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6/28)

6장

***

리하트는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누나인 시오나가 잔뜩 화가 난 채 후작가로 쳐들어온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리아 블로든 좀 미친 것 같아.

시오나는 온갖 욕을 늘어놓았다.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느니, 다음엔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느니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가 떠보듯이 물어왔다.

-걔 말로는 파혼한다던데, 설마…… 아니지?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다퉜더니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리하트는 열심히 변명했다. 씨근덕대던 시오나는 대뜸 빚을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육아 용품을 좀 샀는데, 남편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고 칭얼댔다.

하지만 리하트도 그런 거금은 당장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는 돈이 들어오는 족족 사치스럽게 써버렸다. 어차피 필요할 때마다 일리아에게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일리아와 틀어진 후로 돈 들어올 구석이 없어서 현금이 똑 떨어진 상태였다.

이 나이에 부모님께 용돈 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결국 있는 물건을 팔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리하트는 나중에 일리아와 화해하고 갚아주겠다며, 겨우 시오나를 달래서 돌려보냈다.

“성질 좀 죽일 것이지.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시오나와 일리아가 대판 싸웠다면 더욱 불리해졌다. 안 그래도 최악인 상황에 기름까지 부은 것이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언제나 연애에 관해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그였기에, 역경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심지어 그의 가족들은 블로든 가문만 믿고 이리저리 판을 벌이고 있었다. 사치는 기본이었고 어머니는 사돈 댁 연줄을 빌려 사업을 하겠다며 난리였다.

모든 기대가 리하트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니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일리아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형편으로서는 가족들에게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람을 쐬어야겠다고 생각한 리하트는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이 그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저들끼리 고개를 모아 속닥거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저 멀리서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저를 부를 일이 무엇이 있나 싶어서 리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이자, 집사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조용히 종이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부르시는 모양입니다.”

집사가 내민 황토색 종이는 타블로이드지였다. 유명인의 추문이나 흥미 위주의 소식을 전하곤 하는, 신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싸구려 정보지였으나 은근히 잘 팔렸다.

리하트는 집사가 내민 타블로이드지를 받아들였다. 빠르게 훑어 내리던 눈이 하단 귀퉁이에서 멈추었다.

[충격! 일리아 블로든, 리하트 테르시안과 파혼 원해.]

[결혼식 세 달 앞두고 파경!]

[블로든 가문 아가씨, 매일 눈물 바람. 그 이유는 바로……?]

종이를 쥔 리하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리아 블로든……!”

리하트는 타블로이드지를 집어던졌다. 자신이 바람 피웠다고 대놓고 적혀 있진 않았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제목이었다. 일리아가 기사를 낸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먼저 여론을 이용해버리면 자신이 불리해진다.

좋게 해결하려고 했건만,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리하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집사가 먼저 걸음을 뗐다. 뒤따라가던 리하트는 자존심이 상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회유해도, 용서를 빌어도 일리아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강제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집사의 걸음이 멈추었다. 가볍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리하트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공간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테르시안 후작은 리하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왔느냐.”

“……예.”

불편한 분위기에 리하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리하트의 아버지인 테르시안 후작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권위를 우선시했으며, 귀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강했다.

어릴 적에는 후계자 수업이니 뭐니 잔소리가 많았으나, 일리아와 약혼한 후에는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일리아와 파혼하게 생겼으니, 리하트는 절로 초조해졌다. 한참 후 후작이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어찌 된 일이냐.”

리하트는 어렵지 않게 그가 무엇을 묻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을 했더니…… 화가 난 모양입니다.”

리하트는 자신이 잘못한 점을 쏙 빼고 말했다.

“고작 그런 일로 기사를 낸단 말이냐.”

테르시안 후작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리하트는 움찔했다가 도리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자신이 바람피운 것이 잘못이라 한다면, 일리아 또한 약혼을 파기하기 전에 새 연인이 생겼으니 변명할 말이 있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버지가 나서준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 좀 도와주십시오.”

“한심한 놈. 여자 마음 하나 못 움직여서…….”

후작이 혀를 찼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하고는 이야기해보았느냐.”

리하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후작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헤인리 블로든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헤인리 블로든과 이야기해보마.”

***

카르한은 일리아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팔에는 일리아가 선물한 디저트 봉투를, 다른 한 팔에는 두꺼운 예술 사전을 낀 채였다. 언제 다 읽나 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봤더니 어느새 반절 넘게 읽었다.

테시온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는지 테시온은 카르한에게 미리 전시회에 가서 사전 조사를 하자고 말했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으나 카르한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입장과 동시에 블로든 백작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그러니 무작정 암기해두는 수밖에 없었다.

카르한이 얇은 외투를 벗자, 테시온이 바로 받아주었다. 근래에 테시온은 무척 밝아 보였는데, 특히 오늘은 날아갈 듯했다.

“그렇게 거절을 잘하실 줄 몰랐습니다.”

테시온은 자기 일처럼 뿌듯해했다.

“거절을 못하셔서 야간 보초를 3일이나 서신 적이 엊그제 같은데…….”

감격스럽다며 그가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 테시온은 전쟁터에서 카르한을 처음 만나, 지금까지 가장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동안 속 터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알고 보니 호구여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식량이 귀한 전쟁터에서 그마나 먹을 만한 음식을 빼앗기고, 대신해서 전투에 참가해주고…….

보다 못한 테시온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카르한은 전쟁터에서 아사하거나 과로로 죽었을 것이다.

“블로든 영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테시온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상상하기도 싫다는 얼굴이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테시온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 그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프란체와 말렉이 계속 일리아를 찬양하길래 모시는 주인이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 테시온도 함께 찬양하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런 테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셔츠 단추를 풀어나갔다. 문득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쁜 남자가 되어주세요.

아직도 나쁜 남자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리아가 나쁜 남자가 되어달라고 말했으니, 그럴 생각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모습에 카르한의 딱딱하던 표정이 조금 무너졌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매번 저를 보며 잘했다고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카르한은 디저트가 담긴 봉투를 탁자에 올려두었다.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지만, 아까워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심장 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내뱉어 본 욕설이 귓가를 맴돌았다. 일리아는 그 정도는 욕설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에게는 신선하고 낯선 경험이었다.

카르한에게 욕설이란 하면 안 된다고 규정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부탁이나 제안을 그런 식으로 거절한 것도 처음이었다.

일리아는 심성이 착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카르한은 알고 있었다. 그 말과 달리 자신은 착하지 않다는 것을. 그저 착한 아이로 보이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카르한은 너무 오래되어서 빛바랜 기억을 꺼냈다.

-도련님은 참 착하시네요.

어릴 적, 누군가가 지나가듯 말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처음 들어본 칭찬이었다. 부모의 애정에 목말라 소심하고 수동적이었던 그에게 칭찬은 아주 작은 상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카르한은 상자에 저 자신을 강제로 우겨넣었다. 비좁은 줄도, 불편한 줄도 모르고…… 그것에 맞추려고 들었다.

카르한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배려하고, 얌전해지며, 친절하려 애썼다.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목마른 아이가 딱 한 모금 마신 물에 집착하듯, 그렇게 지냈다. 고작 딱 한마디가 평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일리아는 말해주었다.

-모두에게 친절해질 필요는 없어요.

저는 더 이상 착한 아이로 남지 않아도 될까요?

누군가 그 물음에 대답해주길 바랐고, 일리아에게서 해답을 얻었다. 카르한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상자에서 나왔다. 저 자신을 억압해 왔던 상자 밖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수천 번도 넘게 곱씹어서 닳아버린 칭찬을 깊이 묻어버렸다. 바로 곁에서 칭찬해줄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시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필요하신 것 있습니까?”

“어머니를 뵈어야겠다.”

“예……?”

당황한 테시온이 되물었다. 카르한은 말을 번복하지 않고 지금보다 조금 더 격식 있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마치 부모가 아닌 타인을 만나러 가는 듯했다.

복도를 나온 카르한은 고용인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떨떠름해하던 고용인은 공작부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발걸음 할 일이 거의 없던 장소에 도착했다. 카르한은 가벼운 심호흡을 내뱉은 후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하나를 두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카르한은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말하거라.”

