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리하트는 머리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취가 심해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또다시 이전 일이 떠올랐다.
약 한 달 전, 카르한 에반테온의 약점을 알게 된 리하트는 일리아를 찾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일리아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진실을 알게 된 일리아는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쓰레기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뒷조사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저를 힐난하던 일리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결국 리하트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카르한이 매일같이 블로든 저택에 찾아간다는 이야기만 듣게 되었다.
“……정말 그놈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지금껏 후계자인 척 속였던 가증스러운 놈을?
리하트는 아직까지 일리아가 제게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일리아의 마음이 카르한에게 옮겨갔다면…… 더 이상 비벼볼 구석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는데, 무슨 수로 마음을 돌린단 말인가.
한참 침대에 앉아있던 리하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실에는 일리아가 선물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서랍을 열었다.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편지지가 보였다. 일리아가 자신에게 써준 편지였다.
리하트는 조용히 그것을 읽었다. 작고 네모난 공간에 일리아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함께했던 시간들, 교류했던 감정……. 리하트는 편지지를 반쯤 구겨서 내려놓았다.
카르한과 나란히 서 있던 일리아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원망과 뒤늦은 후회, 질투로 얼룩진 감정은 화마였다. 들끓는 감정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리하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방계 사람들까지 참석하는 가문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리하트는 외투를 대충 걸친 후 방을 나섰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상석에는 가주인 아버지와 후작부인인 어머니 그리고 이미 결혼한 시오나까지 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 방계 사람들이 주르륵 착석한 상태였다.
“너무 늦지 않았느냐.”
테르시안 후작이 타박하자, 리하트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의 착석과 함께 가문 회의가 시작되었다.
분기마다 열리는 테르시안 가문 모임에서는 후작을 중심으로 여러 중요한 문제를 논의했다. 대부분의 결론은 돈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자본금이 필요한데…….”
평소 같았으면 리하트가 자신만만하게 나설 때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리하트는 조용하기만 했다. 다들 눈치 보던 중, 방계 사람 중 하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리하트 님의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가 말문을 떼자 다들 궁금한 얼굴로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리하트의 결혼이었다. 리하트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테르시안 후작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래, 결혼식 준비는 그쪽에 전부 맡겼는데 소식이 없구나.”
그녀가 리하트를 빤히 보며 물었다.
“결혼식 날짜는 언제쯤 잡는다니?”
후작부인이 결혼식을 서두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블로든 가문을 통해 사업 자본금을 유치하기 위함이었다. 리하트의 누나인 시오나가 냉큼 말을 이었다.
“그래, 결혼식은 미리 말해줘야 우리도 준비하지.”
그녀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리하트에게 졸랐다.
“남편이 새로 봐둔 땅이 하나 있는데, 네가 빨리 결혼하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니.”
다들 각자의 욕망을 늘어놓기 바빴다. 기대 어린 눈빛을 받은 리하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 말이 없던 리하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결혼식은 없던 일로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윽고 후작과 후작부인 그리고 시오나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왜……!”
“농담하는 거지?”
리하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블로든 측에서 파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테르시안 후작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운운한 것이 무척 분한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있던 후작부인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유령이라도 씐 것처럼 그녀가 무서운 얼굴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어째서? 혹시 네가 실수라도 한 거니? 당장 블로든 저택에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거라.”
“당신은 자존심도 없소?”
“지금 자존심 가릴 때예요?! 벌여둔 사업이 몇 갠데!!”
블로든 가문과 공동으로 벌인 사업도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여태껏 신나게 깔고 앉아 있던 돈방석을 뺏길 위기인 것이다.
“너 그때 파혼하는 거 아니라며? 어떻게 된 거야!”
시오나가 참지 않고 따지기 시작했다. 후작 또한 뒤늦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리하트를 노려보았다.
“후계자 공부를 소홀히 해도 곧 결혼할 거라 생각해서 넘어가 줬더니……. 한심한 놈.”
방계 가족들도 조용히 눈빛으로 리하트를 탓하고 있었다.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 대부분이 리하트를 통해 일리아에게 기생하고 있었기에 타격이 컸다.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 비난하자, 리하트는 숨이 막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작이 방계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회의장에 후작과 후작부인, 시오나, 리하트만 남았다.
“그래서 갑자기 파혼하자는 이유가 뭔데?”
리하트는 그제야 꾹 다물린 입을 열었다.
“잠깐 다른 여자를 만났는데……,”
“너 미쳤니?”
후작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리하트가 버럭 대꾸했다.
“이미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다고요!”
“…….”
“몇 번이나 찾아가도 아예 받아주질 않아서…….”
리하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에 권위주의적인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후작부인은 리하트를 쪼기 바빴다.
“그걸로 되겠어? 앞에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시끄럽소!!”
후작이 소리치자, 후작부인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리하트는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덮기 위해 주절댔다.
“저도 잘해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일리아도 곧바로 새 남자를 만났다고요.”
“뭐, 새 남자?”
리하트는 말을 멈추었다. 상대가 카르한 에반테온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리하트가 침묵하자, 후작이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블로든 가문과 결혼을 추진할 수 없을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후작은 입매를 비틀었다. 헤인리 블로든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전에 헤인리에게 일리아와 리하트를 화해시키라고 권유했건만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사이 리하트와 일리아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거기다 헤인리 본인은 자신이 얹어준 업무를 전부 훌륭하게 처리했고,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까지 앞두고 있었다. 두 사람을 결혼시킬 수 없게 된 이상, 다른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뜯어낼 거리를 찾아봐야겠군.”
후작의 혼잣말에 가족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테르시안 후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법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
스텔라가 주최한 모임을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다. 그날 일리아는 티파티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사교계 모임과 체질상 맞지 않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으면서 말이다.
