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9장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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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장

    에반테온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카르한은 점점 멀어지는 블로든 저택을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까부터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쏟아져서 멀미를 하듯 속이 울렁였다.

    카르한은 제게 실망할 일리아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계속 진실을 숨겨왔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수록 진실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매번 일리아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번에는 꼭 밝혀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끝내 직접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껏 숨겨온 사실을 리하트가 폭로했을 때, 카르한은 짧았던 행복이 끝났음을 각오했다. 거래 파기는 당연했고, 일리아가 다시는 제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상상해왔던 최악의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일리아는 저를 밀어내거나 매몰차게 굴기는커녕 또 다른 제안을 해왔다. 진짜 후계자가 되라고. 밑바닥이나 마찬가지인 저를 믿어준 것이다.

    카르한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테시온에게 시선을 보냈다.

    “테시온.”

    “네, 카르한 님.”

    “……앞으로 많이 힘들 거다. 원한다면 떠나도 괜찮아.”

    공작부부는 물론이고 원로들 또한 자신의 행보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말 잘 듣는 꼭두각시로 세워두었더니 줄을 끊고 진짜가 되려 하니 말이다.

    “각오는 이미 끝냈습니다. 저는 카르한 님 곁에 있을 겁니다.”

    테시온의 대답에 카르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그 말에 수많은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테시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지른 후에 대답했다.

    “……더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훌쩍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카르한은 ‘그래.’ 하고 짤막하게 대답해주었다. 전쟁터에서 테시온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카르한이지만, 도리어 구제 받은 쪽은 그일지도 몰랐다. 테시온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터였다.

    카르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둠에 파묻혀 있는 에반테온 공작저가 보였다.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저택을 볼 때마다 거북하고 두려웠지만…….

    처음으로 저택이 무섭지 않다고 카르한은 생각했다.

    ***

    며칠 후, 일리아와 약속한 날이 왔다. 카르한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앞으로 특별 훈련을 받을 거라고 말했기에 괜히 긴장되었다. 별관 앞에 도착하자, 일리아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딱 맞춰서 왔네요. 안 그래도 다 모였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왔습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일리아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보면 알 수도 있어요.”

    카르한은 기대와 걱정을 안고 일리아를 따라 별관에 들어섰다. 별관은 본관보다 작았지만, 고즈넉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복도를 걷던 일리아가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 장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당신을 가르칠 교수진이에요.”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메즈라 제니어스입니다.”

    “제 이름은…….”

    이름을 듣던 테시온이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렸다. 전부 화려하다 못해 어마어마한 인물들이었다. 이십 년 넘게 교과서로 쓰이는 책의 저자,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아카데미 명예교수, 사교계에서 유명한 예절 선생 등등…….

    “아니……. 어, 어떻게 모셔 오신 겁니까!”

    테시온이 말을 더듬거리며 일리아에게 물었다. 일리아는 알면서 왜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돈으로요.”

    ***

    하얀 분필이 칠판에 글자를 새겨 넣는 소리만이 또각또각 들려왔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칠판을 응시했다.

    강단에 서서 수업을 진행하던 남자가 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말했다.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완벽한 설명이어서 물을 것도 없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내젓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수업에서 만나도록 하죠.”

    그는 곧바로 강연장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 학생들이 흠모에 가득 찬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남자의 이름은 메즈라 제니어스로, 최연소 아카데미 교수이자 명예교수까지 오른 희대의 천재였다. 한미한 귀족 가문의 사남으로 태어났으나, 지금은 제국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교수로 꼽혔다.

    메즈라는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메즈라를 발견한 조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손님께서 와 계십니다.”

    “손님?”

    오늘 방문한다던 손님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었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카데미 명예 교수직에 오른 후로 메즈라를 찾는 이들은 무척 많았다. 자식을 잘 봐달라며 청탁하는 이들부터 입학시험 유출을 바라거나 다른 아카데미로 스카우트하려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기다리고 있다니 일단 만나 봐야겠군.”

    아무래도 곧 있으면 시험 기간이니 청탁하러 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메즈라는 단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 오늘 자신을 찾아온 손님 또한 이전 손님처럼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메즈라는 연구실 문을 열었다. 햇빛이 드는 창가 쪽에 금발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차분한 색감의 드레스에 장신구는 최소한만 착용하고 있었으나, 모자부터 신발까지 전부 최고급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메즈라는 눈만 깜빡였다. 블로든이라는 이름이 무척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메즈라가 뒤늦게 ‘블로든……?!’ 하고 외치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가 방문 목적을 밝혔다.

    “교수님께서 학생 한 명을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저보고 가정교사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의 청탁은 또 처음이었다. 메즈라는 지금까지 늘 그랬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 학생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되겠군요.”

    “사정이 있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는 없어요.”

    메즈라는 자부심을 담아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배움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일리아는 뒤에 서 있던 감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에게 손짓했다. 어느 정도 체구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검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척 보니 돈 가방으로 보였다. 메즈라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저는…….”

    철컥, 하고 가방이 열렸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낡은 책 한 권이었다. 메즈라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국 건국 초기에 작성된 법률 고서예요.”

    “!”

    메즈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부 소실되어 전설로만 존재하는 고서였다. 만약 저것이 진본이라면 값어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저 책만 있으면 지금까지 해온 연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였다. 논문으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다. 탐구욕으로 그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단 한 권 남은 거예요.”

    “언제부터 출근이라고요?”

    거절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뇌물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인 메즈라는 사직서를 쓸 각오까지 했건만, 일리아는 아카데미 일과 겸업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배움을 독점할 수는 없으니까요.”

    메즈라는 시험 문제까지 제출한 후, 아카데미 방학을 틈타 수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학생의 신원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작성했다.

    “비밀은 꼭 지켜주세요.”

    이쯤 되니 학생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다.

    “제가 가르칠 학생은 어떤 사람입니까?”

    “음…….”

    일리아는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해주었다.

    “강아지 같은 남자예요.”

    그 말에 메즈라는 혼자 상상을 시작했다. 왠지 체구가 작고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일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서도 강아지 같은 학생들이 있었으니 그런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메즈라는 블로든 저택을 방문했다. 블로든 가문의 부에 대해서 귀 따갑도록 들어온지라,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대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별천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부지가 어찌나 넓은지 마차를 타고 한참 들어와서야 저택이 보였다.

    별관에 도착한 메즈라는 ‘여기가 별관이라고?’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별관도 이렇게나 훌륭한데, 본관은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메즈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상력이 이렇게나 빈약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메즈라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는 먼저 도착한 손님들을 살폈다. 각 분야에서 최고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일부러 모으려 해도 모으기 힘들 정도로 쟁쟁한 인사였다. 이들이 모두 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메즈라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자신이 가르칠 학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일리아와 함께 이목을 사로잡는 장신의 사내가 들어왔다.

    “앞으로 당신을 가르칠 교수진이에요.”

    일리아의 말에 메즈라는 몹시 당황했다. 강아지라면서요……. 아무리 봐도 눈앞에 있는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라 곰이었다. 많이 봐줘서 개와 비슷한 늑대 정도라 할 수 있었다. 메즈라는 표정을 수습한 후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가 끝나고 다른 교수들이 우르르 나갔다. 시간표는 미리 협의가 끝난 상태였고, 가장 먼저 메즈라가 수업할 예정이었다.