그녀는 카르한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중요한 말입니다.”

카르한의 말을 듣고도 안쪽에서는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영겁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에반테온 공작부인은 저보다 한참 큰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자식이 아닌, 지긋지긋한 무언가를 보는 시선이었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언제부터 그녀가 자신을 이런 눈으로 봤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카르한은 그녀에게 갱생이 불가능한 아들이었다.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고치고 싶은데, 이유를 몰라서 억울했다.

카르한은 무작정 어머니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양극단에 서게 된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에반테온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카르한은 묵묵히 시선을 받았다. 가슴을 난자하는 눈빛이었으나, 왠지 이전만큼 아프지 않았다.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강해진 것인지. 카르한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저 시선은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었으니까.

“새로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공작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따귀가 날아오기 전에 카르한은 말을 이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그녀의 몸이 멈칫했다. 카르한은 어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마치 일리아가 곁에서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블로든…….”

공작부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국에서 블로든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실이 권력의 정상에 올라 있듯, 블로든 가문은 재력으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델로타 가문 또한 엄청난 재력을 거머쥐고 있지만, 블로든 앞에서는 몇 수 접어야 했다. 그만큼 블로든 가문 앞에서는 누구도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제야 조금 쓸모 있는 짓을 하는구나.”

싸늘하기만 하던 공작부인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지금까지 카르한을 향한 표정 중에서 가장 자애로웠다.

그녀는 장남인 블레어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카르한을 팔아치울 수 있는 여자였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 스텔라 델로타와 재보던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인사를 해야겠으니, 조만간 데리고 오너라.”

***

스텔라는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뒤늦게 끝이 망가진 손톱을 확인하고 짜증을 냈다.

“잘 다듬었는데…….”

스텔라는 고용인을 불러, 손톱을 다시 다듬게 시켰다. 그러는 동안 괜히 입술만 짓씹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와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계속 초조했다.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잘 해결해주겠다고 말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약혼식을 치르지 않은 이상 언제든지 뒤집힐 가능성이 있었다. 심지어 상대가 자신과 엇비슷한 환경을 가진 일리아 블로든이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역시 그 계집애한테 경고해야겠어.”

스텔라는 한번 결정 내리면 바로 밀어붙여야 하는 성미였다. 손톱 정리가 끝나자, 스텔라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블로든 저택으로 가자.”

급하게 외출 준비를 끝낸 스텔라는 마차에 올라타 블로든 저택으로 향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멈춰 섰다.

“블로든 저택 입구입니다.”

거대한 대문 앞에는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방문 의사를 미리 밝히지 않았더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델로타 가문 인장이 찍힌 마차를 보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일리아 블로든에게 전해. 스텔라 델로타가 찾아왔다고.”

스텔라가 당당히 외치자, 경비병 중 하나가 말했다.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좀 오래 걸릴 수 있다고 경비병이 말했다. 스텔라는 마차에서 대기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인내심의 한계가 온 스텔라가 발칵 화를 냈다.

“물어보러 간 거 맞아?”

일부러 물 먹이는 거 아니냐며 스텔라가 길길이 날뛰자, 남아 있던 경비병들이 말했다.

“지름길로 갔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집에 무슨 지름길이 있어?”

스텔라는 아예 마차에서 내려서 따지려 했다. 그때 저 멀리서 경비병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굳건하던 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마침내 델로타 가문 마차가 블로든 저택 부지에 들어섰다. 마차는 양옆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줄 지어 있는 대로를 달렸다. 깔끔하긴 하나 정원치고는 한적했다.

“별 거 없네.”

우리 집 정원이 더 낫다며 스텔라는 자존심을 채워 넣었다. 다들 블로든 저택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워주더니, 소문이 부풀려진 모양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나무 덩굴과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입구가 보였다. 스텔라를 따라온 시녀, 레나가 표지판을 보고 무척 놀란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부터 정원인 모양이에요.”

스텔라는 마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미친 거 아냐?”

방금까지 본 것은 무엇이었냐며, 스텔라는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끝이 없었다. 잘 정돈된 관목들이 일정한 높이를 맞춰서 나열되어 있었다.

사방에는 온갖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나 있었고, 길 양옆으로 수로가 평행하게 놓여 있었다. 일정한 간격마다 위치한 분수대는 엄청났다. 일반 저택이 아닌 중앙 광장에나 있을 법한 크기와 모양새였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유리로 만들어진 돔이 보였다. 사치의 끝이라고 불리는 온실 정원이었다. 스텔라의 집에도 있었지만, 저렇게 크지는 않았다.

“잠깐 멈춰 봐.”

멍하니 정원을 구경하던 스텔라가 소리쳤다. 스텔라는 잠깐 구경할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말한 후, 마차에서 내려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에 스텔라는 잠시 넋을 놓았다.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황궁을 제외하고 델로타 저택이 최고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블로든 저택은 스텔라의 생각을 완전히 부숴놓았다.

정신없이 구경하던 스텔라는 점점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일리아 블로든이 저보다 뛰어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더 우월하지 못하다면 비슷하게라도 해둬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일단 눈으로 담아놓고, 델로타 저택도 똑같이 만들 생각이었다.

“정원사를 새로 고용하고……. 저건 무슨 꽃이지?”

스텔라는 이름 모를 꽃을 보았다. 끝이 살짝 말려들어간 다홍색 꽃잎이 바람결에 흐느적거렸다. 제 눈동자 색을 닮은 이름 모를 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가 어찌나 향기로운지 자신이 쓰는 향수보다 더 좋은 듯했다.

스텔라는 고민하지 않고 꽃을 꺾었다. 손수건을 꺼내 꽃을 감싼 후 가방에 넣었다. 정원사에게 꽃을 보여주면서 정원을 갈아엎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한참 정원 구경을 하던 스텔라는 문득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사방이 꽃과 나무라서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스텔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 없어?!”

스텔라가 허공에 소리쳤다.

“레나!!!”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텔라는 입술만 꽉 깨물었다. 이러다가 남의 집 정원에서 조난당하게 생겼다. 무작정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결국은 저택 안이니, 걷다 보면 길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덥기도 덥고,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스텔라는 그 자리에서 반쯤 주저앉아 짜증을 냈다.

“집을 왜 이렇게 크게 지어서……!”

원망의 상대는 일리아 블로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던 중, 허공에 폭죽이 터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산란했다.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걸어가니 뚜껑 없는 마차가 있었다. 살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길을 잃으셨습니까?”

마차를 몰던 사내가 스텔라를 보고 먼저 물어왔다. 스텔라는 자존심 상했지만, 누구보다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

“타십시오.”

마차에 올라탄 스텔라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발견했다. 스텔라는 고용인 복장을 한 여자에게 물었다.

“방금 폭죽이 터졌는데, 그건 뭐지?”

대낮에 폭죽놀이를 하냐는 물음에 여자가 대답해주었다.

“조난 신호입니다. 저도 방금 길을 잃어서…… 제가 쏘아 올렸습니다.”

“조난이 자주 있단 말이야?”

스텔라가 당황해하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정원을 돌면서 길 잃은 고용인을 데리러 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폭죽을 쏘아 올리면 찾으러 가지요.”

스텔라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도대체 저택이 얼마나 넓은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짜증 낼 힘도 없어진 스텔라는 지친 상태로 저택 현관에 배달되었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 먼저 도착한 레나가 울먹이면서 스텔라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시죠? 정말 큰일 난 줄 알았어요.”

스텔라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저택이 쓸데없이 커서…….”

“왔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텔라는 고개를 들었다. 현관 중앙에 일리아가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사람을 보낼까 하던 중이었어요.”

스텔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은 이렇게 고생했는데,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니 얄미웠다.

“정원이 불필요할 정도로 넓더군요.”

뾰족한 말투에 일리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별생각 없이 확장했더니 이렇게 되었네요.”

원래 블로든 저택 부지는 이렇게 넓지 않았다.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 집 근처 토지가 자꾸 헐값에 나와서 확장했더니, 감당할 수 없이 넓어졌다. 더 늘렸다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지금은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불쑥 찾아온 이유는 뭔가요?”