그 후로 일리아는 나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블로든 저택을 관리하며 틈틈이 경제 공부도 했다. 아침마다 블로든 저택에 찾아오는 카르한을 마중하는 것도 일과 중 하나였다.
오늘도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피던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이 생각났다.
‘점심 같이 먹자고 해볼까.’
아직 오전이었기에, 아마 연무장에 있을 듯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곧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창 연습하는 기사들이 보였지만, 카르한은 없었다.
“벌써 별관으로 갔나?”
연무장 구석에 위치한 건물 쪽으로 걸어가던 일리아가 멈춰 섰다. 건물 처마 밑에 큰 몸을 구겨 넣은 카르한이 있었다. 그는 무릎을 세운 채 칼 한 자루를 끌어안고 졸고 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많이 피곤했는지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무릎을 굽혀, 카르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속눈썹이 촘촘하게 내려앉은 눈 밑은 살짝 거뭇했다. 살이 조금 빠져서 그런지 인상은 좀 더 날카로워 보였다.
굴곡 없이 활강하는 콧대와 약간 틈이 보이는 입술. 창백해 보이던 피부는 혈색 좋게 그을린 상태였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카르한은 가벼운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는데, 쭉 뻗은 목선 아래에 쇄골이 보였다. 일자로 도드라진 쇄골 아래가 움푹 패어 있었다.
일리아는 재빨리 시선을 떼고, 칼집을 붙들고 있는 손등을 유심히 보았다. 제 손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손이었다.
카르한은 저보다 뭐든 커서, 이야기할 때도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카르한은 늘 저와 함께 있을 때 허리를 살짝 굽혀 시선을 마주해왔다.
“덩치도 크면서 왜 이렇게 구겨져서 자는지.”
괜히 불쌍해 보였다. 아무리 열이 많은 편이라 해도, 땀 흘린 후에 그늘진 곳에서 잤다간 감기 걸리기 십상이었다.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순간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카르한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여름용 모포를 들고 나왔다. 펼친 모포를 덮어주다가 손가락이 카르한의 손에 닿았다. 잠결인지 카르한이 일리아의 손끝을 붙잡았다.
일리아는 잠시 멈추었다. 아기가 손가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듯 그는 일리아의 손끝을 잡은 채 숨만 내뱉었다. 그러더니 입매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헤실헤실 풀어지는 그의 입가를 보며 일리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붙잡힌 손끝에서 맥박이 뛰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듯 일정한 맥박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손에서부터 가슴까지 천천히 타고 흘러갔다.
“……일리아.”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일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카르한의 눈꺼풀은 여전히 덮여있었다. 아무래도 잠꼬대를 한 모양이었다.
꼼짝 않던 일리아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일리아는 모포를 대강 덮어준 후에 곧바로 자리를 떠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느릿하게 눈을 뜬 카르한은 멍하니 있다가 어깨까지 덮인 모포를 발견했다. 모포를 덮고 잔 기억은 없었기에,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모포를…….”
의아해하던 카르한은 모포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향기가 희미하게 묻어나왔다. 무척 좋은 냄새라고 생각하며, 카르한은 설핏 웃었다.
***
일리아는 오랜만에 나갈 채비를 끝내고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과 데이트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카르한은 검술 연습과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몹시 바빴다.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카르한이 안쓰러웠던 일리아는 이틀 정도 쉬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카르한은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그럼 쉬는 날에 함께 외출해주시겠습니까?
-집에서 쉬지 않고요?
-예. 당신만 괜찮다면…….
일리아는 흔쾌히 그러자고 말했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연극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비올레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붙어 있는데, 둘이 데이트는 하니?
일리아와 카르한은 연인인 척하는 중이었다. 특히 비올레는 카르한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로 두 사람의 교제를 긍정적으로 봤다. 아무래도 카르한이 검술 수업을 받으면서 점수를 톡톡히 딴 모양이었다.
비올레는 카르한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는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리아의 아버지인 클리프는 아직도 카르한을 싫어하는 척 연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달리 헤인리는 여전히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교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헤인리의 출근 시간에 맞춰서 카르한이 왔기에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헤인리가 일찍 집에 돌아오는 날이 있었다. 그는 별관에 거의 발걸음하지 않았는데, 하필 그날따라 별관에 왔다가 카르한과 마주쳤다. 헤인리는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다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소공자께서 왜 우리 집에 계십니까?
당황한 카르한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사실을 알게 된 헤인리는 크게 뒤집어졌다. 일리아는 열심히 헤인리를 설득했다. 얌전히 있다가 가는 것이 전부다. 집안에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다.
평소 같으면 넘어가줄 법도 했지만, 그날따라 헤인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일리아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매일 에반테온 공작저에 갈게요.
-……차라리 우리 집으로 불러라.
헤인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 들르는 것을 승낙했다. 그때 일을 떠올린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 만한 계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리하트를 무척 싫어했던 헤인리는 카르한에게도 불신을 품고 있었다. 거기다 황궁에서 일하다 보니 고위 귀족들의 비리를 많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높은 신분의 귀족가 후계자인 카르한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는 쉽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카르한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에 카르한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오기에 일리아도 맞춰 나온 것인데 의외였다.
찻집에 들어가기도 애매해 거리에서 카르한을 기다리던 때였다. 일리아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검은 모자를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일리아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바로 보타이를 고쳐 맨 그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일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뒤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나서려 하자, 일리아는 손짓으로 막아 세웠다. 일리아의 앞에 멈춰 선 남자가 심호흡을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저기, 첫눈에 반했습니다.”
“…….”
“혹시 시간 있으시면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프란체와 말렉이 얼굴을 구겼다. 프란체가 칼집에 손을 얹는 것을 본 일리아는 가볍게 흘겨보았다.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남자를 다시 응시했다. 온통 유명 상표를 두른 그는 졸부 티가 팍팍 났다. 차림새 때문인지 저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는 더 많아 보였다.
