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리하트 테르시안은 그 좋아하는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서재에 틀어박혔다.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깃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이전에 리하트는 스텔라의 협력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텔라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났다. 에반테온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로 스텔라가 돈으로 매수한 여자였다. 지금껏 스텔라는 하녀를 통해 카르한의 일정을 미리 알아내곤 했던 모양이었다.
리하트 또한 블로든 백작가 하인을 매수해본 전적이 있었기에 일은 쉽게 풀렸다. 그는 에반테온 공작가 하녀를 만나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약점을 찾지 못해서 안달 난 상태였다.
하녀는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공작가에서 입단속을 당했는지 쉬이 말해주지 않았다.
리하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작업을 걸었다. 여자를 유혹하는 것에 능숙한 그는 돈으로 넘어오지 않던 하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하녀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한 후에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 곁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건데……, 실은 둘째 도련님은 임시 후계자에 불과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에반테온 공작가에 장남이 있다는 거, 아시죠?
그 비밀은 리하트가 그토록 찾던 카르한의 약점이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은 장남을 몰아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장남은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나간 상태였다. 잠시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긴 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제국으로 돌아와 공작이 될 것이었다. 심지어 카르한은 가문 내에서도 미운털이 박혀 딱히 힘이 없다는 말까지 전해주었다.
“그렇단 말이지.”
리하트는 입매를 비죽 끌어올렸다. 일리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 리하트는 믿지 않았다. 마침 딱 자신보다 신분 높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데려온 것이 무척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하트는 일리아가 저를 견제하기 위해 카르한과 모종의 거래를 맺었다고 추측했다.
만약 카르한 에반테온이 빈껍데기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둘 사이의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은 충분했다. 리하트는 조만간 일리아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매듭지었다.
***
일리아는 옷장에 걸어둔 외투 두 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품이 넉넉해 보이는 외투는 옷장 속에서 유독 튀었다.
며칠 전, 일리아는 카르한과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 그때 카르한이 추위를 타는 저를 위해 건네 준 옷이었다.
일리아는 외투를 꺼내 들었다. 세탁 전이라 그런지 향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 어떤 향수를 쓰는지 모르지만 숲에 들어선 것처럼 청량한 향이었다. 묵직하고 독한 향이 아닌, 은은한 시트러스의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카르한과 묘하게 어울렸다.
향기를 맡으니 그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빛이 점점이 펼쳐져 있던 어둑한 강가. 빨려 들어갈 것 같던 새파란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 피어오른 열기가 아직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거지.’
그때 무언가에 홀린 듯했던 기분은 전부 술 때문일 것이다. 일리아는 옷이 구겨질까 싶어, 다시 걸어둔 후에 뒤돌아섰다. 드레스룸에서 나오자,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한 시간 후에 석찬이 있습니다.”
일리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하는 날이었다.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일리아는 잠옷을 벗고 간단하게 치장했다.
만찬장에 도착하자, 벌써 자리에 앉아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일리아는 빠르게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다. 딱 맞춰 왔구나.”
클리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헤인리를 보았다.
“오라버니도 일찍 오셨네요.”
“그러게 말이다. 요즘 바쁜 것 같더니.”
클리프가 한마디 거들자, 헤인리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일이 많긴 했는데, 더 빠르게 처리하는 법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지독한 놈.”
클리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잠시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과거에 헤인리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가정교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가정교사는 무척 깐깐한 사람이었는데 똑같은 성격을 가진 헤인리와 자주 부딪쳤다.
헤인리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그는 무지막지한 과제를 내주었고, 헤인리는 보란 듯이 하루 만에 끝내놓곤 했다. 심지어 일리아와 놀아주기 위해 일주일 치 숙제를 세 시간 만에 끝낸 적도 있었다. 나중에 그걸 알게 된 부모님은 독종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모두 왔으니 식사할까요?”
비올레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화려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수놓았다. 귀족이라 한들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을 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다들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란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일리아는 잠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모두가 함께 식사할 일이 손에 꼽았다. 웃는 얼굴보다 화를 내거나 걱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더욱 익숙했다. 저 때문에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풍경이라 생각하니, 아쉽고 미안했다. 일리아는 속으로 다시 반성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시 클리프가 애지중지 키우는 순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후 메인 요리가 올라왔다. 비올레가 헤인리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는데…….”
“거절해주세요.”
“아직 내 말 안 끝났단다. 뭐가 그렇게 급하니?”
비올레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헤인리는 비올레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듣는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정말이지. 누구 고집을 닮았는지.”
그러자 클리프가 조용히 비올레를 바라보았다. 비올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던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클리프가 움찔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비올레는 나이프로 우아하게 고기를 썰며 한탄했다.
“결혼도 싫다, 사업도 물려받기 싫다. 정말이지 맞춰주기 어렵구나.”
“역시 셋째를 생각해봐야 할까요?”
클리프가 슬그머니 묻자, 나이프가 고기를 한 번에 갈랐다. 쩍 소리와 함께 그릇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클리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기는 누가 낳지요?”
“미안해요. 부인.”
클리프가 곧바로 사과했다. 비올레는 두 동강 난 접시를 치우게 한 후 헤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긴, 네 성격을 맞춰줄 사람이 없을 테니.”
비올레는 혼자 납득하고 말았다. 헤인리는 어찌나 철저한지, 푼돈을 빌려줄 때도 부모에게 계약서를 쓰게 할 성격이었다.
벌써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도 결혼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이유도 전부 헤인리의 성격 탓이 컸다. 헤인리의 부인이 될 사람이 사기 결혼이라며 소송을 걸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에게 데릴사위를 데려오라 하고 싶지만…….”
비올레가 말을 흐렸다.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는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미래의 공작이 될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어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소공자는 만나고 있니?”
“며칠 전에 만났어요.”
일리아의 대답에 모두가 시선을 보내왔다. 다들 카르한에게 무척 관심이 많았다.
“저번에 배웅하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상처는 어떻고?”
“물어보니, 흉터 없이 잘 아물었대요.”
“다행이구나.”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비올레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평온했다.
이전에 카르한을 저택에 초대한 후로 가족들은 그를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직까진 카르한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비올레가 일리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후계자 수업으로 많이 바쁠 텐데 만날 시간이 있니?”
“성실해 보이던데 어련히 잘 하겠지요.”
일리아가 아닌 클리프가 빠르게 대답했다. 조용히 식사하던 헤인리가 비올레의 말을 받았다.
“고작 한 번 만났으니, 성실한 척 연기하는 걸지도 모르죠.”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던데.”
다들 가만히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러냐는 시선에 클리프가 흠칫했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 카르한을 두둔한 모양이었다. 클리프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소공자와 만났어요?”
비올레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클리프는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가 소공자와 사적으로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딸을 데리고 갈 놈인데! 만나 달라고 부탁해도 안 만나 줄 겁니다.”
괘씸하다며 클리프는 과하게 흥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본 비올레와 헤인리는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 그래요.”
클리프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다음에 카르한과 오케스트라를 관람할 때는 변장이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이렇게 취미가 잘 맞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데, 하필이면 딸의 남자친구라니.
클리프는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애썼고, 어느덧 이야기는 헤인리에게 넘어갔다. 반듯하고 매끄럽게 고기를 썰던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승진할 것 같습니다.”
“뭐, 벌써?”
“상사가 내어주는 일을 전부 처리했더니, 실적이 많이 쌓여서요.”
“축하해요, 오라버니.”
일리아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이에 비해 이례적인 승진이었기에 가문의 경사였다.
“축하한다.”
“고생했구나.”
축하 인사를 건넨 비올레와 클리프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은 누가 물려받을지…….”
“지금부터 전문 경영인을 찾아봐야 할까요.”
한탄 섞인 말투에 일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모님은 제게 사업을 물려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일리아가 지금껏 욕심을 낸 적도 없었고, 리하트와 결혼한 후에는 후작부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할 거라 못 박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입술만 달싹였다. 이제 와서 경영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비난 받더라도, 의견은 내고 싶었다. 카르한에게 의견을 표출하라 말해놓고 정작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 우습지 않은가.
일리아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는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업을 잇고 싶어요.”
