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며칠 전 리하트는 평소처럼 귀족 모임에 다녀왔다. 등장과 함께 이목이 집중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리하트의 주위를 둘러싸고 아부했다.
리하트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모임을 즐겼다. 한창 웃고 떠들던 중 거슬리는 말이 귀에 들려왔다.
-타블로이드지 봤어?
-봤지. 파혼한다던데.
-테르시안 영식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아냐? 블로든 영애는 착하잖아.
리하트는 저를 놓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신경 쓰였다. 그러다 은근히 찔러보는 사람도 있었다.
-블로든 영애께서는 요즘 안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척하면서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캐물으려 했다. 리하트는 표정을 수습한 후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곧 있을 결혼식 준비에 시간을 쏟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소문 때문에 걱정했습니다.
-타블로이드지는 저도 봤습니다. 어차피 거기는 엉터리 기사와 추문을 다루지 않습니까.
고소할 생각이라며, 리하트는 변명과 허세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오늘 리하트는 만찬회에 참석했다. 고위 귀족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여는 행사였다. 만찬장에 들어가기 전,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그를 불렀다.
-블로든 영애와 파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놓고 물어오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상대는 공작부인이었지만, 리하트는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헛소문입니다. 고매하신 공작부인께서 그런 소문을 믿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본인에게 들었는데 말이죠.
순간 리하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바람처럼 속삭였다.
-모쪼록 빨리 매듭지어졌으면 좋겠군요.
은근한 파혼 압박에 리하트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일리아가 에반테온 공작부인마저 포섭했을 줄은 몰랐다.
만찬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리하트는 외투를 벗어던졌다. 아버지만 믿고 기다리기엔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여전히 일리아 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보내는 서신은 전부 무시당했고, 만나보려 해도 번번이 실패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았다.
카르한 에반테온의 약점이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보상에 돈도 제법 지불했으나,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서 그런지 시원치 않았다.
초조해진 리하트는 방을 왔다 갔다 했다. 한참을 서성이던 그가 멈춰 섰다.
“스텔라 델로타…….”
불현듯 떠오른 이름이었다. 딱히 엮일 일이 없었으나, 소식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있었다.
스텔라는 카르한 에반테온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공작부인의 태도를 보아, 약혼 이야기는 이미 깨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쪽도 분명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닌데.”
연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 스텔라가 벌써부터 공작부인 행세 한다며 험담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리하트가 씩 웃었다. 적당히 그럴 듯한 제안을 하면서 그녀를 통해 카르한의 약점을 캐내야겠다고 리하트는 생각했다.
***
고용인들은 벽에 등을 붙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발치에는 깨진 유리가 굴러다녔지만, 아무도 나설 수 없었다. 스텔라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레나마저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
방을 엉망으로 만든 스텔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을 해도 울분이 가시질 않았다. 오늘 아침,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델로타 저택에 찾아왔다. 공작부인이 먼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스텔라는 무척 들떴다.
드디어 약혼 날짜를 잡으려는 건가 싶어, 기대를 품고 공작부인을 만났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약혼은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 그게 무슨……?
스텔라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공작부인은 무척 태연하게 쐐기를 박았다.
-우리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거든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텔라는 일리아를 떠올렸다.
-설마…… 일리아 블로든인가요?
공작부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텔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울고불고 매달렸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저를 다정하게 맞아주던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델로타 백작께는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공작부인은 자기 할 말만 끝낸 후 매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방적인 통보에 스텔라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약혼 이야기가 오간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다들 자신이 에반테온 소공자의 약혼녀가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것도 저를 예뻐하고 귀애하던 공작부인이 말이다.
그녀가 돌아간 후로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던 스텔라는 분노를 터뜨렸다.
“어떻게 내게……!!”
카랑카랑하게 올라가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소리를 질렀지만, 억울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당장 공작저를 찾아가 카르한에게 따지고 싶었다. 왜 하필 일리아 블로든이냐고. 그 계집애가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냐고. 하지만 가느다랗게 남아있는 이성의 끈이 스텔라를 붙잡아주었다.
지금 감정적으로 나서봤자, 망신만 당할 뿐이었다. 약혼식을 치른 것도 아니었으니, 파혼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저쪽보다 신분이 낮은 탓에 제대로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이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다들 저를 비웃거나 동정할 터였다. 시기 질투하던 이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스텔라는 씩씩거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또다시 일리아 블로든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그녀를 꺾고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리하트 테르시안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익숙한 이름에 스텔라가 멈칫했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왜……?”
리하트는 일리아의 약혼자였고, 지금까지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찾아온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스텔라는 리하트를 돌려보내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고용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약혼과 관련한 문제로 독대를 요청하고 싶다고 전하셨습니다.”
스텔라가 잠시 멈칫했다.
“약혼 문제라니…….”
혹시 뭔가 알고 온 것인가? 초조해진 스텔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 정도는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들여보내.”
스텔라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와 화장을 고쳤다. 옷매무새까지 확인한 스텔라는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 있는 리하트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리하트가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 말과 달리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스텔라는 불편한 기색을 띤 채 그를 쳐다보았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달갑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리하트를 가볍게 훑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은 거죠?”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요.”
마치 제집 같은 태도에 스텔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돌려보낼까 고민하는데, 리하트가 다시 말했다.
“에반테온 소공자와 약혼이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스텔라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공작부인에게 통보 받았는데 어떻게…….