“미안해요.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일리아는 그의 자신감에 감탄했다.
‘저 자신감의 반만 떼어내서 카르한에게 주고 싶네.’
그럼 정말 공평할 것 같았다. 일리아는 혼자만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시 한번 거절했다.
“지금 연인을 기다리는 중이어서 곤란해요.”
“아니,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연인이라니. 그런 남자는 당장 버리십시오!”
남자가 끈질기게 추근거리자 프란체가 일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가 처리할까요?’라고 묻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일반인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쫓아낼지 고민하는데, 그가 손을 들어 어느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 가게가 제 것입니다.”
일리아의 고개가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번듯한 레스토랑이었다. 남자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은 제가 돈이 좀 많습니다.”
아무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돈이었던 모양이었다.
“와, 그래요?”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저 건물이 제 거예요.”
“예?”
남자가 멈칫했다. 그가 지금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짓자, 일리아는 상냥하게 못 박아주었다.
“여기서 세입자분을 만날 줄 몰랐어요.”
남자는 재빨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보기 드물 정도로 환한 금발과 연보라색 눈동자. 입고 있는 옷이나 모자, 가방 등은 그조차 구입하기 망설여지는 최고급 물건이었다.
설마 하던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카르한을 발견했다.
“혹시…….”
“카르한!”
일리아가 손을 흔들며 카르한을 불렀다. 일리아를 발견한 카르한이 곧장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흔히 볼 수 없는 장신의 사내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카르한과 눈이 마주친 남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들판에서 무기도 없이 거대한 흑곰과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그리고 남자를 발견한 카르한 또한 살짝 긴장한 듯했다.
마침내 마주 서게 된 카르한이 남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던 남자는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반대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카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가버려서 다행입니다.”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이었다며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남자가 잡상인이나 이교도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프란체는 일리아에게 추근거리던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어찌나 끈질기던지 치워버릴 뻔했습니다.”
“별일 없었잖아. 세입자인데 잘해줘야지.”
일리아가 프란체를 달래자,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이교도 아니었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 방금 저 사람이 저보고 같이 차 마시자고 하더라고요.”
일리아가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 카르한은 무척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깊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를 보지 못한 일리아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슬슬 극장으로 갈까요?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아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무척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에는 일찍 나오는 편이었는데, 오랜만의 데이트에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괜찮아요. 아직 약속 시간도 안 되었는걸요. 이만 갈까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걸어 그곳을 벗어났다. 극장 앞에 도착하자 카르한의 얼굴에 감탄과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수도에서 가장 큰 극장인 만큼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에 연극 본 적 있어요?”
“극장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처음입니다.”
으리으리한 극장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카르한을 보던 일리아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거 알아요? 극장에 들어갈 때는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는데, 예의가 아니거든요.”
일리아의 설명을 들은 카르한은 큰일 날 뻔했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극장 건물 앞에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일리아는 그것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건물 입구에 서 있던 극장 직원이 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일리아가 미리 준비해둔 표를 보여주자, 직원은 활짝 웃으며 비켜섰다.
“……미리 표를 준비해야 했군요.”
현장에서 사는 건 줄 알았다며, 카르한이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 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얼마입니까?”
“괜찮아요. 제가 보자고 했잖아요.”
“계속 받기만 했으니 저도 내고 싶습니다.”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일리아가 말했다.
“그럼 저녁 식사는 당신이 내줘요.”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까지 함께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극장 안으로 입장하기 전, 카르한이 멈춰 섰다. 허리를 숙인 카르한이 정말로 신발을 벗으려 하자, 일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 그건 농담이었어요.”
일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카르한을 보았다. 솔직히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잘 속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묻자, 카르한은 뒷목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차마 벗지 못한 신발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일리아는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사실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일리아는 입을 쏙 다물고 말았다. 도대체 저를 향한 신뢰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신발 벗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외치며 입장해야 한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일리아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카르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제 이름을 사칭해서 돈 빌려달라고 하면 뭐라고 말하라 했죠?”
“……그녀는 나보다 부자니까 사기 치지 마라.”
일리아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복도를 걸어간 일리아는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극장은 조금 어둑한 편이었는데, 일리아가 예약한 자리는 무대와 가까우면서도 시야가 탁 트인 위치였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카르한과 나란히 앉은 일리아는 기대를 품은 채 무대를 응시했다. 계속 바빴던 탓에 연극은 오랜만에 관람하는 것이었다.
“요즘 가장 인기가 좋대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보며 소곤거렸다. 그의 얼굴도 제법 들뜬 티가 났다. 곧이어 주연 배우 한 명이 등장하더니 연극이 시작되었다.
일리아는 무대에 집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꾸만 몸을 뒤척이게 되었다. 연극 내용이 생각보다 부실했고, 취향과 너무 멀었다. 아직 초반인데도 어떻게 전개될지 훤히 보이는 신파에 가까운 연극이었다.
‘줄거리 좀 미리 알아볼걸.’
일리아는 속으로 후회했다. 예술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일리아는 살면서 많은 연극을 보았고, 덩달아 눈도 높아졌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이 연극은 좀 심했다.
지난 10년 정도는 우려먹은 흔해 빠진 내용이었다. 그나마 배우들의 빛나는 외모로 부족한 내용을 채우고 있었지만, 잘생긴 남자 배우를 보아도 감흥이 없었다. 제 옆에 남자 배우보다 더 잘생긴 사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사랑, 제발 가지 말아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주인공이 이별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미안해졌다. 살면서 처음 보는 연극이 이렇게 재미없는 내용이라니. 연극에 대한 편견이 생기면 어쩌나 싶었다.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꼼짝 않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이 평소와 달리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역시 카르한도 연극이 형편없어서 짜증이 났나.’