일리아의 발언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업을 잇고 싶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클리프가 물었다. 비올레 또한 클리프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가족들의 반응에 일리아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손바닥이 조금 축축해졌다.
‘역시 너무 성급하게 말한 것일까.’
아직 가족들의 신뢰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사업을 잇겠다고 하니 반길 리 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생각보다 속이 따끔거렸다.
조용해진 만찬장 속에서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장난이라고, 잠시 헛소리를 해본 거라고 말할까 고민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내뱉은 진심이었기에 철회하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들었다.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저는 오라버니처럼 뛰어나지도 않고…… 배운 것도, 해둔 것도 없으니까요.”
리하트와 연애하던 시절에는 좋은 부인이 되고 싶어 신부 수업을 받았다. 부모님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그것이 일리아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고 싶어요.”
일리아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잠시 아무 말 없던 비올레와 클리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헤인리 또한 식기를 내려놓고 일리아만 쳐다보았다. 비올레가 세 사람을 대표하여 일리아에게 물었다.
“아니……, 언제부터 사업에 관심이 있었니?”
“이전부터 관심을 두었는데, 사업을 물려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이에요.”
“결혼은 어쩌려고?”
“결혼은…….”
일리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리하트 이후로 일리아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르한과는 계약 연애일 뿐, 일 년 후 목적을 이룬 후 헤어지기로 했다.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때 불쑥 카르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나서 일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아직은 생각 없어요.”
비올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혼기가 찼다고 꼭 결혼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클리프가 들떠서 한마디 덧붙였다. 잠자코 있던 헤인리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공작부인이 되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거다. 사교계에 여우가 몇 마리나 들어앉아 있는지…….”
다들 이때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사업 이야기에서 결혼으로 주제가 넘어간 것 같아서, 일리아는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래서 사업을 제가 잇고 싶은데…….”
“그렇게 하렴.”
비올레가 흔쾌히 승낙했다. 일리아는 자신이 사업을 잇는 게 아니라, 간식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가 하고 잠시 고민했다.
“……정말 괜찮아요?”
“하기 싫다는 놈을 억지로 앉혀놓을 수는 없지 않니.”
비올레가 헤인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헤인리는 못 들은 척 다시 식기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집은…….”
“이쯤 되면 설득을 포기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헤인리가 받아치자, 비올레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일리아가 사업을 물려받는다고 하니, 이제 네게 물어볼 일은 없단다.”
얼떨떨해진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나름 많은 고민 끝에 내뱉은 의견이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저를 오냐오냐 한다 해도, 이렇게 바로 허락받을 줄은 몰랐다. 비올레가 고개를 돌려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뭔가 하고 싶다 말하는 건 오랜만이구나.”
“…….”
“하지만 단순한 각오만으로는 안 돼.”
비올레의 연녹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니?”
제국 곳곳에 손을 뻗친 블로든은 이렇다 할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 말인즉 블로든 가문 하나에 수많은 이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어깨가 무거웠다.
막중한 책임감이 일리아를 짓눌러왔다. 지금이 발언을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잠시 말이 없던 일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세할게요.”
비올레는 일리아의 눈을 통해 다짐을 확인했다.
“일단은 그걸로 됐다.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따져봐야 할 테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꾸나.”
비올레의 말에 일리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나 커버렸다니…….”
지켜보던 클리프가 손수건 대신 냅킨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아장아장 걷던 것이 어제 같다며 그가 냅킨을 쥐어짤 기세로 움켜쥐었다. 유독 조용히 있던 헤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들면 말해라. 도와줄 테니.”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리하트를 만난 후로 항상 반대하던 모습만 봐서 그런지, 자신의 말에 긍정해주는 헤인리가 낯설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한참 망설인 이유는 헤인리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그가 물려받을 자리인데, 자신이 빼앗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괜찮아요?”
“네가 내린 결정이니, 잘 하겠지.”
“……아니, 그거 말고요.”
“그것 말고 뭐가 있지?”
헤인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사업에 개미 눈물만큼의 미련도 없는 듯했다. 도리어 짊어진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 그제야 일리아는 마음이 편해졌다. 밝아진 일리아의 얼굴을 본 헤인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고마워요.”
가족들의 응원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
일리아는 간만에 외출을 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림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되지만, 일리아와 클리프는 안목이 비슷했다. 덕분에 클리프가 다른 일로 급할 때 일리아가 직접 가서 그림을 고르곤 했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 근래에는 카르한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이제 자기주장도 제법 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를 무섭다고 느끼지 않으니 이전처럼 꼬박꼬박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카르한이 바쁠 것 같아서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았다.
계속 만나다가 일주일 넘게 만나지 않으니, 왠지 허전했다.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나중에 헤어져야 할 사람인데 벌써부터 정 들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할 듯싶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예약해둔 갤러리로 향했다. 그때 옥신각신 싸우는 두 남녀가 보였다. 갤러리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꾀죄죄한 옷을 입은 여자였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 그림을 봐주세요.”
“아, 됐고 당장 나가요. 우리는 무슨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나.”
주인이 여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두 다리로 버틴 채 애원했다.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작품이 별로라면 자신도 포기하겠다며, 여자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싸구려 신문지로 감싼 얄팍하고 네모난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나무판을 신문지로 돌돌 감싼 모양이었다. 갤러리 주인은 여자가 내민 물건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안 봐도 형편없을 게 분명할 텐데, 시간 아깝게! 썩 꺼지지 않으면 경비대를 부르겠소!”
재수 없다는 듯 그가 침을 뱉었다. 매몰차게 문이 닫히고, 여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다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나무판을 주웠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한참 그러고 있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일리아는 무척 불편해졌다. 갤러리 주인의 입장은 이해되었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이니 상품성 있는 작품을 판매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사정하는데 잠깐 정도 시간을 내어 작품을 봐줄 수는 있지 않나.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작품일 텐데, 바닥에 내팽개치고 침을 뱉다니. 작품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아버지가 보시면 노발대발할 일이었다.
유리 문 앞에 서서 여자가 갔는지 살피던 갤러리 주인이 일리아를 보고 뛰쳐나왔다. 방금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그가 환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블로든 님.”
일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약 취소할게요.”
“예……?”
“구입하고 싶은 작품이 없을 것 같아서요.”
작품을 오직 돈으로만 취급하는 갤러리는 안 봐도 뻔했다.
“그, 이번에 좋은 작품을 많이 들여왔는데…….”
당황한 주인은 혹시 자신이 일리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싶어 절절맸다.
일리아는 이런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 순간 리하트를 떠올린 일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드럽고 상냥하기만 하던 얼굴이 싸늘해지자, 주인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러다가 귀한 손님을 아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 다음에 꼭 찾아와주십시오!”
그가 굽실거리며 일리아를 배웅해주었다. 그러나 다시는 블로든 가문 사람이 저 갤러리를 방문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까 봤던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저 여자는 문전박대 당하는 것이 처음은 아닐 터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끈기가 싫지 않았다. 저런 사람은 과연 어떤 작품을 그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행동이 적선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일리아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말렉이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의 결정이 저 사람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일지도 모르지요.”
“……고마워.”
결국 일리아는 여자를 쫓아갔다.
“잠시만요.”
일리아의 부름에 여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얼굴을 본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장료 때문에 미술관 앞에서 머뭇거렸던 그 여자였다.
“……누구세요?”
여자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일리아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잠시 망설이던 일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아까 갤러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혹시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녀는 기운 없이 대답해주었다.
“네……. 하지만 작품 발표도 해본 적 없어요. 위탁하고 싶어도 번번이 쫓겨나기만 하고.”
“…….”
“아무래도 그림 그리는 걸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그만둔다니…….”
일리아가 무척 안타까워하자,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운 좋게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신인들의 그림을 봤어요. 세상에 잘 그리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전시회에 갔다가 화려한 작품들을 보고 기가 많이 죽은 모양이었다.
“저는 그런 물감을 살 형편도 안 되고, 단조롭고…….”
이런 사소한 이야기까지 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묻지 않아도 형편이 뻔히 보였다.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처지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망설임 끝에 결정을 내렸다. 만약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클리프가 운영하는 아틀리에를 추천해줄 생각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제 그림을요?”
“네. 안 될까요?”
“그게 아니라, 이런 게 처음이어서…….”