리하트가 앉으라는 의미로 빈 의자를 눈짓했다. 마지못해서 자리에 앉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 받은 처지라, 영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혼 이야기에 스텔라가 관심을 가졌다. 저번에 블로든 저택을 찾아갔을 때 일리아가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둘 사이를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스텔라가 눈을 부릅떴다. 리하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리아와 에반테온 소공자는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파고들 틈은 많습니다.”
“그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자는 말이에요?”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영애는 소공자와 무사히 약혼할 수 있겠지요.”
“……뭘 원하는데요?”
말이 잘 통해서 좋다는 듯 리하트가 씩 웃었다.
“조금만 협력해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스텔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리하트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일리아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에반테온 가문과 다시 연을 맺게 될 것이다. 만일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른 척 리하트를 끊어내면 그만이었다.
결정을 내린 스텔라가 턱을 치켜들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죠?”
***
마침내 그날이 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카르한은 단정한 차림을 한 후에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카르한은 마차 창문을 통해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시 확인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테시온이 격려했다.
“잘하실 수 있습니다. 어제 예습까지 했으니까요.”
“대강 외우기는 했지만…….”
카르한이 자신 없이 중얼거리자, 테시온은 열심히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누가 보면 결전이라도 치르러 가는 줄 알 법한 모양새였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자,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판판한 지붕에 여덟 개의 원형 기둥을 가진 건물은 웅장하다 못해서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미술관 건물을 살피던 테시온이 눈을 빛냈다.
“몇 번 방문하긴 했는데, 블로든 백작님께서 관장으로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 닥친 상황과는 별개로 테시온은 마음이 들떴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미술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은 비장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내 침착하게 초대장을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카르한은 요즘 들어 예전과 달라진 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처럼 타인이 무턱대고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려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먼저 겁을 먹고 잘못을 빌거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부산히 움직이고 있던 클리프가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자.”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 일리아와 닮은 구석이 없는 클리프 블로든이 카르한을 맞이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침 해야 할 일을 다 끝냈으니, 가시지요.”
직접 안내해주겠다며 클리프가 걸음을 뗐다. 카르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그를 뒤따랐다.
오늘을 위해 카르한은 미술 대백과사전을 몇 번이나 정독했다. 원본을 따라 그리는 것에 한계가 있어 그림 없이 작품 이름과 설명만 적힌 게 수두룩했으나, 어느 정도 도움은 될 터였다.
그리고 저번에는 테시온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모면했다. 그때와 같은 편법이 계속 통할 수는 없을 테니 긴장되었다.
카르한과 클리프는 1층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신경 많이 썼습니다. 부디 소공자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겠군요.”
“훌륭한 작품이 많이 보입니다.”
카르한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칭찬을 들은 클리프는 뿌듯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 그림은 이번에 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혹시 아시는지요?”
클리프가 작품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르한은 빠르게 하단에 적힌 작품명과 작가 이름을 확인했다. 다행히 책에서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예,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책으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순간 클리프의 눈이 반짝였다. 클리프는 그림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카르한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화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작품을 그리게 된 동기까지 읊었을 때, 클리프는 감탄했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벼락치기로 공부했다는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어떻게든 넘어간 것 같았다.
클리프의 시선은 아까와 비교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저를 향한 호의를 확인한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밤을 새워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림을 감상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전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척척 대답하는 카르한의 모습에 클리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옆에서 똑같이 흐뭇한 얼굴을 하는 테시온을 보고 멈칫했다. 그때 카르한이 어느 그림을 앞두고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백작님께 이 그림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매정하고 사나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무척 정중한 물음이었다. 기껍게 여긴 클리프는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었다.
그는 제국에서 예술에 관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었기에,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지식이 쏟아졌다.
한참 떠들어대던 클리프는 뒤늦게 아차 싶어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지루한 기색 없이 유심히 듣고 있었다. 가족들조차 따분하다고 잘 들어주지 않는데,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에 클리프는 속으로 감동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루하셨지요?”
“아닙니다. 전부 알지 못한 것들이라 흥미로웠습니다.”
카르한은 진심이라는 듯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클리프는 가산점을 두둑이 주었다.
“오랜만에 취미가 맞는 사람을 만나 흥분했습니다.”
가족들은 예술에 크게 관심이 없다며 클리프가 울상을 지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어흠흠.”
거기까지 말한 클리프는 뒤늦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비올레와 헤인리가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배신자라며 타박할 것이 분명했다. 클리프는 뒤늦게 근엄한 척 표정을 수습했다.
“2층으로 가시지요.”
클리프가 먼저 걸음을 뗐다. 카르한은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테시온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잘하고 계십니다. 그 많은 것을 다 외우셨을 줄은…….”
역시 천재라며 테시온이 호들갑 떨었다.
“그리고 블로든 백작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억만금을 주어도 이런 시간을 갖기 어려울 거라며 테시온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미술에 관심이 많은 테시온은 이미 블로든 백작의 팬이 되어버린 듯했다.
확실히 카르한도 클리프와 대화를 하면서 단시간에 많이 배웠다. 어느 정도 지식을 쌓고 감상하니 보는 재미도 있었다.
