란체가 감탄했다.
“그리운 느낌이에요.”
선은 거칠고 힘차게 뻗어나갔으나 색감은 밝고 따스했다.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생명감 넘치는 빈민가의 풍경이었다. 빈민가 출신인 프란체는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사람들도 전부 바네사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그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림에 관심 없거나 잘 모르는 이도, 까다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도 그녀의 그림을 칭찬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봤지만 정말 대단하군.”
누군가가 제법 큰 목소리로 칭찬을 쏟아냈다.
“장담하는데, 분명 저 그림을 그린 화가는 3대 문파에 속해 있을 걸세.”
일리아는 목소리의 주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남자가 바네사의 작품을 보며 자신감 넘치게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 보는 기법인데, 막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대형 신인인 모양이야.”
그림 한 점으로 추측을 늘어놓은 사내가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저 과감한 붓 자국을 보니 남자겠어.”
“그림 하나로 그렇게 많은 것을 파악하시다니,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옆에 있던 이들이 아부하자 백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기를 엿들은 주변 사람들은 ‘유명한 신인이래.’ 하고 정보를 퍼뜨렸다.
일리아는 잠자코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추측이 전부 틀리긴 했지만, 익명으로 작품을 공개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이름만 보고 작품을 판단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문파인지, 아카데미를 졸업했는지, 성별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일리아는 그런 것을 다 떠나 바네사가 오직 실력으로 빛을 보길 바랐다.
“일리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카르한이 서 있었다. 오후 수업을 받고 곧바로 온 모양이었다.
“전시회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살폈다. 최근 서로 바빴더니 얼굴을 제대로 볼 틈이 없었다.
“작품 소개해줄게요.”
일리아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카르한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일리아의 손에 잠자코 끌려갔다. 한참 작품을 감상하던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천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가 발견했어요.”
일리아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카르한은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들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잠시 지켜보던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살폈다. 슬슬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이 올 때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묘하게 익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수한 차림새와 달리 얼굴에서 귀티가 흘렀다. 확실하진 않으나 고귀한 사람일 것 같았다. 여인은 이내 뒤에 서 있던 키 큰 여자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카르한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바네사의 그림을 보며 희대의 걸작이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신선한 작품에 목말라 있던 노귀족들에게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
“소공자도 오셨군요.”
노귀족들이 카르한을 알아봤다. 그들은 여전히 카르한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전처럼 무턱대고 경계하거나 날을 세우진 않았다. 카르한 또한 긴장하지 않고 자신을 낮춰서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마음이 풀린 노귀족들은 그에게 질문을 툭툭 던졌고, 카르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고미술에 해박하십니다그려.”
“블로든 백작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여러분께도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뭐……, 아는 선에서라면…….”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그들을 보며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공통 주제가 있으니 카르한도 수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의 카르한이 떠올랐다. 말주변이 없어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몇 달 사이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노귀족들을 살피던 일리아는 에반테온 공작가 원로와 눈이 마주쳤다. 짧게 눈인사하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말수가 적어서, 일리아와 대화를 나눈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늦은 오후 무렵,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원래라면 직원들이 작품 앞에 놓인 장미를 셀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바네사의 그림 앞에 놓인 장미가 월등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앞에 놓인 장미로 작은 꽃밭을 조성해도 될 정도였다.
관람객들은 화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꽃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는 관람객들에게 직접 인사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화가일까?”
“아까 지나가다 들었는데, 궁정 화가의 제자래.”
“유학 다녀왔다던데.”
화가에 대한 무분별한 정보들이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그 중심에는 추측을 잔뜩 늘어놓던 백작이 있었다.
전시장 직원들이 작품 하단에 이름표를 달기 시작했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냐며 탄식하는 사람부터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회 주최자인 클리프가 바네사의 작품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오늘 전시회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가장 많은 장미를 받은 화가를 소개합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화가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인파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바네사가 쭈뼛거리며 튀어 나왔다. 작품 앞에 선 바네사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 작품을 그린 바네사라고 합니다.”
바네사를 본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여자잖아? 남자 아니었어?”
“성이 없는 걸 보니 평민인가?”