목탄화인데 괜찮으냐고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조심스레 신문지를 벗겼다. 그러자 나무판 위에 검은색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 종이가 드러났다.
“!”
그림을 본 순간, 일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무척 거칠고 파격적이었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간 굵직한 선들은 늑대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림 속 늑대가 금방이라도 힘 있게 달려 나갈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해지더니 솜털이 오스스 솟았다. 길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리아는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역시 많이 미숙하죠? 사실 유화가 전공이었는데, 물감은 너무 비싸서…….”
일리아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깜짝 놀란 여자가 상체를 젖혔다.
“유화가 전공이라고요?”
“네? 네. 지금은 목탄으로 그리는 게 전부지만…….”
“맙소사.”
대박이었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여기서 전공을 살리면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가 될 터였다. 일리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랑 계약해요!”
***
바네사는 평민이지만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가족들은 바네사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네사는 가족들의 응원과 지원을 날개 삼아, 꿈을 향해 비상했다.
그러나 열다섯이 되기도 전, 그녀의 집안은 쫄딱 망해버렸다. 부모님이 연대보증을 잘못 선 탓이었다. 근방에서 가장 번듯했던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빚쟁이에게서 도망쳐 정착한 곳은 빈민가였다.
부모님은 빚을 갚기 위해 먼 타지로 떠났다. 바네사는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하루하루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럼에도 바네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근처 식당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그림을 그렸다. 번듯한 재료 하나 없었지만, 숯과 목탄을 구해 그림 연습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바네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형편은 더더욱 나빠지기만 하는데, 그림으로 먹고살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놓아야 했다.
그때 바네사는 수도에서 큰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관람해보기로 결심했다.
막상 미술관 앞에 도착하고 보니 입장료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바네사에게는 선뜻 쓸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망설임 끝에 뒤돌아섰을 때, 전시회 직원이 외쳤다.
-천 번째 손님은 무료입장입니다.
집안이 망한 후로 악운만 가득하던 바네사에게 천운이 떨어진 것이었다. 무료로 미술관에 입장하게 된 바네사는 신인들의 작품을 보았다. 비싼 물감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작품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칙칙하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저 자신이 초라해졌다. 전시회를 다녀온 바네사는 전부 포기해버릴까 고민하다가, 정말 마지막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후로 바네사는 무턱대고 갤러리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으면 정중하게 거절당했고, 나쁘면 욕설을 듣고 경비병에게 끌려 나갔다. 공통점은 그 어디도 바네사를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갤러리를 도는 동안 반복된 거절과 멸시는 그녀의 자존감을 문드러지게 하였다. 남은 것은 혹시나 하는 희망의 씨앗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바네사는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거절당하면 작품은 전부 태우고, 생업에 매달리자.’
바네사는 갤러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난과 욕설만이 돌아왔다. 품고 있던 씨앗마저 도려내졌을 때, 바네사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바네사는 집으로 돌아가 작품을 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바네사를 불렀다.
“잠시만요.”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가 보였다. 훤칠한 남자 두 명을 대동한 데다가 귀티가 흐르는 것이 척 봐도 귀족 영애로 보였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바네사가 뒤늦게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그녀는 아까 갤러리 앞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느냐는 물음에 바네사는 답답한 나머지 처음 보는 여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줄줄 말해버렸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녀가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부끄러운 작품이었기에 망설여졌다.
‘어차피 집에 가서 태울 건데, 한 명이라도 보여주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니 못 보여줄 것도 없어졌다. 바네사는 자신이 그린 목탄화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가 바네사의 손을 덥석 잡고 소리쳤다.
“나랑 계약해요!”
바네사는 잠시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어디 좀 앉아서 이야기해요.”
바네사는 그대로 끌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근방의 고급 찻집에 앉아있었다. 메뉴판을 확인한 바네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차 한 잔 값이 두 끼 식비보다 비쌌다.
“제가 살게요. 부담 가지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내세울 자존심도 없었다. 감사 인사 한 마디에 돈을 아낄 수 있다면 싸게 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바, 바네사예요.”
“예쁜 이름이네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자신을 일리아라고 소개한 그녀가 제안을 줄줄 내뱉었다.
“괜찮다면 저와 계약을 맺지 않겠어요?”
“계약이요……?”
“그림 재료나 화방 같은 지원은 원하는 만큼 해줄 수 있어요. 계약금은 선금으로 지불하는 쪽으로 하고요.”
엄청난 제안에 바네사는 입만 벌렸다. 무명인 제게 그런 제안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째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명쾌한 대답이었다. 바네사는 떨리는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천사처럼 상냥한 외모에 순간 혹할 뻔했다.
……혹시 사기꾼은 아닐까. 세상은 넓고 험하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사기꾼도 분명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바네사는 사기 당한다고 해서 더 잃을 것도 없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며칠 후에 다시 만날까요?”
“아, 아니에요. 잠깐이면…….”
일리아가 이대로 떠나 버릴까 봐 바네사는 다급히 외쳤다. 일리아는 그렇게 하라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고작 차를 마시는 것일 뿐인데도 우아했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바네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 제게 이런 기회가 오기는 할까. 모두가 무시하던 제 작품을 좋다고 해준 사람은 가족들을 제외하고 일리아가 유일했다.
“그……, 제가 돈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일리아가 생긋 웃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네사는 처음으로 일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계약 하고 싶어요.”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린 것 같았다.
“프란체.”
일리아가 손바닥을 내밀며 누군가를 불렀다. 곧바로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펜과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일리아는 좀 더 나이 있어 보이는 감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불렀다. 귓속말로 뭐라고 전달하자, 그가 바로 자리를 떴다. 프란체라 불린 남자만이 정자세를 한 채 호위를 섰다.
“임시 계약서예요. 선금은 얼마 정도를 원해요?”
바네사는 고민했다. 자신도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에 매진하게 되면 식당 일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동생들이 빵집 사장과 안면을 터서 운 좋게 배를 곯지는 않지만, 다달이 나가는 생활비가 있었다. 한창 클 동생들 때문에 돈 나갈 구석이 많았다. 바네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500크로엘이요.”
“1500……?”
말도 안 된다는 일리아의 반응에 바네사가 눈치 보았다. 역시 식당에서 일하는 두 달 치 월급을 한 번에 받는 것은 너무 염치없었나 보다. 바네사가 서둘러 정정하려 할 때, 일리아가 말했다.
“너무 적잖아요.”
“……네?”
너무 적다니. 나름 큰마음을 먹고 지른 금액이었다.
일리아는 내가 그렇게 쫌생이로 보였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150,000크로엘로 하죠.”
엄청난 금액에 바네사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확히 자신이 부른 금액의 100배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에 바네사가 얼어붙었다. 그러자 일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제안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럼 300,000크로엘?”
“……헉!”
바네사는 놀란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평생 접시를 닦아도 벌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액수였다. 바네사의 반응을 본 일리아가 품에서 백지 수표를 꺼냈다. 금액을 적고 유려한 필체로 서명한 후 수표를 내밀었다.
“은행에 가면 신원 확인 후에 돈을 내어줄 거예요. 계약금은 작품 판매 수익에서 제하지 않을게요.”
그냥 주는 돈이란 말이었다. 백지 수표를 받은 바네사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나머지 뻥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펜을 다시 쥔 일리아는 조건을 하나씩 내세웠다.
“작품은 찍어내는 게 아니니까 제작 기간은 따로 정해두지 않을 거예요. 대신 계약 기간은 3년으로, 사전에 합의 없이 다른 의뢰는 받을 수 없어요.”
바네사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일리아는 작품으로 얻을 수익의 배분과 전시회까지 설명해주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전부 말했는지 일리아가 무척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조율할 수 있으니 언제든 말해요.”
“제가…… 계약 기간 동안 그림을 안 그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바네사가 울상을 지었다. 거금을 받았는데, 일리아를 만족시킬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괜찮아요. 그땐 이 그림을 받아 가면 되니까.”
일리아는 바네사의 목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시 계약서긴 한데, 결정을 내렸다면 하단에 서명하세요.”
일리아가 이름 적는 부분을 손끝으로 짚어주었다. 바네사는 심호흡만 계속 내뱉었다.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게 모두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고 이름을 적었다.