클리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추상적이거나 난해한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 클리프가 어느 작품 앞에서 멈춰 섰다. 형태 없이 노란색과 분홍색 그리고 하늘빛이 뒤섞인 그림이었다. 구름처럼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따스한 빛깔을 보고 있으니 일리아가 떠올랐다. 그녀를 색깔로 빚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본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서, 카르한은 한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클리프가 홀린 듯이 그림을 보고 있는 카르한에게 물었다.
“……다정하고 포근해서 덩달아 따스해지는 기분입니다.”
카르한은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클리프가 일리아의 아버지라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말을 이었다.
“블로든 영애가 생각납니다.”
클리프는 그림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카르한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었는데, 저 표정만큼은 쉬이 읽혔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정말로 일리아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카르한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클리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이렇게 쉬운 남자였다니……. 클리프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고작 두 번 봤을 뿐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기울어져서 큰일이었다. 클리프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사랑이라는 주제로 그려진 것입니다.”
순간 카르한은 지레 놀라서 몸을 틀었다.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지요.”
뻣뻣하게 굳어진 카르한이 눈동자만 굴렸다. 괜히 찔려서 그런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클리프는 작품 설명을 상세하게 해준 후 걸음을 뗐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층을 다 돌게 되었다. 클리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종종 만남을 가졌으면 합니다.”
클리프의 말에 카르한은 경직된 어깨를 조금 내렸다.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합격인가 싶어서 안도하는데, 클리프가 물었다.
“혹시 음악 좋아하십니까?”
평소에 오르골을 종종 사용하곤 했다. 카르한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음악 공부를 시작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카르한은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저번에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승낙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드디어 일리아와 연습한 성과를 보여줄 때였다. 카르한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클리프가 말했다.
“아, 그때는 일리아도 함께 가면 좋겠군요.”
“……예.”
결국 카르한은 거절하지 못했다.
“관장님!”
누군가가 클리프를 불렀다. 단걸음에 달려온 남자가 클리프에게 뭐라고 귓속말했다. 클리프는 미안한 얼굴로 카르한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다녀오십시오. 구경하고 있겠습니다.”
클리프는 금방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오케스트라라니……. 분명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일리아의 이름을 듣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카르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포근한 빛깔을 보고 있으니 뱃멀미를 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이 그림을 일리아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에반테온 소공자잖아?”
“아니, 저자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고 이곳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인 괄시에,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노귀족 무리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몇몇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꼬장꼬장한 노귀족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에반테온 공작가 원로 중 한 명이었다.
노귀족들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카르한을 탐색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달리, 흉흉한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위압감도 덜했다. 탐색을 마친 노귀족들이 먼저 다가와 아는 체했다.
“에반테온 소공자 아닙니까.”
카르한은 원로를 제외하고 누군지 잘 몰라서 고개만 살짝 숙였다.
“내 오래 살기는 한 모양입니다. 이런 곳에서 소공자를 뵐 줄이야.”
한 노귀족이 빈정거렸다. 예술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미술관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태도였다.
귀족 사회에서 카르한의 평판은 무척 나빴다. 특히 노귀족들은 카르한을 아니꼽게 보았다. 아무리 공작의 후계자라지만, 지나치게 뻣뻣하고 차갑게 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붙임성 있기는커녕 말을 걸면 도리어 무시무시한 눈빛만 보냈다. 어느 심약한 노귀족이 카르한의 시선을 받고 기절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 후로 그들은 카르한을 악당 취급했다.
“…….”
카르한은 그들이 저를 미워한다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은 별처럼 많았다. 아무래도 태도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탓에 누군가 말을 걸어 올 때마다 무척 곤란했다. 신중하게 대답을 고르고 있으면 다들 그사이에 도망가 버리곤 했다. 심지어 지금처럼 말을 섞기도 전부터 적의를 보이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려웠다.
일리아라면 어떻게 했을까. 카르한은 고민 끝에 일리아와 연습한 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러자 노귀족들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어색한 미소는 오히려 카르한을 거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심지어 허리춤에 칼집까지 차고 있으니 완벽한 악당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뭐지, 미술관을 파괴하러 온 건가.’
‘안 된다. 여기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지켜야 한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노귀족들은 심호흡을 내뱉은 후 맹렬히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마치 재개발 구역을 밀러 나온 용병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우리가 두 눈 새파랗게 뜨고 있는데 감히…….”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눈빛이 더욱 타올랐다. 카르한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게 아닌가. 요즘 그래도 성공률이 많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연습을 더 해야 할 듯했다.
“그래서 무슨 목적으로 여길 온 겁니까?”
“……초대 받아서 왔습니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며 노귀족들이 성토했다. 보다 못한 테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블로든 백작님께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블로든 백작을 언급하자 그들이 웅성거렸다. 클리프 블로든은 이 미술관의 관장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장이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노귀족 하나가 어느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 그림이 뭔지는 압니까?”
당연히 모를 거라는 태도였다. 고개를 들어 그림을 확인한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저 그림은 3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모티프는 이미 멸망한 왕국이라 알려져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카르한은 클리프에게 들은 것과 자신이 아는 것을 토씨 하나 흘리지 않고 설명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팔짱을 낀 채 듣던 귀족들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
“……제가 아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마침내 카르한의 말이 끝났을 때, 주위는 잠시 조용해졌다. 노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혹시 제가 틀렸습니까?”
그들의 반응에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노귀족들은 당혹스러운 듯 눈동자만 굴렸다. 방금 카르한의 설명은 무척 훌륭해서 강연이라도 들은 것 같았다.