아까 열심히 추측을 늘어놓던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부하던 이들은 난감한 얼굴로 백작을 쳐다보았다.
“질문이 있소.”
백작이 손을 들자, 바네사가 시선을 주었다.
“어느 문파 소속인지, 아카데미는 언제 졸업했는지 궁금하군.”
바네사가 일리아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한 바네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적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 말에 백작의 얼굴이 왕창 구겨졌다. 그가 손을 들어 바네사를 삿대질하며 호통 쳤다.
“여기가 시장 바닥도 아니고, 화가도 아닌 자의 그림을 걸어뒀단 말인가!!”
백작의 노성에 바네사의 어깨가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힐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블로든 백작께서 우리의 안목을 너무 무시한 것 아닙니까.”
화살은 클리프에게 향했다. 백작의 얼굴에 악의가 차 있었다. 보잘것없는 무명 화가의 그림을 훌륭하다 떠들어 댔기에, 제 안목이 폄하된 것 같아 불쾌해하는 기색이 그득했다.
“…….”
바네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기다 클리프까지 함께 비난 받자, 무척 당황한 듯했다. 웅성거리던 관람객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꺾인 탓인지, 바네사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맞아. 우리가 돈까지 내고 감상하러 왔는데, 자격도 없는 사람의 그림을 봐야겠어?”
“익명으로 이런 행사를 연 걸 보니 속이 뻔하군.”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난하자, 일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어야만 훌륭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다 다들 자기가 예상한 것과 달라서 반발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빠르게 바네사와 클리프를 살폈다. 덜덜 떨고 있는 바네사는 입술을 꾹 다문 채였고, 클리프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일리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릴 자격은 누가 주는 겁니까?”
묵직한 저음이 커다란 공간을 두드리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마구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리아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이 상황이 버거운 듯 카르한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완전히 결심을 내린 듯했다.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놓은 카르한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작품 앞에 멈춘 그가 등을 돌려, 관람객들을 마주했다. 건장한 체구에 한 번 놀란 사람들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카르한의 얼굴을 보고 아예 입을 다물었다. 카르한은 작품 아래에 수북하게 쌓인 장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작품이 가장 많은 장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말에 관람객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직접 장미를 내려놓은 순간을 기억했다.
“저는 문파나 학벌을 떠나서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백작이 곧바로 반박했다. 그러자 카르한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길만 줬을 뿐인데, 백작은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이내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제 편이라고 생각했는지, 금방 당당해졌다.
“만약 화가에 대해 미리 알았더라면 꽃을 두지 않았을 거요.”
그가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린 이의 사상이나 환경 등을 전부 고려해서 선택한 것이니까.”
백작은 화가가 예상한 만큼 훌륭한 배경을 지닌 인물이 아니기에, 그림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의 오만한 판단이었다. 듣다 못한 클리프가 나섰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오히려 제가 더 실망했습니다. 블로든 백작!”
백작이 지지 않고 호통치자,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그림 볼 줄을 모르는군요.”
차분한 비판에 백작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누가 발언했는지 찾지 못했다. 백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상대가 다시 말했다.
“오히려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주장은 아집으로 보입니다.”
“내가 후원하는 화가들이 몇인 줄 아시오? 비겁하게 사람들 틈에 숨어서 떠들지 말고 얼굴을 보이시오!”
자기 안목이 최고임을 강조하던 백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자 백작에게 일침을 가한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백작은 관중 사이에 파묻혀 있던 남자를 마주 보았다.
“!”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조금이라도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예술에 조예 깊다고 명성이 자자한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였다.
“아침에 내 친우인 궁정 화가가 이 그림을 보고 훌륭하다 칭찬하기에, 저도 일부러 감상하러 온 겁니다.”
궁정 화가까지 언급되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인정한 그림인 것이다. 궁정 화가와 안목을 나란히 하고 싶었던 관람객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그림이 좋다고 생각했어.”
“오히려 작품이 화가 이미지랑 달라서 신선하지 않나?”
너도나도 그림이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백작이 당황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닌…….”
백작은 허둥대며 딴소리를 꺼내려 했다. 그러자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들이 일제히 그를 비난했다.