“당신이 에반테온 소공자와 만난다고 들었어요. 그에게 직접 물었을 때 인정했고요!”

스텔라는 금방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황궁 연회 때와 달리 이제는 증거도 있었다. 더 이상 일리아 블로든도 발뺌하지 못할 터였다.

“맞아요.”

일리아가 순순히 인정하자 스텔라는 잠시 당황했다. 이윽고 스텔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따지기 시작했다.

“저번 연회에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본인이 생각해도 뻔뻔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일리아는 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델로타 영애야말로 소공자와 무슨 사이인데요?”

“곧 약혼자가 될 거예요.”

“그럼 아직은 남이라는 거잖아요.”

“남이라니, 우리는……!”

스텔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족끼리 혼담이 오가고 있지만, 아직 카르한과 스텔라 사이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그것이 불안해서 스텔라는 카르한에게 집착했다. 고용인을 매수해서 그의 일정을 꿰고, 우연을 가장해서 따라다니고…….

조금이라도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만남을 많이 만들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자신이 카르한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질문에 딱 부러지게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스텔라는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 약혼자도 있잖아요!”

“타블로이드지 못 봤나 봐요? 파혼할 거라고 기사도 났는데.”

파혼이라니. 스텔라는 잠시 당황했다. 일리아가 리하트에게 목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죽고 못 살 때는 언제고, 사랑이 참 보잘것없네요.”

스텔라가 비꼬자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내고 잔뜩 헤집고 할퀴었다.

“왜, 테르시안 영식이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마저도 품고 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일리아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소공자를 사랑하나요?”

스텔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스텔라는 카르한을 사랑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무서울 때는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스텔라는 그를 길들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나쁜 남자를 바꾸는 것은 결국 여주인공이 아니던가.

“그게 뭐 중요한가요. 정략결혼에.”

스텔라는 사랑 대신 자신의 야망을 선택했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거기다 이미 스텔라는 권력의 달콤함을 알아버렸다.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벌써부터 공작부인이 된 것 같은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한과 약혼하지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 될 터였다.

스텔라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일리아가 있는 한 스텔라는 만년 2등이었다. 아무리 일리아가 가진 것을 강탈하고 짓밟아도,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카르한 에반테온은 그녀가 일리아보다 확실하게 앞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인은 내 편이에요.”

카르한은 공작부인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정 안 된다면 공작부인을 내세워서 카르한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공작가에 정식으로 항의해서 소공자를 단속시키겠어요.”

스텔라의 말이 끝나자 일리아는 팔짱을 풀었다. 표정이 없던 얼굴 위로 싸늘함이 감돌았다.

일리아는 난감해하던 카르한을 떠올렸다. 스텔라를 피해 무척 다급하게 테라스로 뛰어 들어온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당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그리 못살게 굴었군요.”

정곡이 찔린 스텔라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단숨에 현관으로 뛰어올라왔다.

“일리아 블로든!”

일리아에게 닿기도 전,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스텔라를 막아 세웠다.

“남의 남자를 빼앗으려 하다니, 이 도둑 같은……!”

스텔라가 마구 비난을 쏟아내자 일리아가 단칼에 잘라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남의 것을 탐한 것은 너였잖아.”

“무슨……!”

“마차 도안 생각 안 나?”

스텔라가 바짝 굳어졌다. 오래전 일을 지금 꺼낼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한 입장인 일리아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스텔라는 항상 제 것을 탐냈다. 거금을 줘서라도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사들였고, 얻을 수 없을 때는 짓밟았다.

다른 건 다 참았지만, 마차 도안 사건은 용서할 수 없었다. 블로든 가문의 디자이너들이 밤새워 만든 도안이었다. 그것을 훔쳐다가 바로 제품을 출시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증거가 어디에 있어!”

스텔라가 발뺌하자, 흩어져 있던 고용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시선이 화살촉처럼 뾰족하게 그녀를 향했다. 스텔라는 뒤늦게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더 이상 말을 섞어 봤자 시간만 아깝다고 느낀 일리아가 뒤돌아섰다.

“손님이 돌아가실 모양이구나. 모셔다 드리도록.”

어어 하는 사이, 스텔라와 시녀가 마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일리아는 마차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차에 올라탄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외쳤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나를 공작부인이라고 부르게 될 거야!!”

일리아는 태연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에 열이 뻗쳤는지 창문이 부서지도록 거세게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델로타 가문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대뜸 저를 찾아왔기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들어나 보자 싶어서 만나주었다. 하지만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해도 스텔라 델로타는 좀 아니지.”

일리아는 살면서 스텔라만큼 집착과 탐욕이 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에게 지금까지 시달렸을 카르한이 불쌍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온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스텔라를 상대하고 나니 더더욱 리하트와 파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땅히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계약 기간 내에는 파혼해야 하는데…….’

머리가 아파진 일리아는 아까 읽다 말았던 책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독서하고 있는 사이, 창가를 타고 흘러 들어오던 빛이 점점 물러났다.

다 읽고 나니, 벌써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부모님은 밤늦게 돌아오신다 했고, 지금쯤 오라버니가 도착해야 할 시간이었다. 일리아는 창문으로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안 오셨네. 일이 많이 바쁘신가?”

카르한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이후로 오라버니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집에 살아도 워낙 넓기 때문에 일부러 만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종종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요즘은 제안이 뚝 끊겼다.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산책 삼아 헤인리의 거처로 향했다. 복도를 걷고 있으니 고용인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혹시 오라버니는?”

일리아의 물음에 고용인들이 걱정이 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그래……?”

헤인리는 꼬박꼬박 칼같이 퇴근하는 편이었다. 일이 바쁘더라도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돌아왔었다.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말한 후 침실로 되돌아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일리아는 부모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헤인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즈음, 헤인리의 마차가 현관 앞에 도착했다. 일리아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일리아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헤인리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막 침실로 들어가려는 헤인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일리아?”

헤인리가 문고리를 잡은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빨리 걸어오느라 숨이 차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늦게 오시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이내 헤인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랫사람이 사고를 쳐서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래요?”

일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조만간 끝날 거다. 늦었으니 이만 자거라.”

“네, 오라버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일리아의 인사에 헤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선 일리아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헤인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사무실 가장 끄트머리에 반듯하게 정리된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앞에는 은테 안경을 쓴 금발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황궁의 유명 인사인 헤인리 블로든이었다.

처음 공직에 올랐을 때, 헤인리는 제국 제일 부자인 블로든 가문 장남으로 이름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처리는 완벽하지만 까칠한 성격으로 수많은 이들을 울리면서 더 유명해졌다.

헤인리 블로든은 무능력한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적당히 봉급을 타먹으려던 이들은 모두 그의 손에 갈려나갔다. 블로든 가문에 연줄을 대어보려던 사람들도, 상냥해 보이는 얼굴에 속아서 이용해먹으려고 접근했던 이들도 전부 울면서 뛰쳐나갔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헤인리가 정말 사람이 맞는지 의심했다. 냉철한 독설가를 떠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칼바람만 쌩쌩 불었다.

그래도 헤인리의 표정이 부드러워질 때가 가끔 있었다. 책상에 올려둔 작은 초상화를 바라볼 때였다. 그때만큼은 설풍이 멎고 봄바람이 불어오듯 따스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초상화가 여동생인 일리아 블로든의 어릴 적 모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2행정부서는 나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악명과 달리 헤인리는 부하들에게 꽤 괜찮은 상사였다. 유능하고 칼같이 퇴근하는 데다가 자기가 맡은 일만 잘 해오면 참견하지 않았다. 돈도 잘 썼고, 필요할 때는 적절히 조언해주었기에 은근히 인기 있었다.

특히 근래에는 오랫동안 사이가 틀어졌던 여동생과 화해했는지 무척 온화해졌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다시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제2행정부서는 칼바람만 불었다.

“…….”

헤인리는 은테 안경을 몇 번이나 추어올리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쉬는 시간 없이 일에 매달렸으나, 서류탑은 점점 높아만 갔다.

공기는 점점 무겁고 날카로워졌다. 사무실에 소속된 이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저기…….”

하단에 사인하던 헤인리는 잠시 멈칫했다. 새로운 서류를 왕창 가져온 부하가 눈치를 보았다.