    공부방으로 자리를 옮긴 메즈라는 학생과 단둘이 남았다. 마치 곰 우리 속에 던져진 먹이가 된 기분이었다. 몸이 약해서 가정 수업을 고집한 줄 알았는데 너무 건장했다.

    아카데미를 다니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 폭력 사건을 일으켜 퇴학당했다거나……. 나름 그럴 듯한 추측을 하고 있는데, 그가 조심스레 이름을 밝혔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

    메즈라는 깜짝 놀라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작년에 공작의 후계자가 되며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름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가장 궁금한 것은 에반테온 소공자가 어째서 블로든 가문에서 수업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적인 질문은 금지되어 있었다.

    “저는 오늘부터 제국 법과 정치를 가르칠 겁니다.”

    메즈라의 말에 카르한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았다. 메즈라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반듯한 자세로 깃펜을 쥐고 있는 그를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메즈라는 교과서를 펼치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메즈라는 당황한 나머지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이것도 모르십니까……?”

    산간오지에서 지내기라도 한 듯 기초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차라리 지나가는 열 살짜리 귀족 아이를 붙들고 묻는 쪽이 나을 정도였다.

    “이거 참. 차라리 기초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메즈라가 막막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카르한이 절박하게 말했다.

    “내일까지 꼭 외우겠습니다.”

    “…….”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카르한은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겠다는 듯 단단한 눈빛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전부 외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단원까지 외워두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과연 하루 만에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외우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훈계해주십시오.”

    감히 소공자를? 심지어 어린아이도 아닌 성년이었다. 다 큰 성인이 야단맞는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운 일일 텐데, 먼저 제안해온 것이다.

    “저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꼭 해내야 합니다.”

    그 말에서 절실함이 엿보였다. 메즈라는 헛기침을 내뱉은 후 다시 교과서를 펼쳤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럼 기초부터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메즈라는 카르한 못지않게 열의에 가득 차게 되었다.

    ***

    카르한이 공부하러 간 사이, 일리아는 후원에서 차를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후 이번에 지출한 내역을 확인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르칠 교수를 섭외하기 위해 거금을 투자했다. 재개발로 벌어들인 수익을 고스란히 쏟았지만, 아깝진 않았다. 일리아는 자신의 안목에 확신이 있었다.

    “아가씨, 보고하러 왔습니다.”

    말렉이 후원에 찾아왔다. 그는 호위기사지만 일리아의 개인 비서나 다름없었다. 일리아가 외출하지 않을 때는 이런저런 정보를 정리해서 보고했다. 말렉은 요즘 수도에 떠도는 소문을 말해주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델로타 가문에서 꽃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꽃?”

    “주홍색 꽃잎 다섯 장에 끄트머리가 동그랗고 노란 수술을 가진 꽃을 찾는다는군요.”

    “……우리 집에 심은 꽃인데?”

    일리아는 설명을 듣자마자 정원에 심어둔 꽃을 떠올렸다. 품종 개량을 거듭한 탓에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

    일리아는 스텔라 델로타가 블로든 저택에 방문한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정원에서 길을 잃었는데 그때 꽃을 본 모양이었다.

    “거금을 주고서라도 사겠다고 공고를 냈습니다.”

    “그래?”

    일리아는 씩 웃었다. 아무래도 한탕 할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스텔라라면 얼마를 부르든 승낙할 것이다. 중간에 업자를 끼면 판매자가 자신인 것도 모를 터였다. 이번에 교수를 초빙한다고 지출이 컸으니…….

    “비싸게 팔아야겠네.”

    “네?”

    “걔 돈 많잖아.”

    열심히 수금해서 카르한 학비나 벌어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

    일리아는 다시 별관으로 돌아갔다. 수업이 끝났는지 막 방에서 나오는 메즈라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일리아의 제안에 메즈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일리아가 물었다.

    “어떤가요?”

    “대단히 성실하고 예의 바르신 분입니다.”

    메즈라가 무척 흡족한 얼굴로 칭찬을 쏟아냈다. 직업 만족도 백 퍼센트에 달하는 후기였다.

    “아카데미에 다니셨다면 모범상을 휩쓸었을 겁니다!”

    못 받으면 자신이 추천해서라도 강제로 안겨줬을 거라고 그가 소리쳤다. 일리아는 물끄러미 메즈라를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도축장으로 끌려들어 가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기초는 부족하시지만 암기력과 이해력이 좋으셔서 금방 따라오실 듯합니다.”

    메즈라는 넘치는 의욕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카르한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메즈라가 돌아가고, 일리아는 주방에서 쿠키를 받아와 공부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카르한은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방금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 방해가 될까 싶었지만, 카르한에게도 적절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리아가 쿠키가 든 접시를 내려놓자,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느냐는 듯 그가 눈을 깜빡였다.

    “좀 쉬다가 해요. 첫날인데 할 만해요?”

    “……기초가 한참 부족해서 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칭찬 엄청 하던데요?”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속눈썹이 차양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일리아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잠을 잘 못 자는지 눈가가 거뭇해서 인상이 더욱 날카로워 보였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 보였다. 피부도 더 이상 푸석하지 않고 말이다.

    ‘역시 나도 채식을 해야 하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푸른 불꽃을 닮은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시선을 마주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열심히 해서 성과를 이루면……, 저를 칭찬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교수의 칭찬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그 모습이 임무를 완수하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일리아는 속으로 푸스스 웃었다.

    “오늘 첫 수업인데도 정말 잘했어요.”

    카르한의 눈꼬리가 뒤집힌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포근한 시선이 닿자 가슴이 몽글해졌다. 심장이 밀가루 반죽이라도 된 것처럼 늘어졌다가 뭉쳐지는 느낌이었다. 쿵쿵, 요리사가 반죽을 치대듯 심장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려왔다.

    “더 열심히 할 테니 계속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죠. 나중에 공작이 되면 나 모른 척하지 말아요.”

    카르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주억거렸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요?”

    “저번에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씀하셨는데…….”

    카르한이 말을 흐렸다. 망설이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연인인 척하는 것도…… 그만두는 건가요?”

    이제 일리아와 카르한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닌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인인 척했던 이유는 리하트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나,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터였다. 일리아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아뇨. 그건 계속 유지해야 할 것 같아요.”

    일리아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미 부모님께 교제하고 있다고 밝혔고, 헤어지면 저희 집에 들락날락할 명분이 없어지잖아요. 그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머니인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자신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스텔라 델로타를 불러들일 것이다. 카르한이 예전과 달라졌다 한들 스텔라와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여러 문제가 있으니, 당분간은 이대로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때 카르한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조금 낮아진 어깨는 안도했다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를 살피던 일리아가 그래도 혹시 싶어서 물었다.

    “혹시 싫어요?”

    “아니요.”

    카르한이 곧장 부정했다. 눈매를 반쯤 접은 그가 속삭였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서.”

    뚜렷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일리아는 부드러워진 그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조금 떨리는 입술을 뗐다.

    “첫날이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 말을 남겨놓고 일리아는 곧바로 방을 나와 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복도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그럼에도 가슴 아래에서 쿵쿵대는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귓바퀴를 타고 맴돌았다. 일리아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고개를 내저은 후 걸음을 뗐다.