계약서를 집어 든 일리아는 사냥감을 포획한 사냥꾼처럼 무척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계약서 쓰는 동안 급하게 아틀리에를 준비 시켰어요. 마침 다 되었다고 하니, 함께 가볼래요?”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네사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바네사는 일리아를 뒤따라 걸었다.
번잡한 번화가를 지나 말끔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났다. 평소에 다니던 거리와 비교하자니 행인들의 행색부터 달랐다. 말쑥한 차림새에 열심히 꾸민 티가 났다. 하지만 일리아만큼 귀티 나는 사람은 없었다.
일리아는 화방과 아틀리에가 가득한 거리로 들어섰다. 그 중 가장 크고 세련된 건물로 들어갔다. 1층은 화구를 파는 화방이었고, 2층으로 올라가니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아틀리에가 나타났다.
바네사는 처음 도시에 와본 시골 쥐처럼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제 자리는 어디인가요? 구석에서 그리면 되나요?”
“원하는 자리에서 그리면 돼요. 혼자 사용할 방이니까요.”
“저 혼자요……?”
이렇게 넓고 좋은 아틀리에를?! 바네사가 입만 떡 벌리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래층 화방에서 가져오도록 해요. 위층은 휴식 공간이에요. 전부 당신을 위한 거니까 마음대로 쓰도록 해요.”
엄청난 발언에 바네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네사는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을 고작 한두 시간 만에 제게 안겨줄 재력이라니…….
바네사는 조금 두려운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사기꾼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결국 바네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건물주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건물이 열 개쯤 있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일리아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대답해주었다.
“아직 딱히 하는 일은 없고…….”
무직이란 말인가……?
“제 가문이 블로든이에요.”
바네사는 놀란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
카르한은 오랜만에 외출할 채비를 시작했다. 간만에 일리아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항상 일리아가 약속을 정해주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만나자는 연락이 없었다. 어찌나 감감무소식인지 테시온이 서신을 보내보자고 채근할 정도였다.
카르한 또한 용기를 내어 먼저 만나자고 말해볼까 고민하던 차에 일리아에게서 서신이 왔다.
[내일 시간 되나요?]
카르한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된다고 답신을 보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은 후 옷장을 열었다. 평소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었으나, 오늘따라 신중해졌다.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옷걸이가 완벽해서 무엇을 입어도 태가 살았다. 특히 흉흉한 기운이 누그러져서 그런지,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을 보는 듯했다. 몇 년 동안 함께해온 테시온마저 카르한이 새삼 이런 얼굴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옷은 어떻습니까.”
위쪽에 단추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쇄골까지 드러나는 형태의 셔츠였다. 거기다가 체구에 비해 조금 작아서 몸에 딱 맞을 것 같았다. 평소에 품이 넉넉한 셔츠를 즐겨 입던 카르한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노출이…….”
“이 정도는 노출도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장점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테시온이 주장했다. 카르한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옷을 입고 나니 근육으로 채워진 몸매가 드러났다. 어색한 나머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 고민하는데, 테시온이 박수를 보냈다.
“블로든 영애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 말에 카르한은 이대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은 스스로도 낯설 정도로 들떠 보였다. 사실 어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리아를 만났던 날. 카르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했다. 분명 일리아보다 적게 마신 것 같은데 머리는 점점 몽롱해지고, 말은 자꾸 느려지기만 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털어놓지 않은 속내까지 모두 내놓게 되었다.
지겨울 게 분명할 텐데, 일리아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좋아서 카르한은 열심히 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일리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며칠 동안 고민했다.
카르한은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뭉그러지고, 일리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날 헤어지기 전,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외투를 벗어주었다. 추워하는 일리아를 보니 몸이 절로 움직였다.
체구가 많이 차이 나다 보니 일리아는 커다란 외투에 폭 감싸인 채 저를 올려다보았다. 취한 와중에 자신의 외투를 입은 일리아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 장면을 회상하자,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졌다. 카르한은 품에서 약통을 꺼내 알약 두 개를 삼켰다.
“아니, 또 심장이 안 좋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카르한의 붉어진 뺨을 확인한 테시온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검사를 다시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약을 먹었더니,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은 카르한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시 상념에 잠긴 카르한은 저번에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술기운을 빌려서 일리아에게 후계자 문제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만간 일리아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였냐며 화를 낼까. 상냥하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면 어쩌나.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약속 장소 근방에 도착한 카르한은 찻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일찍 나왔으니,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햇볕이 따스했기에, 찻집 테라스에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그러자 길을 지나가던 남자가 멈춰 섰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에반테온 소공자 아니십니까!”
남자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을 자작의 장남이라 소개한 후, 친근한 척 굴기 시작했다. 열심히 떠들어대는 모습이 신기했다. 제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았다. 테시온이 권유한 옷을 입은 보람이 있었다.
“소공자께서는 독서가 취미신 모양입니다. 무척 진지하게 읽고 계셔서 말을 걸까 말까 고민했거든요.”
카르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를 잡았다.
“어떤 병법서를 읽으시는지…….”
카르한은 말없이 책표지를 보여주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뻔뻔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 겉표지를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보았다.
“그……, 훌륭한 책이지요. 저도 서점에서 본 것 같습니다.”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 그러자 카르한의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기회다 싶었는지, 아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번에 연회에서 뵈었을 때,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다고 표현하는 자작 영식을 보며, 테시온은 어쩔까 고민했다. 이전이었으면 이렇게 목적이 뻔히 보이는 남자는 제 선에서 쳐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르한은 예전과 달라졌기에, 자신이 너무 참견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
카르한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게 무척 호의적인 태도였다. 이 사람이라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면 일리아가 칭찬해주지 않을까.
카르한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고정시킨 채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중인데,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저는 가끔씩 상대의 말을 되묻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긴 해요. 만약 상대가 ‘나 어제 친구하고 만났어.’라고 말하면 ‘친구랑?’ 하고 되물어요.
문득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배웠던 대화법을 사용할 때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카르한에게 사교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며칠 전에 랭스턴 후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다녀왔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배운 대로 대꾸해 보았다.
“다녀왔는데?”
“……그, 연회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백작 영애께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드러냈는데?”
“영애께서 소문과 달리…….”
“소문?”
카르한이 묵직한 목소리로 되묻자,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가 울먹거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독서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했다고 사과한 후 곧바로 자리를 떴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카르한은 눈으로 깜빡였다.
“이게 아닌가…….”
처음으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
일리아는 얼마 전에 계약을 맺은 바네사를 떠올렸다.
자신을 바네사라고 소개한 그녀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목탄화를 보고 전율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 전공인 유화를 그리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그려올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일리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대형 신인이 나타났다고 말해주었다. 관심을 내비치는 아버지에게 작품이 완성되면 보여주겠노라 큰소리 쳤다.
“아가씨, 어떠세요?”
고용인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난 일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끝자락처럼 환한 금발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화장은 너무 짙지 않은 선에서 눈만 강조했다.
“입술 색은 좀 더 분홍빛이 돌았으면 좋겠어.”
일리아는 자잘한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평소처럼 하고 가면 될 텐데,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그런지 괜히 신경 쓰였다.
시간을 확인한 일리아는 침실을 나섰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미리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를 반겨주었다.
“아가씨, 오늘은 한층 더 빛이 나십니다.”
프란체가 칭찬을 쏟아냈다. 일리아는 싱긋 웃어준 후에 마차에 올라탔다.
“외투랑 물건은 다 실었어?”
“예, 전부 깔끔하게 옮겨두었습니다.”
말렉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오늘은 간만에 카르한을 만나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보름도 넘었으니, 계약 연애를 시작한 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것은 기록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조금 복잡했을 뿐이었다.
일상생활을 보내다가도 때때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카르한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술기운이 올라 약간 붉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리아는 카르한을 순진하지만 제법 괜찮은 거래 상대라고 생각했다. 연인 행세를 하고 있으나, 그와 진짜 연애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일리아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몸은 추운데 가슴께는 따뜻했다. 카르한의 시선이 닿은 곳이 이상하게도 간질거렸다. 씨앗이 막 싹을 틔우는 것처럼 제 가슴을 밀어 젖혔다.