헤인리는 한숨을 삼킨 채 손을 내저었다. 두고 가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그는 상사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 이 유치한 일을 벌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헤인리는 맞은편에 따로 분리된 방을 쳐다보았다. 상사인 테르시안 후작의 집무실이었다.

며칠 전, 테르시안 후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헤인리를 불렀다.

-자네 여동생과 우리 아들이 싸웠다던데. 화해 시켜줘야 하지 않겠나.

헤인리는 차가운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리하트가 자기 아버지에게 입을 턴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기가 잘못한 점은 쏙 빼놓고 말이다.

-당사자들이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리 뻣뻣하게 굴지 말고.

헤인리가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후작은 몇 번이고 일리아와 리하트의 화해를 중재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헤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계속 꼿꼿하게 굴자, 후작은 괘씸했는지 방방 뛰었다.

-타블로이드지에 그딴 기사를 실은 것도 눈감아주었건만. 블로든은 우리 가문을 우습게 보는 건가?

권위와 위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테르시안 후작은 자존심이 무척 상한 듯했다. 그때부터 그는 태도를 달리했다. 대놓고 무시하며 과중한 업무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절대 한 명이 볼 업무량이 아니었다.

항의도 해봤지만 테르시안 후작은 일리아와 리하트가 화해하면 줄여주겠다고 못을 박았다. 과로사하는 한이 있어도 일리아와 리하트가 이어지는 꼴은 볼 수 없었기에 업무를 받아들였다.

‘집안에 알릴 수는 없지…….’

가족들이 알게 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황궁 내에서 테르시안 후작의 입김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라면 이참에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밀어붙일 터였다. 무엇보다 일리아가 자책할까 걱정이었다.

헤인리는 숨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냥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헤인리는 혼자서 차근차근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테르시안 후작이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것, 그리고 그가 저지르는 비리에 대해서. 인내하며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화려하게 터뜨려줄 것이었다.

“…….”

뚝, 하고 펜촉이 부러졌다. 그 소리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헤인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 펜촉을 꺼내서 끼웠다. 점점 쌓여가는 부러진 펜촉을 보며 헤인리는 생각했다. 리하트의 얼굴을 다트판 삼아 던져주고 싶다고.

“후우…….”

서류를 너무 많이 봤더니 눈이 뻑뻑했다. 헤인리는 잠시 안경을 벗어놓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일리아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헤인리는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미간을 풀고 초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의 일리아가 환히 웃고 있었다. 헤인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초상화를 매만졌다.

이때는 사이가 좋았는데……. 부모님이 한창 바쁠 때였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헤인리는 아카데미 입학도 조금 늦추고 일리아와 시간을 보냈었다. 옛 추억을 곱씹던 헤인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식사는 잘 하고 있겠지…….”

리하트 그놈 때문에 살이 많이 빠져서 잘 먹어야 하는데. 겨우 달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헤인리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일리아가 제게 준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태엽이 닳는 게 아까워서 몇 번 돌려본 적도 없는 오르골이었다.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차차 평온이 찾아왔다. 오르골을 가져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헤인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

일리아는 홍차와 빵, 과일 등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가벼운 슬립 원피스만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자, 고용인이 서신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아침마다 서신을 확인하는 것은 일과 중 하나였다. 매일 엄청나게 쏟아졌기에 하루라도 거르면 감당이 되질 않았다. 안부 인사를 묻는 편지부터 청탁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생일파티나 연회, 모임 초대장이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일리아와 연을 맺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블로든과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상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신분을 막론하고 서신을 보내왔지만, 대부분은 쓰레기통행이었다.

매정하다 할지 모르나, 일리아는 이제 사람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꼈다. 제 이름만 들으면 돌변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쓰게 웃었다.

‘이제 와서 순수하게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을까?’

과거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결말은 배신이었다. 리하트조차 돈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척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일리아는 타인과 깊게 엮이는 것을 꺼렸다.

정말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생긴다 해도, 끝내는 의심하게 될 터였다.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 진짜 우정인지, 아니면 우정을 돈으로 산 것인지.

차라리 주종관계는 단순해서 좋았다. 처음부터 돈과 충성으로 엮여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리아는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해서 대했다.

일리아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가족과 고용인들이었다. 그 외는 전부 바깥에 존재했다.

하지만 요즘은 규정짓기 곤란한 존재가 생겼다. 바로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그는 일리아가 만든 울타리에 애매하게 걸쳐 있었다. 주종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였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는 걸지도 몰랐고, 동정일 수도 있었다. 다만 거래가 끝나더라도 그를 멀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가족, 친구, 고용인, 연인……. 일단 지금은 가짜 연인이긴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의식하고 나니 연인이라는 단어가 괜히 묘하게 느껴졌다.

서신을 분류하던 일리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봉투 하단에 익숙한 이름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르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일리아는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확인했다.

[부모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작저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

에반테온 공작저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 왔다.

일리아는 차분한 느낌으로 치장을 마쳤다. 대신 옷부터 장신구, 신발까지 하나하나 공을 들였다. 누구도 일리아의 차림새를 보고 무시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현관으로 내려오자, 익숙한 푸른색 머리카락과 감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들이 보였다. 평소보다 말쑥한 차림을 한 프란체와 말렉이었다.

일리아가 올라탄 마차는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말렉이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가씨, 에반테온 공작저입니다.”

“벌써?”

일리아는 정신 차리고 창밖을 구경했다. 블로든 가문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훌륭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마차가 멈추었다. 말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서 깊은 에반테온 공작저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웅장한 저택은 세월의 힘을 받아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건물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일리아는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며 대답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카르한은 얼떨결에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그의 덩치에 맞춰서 만든 꽃다발이었기에 딱 들어맞았다. 카르한은 무척 생소한 눈으로 꽃다발을 살폈다. 낯선 듯하나, 싫지 않아 보였다.

“꽃은…… 처음 받아봅니다.”

“저도 남자에게 선물하는 건 처음이에요.”

처음이라는 말에 카르한이 조금 동요했다.

“저번에 저희 집에 왔을 때 꽃다발 줬잖아요. 답례예요.”

카르한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다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제가 안내할 테니 들어오십시오.”

일리아는 카르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홀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난 창문은 작고 좁은 편이라 햇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실내는 조금 어두웠고, 벽지나 장식품들도 차분한 색감을 이루고 있었다.

근엄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에반테온 저택은 화사하고 눈 돌아갈 듯 화려한 블로든 저택과는 정반대였다. 무척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일리아가 물었다.

“테시온은요?”

“……제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급한 용무가 생겨 외출 중이십니다. 오늘은 어머니만 뵙게 될 듯합니다.”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카르한이 사과했다. 혼자 공작부부를 동시에 상대하기엔 조금 벅찰 것 같았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복도를 걷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문고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곳에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긴장한 듯 목소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오히려 블로든 저택에 왔을 때보다 굳어 있어서 의아하게 느껴졌다. 잠시 닫힌 문을 보던 일리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막상 공작부인을 만나려고 하니 긴장되었다.

사실 자신은 환영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성사되기 직전의 약혼을 깨부수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착한 아들을 유혹했다며 뺨 맞는 건 아니겠지…….’

돈다발을 건네면서 헤어지라고 하면 어쩌지. 그럼 이미 충분히 많다고 거절해야 하나. 일리아는 머릿속으로 소설 한 권을 써내려갔다. 어찌 되었든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카르한이 문고리를 돌리자, 응접실 내부가 드러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응접실 중앙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우아한 여인이었다.

일리아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녀가 에반테온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카르한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빠르게 살피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서 와요.”

무척 기다렸다는 듯 공작부인이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요?”

사근사근하게 물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뜻밖의 환대에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뺨이 아니라면 찻물 세례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카르한이 옆에 있어서 잘해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줄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일리아는 내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편안히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레베타 에반테온이에요.”

레베타는 빠르게 일리아를 훑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만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일리아의 다이아 목걸이에서 잠깐 머물렀다. 이전에 경매에서 역대 최고 가격으로 낙찰된 목걸이였다. 일리아의 값어치를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에 미소가 가득 맺혔다.