그때 일리아는 희끄무레한 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평소보다 반질거렸다. 비 오는 날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물기가 살짝 비쳤다. 설마 하는데 카르한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곱게 접어둔 손수건을 꺼내들어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일리아는 겨우 웃음을 삼켰다. 냉랭한 얼굴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역시 연극보다 카르한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몰입해 보려고 애썼지만, 점점 늘어지는 내용에 하품만 나왔다. 따뜻하고 어둑한 공간에 있으니 조금씩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배우들의 목소리는 소음이 아닌, 자장가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일리아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연극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갔다. 오해로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던 두 주인공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격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진한 입맞춤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보고 있는 자신이 괜히 민망하고 낯부끄러웠다. 혹시 저만 그런가 싶어서 카르한은 슬쩍 일리아를 보았다. 언제 잠들었는지 일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일어나면 목 아플 텐데. 고민하던 카르한은 손을 뻗어 일리아의 고개를 바로 해주었다. 지탱할 힘이 없는지, 또다시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카르한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제 어깨를 내어주었다. 살짝 높긴 했지만 일리아는 안정적으로 기대어 잠들었다.
그때부터 카르한은 연극에 집중할 수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보던 내용들도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덜미에 얕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이 손목을 간질였다.
괜히 긴장되어 뻣뻣하게 앉아 있던 카르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일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깨에 기대 잠든 일리아의 금빛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이어진 작은 콧대와 하얀 뺨…….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이 넓은 공간이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자신의 주변만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무대 위에서 배우가 뭐라고 대사를 뱉고 있는데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카르한의 시선이 살짝 벌어진 입술로 향했다. 느릿한 숨결이 새어나오는 도톰한 입술이 유독 도드라졌다.
일리아의 얼굴에 천천히 그늘이 졌다. 마침내 숨결이 뺨에 닿았을 때.
“……!”
카르한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서 고개를 뒤로 뺐다. 그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이자, 일리아가 뒤척이며 고개를 움직였다. 다행히 일리아는 깨지 않았다. 안도하는 동시에 카르한의 뺨과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닿은 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가 무슨 짓을……. 카르한은 충격 받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만약 완전히 정신을 놓았더라면 자는 사람에게 입을 맞췄을 터였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최대한 숨을 죽인 카르한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손수건만 움켜쥐었다.
***
카르한은 아침 일찍 공작저를 나와 블로든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헤인리와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이전에 한 번 헤인리와 마주쳤다가 집이 뒤집어지는 일이 있었다. 카르한은 헤인리가 무서웠기에 매일 그가 출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들어가곤 했다.
별관에 도착한 카르한은 마중 나온 일리아와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 같으면 마냥 좋았을 테지만, 지금은 일리아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죄책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렸기 때문이었다.
공부방에 들어간 카르한은 교수를 기다렸다. 복습하려고 책과 펜을 꺼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카르한은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연극을 본 후 카르한은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일 내내 공작저에 처박혀서 시간을 보냈다. 카르한은 극장에서 있었던 일로 머리가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배우들이 입맞춤하는 장면을 보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건지, 입술이 예뻐서 잠시 홀렸던 건지…….
하지만 평소의 카르한은 분위기 같은 것을 전혀 타지 않는 편이었다. 남들이 다 흥겨워할 때도 멀뚱멀뚱 서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분위기 탓도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카르한은 온종일 일리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또다시 입 밖으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일리아는 제게 은인이었다. 집안의 꼭두각시처럼 지내오던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임시 후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일리아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도리어 진짜가 되어보자고 설득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말하는 대로 되고 싶었다. 저를 믿어주었으니 최선을 다해 은혜 갚고 싶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양했다. 늘 고마웠고 가끔 칭찬해주면 선물을 받은 듯 기뻤으며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있던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복잡해져갔다. 이전에 리하트와 함께 있는 일리아를 봤을 땐 가슴이 답답했고, 웬 남자가 작업을 걸었다는 걸 들었을 땐 속이 들끓었다.
이것들은 분명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일리아와 자신의 관계는 무엇일까……. 거래와 동맹이 사라진 지금, 그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인 것인가.
“나는 일리아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르한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벌써 몇 번이고 탐독했던 연애 지침서였다. 카르한은 애써 책에 집중했다.
“에반테온 님.”
누군가의 부름에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교수인 메즈라 제니어스가 서 있었다.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들어왔습니다.”
카르한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노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정도로 집중했던 모양이었다.
“책을 읽고 계셨군요.”
메즈라는 흐뭇한 미소 지으며 성실하다고 칭찬하려다 멈칫했다. 책 속에 익숙한 문장이 보인 탓이었다.
“혹시 그 책은…….”
메즈라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카르한은 ‘아’ 하고 짤막한 소리를 내뱉은 후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제2권]
제목을 확인한 메즈라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메즈라가 당황한 까닭은 카르한이 진지한 얼굴로 연애 지침서를 읽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 책의 저자가 바로 메즈라였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이자, 천재라 불리는 메즈라는 온갖 서적을 출간했다. 법과 정치뿐만 아니라, 동화책까지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했다.
언젠가 그는 새벽 감성에 취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을 각색한 에세이와 조언으로 채운 글이었다.
연애 고수인 척 심취해서 쓴 후에 잊어먹었다가 나중에 아내가 원고를 발견하고 출간하자고 설득했다. 고민 끝에 메즈라는 필명을 바꿔서 출간했고…… 그것이 대박 났다.
메즈라는 지금껏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잘 숨기고 다녔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 카르한을 보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메즈라는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저와 달리 무척 덤덤한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존심이 상하거나 창피하다는 이유로 이런 책은 몰래 숨어서 읽곤 하는데, 카르한은 당당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메즈라가 입을 열었다.
“그……. 혹시 연애 문제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메즈라의 물음에 카르한이 움찔했다. 연애 서적을 찾아 읽을 이유라면 그것뿐이었기에 메즈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헛기침을 내뱉은 후 말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한때 연애 상담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지요.”