그 후로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르한에게 가르칠 건 얼추 다 가르쳤으니, 슬슬 적당히 거리를 둘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카르한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쪽은 일리아였다.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빌린 외투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일리아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저택 정원을 모두 빠져나온 참이었다. 풍경을 구경하는데, 다시금 카르한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문득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무언가 말하려다 만 것이 떠올랐다. 자신이 후계자 수업 때문에 바쁘지 않느냐고 물었고, 카르한은 그에 대답하려 했던 것 같았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카르한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조만간 슬쩍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열어둔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단정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모퉁이만 돌면 목적지였다. 일리아는 천천히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
쿵! 하고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일리아의 몸도 함께 휘청거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프란체와 말렉이 곧바로 일리아에게 물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차가 멈춰 서고, 바깥에서 마부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마차 똑바로 몰지 못해!!”
“그쪽이야말로!”
말렉은 마부의 목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접촉 사고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형님! 빨리 옷 벗으시죠!!”
이럴 때는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며 프란체가 서둘러 말렉의 외투를 잡아당겼다. 이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것은 말렉이었다. 프란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잔근육밖에 붙지 않았기에, 믿을 사람은 말렉뿐이라며 재촉했다.
순식간에 외투를 벗겨낸 후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젖혔다. 말렉이 창문에 턱 하고 팔을 얹었다. 오랜 기사 생활로 흉터가 새겨진 팔이 밖으로 뻗어졌다. 그러자 상대 쪽 마부가 잠시 조용해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습니다.”
말 열 마디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강력한 법이었다. 프란체는 부러운 눈으로 말렉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저런 강인한 팔뚝을 가지지 못한 프란체는 늘 얕잡혀 보이기 일쑤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도련님!”
바깥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리아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들여다보았다. 마차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나가봐야겠어.”
“아가씨는 안에 계십시오.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잘 걸렸다며 프란체가 손을 뚜둑 꺾었다.
“사고 치지 마라.”
말렉이 프란체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침착한 목소리와 달리 말렉은 늘 짓던 미소를 거둔 채였다. 일리아가 다칠 뻔했기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프란체와 말렉이 마차에서 내렸다. 일리아는 창문에 얼굴을 붙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상대 마차 주인은 귀족으로 보였다. 호위기사로 추정되는 사내는 말렉과 엇비슷한 덩치를 가진 이였다.
프란체와 말렉, 마차 주인과 호위기사 그리고 마부 두 명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왁왁대며 싸우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것은 그쪽 아닙니까.”
“증거 있어? 어?”
“여기 선 넘어온 거 안 보입니까?”
“알아서 갓길로 빠졌어야지!”
말렉이 침착하게 근거를 들어 말했으나, 상대는 도리어 화만 냈다. 옆에 있던 프란체가 열 받았는지 씩씩댔다. 예전 같았으면 주먹부터 나갔을 텐데, 열심히 교육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곧 있으면 백작이 될 사람이라고! 그쪽은 어느 가문이야!”
결국 상대방이 신분을 내세우며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상대 마차 후면에 찍힌 문장을 확인했다. 수도 변두리에 위치한 백작 가문이었다. 이전에 저쪽 가문 사람이 리하트에게 아첨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한숨을 내쉰 후 마차에서 내렸다. 문이 열리자, 다들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백작 영식에게 말했다.
“블로든이에요.”
잠시 멍하니 일리아를 바라보던 백작 영식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뒤늦게 마차에 찍힌 블로든 가문 인장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사이 일리아는 접촉 사고를 일으킨 마차 두 대를 빠르게 훑었다. 저쪽 마차는 도로의 중앙을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저쪽 과실이었다.
“제가 보기엔 그쪽 잘못인 것 같은데요. 지금 사과하면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사, 사과? 내가?”
“아니면 경비대를 부를까요?”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니, 아무리 블로든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나와도 되는 겁니까?”
백작 영식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호위기사가 위협적으로 나섰다. 일리아를 겁주기 위함인지,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저 새끼가…….”
프란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집에 손을 얹었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때였다.
“일리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한꺼번에 시선이 쏟아지자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황할 때의 버릇이 나온 것이었다.
카르한을 본 백작 영식과 호위기사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인상을 쓴 카르한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오늘의 카르한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카르한이 입은 셔츠는 위에 단추가 없어서 쇄골이 드러났다. 게다가 딱 달라붙어서 몸매가 부각되었다. 얇은 옷감 너머로 단단한 육체가 살짝 비쳐 보였다.
인상까지 팍 쓰고 있으니, 지금 카르한의 모습은…… 저번에 경비대가 오해했던 뒷골목 조직 폭력배를 연상케 하였다.
잠시 멈춰 서 있던 카르한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장신인데, 가까이 오니 위압감이 대단했다. 백작 영식은 숨도 못 쉰 채 호위기사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호위기사마저 얼어붙은 채였다. 본능적으로 카르한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잘못했습니다.”
백작 영식이 빠르게 사과했다. 모두 자신의 과실이라며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돈이고 지위고 여기서 맞아 죽으면 전부 소용없었다.
“가세요.”
일리아는 강자에게 바로 꼬리를 내리는 그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어느 가문인지 외워두었으니 언젠가 또 만날 일이 있을 터였다.
백작 영식이 허겁지겁 마차에 올라탔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마차는 금방 자리를 떠버렸다. 그저 등장하기만 한 것이 전부인 카르한이 일리아에게 물었다.
“제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아뇨. 마침 딱 좋았어요.”
“……아직도 저를 보고 겁먹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많이 바뀐 줄 알았는데 아직 부족한 모양이라며 카르한이 중얼거리자, 일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다독여주었다.
“그거 알아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대요. 천천히 해요. 천천히.”
카르한이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약속 장소에 있다가 소란을 듣고 혹시나 해서 와 보았습니다.”
하긴, 대로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벌였으니…….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일단 갈까요?”
말렉과 마부가 이야기를 끝내자,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북적북적하던 사람들이 줄어들었을 때, 일리아는 멈춰 섰다. 조용히 따라오던 카르한도 덩달아 멈추었다.
“그나저나 오늘 옷이 좀 과감하네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테시온을 한번 쳐다본 후에 물었다.
“이상한가요……?”
“괜찮은데 그냥…….”
흔히 볼 수 없는 몸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시 뒤돌아볼 정도였다. 반듯한 쇄골과 능선처럼 펼쳐진 어깨가 특히 도드라졌다. 훌륭한 체격이나, 아까처럼 인상을 찌푸리면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
만약 마차 사고가 났을 때, 말렉 대신 카르한이 팔뚝을 창밖으로 내밀었으면 상대방은 시비도 못 걸었을 것 같았다. 일리아는 잠시 말없이 카르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항상 품이 넉넉한 옷을 입던 그였기에 이런 모습이 색달랐다. 무엇보다 훈련으로 다져진 듯한 몸매가 무척 이상적이었다. 화실에서 그의 몸을 본다면 토르소로 본 따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일리아의 칭찬에 테시온이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일단 걷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약속장소로 가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평소 같으면 일리아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을 테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르한이었다.
“그날은 잘 들어가셨습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언급하고 있었다.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서 술까지 마신 날이었다.
“혹시 제가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일리아는 잠시 묻어두었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열기가 묻어나오던 그의 눈빛이 생각났다. 일리아는 기억을 떨쳐낸 후 장난스럽게 웃었다.
“실수는 없었지만, 보기보다 술이 약하던데요?”
“……저도 제가 그렇게 약한 줄 몰랐습니다.”
뒤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이 자연스럽게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카르한의 주량은 평균 정도였으나, 일리아가 워낙 잘 마셔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상한 점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떤 사람이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요? 누군데요?”
“이름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첫 만남부터 호의적인 태도였습니다.”
카르한은 못내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알려주신 대로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는데, 상대가 사과하고 가버리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일리아는 이전에 카르한에게 알려준 대화법을 떠올렸다.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속상해 보이는 카르한에게 제안했다.
“나중에 둘이서 한번 연습해 봐요.”
“예.”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친구가 많을 것 같습니다.”
카르한의 물음에 일리아는 침묵했다.
‘친구가 있었던가.’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겨우 생각난 이름들은 전부 리하트와 엮여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제 돈만 보고 알랑대며 접근한 것뿐이었다.
“없는데요.”
