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4/28)
  • 4장

    ***

    만개한 장미가 지천에 깔렸다. 양옆으로 장미 관목이 심겼고, 그 길 끄트머리에 돔을 지탱하는 흰 기둥 두 개가 있었다. 분홍색 장미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 흰 지붕 위까지 두툼하게 덮은 모양새였다.

    돔 아래에는 원형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여인들이 앉았는데, 그 중심에 스텔라가 자리했다.

    오늘 모임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스텔라 델로타의 티파티였다. 초대받은 이들은 전부 결혼하지 않은 영애들로, 백작 신분 이하로 구성되었다.

    모두가 모이자, 뒤에 서 있던 고용인이 물을 따라주었다. 찻잔에 들어있던 말린 장미가 천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황홀한 광경에 모두가 감탄할 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신제품으로 내놓을 장미 차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색감도 예뻐요.”

    다들 한 마디씩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녀들의 말에 스텔라가 미소 지었다.

    스텔라는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가까운 이들을 초대해, 시음회를 열곤 했다. 항상 칭찬뿐이어서 참고할 만한 의견은 딱히 없었지만, 마음의 위안 정도는 되었다.

    시음이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정해지자 다들 이야기꽃을 피웠다. 혼기가 꽉 찬 영애들이다 보니 주로 연인이나 결혼이 화제였다. 한 자작영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혼담이 들어왔는데 고민이에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신세 한탄하는 척하지만 은근한 자랑이 느껴졌다. 다들 모른 척하며 그래도 부럽다는 말을 건넸다.

    한창 서로의 약혼자 이야기를 하던 중, 한 영애가 스텔라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델로타 님께서는 정말 좋으시겠어요. 곧 공작부인이 되시잖아요.”

    다들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재력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델로타 가문의 외동딸인 데다가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까지 앞두고 있었다.

    비록 소공자의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면 늙은 귀족의 재취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수두룩했다.

    스텔라 또한 그런 부류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발버둥 쳐도 거머쥘 수 없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카르한을 선택했다.

    “아직 약혼식도 치르지 못했는걸요.”

    스텔라는 남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름대로 겸손을 떨어 보았다.

    “그래도 두 분 자주 만나시죠?”

    “궁금해요.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스텔라는 손도 대지 않은 다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딱히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카르한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뿐, 아직은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결혼식까지 정해진 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를 쫓아다니는 입장인 것이다.

    심지어 황궁 연회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카르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당분간 찾아가는 걸 자제하는 중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었기에, 스텔라는 거짓말을 섞어서 얼버무렸다.

    “대체로 집에서 만남을 가지고 있어요. 소문 때문에 피곤해서요.”

    다들 카르한의 소문을 한 번쯤 들은 바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자께서 무서운 분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그런 분이 연인에게는 다정하지요.”

    “맞아요. 얼마 전에 제가 읽었던 소설에서도 그런 남자 주인공이 나왔어요.”

    화제는 금방 연애 소설로 옮겨갔다. 스텔라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도 연애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열심히 살을 뺀 까닭도, 즐겨 보던 소설의 여자 주인공 영향 때문이었다. 특히 요즘 가장 즐겨 읽는 소설은 나쁜 남자를 길들이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나쁜 남자. 잘생겼지만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성격 파탄자. 그리고 남자 주인공을 유일하게 길들이는 여자 주인공.

    처음 그 소설을 읽었을 때, 스텔라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울고 웃다가 나중에는 자신과 카르한을 대입했다. 카르한이 저를 밀어내거나, 무뚝뚝하게 구는 모습조차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괜히 더 타올랐다.

    비록 지금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차갑고 나쁜 남자지만, 카르한을 함락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될 것이다.

    “아참……. 얼마 전에…….”

    한 영애가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 아차 하고 다급히 다물었다. 그 모습에 스텔라가 물었다.

    “얼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스텔라의 시선을 받고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제가 번화가에 나갈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우연히 에반테온 소공자를 봤는데…….”

    그녀는 말하다 말고 스텔라의 눈치를 보았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이 있더라고요.”

    “비서 아닌가요?”

    카르한이 비서인지 보좌관인지 모를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제법 유명했다. 용기 내서 카르한에게 말을 걸려 했던 이들도 그 남자 때문에 포기하곤 했다.

    “아니에요. 되게 가까이 붙어서 걷고 있었는데…….”

    “그래서 누군데요?”

    스텔라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말해도 되나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저질러버렸다.

    “일리아 블로든 님이셨어요.”

    쨍그랑, 하고 티스푼이 떨어졌다. 스텔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그 얄미운 계집애와 에반테온이 같이 걷고 있었다고……?

    바들바들 떨던 스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고용인에게 소리쳤다.

    “에반테온 저택으로 가야겠어. 당장 마차 불러!”

    ***

    카르한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화장대 앞에 앉은 일리아는 며칠 전 리하트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리하트는 소리 지르더니 저를 붙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일리아에게는 훌륭한 호위 기사가 둘이나 있었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저지당한 리하트는 분을 못 이겨 난동을 피웠다. 그러다 가게 주인이 경비대를 부른다고 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일리아는 그 틈을 타 집으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 앞으로 둘이서 따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가 파혼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치장이 끝나고,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고용인들이 웃으며 일리아를 배웅해주었다. 침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복도 중앙, 빛이 드는 창가에 반짝거리는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인 헤인리였다.

    “오라버니?”

    일리아의 부름에 헤인리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그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지금 출근하실 시간 아닌가요?”

    “휴가다.”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헤인리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일리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색함이 흘러나왔다. 단둘이 대화를 나눴던 날 후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외출하려는 모양이지?”

    “네, 에반테온 소공자를 만나려고요.”

    헤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리아는 뒤늦게 헤인리에게만 카르한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 그게…….”

    간단히 설명해주려는데, 그가 무심히 대답했다.

    “부모님께 대충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헤인리 혼자 소외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르한과 연애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들이 워낙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헤인리 또한 부모님과 비슷한 생각일 터였다.

    “오라버니, 혹시…… 나중에 둘이서 식사할 수 있을까요?”

    헤인리가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함께 식사하면서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니면 잠시 차라도…….”

    일리아는 나름대로 용기를 냈다. 저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으니,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알겠다. 시간을 비워놓도록 하지.”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당할까 싶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고, 일리아가 물었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 이만 가봐도 될까요?”

    헤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자, 헤인리가 일리아를 불러 세웠다.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더군. 괜히 고용인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우산 가져가거라.”

    “우산 챙겨 갈게요. 고마워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헤인리는 우두커니 서서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리아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일리아와 대화하면서 자꾸만 쌀쌀맞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오랫동안 굳어진 버릇 때문에 살가운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헤인리는 제 말투가 얼마나 날카롭고 차가운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일리아에게만은 다정한 오빠였는데 사이가 틀어진 후로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 일리아도 내색하진 않았으나, 아마 상처 입었을 터였다.

    “좀 더 솔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현관 앞에서 일리아가 막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헤인리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곧바로 고용인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지금 외출할 테니, 바로 마차를 준비해라.”

