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5장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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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에반테온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마차에서 막 내리는 카르한과 테시온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어서 와요.”

    일리아의 인사에 테시온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끝이 없었습니다.”

    “뭐가 끝이 없어요?”

    “바다를 풀로 메우면 블로든 저택 정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일리아는 어느 정도 동감했다. 가끔씩 저택 대문까지 가는 데 한참 걸려서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저택이 정원 중앙에 있어서 다행이죠. 끄트머리에 지었으면 두 배로 걸렸을 테니까요.”

    일리아의 대답에 테시온은 질렸다는 듯 진저리쳤다. 그리고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이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일리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꽃다발을 받았다.

    “고마워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는데…….”

    일리아는 가족들을 뜯어말렸으나,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카르한이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길 바랐다.

    이전에 리하트를 소개해줬을 때가 떠올랐다. 거의 취조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언변이 뛰어난 리하트마저도 잔뜩 질린 얼굴로 돌아갔었다. 그 후로 리하트는 블로든 저택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떼자, 테시온이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은…….”

    벌써 정이 들었는지, 테시온은 자연스럽게 프란체와 말렉을 찾고 있었다.

    “아마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부를까요?”

    “아닙니다. 제가 연습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테시온은 괜찮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일리아와 카르한 테시온은 저택 현관문을 통과했다. 어마어마한 현관 크기에 카르한의 어깨가 살짝 굳어졌다.

    “아참,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그동안 집 구경이라도 할래요?”

    일리아의 제안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테시온은 벽에 쭉 걸린 명화를 보고 감탄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로서는 웬만한 미술관보다 블로든 저택이 더 대단하게 보였다.

    “아, 이 그림 유명하지요.”

    테시온이 어느 그림을 보고 잠깐 멈춰 섰다.

    “저희 집에도 있습니다.”

    웃는 여인의 초상화였다. 몇백 년 전 천재 화가라고 불리는 지그리스가 그린 그림으로, 워낙 유명한 탓에 모조품이 판을 쳤다. 그중에서 이 그림은 유독 정교한 모조품으로 보였다.

    “그래요? 지그리스가 똑같은 그림을 두 장이나 그린 줄은 몰랐네요.”

    “……진품이란 말입니까?!”

    충격 받은 테시온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께서 미술 쪽에 관심이 많으셔서요.”

    “세상에…….”

    저 그림 한 장에 수백만 크로엘은 족히 할 거라며, 테시온이 떠들어댔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뒤늦게 정신 차린 테시온이 제 입을 때렸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정원을 보고 기가 죽었는데, 더 죽일 수 없었다.

    “에반테온 공작가에도 훌륭한 미술품이 많지요.”

    카르한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서 테시온은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앞에서 재력을 자랑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테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집 구경을 하던 카르한과 테시온은 블로든 저택의 화려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석을 깎아 만든 석상, 온실 정원, 황금으로 도배된 방, 국립도서관처럼 큰 서재. 분명 저택 안인데, 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구경시켜주던 일리아는 그제야 카르한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부른 이유를 꺼냈다.

    “가족들을 소개해주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금 이 상태로 카르한과 가족들이 만나면…… 조금 곤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뗐다.

    “저희 가족은 조금…… 성격이 특이해요.”

    벌써부터 긴장하는 카르한의 모습에 일리아는 미안해졌다.

    “어머니는 철혈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하고……, 아버지는 그나마 상대하기 편할 거예요. 예술 이야기 하면 좋아하세요.”

    일리아는 간단하게 가족들에 대해 설명했다.

    “오라버니는 저랑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 특히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말투가 조금 뾰족한 편이라서…….”

    “……명심하겠습니다.”

    “질문이 들어오면 될 수 있는 한 제가 대답할게요.”

    카르한은 약간이나마 안도했다.

    “아가씨!”

    저 멀리서 고용인이 달려왔다.

    “모두 기다리고 계셔요.”

    부모님과 헤인리가 돌아온 것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면 더 긴장하겠지.’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고용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일리아는 멈칫했다.

    “정말 여기에 계신다고……?”

    일리아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일리아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가벼운 경고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방 내부가 드러났다.

    “…….”

    카르한과 테시온은 왜 일리아가 멈칫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방에 검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열을 맞춰서 걸려 있는 것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장검 아래에 두 손을 깍지 채 앉아 있던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순간 카르한은 자신이 적장의 막사에 들어온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일리아는 잔뜩 굳어진 카르한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비올레가 수집한 칼을 전시해둔 방이었다. 비올레의 친정은 무로 유명한 가문이었는데, 그녀 또한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했다. 재능과 뜻이 있어서 한길만 열심히 팠건만, 안타깝게도 여검사는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있었다.

    그녀는 지독히 현실주의자였다. 미래가 뻔히 보이는 일을 계속 붙들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비올레는 마을 축제에서 첫눈에 반한 블로든 백작과 결혼해 사업을 이어받았다.

    다행히 비올레는 사업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곰처럼 귀여운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을 키우며 검술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다만 이 방은 이루지 못한 꿈을 재현한 곳이었다. 가끔씩 비올레는 이곳에서 검을 골라, 떨어지는 낙엽을 조각내곤 했다.

    “반갑군요. 클리프 블로든입니다. 제가 일리아의 아버집니다.”

    일리아와 전혀 닮지 않은 백작이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했다. 닮은 것이라곤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가 전부였다. 그는 카르한만큼 덩치가 컸으나, 근육보다는 살집에 가까웠다. 마치 솜을 많이 쑤셔 넣은 곰인형 같았다.

    “처음 뵙겠어요, 소공자. 저는 비올레 블로든이에요.”

    일리아와 판박이인 비올레가 인사를 건넸다. 짙은 금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그녀가 연녹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부드러운 인상을 보면 일리아가 누구를 닮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올레를 똑 닮은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짤막하게 인사했다.

    “헤인리 블로든입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났을 때 카르한은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일리아는 얼어붙은 카르한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뒤늦게 정신 차린 카르한이 꾹 다물린 입매를 열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떨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리아의 가족들은 그가 긴장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도리어 눈빛을 교환하며 첫인상에 대해 토론했다.

    소문만큼 흉흉한 인상인데요?

    내가 지금까지 칼을 맞댄 이들 중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네요.

    제가 뭐랬습니까, 위험한 남자입니다.

    눈으로 의견을 나눈 그들은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일리아는 빈자리를 확인했다. 두 개의 의자는 각각 떨어져 있었다. 분명 연인을 소개해주는 자리였는데, 두 사람을 떼어놓는 배치였다.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리아는 모른 척하며 고용인에게 말했다.