    ***

    다음 날, 일리아는 바네사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혹시 찾아가면 불편할까 싶어서 방문은 일부러 자제하고 있었는데 먼저 연락이 왔다. 작품 완성을 앞두고 있는데, 와서 한번 봐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저택을 나온 일리아는 간식을 산 후, 아틀리에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는데, 위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2층 계단 위에 있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 부자 언니다!”

    여자아이가 일리아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히 보니 이전에 빈민가에서 만났던 그 아이였다.

    여자아이가 냉큼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일리아는 깔끔해진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 옷에 머리까지 손질해 말끔했다.

    “일리아 님?”

    소란을 들었는지, 바네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라나!”

    바네사가 기겁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불렀다. 라나라고 불린 아이는 일리아의 치맛자락만 꼭 붙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일리아는 라나의 어깨를 감싼 채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네사가 일리아에게 물었다.

    “어쩜 좋아. 혹시 제 동생이 실례되는 행동을 했나요?”

    “전혀요. 동생이에요?”

    “네……. 허락 없이 아틀리에에 데려와서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뭐 있어요. 여기는 당신을 위한 공간인걸요.”

    고맙다고 인사한 바네사가 라나의 귀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언니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거란 말이야!”

    라나가 빽 소리치자, 바네사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소개해준 적도 없는데 일리아를 어찌 알고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전에 빵 왕창 줬던 천사 언니야.”

    “……아!”

    라나의 설명에 바네사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 또한 이전에 아이들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식빵 사야 해요! 우리 언니 거예요.

    -큰누나는…… 그림을 그려요.

    그게 바네사였다니.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 심지어 바네사도 자신이 전시회에 무료로 들여보내줬다가 이후에 길에서 만나 인연을 트게 되었는데 말이다.

    일리아는 여전히 제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렸다.

    “신기하네요.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바네사의 동생들일 줄이야.”

    그때 참 즐거웠다고 일리아가 나직하게 웃었다. 바네사는 한참 입술만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동생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동생들이 빵을 한 아름 들고 돌아왔을 때, 바네사는 웬 빵이냐며 닦달했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을 훔쳤나 오해했다. 바네사는 우는 동생들을 데리고 빵집에 찾아가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웬 부잣집 아가씨가 정말 빵만 사주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쪽이 계산해두었으니, 언제든 빵을 먹으러 오라는 사장의 말에 바네사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바네사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식사 문제가 해결되니 쥐구멍에 볕이 들어오듯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퍽퍽한 호밀이나 보리 빵이 아닌 질 좋은 흰 밀 빵을 먹는 동생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행복해졌다.

    언젠가 이름도 모르는 은인을 만나면 꼭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꼭 뵙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네사의 목소리에 진심이 우러나왔다. 사실 일리아가 그때 아이들을 도와준 것은 그저 동정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네사는 동정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음 깊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뭘요.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지금도 충분한걸요. 저번에 주신 계약금으로 이사도 했어요.”

    수줍게 웃던 바네사가 뒤늦게 목적을 상기했다는 듯 몸을 틀었다.

    “아참, 그림 보시겠어요?”

    일리아는 바네사와 함께 안쪽으로 향했다. 이젤 위에 흰 천으로 가려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완성을 앞두고 있긴 한데……, 마음에 드실지 몰라서요.”

    “나는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돼요.”

    계약까지 했으니 최대한 일리아의 취향에 맞추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바네사의 실력을 믿었다. 분명 그녀가 데뷔하자마자 제국이 뒤집힐 것이다.

    “빈민가 풍경을 그려봤어요.”

    일리아는 지금까지 봐온 빈민가 그림을 떠올렸다. 대부분 어둡고 처참한 분위기였다. 죽음을 업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쩍 마른 아이들이 주로 그려졌다. 관람객의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바네사가 흰 천을 걷어냈다. 유리창 너머를 엿보듯 다른 세계의 풍경이 드러났다. 옅은 노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새벽하늘. 일찍부터 집을 나서는 사람들, 구불구불한 길을 뛰는 강아지, 불 냄새가 날 것 같은 굴뚝.

    낡은 지붕에는 아침 햇살과 미처 떠나지 못한 새벽의 끝자락이 공존하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빈민가 풍경은 이곳 또한 매일 아침이 태어나는 곳임을 말해주었다.

    바네사는 긴장한 얼굴로 일리아의 평가를 기다렸다. 한참 말이 없던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네?”

    바네사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다시 그리겠다고 말해야 하나 싶어, 바네사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일리아는 물감으로 얼룩진 바네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신은 제국이 아니라 대륙을 뒤집어 놓을 사람이에요.”

    ***

    스텔라는 정원에 앉아 홀로 차를 마셨다. 테이블에는 그 흔한 다과조차 없었다.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주홍색 찻물에 홀쭉한 뺨을 가진 얼굴이 비쳤다.

    스텔라는 잠시 눈을 감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통통한 편이었고, 식탐이 강해서 금방 살이 붙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뚱뚱한 자신도 매력적이라 느꼈기에,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로맨스 소설에 푹 빠지게 되었다. 심하게 몰입한 스텔라는 여자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독하다는 말을 제법 들어온 스텔라는 단기간에 살을 빼는 것에 성공했다.

    스텔라는 살을 빼고 나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한동안 제 이야기로 사교계가 들썩거리자, 진짜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거기다 스텔라는 다이어트 하는 동안 마신 차를 상품으로 출시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유행에 민감한 어린 영애들은 스텔라를 따라 하기 바빴다. 콧대 높은 귀부인들도 스텔라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러다 카르한과 약혼 이야기까지 오가게 되었을 때, 스텔라는 인생의 황금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일리아 블로든 때문에. 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스텔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쩜 항상 방해만 하는 거지……?”

    일리아는 스텔라의 인생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가문끼리 숙적이었기에, 사람들은 항상 일리아와 저를 비교했다. 심지어 취향도 비슷해서 물건 하나를 두고 다툴 때도 잦았다. 그러다가 리하트를 만난 후로 착한 척하는 것이 무척 가증스러웠다.

    문득 리하트가 저를 찾아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 후로 계획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연락을 취하진 않았다. 아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탐스러운 장미가 뭉게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그토록 아꼈던 장미 정원이었지만, 예전만 못하게 느껴졌다. 블로든 저택에서 그 꽃을 본 후로 마음을 빼앗긴 탓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다 뒤져도 블로든 저택에서 본 꽃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스텔라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누군가가 정원 입구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꽃을 찾기 위해 파견 보낸 이였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그의 말에 스텔라가 반색했다. 어느새 스텔라의 앞에 멈춰 선 남자가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한 업자가 꽃을 팔겠다고 직접 찾아왔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도 끝냈습니다.”

    “바로 사들였겠지?”

    “그것이…….”

    남자가 우물쭈물하자 스텔라가 타박했다.

    “얼마가 되었든 구입하라고 했잖아.”

    그러자 그가 조용히 가격을 말해주었다.

    “뭐……!”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돈 쓰는 것에 이골이 난 자신조차 깜짝 놀랄 만한 금액이었다.

    “아주 희귀한 품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블로든 저택에만 있었던 건가. 제국 제일의 부자니 그 돈을 주고서라도 살 법했다. 잠시 망설이던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걔도 샀는데 내가 못 살 게 뭐 있어.”