    ***

    마차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번화가에 도착했다. 골목 어귀에 마차를 세워놓고 오르골 가게로 걸어가던 일리아는 엄청나게 긴 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뭔가 신제품이 나왔나? 그것도 아니면 한정판매로 물건이 풀리기라도 했나?

    일리아는 강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수많은 사람을 지나친 일리아는 잠깐 멈춰 섰다. 줄의 근원지는 바로 일리아의 오르골 가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한적했는데?’

    갑자기 대박이 터진 이유를, 사장인 일리아 혼자만 몰랐다. 당황한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왜 다들 줄을 서고 있는 거죠?”

    그러자 젊은 남성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그게…… 이번에 인기 배우가 오르골에 반지를 넣어서 청혼했거든요. 소문이 쫙 나서 오르골이 청혼 필수품이 되었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하필이면 지금 오르골이 인기 제품이 되다니.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일리아는 점점 길어지는 줄을 확인했다.

    수도에서 오르골만 취급하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달은 청혼하기 좋은 기념일이 끼어 있었다. 유명인이 하면 꼭 따라 해야 하는 제국민들의 심리까지 맞물려 이런 기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줄을 둘러보던 일리아의 시선이 잠깐 멎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줄 사이로 머리 하나 더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카르한이었다.

    ‘아니, 왜 저기 서 있어.’

    일리아는 곧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왠지 카르한의 앞뒤로만 줄 간격이 느슨해 보였다.

    “카르한. 여기서 뭐 해요.”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가게 안에서 만나기로 해서…….”

    일리아는 이 와중에 착실하게 줄을 선 카르한에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일정 변경이에요. 지금 들어갔다간 압사할지도 몰라요.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일리아의 말에 그가 줄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개미 떼처럼 줄이 다시 빽빽해졌다.

    일리아는 조금 측은한 얼굴로 가게 입구를 바라보았다. 왠지 새로 뽑은 직원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아무래도 월급을 많이 올려줘야 할 것 같았다. 이 유행이 오래간다면 새 직원도 고용해야 할 테고 말이다.

    일단 두 사람은 오르골 가게 반경을 벗어났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 한적한 곳까지 나온 일리아는 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몰릴 줄은 몰라서…….”

    “괜찮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일리아의 재물운에 적응한 듯했다.

    “당신 보좌관은요?”

    “영애와 길이 엇갈릴까 봐 잠깐 주위를 둘러보러 갔습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일리아는 멈칫했다. 그의 큼직한 손에 들린 분홍색 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번에 일리아가 구입해서 떠넘긴 책이었다. 일리아의 시선을 눈치챈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읽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예요.”

    책으로 배우는 연애도 쓸모가 있을 터였다. 특히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하니 성과가 있을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의 보좌관인 테시온이 합류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줄에서 겨우 탈출했는지 진이 다 빠진 모습이었다.

    “……운이 좋다고 하시더니, 사실이었군요.”

    테시온이 땀을 훔치며 말했다. 저번에 약속 장소가 갑자기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한적하던 오르골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인데 연속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다음 약속 장소는 저희 쪽에서 마련하겠습니다.”

    “그게 낫겠어요.”

    테시온의 말에 동의한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물건은 가지고 왔어요?”

    저번 만남 때, 일리아는 최근 구입한 것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오라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카르한은 착실하게 그 말을 따랐다.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건을 꺼냈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작은 상자였다.

    “언제 샀어요?”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좋아요. 기간도 적당하네요.”

    카르한은 이걸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는 설명해주는 대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 안에 저를 신뢰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처음에는 적당히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리하트를 떨쳐낼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카르한을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감 없는 모습이나, 남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의견을 내세울 줄 모르고, 타인을 우선시하느라 저 자신을 소홀히 하는 것도 전부 바꿔놓고 싶었다.

    절대 카르한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착한 성품으로 살아남기에 이 세상이 너무 험악할 뿐이다.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가진 걸 전부 빼앗기고 물어뜯길 것이다. 그러니 호구 잡힐지도 모를 성격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제가 지켜본 당신은 자신감이 많이 부족해요.”

    일리아의 솔직한 말에도 카르한은 묵묵했다. 본인도 많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제 의견은 조금씩 낼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자신감을 키워볼 거예요.”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무엇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에 손에 들린 상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거 환불하러 가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렇게나 동요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런 카르한을 대신하여 테시온이 나섰다.

    “환불이라니……. 카르한 님께서는 그런 거 못하십니다.”

    “못하면 되게 해야죠.”

    일리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테시온은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카르한은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정당한 요구조차 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그가 자신감을 키우면 지금처럼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자신감을 심어줄지 고민하던 끝에, 일리아는 환불을 택했다. 일리아 본인은 환불할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환불은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하였다.

    “정말 못하겠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강제로 떠밀고 싶지는 않거든요.”

    흔들리는 푸른색 눈동자에 일리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부드러운 금발에 가만히 있어도 호감을 부르는 선한 인상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무섭다고 오해를 사는 카르한과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일리아는 남들과 달리 언제나 곧은 시선으로 카르한을 마주했다. 유일하게 진짜 자신을 봐주는 일리아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눈동자의 떨림이 멎었다.

    “해보겠습니다.”

    조용히 내뱉은 말에 테시온이 놀라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카르한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바로 가볼까요?”

    앞장 선 카르한을 따라 걸었다. 가게 앞에 도착한 일리아는 간판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환불한다던 가게가 우리 가게였네…….’

    신발을 취급하는 곳으로, 블로든 가문 소유의 가게였다.

    “그 물건 뭐예요? 왜 환불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일리아는 뒤늦게 환불 사유를 물어보았다. 손님의 불만 정도는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신발인데, 치수가 맞지 않아서…….”

    “아하.”

    물건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일리아는 멈칫했다. 카르한의 손에 들린 상자는 누가 봐도 그의 발 크기보다 작았다.

    도대체 얼마나 작은 걸로 산 거야……? 일리아가 상자와 카르한을 번갈아 보자, 그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보다가 이보다 큰 치수가 없다고 해서…….”

    그래서 얼떨결에 샀다고 그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보통 신어보지 않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전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마 점원의 능수능란한 말발에 ‘어어……’ 하다가 덜컥 구매까지 이어졌으리라.

    그래도 다행이라면 블로든 가문 소유의 가게들은 전부 점원 교육을 철저히 한다는 점이었다. 막무가내로 환불이 안 된다고 우기지는 않을 터였다.

    카르한이 홀로 가게에 들어가기 전, 일리아가 조언했다.

    “당신, 당황하면 인상 쓰는 버릇이 있어요. 표정 관리에 애써 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정리하고 들어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카르한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편인데도 티가 조금 났다. 카르한은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가게로 향했다.

    “…….”

    가게 입구에서 멈춰 선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왠지 말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할 수 있어요. 힘내요.”

    일리아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더 이상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카르한이 느릿하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환불하러 왔습니다. 환불하러 왔습니다…….’

    몇 번이나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비장하게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 것을 본 점원들이 합창하듯 인사했다.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느릿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체구를 가진 카르한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인사를 건넨 점원들은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막 전쟁터에 나가는 듯 흉흉한 기세가 느껴졌다.