“여기에 앉도록 해요.”

레베타가 자리를 권하자, 일리아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모두가 자리에 앉았음에도 카르한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일리아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너도 앉으렴.”

그녀의 말에 그제야 카르한이 자리에 앉았다.

‘긴장해서 그런 건가?’

그런 것치고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을 응시했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 다과가 놓여 있었다. 찻잔이나 식기에도 신경 쓴 티가 났다.

일리아는 테이블에 길쭉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결이 살아있는 나무 상자에 벨벳과 금실로 리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약소하지만 초대에 대한 답례입니다.”

레베타가 상자에 관심을 가지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에서 생산하는 와인인데, 올해로 딱 100년이 되었어요. 원래 황실에 납품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분께 드리고 싶어서요.”

일리아의 말에 레베타의 미소가 짙어졌다.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이었다. 레베타는 고용인을 시켜 선물을 잘 보관해두라 일러둔 후, 차를 권했다.

“두 사람이 교제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찻잔을 든 레베타가 일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다 만난 건가요?”

“연회에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우려먹은 대답을 내놓자, 레베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위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그녀로서는 이 관계가 사실인지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을 터였다. 일리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기껏 다 잡은 물고기인 스텔라를 놓아줘야 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적당히 속아 넘기기 어려울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카르한이 조심스럽게 일리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일리아는 곧바로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조금씩 파고들어와 얽혀들었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맥박이 요동쳤다. 어찌나 시끄럽게 뛰는지 가슴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뜻하네…….’

온 신경이 손으로 향했다. 카르한의 손은 일리아의 손바닥을 폭 감싸고도 남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팔짱을 낀 적은 있어도, 손을 맞잡은 적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계약 연애인데도 진짜로 연애하는 느낌이었다.

레베타의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레베타의 얼굴을 살피느라 카르한을 볼 수 없었다.

레베타의 눈에서 의심의 빛이 사라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카르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들어요.”

레베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델로타 가문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지요.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미루고 있었어요.”

일리아는 저번에 스텔라가 저를 찾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인은 내 편이에요.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제 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공작부인의 마음속에서는 스텔라가 지워진 듯했다. 스텔라의 성격은 공작부인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스텔라였을까?’

카르한과 스텔라 사이에 연애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에반테온 가문 정도면 더 좋은 가문과 약혼을 추진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스텔라를 골랐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나?’

어찌 되었든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렸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작부인은 제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영애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일리아는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파혼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쪽에서 좀처럼 놓아주질 않아서요.”

일리아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후, 완전히 끝난 관계라고 선을 그었다.

“약혼자가 리하트 테르시안이라고 했나요?”

아무래도 미리 조사한 듯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테이블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모쪼록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대화가 끊기자 침묵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소리 없이 차를 마시던 레베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어릴 적에 그렇게나 말썽을 피웠었죠.”

말썽을 피우는 카르한이라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표정이 다양하게 드러났는데, 지금만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베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나 사고를 치던지, 저 성격을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농담 같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제야 일리아는 계속 찝찝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레베타는 단 한 번도 카르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언제 약혼식을 치를 건가요?”

일리아는 상념에서 벗어나 퍼뜩 고개를 바로 했다.

“바로 결혼식을 치렀으면 하지만 그건 너무 급할 것 같고…….”

결혼식이라니. 일리아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무래도 약혼식 날짜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일리아는 당황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그런 것치고는…….’

일리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공작부인에게서 값어치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물건을 팔아치우려는 상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의 약혼인데…… 너무 성급하지 않나.’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자신과 카르한은 일 년짜리 시한부 계약 연애 중이었다. 서로의 약혼자, 약혼자가 될 사람과 무사히 파혼하기 위해 맺은 거래에 불과했다.

적당히 사귀는 척하다가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약혼식이라니. 대강 생각해둔 핑계를 댈까 고민하는 사이,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아직 파혼하지 못했으니, 바로 날짜를 잡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평소처럼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비바람에 젖은 나뭇잎처럼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베타의 시선이 처음으로 카르한을 향했다. 일리아도 덩달아 카르한 쪽을 바라보았다.

맑고 파란 눈동자는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일렁였다. 레베타와 시선을 마주한 카르한은 거대한 해일을 목도한 뱃사람처럼 보였다. 공포의 끝자락에 서 있었지만, 그는 레베타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일단 올해 안으로 생각 중입니다.”

일리아가 차분히 말했다.카르한에게서 시선을 거둔 레베타가 일리아를 응시했다.

“파혼 후에 각 가문끼리 모임을 가지는 쪽이 좋을 듯하지만……, 공작부인의 의사를 우선시하겠습니다.”

일리아는 슬쩍 레베타에게 결정권을 주는 척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도 그렇군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레베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에요. 워낙 영애가 마음에 들어서.”

마치 이윤 높은 투자 상품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내 그녀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어요. 편히 있다 돌아가도록 해요.”

일리아에게 사근사근하게 속삭인 레베타는 카르한을 보지도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것은 정적이었다. 레베타의 태도를 곱씹어 보던 일리아는 한쪽 손이 무척 따뜻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갑자기 잡아서 놀랐죠?”

미안하다며 일리아가 손에서 힘을 풀자 손가락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카르한은 가만히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얽혀 있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벌써 약혼 이야기를 꺼내실 줄은 몰랐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일리아는 미간을 좁혔다가 풀었다. 일단 최대한 약혼을 미룰 핑계를 생각해야 할 듯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카르한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공작저를 구경하시겠습니까?”

“좋아요.”

응접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복도를 걸었다.

“사실 블로든 저택에 비하면 별것 없습니다.”

“충분히 훌륭한 저택인걸요.”

에반테온 공작저는 규모나 화려함은 블로든 저택보다 못했지만, 고저택만이 줄 수 있는 중후한 분위기가 있었다. 복도를 걷다 보니 고용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카르한을 못 본 것처럼 지나쳤다.

인상이 사나워서 피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아까 공작부인의 태도도 그렇고, 카르한은 이곳에서 이방인 같았다. 그것도 환영 받지 못하는…… 마치 역병 같은.

일리아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한 발자국 앞서서 걷고 있던 카르한이 계단이 놓여 있는 복도를 지나쳤다. 뒤따라가던 일리아는 아래로 뻗은 계단의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거대한 초상화 속에는 세 사람이 담겨 있었다. 아까 만났던 공작부인과 중년의 사내가 장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일리아?”

카르한은 일리아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일리아가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 굳어졌다. 카르한만 존재하지 않는 가족 초상화였다.

“……제가 전장에 나가있을 때 그린 거라서.”

카르한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초상화 속의 젊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공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진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카르한과 별로 닮지 않은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분은 형님입니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야망 때문에 형제를 몰아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지.

카르한의 성격을 아는 지금은 그 소문을 믿을 수 없었다. 도리어 가문에서 후계자 자리를 억지로 떠넘겼다면 몰라도 말이다.

-서로를 무척 신뢰하는 것 같아서…… 단란해 보였습니다.

이전에 백작 저택에 방문했을 때 카르한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 가족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소외당하는 건 아닐까?

“앉아서 이야기 나눌 곳은 없을까요?”

“제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가장 조용하고 어둑한 복도 끝에 도착했다. 아무리 봐도 후계자의 방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카르한이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 환한 빛이 밀려나오며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공간이 드러났다.

문 하나만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세계가 바뀐 것 같았다. 근엄하지만 어딘가 음울하던 공작저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깔끔하면서도 어딘가 정감 가는 방이었다.

카르한은 곧바로 구석에 치워둔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르한을 응시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공작부인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카르한 당신, 어렸을 때 말썽꾸러기였어요?”

상상이 안 간다며 일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카르한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고를 쳤는데요?”

“그냥…… 식사 시간인 것도 잊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거나, 정원 구석에 땅을 파거나…….”

“……?”

그게 무슨 말썽꾸러기란 말인가. 일리아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아끼는 검을 가지고 놀며, 비싼 도자기를 깨고 다녔다. 침실 이불과 벽지에 낙서하거나 연못에 장난감을 왕창 띄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리아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말썽 피운다고 말하지 않았다.