    “의자를 붙여주겠어?”

    고용인이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의자를 옮겼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나란히 자리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카르한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당황한 카르한은 처음이라는 것을.

    그나마 당황하면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을 고쳐서 다행이었다.

    “……선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카르한이 입을 뗐다.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앞으로 나서서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고급 술과 호불호가 없는 건강식품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으나, 그들의 심보는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건강을 잃고 다시 챙기라는 의미군요.”

    독설가로 유명한 헤인리의 말에 카르한의 눈썹이 흔들렸다.

    “흠흠, 어제부터 술을 끊어서.”

    클리프가 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입을 열자, 일리아가 재빨리 말을 낚아챘다.

    “제가 다 먹을 거예요.”

    어머니까지 말하면 카르한은 만신창이가 될 터였다.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굴 줄은 몰랐다.

    “전부 제가 좋아하는 걸로 사온 거라서요.”

    일리아의 발언에 세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새로 주문해주마.”

    일리아는 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세 사람은 마지못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잠깐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고용인이 차를 내어왔다. 다들 찻잔을 앞에 두게 되었을 때, 비올레가 물었다.

    “연회장에서 첫눈에 반했다고 들었어요.”

    “예.”

    “우리 아이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궁금하군요.”

    벌써부터 어려운 질문이 들어왔다. 일리아는 조금 초조해진 눈으로 카르한을 힐끔거렸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모두가 카르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리아의 가족들은 어떤 대답이든 꼬투리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가 눈을 깜빡이는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미소가…… 예뻤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일리아를 제외한 이들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 늘어질 구석 없이 깔끔한 대답이었다. 다행히 1차 시험은 합격이었다.

    일리아는 속으로 땀을 흘렸다. 가짜 연인을 소개하는 자리가 이렇게까지 긴장될 줄이야. 기습적인 어머니의 함정에 카르한이 정답을 말해서 다행이었다. 연애 서적을 잔뜩 사다 안겨준 보람이 있었다.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백작부부는 아주 조금 누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방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는 서로 눈짓했다. 저번에 일리아가 말하기를, 카르한의 다정한 점이 좋았다고 했다. 심지어 착하고 예의 바르단다.

    리하트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도 일리아는 ‘상냥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초대형 콩깍지가 씌었구나 싶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일리아의 콩깍지를 벗겨주고 싶었다.

    리하트 때처럼 일부러 까칠한 질문을 던져서 카르한의 본성이 드러나게 하고 일리아와 헤어지게 만들 계획이었다. 시선 교환을 끝내고,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장에 오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카르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의 시간이었다. 만나자마자 무슨 그런 주제를 꺼내느냐고 일리아가 눈총을 주었다.

    “별 뜻은 없습니다. 불편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적인 감정이 아주 꽉꽉 들어가 있음에도 헤인리는 뻔뻔히 거짓말했다.

    이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단순했다. 수많은 무인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어대길 좋아했다. 아무리 겸손한 척하는 사람들도 판이 깔리면 허세를 부렸다. 일리아가 그걸 직접 듣고 환상이 깨졌으면 하고 바랐다.

    “전쟁은……, 자원한 것이었습니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래전, 카르한의 가족들은 그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길 원했다. 특히 장남이자 카르한의 친형인 블레어드는 어릴 적부터 그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숨 막히는 집안은 카르한에게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는 반쯤은 떠밀려서 전장에 자원입대 했다. 그때 카르한은 성년식도 치르지도 못한 소년이었다.

    “제가 있었던 곳은 제국 변방의 분쟁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도로 돌아온 후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살아 있음에 안도했던 날들. 어제 제게 말을 걸어주었던 이를 다음 날 제 손으로 땅에 묻은 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곳에서, 서툴게나마 표현하던 감정은 더욱 사라졌다.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전쟁터니까요.”

    헤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풍을 떨어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조사해본 결과 카르한은 전쟁터에서 오래 있었고, 제법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말을 아끼는 건가? 표정이 워낙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헤인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사실 저희는 소공자의 소문이 신경 쓰입니다.”

    헤인리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간에서 카르한의 평판은 무척 나빴다. 특히 전장의 살인귀라는 소문이 가장 유명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살인귀라니! 두 사람의 교제를 인정하기 전,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카르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대답했다.

    “외람되나,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테시온에게 향했다. 바짝 긴장한 테시온은 이 상황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카르한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막지 않았다.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일리아의 가족들이 소문을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떠도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전장에서 공을 여러 번 세우신 일이 와전되었을 뿐입니다. 소공자께서는 제 목숨도 구해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백 명을 구했다고 테시온이 주장했다. 그 말에 헤인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었지만, 얼굴만 봐서는 거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 공로가 있으니, 장군이나 기사단장까지 오르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장교로 전역했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모두가 당황했다. 수백 명을 살렸다면서……?

    심지어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장교는 하급 귀족도 손쉽게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이었다. 그의 유명세에 비해 무척 보잘것없는 보상이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나 의심스럽긴 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호구가 아닌 이상, 알아서 다른 보상을 챙겼을 터였다.

    헤인리의 질문이 끝나고, 비올레 차례가 왔다.

    “소공자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딸은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지요.”

    부모로서 이런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며, 비올레가 양해를 구한 후에 질문했다.

    “소공자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교제한 지 얼마 되었다고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일리아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 적령기인 만큼 혼사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생각은 있습니다.”

    카르한의 느릿한 대답에 가족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비올레가 다시 질문하려고 했다.

    그때 일리아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볍게 째려보는 시선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말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더 물었다간 일리아가 화를 낼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확인한 클리프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만찬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이만 자리를 옮길까요?”

    모두가 방을 빠져나와, 만찬장으로 향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서서 먼저 걸어갔다.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첫인상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리하트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말투도 정중하고.”

    “우리가 쓰레기만 봐서 기준이 너무 낮아졌는지도 모르죠.”

    “아버지, 방심하기는 이릅니다.”

    카르한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헤인리가 가볍게 핀잔주었다. 그래도 입을 때려주고 싶은 뺀질이보다 진중하고 과묵한 놈이 낫다는 평을 내렸다.

    “저희 가족…… 좀 극성이죠? 괜찮았어요?”

    가족들보다 먼저 앞서가던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조용히 물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카르한은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웠습니다.”