    교육을 잘 받은 점원들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물밑에서 시선 교환을 하며 누가 접대할 것인지 희생양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중 점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 가게에서 가장 능숙한 접객 실력을 지녔으며, 일주일 전에 카르한에게 물건을 판매했던 점원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물음에 카르한이 천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가게에 들어온 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긴장했는지 가슴팍이 아팠다. 머릿속은 소음으로 가득 차, 정작 하려고 했던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 당황하면 인상 쓰는 버릇이 있어요. 표정 관리에 애써 봐요.

    카르한은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애써서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자 상냥하게 웃고 있던 점원이 움찔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본 카르한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당황한 카르한은 버릇처럼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멈추었다. 그 대신 입꼬리를 조금 올려보았다. 얼굴을 마주한 점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카르한은 빨리 용건을 끝내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르한이 굳게 다물린 입매를 달싹였다. 그러나 환불해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서툰 그에게는 최근 들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카르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님……?”

    점원의 부름에 카르한이 눈을 떴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점원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점원이 울먹거렸다. 조금 있으면 무릎 꿇고 사죄할 기세였다.

    카르한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서 있었다. 조언이 필요했기에 유리창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밖에 서 있던 일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말렉이 씌워준 양산 아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놀라서 딸꾹질하던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나였지만 점원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카르한을 보았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걷히기엔 충분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환불을…….”

    “예!!!”

    카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원은 가게가 떠나가라 외쳤다. 뒤이어 점원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화, 환불 사유를 알아야 하는데…….”

    “……치수가 맞지 않습니다.”

    점원만큼 긴장한 카르한이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른 치수로 교환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조심스레 제안한 점원은 상자를 풀어 상품을 꺼냈다. 점원이 카르한과 신발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봐도 작아 보였다. 이보다 더 큰 치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점원이 말했다.

    “……빠르게 환불 도와드리겠습니다.”

    환불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상품 금액만큼 돌려줬을 뿐만 아니라, 위로조로 다른 상품도 어마어마하게 챙겨주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된 듯했다.

    환불에 성공한 카르한이 가게를 나가버리자, 점원들은 전부 동시에 한숨을 터뜨렸다.

    “큰일 나는 줄 알았네. 가게 파괴될 줄 알았어.”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냥 무섭더라.”

    “뒷세계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재잘거리던 이들이 카르한을 접대했던 점원에게 물었다.

    “괜찮아?”

    다들 위로를 던지자,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진상 손님인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한 것 같아.”

    카르한의 정중한 말투를 떠올리던 점원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며 다들 웃는 사이, 누군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지, 나 무슨 일 있을 줄 알고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경비대 불렀거든.”

    ***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는 카르한이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들어갈 때는 작은 상자 하나만 들고 갔는데, 나올 때는 한 짐 가득이었다.

    “……환불하고 새로 샀어요?”

    “전부 무료로 받았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 잠깐 사이 지쳤는지, 그의 어깨가 조금 처져 있었다.

    “어땠어요?”

    “환불하긴 했는데…….”

    카르한은 무척 찝찝해 보였다.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잘했어요. 과정이 어찌 되었든 훌륭하게 성공했는걸요.”

    일리아는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환불하러 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말에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부수적인 문제였다. 전부 자신감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감은 좀 생겼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카르한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다음에는 지금보다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큰 산을 하나 넘었으니, 앞으로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면, 주위 사람들도 달리 볼 터였다. 적어도 물건을 강매당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일리아와 카르한은 가게 반경을 벗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이 좋아서 산책하기에 알맞았다. 슬슬 점심시간이니 식사라도 하면서 지난번에 리하트를 만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경갑을 갖춘 경비대가 우르르 걸어왔다.

    ‘뭐지?’

    경비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일리아 쪽을 가리키며 다른 경비병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다들 일제히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경비병들이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일리아의 뒤에서 걷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바로 경계했다. 여차하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일리아는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팔을 들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경비대와 대척할 이유는 없었다.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일리아와 카르한을 둘러쌌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비대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신고요?”

    갑자기 웬 신고?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들이 카르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장이 신고 내용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여기에 폭력 조직 우두머리가 있다는 신고입니다.”

    범죄자 의심 신고였다.

    경비병의 말에 일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처구니없어서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테시온이 펄펄 날뛰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로서는 확인을 해야 하는지라.”

    테시온이 역정을 내자, 경비 대장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의심 섞인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카르한을 위아래로 훑던 그가 물었다.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대장 옆을 제외한 경비병들은 이미 칼집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여차하면 칼을 뽑으려는 것이었다. 마치 악당을 상대하는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대장이 턱을 치켜들고 당당히 말했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일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경비병들의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허위라도 신고가 들어왔으면 확인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때 대대적인 폭력 단체 소탕 작전이 있었던 만큼, 제국은 암흑세계 조직을 완전히 근절하길 바랐다. 이해는 되지만,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은 듯한 그들의 태도에 열이 뻗쳤다.

    신고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사유 없이, 겉모습만 보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다들 화가 나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카르한은 차분했다. 환불하는 것보다 이런 상황이 더 익숙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괜히 가슴이 아렸다.

    “이분은 나의 상관이시고, 이건 내 신분증입니다!!”

    테시온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거칠게 내밀었다. 대장은 그것을 힐끔 보았다. 테시온의 가문인 헤르벤은 수도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백작가였다. 대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것으로는 안 됩니다. 본인의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여전히 입장을 고수하던 대장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눈빛이 흉흉한 것이, 제국의 안전을 위해 꼭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듣다 못한 일리아가 나섰다.

    “당신들 입장이 이해 가지만, 벌써부터 범죄자 취급하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그러자 대장이 고압적인 시선으로 일리아를 훑었다. 잘사는 귀족 가문 아가씨라고 판단 내렸는지, 경비 대장이 말했다.

    “공무 집행 중이니, 아가씨는 나서지 마십시오. 괜히 귀족 아가씨가 흠 잡힐 일이 생기면 되겠습니까?”

    그는 걱정하는 척 경고를 내뱉었다. 불쾌해진 일리아가 비뚤게 미소 지었다.

    “경비 대장님도 조심하셔야겠어요. 하루아침에 봉급이 삭감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에 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경비대는 기본적으로 녹봉을 받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서 귀족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황실 기사단 관리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기 때문에, 황실에서도 기부금을 용인해주었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내고 있었다.

    “어느 집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가씨 댁 후원금이 없어도 제 봉급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겁니다.”

    경비대를 후원하는 귀족 가문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며, 대장이 불쾌한 티를 팍팍 냈다.

    팽팽하던 기류는 험악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해진 프란체가 칼집을 달칵거렸다. 거슬리는 소리에, 경비병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칼집에 새겨진 문장을 본 경비병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황급히 대장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했다.

    “블로든……?”

    대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경비병들의 눈에 동요가 서렸다. 제국에서 블로든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경비 대장이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블로든 가문의 상징인, 환한 금발을 확인한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저어……, 블로든 가문 영애십니까?”

    대장이 조심스레 묻자, 일리아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에 대장이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뻣뻣하게 굴던 대장과 경비병들이 쩔쩔매며 눈치 보기 시작했다.