“공작부인께서는 왜 말썽을 피웠다고 하셨을까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묻자,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구제 불능이라서 그렇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신이 구제 불능이라니!!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쓰레기라고요!”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당신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일리아는 카르한의 착한 심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해 받는 한이 있어도 꿋꿋하게 남을 도왔다. 지켜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제가 착하다고 하는 사람은 일리아 당신뿐입니다.”

“아니에요. 내 눈은 제법 정확하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일리아가 덧붙였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제외하고요.”

그때는 진짜 콩깍지가 꼈었다. 리하트는 저를 사랑하는 척 꾸준히 먹이를 던져주었고,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주워 먹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하여튼 당신은 제가 보기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내 안목을 폄하하는 거라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좋은 사람. 그 단어가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카르한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테시온조차 착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부정적인 단어들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일리아가 인정해주는 순간,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제가 어릴 적엔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 알아요?”

일리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을 읽는데, 스무 척의 배를 띄우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보자마자 따라하고 싶었죠.”

그래서 일리아는 장난감 배를 전부 가져가서 후원 연못에 띄워보았다.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침몰했고, 나머지는 연잎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중에 부모님이 그걸 보시고 말씀하셨다.

-다음부터는 진짜 배를 띄워주마.

그때를 떠올리며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참 동안 내버려뒀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국 전부 침몰해버렸어요.”

워낙 어릴 적이라 사고 쳤다는 인식도 없을 때였다. 일리아는 그것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리 할 거라고 난리쳤다가 주방을 밀가루 범벅으로 만든 일.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명화에 낙서를 한 일…….

“걸음마 시작하면서 재앙이 되었죠, 뭐.”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의 눈꼬리가 풀어졌다. 사르르 내려간 눈매가 일리아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일리아를 눈에 담았다.

“하여튼…… 아무래도 공작부인께서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정신을 차렸다.

“가족이지만 서로를 모르는 일도 많이 있거든요.”

카르한이 가족들에게 소외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일리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특히 카르한은 오랫동안 전장에 나가있어서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을 것이다. 거기다 장남을 제치고 후계자가 되었으니, 사이가 좀 더 껄끄러워졌을지도 몰랐다.

“혹시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언제든 말해요.”

가족사이니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려워도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일리아는 항상 카르한을 도와주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사람은 일리아가 처음이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일리아가 대답했다.

“한 배를 탄 사이니 당연하죠.”

일리아가 계약 연애를 언급하자,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손가락까지 타고 흘러왔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당연한 대답인데, 뭘 바란 것인지…….

카르한은 문득 자신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존재이자, 빈껍데기 후계자라는 것을 일리아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했다. 그때도 일리아는 제게 잘해줄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마주했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눈동자가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카르한은 일리아가 주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아버렸다. 모르고 있을 때와 알고 나서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천지 차이였다.

그는 그저 일리아의 옷자락만 겨우 쥐고 있는 상태였다. 일리아가 뿌리치면 바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신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일리아가 말한 것과 달리,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카르한, 왜 그래요?”

표정이 심각해 보인다며 일리아가 걱정하자, 카르한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가슴의 따끔거림을 무시하고 그가 표정을 풀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카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 구경 시켜드리겠습니다.”

지금 일리아와 카르한이 있는 공간은 복도와 연결된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을 중심으로 문이 세 개 더 있었다.

“저 방은 침실이고 반대쪽은 집무실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후계자 정도면 집무실은 완전히 따로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헤인리도 침실과 집무실 등이 모두 분리되어 있었다.

“남은 방은요?”

“창고입니다.”

침실과 창고를 함께 두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공작저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집에 살았으면 아예 한 층을 내어주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저번에 오르골 가게에서 직접 추천해준 물건이었다.

“이거 선물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그게…….”

카르한은 난감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실은 오래전부터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에 산 것이었는데…… 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카르한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전에 오르골 가게 앞에서 서성이던 그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일리아가 말했다.

“다음에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말만 하면 오르골로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일리아는 다시 방을 살폈다. 검소한 편인지 비싼 물건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책, 꽃다발, 디저트를 담았던 종이 상자……. 찬찬히 방을 둘러보던 일리아는 깨달았다. 이곳은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으로 가득했다. 별것도 아닌데 전부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리하트는 지겨워지면 바로 버렸는데.’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리하트와 카르한을 비교하고 있었다. 진짜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추 다 둘러보고 나니, 굳게 닫혀 있는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고 있던 옷은 다 버렸어요?”

“옷은 왠지 버리기 아까워서…….”

카르한이 변명을 빠르게 덧붙였다. 그래도 예전 옷은 안쪽에 정리해두었다고 말하며 옷장을 열어주었다. 화사한 옷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옆으로는 온통 짙은 색감을 띤 옷들이 걸려 있었다.

끄트머리로 갈수록 오래된 옷들이었다. 거의 십 년 전에 유행한 디자인도 보였다.

“이 디자인 되게 오랜만에 보네요.”

일리아는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옷 한 벌을 꺼내들었다. 예전에 유행했던 연회복이었다. 옷을 살피던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가지런히 채워져 있는 단추 중 하나가 떨어지고 없었다. 왠지 익숙한 모양새라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하는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일리아와 카르한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말렉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옷을 다시 걸어놓으며 말했다.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이 있었다. 일리아는 반가워서 테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요.”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일하다 뛰쳐나왔습니다.”

테시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고, 남은 세 사람이 뒤따랐다.

길어 보이던 복도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어느새 일리아는 현관에 도착해버렸다. 밤이라 그런지 조금 추워서 어깨를 떨자, 카르한이 외투를 벗어 주었다.

“괜찮아요. 이제 마차 탈 거니까요.”

“그래도 가시는 동안 추울 수 있으니…….”

성의를 거절하기도 조금 그래서 고민하는데, 카르한이 속삭였다.

“다음에 돌려주십시오.”

일리아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그가 물었다.

“……또 만날 핑계를 만드는 건, 안 될까요?”

순간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전부 지워졌다. 잠잠하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연애 책에서 배웠나.’

정말이지 습득이 너무 빨랐다.

“알겠어요. 다음에 갖다드릴게요.”

“흘러내릴 것 같으니, 단추 잠가드리겠습니다.”

이윽고 기다란 손가락이 단추를 매끄럽게 잠갔다. 일리아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덩치 차이가 꽤 나서, 외투에 파묻힌 것 같았다. 특히 소매가 무척 길어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떨어져 나간 카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직접 입어보니까 정말 체격이 크시네요.”

일리아는 설핏 웃었다. 마치 아빠 옷을 훔쳐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자, 옷에 묻어 있던 서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마치 그에게 폭 감싸인 것 같았다.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카르한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아는 멀찍이 서 있는 고용인들을 확인하고 그에게 손짓했다. 카르한이 얌전히 앞으로 다가서자 일리아가 손을 뻗었다.

“잘 자요. 카르한.”

두 팔로 카르한을 가볍게 안고 속삭였다. 버쩍 굳어진 카르한에게서 팔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카르한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고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카르한 님, 이만 들어가시는 것이…….”

테시온이 슬쩍 말을 걸었다가 멈추었다. 카르한의 표정이 이상했다. 오랫동안 함께해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카르한 님?”

심장 뛰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주위의 소리가 멀어져갔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비 내리던 날, 일리아와 함께 우산을 썼을 때 그랬다.

카르한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마차를 눈으로 좇다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아픈데…….”

헉, 하고 테시온이 숨을 들이켰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닙니까! 얼굴도 조금 붉으시고…….”

테시온이 무척 심각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그런가……?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테시온의 손에 붙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

에반테온 공작저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계속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던 일리아는 오랜만에 외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리아는 간단하게 치장하고 프란체, 말렉과 함께 저택을 나왔다.

먼저 은행에 들러 볼일을 본 후에 오르골 가게를 방문했다. 이전처럼 줄을 설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게 안은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일리아가 들어오자, 새로 뽑은 점원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요즘은 할 만해요?”

“지난달보다는 확실히 덜 바쁜 것 같아요.”