    일리아는 정말 미안해졌다. 이제 겨우 환불할 줄 아는 남자인데……. 가족들의 행동에 익숙해진 일리아조차 감당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식사할 때는 아까처럼 질문 공격이 들어오지 않겠지.’

    만찬장에 도착하자, 카르한이 멈칫했다. 어마어마한 만찬장이었다. 크기 자체는 에반테온 공작저와 비슷했지만, 만찬장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집기, 장식들은 블로든 저택이 월등했다. 눈 둘 곳 없이 화려한 만찬장에서 카르한은 좀 더 기가 죽었다.

    만찬장에 도착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뒤에 대기해 있던 고용인들이 차례대로 음식을 내어왔다.

    수십 가지의 그릇들이 테이블 위를 채워나갔다. 차린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포크만 들고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클리프가 물었다.

    “혹시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사기 전에 아무거나 빨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일리아는 힐끔거리며 카르한 쪽을 보았다. 그의 앞에는 고기가 담긴 그릇만 가득했다. 생김새만 보고 육류를 좋아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접시를 나르는 고용인을 불러 부탁했다.

    “소공자 앞에는 야채가 들어간 음식 위주로 다시 배치해줄래?”

    “예? 하지만…….”

    고용인이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풀만 줬다가 화내면 어쩌나 눈치 보자,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도 괜찮습니다.”

    “이왕이면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좋잖아요.”

    결국 고용인이 다시 음식을 내어왔다. 메뉴를 확인한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듯 눈썹 앞머리가 조금 풀어졌다.

    카르한이 식기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깔끔하고 교과서적인 식사법이었다. 헤인리처럼 우아한 예법은 아니었으나, 군더더기 없었다.

    푸릇푸릇한 야채를 한 입 먹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생긴 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육식동물인데, 초식을 하고 있으니 기묘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카르한을 힐끔대던 고용인이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놓치고 말았다.

    “앗!!”

    비명과 동시에 카르한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프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원래라면 일리아의 어깨에 쏟아졌어야 할 수프는 카르한의 팔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카르한, 괜찮아요?”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젖어버린 옷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왔다. 그러나 카르한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용인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하는 고용인을 달랠 틈도 없이, 일리아는 카르한의 다른 팔을 붙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차가운 물로 적셔야겠어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바로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일리아의 가족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만약 카르한이 대신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있던 일리아는 큰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일리아를 대신해 수프를 뒤집어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용한 만찬장에 앉아 있던 그들은 생각에 잠겼다.

    “……영락없이 악당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클리프가 먼저 중얼거렸다.

    “돌아오면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어요.”

    클리프의 말에 비올레와 헤인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세간에 도는 소문과 조금 다른 느낌이네요.”

    “……물론 바로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요.”

    헤인리의 말에 다들 침묵했다. 그들에게는 둘째와 연애하는 놈들은 전부 나쁘다는 기본 전제가 있었다. 그래도 카르한 에반테온은 적어도 일리아한테는 잘하는 것 같았다.

    “흠, 소문보다는 훨씬 괜찮은 사람 같긴 한데…….”

    고민하던 그들은 한참 만에 결정 내렸다. 일단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말이다.

    ***

    일리아는 만찬장과 가장 가까운 주방으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던 요리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차가운 물 좀 준비해줘.”

    일리아의 말에 요리사가 물동이를 가져왔다.

    “윗옷 벗고, 팔 담가요.”

    카르한이 차가운 물로 팔을 식히는 사이, 일리아는 눈이 마주친 고용인에게 부탁했다.

    “의원 좀 불러줄래?”

    “네, 아가씨.”

    적당히 열기를 식힌 후, 일리아와 카르한은 주방을 빠져나와 자리를 옮겼다. 비어있던 방에 들어간 일리아는 카르한을 의자에 앉혔다. 젖은 소매를 바라보던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고용인의 실수를 책임지는 것은 그녀 몫이었다. 심지어 저를 보호하기 위해 다친 것이니 마음이 무거웠다.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카르한이 작게 속삭이며 일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더 아파 보입니다.”

    일리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술만 달싹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왕진 가방을 든 의원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언제부터 아프신 것인지, 증상은……!”

    의원이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다친 건 이쪽인데.”

    “헉.”

    의원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멈추었다.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의원보다 세 배쯤 큰 카르한이 있었다.

    “아무래도 화상을 입은 것 같아.”

    “그……, 일단 옷을 전부 벗어주십시오.”

    의원은 차마 카르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일리아가 뒤돌아서자, 팔만 걷어붙였던 카르한이 주섬주섬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껴입고 있던 옷이 하나씩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얇은 셔츠 한 장까지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의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몸은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망치질한 듯 생동감이 넘쳤다.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한 몸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옷을 벗고 나니 더욱 야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의원은 달달 떨면서 붉어진 살갗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진단 내렸다.

    “가벼운 화상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흉은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원은 카르한의 몸을 힐끗댔다. 만약 흉이 진다고 해도, 이미 심각한 상처가 많아서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약 발라드리겠습니다.”

    의원은 가방에서 연고 통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없던 수전증이 생긴 것인지 연고 뚜껑을 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달달 떠는 의원을 보던 카르한이 말했다.

    “제가 직접 바르겠습니다.”

    그 말에 뒤돌아서 있던 일리아가 빠르게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해줄게요.”

    혼자서 약을 꼼꼼하게 바르긴 힘들 터였다. 저 때문에 다쳤으니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무작정 소리치고 본 일리아는 뒤늦게 그가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될까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작은 목소리로 ‘괜찮으시다면…….’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뒤돌아선 일리아는 의원에게서 약을 받았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

    “예, 아가씨!”

    연고를 내어준 의원은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지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벗은 몸을 보았다.

    ‘상처가…….’

    군살 하나 없는 몸에 새겨진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많은 상흔들이 별자리처럼 이어져있었다.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어, 몸이 아니라 흠집 많은 석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따끔할지도 몰라요.”

    일리아가 연고 뚜껑을 열자, 그는 등을 돌려 앉았다.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일리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상처 부위에 약을 살살 발라주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파요? 이제 다 끝났어요.”

    떡 벌어진 어깨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꼼꼼하게 다 발렸는지 확인한 일리아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깨끗한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거울을 마주 세운 듯 끝없이 이어져 비쳤다. 꽉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카르한이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붉었다.

    카르한은 붙잡혀 있던 손목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가 다시 옷을 입으려 하자, 일리아가 만류했다.