깔끔한 대답에 카르한이 당황했다. 일리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어릴 적에는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라고 나서 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니 전부 멀리하게 되었다. 배신당한 경험도 많았기에 이제는 구태여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같은 목적으로 인해 손을 잡은 사이지만, 자신과 카르한의 관계를 정의 내리자면 친구에 가깝지 않을까.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요.”
묵묵히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가 제안했다.
“점심 안 먹었죠? 식사부터 할까요.”
“네.”
카르한은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대로 식당을 찾아가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근처 찻집에 앉아서 가볍게 노닥거리다 서점을 들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갔다. 카르한은 오케스트라와 연관된 음악 서적 몇 권을 고른 후, 연애 분야로 넘어왔다. 책장을 훑던 카르한의 눈이 잠시 멈추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2권]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의 다음 권이 나온 것이었다. 카르한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책을 집어 옆구리에 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 모퉁이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일리아가 보였다.
일리아는 찾던 책을 발견했는지 손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고 힘껏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일리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직원을 불러야겠네.”
일리아는 몸을 돌려, 직원을 찾으려 했다. 그때 단단한 무언가가 등에 살짝 닿았다. 근육으로 꽉 찬 가슴팍이 어깻죽지를 지그시 누르더니 익숙한 향이 훅 끼쳐왔다.
종이 냄새를 뒤덮는 청량한 향기에 일리아는 그대로 멈추었다. 곧이어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가고,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맞습니까?”
일리아는 천천히 몸을 틀어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제게 내밀어진 책 한 권이 보였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던 그 책이었다.
“……맞아요. 고마워요.”
책을 받아든 일리아는 새삼 카르한과 자신의 체격 차이를 느꼈다. 카르한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두면 훌쩍 솟아오른 느낌이 들 만큼 장신이었다. 반대로 일리아는 평균키보다 살짝 작은 편이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좀 더 들어 올렸다. 음영이 드리운 그의 얼굴이 보였다. 촘촘하게 내려온 검은 속눈썹 사이로 짙은 벽안이 있었다. 많이 나아졌다 한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는 아침을 맞이하는 여명처럼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를 보았다. 책장에 덜 꽂힌 책처럼 심장이 덜컥거렸다. 금방이라도 툭 떨어져 그 안에 숨어있던 감정이 펼쳐질 것 같았다.
일리아는 가슴께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굳이 꺼내서 파헤쳐 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쓸데없는 감정을 가지게 될지도 몰랐다.
“다 고른 것 같으니 먼저 계산하러 갈게요.”
일리아가 걸음을 떼자, 카르한도 덩달아 함께 계산대로 향했다. 책을 구입한 뒤에 두 사람은 서점을 빠져나왔다. 머리 위에 떠있던 태양이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일리아는 오늘 카르한을 만난 목적을 상기했다.
“외투 돌려드릴게요.”
카르한은 일리아를 졸졸 따라왔다. 마차 앞에 도착한 일리아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카르한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댁까지 배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돌아가는 시간이 더 걸릴 텐데요?”
각자 마차를 타고 온지라 굳이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다. 일리아가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내자, 카르한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외투 잘 빌렸어요.”
일리아는 깨끗하게 세탁한 외투 두 벌을 돌려주었다. 말렉이 카르한의 마차에 외투를 갖다놓는 사이, 일리아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카르한의 시선이 상자에 꽂혔다.
“안에 든 건 커프스단추예요. 지나다가 우연히 샀는데,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별생각 없이 샀는데, 막상 주려고 하니 조금 쑥스러웠다. 상자를 건네받은 카르한이 기다란 손끝으로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귀한 보석을 다루듯 그가 조심스레 품속에 집어넣었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관상용이 아니라 소모품이니까 열심히 착용하고 다녀요.”
“그럼…… 조금만 두었다가 쓰겠습니다.”
아까워서 도무지 쓸 수 없다는 듯 그가 외투를 만지작거렸다. 생일에 무척 갖고 싶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그는 행복해 보였다.
살짝 휘어진 눈매 아래 감춰져 있던 눈빛이 따스했다. 감정을 전부 얼굴에 드러내는 카르한은 처음이어서,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언젠가부터 제가 선물해준 것들을 당연하게 받던 리하트가 생각났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받으면 대놓고 실망하던 그를 떠올렸다.
일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기뻐하고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다음에 봐요.”
짤막한 인사를 건넨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은 그 자리에 서서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블로든 가문의 마차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품 안에 넣어둔 상자가 존재를 주장하듯 가슴팍을 쿡 찔러왔다. 카르한이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답례를 해야겠어.”
“예?”
옆에 서 있던 테시온이 되물었다. 카르한은 설명해주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선물을 받았으면 답례하는 것이 마땅했다. 최대한 빨리 주고 싶었기에 그냥 오늘 선물을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 핑계로 일리아를 다시 보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가게가 늘어진 번화가로 들어선 카르한은 세심한 눈길로 물건을 살폈다.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까 읽던 연애 지침서를 펼쳤다. 추천하는 선물 목록을 참고하여 카르한은 고심 끝에 선물을 골랐다.
한참 골라서 선택한 것은 작은 양산이었다. 왠지 일리아라면 양산도 종류별로 가지고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였다.
“블로든 저택으로 가자.”
“예? 지금요?”
시간이 좀 늦지 않았나 하고 테시온이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선물만 전해주려고.”
일리아를 만나지 못해도 좋았다. 그냥 선물만 전해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탔다. 블로든 저택으로 가는 동안 카르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리아도 이 길을 똑같이 갔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특별해 보였다.
카르한은 품속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기억하기론 생일 선물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는 생일은 쓸쓸할 뿐이었다.
그래서 카르한은 생일을 잊어버렸다. 딱히 챙기질 않으니, 생일이 지난 것도 모르고 넘기기 일쑤였다. 생일에 선물을 받은 적도 손에 꼽는데, 아무것도 아닌 날에 선물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르한은 창가에 고개를 기댄 채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일리아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요.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전이었으면 마냥 기뻤을 것이다. 일리아와 친구가 되었다는 것에 들떴을 텐데…… 막상 일리아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꽉 조여 왔다.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리아와는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 모순적인 마음이 무엇인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저택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불쑥 찾아오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문지기에게 선물을 전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카르한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대문 옆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는 두 남녀를 보았다. 일리아와 리하트 테르시안이었다.
***
일리아는 마차 창문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던 카르한이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일리아는 커튼을 쳤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내렸다. 손에 들린 책 한 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카르한이 직접 꺼내주었던 책이었다.
일리아는 겉표지를 만지작거렸다. 저번 만남 이후로 왠지 미묘하게 불편했다. 카르한이 불편한 게 아니라, 싱숭생숭한 제 마음이 문제였다.
카르한과 만남을 이어가며, 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품게 되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정중하면서도 다정한 태도에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호감은 다른 방향으로 싹을 틔울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후로 일리아는 종종 그와 진짜 연애하게 되는 상상을 가끔 해보곤 했다. 분명 간질간질하고 풋내 나는 연애일 터였다. 하지만…….
‘연애는 안 해.’
일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처뿐이었던 첫 연애 때문에 다시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했으나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일리아는 상처를 덮어놓은 채 마음을 단단히 잠갔다.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겠다고 세뇌하듯 다짐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온 힘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카르한과 자신은 이 정도 거리가 적당했다.
한참을 달리자, 슬슬 저택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저택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차가 멈춰 섰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오자 일리아는 커튼을 걷어냈다. 그리고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리하트를 발견했다.
“안 됩니다.”
“내가 왔다고 전해줄 수는 있잖아!”
문지기가 앵무새처럼 안 된다는 말만 만복하자, 리하트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문지기는 귀족인 리하트를 함부로 대하진 못하고 막아 세우는 것에만 급급했다.
리하트가 일리아의 마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리하트와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커튼을 다시 쳤다. 아무래도 계속 만나주지 않으니 작정하고 찾아온 듯싶었다. 무시하면 온종일 저러고 있을 듯해서 고민 끝에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렸다.
“일리아.”
리하트가 반색하며 일리아를 불렀다.