    사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는데,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씨앗이랑 모종 가격이 다른데…….”

    만개한 모종이 씨앗보다 두 배 비싸며, 씨앗을 심을 경우에는 봉오리를 틔우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린다고 말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스텔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6개월이나 기다릴 수는 없어.”

    이미 인내심이 바닥 난 지 오래였다.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전부 모종으로 사들여!”

    이번에 꽃차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다 투자해야겠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블로든 가문에서 본 것보다 더 많이, 화려하게 심을 생각이었다.

    스텔라는 다음에 일리아를 델로타 저택에 꼭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그러질 일리아의 얼굴을 상상한 스텔라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는 매일 블로든 저택에 방문해, 시간표대로 수업을 받았다.

    긴장한 얼굴로 공부방에 들어서던 교수들은 수업이 끝난 후 하나같이 칭찬을 쏟아냈다. 그렇게 후계자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카르한은 단기간 동안 기나긴 공백을 성큼성큼 메웠다.

    무섭도록 발전하는 카르한을 보며 일리아는 뿌듯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만약 카르한이 차별 없이 자랐다면 이미 제국에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능력을 썩히고 있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슬슬 검술도 연습해야 할 것 같은데…….”

    일리아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국은 1년에 한 번 황궁에서 검술 대회가 열렸다. 귀족 자제들이 출전하는 대회로, 규모가 대단했다. 만약 이 시합에서 우승을 거둔다면 후계자의 자질을 한층 높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땅히 눈에 차는 인물이 없어서, 카르한의 검술 스승을 고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를 떠올려도 프란체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빈민가 출신으로 자신의 호위기사 자리를 꿰찬 것도 전부 실력이었다.

    “프란체에게 부탁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침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말렉을 발견했다.

    “말렉, 프란체는?”

    “연무장에서 연습 중입니다. 곧 있으면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으니까요.”

    “그래? 고마워.”

    정보를 입수한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일단 별관으로 향했다. 슬슬 카르한의 오전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어쩌지. 프란체는 많이 바쁠 것 같고…….’

    프란체는 매년 이 시기에 무척이나 바빠졌다. 검술 연습량을 평소의 세 배로 늘렸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의 실력이라면 연습 없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항상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했다. 그래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일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막 방에서 나오던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

    카르한이 무척 반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편안한 차림이었다. 가벼운 셔츠 한 장만 걸친 데다가 살짝 길어진 머리카락이 눈썹을 가릴 듯 말 듯 했다.

    “수업은 다 끝났어요?”

    “예. 오전 수업은 방금 끝났습니다.”

    “마침 딱 좋네요. 연무장 구경 갈래요?”

    카르한이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오후 수업까지 시간이 있으니까요. 한번 소개해주고 싶었어요.”

    “저는 좋습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별관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정원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지형도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차양과 의자를 설치해둬서 쉬거나 훈련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전부 블로든 가문 기사였는데, 하던 일도 멈추고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덩치 큰 기사들 때문에 까치발을 들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일리아가 폴짝폴짝 뛰자, 카르한이 근처에 있던 연습용 통나무를 가지고 왔다.

    “고마워요.”

    통나무 위에 올라서자 카르한과 키가 엇비슷해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쑥 올라갔다. 카르한이 사는 세상이 이럴 거라 생각하니 새삼 신기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넘어질까 싶어서 팔을 잡아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을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비올레와 프란체였다.

    칼날이 맞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합이 늘어났다. 카르한은 넋을 놓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락부락한 기사들 사이에 있으니 비올레와 프란체는 상대적으로 가냘파 보였다. 그러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어마어마한 기백이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째앵, 쇠붙이의 날카로운 소리가 깨질 듯이 울려 퍼졌다. 먼저 물러난 것은 비올레였다. 프란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검이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허공을 갈라 벼락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올레의 검이 프란체를 막아 세웠다. 키이잉, 날이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자세가 역전되었다. 앞으로 쭉 밀어붙이던 검은 프란체의 목덜미 앞에서 멈추었다.

    “……제가 졌습니다.”

    프란체가 검을 쥔 팔을 늘어뜨리며 패배를 선언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비올레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위험할 뻔했어.”

    “하지만 마님께서는 결국 왼손을 사용하지 않으셨지요.”

    프란체는 어딘가 분해 보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기사들이 위로했다.

    “마님과 붙어서 그만큼 버티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래, 아직 어리면서 욕심이 과하구나.”

    기사들이 웃으며 애정 어린 타박을 내뱉었다. 작게 투덜대던 프란체가 칼집에 검을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어! 아가씨!!”

    프란체가 소리 지르자, 그곳에 있던 이들이 전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프란체와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아가씨!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연무장 구경할 겸 와 봤어.”

    일리아의 대답과 함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기사들을 비집고 나타난 것은 비올레였다.

    “일리아, 점심은 먹었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비올레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둘이 왜 같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은 비올레가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에반테온 소공자.”

    “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카르한이 살짝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카르한의 정체를 들은 기사들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가씨의 남자친구!”

    “무척 강해 보이는데…….”

    “저런 몸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기사들은 카르한의 몸을 힐끗 보더니,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 분명하다고 수군거렸다. 관심이 단번에 카르한에게 쏠리자, 일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따로 검술 수업을 받은 적 없는 초보자야.”

    그제야 웅성거림이 조금 멎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일리아의 말에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명, 비올레만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카르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굉장한 시합을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마워요. 다들 이맘때만 되면 실력이 엄청 늘거든요.”

    일리아의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어서 그렇다며 비올레가 대답해주었다. 비올레의 시선이 카르한의 손에 머물렀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보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력을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소공자.”

    “예.”

    차분하게 대답하는 카르한을 보며 비올레가 싱긋 웃었다.

    “괜찮다면 나와 한번 겨뤄보지 않겠어요?”

    비올레의 제안에 주위가 단번에 시끄러워졌다. 기사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작게 숙덕거렸다.

    “마님께서 아가씨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

    “그래도 초보자라는데…….”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아니야?”

    누군가의 마지막 말에 다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검술 시합이라니 무리예요.”

    “맞습니다. 너무 가혹한 제안입니다.”

    프란체와 다른 기사들도 비올레를 만류했다. 비올레가 카르한보다 한참 체구가 작았지만, 다들 그녀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올레는 무로 유명한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검술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시합이라는 핑계로 카르한이 두드려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뭐 잡아먹는다니?”

    비올레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물었다. 그러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비올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한마디 덧붙였다가 눈총을 받고 싶진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긴 하죠.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좋아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이 망설였다. 아까 비올레와 프란체가 겨루던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자신은 비올레의 상대도 되지 않을 터였다.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시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절의 서두에 비올레가 단념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올레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에 시작하도록 하죠.”

    비올레가 뒤돌아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반듯하게 묶고 검을 재정비했다. 그사이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을 붙잡고 뒤쪽으로 이끌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일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올레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실력은 저게 전부가 아니에요.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을 베는 게 취미거든요.”

    거기다 프란체를 가르친 사람이 비올레였다. 덕분에 프란체는 손꼽히는 실력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비올레를 이긴 적이 없었다. 일리아는 프란체를 최고의 검사라 생각하나, 그건 비올레가 은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올레가 카르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걱정되었다. 교제하는 것까지는 인정해주었으나, 가끔 카르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탐탁지 않아 했다.