    “새 옷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요. 그리고 다시 만찬장으로 돌아가기는 그렇고…… 여기서 간단히 식사하는 것은 어때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미 긴장이 다 풀린 탓에, 만찬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고용인을 불러,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고용인이 옷과 음식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사이, 카르한이 물었다.

    “……오늘 저, 괜찮았습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왠지 초조해 보이기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실수했다거나. 영애의 가족들에게 미움을 샀을까 봐…….”

    아무래도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 가족이 과하게 굴었죠? 정말 미안해요.”

    리하트 때문에 예민하게 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래도 심했다.

    “괜찮습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영애를 걱정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천사인가……? 그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족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잘 해줘서 덕분에 의심 사지 않고 넘어간 것 같아요.”

    다행히 가족들은 계약 연애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좁아진 미간이 스르륵 풀렸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평평해졌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니, 맹수에서 덩치만 큰 순한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려다가 멈칫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할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용인들이 옷과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카르한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일리아는 고용인들이 두고 간 그릇을 재배치했다.

    고기는 제 앞으로, 야채는 카르한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식사와 곁들일 와인도 따랐다. 카르한은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달달한 과일 음료를 앞에 놓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아까 하다 만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일리아는 샐러드를 먹는 카르한을 보다가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야채만 먹으면 몸이 유지가 돼요?”

    “평소에는 주는 대로 먹기 때문에…….”

    도리어 고기만 줘서 야채 먹을 일이 많지 않다고 카르한이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샐러드를 먹는 카르한은 왠지 행복해 보였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리하트는 집 한 채 정도 준다고 해야 좋아하던데…….’

    소박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에반테온 소공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났을 때, 가족들이 감사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전해왔다. 카르한이 부담스러워하자, 일리아는 괜찮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고용인을 돌려보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저택을 산책하기로 했다.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서 테시온이 황급히 걸어왔다.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 사람은 잠깐 멈춰 섰다. 테시온이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묻고 물어서 겨우 찾았습니다.”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그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후원에 나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딱 만나서 다행이에요.”

    후원이라는 말에 테시온이 움찔했다. 낮에 어마어마하게 큰 정원을 봤기 때문이었다.

    “저택이 이렇게나 넓은데, 다들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합니다.”

    “음……. 그건 아니에요.”

    일리아는 다들 비상용 신호탄을 들고 다닌다고 설명해주었다. 저택 안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나 붙잡고 물으면 되지만, 만약 건물 밖에서 길을 잃으면 답도 없었다. 그래서 신호탄은 혹시 정원에서 길을 잃거나, 마차가 고장 나서 조난당할 때 사용했다.

    “길을 잃은 고용인을 수거하는 고용인도 있거든요.”

    테시온은 놀라기도 지쳤는지 멍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테시온은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거리를 둔 채 따라왔다.

    건물을 빠져나오니,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이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침묵이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감쌌을 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뜻밖에도 카르한이었다.

    “……며칠 전에 델로타 영애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무슨 핑계를 대던가요?”

    “저희 사이를 물었습니다.”

    일리아는 잠깐 멈칫했다. 생각해보면 스텔라 델로타 정도면 정보통도 있을 테니, 슬슬 소문을 들었을 법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카르한의 성격을 생각하면 델로타가 일방적으로 쏘아붙였을 것 같다. 기세에 눌려서 아무 말도 못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데, 카르한이 대답했다.

    “약혼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일리아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스텔라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물론 델로타 영애는 받아들이진 않았지만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 중요하죠!”

    일리아는 잘했다며 칭찬해주었다. 솔직히 스텔라가 알겠다고 납득했으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아직 말을 못 했습니다.”

    “대충 언급만 해둬요. 제가 인사드리러 갈 테니까.”

    이제 일리아의 차례였다. 카르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나면 리하트를 처리하기가 더욱 수월해질 터였다. 일리아가 혼자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영애의 가족들은 사이가 좋은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아까 있었던 일을 더듬듯 눈을 내리깔았다.

    “서로를 무척 신뢰하는 것 같아서…… 단란해 보였습니다.”

    오늘 카르한은 낯선 세계에 발을 들였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화목한 가정.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가족들. 그들 사이에 있으니, 마치 따뜻한 모닥불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자신은 차갑고 모난 얼음인데, 몹시 따뜻해서 금방 녹아버릴 것 같았다.

    카르한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있던 곳과 다른 세계였고, 절대 익숙해져서도 안 될 풍경이었다. 한 발짝 물러나 뒤돌아서면 다시 얼어붙을 것 같은 설풍이 불어올 테니 말이다.

    “…….”

    일리아는 말없이 그를 찬찬히 살폈다. 어둠 속에서 언뜻 비친 그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가족과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사실 일리아 또한 가족들과 계속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리아는 리하트와 연애하면서 모두를 실망시켰다.

    그때는 도리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을 원망했다. 지금 와서야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많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별관 뒤편으로 향하자, 수련이 핀 연못이 펼쳐졌다. 이지러진 어스름한 달빛과 램프 불빛이 수면에 비쳤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감탄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예요.”

    일리아가 연못 가까이 다가섰다. 활짝 핀 수련과 어우러져서, 명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카르한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절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인지, 일리아가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못을 내려다보던 일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물만 봐도 무서워했을 때가 있었어요.”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카르한과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옛날에 연못에 빠져서 죽을 뻔했거든요.”

    뒤늦게 정신 차린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았다. 낮보다는 시원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아, 물결이 이는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옛날에 자신이 빠졌던 연못도 이렇게 연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연꽃의 뿌리가 발에 얽혔던 것이 생생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물에 빠진 저를 구해줬어요.”

    리하트에게 딱 하나 고마운 점이 있다면 제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 사람이 제 운명인 줄 알았어요.”

    그것을 계기로 리하트와 지독하게 얽혔다. 지난 몇 년은 리하트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생활을 보냈다. 진심을 다해 좋아했고, 그랬기에 그의 부정에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아니었죠.”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리아는 리하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한 것은 일리아가 아닌, 일리아가 소유한 돈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니, 결국은 어긋날 운명이었다. 처음부터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위태로운 관계였던 것이다.

    애초에 목적이 돈이었다면, 차라리 대놓고 사례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지. 왜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것인지……. 그에게 바쳤던 연정과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만약에 나를 구해준 사람이 리하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의미 없는 물음과 같았다. 이제 와서 가정해봤자 부질없었다.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쨌든 그 자식은 이제는 원수나 다름없어요.”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덜어내기 위해 과격하게 말해보았으나, 카르한은 묵묵히 일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

    “……아직도 좋아하십니까?”