카르한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메즈라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카르한의 연애 고민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첫 만남 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카르한은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었다. 스승으로서 아끼는 제자를 돕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연애 상담은 아니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서…….”
카르한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메즈라는 곧바로 의자에 앉아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마음에 둔 상대가 있습니까?”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메즈라는 좀 더 상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주 생각난다거나, 괜히 의식되는 그런 상대 말입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 생각은 매일 하고 있었다. 나름 일리아를 의식해서 옷도 열심히 골라 입었고, 데이트 코스도 공부해갔다.
“흐음, 에반테온 님이 그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요?”
“……예.”
카르한은 일리아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마냥 좋았다. 친구가 생기면 이런 느낌일까 종종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리아를 볼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온 신경이 일리아에게 몰렸다가 간혹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궁금했다.
“가슴이 막 두근거린다거나 그러진 않습니까?”
“심장이 조금 안 좋긴 한데…….”
거기까지 말한 카르한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가끔씩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뛸 때가 있었는데, 일리아와 함께 있을 때만 그러했다. 늘 들고 다니던 심장 약도 그때밖에 먹을 일이 없었다. 왜 지금까지 이걸 몰랐지……?
카르한이 꼼짝하지 않자, 메즈라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에반테온 님은 그 상대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습니까?”
“저는…….”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카르한은 현재에 안주했을 뿐, 앞으로 변화할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욕심을 좀 더 부리자면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일리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일리아가 무사히 파혼하고, 자신이 진짜 후계자가 된 후에도……. 먼 미래를 상상하던 카르한은 숨이 턱 막혔다.
분명히 일리아와 자신이 바라던 미래였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갈림길이었다.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일리아와 카르한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다른 이와 결혼이라도 하면 바빠서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팔팔 끓는 온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어두운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던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였다.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그거 딱 결혼하면 되는 관계인데? 메즈라는 대답하려다가 참았다.
“하지만 제가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르한이 자신 없어 하자, 메즈라가 발을 굴렸다.
“아니, 에반테온 님께서 무엇이 빠지신다고! 완벽한 집안에 훌륭한 외모! 그리고 재력까지 갖추시지 않으셨습니까.”
카르한이 시무룩한 얼굴로 정정해주었다.
“그분은 저보다 돈이 많습니다.”
돈이 더 많다고……? 설마 블로든 영애인가……?
메즈라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생각해보면 에반테온 후계자인 그가 블로든 저택에 와서 수업을 받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얼핏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교제한다는…….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니, 그전에 카르한은 좋아한다는 걸 아직 자각하지 못한 모양인데……, 정말 교제하는 게 맞긴 한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메즈라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카르한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메즈라는 결국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해주었다.
“제가 보기엔 말입니다……. 에반테온 님께서 그분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 좋아합니다.”
순순히 돌아온 대답에 메즈라가 당황했다.
“아니, 그럼 왜……. 도대체 무엇을 고민하시는 겁니까?”
카르한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저는 채소를 좋아하는데, 채소한테는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아서……”
“아!”
메즈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카르한은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끔씩 카르한을 보고 있으면 아직 세상에 나가보지 못한 아이 같았다. 배우는 속도는 빠르지만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카르한은 사랑을 처음 자각한 모양이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카르한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들어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에 메즈라가 천천히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아무래도 그 상대가 에반테온 님께 특별한 사람이라 고민하시는 듯합니다.”
메즈라는 자신이 쓴 책을 힐끗 보았다. 낯부끄러운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에반테온 님께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계신 듯하지만, 언젠가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날이 온다면…….”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때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일리아는 재무표를 작성하다가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 연무장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카르한은 연무장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을 터였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카르한이 저를 피하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곧바로 사라졌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곰곰이 짚어보던 일리아는 연극 보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일리아는 연극을 보던 중에 잠들어버렸다. 연극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카르한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자버려서 화가 났나.”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카르한을 붙잡고 대놓고 물어봐야 할지 고민되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아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을 나와 본관의 중앙 홀로 내려가자 비올레가 보였다.
“딱 맞춰 왔구나.”
깔끔한 차림을 한 비올레가 일리아를 반겼다. 두 사람은 곧바로 현관 앞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탔다.
일리아가 사업을 물려받고 싶다고 뜻을 내비친 후, 비올레는 일리아를 조금씩 경영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오늘, 비올레가 거래 상대와 협상하는 모습을 견학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일리아와 비올레는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장의자에 앉아 기다리자, 약속 시간에서 15분이 지난 후에야 풍성한 콧수염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조금 늦었다고 허허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따님이시군요. 아름다우십니다.”
일리아를 본 남자가 감탄 어린 얼굴로 칭찬했다. 짤막하게 인사한 일리아는 비올레에게서 미리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남작인 그는 커다란 숲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 마흐니라는 희귀한 나무가 자랐다. 그 원목은 고급 가구 재료로 쓰였고,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이번에 블로든 가문에서 가구 사업을 확장하면서 원목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기 위해 협상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일리아는 기대에 찬 얼굴로 비올레를 힐끔 보았다. 오늘 어머니의 협상 실력을 눈으로 보고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을 터였다. 비올레와 남작은 가벼운 대화부터 시작했다.
비올레는 사담은 적당히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남작이 자꾸만 신변잡기에 가까운 말만 늘어놓았다. 끊어내자니 여기서 굽히고 들어갈 사람은 비올레 쪽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남작은 자기 이야기만 계속했다.
“그래서 이번에 본 오페라가 참 재미있더군요.”
쓸데없는 말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자, 일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고 싶었지만, 자신은 관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때 가만히 듣기만 하던 비올레가 대답했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다고 들었는데, 내용까지 재밌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그 극장의 무대로 쓰인 재료가 마흐니 원목이었죠?”