    “물론 저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비올레가 먼저 제안해준 것이기도 하고, 저런 강자와 붙어볼 일이 언제 또 있을지 몰랐다.

    “……사실 당신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한번 보고 싶긴 해요.”

    일리아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었기에 카르한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는 무려 8년을 전장에서 굴렀다. 제법 많은 공도 세웠다고 하니 그동안 쌓인 경험치가 상당할 터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르한이 설핏 눈매를 접으며 속삭인 후, 걸음을 뗐다.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가 다가왔다. 카르한이 셔츠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붙이자 무척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프란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르한에게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십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제게만 살짝 말씀해주시죠.”

    “딱히 없는데…….”

    “그럼 태생부터 있던 근육이란 말씀이십니까? 진짜 부럽다…….”

    프란체가 근육으로 꽉 찬 팔뚝을 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카르한은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눈에 띄는 체격 때문에 오해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프란체가 연습용 진검을 내밀었다. 날이 뭉툭해서 다칠 위험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항복이라고 외치십시오.”

    프란체는 괜히 측은한 시선으로 카르한을 보았다. 처음 비올레와 시합을 치른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된통 깨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

    카르한은 프란체에게서 검을 받았다. 매끈하게 뻗은 검을 쥐자 금방 익숙해졌다. 전쟁터에 있을 때는 매일 거르지 않고 쥐었기에 손에 익은 탓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검으로 수많은 적을 베었고, 그만큼 동료를 잃었다. 수도로 돌아온 후로는 지긋지긋한 나머지 칼집째로 처박아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까 비올레와 프란체의 승부를 지켜보았을 때, 손끝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사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상념을 떨쳐내고 온전히 검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검을 멀리했지만 그리웠던 걸지도 몰랐다.

    “준비되었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비올레가 몸을 틀었다. 가죽 바지를 입었기에 평소 드레스로 감추고 있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오랜 훈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사들이 원형으로 쪼르륵 앉았다. 일리아는 프란체가 마련해준 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구경했다.

    연무장 한복판에 비올레와 카르한이 마주 섰다. 서로 정중히 경례를 나눈 후 검을 치켜들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비올레가 선공했다. 카르한은 반 박자 늦게 비올레의 검을 막았다.

    둔탁한 날붙이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올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 한 합에 카르한의 실력을 파악한 비올레가 재빠르게 검을 거두었다가 공격을 가했다.

    카르한은 날아드는 검을 막기 급급했다. 태산 같던 카르한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나갔다. 분명 비올레의 검은 가벼운데 끝이 묵직했다. 카르한은 비올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몇 번이나 검을 받아내다 보니 동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검을 막아낸 카르한이 처음으로 반격했다.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비올레의 검이 떨렸다. 바위를 치기라도 한 듯 손목이 시큰거렸다.

    여유롭기만 하던 비올레의 표정이 돌변했다. 무척 재미있다는 듯 비올레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헉…….”

    입을 떡 벌린 채 지켜보던 기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시합 중에 비올레가 미소 짓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실력을 낼 때였다.

    두 자루의 검이 맞물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물러서기만 하던 카르한이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비올레가 밀리기 시작하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올레의 패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힘이 대단하군요.”

    칼을 맞대고 있던 비올레가 속삭였다. 카르한의 검이 단숨에 비올레를 향해 밀어붙여졌다. 칼날 끝이 그녀의 목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패배가 확정되기 직전, 비올레가 생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대로 재련되지 않은 검은 부러질 뿐이에요.”

    때를 기다리던 노련한 사냥꾼처럼 그녀가 움직였다. 비올레는 검을 비틀어, 쏟아지는 폭포를 걷어내듯 거대한 힘을 흘려보냈다. 순간 반듯하게 뻗은 검이 마치 곡도처럼 휘어져 보였다.

    유려한 선을 그리던 검은 바늘구멍을 겨누듯 한 점으로 향했다. 째앵! 파열음과 함께 날에 반사된 햇빛이 눈동자로 쏟아졌다. 카르한의 동공에 두 동강 난 칼날이 비쳤다. 이윽고 허공을 가르던 칼날 반쪽이 툭, 하고 잔디 위에 떨어졌다.

    사방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카르한은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

    “왼손을 사용한 건 오랜만이에요.”

    깔끔한 패배 선언에 비올레가 검을 허리춤 칼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넋을 놓고 지켜보던 이들이 둑이 터진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초보자라고 하셨잖습니까.”

    “정말로 검술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일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 또한 카르한의 검술을 처음 보았다. 분명 카르한은 어디서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검을 겨뤄서 저만큼 버틴 사람은 처음이었다.

    카르한은 시선이 제게 쏟아지는 줄도 모른 채 부러진 검만 만지작거렸다.

    “검이 부러졌는데…… 배상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부러뜨린 건 나니까요.”

    비올레는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카르한을 가볍게 살피던 비올레가 조언해주었다.

    “소공자, 검을 맞붙일 때 오른손에 의지하는 버릇이 있어요. 검을 쓸 때는 둔탁하고 거칠고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비올레가 속삭였다.

    “시합용이 아닌 실전용 검술이더군요.”

    카르한이 멈칫했다. 비올레의 말은 정확했다. 카르한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검술은 몰랐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으로 직접 익힌 검이었다.

    “…….”

    비올레는 가만히 카르한을 응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야생을 누빈 들짐승 같았다. 자세나 검을 쥐는 방법 등이 교본서와 많이 다르나, 본능적으로 감을 깨우친 상태였다. 게다가 머리도 비상한지 금방 비올레의 버릇을 파악하고 대처했다.

    비올레는 아직도 저릿저릿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바위를 몇 번이고 두드린 것 같았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자칫 잘못했으면 비올레의 검이 먼저 부러졌을 터였다.

    비올레는 가늘어진 눈으로 카르한을 살폈다. 이런 사람은 괴물이 되거나, 영웅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왕이면 영웅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소공자께서는 검술에 관심이 있나요?”

    “저는…….”

    카르한이 멀찍이 서 있던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카르한은 자연스럽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비올레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한 카르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살생은 좋아하지 않지만…… 검을 쓰는 것 자체는 관심 있습니다.”

    “특이하군요.”

    전쟁터에서 익힌 검술이나, 살생은 좋아하지 않는다니. 무척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던 비올레가 일리아에게 손짓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일리아가 다가왔다. 일리아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비올레를 살폈다. 저런 음흉한 미소를 지을 때는 분명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이었다.

    “요즘 별관에 교수들이 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일리아는 어떻게 알았지, 하는 얼굴로 비올레를 올려다보았다. 나름 입단속을 철저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손바닥 안이었다.

    ‘카르한의 사정을 솔직하게 밝힐 수 없어서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혼내시려나.’

    어떤 변명을 할지 고민하는데, 비올레가 말을 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검술 스승도 필요하지 않겠니?”

    “네, ……네?”

    일리아가 눈만 깜빡이자, 비올레가 쐐기를 박았다.

    “내가 소공자를 가르치고 싶구나.”