무식한 칼잡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반테온 소공자가 이렇게나 박식했다고……? 그들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입술만 벙긋거릴 때였다.
“카르한……?”
익숙한 목소리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일리아가 서 있었다.
***
일리아는 아버지께서 준비한 전시회가 개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초기에는 많이 바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택을 나온 일리아는 수도에서 가장 큰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은 귀족과 평민, 아이와 노인까지 다양했다. 이 모든 것은 클리프 블로든이 노력한 결과였다.
십 년 전만 해도 규모가 큰 미술관이나 극장은 평민의 출입을 제한하곤 했다. 그러나 클리프는 예술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음을 늘 강조했다.
그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귀족만 입장할 수 있었던 대형 미술관을 평민에게도 개방했다. 다만 약간의 입장료를 받았는데, 한때 무료로 개관했다가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건물 입구 구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낡은 옷을 입은 여자는 동전을 손바닥으로 굴리며 미술관 입구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입장료가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전시된 작품의 가치와 숫자를 따지자면 입장료는 무척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사치라고 생각될 만큼 부담일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입장을 도와주는 직원에게 향했다.
간단히 일러두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가 고민 끝에 뒤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천 번째 손님은 무료입장입니다.”
직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재빠르게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제가 천 번째인가요?”
“네,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직원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는 들뜬 얼굴로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건넨 후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아도 천천히 걸음을 뗐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온 일리아는 아버지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이 바쁜지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직원에게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듯했다. 일리아는 프란체, 말렉과 함께 그림을 구경했다. 오래된 명화부터 시작해서 외국 작품까지 다양했다. 클리프가 몇 달을 공들여 준비한 만큼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조용히 관람하는데, 카르한이 떠올랐다. 저번에 미술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온 것이 생각났다.
“초대장을 보낼 걸 그랬네.”
제안만 해놓고 잊고 있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바로 초대장을 보내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1층을 전부 돌고 난 후 2층으로 올라갔다. 작품을 구경하던 중 프란체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하품하던 프란체는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변명했다.
“절대 지루해서 그런 게 아니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프란체가 실토했다.
“역시 저는 미술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 있지.”
1층에 비해 2층은 심오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상화부터 시작해 역사와 정치, 철학, 이념을 표현한 것들이라 공부한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그림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문득 아쉬웠다. 분명 훌륭한 그림이지만, 대부분 외국 작품이거나 오래된 것들이었다. 최근에 그려진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엇비슷하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힘이 부족했다.
-기막힌 신인이 하나 나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고이다 못해서 썩었으니.
아버지가 왜 한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리아는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낯익은 노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카르한……?”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그곳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오, 블로든 영애 아닙니까.”
일리아의 얼굴을 알아본 노귀족들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일리아는 이들이 누군지 깨달았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저번 만찬 이후로 오랜만이지요.”
“백작께서는 잘 계십니까?”
그들이 우르르 안부 인사를 건넸다. 미술관 관장인 아버지를 두고 있는 덕분에, 노귀족들은 일리아를 손녀처럼 귀여워했다.
“저도 오랜만에 뵙게 되어서 기뻐요.”
일리아가 생긋 웃었다. 천사 같은 미소에 노귀족들은 흐뭇하게 따라 웃었다. 인사를 받던 일리아는 미묘한 얼굴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난감하다는 듯 서 있던 카르한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하는 강아지 같았다. 무뚝뚝하던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지자, 노귀족들은 놀란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어색하다 못해서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그사이 일리아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노귀족들과 카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노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잘되었다는 듯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라면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 듯했다. 한 귀족이 카르한을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흠, 소공자께서 블로든 백작의 초대를 받아 전시회에 참석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믿기 어려워서 말이지요.”
……아버지가?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그 말이 맞는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저희는 이곳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에…….”
누가 들으면 카르한이 미술관을 때려 부수러 온 것처럼 느껴질 말이었다.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일리아는 악당 취급 당하고 있는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순한지 화를 낼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그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열심히 떠들어대던 귀족이 말을 멈추었다. 모두가 당황한 눈으로 일리아와 카르한을 번갈아 보았다.
“블로든 영애……?”
“듣고 있으니 계속 말씀하세요.”
“아니, 두 사람 무슨…… 사이인지……?”
설마 하는 말투였다. 어릴 적부터 손녀처럼 귀여워해오던 일리아와 평소 행실이 좋지 않은 에반테온 소공자의 조합이라니…….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일리아는 아예 도장까지 쾅쾅 찍어주었다.
“연인이에요.”
콰앙, 하고 머리 위로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노귀족들의 얼굴에 완전히 금이 갔다. 노귀족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황망히 일리아를 살폈다.
혹시 협박당했나 걱정하는 사람부터 카르한을 노려보는 사람까지 반응이 다양했다. 아무래도 노귀족들 사이에서 카르한은 평판이 무척 나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척을 지는 것은 아둔한 생각이었다. 이들 중에 아직까지 제국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고위 귀족도 여럿이었다. 잘 보여 두면 미래에 공작이 될 카르한도 도움을 많이 받을 터였다.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좀…… 아프네요.”
“아니, 왜…….”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노귀족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어릴 적부터 봐 온 만큼 일리아에게 약했다. 일리아는 일부러 눈꼬리를 좀 더 아래로 내린 채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에반테온 소공자께서는 순수하게 예술을 좋아하실 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으니 속상해요.”
“……저자가?”