비올레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원하는 쪽으로 유도했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흐니 원목은 고급 가게에서만 쓰이기로 유명하지요. 그만큼 결이 아름다우니까요. 하지만 워낙 관리하기 까다로운 나무라서…….”
남자는 나무의 가치와 재배법에 대해 나불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적을 내비쳤다.
“한 그루당 1만 크로엘은 받아야겠습니다.”
남자가 제시한 금액에 일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1만 크로엘은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가공도 되지 않은 나무를 웬만한 가구보다 비싼 가격에 팔아치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올레는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가격보다 훨씬 높아서 곤란하군요.”
“이거 참. 블로든이라면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비올레를 힐끗댔다. 어차피 아쉬운 입장은 비올레라고 생각하는지 몸을 뒤로 젖힌 채 건방을 떨었다.
“뭐, 저는 아쉬울 것 하나 없습니다. 이미 그 가격을 맞춰준다는 사람이 제법 있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블로든과 우선 협상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일리아는 남작의 행동과 표정을 살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반절 이상 허풍일 터였다. 비올레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남작은 더욱 신이 나서 오만하게 굴었다. 제가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남작은 다리를 꼬아 거만한 자세를 취한 채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저는 제시한 가격에서 단 한 푼도 낮출 생각이 없습니다.”
싫으면 지금 나가라는 식으로 남작이 말했다. 한참 말이 없던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자세가 비뚜시네요.”
“허리가 좋지 않아서.”
남작이 웃으며 받아치자, 비올레는 가만히 디저트 나이프를 들었다. 그러자 남작의 시선이 나이프에 따라붙었다. 이윽고 퍽, 하고 부서지는 소리에 남작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듯하게 잘린 케이크와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만 한 디저트 나이프로 두꺼운 접시를 두 동강 낸 것이었다. 허억, 하고 남작이 숨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접시가 무척 약하군요.”
비올레가 나이프를 쥔 채 남작의 풍성한 수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허리가 안 좋은가요?”
그는 반사적으로 애지중지 기른 콧수염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리고 뒤늦게 비올레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한때 천재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여자. 블로든 백작부인이 된 후에는 도장 깨기 하듯 무례한 거래 상대들을 박살내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비올레와 남작의 눈이 마주쳤다. 남작은 저도 모르게 꼬았던 다리를 풀고 허리를 폈다. 그가 똑바로 앉자, 비올레가 턱을 치켜들었다. 상대를 압박하는 기운을 여과 없이 흘려보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럼 협상을 계속 해볼까요.”
***
거래가 무사히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일리아는 조금 지쳐서 의자에 기대앉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정신적으로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고삐 없이 날뛰던 남작은 비올레가 나선 후부터는 훨씬 얌전해졌다. 그래도 간간이 헛소리를 했는데, 비올레는 대답 대신 조용히 디저트 나이프를 들었다.
그때마다 나이프가 한계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작은 수그러들었다. 그 결과 블로든 측은 원하던 조건으로 협상을 마칠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비올레가 일리아에게 물었다.
“오늘 공부는 좀 되었고?”
……아뇨. 참고할 수 없겠던데요.
일리아는 온화한 얼굴로 나이프를 치켜들던 비올레를 떠올렸다.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그녀의 기백이 아직도 생생했다. 만약 자신이 어머니를 따라하려면 협상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검술부터 익혀야 할 듯했다.
일리아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자, 비올레가 다시 질문했다.
“요즘 소공자와는 잘 지내고 있니?”
“……네. 서로 바빠서 그렇지, 매일 보고 있어요.”
일리아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대답했다. 문제없다는 일리아의 태도에 비올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일리아에게서 에반테온 소공자와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올레는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던 카르한은 온갖 악소문을 몰고 다녔다. 전쟁터의 악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 매몰차고 차가운 성정.
비올레는 소문만 듣고 카르한 에반테온이 무척 야만적이며 위험한 남자일 거라 생각했다. 나쁜 남자가 잘 꼬이는 체질인 일리아가 드디어 대형 폭탄을 데리고 왔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카르한을 만나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사나운 인상이긴 하나 말투는 정중하고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예절 교육을 잘 받은 도련님도 이 정도는 아닐 듯했다.
무척 인상 깊었지만, 첫 만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레는 여전히 카르한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하진 않았으나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은근히 헤어지기를 바랐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우연한 기회에 카르한을 가르치게 되었다. 실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카르한의 실체를 파헤쳐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제게 보여준 행동이 연기라면 당장 쫓아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올레는 시간이 지날수록 카르한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 야만적일 거라 생각했던 카르한은 무척 순했으며, 풀꽃처럼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카르한은 훈련이라는 이름하에 무자비하게 굴리는 비올레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혹시 저 때문에 다른 일을 못 하시는 것은 아닌지…….
한결같은 그의 태도에 마지막까지 박혀 있던 편견의 조각이 빠져나갔다. 결국 비올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편견이라는 베일을 벗고 보니, 카르한은 다시 없을 천재였다. 평소에는 정중하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검만 들면 사람이 돌변했다. 전쟁터의 악귀라는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오싹한 위압감을 내뿜는 카르한은 비올레를 잔뜩 고양시켰다.
프란체도 검에 재능이 있긴 했으나, 그와는 또 다른 재능이었다. 오랜 실전으로 쌓아 올린 감각과 판단력. 비올레는 자칫 잘못하면 괴물이 될 수 있는 카르한을 제국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잠깐의 침묵이 마차 안을 휘감았다. 비올레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파혼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지?”
창밖을 바라보던 일리아가 고개를 돌려, 비올레를 마주보았다. 비올레는 차분히 앉아 있었지만 눈동자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쪽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 같진 않구나.”
“……얼마 전에 저를 찾아왔어요.”
“리하트 테르시안이?”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혼해달라고 했는데, 받아들이질 않아서…….”