    봉급 삭감이고 뭐고, 블로든 가문에서 정식으로 항의하면 평민인 이들은 직장에서 잘릴 수 있었다. 일리아는 이때다 싶어,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카르한, 많이 속상하죠?”

    경비병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르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흉흉하게 생긴 사람이라면 딱 한 명뿐일 터였다.

    카르한 에반테온. 요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이자, 온갖 소문을 두르고 다니는 소공자였다.

    경비병들의 얼굴이 아예 탈색되어버렸다. 에반테온 가문은 황실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쥔 공작 가문이었다. 이제는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때인 것이었다.

    일리아는 경비병들을 힐끗 봐준 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체념으로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를 보니 속이 탔다.

    기껏 자신감을 좀 올려뒀더니……. 무덤덤해 보였지만, 분명 속이 쓰라릴 터였다. 일리아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다들 소공자께서 상처 받으신 거 안 보이나요?”

    “……?”

    일리아가 진심으로 외치자, 경비병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카르한을 힐끔댔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엔 상처 받기는커녕 상처 입힐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소리쳤다.

    “법 없이도 사실 분인데!”

    테시온과 프란체와 말렉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병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조용히 있던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자, 경비병들이 술렁였다. 진짠가?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해요?”

    일리아가 되묻자, 대장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대장의 깍듯한 인사와 함께 경비병들도 예를 갖추었다.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낙인찍지 않아줬으면 좋겠어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가요, 카르한.”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의 팔을 끌어당겼다. 카르한이 뒤늦게 반응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일리아의 손에 붙들린 팔에 꽂혀 있었다. 경비병들과 멀어지자, 일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기분 나빴죠?”

    잠시 말이 없던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장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막 수도로 귀환했을 때는 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기운을 억누르지 못해서 흉악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그가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히 과거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괜찮았습니다.”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괜히 가슴이 아렸다. 카르한을 보다 보면 동정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도와줄게요.”

    “예.”

    카르한의 대답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뾰족하던 얼음 조각이 녹아 둥근 눈송이가 된 것처럼 이전에 비해 표정이 부드러워 보였다. 정말 보기 드문 착한 남자인데, 왜 그렇게 오해를 하는지.

    “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 일단 식사라도 하러 가요.”

    일리아가 카르한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앞서가고, 뒤따르던 테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영애께서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자 프란체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듯 치켜 올라갔다. 그것 보라는 듯 프란체가 말했다.

    “제가 뭐랬습니까. 우리 아가씨가 최고입니다.”

    ***

    한 남자가 벽에 딱 달라붙어서 몸을 숨겼다. 수상쩍은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전부 무시한 그는 한곳만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는 일리아와 에반테온 소공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미행하는 남자는 헤인리 블로든으로, 그는 귀한 휴가까지 사용하여 일리아를 따라 나왔다. 블로든 가문 회의에서 지령 받은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군.”

    처음에는 에반테온 소공자를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뚜렷한 특징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인리는 곧바로 에반테온 소공자를 발견했다. 소나무처럼 우뚝 솟은 저 남자가 틀림없었다. 멀리서 봐도 강렬한 인상이라 그런지 유독 눈에 띄었다.

    헤인리는 유심히 카르한을 살폈다. 세상의 어둠을 모두 끌어온 듯한 검은 머리카락,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와 짙은 눈썹, 단단한 체구……. 프란체의 어법을 빌리자면, 싸가지 없게 생긴 얼굴이었다.

    흉흉한 분위기를 걷어내면 잘생긴 얼굴인데, 이미 편견으로 휩싸인 눈은 단점만 찾고 있었다.

    ‘그래도 겉모습만 보면 리하트 놈보다는 낫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헤인리는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면접관이라도 된 것처럼 더욱 엄격하게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이동하자, 헤인리는 벽에서 몸을 떼어내고 쫓아갔다.

    두 사람은 어느 가게 앞에 도착했다. 남성 신발 전문점이었다. 그리고 카르한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기 물건 사는데, 내 동생을 밖에서 대기시켜?”

    햇볕이 이렇게 뜨거운데 일리아를 방치해두는 행태에, 헤인리는 이를 갈았다. 어떤 이유이든 좋게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한이 가게에서 나왔다. 제대로 쇼핑했는지 손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헤인리는 대화를 듣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저 멀리서 경비병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사건이라도 터졌나?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고 신고했는지도 몰랐다.

    헤인리가 급하게 몸을 숨기는데, 경비병들이 가는 방향이 이상했다. 순식간에 경비병들이 일리아와 카르한 주위를 에워쌌다. 그것을 본 헤인리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사이 범법 행위까지 저지른 모양이구나……!’

    갑자기 리하트와 우위를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일리아의 남자 보는 눈은 역시 최악이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차를 주문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제 약혼자를 만났어요.”

    일리아는 어쩌다가 리하트를 만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파혼해달라고 했지만, 예상대로 거부하더군요.”

    리하트에게 자신은 물주였다. 그것도 돈이 끊이지 않는 황금단지였다. 그러니 그가 순순히 파혼해줄 리 없었다.

    사실 약혼은 결혼과 달리 법적인 제재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명백히 한쪽의 잘못으로 약혼 관계가 파탄 날 경우에도, 위자료를 지불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약혼식 때 작성한 서약서가 관청에 보관되기 때문에, 파혼 동의서를 받지 못하면 약혼 상태가 유지된다. 다른 누구와도 약혼하거나 결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합의를 거쳐 파혼하지만, 가끔씩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재판을 받는데, 소송 과정이 길어서 몇 년씩 걸리곤 했다.

    “지긋지긋한 자식.”

    일리아의 혼잣말에 카르한이 움찔했다. 괜히 눈치를 보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쪽에서 방해 공작이 들어올 거예요. 우리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겠죠.”

    리하트는 치졸하고 오만한 놈이었다. 카르한만 치우면 다시 재결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사이를 공고히 하면 좋겠어요.”

    리하트 입장에서는 카르한의 눈치가 보이니 마구잡이로 날뛸 수는 없을 것이다. 그사이 일리아는 리하트가 파혼할 수밖에 없도록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그를 궁지까지 몰아넣을 만한, 그런 계획 말이다.

    “가족들에게 당신에 대해 말해뒀어요.”

    “반대하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알고 있는 카르한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뭐……, 괜찮아요.”

    리하트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가족들은 도리어 카르한에 대해서는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가 좀 반대하시긴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을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무척 미안했으나, 계약 연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한 것이 조건이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오래 유지되는 법이었다. 이미 보좌관과 호위 기사들이 알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당신은 저에 대해 가족들에게 말씀드렸어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침묵했다.

    “슬슬 말하는 게 좋을 텐데요.”

    카르한과 스텔라 델로타는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저번에 듣기로 카르한은 모르고 있다가 약혼 상대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약혼식 날짜를 잡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시기를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물 먹은 솜처럼 축 가라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궁금하긴 하나, 가족사는 예민한 문제니 먼저 말해줄 때까지 캐묻고 싶지 않았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거절하는 연습을 해봐요.”