    ***

    따스한 햇살이 물결처럼 테이블에 밀려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비올레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식사가 아닌, 둘이서 차를 마시는 것은 무척 간만이었다. 침묵 속에서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요즘 어때요?”

    일리아의 질문에 비올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성실하고 근성 있지.”

    짤막한 대답을 내놓은 비올레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비올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르한의 이야기를 꺼내면 미간을 살짝 좁히곤 했다. 그건 탐탁지 않다는 태도였다. 요 며칠 사이에 달라진 그녀의 태도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에게 소개해줄 겸 연무장에 데리고 갔다가 비올레를 만났다. 비올레가 먼저 시합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검을 겨루게 되었다. 시합에서 승리를 거둔 비올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소공자를 가르치고 싶구나.

    그 제안에 모두가 기겁했다. 일리아 또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되물었을 정도였다.

    -진심이세요?

    -그래. 흥미가 생겼어.

    비올레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가 직접 가르친다면 검술 공부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비올레는 일주일에 두 번, 카르한을 가르쳤다. 자세 잡는 법, 기본기, 예법, 검 종류에 따른 공격기 등등. 카르한은 아침 일찍 연무장에 들러 검술을 연마하고, 오후에는 교습을 받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체력은 대단하니 섬세함과 기술만 갖추면 최고가 될 테지.”

    비올레는 무척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은 오랜만이라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괴물이 될지 영웅이 될지, 무척 궁금하단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비올레는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카르한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거침없이 성장하는 그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사실 처음에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카르한을 열심히 굴렸다. 지옥 훈련이라 불릴 만큼 무척 힘든 일정이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갈 터였지만, 카르한은 묵묵히 따라왔다. 도리어 시킨 것보다 곱절로 해와 비올레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거기다 힘은 어찌나 좋은지. 목검으로 연습용 통나무를 쓰러뜨리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요.

    카르한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리어 부족하다며 채찍질하듯 훈련에 매진하곤 했다.

    그러다 이틀 전, 가벼운 시합을 치른 후 카르한이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엄청나게 노력하셨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굳은살 위에 또 다른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평소에는 얇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궤적이 무척 깔끔해서 수만 번은 연습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어림짐작해 보았습니다.

    비올레는 무척 묘한 기분이 들었다. 뛰어난 기사를 배출하기로 이름 난 가문에서 태어난 비올레는 그중에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사람들은 비올레가 노력하지 않고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재능이 있으니까 이만큼 오를 수 있었던 거지.

    -연습? 남들도 그 정도 연습은 하잖아. 그냥 네가 천재인 거야.

    끝없는 연습과 피나는 노력은 전부 천재라는 이름 아래에 가려졌다. 수많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 비올레는 길을 잃게 되었다. 여검사로서 경지에 오른 비올레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모르는 남자였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나쁘지 않지.”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은근히 카르한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별관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일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대륙 각지에서 모셔온 교수들과 카르한이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카르한의 가정사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직접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말하기 곤란하다면 됐다.”

    비올레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네가 어련히 잘 하겠지.”

    저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뭐…… 소공자가 저택에 들락날락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헤인리밖에 없으니까.”

    일리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비올레를 살폈다. 혹시 아버지와 카르한의 사이가 생각보다 좋다는 걸 눈치채신 건가.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숨기려고 애쓰시던데…….

    비올레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음에 거래 문제로 협상할 자리가 있는데, 따라 오겠니?”

    “제가 가도 되나요?”

    “사업에 관심 있다고 했으니, 공부할 겸 천천히 배워가는 거지. 그리고 친분을 쌓아두면 좋으니까.”

    “알겠어요. 다음에 가실 때 불러주세요.”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올레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은 차를 좀 더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돌아온 일리아는 오늘 아침에 하지 못한 일과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신을 가득 채운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고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문득 비올레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친분을 쌓아두면 좋으니까.

    지금까지 일리아는 사람들과 담을 쌓아왔다. 낯선 이들과 엮이는 것이 거북하기도 했고, 리하트와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그때만 해도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업을 이끌겠다고 다짐한 이상, 이전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사업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일리아는 초대장을 하나씩 살폈다. 연회는 부담스러웠고, 소규모 모임 정도면 적당할 듯싶었다. 초대장을 확인하던 일리아의 손이 멈칫했다. 유독 화려한 초대장이었다.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젊은 부자들의 모임에 초대합니다.]

    대충 읽어보니, 사업을 이끌거나 투자에 관심이 있는 귀족 영애들의 모임인 듯했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리아는 편지 끄트머리에 적힌 장소를 확인했다. 델로타 저택이었다.

    “흐음…….”

    일리아는 손끝으로 책상만 톡톡 쳤다. 스텔라를 중심으로 젊은 부호들이 모인다는 소문은 대충 들었다. 그 모임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제법 쓸모 있다는 것도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스텔라 델로타의 집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엮일 텐데 피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픽 웃으며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귀한 고객님이 꽃은 잘 심었는지 한번 보러 갈까.”

    ***

    스텔라는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일리아의 답신을 받고 눈을 깜빡였다.

    “……정말 온다고?”

    당연히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보낸 초대장이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스텔라는 일리아 블로든의 꿍꿍이가 궁금해졌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참석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모종을 다 옮겨 심은 참이었다.

    빨리 꽃을 틔울 수 있도록 비싼 영양제를 들이부은 덕에 스텔라의 장미정원은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었다. 매사에 저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굴던 일리아가 정원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스텔라는 모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저택을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미고 장신구와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모임을 가지기로 한 날이 왔다.

    스텔라는 약속 시간에 맞춰서 후원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부터 마차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문객이 모두 부호들이라, 마차는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금을 두르는 것은 기본이고, 비단 깃발을 달거나 바퀴에 보석을 박은 이들도 있었다. 마차만큼 힘을 잔뜩 준 영애들이 하나씩 내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랜만에 뵈어요.”

    다들 웃으면서 서로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누가 더 훌륭한 마차를 끌고 왔는지,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장신구를 했는지 살폈다. 그러면서 자신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는 사람은 스텔라 델로타였다. 거상의 외동딸로 이름이 자자한 그녀는 이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다들 기 싸움을 하면서도 스텔라에게는 잘 보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한창 인사를 나누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착했을 즈음. 마지막 손님이 왔다. 저 멀리서부터 잘 빠진 흑마 네 마리가 이끄는 흰색 마차가 매끄럽게 후원 입구를 통과했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마차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마차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이국적인 디자인이었다.

    생김새가 번듯한 사내 두 명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푸른색 구두가 간이 계단을 밟았다. 사내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온 일리아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가장 앞에 있던 스텔라를 본 일리아가 싱긋 웃었다.

    “마중 나와 주신 건가요, 스텔라 영애?”

    일리아와 스텔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맞닿은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스텔라였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만 후원으로 갈까요?”

    여기서 설전을 벌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스텔라가 걸음을 뗐고, 영애들이 뒤따라 걸어갔다. 일리아는 마차 앞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에게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니, 마차 안에서 대기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말렉과 프란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따라가진 못해도 이곳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대기하겠다는 태도였다. 일리아는 두 사람 다 고집이 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최대한 일찍 돌아올게.”

    그 말을 남겨두고 일리아는 영애들을 뒤따라갔다. 선두에서 걷던 스텔라는 연신 뒤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일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저를 챙겨줄 성격은 아니니, 뭔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후원 안쪽으로 걸어가던 스텔라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영애들의 감탄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와아…….”