그 후로 일리아는 파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방도를 알아봤다. 리하트는 애매한 쓰레기였다. 도덕은 전부 갖다버렸으면서 쓸데없이 법망 안에서 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파혼하려면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일리아는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해 나가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자료가 모이긴 했지만, 먼저 터뜨렸다간 반격이 돌아올까 싶어 눈치 싸움 중이었다. 무엇보다 승진을 앞두고 있을 헤인리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리하트가 돈에 허덕인다는 말이 슬슬 들려왔다. 씀씀이를 줄이진 못하는데, 들어오는 돈이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돈을 이용해서 리하트를 괴롭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리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비올레에게 말해주었다.
“공동 사업 건은 완전히 발을 뺐단다. 이후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돈은 전부 끊어버렸고.”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고 비올레가 설명해주었다. 테르시안 가문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블로든에게 기댈 수 없을 터였다. 도리어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면 블로든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테르시안 가문을 멀리할 것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일리아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피해 끼친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저를 탓하지 않고 신경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괜히 눈물 날 것 같아서 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올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내 딸 눈에 눈물 나게 한 그놈이 문제지.”
이렇게 예쁜 약혼자를 내버려두고 바람이라니, 하고 비올레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에 리하트가 있으면 한 방 날려줄 것 같은 기백이었다.
비올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아의 옆에 앉았다. 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올레가 속삭였다.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
메즈라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카르한은 온종일 나사가 빠져 있었다. 계속 삐걱거리다가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도 연발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카르한은 공부방에 혼자 남았다. 멍하니 앉아있던 카르한은 빈 종이에 펜으로 의미 없는 낙서만 끄적거렸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었다가 흠칫 놀라 벅벅 긁어냈다.
사랑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단어가 와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은 적도, 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메즈라는 지금 자신이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내가 일리아를……?”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리아를 좋아하긴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로는 어딘가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메즈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감히 자신이 그런 감정을 품고 일리아를 바라볼 자격이 있을까. 지금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면, 이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멍하니 앉아있던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공부방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일리아와 마주쳤다.
“카르한.”
일리아가 반갑게 부르며 다가왔다. 카르한은 멈춰 선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메즈라의 말도 그렇고 이전에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아직까지 일리아의 얼굴을 보기 어색했다.
“배웅해줄게요.”
망설이던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일리아와 함께 제 집보다 익숙해진 별관 복도를 걸었다.
“어때요, 공부는 할 만해요?”
“다른 건 할 만한데, 외국어가 조금 어렵습니다.”
“저는 언어 쪽이 재밌던데.”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계속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던 카르한은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도톰한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제 목에 닿았던 숨결이 연상되었다. 귓불이 뜨끈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카르한은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카르한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더더욱 의심스럽다는 듯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리하트 테르시안이 찾아왔다거나…….”
카르한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별관 복도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현관 앞에 선 일리아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말해줘요.”
일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던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틈이 벌어진 상자처럼 달싹거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마차 한 대가 별관 쪽을 향해 달려왔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확인했다. 헤인리의 마차였다.
카르한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일리아 또한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카르한과 헤인리가 마주쳤다간 분명 껄끄러운 일이 생길 터였다.
“일단 숨어요.”
카르한이 커다란 덩치와 맞지 않게 후다닥 걸음을 뗐다. 어디에 숨을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급한 대로 현관 기둥 뒤에 섰다. 기둥은 두 팔로 감싸도 닿지 않을 정도로 컸지만, 카르한의 어깨가 더 넓었다.
“어깨 보여요!”
우왕좌왕하던 카르한은 냉큼 뛰어서 벽 뒤로 숨었다. 한바탕 일을 치른 후에야 마차에서 헤인리가 내렸다.
그가 별관에 들르는 일은 별로 없었기에, 일리아는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선 헤인리가 일리아를 발견하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늘 쓰고 있던 은테 안경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리아……?”
일리아는 대답 대신 헤인리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술 냄새가 많이 났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헤인리를 살폈다.
“술 마시고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
헤인리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늘 반듯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였기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라버니.”
헤인리는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하게 서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사표를 내기로 했다.”
헤인리의 발언에 일리아는 놀라서 굳어졌다. 과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헤인리가 지금 직장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알고 있었다. 잘나가는 사업까지 물려받기 싫다고 거절했을 정도로 공직이 체질이었다. 거기다 조만간 승진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사표라니.
“네? 어째서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뒤에 숨어 있다는 것도 잊고 헤인리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곧 승진한다고 하셨잖아요.”
“……반려되었다.”
“반려라니, 대체 왜요?”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깜빡이던 헤인리는 대답을 망설였다. 일리아가 설마 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저 때문이에요?”
“아니야.”
헤인리는 곧바로 부정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확신을 가진 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테르시안 후작이 나선 거지요?”
헤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답이라고 생각한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테르시안 후작 밑에서 일하는 헤인리가 혹시 저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다. 그런데 리하트가 기어코 헤인리를 건드린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일리아가 느릿하게 물었다.
“혹시 저번에 계속 늦게 들어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네 탓이 아니야.”
헤인리는 부정하는 대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전부 제 탓이라는 것을.
헤인리가 리하트와의 교제를 반대했을 때, 순순히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만,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의를 제기한다 한들, 황실 측은 테르시안 후작의 편을 들 게 분명했다. 그만큼 황궁 내에서 테르시안 가문의 입지는 탄탄했다. 일리아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차마 헤인리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고개를 푹 숙인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헤인리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일리아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 또한 어떤 식으로 일리아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어깨를 떨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할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내 일이니 너는 나서지 마라.”
헤인리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까닭도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헤인리는 일리아가 저 때문에 죄책감 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나도 순순히 나갈 생각은 없다. 테르시안 후작의 비리를 공론화하고 나올 생각이야.”
물론 윗선에 가로막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인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생각이었다.