    카르한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놓고 놀랐는지 뒤늦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뇨!”

    일리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실체를 알게 된 후로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 남은 것은 애증도 아닌 증오뿐이었다. 만약에 리하트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손을 뻗으면 걷어차 줄 것이다.

    일리아는 걸음을 돌려, 한쪽에 놓인 간이 계단으로 향했다. 연못 아래로 이어진 계단 끝에는 물이 차 있었다.

    일리아는 층계참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드레스 끝을 살짝 묶어서 물에 젖지 않도록 했다. 귀족 영애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어차피 개인적인 공간이니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미끄러지듯 물에 들어갔다. 발만 담갔을 뿐인데,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리 오세요.”

    일리아가 손짓하자, 멀뚱히 서 있던 카르한도 그쪽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일리아를 따라 그도 신발을 벗었다.

    바짓단을 걷은 후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생각보다 차가워서 놀랐지만, 이내 적응했다.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오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여름에 자주 이러고 있거든요.”

    사실 이곳은 리하트도 데려온 적이 없는, 오로지 일리아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름마다 혼자 여기에 와서 발을 담근 채 독서를 하곤 했다.

    리하트의 영향을 받은 일리아는 돈을 써야만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란히 이러고 있으니 뭔가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데이트겠죠?”

    일리아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며 똑같이 물었다.

    “……데이트입니까?”

    “사실은 나도 잘 몰라요.”

    일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리하트와 이런 소소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데이트를 즐기는지 궁금하네요.”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겠다며 일리아가 웃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휘어지는 눈꼬리를 눈에 담았다. 어둠 속에서 보라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바람이 불어오자, 환한 금발이 흩날렸다. 쏟아지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저를 칭찬해주던 입술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일리아가 지금까지 제게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단단히 다물린 입매가 저도 모르게 서서히 풀어졌다.

    “진짜 연애하는 기분이에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의 입매가 다시 굳어졌다. 가시를 품은 것처럼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잠깐 좋은 꿈을 꾼 기분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계약 연애를 하는 것이지, 진짜로 교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 년짜리 시한부 연애. 이 모든 게 타인을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되었네요.”

    어느덧 사위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아, 캄캄해졌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듯했다.

    일리아는 일부러 가족들에게 카르한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카르한이 불편해할 것이 뻔히 보였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와 복도를 걷고 있으니, 고용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잠시 부르십니다.”

    “소공자를 배웅해 드린 후에 가겠다고 전해줄래? 좀 걸릴 것 같아.”

    옆에서 일리아의 말을 들은 카르한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제대로 된 대접도 하지 못했는데, 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말을 더했다.

    “저희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길을 전부 외우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일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많이 급한가 싶어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배웅 못 해줘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짤막한 인사를 나눈 후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일리아가 사라지자, 카르한과 테시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블로든 저택의 정원 크기를 생각하면, 지금 출발해도 한밤중에 자택에 도착할 듯했다.

    쭉 이어진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침없이 걸어가는데, 복도 끝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일리아의 아버지인 클리프 블로든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

    클리프가 먼저 아는 척하자, 카르한과 테시온이 나란히 멈춰 섰다.

    “댁으로 돌아가십니까?”

    “예.”

    카르한은 떨지 않기 위해서 주먹을 살짝 쥐었다. 딱딱한 대답을 들은 클리프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다친 곳은 좀 괜찮으십니까?”

    클리프의 시선이 카르한의 팔에 닿았다.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첫인상이 어쨌든 클리프에게 카르한은 은인이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까 바르고 남은 약은 받았으니…….”

    느릿하게 대답한 카르한이 클리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을 받자, 클리프는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돌았다. 타인과 대화하는 데 서툰 카르한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칭찬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그림이 아름답습니다.”

    칭찬부터 내뱉고 본 카르한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을 확인하고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아까 봤던 수많은 명화들은 어디 가고, 달랑 실선 두 개만 그어진 그림이 놓여 있었다.

    “소공자께서도 예술에 관심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클리프가 조금 흥미를 보였다.

    “괜찮으시다면 그림에 대한 감상평을 듣고 싶군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캔버스에 그어진 흰색 선과 검은색 선……. 아무리 봐도 평행을 이룬 두 개의 선이 전부였다. 오랫동안 전장을 떠돌았던 만큼 예술에 문외한인 카르한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카르한은 오늘 봤던 장면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을 떠올렸다. 대검 아래에 앉아 있던 비올레였다.

    “……제 소견으로는 두 자루의 칼날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오. 신선한 접근이군요.”

    클리프가 흥미로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빛냈다.

    “사실 이 그림은 선과 악이 영원히 교차할 수 없이 평행하지만, 결국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지요.”

    그런 심오한 의미가……. 카르한은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실선 두 개였다.

    클리프는 살짝 신이 났는지, 상대가 딸의 남자친구라는 것도 잊고 다른 그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춘 채 질문했다.

    “이 그림은 당연히 아시겠지요?”

    당연히 몰랐다. 카르한이 입술을 달싹이자,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이브노프의 ‘신비로운 침실’입니다.”

    “……이브노프의 ‘신비로운 침실’ 아닙니까?”

    카르한이 들은 대로 대답하자, 클리프는 기뻐했다.

    “역시 아시는군요!”

    또 감상을 물어볼까 봐 카르한은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클리프가 알아서 줄줄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이 끝나고 클리프는 다른 그림들을 소개해주었다. 그때마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테시온이 몰래 정보를 알려주었다.

    결국 다섯 번째 그림까지 감상했을 때, 클리프가 뒤늦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쩌다 보니 카르한과 너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흠, 소공자께서 이렇게나 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술에 관심이 없어서 슬펐다며, 그가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저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그 일로 인해 카르한을 일리아의 남자친구로 인정하긴 했지만, 환영하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클리프는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클리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비올레나 헤인리가 나타나지는 않을지 확인한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말했다.

    “혹시 다음에…… 전시회에 한번 오시겠습니까? 좀 더 깊은 토론을 나누고 싶군요.”

    “……예.”

    아직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카르한은 그만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

    카르한이 돌아가고, 일리아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럴 거면 다음부터는 집에 데려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자, 가족들이 사과해왔다.