“거기서 이야기해요.”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말에 리하트가 멈춰 섰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리아는 가만히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긴 그가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찻집에서 파혼으로 다툰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리하트에게서 오는 서신은 제 손에 떨어지기도 전에 전부 처분했기에 이름조차 볼 일이 없었다. 탐색하듯 일리아를 살피던 리하트가 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익숙함이 찾아왔다. 파도가 쓸고 지나간 해안처럼 일리아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계속 서신을 보냈는데, 못 봤어?”
다정다감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내에 감춰진 것은 은근한 질책이었다. 상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게 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일은 리하트가 잘하는 것이었다. 그와 교제할 때도 항상 저 교묘한 화법에 넘어가, 내가 또 실수했구나 하고 자책하곤 했다.
바보 같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 일리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전부 버려서 모르겠네요.”
그의 눈썹이 희미하게 솟았다가 내려왔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요?”
“잠깐. 이야기 좀 해!”
일리아가 걸음을 떼려 하자, 리하트가 단숨에 손목을 잡았다. 프란체와 말렉이 리하트에게 경고했다.
“그 손 놓으십시오.”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지만, 리하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일리아의 명령 없이는 저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남처럼 구는 거야? 우리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당신 혼자 안 끝난 거겠죠.”
일리아가 손을 뿌리치자, 리하트는 순순히 손목을 놓아주었다. 일리아는 리하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한때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제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제하던 초반의 다정함이 사라지고,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그가 언젠가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전부 덮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배신이었다. 일리아는 서늘한 눈으로 리하트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미련과 탐욕이 뒤덮여 있었다.
“그때는 미안했어.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앞으로 정말 잘할 테니까…….”
“돈 다 떨어졌어요?”
일리아의 노골적인 물음에 리하트가 말을 멈추었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잃어버린 물주를 되찾고 싶은 거겠죠. 안 그래요?”
“……무슨 말이 그래?”
“내 앞에서 후회한다는 말 하지 마요. 후회는 내가 하고 있으니까.”
이런 개자식을 좋아했다니,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하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어장 속에 헤엄치던 황금 물고기를 놓쳤다는 것.
“당신은 내 돈이 좋았을 뿐이잖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리하트가 곧바로 부정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거북할 정도로 절절함을 담아 속삭였다.
“난 네가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리하트는 평소에 자주 언급하던 운명을 꺼냈다. 분명 낭만적인 단어인데, 그가 말하는 운명은 닳아빠진 단어처럼 들려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하트는 좀 더 애달프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분노로 들끓었던 가슴이 단번에 얼어붙었다. 조금이나마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잔뜩 헤집어졌다. 여기까지 와서도 거짓말을 일삼는 그의 모습에 남아 있던 실망도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쉽게 내뱉은 사랑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했다. 일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숨이 아니라 얼음 파편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그동안 겨우 생각한 게 개소리뿐이에요? 그딴 같잖은 사랑은 필요 없으니 내 인생에서 좀 꺼져요.”
모욕적인 언사에 리하트는 표정을 싹 바꾸었다.
“소공자는 뭐 다를 것 같아?”
평생 너만 사랑해줄 것 같으냐고 리하트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소공자만 믿고 제멋대로 구는 모양인데, 분명 후회할걸?”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어 일리아는 걸음을 뗐다.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리하트는 일리아를 붙잡기 위해 성큼 다가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리하트의 팔목을 붙들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은 억센 힘에 리하트가 악, 하고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겁니까.”
밑바닥을 두드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카르한이 매서운 눈으로 리하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블로든 저택 앞에 도착한 카르한은 일리아와 리하트를 지켜보았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멈추었다.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이 끼어들 상황이 맞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늘 짓던 부드러운 표정은 어디로 가고, 무표정하다 못해 싸늘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일리아의 표정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두 사람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일리아와 리하트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리하트의 말에 카르한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차갑게 쏘아붙이던 일리아가 상처 받은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제 몸을 마구 두드리는 것처럼 어디 한 곳 빼놓지 않고 욱신거렸다.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카르한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겨우 말아 쥐었다.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리하트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의 진짜 약혼자였다면 그녀를 정말 소중히 여겼을 텐데.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좋은 것만 줬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답답하던 가슴이 꽉 조여 왔다. 울컥 하고 안쪽에서 감정이 역류했다.
“그동안 겨우 생각한 게 개소리뿐이에요? 그렇게 하찮은 사랑은 필요 없으니 좀 꺼져요.”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절절하게 굴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는지 리하트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소공자만 믿고 제멋대로 구는 모양인데, 분명 후회할걸?”
일리아가 무시하고 등을 돌리자, 리하트는 강제로 붙잡으려 들었다. 그때 이성이 뚝 끊어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리하트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짤막한 비명을 지른 리하트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사납게 일렁이는 눈동자에 리하트의 놀란 얼굴이 가득 담겼다.
“윽……!”
팔목이 비틀어질 것 같은 고통에 리하트가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카르한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리하트는 비명을 겨우 참고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리하트보다 반 뼘 정도 더 큰 카르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좁혀진 미간이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을 세세하게 살필 겨를도 없었다.
리하트를 억누른 것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라 리하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소공자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까지 속일 셈입니까?”
리하트의 말에 지그시 눌러오던 힘이 멈추었다. 리하트는 일리아에게도 들리도록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짜 후계자도 아니면서.”
심장이 덜컥, 제자리를 잃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카르한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손아귀 힘이 약해지자, 리하트는 붙잡혀 있던 팔목을 빼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제까지 거짓말을 일삼을 겁니까?”
“…….”
“순진한 제 약혼녀가 소공자에게 속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리하트가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미간을 좁힌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일리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공자께서 진짜 후계자가 아니라는 걸 일리아도 알고 있습니까?”
“무슨 말 하는 거예요? 헛소리 그만해요.”
일리아가 곧장 끼어들었다.
“하다하다 미친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리하트가 되물었다. 일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응시했다. 고장 난 것처럼 서 있던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하트는 웃음을 겨우 삼킨 채 일리아에게 속삭였다.
“그거 봐, 일리아. 넌 소공자에게 속은 거라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리하트는 카르한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비밀을 폭로했다.
“공작부인이 되는 걸 상상했겠지만, 소공자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임시 후계자라고.”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카르한은 여전히 반박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가끔씩 카르한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계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망설이던 얼굴. 공작저에 초대 받았을 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굴던 그의 모습……. 리하트의 말을 듣고 나니 전부 이해가 되었다.
“공작의 눈 밖에 난 차남이 작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장남이 돌아오면 가문에서 쫓겨날 텐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리하트는 카르한의 가정사까지 나불댔다. 듣다 못한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리하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뭐?”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리하트가 당황해했다.
“그걸 듣고 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당신한테 매달릴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난…….”
일리아는 틈을 주지 않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쓰레기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뒷조사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일리아는 치밀어 오른 화를 누르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리하트가 왜 자신만만하게 찾아왔나 했더니, 카르한의 약점을 폭로하면 제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줄 알았나 보다. 없던 정까지 싹싹 긁어 가주다니, 그것도 재주였다.
“카르한.”
일리아가 한 번 더 카르한을 불렀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돌멩이가 던져진 수면처럼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죄를 짓기라도 한 듯 카르한은 끝내 일리아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마차에 타세요.”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일리아의 말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일리아 또한 마차에 올라타려 하자, 리하트가 소리쳤다.
“일리아! 내 말 좀 들어봐!”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곧바로 리하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리하트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온 힘을 다해 버둥댔지만 두 사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놓지 못해!!”
일리아는 마치 과녁을 응시하듯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게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화살이 세 대 있다면, 망설임 없이 리하트에게 세 발 다 쏠 것이다.
“앞으로 당신이 날 찾아올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일리아는 마지막 여지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파혼 동의서를 가져올 때.”
그 말을 남기고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등 뒤에서 리하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후회할 거라는 둥, 이제는 매달리지 않을 거라는 둥……. 일리아는 싹 무시하고 마부에게 말했다.
“출발해.”
마차 문을 닫아버렸다. 창문 너머로 발광하고 있는 리하트가 보였다. 저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풀에 꺾여서 돌아갈 모습이 훤했다.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정원을 향해 달렸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채웠다. 일리아는 커튼을 친 후 맞은편 구석에 앉아있는 카르한을 보았다.