    확실히 거절할 수 있게 되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게를 나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먹구름 사이로 숨어버리고, 굵직한 빗줄기가 달아오른 대지를 식혔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물안개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탄식했다. 헤인리의 말을 듣고 우산을 챙겨 오긴 했는데, 바보같이 마차에 두고 왔다. 아까 날씨가 좋았던 탓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잠시 가게 차양 아래에 섰다. 비는 쉬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도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갔는지, 거리는 한적했다.

    “……잠시만 계십시오.”

    카르한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그가 어쩌지 싶은 얼굴로 말했다.

    “하나밖에 없다고…….”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한이 먼저 나서서 빌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잘했어요.”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뾰족한 눈매가 조금 허물어졌다.

    “제가 우산 사오겠습니다!”

    프란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산 하나로 다섯 사람이 쓰기엔 한참 부족했다. 프란체는 카르한이 가져온 우산을 쓰고 빗속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돌아왔다.

    “……겨우 하나 사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낙비 때문에 우산이 금방 동난 모양이었다.

    마차까지 왔다 갔다 하기는 거리가 제법 있고……. 일리아는 우산 두 개를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그러자 말렉이 눈치 빠르게 테시온과 프란체의 어깨를 잡았다.

    “저희끼리 함께 쓰겠습니다!”

    그는 사명감을 지닌 사람처럼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다들 괜찮겠어요?”

    일리아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큰 세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우산을 펼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카르한의 옆에 바싹 붙었다.

    “같이 쓰고 가야겠네요.”

    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산이 펼쳐졌다.

    “제가 들겠습니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지라, 그편이 나을 듯했다. 카르한이 우산을 건네받았다. 그의 손에 들리자 우산이 작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몸을 맞붙인 채 빗속으로 나아갔다.

    투두두둑, 머리 위에서 시원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찰박찰박 물방울을 튕기며 일리아와 카르한은 걸음을 맞춰 앞으로 걸어갔다. 최대한 밀착하다 보니, 어깨 부분에 긴장해서 팽팽해진 그의 팔이 느껴졌다.

    대지를 식히는 차가운 빗속에서도 그의 몸은 따뜻했다. 쌀쌀해서 솜털이 일어나는 와중에, 맞닿은 부분에만 온기가 느껴졌다.

    빗속을 한참 걸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치맛단을 빼고는 거의 젖지 않았다. 일리아는 카르한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잔뜩 젖어서 옷이 딱 달라붙은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저와 맞닿은 부분만 젖지 않았을 뿐이지, 영락없이 물에 빠진 모습이었다. 놀란 일리아가 제 쪽으로 기울어진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카르한, 당신 다 젖었어요.”

    “괜찮습니다.”

    앞만 묵묵히 응시하던 그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사위는 온통 물안개 때문에 흐릿한데, 그의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순간 일리아는 자신이 카르한의 눈동자에 잠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써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감기가 잘 들지 않는 체질이니까요.”

    괜히 미안해진 일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좀 더 옆으로 붙었다.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카르한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마차가 세워진 골목 어귀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드디어 마차 앞까지 도착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계속 우산을 씌워주었다. 결국 그는 우산을 쓴 보람이 없을 정도로 흠뻑 젖고 말았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만 편하게 와버렸네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젖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카르한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일리아.”

    일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으로 먼저 이름을 불러줬네요.”

    비온 뒤 무지개가 뜨듯 일리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환한 미소에 카르한은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역시 연습하니까 되죠?”

    “……예.”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 말과 함께 마차 문이 닫혔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빗줄기를 뚫고 마차는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마차를 눈으로 좇던 카르한은 따끔거리는 가슴팍을 문질렀다. 망치질하듯 사방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뚫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카르한 님. 가시지요.”

    테시온의 말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카르한이 걸음을 뗐다.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테시온이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잔뜩 젖어버린 옷을 벗었다.

    셔츠까지 모두 벗고 나자, 꼭꼭 숨겨진 피부가 드러났다. 근육으로 꽉 찬 몸에는 상흔이 가득했다. 가벼운 생채기부터 생사를 오간 흔적까지 흉터가 여럿이었다.

    테시온이 건넨 옷으로 갈아입은 카르한은 천천히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고작 반나절이었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난도가 너무 높은 환불도 경험해보고, 경비병과 실랑이도 했다.

    신분패를 보여줄 필요도 없이 경비병들이 물러난 것은 처음이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는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변화하는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을지 기대되었다. 즐겁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일리아가 해준 칭찬을 곱씹던 카르한은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가슴께를 둥둥 울렸다. 통증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데,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카르한의 중얼거림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테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가 저를 위해 이렇게나 열심히 도와주는데, 정작 자신은 해줄 것이 없었다. 심지어 계약 연애조차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제대로 해야 할 텐데.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카르한은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일리아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에반테온 후계자지만,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매번 일리아를 만나러 갈 때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혓바닥을 굴러다니던 가시는 어느새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 방치했을 뿐이었는데, 점점 깊숙이 파고들어 괴로웠다.

    “내가 도움이 될까?”

    “카르한 님…….”

    테시온이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누가 뭐라고 한들 에반테온의 후계자는 카르한 님이십니다.”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시온은 뭐라고 응원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공작의 후계자지만, 후계자 수업조차 받지 못한 임시직에 불과했다. 공작부부와 일부 원로들이 생각하는 진짜 후계자는…….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에반테온 저택이 보였다. 거대한 대저택은 한 마리의 웅크린 짐승 같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카르한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물에 잠긴 듯 숨통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 거센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카르한이 문을 열었다. 축축하게 젖은 땅을 밟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딘가 낯익은 마차가 보였다. 그 마차 또한 방금 도착했는지, 마부가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카르한은 계단을 밟고 내리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깨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반테온!”

    카르한은 가만히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것인가 했지만, 정말로 스텔라 델로타였다.

    “에반테온, 외출하고 오는 길이에요?”

    스텔라가 카르한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어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은 방문객을 받지 않는 저녁 시간이었고, 스텔라가 방문한다는 언질조차 받지 못했다. 요즘 불쑥불쑥 찾아오는 일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스텔라가 불편했다. 그녀의 끝없는 집착은 저를 감싸오는 거미줄 같았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기분에 몇 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녀를 꺼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카르한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자, 스텔라가 움찔했다. 그러나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도리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도 오는데, 날 여기에 세워둘 생각이에요?”

    보다 못한 테시온이 나섰다.

    “저녁이니, 다음에 방문 의사를 밝히고 찾아오십시오.”

    “내가 뭐 못 올 곳 왔나요? 그렇게 늦지도 않았잖아요.”

    아직 초저녁이라며 스텔라가 도리어 불쾌해했다. 그녀는 테시온을 무시한 채 카르한에게 칭얼댔다.

    “다리가 아파요. 일단 들어가요.”

    카르한은 이러다가 기껏 갈아입은 옷이 젖을 것 같아, 걸음을 뗐다. 스텔라는 우산을 씌워주는 고용인과 함께 카르한을 뒤따랐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현관문을 등진 채 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스텔라가 멈칫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카르한은 한층 서늘해 보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읽었던 수많은 연애 소설이 스쳐지나갔다.