    일리아는 그들이 유독 엄격하게 구는 이유를 이해했기에 적당히 잔소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카르한을 아주 나쁘게 평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리하트를 데리고 왔을 때는 집이 뒤집어졌었는데…….’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린 일리아는 한참 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일리아는 볼일을 보기 위해 잠깐 외출하기로 했다. 프란체와 말렉을 동행한 채 번화가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볼일인 은행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재개발로 인한 수익이 들어오고 오르골 가게가 대박을 치는 바람에 자산이 대폭 늘어버렸다. 그래서 금고를 확장해야 하니, 본인 확인을 위해 은행에 방문해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은행에 도착한 일리아는 설명을 들은 후, 지하 금고 두 칸을 더 늘리기로 협의를 끝냈다. 일리아는 문득 자신의 자산이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개인 금고에 얼마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금액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그리고 금액을 불러주려던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

    “현재 금액을 불러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죄송하지만, 실시간으로 이자가 붙는 중이라서요.”

    직원이 일리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한참 동안 금액을 불러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네.’

    가문 재산도 아니고, 개인 자산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무래도 별장을 지을 터에서 발견된 금맥이 이만큼의 수익을 벌어들여준 듯했다.

    땅을 구입한 것은 일리아의 부모님이었지만, 일리아는 공로의 대가로 지분 반절을 받았다. 결국 일리아의 금고는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오늘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일리아가 은행을 나서자, 모든 직원들이 배웅하러 나왔다. 은행을 벗어난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돈이 더 늘면 어디다 쓰지?’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들어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특히 리하트와 헤어진 후로는 과소비가 줄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일리아는 번화가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요즘 자주 들르던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르한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와 함께하는 것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길을 걷던 일리아는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다.

    “디저트나 먹으러 갈까.”

    저택에는 제국 디저트 대회에서 연승을 거둔 요리사가 있었지만, 왠지 집에서 먹으면 그 맛이 나질 않았다. 결국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을 데리고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먹고 싶은 것을 왕창 시킨 후 가게 테라스로 나와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대화 주제에는 이전과 달리 카르한과 테시온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특히 프란체는 몇 번이고 테시온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셋이서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익숙하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물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때 적발의 여인이 멈춰 서더니, 테라스에 앉아있는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 블로든?”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똑바로 보았다. 다시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리하트의 누나인 시오나였다.

    “오랜만이네? 좀 바뀐 것 같다?”

    시오나는 잘 만났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리하트와 남매 아니랄까 봐 만나자마자 하는 짓이 똑같았다.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진창으로 처박혔다.

    일리아는 시오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리하트의 누나라는 점을 이용해서 일리아를 실컷 부려먹었기 때문이었다. 걸핏하면 리하트를 들먹였기에,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안 그래도 지금 쇼핑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따라와.”

    시오나가 거만하게 명령했다. 마치 시종을 부리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가 무척이나 당당하게 앞장서자, 일리아는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리하트한테서 파혼통보 받았다는 말을 아직 못 들은 모양이지?’

    시오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일리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잘 만났다.’

    그때의 호구는 이제 없다는 것을 알려줄 차례였다.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렉에게 계산을 맡겨둔 후에 일리아는 시오나를 따라갔다. 한참 후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아기 용품을 파는 가게였다. 혹시 임신했나 싶어서 쳐다보는데, 시오나가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번에 내가 임신 계획이 있거든. 그러니 미리 준비해야지 않겠어?”

    시오나는 재작년에 결혼했는데, 아직까지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뻔질나게 후작가를 드나들었고, 일리아와 자주 부딪혔다. 먼저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훈수를 두곤 했다.

    시오나는 일리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가게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점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시오나의 얼굴을 확인한 점원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찰나였지만,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이었다. 시오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당당한 발걸음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저번에 봐둔 거 오늘 전부 사려고.”

    점원의 눈빛이 단숨에 바뀌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점원이 방긋방긋 웃으며, 시오나를 안내했다. 그 모습만 보고도 일리아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전에 시오나는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점원을 달달 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를 만난 이 기회에 물건을 구입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시오나는 가게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 것 같은데, 이것보다 더 비싼 건?”

    “저희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은 여기에…….”

    “저건 디자인이 왜 저래?”

    시오나가 깐깐하게 굴어도 점원은 웃으며 맞춰주었다. 물건을 전부 사겠다는 선언 때문이었다.

    보행기와 보닛, 장난감 등등을 쓸어 담던 시오나는 상자를 열고 물건을 사용해보았다. 바퀴를 밀어보거나, 모양을 흩뜨려 놓기도 했다.

    “계산하시고 뜯어야…….”

    “사면 되잖아?”

    점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 후 시오나의 쇼핑이 끝났다.

    “전부 합해서…… 157,200크로엘입니다.”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평민의 몇 년 치 생활비였으며, 시골에 작은 별장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육아 용품에 그렇게까지 돈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터였다. 유행을 타는 데다가 몇 년 쓰지도 못할 소모품이니 말이다.

    시오나는 당연하다는 듯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리아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재촉해왔다.

    “뭐 해? 계산하지 않고.”

    일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시오나가 흡족한 얼굴로 기다리는데, 일리아가 계산대에 보석을 박은 호화로운 딸랑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계산해주세요.”

    “……뭐 하는 거야?”

    “내 물건 계산하는데요? 우리 집 강아지 주려고요.”

    일리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시오나는 잠시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내 거는?”

    “그건 그쪽이 계산해야죠.”

    시오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까지 일리아가 제 물건을 계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너 왜 그래?”

    초조해진 시오나가 물었다. 지금까지 눈빛 한 번만 주면 알아서 재깍 계산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맞아요. 못 해줄 거 없죠.”

    시원한 대답에 시오나가 안도하려는데, 일리아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그쪽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요.”

    “……뭐?”

    “아직도 내가 지갑으로 보여요?”

    일리아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조곤조곤한 말투인데,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잠시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벌리고 있던 시오나가 발칵 화를 냈다.

    “너 그딴 식으로 굴어놓고 우리 가문에 들어올 생각이야?”

    결혼이고 뭐고 반대할 거라며 시오나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리하트한테 말해야겠어.”

    마지막으론 자주 일삼던 협박까지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일리아가 팔짱을 꼈다.

    “그렇게 친한데, 아직도 못 들었나 봐요?”

    시오나가 멈칫하더니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나 그 자식이랑 파혼할 거거든요.”

    그 말을 남겨놓고 일리아는 등을 돌렸다. 시오나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일리아를 불렀다.

    “일리아 블로든!”

    일리아는 곧바로 가게를 나왔다. 뒤따라 나온 시오나가 일리아를 붙들기 전에, 점원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계산하셔야죠!!”