    “어쩜.”

    다들 걸음을 멈춘 채 홀린 듯이 꽃밭을 바라보았다. 주홍색으로 물든 꽃밭은 팔레트에서 가장 예쁜 색을 뽑아 톡 떨어뜨린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꽃잎이 물결치며 향긋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다들 황홀한 얼굴을 하자, 스텔라는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 정원을 한번 손보았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처음 보는 꽃인데, 이름이 뭔가요?”

    다들 재잘거리며 칭찬을 쏟아냈다. 그중 몇몇은 탐욕 어린 눈길을 보내며 질문했다.

    “꽃 이름은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어렵게 구한 꽃이거든요.”

    스텔라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이들이 아쉬움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조차 어렵게 구했다면 정말 가지기 어려운 꽃일 터였다.

    스텔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스텔라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바로 저 표정이 보고 싶었다. 매사 심드렁하게 굴던 일리아 블로든이 놀라는 모습을 말이다. 일부러 블로든 저택에서 봤던 꽃밭의 두 배 넓이로 만들었는데, 보람이 차고 넘쳤다.

    “아직 부족한 것 같아서, 꽃밭을 차츰 더 늘려보려고요.”

    스텔라는 일리아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일리아가 더더욱 놀라워하자, 스텔라는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었다.

    ‘여기서 더 늘린다고?’

    일리아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 꽃밭 크기를 보고, 얘가 모종을 이렇게 많이 사갔나 싶었다. 왠지 교수들 초빙하고 나서도 돈이 남아돈다 했다. 그리고 스텔라가 꽃밭을 더 늘리겠다는 말을 듣고 놀란 까닭은…….

    ‘아무래도 빨리 키우라고 해야겠네.’

    공급자인 일리아조차 모종이 부족했다. 블로든 저택에 심으려고 했던 모종까지 팔아야 할 듯했다. 이왕이면 팔 수 있을 때 많이 팔 생각이었다.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 일리아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꽃밭을 지나, 후원 안쪽으로 들어서자 티 테이블이 보였다. 얇은 비단으로 덮인 테이블 위에는 4단으로 이루어진 디저트 트레이와 주홍색 꽃이 꽂힌 크리스털 화병, 티세트 등이 있었다.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무척 화려한데 촌스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색감의 조화와 배치가 훌륭한 덕분이었다. 별로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안목이 제법 괜찮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스텔라의 말에 일리아는 자리를 확인했다. 원래 주최자의 자리를 상석으로 두고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지 않은 자리였다. 그리고 일리아의 이름이 적힌 자리는 가장 말석이라 불리는 위치였다.

    일리아는 눈썹을 한번 치켜 올리곤,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 앉았다. 스텔라와 다른 영애들은 당황한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도리어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저를 응시하는 이들을 마주 보았다. 안 앉고 뭐 하냐는 시선에 스텔라는 미간을 좁혔다.

    말석에 배치 받은 일리아가 치욕스러워하거나 따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덥석 착석한 것으로 모자라 말석이 상석이라도 된 것처럼 굴 줄은 몰랐다.

    스텔라는 무척 찝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됐지만, 그 과정이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스텔라는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고용인들이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쏟아지는 시선에 뺨이 따끔거렸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이들부터 곁눈질하는 이들까지, 모두가 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많이 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싹 살펴오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지금 일리아가 착용한 것은 전부 블로든 사의 물건이었다. 그러니 저를 보는 눈빛이 호의든 적의든 상관없다. 한번 관심 있게 봐두면 다음에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착용했던 물건들을 눈여겨볼 테니까.

    ‘뭐, 취향이 맞으면 하나쯤 사겠지. 돈 많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유행에 민감한 돈 많은 손님들이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새 제품들을 착용하고 왔다. 몇몇이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일리아는 일부러 소매를 살짝 쓸어 올렸다.

    찻잔이 가득 채워지고 고용인들이 뒤로 물러서자, 일리아를 향한 시선이 흩어졌다. 모임의 주최자인 스텔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각자 간단하게 인사말을 할까요. 서로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스텔라를 시작으로 한 명씩 이름과 가문을 밝혔다.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백작의 딸, 무역왕의 딸, 부동산 큰손……. 다들 제국에서 돈으로 한가락씩 하는 가문이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일리아의 차례가 다가왔다.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짤막한 소개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주위에 앉아 있던 이들이 샐쭉 웃으며 말을 걸었다.

    “블로든. 유명하지요.”

    “제국에 블로든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나긋한 말투는 가시가 서려 있었다. 일리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제 이름을 듣고 알랑거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는 오랜만이었다. 다들 잘사는 집안이라 아부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저를 경쟁자라 생각한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때 스텔라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카락과 눈이 마주쳤다. 투자로 이름을 날린 백작 영애였다.

    “그나저나 영애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일리아는 제게 질문을 던진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가업을 잇거나,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녀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블로든 가문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작 영애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일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은 없었다. 경제 활동이라면 가게랑 건물 몇 채를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다 금맥에서 나오는 지분의 반절이 제 것이었다.

    가끔씩 어머니와 아버지의 일을 돕기도 하고, 이전에 투자해둔 사업도 몇 가지 있고……. 생각보다 이것저것 하는 건 많았지만, 구구절절 말하기는 귀찮았다.

    “작은 가게를 몇 개 가지고 있긴 해요.”

    간략한 대답에 백작 영애가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그저 가문의 수혜를 받는 것이 전부라니…….”

    부모의 돈으로 가게를 차려 편하게 돈을 버는 거겠지, 하고 그녀가 추측하듯 말했다. 일리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혐오와 편견이 서려있었다. 블로든 가문은 대단하지만 일리아 자체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걸로 수익이 나긴 하나요?”

    “그럭저럭 나쁘진 않아요.”

    “적자가 나도 메워줄 배경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겠어요.”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도 일리아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었다. 유유자적한 모습에, 그녀가 눈썹을 좁혔다. 그리고 일리아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지요?”

    마치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어깨를 폈다.

    “투자를 하고 있어요.”

    “투자요?”

    “영애는 잘 모르시겠지만, 전망을 알면 투자로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요.”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며 그녀가 자랑 섞인 설명을 내놓았다. 일리아는 지루한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에 머물렀다.

    ‘이 집 꽃차는 잘 만드네.’

    예전에 이름을 내건 꽃차로 대박을 쳤다더니……. 스텔라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았다. 지루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자,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투자는 해봤어요.”

    “그래요? 소액으로요?”

    제 기준으로는 소액이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었다.

    “소액으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죠.”

    백작 영애는 그럼 안 된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거금을 투자했는데, 1년 만에 수익을 배분 받았어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녀는 마치 물어봐주길 바라는 듯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일리아는 순순히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벌었는데요?”

    “이백만 크로엘이요.”

    금액을 들은 일리아는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넸다.

    “저런……, 다음에는 더 잘 되겠죠.”

    일리아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표정이 안 좋아진 영애를 보며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응? 망한 거 아니었어?’

    일리아는 뒤늦게 대화의 흐름을 되짚어보았다.

    ‘아, 자랑하는 거였구나.’