    스텔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말려들면 조연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기죽지 않는 당당한 여주인공만이 나쁜 남자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를 찾아온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스텔라는 카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에 스텔라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이 블로든 영애와 함께 외출했다는 이야기요.”

    찰나의 순간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스텔라가 물었다.

    “거짓말이죠?”

    단단히 다물린 입매에 틈이 생겼다. 카르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스텔라가 눈을 부릅떴다. 카르한은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내뱉었다.

    “저는 블로든 영애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차분히 내뱉은 목소리와 달리, 카르한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말을 내뱉고 나니 다음 말은 수월하게 나왔다.

    “영애께는 미안하지만, 약혼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에반테온!!”

    뒤늦게 정신 차린 스텔라가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

    “왜 하필 그 계집애예요!!”

    일리아를 비난하는 어투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스텔라는 주춤했으나, 저번과 달리 물러서진 않았다.

    “이미 공작부부께선 저를 받아들이셨어요. 이야기가 끝났다고요!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는데, 어떻게……!”

    원망의 화살이 날아들자,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전이었다면 싸우고 싶지 않아서 먼저 꺾였을 것이다. 침묵하고 상대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텔라와 약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자신의 의지였다. 처음 스스로 내린 결정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카르한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깨를 바들바들 떨던 스텔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에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면…….”

    “이게 무슨 소란이냐.”

    대화를 비집고 들어온 낯선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열린 현관문으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허리까지 덮는 숄을 걸친 그녀는 램프를 든 고용인을 양옆에 대동한 채였다.

    “에,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당황한 스텔라가 인사를 건넸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카르한이 뒤늦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스텔라에게 말을 걸었다.

    “델로타 영애는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요?”

    “공작부인…….”

    스텔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공작부인을 불렀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그녀는 흐느끼는 척했다.

    “소공자께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그 말에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카르한에게 눈길을 보냈다. 얼어붙은 시선에, 혓바닥까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카르한이 스텔라를 꺼렸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스텔라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에반테온 공작부인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녀의 집착이 버거워서 피해 다니면 공작부인을 찾아가 하소연하곤 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그 방법이 무엇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거 참……. 나 또한 몰랐던 일이군요.”

    공작부인은 카르한을 아래위로 찬찬히 훑더니, 다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교육해둘 테니, 영애는 안심하고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하지만.”

    스텔라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카르한에게서 확답을 받고 싶었다. 다시는 일리아 블로든을 만나지 않겠다는.

    “델로타 영애.”

    공작부인의 부름에 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인자했으나, 지금은 왠지 소름끼쳤다.

    “지금부터는 가족사이니, 그만 가주세요.”

    권유에서 명령으로 바뀐 말투에 스텔라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스텔라는 현관 계단을 내려오며, 카르한을 힐끔거렸다.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왠지 창백해 보였다.

    스텔라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여기서 잘못한 것은 카르한이었다. 자신을 두고 감히 일리아 블로든을 만날 줄이야.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그를 제대로 훈계해주길 바라며, 마차에 올라탔다.

    델로타 가문 마차가 출발하고, 현관에는 다섯 사람만 남았다. 카르한, 테시온, 공작부인 그리고 고용인 두 명. 숄을 걸친 채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던 공작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이니?”

    굳어졌던 혀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예.”

    그 순간, 손이 날아왔다. 빗소리를 헤집고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똑바로 하라고 했지?”

    카르한은 시선을 떨구었다. 공작부인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주 나쁜 아이구나. 집안 망신이나 시키고 말이야.”

    “공작부인……!”

    놀라서 숨을 들이켰던 테시온이 다급히 공작부인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테시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카르한의 권속인 테시온은 그녀에게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

    “네 형만큼은 바라지도 않으니 처신 잘해라.”

    그 말을 남기고, 공작부인은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램프를 든 고용인들까지 들어가자,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카르한은 가만히 서 있었다.

    “카르한 님.”

    테시온이 안절부절못하며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고 굳게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고작 문 하나인데, 완전히 단절된 것 같았다. 이 집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에게 맞은 뺨이 아니라, 속이 아팠다. 어머니의 뾰족한 힐난은 카르한의 가슴을 몇 번이고 저미었다. 이제 덤덤하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물안개처럼 잠깐 흐려졌던 표정이 되돌아왔다. 카르한은 직접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테시온은 카르한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은 여전히 장남만을 귀애했다.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쫓겨났는데도,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남이 다시 돌아와 공작가 후계자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카르한은 그저 이용될 뿐이었다. 장남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하기 위해 원치 않은 사람과 약혼해야 했다. 같은 친자식인데 어쩜 그럴 수 있는지. 자신이 직접 본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분명 숨겨진 일도 수두룩할 터였다.

    테시온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카르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헤인리는 일리아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자, 저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보였다. 아무래도 얌전히 기다리기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후다닥 계단을 내려온 두 사람이 헤인리를 붙들고 물었다.

    “어땠니?”

    “얼굴은 봤고?”

    헤인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응접실로 향했다. 곰처럼 덩치 큰 블로든 백작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백작부부가 대답만을 기다리자,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렸다.

    “소문대로 위험한 남자인 것 같습니다.”

    헤인리는 자신이 본 것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 잠깐 사이에 경비병들이 출동해서 소공자를 둘러싸더군요.”

    거리가 있었던 탓에 대화는 듣지 못했다. 헤인리가 일리아라도 구하기 위해 개입하려는 순간, 경비병들이 모두 물러섰다. 다들 안색이 푸르죽죽한 것이 몇 대 맞은 것 같았다.

    법보다 폭력인가! 헤인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식당에 들어가 버렸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괜히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아닌 듯합니다.”

    다들 근심 어린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이제 나쁜 남자가 취향인가?”

    비올레가 중얼거렸다.

    “부인, 리하트 그놈도 나쁜 놈이었는걸요.”

    “그것도 그렇네요.”

    백작이 한마디 거들자, 비올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일리아가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일리아를 불러서 직접 묻는 게 좋겠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비올레가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은 다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하죠.”

    저녁 식사 시간에 결판을 내야겠다고, 그녀가 다짐했다.

    ***

    집에 돌아온 일리아는 곧바로 옷을 벗었다. 비는 거의 맞지 않았지만, 습기 때문에 눅눅했다.

    고용인이 장미 석영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워 넣었다. 이전에 서부 광산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미 석영이 채굴되어 화제가 되었다. 워낙 고품질의 원석이라 다들 어디에 쓰일지 궁금해했는데, 결국 일리아의 욕조가 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호화로운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 장미 꽃잎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욕실에서도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집이 최고야.”

    일리아는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끌어안았다. 몸이 노곤해지고, 수증기가 낀 듯 머리가 둔해졌다.

    가만히 있으니 자연스럽게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함께 우산을 쓰고 오며 맞닿은 어깨가 아직도 뜨거운 듯했다. 일리아는 괜히 손을 들어 어깨를 문질러보았다.

    다 씻고 나오자, 고용인들이 재빨리 머리를 말려주었다. 얌전히 시중 받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고용인이 곧바로 일리아를 찾았다.