    어디 가냐며 점원이 바로 막아 세웠다. 시오나와 점원이 실랑이하더니 이윽고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아니, 다음에 산다니까!”

    “포장 뜯은 건 계산해야죠! 아까 전부 산다더니!”

    잔뜩 벼르고 있던 점원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오나가 그렇게 큰 금액을 덜컥 지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란이 점점 커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뭔데? 무슨 일이야?”

    “계산 안 하고 사용했다가 그대로 튀려고 했나 봐.”

    “몰상식하기도 하지.”

    일리아는 시오나를 뒤로한 채 거리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동생이 파혼한 줄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한편으로 우스웠다.

    ‘결국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한테도 말 안 했다 이거지…….’

    그렇다면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 모두가 파혼을 알게 되도록 말이다.

    ***

    카르한을 만나기로 한 날이 왔다.

    일리아는 카르한 쪽에서 정해준 장소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가게였다.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인 듯했다.

    일리아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었던 카르한과 테시온이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죠, 그때 잘 들어갔어요?”

    “예, 덕분에…….”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던 일리아의 눈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미술 대백과사전]

    ‘웬 미술 책……?’

    일리아의 시선이 닿자, 카르한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요즘 관심이 생겨서…….”

    “뭐, 알아둬서 나쁠 건 없죠.”

    수많은 노귀족들은 예술을 모르면 무식한 사람 취급했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예술의 부흥기라고 불렸다. 실력 있는 조각가와 미술가들이 넘쳐났고, 수준 높은 연극들이 줄지어 개봉했다. 모두들 예술에 심취했으며,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작금의 예술은 예전만 못했다. 전처럼 걸출한 예술가들이 나오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쇠퇴했고 관심도 떨어졌다.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는 노귀족들은 지금 젊은이들이 이전과 달리 예술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다만 일리아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그림과 조각상, 음악, 연극 등 모든 예술 분야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곁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 덕분에 처음 보는 노귀족들에게도 예쁨 받곤 했다.

    “아버지께서 조만간 전시회를 연다던데, 한번 놀러오세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왜 그러지? 전시회까지는 부담스럽나?’

    일리아는 혼자 의아해하다가 말았다. 음료까지 시킨 후,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은 옆으로 빠졌다. 둘만 남게 되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거절하는 법을 연습할까요?”

    카르한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몰입하기 위해서 상황을 설정해야겠어요. 제가 부탁하면 당신이 거절하는 거예요.”

    일리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멀리까지 나갔다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무척 사정 있어 보이는 얼굴에 카르한의 손이 움찔 떨렸다.

    “카르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리아가 연기를 시작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일리아가 고개를 들고 카르한과 눈을 마주했다. 맑은 보랏빛 눈동자를 본 순간 카르한이 대답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

    그가 당장 지갑을 꺼낼 것처럼 굴자, 일리아가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놀란 카르한이 몸을 뒤로 물리는 동시에 일리아는 곧바로 한 소리 했다.

    “그 상황에서는 거절해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돈을 왜 빌리겠어요?”

    일리아가 돈을 빌려야 할 일이 온다면 그때는 제국이 파산했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이지 큰일 날 사람이었다. 누가 보증 서 달라고 하면 그것만으로 되겠냐면서 알아서 더 얹어줄 것 같았다.

    “불쌍한 척하면 다 빌려줄 생각이에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

    “무리하더라도 들어주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뭔가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착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바꿔놓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아무래도 시범을 보여줘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그래도 보증은 가족끼리도 서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는 단단히 교육해놓은 후 몸을 좀 더 당겨 앉았다.

    “그럼 제가 거절해볼 테니까. 당신이 부탁해 봐요.”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

    “바빠서 힘들 것 같은데요.”

    일리아가 단칼에 거절하자, 카르한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이렇게 빠르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연습인데 왜 상처받고 그래요……?”

    카르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다시 엄격함을 유지했다. 지금 제대로 해둬야 이후에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일리아는 그가 저 없이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번 더 연습을 했다. 나중에 카르한은 일리아가 급한 얼굴로 부탁해도,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누가 부탁하면 이 정도는 무리 없이 해줄 수 있겠다 싶을 때는 들어줘요.”

    “네.”

    “하지만 조금이라도 걸리는 구석이 있으면 거절하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카르한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부탁만 늘어놓는 사람은 피하는 게 좋아요. 이용당하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충고를 가슴에 새겼다. 일단 열심히 배우긴 했는데,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의 부탁을 꾸역꾸역 들어준 까닭은 그들이 제게 실망하고 인상 찌푸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착한 아이로 남고 싶었기에……. 카르한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가 곧바로 지웠다.

    “자, 이번에는 아무리 거절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만 찾아오라고 말해야 하나요……?”

    “아뇨, 그냥 인상 쓰고 가만히 노려보세요.”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행랑 칠 터였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미친놈도 많은 법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잊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놈도 존재했다.

    다행이라면 카르한은 황족을 제외하고 눈치 볼 필요가 없는 막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 이용해도 어느 정도 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으면, 한마디 해주세요.”

    일리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차갑게 말했다.

    “꺼져.”

    카르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런 욕설은 입에도 담아본 적 없다는 듯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카르한은 상대가 무서워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순간 일리아는 그가 연회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오해를 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진짜 성격을 들켜서 만만하게 보일 터였다.

    일리아는 이참에 그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르한. 호구가 뭔지 알아요?”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몸을 좀 더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사람을 말하는 거죠.”

    카르한은 이제 이해했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하게 내 사람한테만 잘해주면 돼요. 다 잘해주면 호구 취급 당해요.”

    일리아는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리하트 때문에 착한 사람으로 살아 왔더니, 제게 쏟아졌던 불합리한 일들. 다들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당연하다는 듯 부탁을 늘어놓았던 것들도…….

    “모두에게 친절해질 필요는 없어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래도 당신이 원한다면, 사람들이 겁먹지 않게 해줄 수는 있어요.”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인상만 살짝 바꾸면 무서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정이 좀 더 얼굴에 드러나면 좋겠지만, 그건 천천히 노력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분명히 상처 받을 일이 생길 거예요.”