점원은 이번 달에는 특별한 기념일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라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사장님. 저는 다시 재고 정리하러 가볼게요.”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조만간 휴가와 함께 포상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손님들과 섞여서 물건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오르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카르한이 떠올랐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그러고 보니 카르한의 취향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고, 달달한 음료를 선호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래도 다음에 함께 와서 고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일리아는 가게를 나와 상점가를 돌았다. 쇼핑 목적은 아니었고, 요즘 어떤 것이 유행하는지 알아볼 목적이었다.

가업을 잇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로, 일리아는 조금씩 공부하고 있었다. 경영 수업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으나, 이렇게 직접 보고 듣는 것 또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저기는 매일 줄 서 있네.’

음식점 앞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줄 지어 있었다. 몇 번이나 가게를 확장했으나, 아직도 한참 동안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요리법을 전수해준 후에 분점을 내면 좋을 텐데.’

의상실이나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는 종종 분점을 내나, 음식점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자본의 문제도 그렇지만, 레시피 유출을 꺼리는 탓이었다.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던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가게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커프스단추가 눈에 띄었다.

새파란 사파이어는 카르한의 눈동자 색과 흡사했다. 잠시 커프스단추를 착용한 카르한을 상상해보았다. 무척 세련된 느낌이었다.

‘눈에 띄었으면 사야지.’

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의 인사를 들으며 일리아는 커프스단추를 가리켰다.

“저 커프스단추 포장해주겠어요?”

물건을 포장하는 동안 일리아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무슨 가게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장인이 만든 물건을 위탁해서 판매하는 고급 잡화점인 듯했다. 가격대가 제법 있지만, 품질이 좋아 보였다.

일리아는 요즘 바빠 보이는 헤인리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어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실용성 있는 것으로 고르던 중, 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날렵하게 빠진 데다가 세련되어 보였다.

“알아주는 장인이 제작한 것인데, 오늘 중으로 각인도 가능합니다.”

일리아가 펜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주인이 슬쩍 말했다. 거기까지 들으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도 주세요.”

“감사합니다. 각인은 시간이 조금 걸리니, 나중에 찾으러 오십시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일리아는 가게를 나섰다. 각인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둘 다 필요한 거 없어?”

일리아가 프란체와 말렉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웬만한 물건은 백작저 내에서 구할 수 있었다. 프란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연습용 목검이 필요합니다.”

“목검?”

“네, 저번에 제작해둔 것들은 조금 불편해져서요.”

키가 자라면서 손도 커졌다며 프란체가 말했다. 성년식도 치렀는데 아직도 성장기인지, 확실히 작년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무장에 자주 가는 것 같던데.”

“곧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으니 열심히 해야죠.”

프란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자, 일리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엊그제 치른 것 같았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일 년에 한 번, 블로든 백작저에서는 선발전이 열렸다. 일리아의 호위기사를 뽑는 대회로, 단 한 명만 차지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우승자는 일 년 동안 일리아의 전속 호위기사가 될 수 있었기에, 블로든 가문 기사들은 전부 선발전에 참가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이맘때가 되면 다들 투지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프란체는 항상 우승을 거둬, 일리아의 호위기사 자리를 지켜왔다.

“그럼 목검도 제작하러 가야겠네.”

명쾌한 결론이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무기 제작소로 향했다. 연습용 목검을 여러 자루 맡긴 일리아는 프란체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힐끗 보고 물었다.

“그 검도 바꿔야 하지 않아?”

“아직 더 쓸 수 있습니다!”

프란체는 빼앗길세라 검을 움켜쥐었다. 그가 항상 품에서 놓지 않는 검은 일리아가 처음으로 선물해준 것이었다. 너무 많이 갈아서 칼날은 얄팍해졌고, 손잡이는 칠이 벗겨졌다. 뛰어난 명검이었지만 그의 연습량을 이길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봉급도 안 주는 줄 알겠다.”

일리아가 농담 삼아 핀잔을 놓았다. 그러자 프란체의 남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민하던 프란체가 슬그머니 말렉에게 물었다.

“형님, 제 검이 그렇게 낡아 보이나요?”

“많이.”

말렉은 아주 솔직했다. 결국 고민 끝에 프란체는 새로운 검을 맞추기로 결정 내렸다.

“지금 검은 퇴임식을 치러줄 겁니다.”

프란체가 가지고 있던 검을 끌어안았다. 유난 떤다고 할지 모르지만, 프란체가 그 검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말렉은 필요 없어?”

“저는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형님께서는 선발전에 참여하실 필요 없잖아요.”

프란체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 말처럼 말렉은 선발전에 나가지 않아도 일리아의 호위기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리아가 꼬꼬마였을 시절부터 모셔왔던 공로를 인정받은 탓이었다.

“저는 정정당당하게 따낼 겁니다.”

프란체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일리아와 말렉은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주었다.

볼일을 전부 끝낸 후, 세 사람은 강을 끼고 있는 대로를 산책로 삼아 걸었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것도 몰랐다.

번듯한 도로와 주택들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허름한 건물들이 보였다. 빈민가 초입이었다.

“아가씨.”

말렉이 조용히 일리아를 불렀다. 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가벼운 경고였다. 빈민가는 치안이 좋지 않아서,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다.

입구에 멈춰 선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말없이 빈민가 안쪽을 응시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음지, 온갖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거리,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이곳은 오래전, 프란체가 태어나고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끔해졌지만, 처음 만났던 프란체는 꼬질꼬질한 꼬마였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저곳에 살고 있었겠지요?”

프란체는 괜히 허리춤에 찬 칼집을 매만지며 혼잣말했다. 과거를 떠올렸는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어두워졌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밝아졌다.

“아가씨, 이만 가시지요.”

회상을 끝낸 프란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이 발걸음을 돌리는데, 빈민가 안쪽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남매로 보이는 꼬마들은 무척 신이 나 보였다.

“빵 많이 살 거야!”

아이의 외침에 일리아는 그쪽을 보았다. 그때, 신나게 뛰어가던 여자아이가 발이 꼬여서 엎어졌다. 일리아는 여자아이의 손바닥에서 동전 한 닢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동전은 순식간에 하수도로 들어가 버렸다.

“누나! 괜찮아?”

깜짝 놀란 남자아이가 황급히 다가왔다. 여자아이는 무릎이 까진 것도 보지 못하고 텅 빈 손바닥부터 확인했다.

“내 동전!”

하수도로 들어간 것을 보지 못했는지, 두 아이는 바닥에 엎드려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자,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프란체가 주먹을 쥐었다. 그는 빈민가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잃어버린 동전은 식량을 살 귀중한 돈이었을 것이다. 그때 일리아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이 찾는 게 이거니?”

일리아의 손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들려 있었다. 금화를 처음 본 아이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방금 그 동전 내가 주웠거든. 동전이 필요해서 그런데, 이거랑 바꾸면 안 될까?”

“우리 빵 사려고 했는데…….”

남자아이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금화로 더 많은 빵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빵이랑 동전이랑 바꾸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적이 일치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빵집으로 향했다. 빈민가와 가까운 빵집이라 그런지 번화가처럼 번듯하진 않았다. 그래도 호밀 빵부터 시럽을 바른 조각 케이크까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쭈뼛거리던 아이들이 진열대에 놓인 빵을 살폈다. 남매는 흰 밀 빵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른 것은 가장 값싼 귀리 빵이었다. 밀 빵 하나 살 돈으로 귀리 빵은 네 개나 살 수 있었다.

“자, 먹고 싶은 거 전부 담으렴.”

지켜보던 일리아가 쟁반을 내밀었다. 그리고 시범으로 흰 밀 빵을 팍팍 담았다. 깜짝 놀란 여자아이가 중얼거렸다.

“흰 빵은 비싼데…….”

“괜찮아.”

일리아는 가게에서 가장 비싼 조각 케이크를 집으며 말했다.

“언니 돈 많단다.”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크게 벌렸다. 일리아는 방금 했던 말을 증명하듯 빵으로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홀린 듯이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식빵 사야 해요!”

“식빵?”

“우리 언니 거예요.”

일리아가 왜 굳이 식빵이냐는 표정을 짓자, 우물쭈물하던 남자아이가 대답해주었다.

“큰누나는…… 그림을 그려요.”

“그래?”