“듣자하니 어이가 없군. 당신 눈만 최고인 줄 아시오?”
“도대체 몇 명이나 후원하기에 그리 으스대는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쟁쟁한 노귀족들이 몰아붙이자,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저를 지지하던 흐름은 끝나버렸고, 아부하던 이들마저 눈을 돌렸다. 어찌할 바 몰라 하던 그는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쯧. 눈을 발에 달았나.”
재수 없다며 노귀족 하나가 혀를 찼다. 상황이 대강 마무리되자, 바네사는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리아가 곧바로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바네사, 괜찮아요?”
“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예요.”
일리아는 해쓱해진 바네사를 위로했다.
“미안해요.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봤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일리아 님 덕분에 제가 여기에 설 수 있었는걸요.”
바네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바네사의 그림이 좋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일단 좀 쉬다 와요.”
일리아는 클리프에게 말해서 바네사를 안쪽에 데려다주게 하였다. 할 일을 마친 일리아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어요.”
일리아의 인사에 노귀족들은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좋은 작품이 폄훼당하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방금과 같은 상황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봤자, 어린데 뭘 아느냐며 무시당할 뿐이었다.
그래서 예술 쪽에 권위 있는 노귀족들을 초대했고, 예상대로 노귀족들의 도움 덕분에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일리아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소공자를 다시 봤습니다.”
“맞습니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대단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노귀족들의 시선이 카르한을 향했다. 호의로 가득한 눈빛이 쏟아지자, 카르한은 어색해서 눈동자만 굴렸다.
“카르한, 고마워요.”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카르한이 엄청난 용기를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봤으니 말이다.
“말 잘하던데요?”
“그게 실은…….”
카르한이 일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요즘 교수님과 웅변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웅변이요?”
“예, 나중에 작위를 계승하면 국무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일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수업 때 어떤 것들을 배우는지 궁금해졌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노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다. 그러다 한 노귀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로든 양,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비루먹을 놈이 다 있다니……!”
평소에 끓는점이 높은 노귀족 하나가 역정을 냈다. 일리아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금방 깨달았다. 리하트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연회 사건 이후로 일리아는 집 밖에 나갔다 하면 리하트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은 점점 더 부풀려져서 리하트는 천하에 다시없을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불쌍한 피해자로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소공자가 듬직하니, 잘 어울립니다.”
“그래요. 그런 놈이랑은 어서 파혼하고 둘이 약혼하세요. 우리도 축하하러 갈 테니.”
노귀족들이 흐뭇한 얼굴로 일리아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오늘 노귀족들에게 점수를 제대로 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살폈다. 무척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표정을 잘 읽는 일리아도 지금만큼은 카르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랑 약혼하는 게 싫나?’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약혼할 사이도 아닌데, 순간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카르한과 자신은 그냥……. 일리아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이 관계를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머릿속이 깜깜했다.
‘그만 생각하자.’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아직도 퇴장하지 않은 관람객들이 제법 있었는데, 다들 바네사가 사라진 방향만 주시했다. 아무래도 바네사와 대화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소공자.”
그때 계속 침묵하던 에반테온의 원로가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괜찮다면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카르한이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다녀오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식을 취하러 갔던 바네사가 돌아왔다. 그러자 작품을 감상하는 척하며 전시장을 떠나지 않던 이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바네사 님! 작품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림을 보자마자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어허! 순서는 지킵시다.”
다들 바네사를 둘러싸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난리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도 무척 적극적이었다. 당황한 바네사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조언을 구하는 얼굴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계약을 맺긴 했으나, 반년에 작품 하나씩만 넘겨주면 다른 일은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막 뜨는 화가가 될 바네사에게는 부수입도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네사를 독점하지 말라고 성화일 게 분명했다.
바네사 또한 저와만 거래하고 싶진 않을 터였다. 오래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사람이랑 일하며 몸값을 높이는 쪽이 나았다. 일리아의 대답을 들은 바네사는 결심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모두에게 선언했다.
“저는 후원자인 일리아 블로든 님을 통해서만 작업을 받겠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