시선이 닿자,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검은 속눈썹이 비에 젖은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카르한이 조금 밭은 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꽉 잠겨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겨서 죄송합니다.”
카르한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죄책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일리아는 진작 카르한이 제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눈치챘다. 몇 번이고 망설이는 그의 모습을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냥 넘겼을 뿐이었다.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요.”
카르한은 손바닥으로 무릎만 쥐었다가 놓았다. 마치 버려질 것을 각오한 사람처럼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가문의 눈 밖에 난 존재입니다.”
카르한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직접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 가문에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지내오다가 반쯤 떠밀리듯 전쟁에 출전했다는 것. 작년에 가문의 명으로 장남을 대신하여 잠시 후계자 자리를 잇게 되었다는 것까지.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감정 하나 싣지 않고 사실만을 내뱉었다.
“형님께서 돌아오시면 저는 아마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임시직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후계자 수업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형식상의 후계자임을 모두 털어놓은 카르한이 조용히 물었다.
“……제게 실망하셨지요?”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요.”
처음으로 일리아와 눈을 마주한 카르한은 움찔 떨었다. 일리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신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게 사실을 숨기긴 했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캐물었으면 그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었을 터였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리하트가 후계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버렸네.’
계획이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후계자인 카르한에게 어느 정도 권력이 있을 거라 믿고 계획을 추진해 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여기서 카르한과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 옳았다. 리하트를 감당하기도 힘든데, 카르한까지 책임지기는 버거웠다. 일리아는 제 결정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카르한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자신마저 떠나가면 카르한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였다. 진짜 후계자가 돌아올 때까지 부질없는 시간을 보내다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일리아는 이전에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제게는 살갑게 굴면서 정작 아들인 카르한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공작부인. 카르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시하던 고용인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그때는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르한은 단지 거래 상대일 뿐이었다.
가족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니 먼저 묻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실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내게 거래 상대일 뿐일까.’
그동안 카르한을 향한 일리아의 마음은 서서히 변해왔다. 이 사람이라면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다.
아직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르한은 더 이상 일리아에게 거래 상대가 아니었다. 일리아는 거래가 아니더라도 그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우리 계약은 파기해요.”
한참 만에 일리아가 말했다.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던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그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대신 거래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로 고치죠.”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 말인데…….”
일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카르한. 당신이 진짜가 되는 건 어때요?”
“……!”
카르한은 숨을 멈추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국 백작의 딸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어찌 되었든 공작가의 핏줄이잖아요. 그냥 당신이 진짜가 되어버려요.”
“하지만 저는…….”
카르한의 입술이 떨렸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듯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해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척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공작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후계자로 자라난 장남과 비교하면 자질도 한참 뒤떨어졌다. 카르한이 진짜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모지에 숲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도 저를 지지해주지 않을 겁니다.”
“카르한, 과거의 당신을 생각해봐요. 나랑 거래할 때만 해도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
“이만큼 바뀌었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할 수 없다고,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해냈다. 이제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
하지만 가문의 억압은 평생 차온 족쇄 같은 것이었다. 일리아의 말처럼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가 되려면 가족들과 대적해야 했다. 한평생 넘지 못했던 태산과 맞서는 것과 같았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이 점점 흩어져갔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한참 만에 말문을 연 카르한은 좀 더 힘주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카르한은 분명히 훌륭한 공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일리아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제게 넘쳐나는 것은 돈뿐이니……. 지금부터 돈으로 카르한을 키워볼 생각이었다.
마차는 정원에서 멈추었다. 구비해둔 램프에 불을 붙이자 마차 안이 환해졌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카르한을 응시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가문은…… 저를 빼면 완벽한 집안이었습니다.”
카르한은 차분하게 가정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공작인 아버지는 항상 바빠서 집안에 관심이 없었다.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공작부인인 레베타는 제 배로 낳은 카르한을 미워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을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따뜻하던 눈빛은 실망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완전히 카르한을 적대시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니 어머니께서 실망하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어머니께 예쁨 받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자꾸 어긋나기만 했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데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어린 날의 카르한은 서러웠던 나머지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더 노력할 테니 예전처럼 사랑해 달라고.
카르한은 어머니의 반응을 기다렸다. 건방지다고 혼을 내도 좋으니, 저를 멀리하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카르한은 편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다가, 쓰레기통에서 자신의 편지를 발견했다. 충격 받은 카르한은 하염없이 쓰레기통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카르한은 억지로 붙들고 있던 관계의 끈을 놓았다.
“형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장남인 블레어드는 언제부턴가 카르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비난은 카르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온전히 독차지한 채, 동생을 차별하는 어머니에게 동조했다.
그때부터 카르한은 공작가의 유령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카르한을 배척하니 고용인들도 자연스레 무시했다.
“그래서 저는 반쯤 자원해서 전쟁터로 출전했습니다.”
카르한은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도망치듯 전쟁터로 떠났다. 버려진 자식이나 다름없었기에 에반테온이라는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카르한이 평민일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공을 세우고 테시온을 만나면서 에반테온 공작의 차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카르한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일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아무래도 너무 어릴 적부터 당해온 것이라, 카르한은 그것이 학대인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구석까지 내몰려서 결국 전쟁터를 택했을 어린 날의 카르한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팠다.
일리아는 처음 만났던 카르한을 떠올렸다. 점원에게 휘둘리다가 강매 당하던 그를 보며 호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공작가문 후계자인 카르한의 평판이 엉망인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나쁜 소문에 불을 붙여놓고, 그것으로 꼬투리 잡아서 수월하게 쫓아낼 심산인 게 분명했다.
일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게 상냥하게 웃어주던 공작부인을 떠올리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저를 지나치게 환대해 주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장남을 위해 카르한을 비싼 값에 팔아치울 생각이어서 그런 것이었다.
“일리아?”
일리아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카르한이 조심스레 불렀다. 그가 눈치를 보자 일리아가 구석에 두었던 쿠션을 집어 들고 마구 쥐어뜯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해소할 방도가 없었다. 당장 공작가로 뛰어가서 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리아는 쿠션 하나를 완전히 뭉개놓은 후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당황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에게 말했다.
“화가 나서 그래요. 그렇다고 당신 가족들을 이렇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일리아는 망가진 쿠션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화나는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가문으로부터 지원도,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거죠?”
“……예.”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온 거예요?”
수도에서 생활하려면 금전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설마…… 저 모르는 사이에 접시라도 닦으러 다녔나.
“가문에서 품위 유지비를 조금 받고 있고, 전장에서 모은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모아둔 돈이 있어요?”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아다닌 카르한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모았다. 처음에는 상관에게 공로를 많이 빼앗겼지만, 테시온을 만난 후로 그가 살뜰히 챙겨주었다.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어, 은행에 전부 넣어두고 잊었더니 쌓인 이자가 상당했다. 덕분에 어디서도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만큼 돈이 모였다. 카르한은 나름 자신 있게 말했다.
“백만 크로엘 정도는 있을 겁니다.”
“아껴 써야겠네요.”
“…….”
카르한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백만 크로엘이면 번화가에 건물 한 채도 못 사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 지금까지 버텼다니, 무척 검소하게 지내온 모양이었다.
“일단 간단하게라도 계획을 짜봐야 할 것 같은데, 특기 같은 거 있어요?”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특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듯 한참 만에 그가 대답했다.
“……30초 안에 돌로 불을 피우거나, 별자리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부 기각이었다.
“검술은요?”
“제가 따로 검술을 배우진 못해서…….”
카르한이 단정한 손톱으로 애꿎은 무릎만 긁었다. 그가 익힌 것은 살기 위해 본능으로 배운 검술이었다. 전쟁터가 아닌, 수도에서 보여주기 식으로는 마땅치 않았다.
“좀 막막하긴 하네요.”
갑자기 하늘의 별을 마주하는 것처럼 후계자 자리가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둔 것이 없을 줄은 몰랐다.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허황된 제안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에반테온 공작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공작부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가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져놓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은 무척 험난하고 힘들 테지만 말이다.
“……카르한, 당신 그래도 체력은 좋죠?”
“예.”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카르한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나름 근성 있고……. 암기력도 괜찮은 것 같았고.’
대충 가닥을 잡은 일리아가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올리며 말했다.
“특별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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