    “아가씨, 저녁 식사에 꼭 참석하시라는 마님의 전언입니다.”

    “어머니께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간만이었다. 다들 바쁘다 보니 따로 먹을 때가 잦았고, 특히 헤인리와 사이가 틀어진 후로 일리아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피했다.

    “알겠다고 말씀드려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니, 저녁 식사 시간이 왔다. 일리아는 침실을 나와 중앙에 위치한 만찬장까지 걸어갔다.

    저택 본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 서관, 동관으로 나눈 이유는 단지 저택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동관 끝에서 서관 끝까지는 30분은 걸어야 했다. 그것도 길을 잘 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다행히 일리아의 침실은 중앙에 있었기에 만찬장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만찬장에 도착하자, 고용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금테와 가죽을 덧씌운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샹들리에 아래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비단이 깔린 테이블에는 은촛대와 싱싱한 과일, 생화로 장식한 그릇이 놓였다. 만찬장 벽에는 수백 년 된 명화가 빼곡했다. 일리아는 화려한 만찬장을 둘러보지도 않고, 곧바로 한곳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왔구나.”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상석에 앉아 있는 블로든 백작이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다. 딱 맞춰 왔구나.”

    백작이 헤인리의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켰다. 일리아가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순서대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애피타이저만 해도 다섯 가지가 넘어갔다. 거기다가 개인의 입맛에 맞춰 간을 전부 다르게 한 것들이었다.

    오늘 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 걸까, 배가 고팠다. 일리아가 음식을 먹는 동안, 백작과 비올레, 헤인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지 눈짓한 끝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요즘 신선한 작품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하나가 뜨면 우르르 따라하니.”

    백작이 한숨과 함께 화제를 꺼냈다. 블로든 백작은 유명 미술관의 관장이었다. 사업은 체질이 아닌지라 부인인 비올레에게 모두 맡기고, 대형 갤러리와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전시회를 열며 작품을 파는 것이었다. 예술은 웬만한 사업보다 돈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은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돈을 벌기보단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

    “기막힌 신인이 나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고이다 못해서 썩었으니.”

    그가 푸념하자, 비올레가 말을 거들었다.

    “저도 요즘 사업체가 많이 늘어나서 힘드네요.”

    비올레는 우아하게 고기를 자르고 있는 헤인리에게 물었다.

    “헤인리, 언제쯤 이 엄마를 도와줄 거니?”

    “그래, 돈도 못 버는 공직은 때려치우고 빨리 가업을 물려받거라.”

    백작이 부추기자, 헤인리가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싫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지금 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 누가 사업을 물려받는단 말이냐.”

    정작 사업이 맞지 않아 부인에게 떠넘긴 백작이 우는 소리를 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사업에 관심이 있지만, 해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씩 부모님을 도울 일이 있었으나 그것으론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단순히 하고 싶다는 이유로 가업을 덜컥 맡을 수는 없었다.

    ‘파혼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진지하게 의논해볼까.’

    “그리고 일리아 너는…….”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일리아 쪽으로 넘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요즘 그…… 에반테온 소공자는 잘 만나고 있니?”

    백작의 질문에 일리아가 입가를 닦고 대답했다.

    “오늘도 만나고 왔어요.”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만나게 된 것이지?”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일리아는 냉큼 카르한과 미리 입 맞춰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나도 네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으니 이해한다. 어디가 좋았는지 들어보고 싶구나.”

    그 흉악한 카르한 에반테온에게 좋은 점이 하나라도 있냐는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일리아는 고민했다. 당장 생각나는 장점은 제법 많았다. 착하고 성실하고 뻐기지 않고……. 그중에서 굳이 꼽자면…….

    “다정한 점이요?”

    쨍그랑, 하고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헤인리 쪽으로 향했다. 헤인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릇에 떨어진 스푼을 집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비올레가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또?”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에요.”

    진심이 담긴 대답에 세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았다. 일리아가 소공자에게 세뇌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문이 좀…… 그렇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이에요.”

    좀이 아니라 많이 나쁘긴 한데, 실상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답답한 면이 있긴 하나, 귀족 사회에서 그만큼 훌륭한 성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공작가의 후계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남들은 다 오해해도, 제 가족들만큼은 진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시켜주려고 한 말이었으나, 도리어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한 수준이었다.

    리하트가 너무 개차반이라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는 게 아니냐고, 백작이 비올레와 헤인리에게 눈짓했다. 리하트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던 중, 비올레가 먼저 나섰다.

    “그럼 이제 리하트와 헤어진 이유를 이야기해주겠니.”

    그 말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헤인리까지 모두 모였으니 이제 이야기해줄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에반테온이라는 든든한 방패도 얻었다.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려우니, 일리아는 가족들이 최대한 흥분하지 않도록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도 화를 낼 것 같았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일리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리하트가 바람을 피워서요.”

    순간 만찬장이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 내 칼 가져와라!!”

    “당장 마차를 대기시켜! 테르시안 후작가로 가자!”

    비올레와 백작이 연달아 소리쳤다. 헤인리는 아무 말 없이 이미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일리아가 말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일리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말 안 했니!”

    비올레가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리아는 지그시 입술을 다물었다. 말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이미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블로든 백작가가 대단한 재력을 거머쥐고 있다 해도, 상대는 더 큰 권력을 쥔 후작가였다. 금전적으로 보복하면 황실과의 연줄을 이용해 앙갚음할 것이 분명했다. 특히 테르시안 후작이 오라버니의 상사이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저를 위해 나설 터였다. 무슨 손해를 보든지 말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하기 껄끄러웠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그리고 오라버니께 상처를 줄까 봐요.”

    조용히 흘러나온 말에 다들 씩씩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반대하긴 했지만, 가족들은 일리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바람을 피웠으니 일리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상처였다.

    “다들 약혼식 전부터 말렸는데, 제가 결혼하고 싶다고 우긴 것이기도 하니까요.”

    일리아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하고 싶어요. 죄송해요.”

    일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다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서있던 그들이 스르륵 자리에 앉았다.

    “네 잘못이 아니지 않니.”

    “그래, 네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 사과하지 말거라. 우린 언제나 네 편이니까.”

    복잡한 표정을 짓던 비올레와 백작이 연달아 말했다. 마지막으로 헤인리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리하트 그놈은 파혼해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에반테온 소공자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도와준다고?”

    “네. 리하트도 에반테온 공작가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고요.”

    계약 연애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가족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리하트와 카르한을 저울에 두었을 때, 비등비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어졌다. 세 사람은 갑자기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또 일리아가 좋다고 하니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뭐, 우리가 나섭시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의논을 끝냈는지,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헤인리가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리하트 문제는 네게 맡기마. 대신 정식으로 파혼한 이후에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 말리지 마라.”

    “알겠어요.”

    파혼까지 하고 나면 그때는 복수뿐이었다. 일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헤인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봐야겠다.”

    뭘……?

    일리아가 헤인리를 올려다보자, 은테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집으로 초대하거라.”

    ***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물건이 카펫 위에 널브러지고, 술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하트는 폐허나 다름없어진 방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힘껏 깨부순 탓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 술도 마시고 분이 풀릴 때까지 기운을 쏟아봤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리하트는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있으니 자연스럽게 잊고 싶은 기억들이 쏟아졌다.