미심쩍다는 시선에 일리아가 내 말 못 믿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다들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초대한 것도 사실이고요.”
만약 아니더라도 나중에 아버지와 말을 맞춰두면 될 일이었다. 노귀족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일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해버리니 차마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사람은 없었다. 일리아는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지요.”
노귀족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된 뿌리였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카르한을 힐끗댔다. 아무리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리아가 온 후로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빠르게 노귀족들의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 낯가림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세요.”
낯가림……? 그들은 무뚝뚝하게 서 있는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카르한, 강아지.”
긴장해서 뻣뻣하던 카르한이 정신 차렸다. 강아지는 둘만의 암호였다. 어릴 적에 키운 강아지와 뛰어노는 걸 상상해 보라는. 하지만 카르한은 강아지가 아닌, 저를 칭찬하며 웃어주는 일리아를 떠올렸다.
“……!”
옅은 미소를 띠는 순간, 사나워 보이던 인상이 완전히 걷혔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내려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홀린 듯이 카르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확실히 카르한의 웃는 얼굴은 효과가 굉장했다.
‘웃으면 무척 호감형이지…….’
지금까지 카르한의 웃는 얼굴을 아무도 몰라줘서 안타까웠다. 매서운 기운에 가려졌던 잘생긴 얼굴이 드디어 빛을 보았다. 뾰족하던 시선들이 거둬지자, 카르한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자, 귀족들은 괜히 헛기침만 내뱉었다. 여전히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저희도 조금 지나쳤습니다.”
노귀족들이 고집을 꺾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한번 인식이 틀어박히면 그것에 사로잡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태도가 완전히 호의적으로 바뀐 건 아니었으나, 이만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요.”
“언제 한번 모임에 와주세요. 블로든 양.”
노귀족들은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말이 없던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와 카르한이 눈을 마주쳤다. 원로의 시선에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그들이 우르르 가버렸다.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테시온이 무척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잘됐습니다. 원로께 눈도장을 찍었으니까요.”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원로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미약하나 분명 좋은 신호였다. 그러나 정작 카르한은 시무룩해 보였다. 새까만 눈썹이 아래로 처지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살폈다.
“……아직 저는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리아가 오기 전까지는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일리아의 도움을 받고 말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늘이 드리웠던 시야에 일리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평생 지녀온 성격을 바꾼다는 건 절대 쉽지 않거든요. 오해도 풀었으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에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을 감상할 때처럼 가슴이 울렁였다.
“소공자!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반갑게 카르한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클리프가 숨을 들이켜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마치 숨겨왔던 비밀이 발각된 것처럼 클리프는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일리아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까 아버지께 초대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그나저나 언제부터 둘이서 나 몰래 만나는 사이가 됐지? 저번에 저택에 초대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일리아가 클리프에게 물었다.
“언제 소공자께 초대장을 보내신 거예요?”
클리프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물가에 숨 쉬러 나온 붕어처럼 클리프가 입술만 뻐끔거리자, 카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오고 싶다고 백작님께 부탁드렸습니다.”
“그, 그래……! 소공자께서 하도 부탁하셔서 초대장을 보낸 거다.”
이때다 싶어 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일리아를 통해 이 소식이 헤인리와 비올레의 귀에 들어가면 달달 볶일 것이 분명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벌써 소공자한테 넘어갔냐며 실망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클리프는 비올레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클리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실이에요?”
“……예.”
카르한은 일리아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거짓말하는 것이 다 보였지만 일리아는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초대장 정도는 보내줄 수 있는데.”
“저번에 저택에 초대 받았을 때 백작님과 따로 말씀 나눌 기회가 있어서 부탁드린 것입니다.”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클리프의 가슴이 찡해졌다. 저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 것이었다. 클리프는 감동 받은 눈빛으로 카르한을 보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여튼 그렇게 된 거니 오해하지 말거라.”
“뭐, 그래요.”
일리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언제 왔니.”
“좀 전에요. 1층은 다 돌고 올라왔어요. 좋은 작품이 많던데요?”
“네가 만족했다면 다행이구나. 물론 아쉽긴 하다만…….”
클리프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그는 제법 오랫동안 전시회를 기획해 왔다. 하지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공개된 것이었다. 공개되지 않은 신인 작품을 전시회의 꽃으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리아는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노귀족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방금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분들이 다녀갔어요.”
“인사드리러 가야겠구나.”
클리프는 고개를 돌려 따스한 눈빛으로 카르한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천천히 구경하시다 돌아가십시오.”
“오늘 감사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함마저 느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궁금해졌다. 클리프가 가버리고,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저희 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죠?”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 설명을 해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미심쩍긴 하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돌아볼래요?”
카르한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기쁨을 띤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눈동자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일리아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혼자 구경하니 지루했나 보네.’
일리아와 카르한은 천천히 2층을 돌았다. 카르한은 이미 구경을 모두 끝낸 후였지만, 잠자코 일리아를 따랐다. 그리고 계속 눈여겨보았던 일리아를 닮은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
“색감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따스해 보이네요.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카르한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일리아의 감상평에 카르한은 묘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한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일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함께 감상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2층을 전부 돌고 난 후,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왔다. 따로 약속을 정해두고 만난 건 아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는 조금 아쉬웠다. 카르한도 마찬가지였는지 눈동자만 굴렸다.
“조금 이르긴 한데, 간단하게 저녁 식사 하러 갈래요?”