일리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식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석탄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빈민가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적잖게 고생할 듯싶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오지랖이었다.

쟁반 세 개를 가득 채운 후 계산을 마쳤다. 가게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 아이들을 앉히고 빵과 케이크를 쥐여 주었다. 체하지 말라고 음료도 주문했다.

남매는 많이 배고팠는지 숨도 쉬지 않고 빵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맛있다고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결대로 찢어서 먹으면 더 맛있어.”

프란체가 빵 먹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말렉은 일리아의 부탁대로 조용히 가게를 나가, 약을 사들고 왔다.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일리아는 여자아이의 까진 무릎에 약을 발라주었다. 쓰라린지 움찔거렸지만,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얌전했다.

한참 후 쟁반이 텅텅 비고, 남매의 배는 빵빵해졌다. 일리아는 남은 빵을 아이들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앞으로 배가 고프면 이 가게를 찾아와.”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넨 아이들이 종종 뛰어갔다. 빵을 얻게 된 남매는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돈을 주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남매의 보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돈으로 무슨 화를 부를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일리아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뭣도 몰랐던 옛날에는 우리 집으로 가자며 하나씩 데리고 갔다. 프란체도 그렇게 저택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끝도 없다는 것을.

일리아는 모든 빈민가 사람들을 거두어줄 수 없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하면 항상 나쁘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는 도와주지 않느냐며 일리아를 원망하거나, 아이들을 내세워 더 큰 돈을 바랐다.

아무리 기부하고 도와도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블로든 가문이 직접 나서서 빈민가를 근절시킨다 해도 또 다른 곳에서 가난이 태어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가난과 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방금 그 아이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갑자기 복권이 당첨된 사람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빵집 주인에게 넉넉히 돈을 맡겨둔 후, 가게를 나섰다.

“이제 슬슬 펜을 찾으러 가볼까?”

지금 가면 시간이 얼추 맞을 듯했다.

빈민가를 빠져나온 일리아는 가게를 방문해, 펜을 찾았다. 각인까지 하니 세상에 하나뿐인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일리아는 곧장 마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외출이 길어져서, 벌써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태우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리하트를 떠올렸다. 원하지 않아도 자주 리하트 생각이 났는데, 요즘은 훨씬 덜했다. 자신의 일상에서 리하트가 많이 씻겨 나간 모양이었다.

‘너무 조용하지 않나?’

아직까지 파혼 동의를 해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꿍꿍이가 있을 듯했다. 그동안 일리아는 리하트가 파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점을 찾고 있었다. 몇 개 떠오르긴 했지만 전부 약했다. 그를 궁지에 몰아붙일 한 방이 필요했다.

무사히 파혼을 하게 되면…… 다시는 제 인생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상념에 잠긴 일리아는 공작부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약혼식 날짜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리아는 리하트와 무사히 파혼하기 위해 에반테온을 끌어들였다. 그가 보복할 때를 대비해 방패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계약 연애를 제안할 때만 해도 카르한이 자기주장이 없어서 스텔라와 약혼을 앞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감을 심어주고 의견을 내세울 줄 알게 된다면,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관계를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카르한은 후계자임에도 공작가에서 힘이 너무 없었다. 이번에 공작부인이 꺼낸 약혼 이야기도 제안이 아니라 강제처럼 느껴졌다. 성격만 고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 년 후에 무사히 헤어질 수 있을까.’

리하트를 피하려다가 정말로 카르한과 약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카르한 자체는 훌륭한 남편감이었다. 호구 같은 성격이 조금 걸렸지만, 착한 성품에 미래에 공작이 될 사람이었다.

그가 싫은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호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일리아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괜찮은 척, 전부 잊은 척 하고 있지만 리하트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짙었다. 다시 들여다보는 것조차 무서워서 외면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만약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리하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주저할 것이다. 끝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결국엔 두려워서 스스로 끊어낼지도 몰랐다.

‘그 전에 카르한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잖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보내줘야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가 오는 것처럼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두고 시작하지 않았던가.

“아쉬워서 그런가.”

일 년짜리 시한부 연애가 끝나면 더 이상 카르한을 만나지 못할 터였다. 공식적으로 헤어진 사이가 될 텐데 괜히 추문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아무래도 카르한과 정이 든 모양이라고, 일리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던 마차가 저택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익숙한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헤인리의 마차였다. 고개를 돌리니, 막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헤인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

일리아는 반가운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헤인리는 멈칫하더니 몸을 틀었다. 일리아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제 바쁜 것은 괜찮으세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헤인리가 마차를 힐끗 보며 물었다.

“소공자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 보지?”

“아뇨, 볼일만 보고 들어왔어요.”

미묘한 얼굴이었다. 헛기침을 내뱉은 헤인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산책이라도 하는 것은 어떠냐.”

헤인리가 먼저 제안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안 그래도 언제 선물을 줄지 고민했는데, 산책하면서 기회를 엿보면 될 것 같았다.

“좋아요.”

일리아와 헤인리는 정원으로 들어섰다. 석양의 머리가 헤엄치듯 가라앉고, 푸르스름한 빛이 꼬리처럼 차올랐다. 어둠을 머금은 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정원에 가득 찬 고요함을 간간이 부숴놓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헤인리였다.

“……요즘 식사는?”

“꼬박꼬박 하고 있어요.”

헤인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아는 마음고생 때문에 살이 많이 빠져버렸다. 계속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빠진 살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라버니께서도 식사 잘 챙기고 계시죠?”

“그래.”

짤막한 대답이 돌아오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둘만 남으면 어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였다. 몇 년간 멀어진 거리가 단번에 좁혀질 리 없었다. 헤인리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일리아 또한 살갑게 행동하지 못했다.

“에반테온 소공자는 요즘 잘 만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종종 만나고 있어요.”

헤인리는 카르한에게 은근히 관심이 많았다. 카르한을 저택에 초대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도 헤인리였다.

이해는 됐다. 일리아가 처음으로 연애했던 리하트는 쓰레기였으니까. 카르한 또한 소문이 좋지 않으니 그로서는 탐탁지 않을 터였다.

“아직은 뭐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헤인리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할 때 그는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소문만큼 나쁜 사람 같진 않았지.”

그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귀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헤인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소공자에게 무례하게 군 점은 반성하고 있어.”

잘못을 인정하는 헤인리는 무척 신선했다. 헤인리는 사과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헤인리는 완벽주의였고, 꼿꼿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공자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지켜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윽고 헤인리는 복잡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양보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하트와 연애할 때는 무조건 헤어지라고 강요했었다. 그 때문에 비련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더 타올랐는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일리아의 대답에 헤인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눈매를 조금 접어 보였다.

“리하트 때도 그렇고,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부정하거나 침묵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항상 그렇지.”

무뚝뚝하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어릴 적에 저를 돌봐주던 헤인리가 떠올랐다.

일리아와 헤인리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다. 말렉만큼은 아니었지만, 업어 키우기엔 충분했다.

유년기의 기억은 온통 헤인리로 가득했다.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헤인리는 일리아의 부모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헤인리는 자상한 오라버니였고, 일리아는 그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늘 함께였지만 헤인리는 결국 아카데미로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일리아는 그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꼈다. 부모님은 여전히 바쁘셨고, 고용인들은 헤인리를 대신해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자신은 외로웠던 것 같다.

“저도 그래요.”

일리아는 오랫동안 묻어온 진심을 꺼냈다.

“항상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고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계속 늦게 들어와서 걱정하고 있다며,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왠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흐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선물이에요.”

일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뭐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종이 가방을 받아든 헤인리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어보니, 은색 막대에 남색 깃털을 단 펜이 놓여 있었다.

“지나가다가 오라버니 생각이 나서 샀어요. 물론 이것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쓰시고 계시겠지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하다 보니 설명이 점점 길어졌다. 헤인리는 상자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비싸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지.”

제 말투가 퉁명스럽다고 느꼈는지, 헤인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상자 뚜껑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안 그래도 새로 사야 했는데…… 잘 쓰마.”

일리아는 그가 깃펜을 조심스레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본까지 완벽하게 묶은 헤인리는 좀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함께 먹자꾸나.”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게만 느껴졌던 오라버니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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