“…….”
현관 뒤쪽,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이고 있던 카르한은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었다. 카르한은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일리아가 가장 걱정하고 염두에 두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전부 자신이 쓸모없는 패라는 것을 들킨 탓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나머지 카르한은 애꿎은 옷자락만 콱 움켜쥐었다. 일리아가 거래를 제안했을 때 카르한에게 요구한 것은 신분이었다. 리하트가 날뛸 수 없도록 카르한의 뒤에 있는 에반테온을 방패 삼으려 했다.
그 대신 일리아는 카르한의 약혼을 막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카르한이 원하는 바를 전부 들어준 일리아와 달리, 카르한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일리아가 먼저 말해왔으나, 그것은 늘 마음의 빚처럼 남아있었다.
일리아와 헤인리의 대화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술에 취한 헤인리가 살짝 비틀거리자, 일리아는 고용인을 불러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카르한은 천천히 등을 떼어냈다.
고용인에게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긴 후 마차에 올라탔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카르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자신은 일리아에게 받기만 해왔다. 일리아는 보잘것없던 제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해주었다. 그렇기에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사위는 어두컴컴해진 지 오래였다. 하늘을 떠도는 별무리가 불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선 카르한은 오랫동안 발걸음 하지 않았던 본관 꼭대기로 걸어갔다.
계단을 오르던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깊은 곳에 묻었던 감정 찌꺼기와 오래된 상념이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카르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난간을 쥐었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쫓아낸 카르한은 오직 일리아 생각만 했다. 그러자 발에 날개를 단 듯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꼭대기 층에 도착하니 텅 빈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도 벽에 걸린 등불이 길잡이처럼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등불을 따라 걷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고용인이 놀라서 멈춰 섰다. 이곳에서 카르한과 마주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공작께서는?”
“서, 서재에 계십니다.”
고용인의 대답을 들은 카르한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복도 끝, 두터운 나무문이 하나 있었다. 카르한은 짧은 심호흡을 내뱉은 후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잠시 후 안쪽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긴장한 카르한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자, 사방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처럼 굳건하게 세워진 책장에는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많은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카르한은 어둑한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일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목적지 삼아 걷자, 높디높은 책장 앞에 서 있는 중년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내는 작은 램프 하나만 발치에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생김새가 많이 닮은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카르한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중년 사내, 에반테온 공작이 무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목소리가 차마 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말라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공작의 눈썹머리가 좁아졌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카르한은 간결하지만 핵심만 담아 상황을 설명했다. 교제하는 사람의 오라버니가 황궁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 약혼자의 보복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 그 상대가 테르시안 후작이라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카르한의 말이 끝나자, 추임새 하나 없이 듣고 있던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와준다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흔쾌히 받아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예상보다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머리를 굴리고 고민할 틈도 없이 카르한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뭐든 하겠습니다.”
카르한은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름뿐인 후계자.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이 희망을 걸 곳은 오직 여기뿐이었다. 일리아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자존심도 내다버릴 수 있었다.
“뭐든?”
공작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카르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탁, 바람이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공작은 발을 뻗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카르한은 제 옆을 스쳐지나가는 공작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부탁을 거절당한 것이다. 이윽고 조금씩 멀어지던 걸음 소리가 멎었다.
“좋다.”
꿈결처럼 들려온 목소리에 카르한이 눈을 번쩍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카르한은 걸음 소리가 멎은 쪽을 응시했다. 다른 책장 앞에 선 공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촘촘히 꽂혀있는 책등을 훑어나갔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책꽂이에서 서적을 빼든 공작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카르한을 응시했다.
“여름이 지나거든 분쟁지역에 다녀와라.”
***
테르시안 후작은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확인했다. 아랫사람들이 처리해둔 것이라 승인만 내주면 되었다. 서류를 빠르게 훑어가던 후작의 눈이 잠시 멈추었다.
내용을 다시 확인한 그가 씩 웃었다. 헤인리 블로든의 승진이 반려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저번에 황태자비를 붙들고 하소연했더니 잘 처리해준 모양이었다.
“위아래 없이 굴더니, 건방 떤 대가지.”
후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랫사람으로 들어온 주제에 건방지게 굴던 놈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넙죽 엎드릴 것이지, 저와 대립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아무리 블로든이 대단하다 한들, 황궁은 제 손바닥 안이었다. 황태자비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고위 귀족들과 친분도 잘 다져놓았다.
테르시안 후작은 헤인리가 저를 찾아와 싹싹 비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찌나 통쾌한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건방진 콧대를 눌러주마.”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맺혔다. 헤인리가 제게 사과하러 오면 승진 건을 인질 삼아 협상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블로든 가문과 결혼은 물 건너간 듯하니, 파혼 위자료라도 두둑하게 받아낼 계획이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서류 하단에 서명하는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말하니 처음 보는 이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테르시안 후작님. 에반테온 공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출에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공작께서……?”
어쩐 일이시지? 하고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테온 공작과는 가끔 국무회의 때나 보는 사이로, 사적으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작가의 위세와 영향력은 황실 측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 기회에 친분을 다져두는 것도 좋을 듯했다.
개인 집무실을 나선 테르시안 후작은 본궁으로 향했다. 공작의 대리인이 향한 곳은 에반테온 공작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혹시 제게만 긴히 할 말이 있나 싶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대리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후작은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채광이 좋은 후작의 집무실과 달리, 공작의 방은 조금 어둑한 편이었다. 커튼을 단단히 치고 있어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서서히 꺼지고, 긴장이 몰려왔다. 창가에 서 있던 에반테온 공작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후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분명 엇비슷한 나이인데, 기백이 달랐다.
“그…….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테르시안 후작이 더듬거리며 묻자, 공작이 대답했다.
“헤인리 블로든의 승진 건에 대해 할 말이 있소.”
그때 후작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