일리아가 먼저 제안을 건넸다.
“과실주가 괜찮은 곳이 있거든요. 아참, 술 안 마시죠?”
“……아닙니다!”
카르한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마시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승낙으로 받아들인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바로 미술관을 나왔다. 일리아가 데리고 간 곳은 골목 어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목재로 지은 가게는 벽면 절반이 열려 있어, 탁 트인 느낌을 주었다. 터를 잡은 지 제법 되었는지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꽤 운치 있고 적당히 조용했다.
카르한이 가게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일리아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구석 자리긴 했지만 고개를 돌리면 야외가 보였다. 노을이 질 즈음 저 멀리 보이는 강변이 아름다워서 종종 찾곤 했다.
“가끔 오는 가게예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일리아는 가게를 그 자리에서 매수하거나, 고급 의상실을 옷장으로 둘 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종종 소박한 가게를 소개해주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음식점도 귀족 아가씨가 선호할 만한 가게는 아니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그냥 좀 신기해서…….”
“제가 이런 가게를 알고 있는 것이요?”
속마음을 들킨 카르한은 놀랐는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일리아는 조금 웃다가 대답해주었다.
“항상 좋은 것만 경험할 수는 없잖아요.”
일리아는 귀족 아가씨였지만,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해왔다. 가족들의 상반된 교육 탓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일리아에게 최고만 안겨주었다. 대신 어머니는 일리아를 데리고 다니며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게 도와주었다.
-비싼 것이 꼭 최고라는 법은 없단다.
-뭐든지 일단 경험해 보렴.
어머니의 말은 아직까지 일리아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덕분에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았다. 모험이긴 하나, 가끔씩은 지금처럼 소박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가게를 찾곤 했다.
“혹시 좀 불편해요? 자리를 옮길까요?”
“아닙니다. 저도 이런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카르한은 편안한 듯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몇 번 본 적도 없지만, 카르한이 미소 지을 때마다 왠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순간 직원과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직원은 겁을 먹거나 놀라기는커녕 뺨을 살짝 붉혔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직원이 카르한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으니 무척 잘된 일이었다. 마땅히 축배를 들어야 할 만한 일인데, 이 미묘한 기분은 무엇인지.
일리아는 생각을 떨쳐내고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사이, 직원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추천해드릴게요. 여기 밑에 보시면…….”
직원은 은근슬쩍 비싼 메뉴를 시키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카르한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메뉴판을 좀 더 보고 주문하겠습니다.”
직원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고르시면 불러주세요.”
직원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가버리자, 카르한이 뿌듯한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거절을 못해서 강매 당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거절도 잘하는데요? 이제 제가 없어도 되겠어요.”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 뿌듯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는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안 되는데…….”
희미한 중얼거림은 가게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일리아는 메뉴판을 세로로 세워서 카르한과 함께 메뉴를 골랐다. 야채를 좋아하는 카르한을 위해 토마토 샐러드를 하나 고르고, 일리아는 소시지를 선택했다.
“세 사람도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일리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프란체와 말렉, 테시온에게 말했다. 프란체와 말렉은 아직 일하는 중이었기에 술 대신 음식만 골랐다. 테시온이 그들을 대신하여 가벼운 밀주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왔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술병 하나가 턱 하고 놓이자, 카르한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일리아를 보았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술병을 따며 물었다.
“그런데 원래 술 안 마시지 않았어요?”
“……아예 금주한 것은 아니고, 자제하던 중이었습니다.”
“왜요? 건강 때문에요?”
카르한은 술을 멀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었다. 그가 전전했던 전쟁터에서는 군율상 술을 금기시했다. 오랜 기간 동안 술은 마시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해온 탓에, 전역 후에도 자연스럽게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은 몇 년 만입니다.”
“이거 조금 독해요. 괜찮겠어요?”
“제가 술은 잘 모르지만, 아직까지 취해본 적은 없습니다.”
외모만 보면 술을 무척 잘 마실 것 같긴 했다. 일리아는 혹시 몰라, 유리잔에 술을 조금만 따라주었다. 달달한 과실주가 채워지고 일리아가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건배해요.”
두 개의 잔이 닿을 듯 말 듯 기울어졌다. 이윽고 카르한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독했는지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카르한은 다시 한번 술을 홀짝였다. 아무래도 끝 맛이 달달한 과실주는 카르한의 취향인 듯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술을 곁들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먼저 먹어보고 맛있으면 서로에게 권하기도 했다. 카르한은 여린 채소와 토마토를 맛있게 먹었다. 채식하는 흑곰 같아서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더니 남자 셋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이 맞은편 끝에 앉자, 일리아는 잠시 그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옮겼다.
탁 트인 공간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 색깔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을 보며 일리아는 술을 홀짝였다.
무척 평온한 시간이었다. 카르한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리하트를 만날 때는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친해질 생각이 없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거래를 제시했을 때만 해도 적당히 이득만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얽히다 보니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계약만 아니었다면 계속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조용히 술을 마시던 카르한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고민 많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잘 이어가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해주었다.
“음, 저는 가끔씩 상대의 말을 되묻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긴 해요.”
“예를 들면요……?”
“만약 상대가 ‘나 어제 친구하고 만났어.’라고 말하면 ‘친구랑?’하고 되물어요. 그럼 상대에게 다시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
카르한은 명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었다.