    어제 리하트는 일리아를 만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확연히 달라진 일리아의 태도가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리하트는 최후의 방법까지 사용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자존심 상했지만,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리아도 저를 받아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태도를 바꾸지 않은 일리아는 파혼을 요구했다.

    리하트는 파혼해줄 수 없다고 우기며 끝까지 버텼다.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파혼해주겠냐고.”

    리하트는 제 발치까지 굴러온 술병을 걷어찼다. 벽에 부딪힌 술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리하트는 씨근덕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데…….”

    일리아가 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낸 결과였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공을 들였다. 마음을 다 잡아 놓은 줄 알았는데, 겨우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수천 번도 더 후회했다. 그 여자를 집까지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는 얌전히 있을걸.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자꾸만 곱씹었다. 그리고 항상 후회의 결말은 스스로를 두둔하는 것이었다.

    “바람 정도는 다들 피우잖아. 고작 그 정도로…….”

    사교계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아느냐며, 리하트는 다시 씩씩거렸다.

    그저 억울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일리아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탓이었다. 이렇게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 번 정도는 넘어가줄 법도 한데,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리하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입고 있는 값비싼 옷과 장신구, 신발……. 전부 일리아가 준 것들이었다. 이미 그는 이 달콤한 생활에 중독된 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빌어먹을.”

    가족들이 파혼에 대해 알기 전까지 다시 일리아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을 무사히 치를 수만 있다면…….

    리하트는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역시 카르한 에반테온이 거슬렸다.

    -정말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이번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리하트는 일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이들을 경계하고 의심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그렇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 그걸 알아내면 일리아와 카르한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에반테온 소공자 쪽을 조사해봐야겠어…….”

    약점이라도 잡으면 더 좋고. 리하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출할 테니, 마차 대기시켜!”

    고용인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이, 리하트는 빠르게 나갈 채비를 마쳤다.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마차를 타고 나온 그는 자주 들르던 옷가게로 향했다. 일리아의 소유였기에, 돈 한 푼 없이도 쇼핑이 가능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점원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 저를 반겨주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점원은 리하트를 막아섰다.

    “비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앞으로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뭐?!”

    리하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들어갈 수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한참 실랑이가 이어졌다. 급기야 경비대를 부르겠다는 점원의 말에 리하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욕설을 내뱉은 리하트가 뒤돌아섰다. 분명 일리아가 손을 쓴 것이었다.

    “가게가 하나뿐인 줄 알아?”

    더 좋은 가게를 찾아가면 그만이라며 그가 씩씩댔다. 그러나 한 곳, 두 곳…… 문전박대 당하는 가게가 점점 늘어났다. 이 근방의 괜찮은 가게들은 전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거리를 전전하던 리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까지는 제 얼굴만 보면 다들 발 벗고 나와 굽실거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돈을 쓰겠다는데도, 아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목이 탄 리하트는 음료라도 마시려고 가게를 찾았다. 단골이니 여기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리하트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개소리 하지 말라고 멱살을 붙잡아도 가게 주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경비대를 부르겠다고 뻔뻔히 나왔다.

    “젠장맞을!!”

    리하트는 결국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씨근덕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섰다. 수많은 가게들을 바라보던 그는 깨달았다. 이 많은 가게들 중에서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하나도 없다는 걸.

    ***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카르한은 서신 하나를 받았다. 카르한은 서신을 읽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뒤에서 다른 일을 하던 테시온이 그에게 다가섰다.

    “무슨 서신인데 그러십니까?”

    카르한이 말없이 테시온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척 심각해 보였다.

    “제가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테시온은 서신을 건네받았다. 잠시 후 서신을 읽은 테시온도 그와 마찬가지로 굳어졌다. 서신은 일리아가 보낸 것이었다.

    [가족들을 소개해주고 싶은데, 블로든 저택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초대하고 싶어요.]

    테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빨랐다.

    환불이라는 산을 넘었더니, 더 큰 산이 남아 있을 줄이야……. 테시온은 벌써부터 근심걱정으로 가득한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혼기가 꽉 찬 두 사람이 만났으니, 가족 소개는 당연히 따라오는 일이었다.

    “제가 답신을 보낼 테니, 일단 선물을 사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첫인상으로 점수 따기는 어려우니, 선물 공세라도 해야 할 듯했다.

    그 길로 두 사람은 번화가로 나왔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살지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다 가지고 있을 텐데.”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테시온이 말했다.

    열심히 가게를 들락날락하던 중, 카르한은 제법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건을 들자마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귀퉁이에 블로든 가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수입은 좀 곤란했다.

    그 다음으로 괜찮아 보이는 물건을 집었는데, 델로타 가문 인장이 박혀 있었다. 경쟁사 물건을 선물로 주는 것도 눈치 없어 보였기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한참 물건을 고르는데, 새삼 블로든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었다. 손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한 카르한과 테시온은 작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술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였다.

    “술도 괜찮은 선물이지요.”

    정작 카르한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연회에서 일리아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고민 끝에 카르한은 술을 선물해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가게 주인이 카르한의 주위를 맴돌았다.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 상황이 불편해서 빠르게 용건을 처리했을 테지만, 이왕 선물하는 것이니 좋은 것으로 주고 싶었다. 카르한은 환불 경험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었다.

    “……제가 술은 잘 모르는데, 추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가게 주인이 반색하더니, 곧바로 설명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카르한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가게를 나왔을 때, 카르한의 손에 술병이 네 개나 들려 있었다.

    어쩌다 보니 좀 많이 사긴 했는데……. 사려고 마음먹은 걸 샀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래도 다음엔 거절하는 법을 배워두면 좋겠다고, 카르한은 생각했다.

    가족들을 위해 건강식품도 사고, 꽃다발도 구입했다. 카르한이 쇼핑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테시온은 감격했다. 똑 부러진 구매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정말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테시온은 속으로 일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성공적이었던 쇼핑이 끝나고, 다음 날. 마침내 블로든 저택을 방문하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조언대로 밝은 색 계열의 옷을 입었다. 분홍빛이 도는 셔츠가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카르한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놀란다면, 지금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놀랄 정도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기운을 조금 낮추시면 좋겠지만…….”

    테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흉흉한 기운을 완전히 걷어낼 수가 없었다. 전장을 오랫동안 누빈 만큼 본능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선물을 싣고 마차에 올라탔다. 긴장한 것인지, 카르한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마차는 어느새 블로든 저택 부지로 들어섰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구경하던 테시온이 감탄했다.

    “역시 블로든 가문이군요. 정원이 이렇게나 넓다니.”

    수도에 위치해서 땅값도 비쌀 텐데,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 대단한 에반테온 공작저조차 한 수 접고 갈 정도였다.

    “곧 있으면 저택이 보일 것 같습니다.”

    테시온이 흥분에 가득 차서 떠들어댔다. 그때, 바깥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이제 정원 입구 통과하겠습니다!!”

    ……?

    테시온과 카르한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평선을 바라보듯 끝없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블로든 저택 정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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