    일리아는 뒤늦게 자신이 눈치 없었음을 깨달았다. 제게 그 정도 수익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말해버렸다.

    자랑하려다가 졸지에 위로를 받게 된 백작 영애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아까 투자해본 적이 있다고 했죠? 수익이 얼마나 되는데요?”

    일리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곧바로 무역선 투자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북측 왕국과 교역이 뚫리고, 투자자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상선이 대거 출항했다.

    그때 일리아는 작은 선박에 약간의 돈을 투자했었다. 그 왕국에서만 나는 모래가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투자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을 즈음. 단 한 척의 배만 제국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해류를 읽지 못한 상선들이 전부 침몰한 것이었다.

    일리아가 투자한 배는 작은 데다가 선장의 노련한 기술 덕분에 무사히 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탓에 왕국에서 가져온 최초의 물건들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삼백만 정도 수익을 얻은 것 같네요.”

    일리아가 덤덤히 대답하자 백작 영애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아가 백만 정도 더 벌긴 했지만, 투자는 역시 수익률을 봐야 했다.

    “수익률은요?”

    “정확하진 않은데, 3천 배 정도일 거예요.”

    듣고 있던 누군가가 티스푼을 떨어뜨렸다. 푼돈으로 그 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고? 백작 영애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베니시아 왕국과 처음 교역할 때 투자했거든요.”

    베니시아와 첫 교역 때 선박이 단체로 침몰한 사건은 워낙 유명했다. 백작 영애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지자, 스텔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스텔라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차가 식겠어요. 제가 직접 만든 건데, 한번 시음해보세요.”

    스텔라의 말에 다들 얌전히 차를 마셨다.

    “향이 정말 좋네요.”

    “색감도 예뻐요. 이번에도 인기가 좋을 것 같아요.”

    알랑거리는 칭찬이 쏟아지고,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끌어냈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자 영애들은 너도 나도 이야기에 참여했다. 다들 관심사가 비슷하다 보니 물질적인 것들이 주로 대화에 올랐다. 요즘 유행하는 물건이나, 경매, 투자…….

    일리아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제법 쓸모 있는 정보도 화두에 올랐다. 그러다 대화가 영양가 없는 주제로 빠지자, 심심해진 일리아는 둥글게 둘러앉은 영애들을 살폈다.

    모임에 참석한 영애들은 스텔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대놓고 알랑거리는 이들부터 은근히 아부하는 이들까지. 이 모임에서 스텔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블로든에 가려져 있긴 해도, 델로타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거기다 스텔라는 어린 영애들뿐만 아니라, 귀부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행보 하나하나 주목을 받았으며, 유행의 중심에 서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는 멀찍이 앉아 있던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잘 봐두라는 듯 그녀가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지만, 일리아는 별생각 없이 쿠키를 집어 들었다. 쿠키를 한 입 먹은 일리아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다과는 맛없네.’

    차는 훌륭한데 디저트는 그냥 그랬다. 일리아는 스텔라 쪽을 힐끗 보았다. 스텔라의 접시는 텅텅 비어 있었다. 부스러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빈 접시였던 모양이었다. 자기 집 디저트가 맛없다는 걸 알고 일부러 받지 않았나 의심이 갔다.

    일리아가 스텔라의 빈 접시를 쳐다보자, 그것을 알아본 누군가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스텔라 님 접시에만 아무것도 없네요. 고용인이 실수했나 봐요.”

    스텔라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그녀는 손을 들어 고용인을 불렀다. 고용인은 잠시 눈치 보다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스텔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자는 무척 뿌듯한 얼굴로 스텔라가 쿠키를 먹기를 기다렸다.

    스텔라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모두에게 대접한 디저트를 대놓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스텔라는 쿠키를 먹었다. 그러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다른 디저트를 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대화의 흐름은 허영과 자랑으로 넘어갔다.

    ‘집에 가고 싶다…….’

    괜히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서 여기서 고통 받고 있었다. 지루해진 일리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아까 제게 투자를 운운하던 백작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일로 마음이 상했는지 눈빛이 매서웠다.

    “그나저나 우연히 타블로이드지를 읽다가, 익숙한 이름을 봤거든요.”

    백작 영애의 말에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그녀가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블로든 영애. 테르시안 영식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세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녀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꽂혔다. 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회피한다고 생각했는지, 백작 영애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떠벌렸다.

    “제목만 봐서는 테르시안 영식이 바람이라도 피운 모양이던데……. 조만간 두 분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결혼할 거라고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냐며 비웃었다.

    “맞아요. 파혼할 거예요.”

    일리아가 순순히 수긍하자, 백작 영애는 웃음기를 거두고 안타까운 척 중얼거렸다.

    “상심이 크겠어요. 약혼자가 바람이라니…….”

    “그러니까요. 결혼식을 앞두고 말이에요.”

    “오랫동안 교제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곧바로 다른 이들이 말을 받았다. 너무 속 보여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들 일리아를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어차피 재력으로는 깔 수 없으니,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여자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속으로는 아쉬워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테르시안 영식 정도면 손꼽히는 신랑감이잖아요.”

    백작 영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리하트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가만히 들어주던 일리아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선한 인상 때문에 상냥한 미소가 지어지자, 모두들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저를 걱정하는 척하며 깎아내리던 이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다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들의 비꼼을 무시한 일리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테르시안 영식 같은 바람둥이가 취향인가 봐요? 아까부터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무슨……!”

    “소개해드릴까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요.”

    일리아의 말에 백작 영애는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주제를 끌고 가봤자 건질 게 없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힐끗 보았다. 뭔가 한마디라도 거들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조용했다. 그럴 애가 아닌데, 하고 유심히 보니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 보였다.

    자세히 살피니 입에 뭔가를 머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조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와줄까, 말까.’

    마음 같아서는 별로 돕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색만 봐서는 당장 숨넘어갈 것 같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보단 낫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입을 열었다.

    “델로타 영애.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나눌 말은 아니니, 잠깐 시간을 내어주겠어요?”

    일리아의 말에 몇몇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뭐라 하기 전,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아는 의자를 밀어 넣고 스텔라를 뒤따랐다.

    다급한 걸음으로 티파티장을 벗어난 스텔라는 이내 정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티파티장과 멀어졌을 즈음 수풀에 고개를 처박았다. 우웨엑, 하고 구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라 온 일리아는 걸음을 멈춘 채 얼굴을 굳혔다.

    ‘혹시…….’

    저번에 다이어트를 독하게 했다더니, 혹시 먹고 토하는 건가 의심이 갔다. 이전에 블로든 저택에 쳐들어왔을 때보다 좀 더 마른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이고 구역질하던 스텔라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스텔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창피한 듯했다.

    “물 가져다 줘?”

    “웬 참견이야!”

    스텔라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없어도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었어.”

    절대 도움 받을 생각이 없었다고 스텔라가 강조했다. 일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예쁘다고 얘를 도와줬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스텔라를 보며 일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스텔라는 입매를 꾹 다문 채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복잡해 보였다. 자존심 상한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독기는 없었다. 스텔라는 일리아를 가만히 노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혹시 약점이라도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왜?”

    일리아의 반응에 스텔라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스텔라는 결국 팩 뒤돌아섰다. 스텔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프란체가 이런 상황에 자주 하던 말을 내뱉었다.

    “……싸가지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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