“아까 속상했죠?”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미술관에서 그분들이 좀 지나치게 굴었잖아요.”
노귀족들은 편협적인 시각을 가지고 카르한을 대했다. 나중에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속상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실수했다고 생각했기에…….”
“화가 나지 않아요?”
“화는…….”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그리고 비밀을 털어놓듯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저는 분노라는 감정을 잘 모르겠습니다.”
“…….”
“억울하고 슬픈 것은 알겠지만요.”
일리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끔 보고 있으면 카르한은 어린아이 같았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서투른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물처럼 순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분노라는 감정을 가르쳐주기엔 너무나 막연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화가 나면 속이 끓어올라요. 옷을 겹겹이 입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전부 쏟아내고 싶어져요.”
“…….”
“저는 그걸 분노라고 불러요.”
카르한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단어를 깨우치는 아이처럼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여간 아까 그분들에게 잘 보이면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나중에 작위를 계승할 때 기반을 쌓기도 좋을 거고요.”
작위 이야기가 나오자 카르한이 움찔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후계자 수업 힘들지 않아요? 많이 바쁠 텐데……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따로 만날 시간이 있느냐고 일리아가 물었다. 그러자 카르한은 대답 없이 테이블 위만 쳐다보았다. 그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일리아는 잠자코 기다려주며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일리아는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함께 앉아 있던 이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려는데, 덜컹 하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저는…….”
카르한이 어렵사리 입술을 떼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살짝 비틀대는 와중에도 호기로운 얼굴이었다. 일리아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는 것이, 목적이 뻔했다.
그리고 남자가 일리아 쪽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프란체와 말렉이 동시에 일어났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휴, 많이 취하셨네.”
“……어어?”
“자, 집으로 갑시다.”
프란체가 무력으로 남자의 몸을 완전히 틀어버렸다. 얼떨결에 남자는 출입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남자가 놓으라며 팔로 밀어냈으나, 프란체와 말렉은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말렉이 남자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이내 조용해진 남자는 말렉에게 끌려 나갔다.
프란체는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말렉과 남자가 나가자, 문을 닫고 등을 딱 붙였다. 프란체가 일리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꼴을 고스란히 지켜본 일리아는 뒤늦게 카르한에게 물었다.
“미안한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카르한을 향했다. 카르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자신이 일리아가 생각하는 후계자가 아님을 털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뒤늦게 정신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도 일리아는 평소처럼 저를 대해줄까?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별 거 아니었습니다.”
카르한은 결국 입술까지 차올랐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자신은 형편없는 겁쟁이였다.
카르한은 곧바로 술잔을 들었다. 빠르게 술잔을 비우는 그를 보던 일리아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가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 없이 술만 마셨다. 술잔을 비우는 속도는 일리아가 카르한보다 빨랐다. 그러나 멀쩡해 보이는 일리아와 달리, 카르한의 목덜미와 귓불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취한 거 아니죠?”
“……괜찮습니다.”
대답이 반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아까 취한 적이 없다고 하더니.’
솔직히 외모만 보고 잘 마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전이었다.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살폈다. 군살 하나 없는 턱선이 무척 날렵해 보였다. 햇빛이 드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좀 더 맑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짙고 반듯한 속눈썹,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입술과 이마를 살짝 덮은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내려오니 그의 쭉 뻗은 목선과 대칭을 이루는 넓은 어깨가 보였다. 얼굴부터 몸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이쯤 되었으면 익숙해질 법도 되었는데, 도리어 점점 더 시선이 갔다. 요즘 들어 표정이 좀 더 다채로워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첫 만남 때는 박물관에 세워둔 동상처럼 딱딱했지만, 지금은 생동감이 넘쳤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던 일리아의 눈에 카르한의 손등이 들어왔다. 단단해 보이는 손 위로 불거진 핏줄이 미약한 골을 만들고 있었다. 분명 저와 똑같은 유리잔을 들고 있는데, 손이 큼직해서 그런지 유리잔이 작아 보였다.
‘저번에 손잡았을 때 내 손을 완전히 감쌀 정도로 컸지.’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는데, 순간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
“손이 참 크네요.”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리아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같은 유리잔인데 당신이 드니까 유독 작아 보여서요.”
“……아.”
“저는 손이 작은 편이거든요.”
일리아가 손바닥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많이 차이 나 보이죠?”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테이블 위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대보아도 좋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던 일리아는 냉큼 손바닥을 대보았다.
손이 겹쳐지자 온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손 크기를 비교해 보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는 차이 났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서 그런지 단단하네. 굳은살도 많고.’
탄탄하다 못해서 단단하게 느껴지는 손바닥이었다. 부드러운 제 손바닥과 너무나 달라서 신기했다. 촉감이 좋아서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었다.
느슨하게 깍지가 껴지자 카르한이 파드득 떨었다. 일리아는 온통 손바닥에 집중하느라 카르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한은 다른 쪽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불을 오랫동안 쬔 것처럼 뺨이 뜨끈했다. 멀쩡하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앓이 하듯 욱신거리는 감각이 가슴께부터 손끝까지 전해졌다. 요즘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재발한 모양이었다.
“잠시만…….”
카르한이 조금 초조하게 말하자, 일리아가 손을 놓아주었다. 카르한은 외투에서 다급히 약통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탈탈 털자, 흰 알약 두 개가 나왔다. 카르한은 물도 마시지 않고 약을 삼켰다. 그것을 본 일리아가 놀라서 물었다.