    이 세상에는 카르한의 상냥함을 이용해먹을 놈들이 바글바글했다. 처음부터 일리아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사람들이 카르한을 보고 겁먹거나 기피하지 않게 만드는 것. 카르한 스스로 의견을 내게 하는 것. 그가 타인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 진정한 나쁜 남자는 못 되더라도,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나쁜 남자가 되어주세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지금 일리아의 제안은 카르한의 근원을 흔들어놓는 것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카르한은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마냥 좋아서 받아들였다면 상처는 남지 않았겠지만, 싫어도 억지로 참고 체념하니 혼자 곪아갔다.

    카르한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막막해서 손을 대지 못했다.

    “…….”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잠시 충격 받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의 제안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가 아닌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자신이 바뀌었음을, 카르한은 느끼고 있었다.

    “……폐를 많이 끼치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요.”

    조심스럽지만, 확실한 대답에 일리아가 씩 웃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볼까요.”

    일리아와 카르한이 일어나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세 사람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가게를 나온 일리아는 어디서 거절 연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시 무난하게 물건이라도 사면서 배워야 하나…….’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곧바로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저기, 길을 물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자, 일리아는 곧바로 촉이 왔다.

    ‘분명히 이상한 종교를 권유하는 사람이거나, 차비를 잃어버렸으니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만만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온갖 일에 얽혔기에 눈치만 빨라졌다.

    “저쪽으로 가세요.”

    일리아가 짤막하게 대답해주자, 남자는 이때다 싶어서 말을 붙였다.

    “그런데 인상이 정말 좋으…….”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시야에 카르한이 들어왔다.

    “인상이…….”

    카르한의 얼굴을 본 남자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지 제법 만만치 않았다.

    “하여튼 제가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전자였군.’

    일리아는 빠르게 판단을 내린 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카르한이 마주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눈빛으로 말했다. 실전이에요.

    어어 하는 사이, 카르한과 이단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마주 섰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줄행랑을 쳤을 텐데, 경력자는 역시 달랐다.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열심히 입을 나불거렸다. 카르한은 난감해하다가 일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일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실전을 치르게 된 카르한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관심 없습니다.”

    카르한은 아까 배운 대로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러나 카르한의 정중한 태도에 남자는 더욱 활개를 폈다.

    “아니, 저는 아무나 붙잡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시면 섭섭합니다.”

    남자가 카르한을 질책했다. 카르한은 순간 움찔했지만, 조금 더 완강하게 거절했다.

    “저희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아예 카르한을 무시하고 일리아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생김새를 봐서는 일리아 쪽이 훨씬 공략하기 쉽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가 일리아를 향해 걸음을 떼자, 카르한이 막아섰다.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미간을 찌푸린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흉흉한 기세에 남자는 순간 주춤했다. 이내 남자는 언제 겁먹었냐는 듯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니, 왜 길을 가로막고 그럽니까?”

    역시 비범한 남자였다. 카르한이 노려보는데도 줄행랑치지 않은 이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이 처음에 정중하게 나와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온갖 사람을 상대해본 만큼 호구인 것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강적인데.’

    일리아는 카르한이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실력은 햇병아리인데, 처음부터 최종 난도를 받게 될 줄이야. 가만히 노려보는 것까지 통하지 않자, 카르한이 머뭇거리던 때였다.

    “아가씨, 저랑 이야기 좀…….”

    남자가 일리아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놀란 일리아가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카르한이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엄청난 악력에 남자가 비명을 삼켰다. 잘 벼린 시선이 도륙 낼 것처럼 그를 향했다.

    “꺼지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겁에 질린 남자는 뒷걸음질 치더니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못해서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던 카르한이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의 어깨가 낮아졌다.

    “똑바로 했습니까……?”

    눈치를 보는 것이, 평소에 많이 보았던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카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잔잔한 수면처럼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강아지 같은 모습에 일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했어요. 실전에 강하시네요.”

    일리아는 듬뿍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하얀 솜처럼 일리아가 알려준 모든 것들을 금방 흡수했다. 이렇게 훌륭한 학생이라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무척 뿌듯했다.

    칭찬을 퍼부어준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남자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경비대를 부르러 간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일리아는 고개를 바로 했다.

    “…….”

    순간 일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아니,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카르한이 웃고 있었기에.

    뾰족하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딱딱하던 입매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미소를 머금었다. 사납던 인상도,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던 무표정한 얼굴도 온데간데없었다.

    거친 북풍한설이 멎고 마지막 눈송이가 봄꽃에 내려앉은 것처럼 그를 이루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저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 일리아는 손끝이 가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첫 봄에 피어난 꽃잎이 제 가슴으로 불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카르한의 미소는 그만큼 대단했다.

    “카르한, 당신…….”

    일리아는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웃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카르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원래대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일리아는 괜히 아쉬워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걸까.

    ‘웃는 연습을 했을 때도 어색하기만 했는데…….’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카르한을 무서워하지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 한 거예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롯이 저를 향한 칭찬이 좋아서, 일리아의 웃는 얼굴이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표정이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버렸다.

    “어릴 때 키운…… 강아지가 생각나서…….”

    “아!”

    일리아는 손뼉을 쳤다. 자연스럽게 그의 표정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일리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주었다.

    “어릴 때 키운 강아지랑 들판에서 뛰어노는 상상을 해봐요.”

    카르한은 고민하다가 강아지가 아닌, 방금 일리아가 해준 칭찬을 떠올렸다. 딱딱하던 미간이 사르르 풀리더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방금 보았던 옅은 미소를 확인한 일리아가 속으로 소리쳤다.

    ‘완벽해.’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 가장 고민이었는데, 한 번에 해결되었다. 다음에 미소 지을 일이 필요할 때 쉽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제가 강아지라고 말하면 방금 했던 상상을 하는 거예요. 알겠죠?”

    “……예.”

    카르한은 오해를 풀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리아가 좋아하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오늘 성과가 좋은데요.”

    일리아는 무척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만 하면 무척 좋을 듯했다. 환불까지 해낸 후에도 어딘가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 듯했다.

    일리아는 조금 전, 카르한이 욕설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효과가 굉장해서, 몇 개 정도 더 배워두었으면 했다.

    “앞으로 계속 바른말만 할 수는 없으니…… 욕하는 법도 좀 배워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일리아는 프란체를 힐끔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섰다. 일리아가 알기론 프란체보다 욕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선을 받은 프란체가 시범을 보였다. 곱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온갖 욕설이 비처럼 쏟아졌다. 욕으로 얻어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충격 받은 카르한과 테시온을 보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처음부터 너무 강했나요?”

    “다른 욕설도 있습니다!”

    프란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말렉이 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카르한과 테시온을 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방금 그건 잊어주세요. 제가 천천히 알려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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