“웬 약이에요?”
“……요즘 심장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심장이요? 언제부터요?”
일리아가 놀라서 묻자, 카르한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저번에 일리아가 에반테온 공작저에 방문했을 때, 카르한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카르한이 증상을 말했을 때, 테시온은 곧바로 의원을 불렀다.
-심장이……, 심장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설마 죽을병은 아니지요?
테시온은 이미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채 의원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의원은 카르한에게서 증상을 들은 후 약을 지어서 건네주었다.
-심장에 통증을 느끼거나 비정상적으로 뛴다고 생각되실 때 드십시오.
그러나 막상 약을 짓고 나니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들고 다니긴 했는데, 하필 지금 그때처럼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최근 들어서 가끔씩 통증이 있습니다.”
“우리 가문 주치의라도 보내드릴까요? 황실 주치의 출신인데.”
“자주 그런 건 아니라서…….”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일리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입매를 꾹 다물었다. 일리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간질거렸다.
살아오면서 걱정 받을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과 엮인 사람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상황이 익숙하진 않지만, 싫진 않았다.
조금 잦아들었던 심장 소리가 다시 북을 치듯 둥둥 울려 퍼졌다. 점점 커져가는 소리는 주변의 소음을 모두 집어삼켰다.
카르한은 약 효과가 돌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아서 심호흡만 여러 번 할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심장 소리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저릿하던 감각도 많이 줄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약도 먹었으니 술은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일리아가 카르한의 술잔을 치우려고 하자, 그가 빠르게 말했다.
“이 약은 술을 마시는 것과는 상관없다고 들었습니다.”
일리아는 처음보다 붉어진 카르한의 귓불과 목덜미를 힐끔 보았다.
“그럼 조금만 더 마셔요.”
일리아는 메뉴판을 아예 덮어버렸다. 남은 술만 마시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이 이상으로 마셨다가는 술을 마신 티가 날 것 같았다.
일리아의 목표는 조용히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택을 두고 굳이 밖에서 술을 마시는 까닭은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술을 마셨다간 온 집안사람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리아는 종종 밖에서 술을 마신 후 안 마신 척하고 들어가곤 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술만 홀짝홀짝 마셨다. 살짝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일리아가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카르한은 포크로 애꿎은 토마토만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취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이만 일어나자고 말하려 했다. 그때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리아가 멈칫했다. 카르한은 포크로 토마토를 가지런히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늘 듣기만 하던 카르한은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카르한의 말을 들어주었다.
엄격한 집안에 태어나, 딱 한 번 착하다는 칭찬을 들은 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누구에게든 좋으니 인정받고 싶었다는 것. 하지만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것.
길고 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카르한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번에…… 공작저에 방문하셨을 때…….”
조금 늘어지는 말투에서 술에 취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검은 속눈썹이 차양처럼 드리웠다가 천천히 올라갔다. 속눈썹 안에 숨어 있던 새파란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그때 정말 기뻤습니다.”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줘서. 그것이…… 무척…….”
카르한이 배시시 웃었다. 무해한 웃음에 일리아는 술잔을 들려다가 놓쳤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카르한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깨달았다.
-하여튼 당신은 제가 보기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카르한이 저 스스로를 구제 불능이라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서 내뱉은 말이었다. 엄청난 의미를 둔 말도 아니었는데, 카르한에게 깊이 남았을 줄은 몰랐다.
카르한은 가만히 일리아만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벽안에 흠뻑 빠져버릴 것 같았다. 살짝 휘어진 눈매가 부드러워서 일리아는 잠시 숨을 멈춘 채 눈만 깜빡였다.
평소에 카르한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눈이 마주치면 먼저 피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저를 빤히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녹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카르한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제가 나쁜 남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한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아졌다. 그리고 일리아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당신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사람의 별 의미 없는 말일 텐데, 그게 오랫동안 귀에 박혀들었다. 괜히 쑥스러워진 일리아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당연하죠. 앞으로 나한테 잘해요.”
카르한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순간 카르한이 귀엽다는 생각을 해버린 일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벌써요?”
아쉬움 가득한 말투에 일리아는 순간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가야죠.”
벌써 날이 저물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일리아는 곧바로 프란체와 말렉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프란체와 말렉이 빠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시온은 술을 좀 마셨는지 목과 뺨이 발갰다. 모두가 일어나자, 카르한 또한 얌전히 일리아를 따랐다.
계산을 마친 후 가게를 나왔다. 강가라 그런지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일리아가 어깨를 떨자, 카르한이 빠르게 외투를 벗었다.
“괜찮으니까 그냥 입고 있어요.”
그에게 매번 외투를 얻어 입었다. 심지어 저번에 걸친 외투는 아직 돌려주지 못한 채였다.
“감기 걸리면 안 됩니다.”
단호한 말투에 일리아는 당황했다. 그사이 카르한은 자신의 외투를 일리아에게 걸쳐주었다.
일리아는 단추를 꼼꼼히 채워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가의 불빛 때문인지, 카르한의 눈동자에 불빛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것이 야경보다 아름다워서 일리아는 잠시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단추를 완전히 채운 카르한이 손을 거두었다.
“……다음에 저번에 빌린 외투와 함께 갖다 줄게요.”
카르한은 대답 대신 눈매를 조금 접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술을 마시면 웃음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제 안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술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